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2020. 5. 20. 15:11

세가지 반응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 예수께서 엄히 경고하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하셨으나 그들이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땅에 퍼뜨리니라” (마 9:30-31) 

예수님께서 앞을 보지 못하는 두 명의 눈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떠한 이유에서였는지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치유해주신 사건을 이야기하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경고를 하셔도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계속해서 퍼집니다. 31절은 예수의 소문을 ‘그 온 땅에’, 그 온 땅에 퍼뜨렸다고 기록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바로 그때, 온 세상에 퍼져나갔습니다. 누구도 예외 없이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동일한 소식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소식에 반응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천차만별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에 대해 소문을 들었던 사람들의 반응을 크게 3가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 반응은 ‘그저 놀라는 것’입니다. 본문 32절과 33절입니다. 

“그들이 나갈 땡에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예수께 데려오니 귀신이 쫓겨나고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거늘 무리가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 하되” 

어떤 사람이 귀신에 사로잡혀 말을 하지 못하던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치유하여 주십니다. 귀신에 사로잡혔던 영혼이 자유를 얻고, 그의 입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 장면을 보면서 사람들은 놀랍게 여깁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다 자세히 보십시오. 33절에 “귀신이 쫓겨나고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거늘,” 그 다음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무리가” 예수님의 기적을 바라보면서 그저 놀랍게 여기는 사람들은 무리를 이루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치유 사건을 보면서 그저 놀랍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마치 TV에서 놀라운 사건에 대해 보도를 하면, 그 장면을 흥미롭게 바라보는 것과 같습니다. 때로는 자신이 흥미롭게 시청한 TV의 내용을 다른 사람들에게 신이 나서 이야기할 지도 모르죠. 그러나 거기까지입니다. 그 놀라운 사건이 자신의 삶에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수많은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에 사로잡혔던 사람을 자유하게 하셨지만, 그 장면을 바라보면서 혹은 그 소식을 전해 들으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놀랍게 여길 뿐입니다. 그 이상 한 걸음도 나아가지 않습니다. 놀라운 사건인 것은 분명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사건을 일으킨 예수님께 나아가 자신의 삶도 변화시켜 달라고 요청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오늘 본문 33절이 가르쳐주듯, 우리 시대에도 예수님의 치유 사건이 기록된 복음서의 말씀을 읽고 묵상한 사람들 가운데 대부분의 무리들에게는 예수님의 치유 사건이 단순히 놀라운 일에 그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치유 사건에 대한 소문을 들었던 사람들이 보여준 두 번째 반응은 오히려 적대시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34절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르되 그가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 하더라” 

예수님께서 귀신에 사로잡혀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을 치유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가련한 영혼을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있던 어떤 사람들은 오히려 예수님의 치유 사건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들이 바리새인들이었다고 기록합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귀신 들린 사람을 치유하신 사건을 놓고, 예수님께서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아냥거렸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치유 사건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육신의 질병과 마음의 아픔과 영혼의 상처를 치유하여 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치유 사건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바리새인과 같이 예수님의 치유 사건을 적대시하는 사람들입니다. 

자, 이제 마지막으로 세 번째 반응은 예수님의 치유 사건이 나 자신에게도 일어나기를 바라며 간구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9장 26절과 27절입니다. 

“그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더라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가실 새 두 맹인이 따라오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26절에 ‘그 소문’은 예수님께서 이미 죽어버린 어린 소녀를 다시 살리셨다는 소문입니다. 그 소민이 온 땅에 퍼졌습니다. 그리고 그 소문을 누가 들었습니까? 앞을 보지 못하는 두 명의 소경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에게 들린 예수님에 대한 소식에 놀라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예수님을 향해 이렇게 소리 지릅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들은 이미 죽어버린 어린 소녀를 살리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여러분, 사실 두 명의 소경에게 어린 소녀가 살아났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어린 소녀의 아버지 회당장 야이로에게는 너무도 중요한 사건이지만, 두 명의 소경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어요. 그런데 이 소경의 장점이 무엇입니까? 자신의 귓가에 들리는 예수님의 치유 사건을 자신의 삶에 적용한다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도 살리시는 분이라면, 자신의 눈을 고쳐주시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믿음이 그들 마음에 싹트기 시작하였던 것이죠. 

이 대목에서 어떤 분들은 마음으로 이렇게 질문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목사님, 수많은 무리들 가운데 예수님의 치유 사건을 자신의 삶에 적용했던 사람은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잖아요?”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은 몸에 큰 질병이 없으니 예수님께 간구하지 않았던 것이 아닙니까?” “저 역시 예수님의 치유 사건을 믿지만, 저는 귀신에 사로잡힌 것도 아니고, 몸에 불치의 질병이 있는 것도 아니니 당연히 예수님의 치유 사건을 저에게 적용할 필요가 없지 않나요?” 여러분들 가운데도 이와 같은 질문이 마음속으로부터 올라오는 분들이 계십니까? 만일 그런 분들이 계시다면 저는 그런 분들에게 이렇게 질문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육신은 정말로 건강하십니까?
여러분의 마음은 정말로 아무런 상처가 없으십니까?
여러분의 영혼은 정말로 모든 죄로부터 자유로우십니까?

예수님께서 언젠가 바리새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적용의 단계들 

예수님께서 이미 죽은 어린 소녀를 살리셨다는 소문을 듣고 두 명의 소경은 예수님을 향해 소리 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곧바로 반응하여 주시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27절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가실 새 두 맹인이 따라오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잘 보십시오. 두 맹인이 앉은 자리에서 예수님을 향해 소리친 것이 아닙니다. 두 맹인이 그저 서 있는 자리에서 예수님을 향해 소리친 것도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히 이야기하지요. 두 맹인이 ‘따라오며’ 예수님을 향해 소리를 질렀습니다. 

