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강해2020. 6. 7.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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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안산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섬기는 목사님들이나 기독교 단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박천응 목사님이 대표로 있는 안산이주민센터입니다. 그런데 안산이주민센터는 매년 성탄절을 맞이하면 한 가지 특이한 행사를 진행합니다. 그곳에 거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과 함께 거리 구석구석을 다니며 버려진 플라스틱 PT병을 줍는 것입니다. 그렇게 수거한 PT병을 깨끗이 세척하여 버려진 PT병으로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드는 것이지요. 
이러한 행사의 의미는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버려진 PT병이라 할지라도, 그래서 사람들은 더 이상 버려진 빈병 하나에 그 어떠한 가치도 두지 않는다 하더라도, 누군가 관심을 가지고 깨끗하게 세척하고 씻어주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고 찬양하는 아름다운 성탄 장식이 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버려진 플라스틱 PT병과 같이, 사람들이 보기에 이제는 끝이라고 더 이상 소망이 없다고, 그저 버릴 수 밖에 없다고 생각되는 절망의 순간이 우리의 삶 속에 때로는 찾아옵니다. 그러나 버려진 PT병을 이주노동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주어 깨끗이 세척하듯이, 우리에게 지극한 관심을 가져주시고 우리의 삶을 새롭게 씻어 정결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면 우리의 삶은 여전히 소망이 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인생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소망이 없다고 마침표를 찍는 그 순간,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마침표에 선을 하나 그어 잠시 쉬어가는 그러나 결코 멈추지 않는 쉼표로 고쳐주시는 것입니다. 


로암미를 암미로, 로루하마를 루하마로 

이와 같은 예는 성경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먼저, 구약 성경에서 그 하나의 예를 찾아본다면 호세아서를 꼽을 수 있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고멜이라는 여인으로부터 딸을 낳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호세아 선지자에게 딸의 이름을 지어줍니다. 곧, ‘로루하마’이지요. 그리고 그 이름의 뜻은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는 자”입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 호세아는 고멜로부터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번에도 아들의 이름을 지어줍니다. 이번에는 ‘로암미’입니다. 그리고 ‘로암미’는 ‘내 백성이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얼마나 하나님께 큰 죄를 범하였는지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에게 자녀들의 이름을 주시면서 ‘로암미,’ ‘나의 백성이 아니다’ ‘로루하마,’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한 자’라고 부르셨던 것이지요. 그리고 로암미, 로루하마라는 이름은 단지 호세아 선지자의 자녀들을 부르는 이름이 아니고 범죄 한 이스라엘 전체를 향한 하나님께서 불러주신 호칭이 되었습니다. 호세아의 아들에게 주어진 이름, 곧 로암미는 모든 이스라엘 남자들에 대한 이름이고, 호세아의 딸에게 주어진 이름, 곧 로루하마는 모든 이스라엘 여자들을 부르는 이름이었던 것이죠. 그러므로 하나님은 분명히 선언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 모두에게 너희는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도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도 받지 못한다는 선언입니다. 

여러분, 이쯤 되면 마침표입니다. 하나님의 판결은 명확합니다. 더 이상 소망이 없습니다. 그 누구도 돌이킬 수 없으며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는 끝이 난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마침표가 찍힌 거죠. 

그런데 여러분, 호세아 1장에서 로루하마, 로암미라는 이름을 지어주신 하나님께서 호세아 2장으로 접어들면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십니다.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는 자’라는 뜻의 로루하마에게 ‘로’자를 지우시는 거예요. 히브리어로 ‘로’가 ‘아니다’라는 뜻이거든요. 하나님께서 ‘로루하마’에서 ‘로’라는 글씨를 지워서 이제부터는 이스라엘 여성들에게 ‘루하마,’ 곧 ‘긍휼히 여김을 받는 자’라고 부르시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의미의 ‘로암미’에서 여전히 ‘아니다’라는 의미의 ‘로’자를 지우십니다. ‘로암미’에서 ‘로’자를 지워 ‘암미,’ 곧 ‘나의 백성이다’라는 이름으로 불러주시거든요. 

여러분, 이것이 오늘도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이 아닌가요? 

