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강해2020. 5. 23.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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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기야 왕이 남 유다를 다스리던 때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북쪽에서 내려온 앗수르 제국의 군대는 이미 북이스라엘을 멸망시켰습니다. 그리고 그 기세를 몰아 더 남쪽으로 내려와 남유다의 수도 예루살렘을 완전히 포위하였지요. 남 유다의 수도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고 있었으니 이미 유다의 다른 성들은 모두 앗수르 군대의 손에 넘어간 상태였습니다. 당시 앗수르 제국의 군대를 지휘하고 있었던 랍사게 장군은 18만 5천 명이라는 대군을 이끌고 있었기에 예루살렘 성을 포위만 하여도 예루살렘 성은 머지않아 그들의 손에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랍사게 장군이 그와 같은 전략을 세운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은 높은 산 위에 세워진 도시로 천연 요새입니다. 아무리 거대한 대군을 이끌고 공격을 하더라도 쉽게 무너트리기가 어려웠습니다. 오죽하면 여호수아 시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의 대부분을 점령하였지만, 가나안 땅 한 중심에 위치하였던 예루살렘은 이후 다윗이라는 천재적인 군사 전략가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점령하지 못했겠습니까? 그토록 예루살렘 성은 군대의 힘만을 가지고는 점령하기 매우 어려운 지역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예루살렘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식수를 얻을 수 있는 강이나 하천이 예루살렘에는 하나도 없다는 점입니다. 특히 예루살렘은 건기에 해당하는 4월부터 10월까지는 비가 한 방울도 안 내린다고 해요. 그러므로 예루살렘 사람들은 식수를 비롯한 생활용수를 얻기 위해 예루살렘 성을 나와서 기드론 골짜기에 있는 기혼 샘까지 나와야 했습니다. 그러니 앗수르의 랍사게 장군은 예루살렘 성벽을 18만 5천 명의 군인들로 물 샐 틈 없이 포위만 하고 있으면 예루살렘 사람들은 생명에 꼭 필요한 식수를 얻기 위해 기혼 샘까지 나올 수 없으니 남 유다는 곧 앗수르 제국에 항복을 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랍사게 장군의 이 전략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습니다. 물론, 예루살렘에는 식수를 공급할 수 있는 강이나 하천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 왕은 예루살렘 성벽 바깥 곧 기혼샘으로부터 지하를 통해 예루살렘 안으로 물길이 들어올 수 있도록 터널을 만들었고, 그 끝에는 조그마한 연못을 만들어서 물이 고이게 하였습니다. 그 연못의 이름이 바로 실로암입니다. 사람들은 그 터널을 히스기야 왕이 만들었기에 ‘히스기야 터널’이라고 불렀고 유사시에 히스기야 터널이 시작되는 기혼 샘의 그 입구를 적군이 발견하지 못하도록 잘 막아놓기만 하면 예루살렘 성벽을 제 아무리 18만 5천 명의 대군이 층층이 에워싼다 하더라도 예루살렘 안에는 생수가 흘러 들어와 실로암에 모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수많은 적군의 위협 속에서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백성들을 지켜주었던 것은 튼튼한 성벽이나 강력한 군대라기보다는 기혼샘으로부터 히스기야 터널을 따라 실로암 연못에 모이는 한 줄기의 생명수였습니다.

여러분은 긴박한 위기의 순간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을 지켜주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위기의 순간 우리에게 생명의 끈이 되어주는 것은 거대한 성벽이 아닙니다. 크고 화려한 집을 장만하고, 남부럽지 않은 사회적 지위를 얻고, 사람들이 부러워할만한 성공을 이룬다고, 그것이 긴박한 위기의 순간 우리와 우리 가정을 지켜주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절박한 위기의 순간 우리 자신과 우리 가정을 지켜주는 것은 우리의 심령 안으로 흘러 들어오는 조그마한 물줄기, 하나님의 은혜의 샘으로부터 시작하여 우리 개인의 심령과 우리 가정에 머물러 고이게 되는 ‘실로암 연못.’ 바로 그 은혜의 샘물이 긴박한 위기의 순간 우리를 지켜 주는 생명의 끈이 되는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하니하리로다

