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2020. 5. 2.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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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특징적으로 표현한 단어들 가운데, 대표적인 것 하나를 꼽으라면 ‘나그네’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나그네의 삶이지요. 

창세기에 등장하는 이삭의 아들 야곱이 그의 인생 말년에 애굽의 황제 바로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바로가 야곱에게 질문합니다. ‘노인께서는, 연세가 어떻게 되십니까?’ 그 질문에 야곱이 무엇이라고 대답합니까?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야곱은 자신의 삶을 나그네의 삶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내 나그네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130세를 살았던 야곱은 계속해서 이렇게 이야기하죠. “내 나이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창 47:9절) 

실제로 그러했습니다. 야곱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몇 세까지 살았습니까? 175세까지 살았습니다. 장수하였지요. 그러나 아브라함의 삶은 나그네의 삶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자신의 고향을 떠났지요. 그리고 가나안 땅에서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그 땅을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지만, 그것은 아직 약속일 뿐이고 아브라함이 175세로 숨을 거둘 때까지 아브라함이 소유했던 땅이라고는 자신의 아내 사라와 자신이 묻힌 막벨라 굴 하나였습니다. 175년 동안 장수하였지만, 나그네로 살았지요. 

야곱의 인생을 보십시오. 그는 147세까지 살았습니다. 장수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형 에서의 장자권을 빼앗은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20년 동안 머물지요. 나그네의 인생입니다. 그가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것입니까? 고향 땅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야곱의 딸 디나가 부족의 추장 아들로부터 성폭행을 당하죠. 이에 분노한 야곱의 두 아들, 시므온과 레위가 그 성읍의 모든 남자들을 죽여 버립니다. 이제 자신의 고향에서 정착하며 편안히 살 수 있기를 기대했던 야곱은 또다시 그 동네를 피해 떠나가야 했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야곱은 자신의 죽음을 먼 타향 애굽에서 맞이합니다. 나그네 인생이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나그네 인생 

하나님은 믿음의 조상들에게 나그네의 삶을 요청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 역시 나그네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18절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싸는 것을 보시고 건너편으로 가기를 명하시니라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에워싸고 있었습니다. 이 무리들이 예수님을 둘러싼 이유가 무엇일까요? 네, 예수님의 가르침 때문입니다. 무리들은 산상보훈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다른 서기관들과 달랐지요.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권위가 있었습니다. 무리가 예수님을 에워싼 이유는 그것뿐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모든 병든 사람들 모든 귀신 들린 사람들을 고쳐주셨습니다. 하룻밤을 꼬박 지새우시면서 예수님은 자신을 찾아온 병자와 귀신 들린 사람들에게 일일이 손을 대시며 고쳐주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사역은 수많은 무리들로부터 호응을 얻었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에워싸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무리가 예수님을 에워싸는 장면을 바라보시면서, 예수님께서 어떤 결정을 하셨습니까? 18절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싸는 것을 보시고 건너편으로 가기를 명하시니라” 

여러분,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은 출세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그 이유는 너무도 명백합니다. 예루살렘에는 유대교의 중심지인 성전이 있고, 성전이 있다는 이유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시대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루살렘에서 성전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안정적인 삶의 터전을 닦아 놓는 것이 일생일대의 목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반대의 길을 걸으십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나그네의 인생을 살아가십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과 동일하신 주님께서 하늘의 모든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 자체가 스스로 나그네의 인생을 선택한 것입니다. 모든 안정적인 삶, 모든 영광스러운 삶을 포기하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것이 크리스마스의 의미가 아닙니까?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셨을 뿐만 아니라, 이 땅에 오셔서도 당시 세계의 중심 로마로 향한 것이 아니라 로마의 식민지 유대 땅으로 오셨습니다. 유대 땅 중에서도 종교와 정치의 중심지였던 예루살렘이 아닌 저 북쪽의 변방 가나안으로 오십니다. 그리고 그 가나안에서 조차 예수님 주변에 무리들이 에워싸니 그들을 피하여 예수님은 길을 떠나십니다. 예수님이야말로 나그네의 삶, 순례자의 삶을 사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정말 제 마음이 감동이 되는 부분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 주님께서 수많은 무리들을 피하여 갈릴리 호수를 건너 도착하신 장소가 가다라 지방이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가다라 지방에서 예수님은 귀신이 들려서 무덤 사이를 뛰어다니던 두 명의 가련한 여혼을 치유하여 주십니다. 
네, 예수님은 하늘 보좌를 버리셨습니다. 이 땅에 로마의 황제로 오신 것도 아닙니다. 하다못해 예루살렘의 대제사장으로 오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저 북방의 언저리 갈릴리에 오셨고, 사람들이 자신을 에워싸며 높이 칭송하자 그들을 피하여 귀신 들려 영혼이 다 죽어버린 두 명의 영혼을 치유하시기 위하여 길을 떠나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며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나를 찾아오셨다는 거예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늘의 모든 영광을 버리셨다는 사실입니다. 그 놀라운 사실로 감격하며, 그 놀라운 사실에 눈물 흘리며 우리 주님의 사랑을 찬양하며 예배하는 것, 그것이 성탄절의 의미가 아닌가요? 

