마태는 마태복음을 시작하면서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전 역사를 멋진 하나의 문장으로 요약합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라” 하나님께서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구원의 역사를 펼치시는데 아브라함, 다윗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분기점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스라엘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다윗 시대에 이스라엘은 모든 백성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민족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복음이 완성됩니다. 그러니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가 됩니다.
그런데 지난주에 이에 오늘 본문을 찬찬히 묵상하다보면, 마태가 기록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아브라함, 다윗, 예수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서술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지난주에 묵상하였던 마태복음 1장 2절부터 6절 상반 절까지 마태는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의 족보를 서술했습니다. 이 기간이 대략적으로 약 1,000년이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 이제 다윗부터 예수 그리스도까지를 서술하면 될 듯합니다. 그런데 마태는 그 안에 중요한 하나의 분기점을 새로 첨가합니다. 바로, 바벨론에서의 포로입니다. 마태복음 1장 17절 말씀을 우리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 네 대더라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서 아브라함의 시대, 다윗의 시대,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가 분명 중요한 하나의 분기점이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사건, 또 하나의 시기가 여전히 중요한 분기점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벨론에서의 포로 생활입니다. 특별히 오늘 우리가 묵상하는 마태복음 1장 6절부터 16절까지는 다윗부터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이어지는 족보인데, 다윗부터 예수 그리스도까지의 역사를 구분하는 결정적인 사건이 바벨론 포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있어서 빠질 수 없는 것이 포로시대입니다. 하나님은 이집트 땅에서 종으로 살던 이스라엘을 구원해주셨습니다. 그것이 출애굽이고, 출애굽을 기념하는 의식이 유월절입니다.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와 사망의 노예로 살던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해주십니다. 이것이 복음이죠. 예수 믿는 크리스천이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이해함에 있어서 너무도 쉽게 잊어버리는 것이 있다면, 바로 포로의 시기인 듯합니다. 여러분, 모든 하나님의 역사에는 포로 시기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최근 경제적인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어려움은 예수님을 믿는 크리스천이든, 예수님을 모르는 넌크리스천이든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동일한 경제적 어려움을 당하였을 때, 크리스천들이 더 큰 마음의 아픔을 겪는 경우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복음을 생각할 때 포로의 시기를 배제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잘 믿으면 나의 영혼이 구원받는 것은 물론이고, 이 세상을 살아갈 때도 물질의 복을 누릴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경제적인 어려움이 찾아옵니다. 그 문제도 힘이 드는데, 내가 물질의 축복을 받지 못하는 것이 마치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듯한 생각도 밀려옵니다.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바벨론에서의 포로 생활이 중요한 분기점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인간의 절망
마태복음 1장 6절 말씀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이 짧은 한 문장 속에는 다윗에 대한 역설적인 두 가지 사실이 들어가 있습니다. 첫째로 다윗은 왕입니다. 그것도 시시한 왕이 아니고,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부강한 이스라엘을 이루었던 왕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다윗의 왕위를 인정해 주셨습니다. 사무엘하 7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다윗의 왕위를 영원히 지키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장하시는 왕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그 다윗 왕이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았습니다. 자신의 아내가 아니라 우리아의 아내입니다.
예수님의 족보에는 여러 명의 왕이 등장합니다. 7절부터 등장하는 솔로몬, 르호보암, 아비야, 아사 등 적지 않은 사람들이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유독 6절에 등장하는 다윗의 이름 뒤에만 왕이라는 단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울러, 예수님의 족보에는 여러 명의 여인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유독 밧세바만이 자신의 이름 밧세바라는 이름 대신 ‘우리아의 아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유다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은 다말의 경우, 마태는 엘과 오난의 아내라고 기록하지 않고 다말이라고 기록하였습니다. 보아스에게서 오벳을 낳은 룻도 기룐의 아내라고 적지 않고 그냥 룻이라고 적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다윗만은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았다고 적었습니다.
여러분, 다윗은 왕입니다. 그것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왕입니다. 다윗 자신이 하나님을 그 마음의 중심에 모시는 것은 물론이고, 그 시대의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을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 모셨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다윗까지도, 씻을 수 없는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자신의 충성스러운 신하의 아내를 빼앗고, 그 여자를 얻기 위해 충성스러운 신하를 죽였습니다.
다윗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10절에 히스기야가 있었고, 요시야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잘 섬기고 정치를 잘 하기로 이름난 성군이었습니다. 그러나 남 유다를 다스리는 왕의 이름을 보면, 하나님을 잘 섬긴 왕들보다는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지 못하고 오히려 유대 나라에 이방인의 우상을 옮겨 다 놓는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여러분, 성군 중의 성군이라고 불리는 다윗 왕조차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았으니 그의 후손들은 보아 무엇 하겠습니까? 그러니 다윗으로부터 14대가 지난 후, 바벨론 포로 시대가 찾아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태는 예수님에 대한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그 처음에 예수님의 족보를 적고 있습니다. 이 족보에는 다윗으로부터 시작하여 다윗 왕조가 멸망하는 시기까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간의 모습이 꼭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겉모습은 근사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에 하나님을 참으로 섬기지 못합니다. 다윗 왕의 혈통에서 아하스와 같이 악한 왕이 나올 수 있다고 누가 생각했겠습니까? 다윗 왕의 혈통에서 므낫세와 같이 악한 왕이 나올 수 있다고 누가 생각할 수 있었겠습니까?