앗수르의 군대는 예루살렘 성을 겹겹이 에워싸기만 하면 유대인들이 스스로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기혼 샘으로부터 시작하여 히스기야 터널을 지나 실로암에 머무르는 은혜의 샘물이 솟아나고 있었습니다. 앗수르 군대의 침공을 받으면서도 예루살렘 성 안에서 생존하였던 유대인들은 그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고 그들의 믿음의 고백을 노래로 만들어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1절)

오늘 본문 시편 46편 1절의 말씀이지요. 네,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 시편 46편의 역사적인 배경이 히스기야 시대의 바로 그 사건이라는 데 많은 성서학자들이 의견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자, 일촉즉발의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그들의 피난처가 되어 주시고 그들의 심장 깊은 곳에 새영의 샘이 솟아나게 하시니 온 땅을 뒤덮을 듯한 앗수르의 군대 18만 5천 명이 예루살렘 성을 겹겹이 에워싸더라도 그들의 생명은 안전하였습니다. 바로 이러한 경험으로 말미암아 유대인들은 더욱 놀라운 믿음의 고백을 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 2절부터 보십시오.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3절입니다.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땅이 움직입니다. 지진이지요. 산이 흔들려 바닷물에 빠집니다. 거대한 홍수입니다. 바닷물이 솟아나 뛰놀며 산을 덮칩니다. 쓰나미 현상이지요. 그러므로 2절과 3절이 묘사하는 위기의 장면은 문자 그대로 자연재해를 의미할 수도 있고, 우리의 인생에 찾아오는 거대한 재난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마치 18만 5천 명이라는 쓰나미와 같은 적군이 하나님의 백성이 모여 있는 예루살렘을 향해 돌진해오는 경우처럼 말이지요. 그러나 그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으로부터 흘러 들어오는 은혜의 샘을 마셨던 유대인들은 3절 뒷부분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교회 역사상 시편 46편을 무척 사랑했던 사람으로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를 꼽습니다. 마틴 루터는 종교개혁을 앞장서면서 지진과 같은, 홍수와 같은, 쓰나미와 같은 위험과 시험이 찾아와 그 마음에 두려움이 생길 때면 어김없이 그의 동역자였던 필립 멜란히톤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필립, 우리가 시편 46편을 노래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거의 습관적으로 시편 46편을 노래했던 것입니다. 그토록 시편 46편을 사랑하며 노래하였던 마틴 루터는 이 시편에 근거하여 지금까지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즐겨 부르는 찬송을 작곡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찬송가 585장입니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
큰 환난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