여러분, 우리의 영혼이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러 가지 질병으로 고통 받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온갖 상처와 아픔으로 가득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 모습을 보시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자신의 모든 영광을 다 버리고 스스로 나그네가 되어 이 땅에 오신 성육신의 은혜, 그 사랑이 우리를 모든 죄악과 모든 질병과 모든 상처와 아픔으로부터 구원한다는 이 놀라운 진리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의 나그네 인생 

예수님께서 자신을 에워싸는 무리를 보시고 다른 지역으로 건너가실 결정을 하셨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스스로 나그네의 인생을 선택하셨다는 이 깊은 진리를 깨닫지 못했던 한 사람, 어느 서기관이 아주 자랑스럽게 예수님 앞을 가로막으로 이렇게 이야기하지요. 오늘 본문 19절입니다. 우리 19절을 한 목소리로 봉독 하겠습니다.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아뢰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이 서기관의 이야기는 문자 그대로만 놓고 본다면 칭찬받아 마땅합니다. 그렇죠? 그러나 그 다음 절에서 예수님은 칭찬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의 대답을 근거로 우리는 이 서기관이 왜 ‘예수님, 예수님께서 어디를 가시든 저는 따르겠습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했는지 유추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왜, 도대체 어떠한 의도로 이 서기관은 예수님께서 어디를 가시든 따라가겠다고 했을까요? 아마도 이 서기관은 예수님께서 군중들 사이에서 칭송받는 장면에 주목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시니 사람들이 그분의 권위를 인정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환자들, 귀신 들린 사람들을 가득 데리고 왔더니 예수님께서 놀라운 능력으로 그들을 다 고쳐주십니다. 이 서기관이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네, ‘저 예수를 스승으로 모셔야 네 인생이 펴겠구나’라는 계산을 순간적으로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이라면 어디든 따르겠다고 선언했던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오늘 본문 20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예수님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서기관이 오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면 어디서나 사람들이 몰려오고, 그들로부터 칭송을 받고 존경을 받으며 결국에는 종교가 중심인 유대 사회에서 출세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오해를 풀어주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삶이 그 서기관이 생각하는 것처럼 화려한 삶이 아니라 나그네의 인생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하다못해 여우도 들어가서 쉴 수 있는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할 둥지가 있는데 예수님은 머리를 두고 쉬실만한 장소조차 없는 나그네의 삶, 순례자의 삶을 사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여기에서 우리가 깨닫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그렇지요. 예수님을 믿고 그분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삶 역시 나그네의 인생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구약 성경의 큰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하나님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이 나그네로 살아갈 때에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들의 믿음이 성숙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이 어딘가에 정착하게 되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보게 되지요. 

출애굽 이후, 40년 동안 광야에서 나그네로 살아왔던 세월은 애굽의 종이었던 히브리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민족으로 거듭나는 기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 평안한 삶을 누리면서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율법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지요. 
급기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70년 동안 바벨론 제국의 포로로 삼으십니다. 그들에게 다시금 나그네의 삶이 시작되었지요. 그리고 바로 이때 이스라엘 백성은 다시금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성전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얼마나 귀중한 일인지를 절감하게 됩니다. 그 결과로, 그들은 가나안 땅으로 귀환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다시금 성전을 쌓고 하나님을 예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나그네의 삶을 요구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의기양양하게 선포했던 한 서기관에게 우리 주님은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란 정해진 거처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나그네의 삶이라고 설명하십니다. 여러분, 왜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 된 우리에게 나그네의 삶을 요구하실까요?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살아갈 때에만 우리가 하나님을 참으로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부터 

오늘 본문에는 서기관 외에도 또 한 사람이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 21절과 22절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언 듯 듣기에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지나치게 냉정하다고 여겨지지요. 이 본문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가장 적절하다고 여겨지는 설명을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우선, 이 사람의 아버지는 연세가 많은 것을 분명하지만 아직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이 사람의 이야기는 어떠한 의미가 될까요? 노쇠하신 아버지의 마지막 인생을 옆에서 돌보아 드리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그때부터 자유롭게 주님을 따르겠다는 의미가 됩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 사람에 대한 예수님의 응답은 시간을 지체하지 말라는 의미가 됩니다. 시간이 지나 부모님에 대한 의무가 사라지면 순례자의 길, 나그네의 길을 걷겠다고 말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에는 그가 제자로서 순례자의 길, 나그네의 삶을 살아가는데 또다시 발목을 잡는 무엇인가가 등장하게 되지 않겠어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나그네의 길을 걷는 우리의 발걸음이 바로 오늘 이 자리에서부터 시작되시기를 바랍니다. 


더 나은 본향 

저는 오늘 설교를 마무리하면서 히브리서의 말씀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히브리서 11장은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의 영웅들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믿음의 영웅들을 소개한 뒤 히브리서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표준새번역으로 읽어 드립니다. 

이들은 모두 믿음으로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들은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하였지만, 그것을 멀리 바라보고 즐거워하였으며, 땅 위에서는 손과 나그네로 있다는 것을 인정하였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함으로써, 자기네가 본향을 찾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들이 떠나온 곳을 생각하고 있었다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 그들은 더 좋은 것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곧 하늘나라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도시를 마련해 주셨습니다.(히 11:13-16)

여러분, 예수님은 나그네의 삶을 사셨습니다.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로마의 변방 이스라엘, 그 가운데서도 변방 갈릴리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조차 사람들이 자신을 에워싸자 그 자리를 피하십니다. 예수님의 그 나그네 삶이 우리에게 구원이라는 위대한 선물을 안겨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그러한 나그네의 삶을 사셨어요? 네, 예수님의 고향은 베들레헴이 아니라 하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나그네의 삶을 사셨던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나그네의 삶, 순례자의 길을 요구하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이 땅을 살아가면서 나그네로 순례자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우리의 본향이 하늘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믿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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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