여러분, 이 장면을 상상해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이미 죽어버린 어린 소녀를 살리시고는 그 장소를 떠나시지요. 그 집을 떠나 이동하시는 예수님을 따라가며 소리 질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절은 어떻게 이어지나요? 2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예수님께서 그냥 집에 들어가 버리십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서부터 예수님이 머무셨던 집까지 두 맹인은 예수님을 따라가며 소리쳤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예수님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그들의 간절한 부르짖음에 상관없이 그저 자신의 길을 걸으시는 겁니다. 그리고 집에 들어가 버리십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며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라고 소리 질렀던 사람들은 소경입니다. 맹인입니다. 앞을 볼 수가 없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상황에서, 자신이 아무리 소리쳐도 그냥 자신의 집으로 들어가는 예수님을 따라가는 이들의 심정을 상상해보십시오. 앞이 보이지 않아요, 예수님께서 어디로 가신다는 소리만 듣고 따라갑니다. 그러면서 그 예수님께 소리를 질러보지만 예수님은 대답하지는 않고 그저 자신의 집을 향해 휑하니 걸어가고 있습니다. 이때, 이 소경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정말 저분 예수가 우리의 눈을 고쳐줄까라는 의심이 마음에 들지 않겠어요? 

우리는 예수님의 치유 사건을 묵상하면서 예수님의 치유 사건이 바로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기를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즉각적으로 응답하실 때도 있지만, 오늘 본문과 같이 그저 휑하니 지나가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몇 번 기도하였지만, 간절히 기도하였지만 예수님의 응답이 당장 돌아오지 않을 때 우리의 마음에는 의심이 들어옵니다. ‘맞아, 역시 성경의 사건은 성경의 사건일 뿐이야.’ ‘예수님의 치유 사건은 성경에나 있는 사건이야.’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경험한 다른 교회의 이야기들은 역시 다른 교회의 이야기일 뿐이야.’ ‘나와는 상관이 없어.’ 이러한 생각이 우리 마음에 쑥 들어오지요. 그러나 여러분,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는 우리가 묵상한 예수님의 치유 사건을 나의 개인의 삶과 우리의 가정과 우리의 교회에 적용하기를 원한다면, 그 의심의 단계를 뛰어 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두 명의 맹인이 보여준 믿음의 위대함이 무엇입니까? 그들이 아무리 예수님을 향해 소리를 질러도 예수님께서 휑하니 자신이 머무는 집으로 들어가 버릴 때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는 그 단계를 넘어섰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8절을 다시 보십시오.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그러자 맹인들도 자기 집으로 돌아갔나요? 아닙니다. 그 다음을 보십시오. “맹인들이 그에게”, “예수님께 나아오거늘”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의 치유 사건을 묵상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의 능력이 우리의 몸과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영혼도 모든 질병과 아픔으로부터 치유하여 주옵소서. 우리는 또한 이렇게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의 능력으로, 우리 개인의 삶과 우리의 가정과 우리의 교회를 새롭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였지만, 아직도 예수님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신이 머무는 집을 향해 휑하니 지나가버리실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제 아무리 간절히 기도한다 할지라도 예수님은 여전히 응답하지 않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맹인과 같이 끝까지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 그 집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두 명의 맹인이 예수님을 따라 집에 들어가자, 예수님께서 곧 그들의 눈을 고쳐주셨습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앞도 보이지 않는 그들이 예수님의 집까지 따라갔으면 이제 고쳐주실만 하잖아요.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나의 고비를 더 넘을 것을 요구하십니다. 오늘 본문 28절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맹인들이 그에게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니이다 하니” 

예수님께서 자신의 집까지 따라온 두 명의 맹인에게 질문하십니다. “내가 능히 이 일을 할 줄을 믿느냐?” 저는 예수님의 이 질문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단어를 뽑으라면, ‘이 일’이라는 단어를 꼽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능히 ‘이 일’을 할 줄을 믿느냐?”라고 질문하십니다. 

두 명의 맹인은 예수님이 이미 죽어버린 어린 소녀를 살린 사건을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두 명의 맹인은 예수님께서 12년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을 깨끗하게 고쳐주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두 명의 맹인은 예수님께서 수많은 사람의 질병을 고쳐주시고, 귀신에 사로잡힌 수많은 사람을 자유롭게 해주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질문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행하신 수많은 치유의 사건이 아니라, 바로 그들, 바로 그 맹인들에게 필요한 ‘그 일’을 예수님께서 행하실 것으로 믿느냐고 질문하십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한 질문을 던지십니다.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예수님께서 성경 시대에 수많은 병자를 고치셨다는 사실을 믿느냐고 질문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는 이미 죽어버린 사람도 살릴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믿느냐고 질문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들, 다른 가정들, 다른 교회들에게 행하신 놀라운 일을 믿느냐고 질문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질문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지금도 기도하고 있는 그 기대의 제목, 곧 우리 개인의 삶과 우리의 가정과 우리의 교회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의 능력이 나타나게 하여 주시옵소서라는 그 기도의 제목에 예수님께서 응답하실 것이라고 여러분은 믿으십니까? 

예수님은 두 맹인이 예수님의 그 질문에 “네, 그렇습니다”라고 응답하자, 그들의 소원대로 그들의 눈을 고쳐주십니다. 

여러분, 제 아무리 열심히 기도하여도 예수님의 치유의 능력이 여러분에게 나타나지 않으셨습니까? 끝까지,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님의 집까지도 따라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질문하실 것입니다.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예수님의 바로 그 질문에 “네, 그렇습니다. 제가 믿습니다.”라고 응답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의 역사를 바로 나의 삶 가운데, 우리의 가정 가운데, 우리의 교회 가운데 경험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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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