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2020. 5. 24. 15:40

성경을 읽다 보면 어떤 말씀들은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적지 않게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 속에서 크리스천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하는 성경구절에도 이와 같은 경우를 찾아볼 수 있지요. 그 대표적인 예를 하나 소개하며 오늘의 설교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6장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베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고후 6:14-16) 여러분 이런 말씀을 들으면 믿지 않는 사람들과는 상종을 하지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5장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거든요. “내가 너희에게 쓴 편지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이나 속여 빼앗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면 너희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고전 5:9-10) 여러분, 그러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어떠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까? 도대체 어떤 것이 우리가 따라야 할 기준입니까? 

고린도후서의 세상 사람들과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는 말씀과 고린도전서의 세상의 죄악 된 사람들과 도무지 사귀지 말라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은 언뜻 상충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두 가지 말씀이 모두 참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크리스천은 고린도전서의 말씀과 같이 이 세상을 떠나 살 수 없는 한 세상의 사람들과 어울려 사귀며 살아야 합니다. 고린도전서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우리 크리스천이 이 세상 속에서 믿지 않는 사람들과 섞여 살아가는 가운데 나의 생각과 나의 말과 나의 행동이 하나님이 아닌 이 세상의 풍속을 따라갈 수 있다는 위험성은 날마다 경계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고린도후서의 말씀도 진리입니다. 

우리가 세상 속에서 크리스천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고린도전서의 말씀과 고린도후서의 말씀을 모두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두 가지의 말씀들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과 아름다운 관계를 맺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의 하나님 없는 생활 습관에 휩쓸리지 않도록 언제나 주의해야 합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지금까지의 교회 역사를 보면 이 둘 사이에 균형을 잡지 못한 경우가 너무도 많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 사도 바울은 분명히 죄를 범하고 온갖 악행을 행하는 세상 사람들과도 사귀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지만 세상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위해 세상과 등을 돌렸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그 대표적인 모습이 바로 수도원 전통입니다. 수도원 전통은 약 4세기경부터 시작되었으니 얼마나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까. 물론 수도원 운동들 가운데 세상 사람들과의 관계를 적절하게 균형감을 가지고 유지하였던 분들도 계시지만, 많은 경우,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세상으로부터 등을 돌린 시간들이 많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반면에, 고린도후서에서 사도 바울은 분명히 세상의 문화와 짝하여 동일한 멍에를 매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였는데, 세상 속에 너무 깊이 들어간 나머지 그 안에서 크리스천으로서의 순수성을 잃어버린 경우도 참으로 많았습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중세 가톨릭교회가 아니겠습니까? 그들은 세상의 권력을 잡았고, 세상의 통치자들을 지배하였지만 세상으로부터 스스로의 믿음과 신념을 지키는 일에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어쩌면 우리 시대의 많은 크리스천들에게 나타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다시 반복하지만, 우리는 세상 속에서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세상 사람들로부터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매우 힘든 일이지만 세상 속에서 크리스천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 사이의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불화 

오늘 본문 역시, 언뜻 보면 다른 본문과 상충하는 듯 보입니다. 오늘 본문 34-36절입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그런데 에베소서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 2:14-18) 

이 짧은 구절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화평이시라고 선언합니다. 예수님께서 중간의 모든 막힌 담을 자신의 몸으로 허무셨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정반대로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화평을 주기 위함이 아니라 검을 주기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두 가지 말씀을 어떻게 해결하겠습니까? 여러분은 어떠한 말씀을 따르겠어요? 만일 여러분이 저에게 동일한 질문을 물어 오신다면 저의 대답은 무엇일까요? 이번에도 저의 대답은 두 구절의 말씀이 모두 우리가 믿고 따라야 할 진리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이 말씀은 서로 상충하는 듯 보이지만 우리는 이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며 두 구절 모두로부터 귀한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화평이 되십니다. 옳습니다. 진리입니다. 복음은 복음 안에서 하나 됨을 이루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복음에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데, 곧 우리가 복음 안에서 모든 막힌 담이 허물어지고 하나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네, 에베소서의 이 말씀은 귀한 진리입니다. 복음 안에서 하나가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 아름다운 화해의 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때로는 복음이 들어가는 바로 그 자리에 복음으로 말미암는 불화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자녀들이 먼저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출석하면서 부모님으로부터 심한 반대를 받았다는 간증을 여러분 많이 들어보시지 않았습니까? 특별히 우리나라에 복음이 처음 들어올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가족들에게 심한 박해를 받았어요. 오늘 본문의 말씀도 사실입니다. 진리예요. 예수님의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때로는 화평이 깨어지고 불화하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세상 속에서 크리스천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수님께서 우리의 화평이 되신다는 말씀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화평이 깨어지고 불화하게 된다는 이 두 가지 말씀을 모두 받아들이는 균형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화평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사람들과 화목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만일 누군가를 향해 미움의 감정이 있다면 회개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의 화평이 되신다는 사실을 믿는 우리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아울러, 우리는 예수님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화평이 깨어지고 불화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누간가와 갈등이 생기고, 누군가로부터 미움을 받을지라도 그것을 마음으로부터 받아 인내할 수 있는 힘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분명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화평이 아니라 갈등과 분열과 다툼이 일어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크리스천이 복음을 마음에 세기고 세상 속으로 나아갈 때 우리 주변에는 화평이 아니라 갈등과 불화와 다툼이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그 누구와 화평하는 것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37절부터 39절입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모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손양원 목사님의 사랑과 정의 

