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2020. 5. 21.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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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가 세상 문화에 대하여 어떠한 태도를 지녀야 하는지에 관심은 기독교 신학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가 세상 문화에 대하여 어떠한 태도를 지녀야 하는가라는 이 문제에 대하여 이제는 거의 고전으로 여겨지는 한 권의 책이 있습니다. 미국 예일대학교의 기독교 윤리학자였던 리처드 리버라는 분이 1951년 저술한 Christ and Culture라는 책입니다. 우리말로는 원 제목을 그대로 옮겨 「그리스도와 문화」라는 제목으로 여러 번역본이 나와 있습니다. 

이미 고인이 된 리처드 니버 교수는 이 책에서 매우 흥미로운 관찰을 제시합니다. 지난 2000년의 기독교 역사를 돌아보면, 기독교가 세상 문화에 대하여 견지하였던 자세나 태도는 다섯 가지의 큰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리처드 니버 교수는 이 책에서 기독교가 문화를 대하는 태도의 다섯 가지 유형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몇 가지만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리처드 니버는 먼저 기독교가 세상 문화를 대하는 첫 번째 태도로 ‘문화에 대립하는 그리스도’ 유형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문화에 대립하는 그리스도’입니다. 세상 문화는 악한 것이기에 세상의 모든 문화를 거부하려는 태도가 지난 2000년의 역사 속에서 자주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문화의 그리스도’ 유형입니다. 이 유형에 속한 기독교는 세상의 문화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라고 주장하면서 세상의 문화가 발전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리처드 니버는 기독교가 세상 문화를 대하는 태도를 다섯 가지 유형으로 구분하였는데, 그 마지막 유형으로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태도를 설명하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문화를 변혁하는 그리스도’ 유형입니다. 첫 번째 유형과 같이 세상의 문화를 무조건 악한 것으로 치부하며 그것을 거부하는 것도 아니요, 두 번째 유형과 같이 세상의 문화는 하나님의 선하고 아름다운 선물이라고 주장하며 세상의 문화를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라, 기독교의 진리를 가지고 세상의 문화를 변혁해가는 기독교의 모습, 이것이 가장 이상적인 그리스도인의 태도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책은 지난 50년 간 기독교윤리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입문서가 되었습니다. 기독교인이 어떻게 세상 문화를 대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분명한 기준을 제시해주는 좋은 자료였지요. 다시 말해, 리처드 니버의 주장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기독교가 세상의 문화를 무조건적으로 거부하거나 받아들이지 말고, 기독교의 복음과 성경의 가치에 따라 세상의 문화를 오히려 바꾸어 나가야 한다는 분명한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 미국 드류대학교의 레너드 스윗 교수라는 분이 리처드 니버의 「그리스도와 문화」라는 책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나섰습니다. 레너드 스윗 교수는 리처드 니버 교수의 책 「그리스도와 문화」가 지금 우리 상황을 정확하게 평가하는 데 ‘가장 방해가 되는 책’이라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리처드 니버의 책을 읽으면 세상에서 길들여진, 이미 세상의 문화를 거역할 수 없는 기독교가 스스로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시대 세상 속에서 크리스천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세상 속에서 우리는 기독교 가치관과 상충하는 많은 장면에 직면하게 됩니다. 성경은 낮은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하늘나라에서도 크게 된다고 말씀하지만, 세상은 그 반대로 이야기합니다. 편법을 써서라도, 다른 사람을 억눌러서라도 자신의 이득을 챙겨야 한다고 가르치지요. 성경은 우리에게 성결하고 거룩한 삶을 요구하지만, 우리가 접하는 많은 영상물에는 폭력과 왜곡된 성이 무차별적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재물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말하지만, 세상은 하나님이 아닌 재물을 선택하라고 우리에게 강요합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우리는 세상의 문화를 그저 악한 것으로 치부해버리며 거부하고 살 수만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세상의 문화는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고 모두 선하고 아름답다고 말 할 수도 없죠. 그래서 교회는 그동안 리처드 리버의 주장과 같이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충실하게 담당함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문화를 조금씩 변혁시켜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교회는, 그리고 크리스천들은 세상 속에서 이 시대의 문화를 성경적으로 기독교의 정신으로 변혁시켜 왔나요? 아닙니다. 사실은 교회 역시 세상의 흐름 속에 거의 함몰되어 있지요. 여기에는 미국의 교회이든, 한국의 교회이든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어쩌면, 레너드 스윗 교수의 주장처럼, 마치 그리스도인 자신이 세상의 문화를 변혁시키는 주체인 것처럼 착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리 가운데 보낸 양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직접 선택하신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교육하신 제자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직접 세상 속에 파송하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열두명의 사도를 세상 가운데 파송하시는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16절에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선택을 받았고,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교육을 받았고,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치는 권능을 받았지만 세상 가운데 파송 받은 제자들, 세상 가운데 파송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마치 이리 떼 가운데 떨어트려진 양과 같다는 것입니다. 