때로는 우리가 하나님께 범죄합니다. 때로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다 헤아리지 못하여 잘못된 선택을 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로암미,’ ‘나의 백성이 아니라’고 ‘로루하마,’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했다’고 하나님의 판단을 받을 때도 있어요. 그러면 사람들은 그것이 마침표라고 생각을 하죠. 더 이상 나아갈 수 없고, 거기에서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로암미,’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다)라는 자리에 있을 때 하나님은 우리의 이름에 붙어 있는 ‘로’ (아니다)라는 글씨를 지워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로루하마’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한 자)라는 자리에 있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다시금 거룩하고 성결하게 바꾸시어 우리의 이름에 있는 ‘로’ (아니다)라는 글씨를 지워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삶 속에 ‘로’ (아니다)라는 글씨가 그려져 있다면,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것 같고 하나님의 긍휼을 받지 못한 것 같이 느껴진다면, 여러분의 삶 속에 그려진 그 ‘로’ (아니다)라는 글씨를 가지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을 여전히 사랑하시며 여러분의 삶에 그려진 ‘로’ (아니다)라는 글씨를 지워 암미 –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루하마 – 긍휼히 여김을 받는 자라고 선언하여 주십니다. 


실패한 선교를 성공한 선교로 

오늘 본문 사도행전 17장 1절부터 9절의 말씀은 데살로니가에서 사도 바울이 행한 전도와 선교 활동을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아무리 보아도 데살로니가에서 행한 바울의 사역은 좋게 말해서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한 것처럼, 나쁘게 말해서 실패한 것처럼 보입니다. 오늘 본문이 묘사하는 사도 바울의 전도, 특별히 데살로니가에서의 전도 활동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몇 가지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머문 시간이 너무도 짧았다는 점입니다. 여러분, 바울과 실라 두 사람이 선교를 위해 데살로니가라는 지역에 머물렀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선교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요? 먼저 기도해야겠지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시는 데로 복음을 전해야겠지요. 전도를 통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생기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경도 가르치고 기도 생활도 가르치고 신앙생활 전반에 대한 교육과 양육의 과정이 있어야겠지요.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을 바른 신앙인으로 세워서 그들을 중심으로 교회의 기틀을 마련하겠지요. 그리고 교회가 지속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필요한 조직이나 재정이나 건물 등을 마련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모든 과정을 진행하려면 여러분은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세요? 한달? 일 년? 십 년? 선교사가 파송을 받아 선교지에 도착하면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곳에서 뼈를 묻을 각오를 하고 선교해야 한다. 그래서 선교사를 파송한 교회는 선교사에게 너무 빨리 선교의 열매를 요구해서는 안된다고. 선교는 시간이 걸리고 선교는 인내가 필요하다고 우리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만큼 선교 활동은 오랜 시간을 두고 지속해야 열매가 맺히는 법인 것이죠. 
그렇다면 오늘 본문이 묘사하는 사도 바울의 데살로니가 선교는 어떠했을까요? 바울과 실라는 데살로니가에 어느 정도의 기간 동안 머무르며 선교 활동을 했을까요? 10년? 5년? 아니면 1년? 그 대답이 오늘 본문 2절에 등장합니다.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2절) 

바울이 유대인의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안식일이 세번 돌아오는 동안 바울이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세 번 맞이했으니 아무리 길게 잡아도 한 달이 채 되지도 않는 기간 동안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반대하는 유대인들의 눈을 피해 사도 바울은 밤의 어두움을 틈타 데살로니가를 떠나 뵈뢰아로 도망을 갑니다. 사도행전 17장 10절입니다.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그들이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바울과 실라는 데살로니가에 더 머물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의 계획과는 상관없이 유대인의 반대가 너무도 커요. 그래서 도저히 그곳에 더 머물러서 선교활동을 할 수가 없는 것이죠. 그러니 3주, 혹은 한 달 동안 무슨 선교의 열매를 기대할 수 있겠어요? 

오늘 본문이 묘사하는 데살로니가에서 행한 사도 바울의 전도를 실패라고 평가할 수 있는 두번째 이유는 바울이 전한 복음을 믿는 사람보다 거부한 사람이 더욱 많았다는 점입니다. 바울이 유대인의 회당에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 4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나(4절) 

이 말씀에 의하면 바울의 전도를 듣고 복음을 받아들인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건한 헬라인’입니다. 유대인이 아니지요. 유대인은 아니지만 유대인들을 섬기는 하나님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 그래서 오늘 본문이 ‘경건한 헬라인’이라고 표현한 사람들이 주로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한 번 생각해보세요. 지금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고 있는 장소는 유대인의 회당입니다. ‘유대인의 회당’이에요. 그러면 안식일을 맞아서 유대인의 회당에 참여하여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는 사람들 중에는 유대인들이 더 많았을까요? 아니면 헬라인을 비롯한 이방인들이 더 많았을까요? 당연히 유대인들이 더 많지요. 대부분은 유대인이었어요. 그리고 그들 사이에 유대인들이 섬기는 하나님에 대해 궁금해하는 헬라인들이 조금 섞여 있었던 거지요. 그런데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은 ‘경건한 헬라인’들이 주로 믿고 유대인들은 거부합니다. 오늘 본문 5절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하게 하여 그들을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5절)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했더니 그 자리에 있는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복음을 거부하고 바울과 실라를 백성 앞에 데리고 가서 그들을 고발하려고 찾아나섭니다. 그저 유대인의 회당에 손님으로, 그저 궁금해서 그 자리를 찾아온 ‘경건한 헬라인’들만 바울이 전한 복음을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 장면을 놓고 사도 바울이 전도와 사도 바울의 선교를 성공적이었다고 말하기는 어렵겠지요. 

