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과 주일에 대한 설교, 그 두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 설교의 주제를 한 문장으로 말씀드리면, “참된 안식은, 참된 쉼은 안식일이나 주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입니다. 바쁘고 지친 일상 속에서 참된 안식이나 참된 쉼은 안식일이나 주일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포함하여, 마태복음 12장 1절부터 21절까지, 마태복음은 안식일이라는 주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안식일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마태복음 12장 1절부터 21절까지의 말씀 바로 앞에 등장하는 내용은 무엇일까요? 마태복음 11장 마지막에서 예수님은 위대한 초청의 말씀을 선언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님은 우리의 일상이 매우 수고롭다는 사실을 아세요. 그리고 우리의 일상 속에서 매우 무거운 짐을 어깨에 메고 있다는 사실을 아세요. 그리고 선언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이여, 예수님께 나아오라. 그러면 예수님께서 쉼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참된 쉼을 주시겠다고 우리를 초대하신 그 말씀 바로 뒤에 등장하는 주제가 바로 안식일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 마태가 그의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그저 아무런 생각 없이 이와 같은 배열을 했겠습니까? 여기에는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중요한 교훈이 담겨 있어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참된 안식과 참된 쉼은 바로 안식일 혹은 주일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주시는 참된 쉼은 안식일 혹은 주일에 시작됩니다. 주일에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성도들을 만나고, 여러 가지로 봉사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쉼을 누리지 못한다면, 여러분이 하루 종일 집에 누워서 잠을 자더라도 여러분에게는 언제나 잠이 부족하게 될 것이고, 하루 종일 쉰다 할지라도 여러분에게는 쉼이 부족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참된 쉼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여러분의 것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신다면, 여러분 먼저 예수님의 이 약속은 안식일로부터, 바로 주일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안식일에 쉼이 없는 사람들
오늘 본문에는 안식일에 회당에 있으면서도 참된 쉼이 없는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로 손이 마르는 병에 걸린 사람이지요. 오늘 본문 마태복음 12장 9절과 10절을 우리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거기에서 떠나 그들의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물어 이르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대화하시던 바로 장소를 떠나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마태는 재미있는 표현을 하나 사용합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셨는데, ‘회당’이라는 단어 앞에 어떠한 단어가 붙어 있습니까? 바로 ‘그들의’ 회당입니다. 아니 회당이면 회당이지 그들의 회당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왜 마태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회당에 들어가셨다고 기록하였을까요?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의 규례를 자신의 생명처럼 지켰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을 잘 지키기 위해 다양한 규정을 지어 놓고는 그것들을 다 지켰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토록 안식일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 안식일을 잘 지킨다고 자타가 공인하던 그들의 회당에는 한쪽 손이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제 아무리 안식일에 대해 강조하지만, 그들 곁에 있던 사람들은 참된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한 쪽 손이 마른 이 사람은 벽돌공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손이 마르니 어떻게 자신의 일을 하겠어요? 그래서 자신의 모든 일을 내려놓고 사람들에게 구걸하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전설은 사실일 가능성이 매우 낮습니다. 그러나 손 마른 사람이 겪었을 아픔을 이해하는 데는 조금이라나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그가 어떠한 직업을 가지고 있었든 상관없이 손을 움직이지 못하니 아무 일도 못하고 있었겠죠. 바리새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안식일에 아무런 일을 안 합니다. 어떠한 일도 할 수가 없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주장하는 안식일 규례는 어기지 않아요.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가르치는 데로 안식일 규례를 잘 지키면 뭐합니까? 안식일은 지키지만 그의 마음에는 안식이 없는데요. 우리가 때로는 몸이 너무 힘들어 삶이 지칠 때도 있지만, 대부분 우리의 삶이 버겁고 힘이 든 이유는 우리의 마음이 피곤하기 때문이 아닌가요? 지금 한쪽 손이 마른 이 사람은 아무런 일을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외향적으로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는 쉼이 없고, 그의 삶은 곤고하기만 합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가 한 가지 눈 여겨 보아야 할 사항은 바리새인들의 질문입니다. 10절에 바리새인들이 무엇이라고 질문합니까?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바리새인들은 언제나 무엇을 질문합니까?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먹는 것이 옳은가?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옳은가? 안식일에 어떠한 일을 하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옳지 않은가를 질문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질문에는 보다 중요하고, 보다 핵심적인 질문이 빠졌습니다. 그것은 ‘안식일을 보내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안식을 누리고 있는가’입니다.
한국의 많은 크리스천들이 주일을 지키고,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지만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손 마른 사람과 같이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참된 안식과 참된 쉼으로의 초대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주일이 되면 예배에 참여하지요, 주일이 되면 성도들을 만나죠. 주일이 되면 교회의 다양한 행사에 참여를 하죠. 그러나 그 마음에 우리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없고, 주님께서 주시는 쉼을 누리지 못하고, 그리하여 다시금 시작되는 한 주를 힘 있게 살아갈 힘을 공급받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그들의 회당에 있던’ 한쪽 손이 마른 바로 그 사람입니다.
