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2020. 4. 28. 16:02

사복음서를 읽다 보면 예수님께서 병자를 치유하신 사건을 접하게 됩니다. 복음서에서 상당히 많은 부분이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의 사건, 특별히 치유의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님의 사역에 있어서 예수님의 치유 사건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깊이 생각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지요.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시고, 때로는 죽은 사람을 살리신 사건의 중요성을 축소하려는 오해는 다음의 몇 가지 방향으로 진행됩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치유의 기적은 단지 예수님의 능력을 입증하기 위함이라는 오해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셨다는 사실, 특별히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나병환자와 같이 당시의 의술로는 도저히 고칠 수 없었던 불치병을 예수님께서 고치신 사건은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보여줍니다. 나아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증거가 되기도 하죠.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표적’이라는 용어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표적이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분이며 예수님의 사역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신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은 병자를 고치는 기적을 많이 행하셨지만, 유대인들이 정작 예수님께 표적을 요청할 때, 예수님께서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십니까? 마태복음 12장의 말씀을 제가 봉독해 드립니다. “그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38절) 그러자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는 능력을 보여주셨습니까? 그 이전까지, 그리고 그 이후에도 수많은 병자를 고치셨던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하십니까? 그다음 절을 제가 읽어 드립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40절) 

예수님은 분명 수많은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분이라는 사실, 예수님의 사역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사역이라는 사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증명해보이기 위한 표적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쳐주신 사건에는 그 보다 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쳐주신 치유의 사건이 가지는 의미를 축소하는 일반적인 오해, 그 두 번째는 예수님의 치유 사건은 2000년 전 예수님 시대에만 일어난 사건이라는 오해입니다. 2000년 전 유대사회, 다시 말해 의술이 발달하지 않았고 사람들은 미신에 사로잡혀 있던 시대,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던 바로 그 시대에나 일어나는 사건이라는 오해입니다. 이러한 오해로부터 조금 발전한 것이, 예수님의 시대만이 아니라 성령께서 강력하게 역사하시는 어느 특정한 시기에만 치유의 사건이 일어난다는 오해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님은 치유의 사건이 예수님 시대에만, 혹은 성령께서 특별히 역사하시는 시기에만 일어나는 사건이라고 단 한 번도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말씀하셨지요. 마가복음 16장의 말씀을 제가 읽어드립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와 같은 표적이 따르는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치유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치셨습니다. 그리고 사복음서는 예수님의 치유 사건을 매우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마태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으로부터 시작하여 마태복음 8장과 9장에만 모두 아홉 번이나 예수님께서 병든 사람을 치유하신 장면이 등장합니다. 마태복음 5장, 6장, 7장에서 예수님의 보배로운 말씀, 곧 산상보훈의 말씀을 구체적으로 기록하였던 마태는 8장과 9장에서 예수님의 치유 사건을 집중적으로 기록합니다. 실제로 마태는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의 초기 갈릴리에서의 사역을 크게 세 가지로 설명하였습니다. 곧 복음을 선포하시는 사역,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는 사역, 그리고 병든 사람을 치유하는 사역입니다. 이처럼 마태는 예수님에 대한 기록을 서술하면서 예수님께서 천국의 복음을 선포하시는 사역,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사역과 동일한 수준으로 병자를 치유하는 사역을 중요하게 여겼고 그것을 복음서에 집중적으로 기록해 놓았습니다. 여러분,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성경은 예수님께서 병든 사람을 고치신 사역을 왜 그토록 중요하게 여깁니까? 

그 이유는 2000년 전 유대 사회의 백성들뿐만 아니라 사복음서를 읽고 묵상하는 오늘 우리에게도 예수님의 치유 능력이 간절히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나병환자 한명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에게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의 가르침이 매우 중요하지요.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삶의 기준이요, 예수님의 가르침이 내 인생의 이정표가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많이 들었다고 나의 인생이 변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웠다고 해서 우리 교회가 새로워지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하는 능력, 우리를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간절히 필요합니다. 제 아무리 의술이 발달했다고 말해도 여전히 우리는 우리의 육신을 치유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마음에 새겨진 뿌리 깊은 상처를 치유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나의 영혼을 병들어 죽게 만드는 죄악으로부터 우리를 치유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하지요.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니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의 말씀을 마치시고 산에서 내려오셨습니다. 그러자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수많은 무리들 가운데 자기 자신에게 예수님의 치유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나병환자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한 나병환자가.” 1절에는 “수많은 무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2절에서는 나병환자 한 명입니다. 예수님의 치유 능력을 요청한 사람은 수많은 무리들 가운데 한 명이었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는 예수님께서 태어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했던 맹인을 고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이야기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는 요한복음 9장의 마지막 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요 9:38) 