온 땅을 뒤덮는 쓰나미와 같은 앗수르의 군대를 바라보았던 히스기야의 마음에 왜 두려움이 없었겠습니까? 종교개혁의 깃발을 높이 들어 올렸지만 여전히 강력한 공권력과 무력을 휘두르는 로마가톨릭교회의 위협 속에서 마틴 루터의 마음에도 왜 두려움이 없었겠습니까? 이후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신앙을 지키며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며 지진과 홍수와 쓰나미와 같은 위험을 당할 때 그들의 마음에 왜 두려움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두려움이 그들의 마음에 엄습해 올 때마다 믿음의 사람들은 입술을 열어 지금도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선포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난 큰 도움이시라”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 큰 환난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하나님은 큰 환난 가운데 우리에게 피난처가 되십니다. 그리하여 수많은 적군의 쓰나미, 두려움의 쓰나미, 재앙의 쓰나미가 우리를 찾아와도 하나님의 은혜의 샘으로부터 시작하여 생명의 물줄기가 흘러 우리의 심령에 고이기만 한다면 우리는 그 어떠한 위기의 순간도 헤쳐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위기의 순간을 맞이하였을 때 피난처 되시는 주님의 도움을 받기 위하여, 우리의 힘이 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기 위하여 우리는 무엇을 행해야 할까요? 과연 위기의 순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본문 시편 46편에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명령, 특별히 위기의 순간에 봉착한 인간들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분명한 명령이 딱 하나가 등장합니다. 시편 46편은 첫 구절부터 마지막 절까지 하나님을 향한 인간들의 찬양이지만, 유일하게 딱 한 구절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거든요. 그리고 바로 그 구절 안에 위기를 맞이한 우리 인간들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이 들어 있습니다. 자,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을 찾아보며 오늘 본문 10절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10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르시기를” 네, 하나님께서 이르시는 말씀입니다. 10절을 계속 보십시오.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네, 이것입니다. 위기에 처한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요구사항은 단 한 가지입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움직이지 말고 말하지도 말고 그저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입니다. 여기에 ‘가만히 있다’는 히브리어 표현은 군대식 명령입니다. 굳이 우리말로 옮긴다면 ‘차렷!’ 정도가 됩니다. 위기에 처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명령하시는 하나님의 요구사항이 무엇이라고요? 그저 가만히 있어서, 그저 차려 자세로, 그저 열중쉬어 자세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 하나님께서 친히 하나님이 되시는 바로 그 장면을 주목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본문 마지막 11절에 등장하는 성경의 인물이 참으로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11절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여기에 야곱이라는 이름이 등장합니다. 여러분, 믿음의 성숙도를 생각한다면 ‘야곱의 하나님’보다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혹은 ‘요셉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요? 혹은 역사적 배경을 따라 ‘히스기야의 하나님’ 혹은 ‘여호사밧의 하나님’이라고 하면 더 좋을 것 같지 않으세요? 그런데 시편 46편은 굳이 ‘야곱의 하나님께서 우리의 피난처가 되신다’ 선언하며 시편을 마무리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에 기록된 야곱이라는 이름에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어요. 

자, 야곱은 젊은 시절 자신의 손을 부지런히 움직였던 사람입니다. 창세기의 표현을 그대로 옮긴다면 “낮에는 더위와 밤에는 추위를 무릅쓰고 눈 붙일 겨를 도 없이”(창 31:40) 일했던 사람이 야곱입니다. 그렇게 악착같이 열두명의 아들을 낳았고, 그렇게 악착같이 큰 재물을 모았습니다. 그런데 젊은 시절 자신의 손으로 최선을 다하여 아들을 낳고 재물을 모아보았지만 자신이 가장 사랑하던 아들 요셉은 들에서 짐승에게 찢겨 죽었다는 소식이 들어오고, 자신의 모든 재물은 애굽에 임한 7년 흉년 가운데 채 1~2년도 버티지 못하고 모두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젊은 시절의 모든 노력과 수고가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인생의 반전은 여기서부터입니다. 그렇게 지칠 줄 몰랐던 야곱이, 세월 앞에 장사가 없다고, 노년이 되어 이제는 자신의 두 팔에 다 빠져버리자, 그는 모든 것을 멈출 수밖에 없었어요. 그저 차려, 열중쉬어 자세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기대하며 바라볼 수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렇게 두 팔에 힘이 모두 빠져버린 야곱, 그리하여 이제는 그저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던 야곱에게 죽은 줄만 알았던 아들 요셉이 살아 있다고, 그것도 애굽의 국무 총리가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그리고 자신의 두 손에 힘이 모두 빠져 그저 열중 쉬어 자세로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바라보자 야곱의 자손이 애굽에서 번성하는 그 풍성한 은혜가 그의 삶 속에 펼쳐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 모든 장면을 기억하는 유대인들은 시편 46편을 마무리하며 아브라함이나 요셉이나 히스기야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 야곱의 하나님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그러므로 여러분, 위기의 순간을 맞이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의 손을 부지런히 움직여 성벽을 쌓는 것이 아닙니다. 위기의 순간을 맞이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의 손으로 무기를 들고 적군을 향해 달려가는 것도 아닙니다. 위기의 순간을 맞이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나에게 도움을 줄 만한 사람을 찾아다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신앙의 절정, 곧 신앙의 하이라이트는 달려가는 것도 아니요, 힘껏 소리치는 것도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그 결정적인 순간, 그저 가만히 있어, 그저 차려 자세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잠잠히 바라보는 믿음입니다. 특별히 여러분에게 위기가 찾아오셨습니까? 여러분의 능력을 뛰어넘는 쓰나미와 같은 문제를 만나셨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은 여러분의 손을 멈추어야 할 때입니다. 그저 가만히 있어, 그저 차려 자세로 하나님을 주목하시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지켜보십시오. 