오늘 본문이 묘사하는 사도 바울의 데살로니가에서의 선교활동이 성공적이니 못하고 오히려 실패에 가깝게 보이는 이유, 그 세번째는 바울의 전도로 말미암아 기독교에 대해서, 특별히 예수님에 대해 오해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6-7절입니다. 

발견하지 못하매 야손과 몇 형제들을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야손이 그들을 맞아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 (6-7절)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거부했던 유대인들이 바울과 그 일행을 고발하면서 했던 이야기입니다. 6절 뒷부분을 다시 보십시오.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그러니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곧 기독교인들은 어디를 가든지 분란이 일어난다고 공격하는 것이죠. 7절입니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로마의 황제 가이사를 거역하고 로마 제국이라는 체제를 전복하려는 사람들이라고 공격했던 것입니다. 나아가 그러한 반란의 주동자가 누구라고 주장합니까? 7절 을 다시 보세요.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누구입니까?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예수님이 갑자가 체제를 전복하고 로마 황제의 자리에 앉으려는 정치적 반란꾼이 되었습니다. 

물론, 바울을 시기했던 유대인들의 이러한 공격은 터무니없는 중상모략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를 보십시오. 8절입니다. “무리와 읍장들이 이 말을 듣고 소동하여” 당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말을 믿어버리고 말았어요. 그러니 예수님에 대해서 기독교인들에게 대해서 커다란 오해가 쌓이고 있었던 것이죠. 바울과 실라가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했는데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거부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른 사람에게 예수님과 기독교인들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켰습니다. 그 결과 바울과 실라는 채 한 달도 그곳에 머무르지 못하고 한 밤의 어두움을 틈타 그곳을 빠져나와야 했습니다. 이 정도 되면 실패한 거 아닙니까? 이 정도 되면 데살로니가에서의 선교는 막을 내렸다고 마침표를 찍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런데 여러분, 참 놀랍지요. 하나님은 마침표를 쉼표로 고치십니다. 이쯤되면 데살로니가에서의 전도와 선교에 대해서는 마침표가 찍히고 신약성경에 더 이상 데살로니가라는 지역에 대한 언급이 없어야 할 것 같아요. 그런데 데살로니가라는 지역 이름으로 제목이 붙여 있는 성경 두 권을 알고 있습니다. 곧, 데살로니가전서와 데살로니가후서입니다. 그리고 데살로니가전후서를 보면 데살로니가 지역에서 행해진 선교 활동에 마침표가 찍혔을 때, 하나님께서 마침표를 쉼표로 고쳐 잠시 멈추기는 했지만 다시금 전도와 선교가 이루어지게 하셨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2절부터 보시겠습니까?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살전 1:2-3)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딱 세 주만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면서 데살로니가에 남겨진 성도들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에 감사의 기도가 넘쳐나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에게 있는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의 소식이 사도 바울에게 계속해서 들리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내려가서 데살로니가전서 1장 8절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살전 1:8)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딱 3주 머물렀어요. 그것도 거의 실패에 가까웠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그곳에 다시금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그 결과 데살로니가에 있는 성도들에게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시작되고, 8절이 말씀하는 바와 같이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곧 데살로니가 성도들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까지 복음이 전파되고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져나가고 있어요.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선언합니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그럼요. 사도 바울이 한 게 아니잖아요. 어떤 인간의 수고와 인간의 계획으로 된 것이 아니잖아요. 인간의 눈으로 볼 때는 실패였잖아요. 데살로니가 선교, 이제 끝이었잖아요. 마침표죠. 그런데 하나님은 그 마침표를 고쳐 쉼표로 만드셨고, 복음의 역사를 지속적으로 일으켜 주셨습니다. 

여러분, 실패했다고 생각되세요. 마치 모든 가능성이 닫혀버렸다고 생각하세요? 이제는 더 이상 해볼 수 없다고 마침표를 찍고 계신가요? 하나님은 마침표를 고쳐 쉼표로 바꾸시는 분이십니다. 쉼표이기에 때로는 머뭇거리기도 하고, 때로는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고, 때로는 나아가지 못하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이기에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있는 우리 인생은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바로 그 길을 향해 지속적으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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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