여러분, 나 자신의 육신에, 그리고 나 자신의 마음에,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의 영혼에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가 간절히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하시기 바랍니다. 이 간절함이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고,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 굻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치유를 원하신다 

자신에게 예수님의 치유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하였던 한 명의 나병환자는 예수님 앞으로 나아갔고, 그분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2-3절)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이렇게 요청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하시고자 하면 저를 깨끗하게 치유하실 수 있지 않으십니까? 저를 깨끗하게 고쳐 주십시오.’ 그러자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대답하십니까?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대답하신다고요? 주님께서 원하신데요. 주님께서 우리의 치유를 원하신다고요. 주님께서는 나의 영혼이 더러운 죄악으로 말미암아 병들어 있는 모습을 보시면서 하루빨리 치유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나의 마음이 온갖 종류의 아픔과 슬픔으로 병들어 있는 모습을 보시면서 하루 빨리 치유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육신이 질병으로 고생하는 모습을 보시면서 하루 빨리 치유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가정이 서로에게 상처를 받고 아파하시는 모습을 보시면서 하루 빨리 그 가정을 치유하고자 하신다고요. 여러분, 우리의 교회가 여러 가지 이유로 서로 상처를 받고 아파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 주님은 어떠한 마음을 품으실까요? 하루라도 빨리 우리 교회를 치유하고 싶으신 거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원하노니” 주님께서 원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치유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치유하시는 방법도 주의하여 보십시오. 3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실 때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손으로 나병환자를 고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고치셨어요. 3절 뒷부분에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말씀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졌습니다. 그런데 치유의 방법과 상관없이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나병환자에게 대십니다. 예수님이 나병환자의 어느 부분에 손을 대셨을까요? 분명하지는 않지만 나병이 가장 심한 곳이 아니었을까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예수님께서 그에게 손을 대신 것은 치유의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의 질병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예수님은 그의 상처에 손을 대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있는 육신의 질병이 심해서 고통스러우세요? 예수님께서 더욱 안쓰러운 마음으로 여러분을 치유하기 원하십니다. 여러분에게 있는 마음의 상처가 너무도 쓰리십니까? 예수님은 여러분의 상처가 깊으면 깊을수록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손을 대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영혼이 죄악으로 말미암아 큰 질병에 걸려 있습니까? 비록 사람들은 나병환자를 가까이하고 싶어 하지 않겠지만, 예수님만큼은 여러분의 죄악을 멀리하시기보다 가까이에서 손을 대시며 치유하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의 상처와 아픔을 그 누구보다도 치유하기를 원하시는 우리 주님께 내어 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 

오늘 본문 마지막 절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시니라(4절)

여기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명령, 곧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제사장을 찾아가라는 명령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있습니다. 그리고 각각의 해석에 대해 다양한 논쟁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 가운데 가장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해석을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3년간의 사역을 계획하고 계시기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가 되기까지 예수님의 치유 사역에 대해서 침묵하라고 명령하셨다는 설명입니다. 아울러 모세의 율법이 정해놓은 바대로 예물을 드리도록 명령하신 것은 나병이 치유되었다는 사실을 제사장으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으라는 명령이라는 견해입니다. 저는 이러한 설명이 크게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이러한 설명과는 별도로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교훈을 한 가지 던져줍니다. 그것은 제사장의 역할과 예수님의 역할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약 레위기에서 나병환자를 제사장들이 진찰 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역할은 진찰하는 것이지 나병을 고치는 것은 아닙니다. 제 아무리 하나님께서 세우신 제사장이라 할지라도 나병환자를 고칠 수는 없습니다. 제사장은 나병환자가 치유받았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확인하는 일을 합니다. 아직 치유받지 못한 환자가 있다면 그를 돌보는 역할만 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나병을 고치는 일은 누가 하십니까? 네, 예수님만 하십니다. 교회가 이것을 정확하게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가 성도들의 영혼을 치유할 수 없습니다. 목회자가 성도의 마음을 치유할 수 없습니다. 성도들의 기도가 환자의 질병을 치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치유는 누구에게 달려 있습니까? 네, 우리 주님께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무릎을 꿇고 간청했던 것처럼,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우리에게 예수님의 치유 사건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치유할 수 없어요. 우리의 질병을 우리가 치유할 수 없잖아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마음의 질병, 우리 영혼의 질병을 우리 스스로 치유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치유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며, 예수님께 매어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영혼의 치유를 위하여, 마음의 치유를 위하여 다른 것을 찾지 마십시오. 다른 데를 가도 소용없습니다. 제사장이 나병을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 그분에게 매어 달려야 합니다. 그분만이 우리 영혼의 질병을, 우리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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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