손양원 목사님은 일반적으로 ‘사랑의 원자탄’으로 잘 알려진 분이시지요. 1948년 당시는 한한도 전체가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어 극심하게 대립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두 아들은 손 목사님의 신앙을 이어받아 기독교 정신이 투철한 분들이었고, 이들은 결국 당시 좌익 청년들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1948년 10월 21일 손양원 목사님의 두 아들은 강철민이라는 청년의 주도로 결국 죽음을 당하고 말지요. 그런데 손양원 목사님은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강철민을 양자로 받아들였다는 것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우리 시대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신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마음 가운데 충만하였던 손양원 목사님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셨습니다. 모든 막힌 담이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에베소서 2장의 말씀과 언뜻 보기에 상충되는 것처럼 보이는 오늘 본문을 생각하면 저는 언제나 손양원 목사님이 떠오릅니다. 일제말기 일본 제국주의는 우리 민족에게 신사 참배를 강요하였습니다. 당시 많은 분들이 어쩔 수 없이 신사에 절을 하였지요. 그러나 마지막 순간까지 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그래서 감옥에서 해방을 맞이하신 분들이 계셨습니다. 그들을 이른바 ‘옥중 성도’라고 부르는데 손양원 목사님께서 바로 그와 같은 분이셨습니다. 

1940년 9월 25일 당시 애양원교회에서 목회를 하시던 손양원 목사님을 잡아가기 위해 형사 두 명이 손 목사님의 집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이날부터 해방을 맞이할 때까지 손 목사님은 감옥에 갇혀있었지요. 그런데 1940년 9월 25일 손양원 목사님이 경찰에 의해 끌려가던 바로 그날, 손양원 목사님의 아버지가 손 목사님의 뒷가에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애비야, 누가복음 9장 62절과 마태복음 10장 37절에서 39절까지를 마음에 깊이 새기래이.” [각주:1]
 
마태복음 10장 37절부터 39절까지가 어떠한 말씀인가요? 오늘 본문이지요.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당시 손 목사님이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감옥에 들어가고, 그곳에서 종신형을 선고받고, 실제로 해방을 맞이하기까지 5년여의 세월 동안 투옥되어 있다는 것은 그의 가족들로서는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감옥에 투옥되자, 그분이 목회하셨던 순천 애양원의 나병환자들이 흩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손 목사님의 자녀들은 고아원에 가서 생활하게 되요. 그 과정에서 손 목사님의 사모님이 겪었을 삶의 애환은 얼마나 큰 것이었겠습니까?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렇게 질문합니다. 그 시대 자신의 믿음을 지지키 위해 감옥에 갇히고 심지어 순교하신 분들의 믿음은 위대한 것이었지만, 그분들이 자신의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교회와 가정에 큰 아픔과 시련을 주는 것은 타당한가? 그런데 여러분,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오늘 본문이었던 것입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모시며 공양해야 한다는 사실이 눈앞에 현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나 어머니를 예수님보다 더 사랑할 수는 없었습니다. 부모로서 가장으로서 자녀들을 돌보는 책임이 있지요. 그러나 아들이나 딸을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님에게 합당하지 않다는 이 말씀에 근거하여, 수많은 순교자들이 투옥과 순교의 길을 선택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손양원 목사님에게는 에베소서 2장의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화평이 되신다는 말씀과 오늘 본문의 말씀, 곧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화평이 아닌 검을 주신다는 말씀이 모두 너무도 중요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크리스천의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들 

세상 속에서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가장 큰 능력은 우리가 진리를 따를 때 발휘하게 됩니다. 진리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옳고 그름을 분명하게 구별하고, 정확하게 이야기하고, 나아가 옳은 것을 당당히 행하는 것, 이것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크리스천의 능력입니다. 때로는 크리스천으로 살아가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 불화할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가족들과 관계가 소원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사랑하는 결단이 없이는 이 세상 속에서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주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않다’ 

오늘 본문은 분명 부담스러운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와 같이 주님의 길을 따라가는 사람이 얻게 되는 놀라운 상이 있습니다. 본문 41절을 보십시오.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사람은 선지자의 상을 받습니다. 선지자에게 상이 있는 것은 물론이요, 그를 영접한 사람에게도 예수님은 상을 약속하십니다. 또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사람에게도 의인의 상이 있습니다. 의인에게 상이 있는 것은 물론이요, 그를 영접한 사람에게도 예수님은 상을 약속하십니다. 여기서 영접한다는 것이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42절을 보면 그저 냉수 한 그릇 대접하면 그에게 상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옳지 않은지 판단합니다. 그리고 옳은 것을 행하고 옳지 않은 것을 거절합니다. 비록 그 선택이 우리에게 엄청난 피해와 손해를 가져다준다 할지라도, 때로는 그 선택이 우리의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를 소원하게 만든다 할지라도 우리는 진리를 위해 살아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그리고 예수님을 위해 손해를 본다면, 하나님께서 그 이상으로 풍성하게 채워주시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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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손동희, 『나의 아버지 손양원 목사』(서울: 아가페, 1994), 51.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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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