저는 교회에서 사역을 하면서, 주일을 기다리는 많은 크리스천들을 만나보았습니다. 자신에게 있어 주일이 가장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동감하십니까? 주일이 되어 예배에 참여하고 다른 성도들과 교제하고 자신에게 기쁜 일이 있든 슬픈 일이 있든 함께 나누며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 안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일이 가장 기다려지고, 주일이 가장 행복하다는 것은 동시에 평일 세상 속에서 크리스천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고되고 힘든 일인지를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우리 크리스천의 모습이 아닌가요? 세상 속에서 크리스천으로 살아가기를 소원하는 우리 크리스천 청년들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도 우리가 세상 속에서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 아십니다. 크리스천이 세상 속에서 세상의 문화를 변혁시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요, 오히려 이리 떼에 던져진 양의 모습과 같다고 비유로 말씀하신 분이 바로 우리 예수님입니다. 예수님도 세상 속에서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아십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세상 속에서 크리스천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마치 이리 떼 한 가운데 던져진 양의 모습과 같다는 것을 훤히 할고 계신 예수님께서 우리 크리스천을 세상 가운데 밀어 넣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6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런데 이 문장의 우리말 번역은 조금 의역이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원문을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보라, 내가 양과 같은 너희를 이리들 가운데 보낸다.’ 양과 같은 우리를 이리 떼 한가운데 보내시는 분이 누구세요? 바로 예수님입니다. 

여러분, 기독교가 세상 속에서 세상의 문화를 변혁할 수 있을까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크리스천으로 학교에서, 직장에서, 가정에서 살아갈 때 여러분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이 만나는 사람들이 우리 주님의 권능에 굴복하던가요? 아니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세상을 변혁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세상 속에서 크리스천으로 살아갈 힘과 능력이 없어요. 바로 그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리 떼와 같은 이 세상 속에 양과 같은 우리를 던져 넣으신 분이 우리 주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요새를 벗어나라는 명령 

구약의 다윗은 여러 해 동안 자신을 죽이려 달려드는 사울의 칼을 피해 도망자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다윗이 사울의 의도, 곧 사울이 자신을 죽이려한다는 숨은 의도를 파악하기 전까지 다윗은 사울 왕이 거주하는 왕궁에서 사울의 신하로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이 다윗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의도를 분명히 확인하자 다윗은 왕궁을 피해 도망가지요. 여러분, 다윗이 사울 왕의 칼날을 피하기 위해 유대나라를 떠나 가장 먼저 망명을 갔던 나라가 어디였는지 기억하십니까? 다윗은 이스라엘의 서쪽에 위치하였던 블레셋 나라에 망명을 가지요. 블레셋 나라의 가드라는 도시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다윗이 망명할 지역을 처음에는 잘못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처음 블레셋 지역으로 갔는데, 블레셋의 모든 백성들은 이미 다윗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이 얼마 전 전쟁터에서 죽인 골리앗이 바로 블레셋 나라의 최고 장수였기 때문입니다. 블레셋 백성들 입장에서 다윗은 민족의 영웅 골리앗을 쳐 죽인 국가의 주적입니다. 다윗이 사울의 칼날을 피해 도망가는 그 길이 급하기는 급했던 것 같습니다. 아니, 자신이 얼마 전에 블레셋의 전쟁 영웅 골리앗을 죽여놓고는 자기 목숨을 구제하기 위해 바로 그 블레셋에 갔단 말이죠. 

아니나 다를까. 블레셋 사람들은 금방 다윗을 알아봅니다. 그리고 민족의 주적인 다윗을 죽이려고 계획을 세우자, 다윗이 다급한 마음으로 꾀를 하나 내었으니, 곧 미친 척 한 것입니다. ‘나는 너희 민족의 전쟁 영웅 골리앗을 쳐 죽일만한 그런 위인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 보인 것이었죠. 그래서 간신히 자신의 목숨을 건져냅니다. 