유대인들이 자신은 아브라함의 후손이고, 다윗 왕의 후손이라고 자부심을 가지고 있을 바로 그때에, 마태는 다윗 왕이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았다고 선언합니다. 다윗의 후손 가운데 아하스와 므낫세가 있었다고 선언합니다. 다윗의 후손이라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에게도, 그리고 우리와 같은 이방인에게도 동일하게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족보가 바로 그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도 이 자리에 나와서 예배하는 우리의 마음에 누가 악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생각들이 도사리고 있다고 생각하겠습니까? 이렇게 양복을 잘 입고, 사람들 앞에서 설교하는 제가 예수 그리스도가 없으면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는 흉악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누가 알겠어요? 그러나 저 자신은 알거든요. 그리고 우리 하나님은 아십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필요하지 않으신가요? 많은 사람들은 나와 우리 가정을 다윗 왕으로 평가하고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은 모습은 아닙니까?
하나님의 희망
마태복음 1장 12절부터 16절까지 함께 읽겠습니다.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스룹바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리아김을 낳고
엘리아김은 아소르를 낳고
아소르는 사독을 낳고
사독은 아킴을 낳고
아킴은 엘리웃을 낳고
엘리웃은 엘르아살을 낳고
엘르아살은 맛단을 낳고
맛단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12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에” 바벨론에서 포로로 살아간 지 어느덧 70년이 지났습니다. 그 정도의 세월이 흘렀으니 더 이상의 희망도 없습니다. 더 이상의 기대도 없습니다. 철저한 절망입니다. 다윗부터 요시야까지는 다윗 왕조였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다윗 왕조의 부활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 왕조의 마지막은 바벨론의 포로였습니다. 다윗 왕조가 제 아무리 화려했을 지라도, 인간이 세운 왕국은 죄악 된 인간의 본성이 그 안에 자리 잡게 되고 결국 몰락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절망입니다. 그러나 그 절망의 자라에서 새로운 출발이 시작됩니다.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에” 새로운 희망의 역사가 펼쳐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섭리는 참으로 오묘합니다. 인간이 자신의 연약함을 철저히 인식하면서 하나님께 모든 것을 내어 맡길 때 하나님께서 일하기 시작하십니다. 바벨론 포로 이후 예수 그리스도까지 우리가 잘 아는 인물은 별로 없습니다.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일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던 스룹바벨 정도입니다. 그것도 바벨론의 포로 이전에 등장했던 사람들의 신분이 주로 왕이었던 것에 비한다면 참으로 무명하고 눈에 두드러지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역설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죄인인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크리스천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다윗과 같은 영웅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바벨론 포로의 시기, 곧 자신의 연약한 본성을 철저히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만을 기대하는 절망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1. 바벨론 포로는 회개의 기간이다
저는 이 시간에 복음에 있어서 바벨론 포로의 시기가 가지고 있는 중요한 의미를 크게 두 가지로 소개하려 합니다. 그 첫째로, 바벨론 포로의 시기는 바로 ‘회개의 시간’입니다.
마태는 예수님에 대한 복음서를 적어 내려갑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삶이요, 예수님의 말씀이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입니다. 그런데 그 서론으로 예수님의 족보를 기록합니다. 족보 이야기를 통해 자신이 기록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기본 조건을 만들어 놓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겸손입니다. 나의 절망적인 상태를 아는 것입니다. 겉은 다윗 왕의 모습이지만, 속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가 꼭 필요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절망적인 상태를 철저하게 깨달은 사람은 하나님께 회개하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사역을 하다보면, 수련회에 대한 경험이 많아지게 됩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일반적으로 수련회가 큰 열기 속에서 진행되면 수련회 이후 각 부서나 교회에의 부흥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이유를 가만히 생각해보면, 수련회에서 다른 어떠한 때보다도 회개를 많이 하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교회의 한 부서가, 혹은 교회 성도들 전체가 하나님께 간절히 회개하는 경험은 그 교회에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요. 진정으로 회개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잖아요. 그런데 아쉬운 수련회는 다른 기도는 열심히 했으나,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고 혹은 교회의 모습을 돌아보고 회개하는 기도가 없는 수련회입니다. 무엇인가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했지만, 회개가 없는 기도는 나를 교만하게 만듭니다.