만군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어 주십니다. 


목마른 자들은 내게로 와서 마시라

히스기야 시대 지하로 연결되어 있는 조그마한 생명의 물줄기를 통해 예루살렘 백성들은 생존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앗수르 제국의 군대 18만 5천 명을 하룻밤에 멸하시는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펼쳐 주셨고, 유대인들은 앗수르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 모든 과정을 잊을 수 없었던 유대인들은 장막절의 마지막 날 특별한 행사를 진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장막절의 마지막 날이 되면 기혼 샘으로부터 시작하여 히스기야 터널을 지나 실로암 연못에 모인 물을 금항아리에 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을 선두로 하여 물이 가득 찬 금항아리를 들고 예루살렘 성전으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갑니다. 대제사장을 선두로 한 그 대열이 예루살렘 성전에 도착하면 악기 소기가 들려오면서 시편을 노래합니다. “할렐루야, 여호와의 종들아 찬양하라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 그렇게 시작된 시편의 찬양이 모두 마치면 그 자리에 있던 모든 남성들은 일제히 소리칩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X3) 이렇게 세 번 큰 소리로 외칠 때 대제사장은 실로암 연못에서 가져온 물 항아리를 성전 제단에 쏟아부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 시대 장막절의 마지막 날 있었던 의식입니다.  

이와 같은 장막절 행사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오래전 히스기야 시대에 임했던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기억하기 위함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매년 동일하게 진행하는 장막절 행사에 참여하는 유대인의 마음에는 또 하나의 생각이 교차하지 않았을까요? 앗수르의 군대는 오래전 물러갔지만 여전히 예루살렘은 로마라는 새로운 이방 제국의 통치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매년 장막절을 보내며 실로암의 물을 성전 제단에 쏟아붓는 행사에 참여하는 유대인의 마음에는 어제의 은혜가 아닌 오늘의 은혜를 향한 갈망. 어제의 구원이 아닌 오늘의 구원을 향한 갈망. 어제의 역사가 아닌 지금도 자신의 눈 앞에 생생하게 펼치지는 오늘의 역사에 대한 갈망. 그것이 유대인의 마음에 가득했겠지요. 

그렇게 또 한 번의 장막절 행사가 그저 습관적으로 마무리되고 있는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비로소 예루살렘 성전 한 중앙에 일어서십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외치십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요 7:37-38)

절박한 위기의 순간에 한 줄기 생명의 강줄기를 흘려보내 주셨던 하나님의 사랑을 과거에 체험하였지만 어느덧 그 모든 경험은 아득한 오래 전의 기억이 되어버리지 않으셨습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제의 은혜가 아니라 오늘의 은혜이지만 지금은 하나님의 역사가 잘 보이지 않아 가슴 답답해하는 것이 오늘날 이 땅의 교회가 처한 현실은 아닙니까? 우리는 어제의 구원이 아니라 오늘의 구원을 갈망하며 새벽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우리의 손을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지만 오늘 우리에게 흘려보내시는 생명의 강줄기는 쉽게 찾아볼 수가 없기에 다시금 두려움이 엄습하고, 다시금 낙심하는 마음으로 한 해를 떠나보낼 준비를 하고 계시지는 않으십니까? 

우리가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 그 분만이 우리의 소망이라고 믿는다면, 우리가 참으로 여호와 하나님만이 우리의 피난처가 되신다고 믿는다면, 우리가 참으로 야곱의 하나님께서 우리의 힘이 되신다고 믿는다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는 여러분의 분주한 손을 멈추고 가만히 있어 우리 주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바라보십시오. 

우리 주님 예수께서 약속하신 생수의 강이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여러분 모두에게 반드시 흘러넘칠 것입니다. 

만군의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여러분의 피난처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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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Dr. Hanjin Lee 이한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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