그리고 다윗은 정 반대편 나라로 다시 망명을 시도합니다. 블레셋 나라는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서쪽에 있는 나라입니다. 이번에는 다윗이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동쪽에 있는 나라로 망명을 떠납니다. 당시 이스라엘 동쪽에는 모압이라고 하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사실, 모압이라는 나라는 다윗에게 있어서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잠시 숨어있기에 매우 적합한 곳이었습니다. 여러분, 혹시 다윗의 증조할아버지 이름이 무엇인지 기억하십니까? 다윗의 아버지는 이새입니다. 이새의 아버지는 오벳이죠. 오벳의 아버지가 바로 보아스입니다. 다시 말해 다윗의 증조할아버지가 룻기에 나오는 보아스입니다. 그러면 다윗의 증조할머니는 누구일까요? 네, 바로 룻이죠. 그리고 룻은 모압 여자였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모압 사람들에게 자신의 증조할머니가 모압 사람이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그들의 도움을 요청할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실제로 모압의 왕은 자신을 찾아온 다윗을 대하는 방식이 블레셋의 가드 왕과는 달랐습니다. 모압의 왕은 다윗뿐만 아니라 다윗의 가족들까지도 기쁘게 받아들여서 그들이 모압에서 생명을 보존할 수 있도록 배려합니다. 여러분, 이미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는 굳은 결심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 아무리 한 나라의 왕이라 할지라도 국경을 넘어서까지 군대를 보낼 수는 없는 것이지요. 다행히 이스라엘 서쪽에 있었던 블레셋은 몰라도, 이스라엘 동쪽에 있던 모압에서는 다윗과 그의 가족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모압에 머무는 것이 여러모로 안전합니다. 

그런데, 모압에 머물며 사울의 위협을 피하고 있던 다윗에게 하나님은 선지자를 보내십니다. 그 선지자의 이름은 갓이죠. 갓 선지자가 다윗을 만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너는 이 요새에 있지 말고 떠나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 여러분, 하나님의 이 말씀은 다윗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은 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 갓 선지자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너는 이 요새에 있지 말고” 네, 그렇습니다. 다윗에게 있어서 모압 땅은 요새와도 같습니다. 사울의 칼날이 도무지 넘볼 수 없는 요새, 그곳이 모압입니다. 그런데 그 요새를 떠나 어디로 가라고 말씀하십니까?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유다 땅은 사울이 다스리는 지역입니다. 유다 땅에는 사울의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는 이스라엘의 군대가 주둔해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요새가 아닌 유다 땅으로 내모십니다. 오늘 본문인 마태복음의 표현을 사용한다면, 양과 같은 다윗을 안전한 요새에서 끄집어내셔서 이리 떼 한 가운데인 유다 땅으로 보내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한 가지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양과 같은 우리, 양과 같은 우리 크리스천을 이리 떼와 같은 이 세상 속으로 보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양과 같은 우리를 이리 떼와 같은 세상 한 가운데 던져 넣으시는 것일까요? 이러한 질문을 가지고 오늘 본문을 다시 묵상하면서 저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세상 가운데 던져 넣으시는 중요한 이유 한 가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 다 함께 18절 말씀을 봉독 하도록 하겠습니다. 

“또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가리니 이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리 떼 가운데 던져진 양과 같은 우리가 세상 속에서 크리스천으로 살다보면 억울하게 총독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심문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억울하게 재판받을 때가 있어요. 억울하게 손해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당연하지요. 이리 떼 가운데 던져진 양이 어떠한 경우를 안 당하겠습니까? 그런데 바로 그 순간에 우리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이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 크리스천이 세상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마치 양이 이리 떼에 던져진 것과 같지만,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역사를 세상 가운데 보이신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만일 모압 땅 그 요새에 거하였다면, 다윗은 사울이라는 큰 위험으로부터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는 하나님의 역사도 경험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을 모압이라는 요새를 떠나서, 유다 땅으로 옮기십니다. 유다 땅에서 다윗은 연약하기 짝이 없는, 그래서 이리 떼에 던져진 어린양 한 마리와 같은 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양과 같은 다윗이 이리 떼 한가운데 떨어진 것과 같은 바로 그 유다 땅에서 모압이라는 국경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길이 다윗을 지키고 보호하신다는 그 사실을 다윗에게 알리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다윗 본인에게는 물론이요 사울과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게 친히 알리고자 하셨던 것이지요. 