개인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회개는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만 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미 예수님을 믿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합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 나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합니다. 그러면 복음의 능력이 나를 사로잡습니다. 날마다 내 안에 은혜가 충만해집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이 오래되면서 마음이 교만해집니다. 나 자신의 잘못과 죄악을 잘 못 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도, 그 안에 회개가 없습니다. 회개가 없으니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고, 내 마음에 복음의 감격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냉랭하고 차가운 신앙생활을 하는 겁니다.
다윗 왕조의 시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로, 구약의 시대에서 신약의 시대로, 율법의 신앙생활에서 복음의 신앙생활로 나아가는 그 과정에는 반드시 바벨론에서의 포로 과정이 필요합니다. 곧 회개가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회개의 기도를 되찾으시기 바라니다. 우리 교회가 회개의 기도를 되찾아야 합니다. 그때에 우리의 마음에 복음의 감격이 다시금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2. 바벨론 포로는 하나님의 침묵 기간입니다
둘째로, 바벨론 포로의 기간은 바로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시간’입니다.
다윗 왕조 시대, 하나님은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다윗 왕에게 주신 약속, 곧 그의 왕위를 지켜주시겠다는 약속을 실천하셨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예루살렘 성을 둘러싼 18만 5천 명의 앗수르 제국 군대를 하루 밤 사이에 물러져 추신 사건 아니겠습니까? 다윗 왕조의 시대,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윗 왕조가 무너지고 바벨론에 포로가 됩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기도하며 부르짖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구해주십시오’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까? 아니요. 침묵하십니다.
바벨론에서의 포로 생활이 70년이 되자,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 올 수 있는 길을 하나님께서 열어주셨습니다. 이때부터 유대인들은 또 다시 다윗 왕조의 부활을 꿈꾸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에 또 다시 침묵하십니다.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시간이 수백 년 동안 지속됩니다. 그러면서 유대인들 가운데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상실해버리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여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율법을 지키고 예루살렘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도 하나님의 음성, 하나님의 역사가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저버렸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예수님 시대의 사두개인들입니다.
사두개인들은 더 이상 구약의 율법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세속적인 로마의 권력과 분봉 왕 헤롯의 권력에 아부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는 것보다 눈에 보이는 로마 황제와 헤롯 왕의 권력을 더 신뢰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의 눈에 하나님의 역사라 보이지 않는 시기, 곧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때가 바로 바벨론의 포로 시기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과연 바벨론 포로의 시기에 하나님께서 정말로 아무런 일도 하지 않으셨을까요? 마태복음 1장 13절부터 다시 보십시오. “스룹바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리아김을 낳고 엘리아김은 아소르를 낳고 아소르는 사독을 낳고 사독은 아킴을 낳고 아킴은 엘리웃을 낳고 엘리웃은 엘르아살을 낳고 엘르아살은 맛단을 낳고 맛단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이 긴 역사의 흐름 속에서 하나님께서 손놓고 계셨습니까? 아닙니다. 사람들의 눈에 이들의 족보가 보이지 않았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새로운 구원의 역사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를 열기 위해, 이 족보를 지속적으로 이어오고 계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이 보이지 않으시나요? 하나님의 음성이 무엇인지 잘 들리지 않으십니까? 바로 그 때가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바벨론 포로의 시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비록 하나님께서 침묵하신다고 느껴질 수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결코 손을 놓고 계시는 분은 아니십니다. 우리를 위하여 바벨론 포로의 시기에도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꾸준히 그 계획의 성취를 준비하고 계시는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마치 스룹바벨부터 요셉에 이르는 족보를 당시 그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때를 준비하며 그 족보가 이어져 내려오도록 섭리하셨던 것처럼 말이지요.
절망 가운데 희망을 노래한다
성경은 분명 우리에게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인간의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희망을 볼 수 있도록 안내하는 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오늘 본문이 그 하나의 예가 아닌가요? 그 찬란했던 다윗 왕조 역시 바벨론에 점령당하고 맙니다. 절망이지요. 인간의 절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계속해서 이어오시면서 인류 구원을 위한 새로운 희망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분명합니다. 성경은 인간의 절망 가운데 희망을 선포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에서 우리 크리스천들이 반드시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인간이 절망하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희망이 시작된다고 말할 때, 반드시 바벨론의 포로 기간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사회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희망과의 차이점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희망은, 우리가 조금 더 노력하면 경제가 회복되리라는 희망입니다. 우리가 조금 더 노력하면 더 좋은 내일이 펼쳐지리라는 희망입니다. 아니요. 우리가 제 아무리 노력해도 절망의 순간이 찾아올 수가 있습니다. 바벨론의 포로 시기가 바로 그것이 아닙니까? 아무리 노력해도 절망입니다. 그래서 나의 모든 가능성을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리고 그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리에게 희망과 소망이 되어 주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약할 바로 그때에, 하나님의 강함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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