참된 쉼을 주시는 예수님
회당 안에 있었던 사람, 그리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십계명의 말씀을 어쩔 수 없이 지킬 수 밖에 없었던 사람, 그렇게 안식일을 지키지만 여전히 그의 마음에는 쉼이 없었던 바로 그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찾아가십니다. 그리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시죠. 오늘 본문 11절과 12절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예수님께서는 먼저 바리새인들에게 질문하십니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우리는 양을 키우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 질문이 오늘 우리에게는 설득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질문을 이렇게 바꾸어보면 어떨까요? 여러분 중에 누군가가 집을 팔기 위해 부동산에 내놓았습니다. 부동산 시장이 얼마나 얼어붙었는지 그 누구도 사겠다는 사람이 나오지 않아요. 그 집을 사겠다는 사람이 있어도 값을 형편없이 부릅니다. 그런데 토요일 저녁 부동산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그 집을 제값에 사겠다는 사람이 나왔다는 거지요. 그런데 그 사람이 다음날 출국을 해서 주일 오전 밖에는 계약할 시간이 없다는 거예요. 여러분 같으면 주일 오전 예배 빠지고 부동산에 가서 도장을 찍겠습니까? 아니면 계약을 포기하고 주일 예배에 참여하겠습니까?
사람의 마음이 자신의 재산에 대해서 얼마나 민감한지 아시잖아요. 바리새인에게 양 한 마리는 사랑스러운 애완동물이 아닙니다. 양한 마리는 그 자체가 재산입니다. 그런데 그 재산을 잃어버릴 상황에서는 안식일 제도고 뭐고 상관이 없어요. 당장 가서 자기 재산을 챙기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그러한 행동이 잘못됐다는 건가요? 그렇지 않아요. 예수님은 그러한 행동을 정죄하려고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말씀의 핵심은 바로 그 다음 구절입니다. 11절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질문하셨죠?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그다음 12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지금 예수님의 이 말씀은 사람의 마음을 표현한 게 아닙니다. 바로 예수님의 마음,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어요.
사람은 자신의 재산, 자신의 재물을 지키는 일에 매우 민감합니다. 그러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관심으로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 쉼을 주기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이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의 애뜻한 심정이 느껴지세요? 안식일을 맞이하고 있지만, 손이 오그라들어서 안식일의 규례와 같이 아무런 일을 할 수가 없지만, 그 마음에는 세상의 모든 시름과 고난이 가득한 그 한 사람을 바라보며 예수님께서 탄식하십니다. ‘이 한 사람이 양 한 마리와 비교할 수 없도록 귀하지 않느냐?’
오늘 예배를 드리는 모든 분들이 예수님의 이 타는 듯한 음성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세상 속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온갖 시름과 고난이 가득한 마음으로 교회를 찾았는데, 교회 안에도 여전히 쉼이 없고, 교회 안에도 여전히 위로가 없고, 교회 안에도 여전히 평안을 발견하지 못하는 바로 여러분에게 예수님께서 ‘너희 한 사람이 얼마나 귀하냐’고 말씀하시며 여러분을 찾아가십니다.
손 마른 사람의 순종
예수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참된 쉼을 주십니다. 그의 손을 고쳐주시는 거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의 손을 ‘말씀으로’ 고쳐주십니다. 오늘 본문 13절을 우리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예수님께서 손이 마른 사람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손을 내밀라”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말 번역은 그 의미를 충분히 표현하지 못하는 면이 있어요. 예수님의 말씀, 곧 ‘손을 내밀라’는 표현의 원어적 의미는 ‘손을 펼친다’는 의미가 강합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의 명령은 손을 펼치면서 내밀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손이 마르는 병에 걸린 사람입니다. 이 부분도 원어의 의미를 충분히 살리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손이 말랐다는 단어의 원어적인 의미는 손이 시들어서 – 마치 꽃이 시들 듯이 - 오그라들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저에게 손을 내밀어 펼쳐보라고 명령하시면 그것은 순종하기 매우 쉬운 명령입니다. 그러나 손이 말라 오그라든 사람에게 손을 펼쳐 내보이라는 명령은 순종할 수가 없는 말씀이죠.
한 번은 예수님께 몇몇의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메고 왔습니다. 몸에 중풍이 와서 몸을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어요. 그러니 그의 형편을 아는 사람들이 침상에 누인 채로 메어서 예수님께 데려온 거예요.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그 중풍병자를 말씀으로 고치시는데, 그 환자에게 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기억나십니까? 마태복음 9장에서 예수님께서 중풍병 환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너의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마 9:6) 몸에 풍이 와서 조금도 못 움직이는 사람에게 불가능한 바로 그 일을 명령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여러분이 처해있는 바쁜 일상 속에서 마음에 쉼을 얻는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교회를 다니고 신앙생활을 하는 크리스천은 세상 사람들보다 더 바쁜 거 같아요. 세상 사람들은 그래도 토요일이나 일요일이 되면 등산이라도 가고 쉬면서 시간을 보내잖아요. 그런데 우리 크리스천은 월요일부터 금요일, 혹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열심히 일했는데 주일이 되어 또다시 아침 일찍부터 교회를 가야 해요. 이런 모습을 보면 주일에 쉼을 얻고 휴식을 얻는다는 것이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님의 말씀을 믿으십시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초대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안식일에 회당에 있었지만, 여전히 쉼을 누리지 못하던 가련한 한 사람에게 참된 쉼을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그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주일에 쉼을 얻으십시오. 쉼을 누리세요. 주일 아침 일찍부터 교회에 나오는 것이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참된 쉼을 주십니다. 예배드리는 것이 쉼이 되고요. 말씀을 듣는 것이 쉼이 되고요. 교인들을 만나 교제하는 것이 쉼이 되고, 심지어 교회 안에서 봉사하는 것이 쉼이 됩니다. 그 놀라운 쉼의 비밀, 우리에게 쉼과 휴식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충분히 받아 누리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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