우리 크리스천은 오늘과 같이 매 주일이 되면 함께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서로 성도들 간의 교제를 나누지만, 하루가 지나 월요일이 되면 우리는 또 다시 세상 가운데로 나아가야 합니다. 비록 우리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가 넘친다 할지라도 이 세상의 직장과 학교에 파송된 우리가 크리스천으로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마치 이리 떼 한가운데 던져진 양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우리 크리스천이 기독교의 가치관으로 세상의 문화를 변혁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지만 현실은 그리 녹녹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때 여러분 나를 이 세상 가운데 크리스천으로 파송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나는 이 세상 가운데 연약한 존재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나를 통해 오늘도 하나님의 손길을 수많은 사람들에게 보이고자 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크리스천에게 요구되는 것 - 지혜 & 순결 

예수님께서 12명의 사도를 세상 가운데 파송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리고는 이리 떼 한 가운데 던져진 양과 같이, 세상 가운데 파송된 크리스천에게 필요한 두 가지 덕목을 말씀하시지요. 그것이 무엇입니까? 16절 하반절에 “그러므로 너희는 뱀과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두 가지 덕목은 첫째로 지혜요, 둘째로 순결입니다. 

먼저 지혜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설명하십니다. 오늘 본문 17절부터 20절까지 우리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사람들을 삼가라 그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그들의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또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가리니 이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이리 떼의 실체는 17절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세상 속에서 크리스천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을 가만히 놓아두지 않습니다. 공회에 넘겨주고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총독과 임금들 앞에서 심문을 당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지혜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세상에서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자신을 변호할 수 있는 지혜입니다(19절). 사람들이 진리를 왜곡하고 거짓으로 나를 모함할 때, 무엇이 진리요 무엇이 참인지를 들어낼 수 있는 것, 이것이 지혜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 다시 살아나시고 하늘에 올라가신 뒤, 베드로와 요한이 공회 앞에 끌려가 심문을 받았습니다. 예루살렘 공회는 베드로와 요한을 위협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더 이상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지 말라고 경고하지요. 바로 그때 베드로와 요한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그들의 대답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베드로와 요한은 예루살렘 공회 앞에서 심문을 받고 있었습니다. 마치 이리 떼 한가운데 던져진 양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무엇이 옳으며, 무엇이 진리이며, 무엇이 참인지 그 자리에서 명백하게 드러낼 수 있는 지혜가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크리스천에게 예수님께서 요구하신 두 번째 덕목은 바로 순결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순결의 덕목에 대해서도 설명하십니다. 오늘 본문 22절입니다.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그럼요. 이리 떼 한 가운데 던져진 양이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어요. 여러분이 크리스천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려고 결심만 하여도 여러분은 이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네, 이것이 순결의 내용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다 할지라도 끝까지, 마지막 순간까지 이 세상 가운데 예수님을 믿는 크리스천으로 살고자 애쓰는 마음이 변하지 않는 것, 바로 그것이 순결입니다. 

저는 하루의 시간이 흘러 내일 또 다시 세상 가운데 나아가야 하는 여러분들에게 순결의 마음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 순결은 인내입니다.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습니다. 사람들은 나에게 예수님을 믿는 것이 뭐 그리 다르냐고 이야기합니다. 사람들은 나로 하여금 종교는 종교일 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세상 속에서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는 것을 단념하도록 계속해서 재촉합니다. 그러나 제 아무리 세상 사람들이 나를 미워한다 할지라도 마지막 순간까지 크리스천으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인내, 곧 순결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두 가지 덕목을 요구하십니다. 첫째는 지혜요, 둘째는 순결입니다. 그런데 지혜든, 순결이든 우리가 세상 속에서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덕목은 내 안에서 짜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선물입니다. 

먼저 지혜입니다. 오늘 본문 19절부터 제가 읽겠습니다.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우리가 세상 가운데 크리스천으로 살다가 어렵고 억울한 일을 당하였을 때, 우리에게는 무엇이 진실인지를 드러내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지혜는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순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23절을 제가 읽겠습니다. 

“이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세상 속에서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면서 순결을 지켜야 합니다. 인내해야 합니다. 이 동네 저 동네로 피하면서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려는 노력을 쉬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인내가 마지막에 다다르기 전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인내하지만, 그 인내에는 한계가 있어요. 그러나 그 한계에 다다르기 전에 주님께서 오셔서 우리의 인내를 붙잡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우리는 오늘 하루가 지나면, 또 다시 세상 속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 속에서 크리스천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마치 이리 떼 한가운데 던져진 한 마리 양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문화를 변혁하고, 기독교의 가치관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어려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나를 이 세상 한 복판에 던져 넣으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마지막 순간까지 세상 속에서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려는 소원을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지혜도 주시고 순결을 지킬 수 있는 인내도 허락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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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