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후서 강해2022. 2. 6.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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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기독교 영성가 가운데 한 명인 게리 토마스라는 분은 『체리쉬』(Cherish)라는 책에서 ‘소중히 여김’이라는 개념을 집중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먼저 사랑과 소중히 여김은 구분합니다. 게리 토마스는 사랑하다와 소중히 여기다는 단어가 함께 등장하는 대표적인 예를 들어 설명하는데, 그것은 결혼식의 서약입니다. 수많은 부부가 이렇게 서약하지요.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기로 서약합니다.” 게리 토마스는 이 짧은 구절에서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는 모든 사람들이 이해하고 받아들이지만, 정작 그 사랑이 가정에서 표현되고 한 가정을 행복으로 이끌어가는 중요한 수단인 소중히 여긴다는 말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너무도 무관심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소중히 여긴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일까요? 소중히 여긴다는 말은 사람에게도 사용하지만, 물건이나 사물에 많이 사용하지요. 귀한 보석이 박힌 반지나 귀걸이를 신발장에 놓아두는 분이 계신가요? 우리는 귀한 보물일수록 방의 가장 깊은 곳에 잘 보관해 둡니다. 이것이 소중히 여기는 것이죠. 미술품을 수집하는 사람에게 렘브란트가 직접 그린 그림은 얼마나 소중할까요? 그는 그 그림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장 좋은 액자를 끼우고 최고의 조명이 비치는 장소에 그 그림을 걸어두겠지요. 이것이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게리 토마스는 사랑하는 것과 소중히 여기는 것을 애써 구분하면서 진실한 사랑은 언제나 소중히 여기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나게 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이 없으면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하여도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하였지요. 사랑이 없으면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산을 옮길 수 있는 믿음이 있어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비록 자신의 전 재산으로 구제하고 심지어 자신의 생명까지도 불사르게 내어 주어도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오직 진실한 사랑, 곧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사랑이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우리의 신앙생활에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그가 노래하는 진실한 사랑의 특징을 이야기하는데, 그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본문 4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이 짧은 문장에서 주어는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사랑이 오래 참는다는 말씀하지요. 그리고 이러한 형식은 더 길게 연장되어 4절부터 7절까지의 주어는 어디까지나 사랑입니다. 사랑이 주어이고, 사랑이 주체입니다. 그리고 우리말 번역에서는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4절부터 7절까지의 모든 문장은 동사로 되어 있어요. 사랑이 무엇을 행하는지, 사랑이 무엇을 행하지 않는지를 서술하고 있지요. 그러므로 오늘 본문을 통해 발견하는 진실한 사랑의 중요한 하나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진실한 사랑은 구체적인 행동으로 표현된다는 사실입니다. 


미술품 수집가가 렘브란트의 진품이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진품을 소중히 여기는 것처럼, 값진 보석이 박혀 있는 반지나 목걸이가 더욱 빛나도록 소중히 관리하는 것처럼 진실한 사랑은 그 대상을 소중히 여기는 구체적인 실천이 뒤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진실한 사랑이 새겨졌다면, 우리의 마음에는 진실한 사랑의 원형을 찾아보기 어렵지만 마치 도장을 찍듯 예수 그리스도의 진실한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새겨져 있다면, 이제 우리는 그 사랑의 마음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오늘의 짧은 본문에는 진실한 사랑의 특징, 곧 진실한 사랑이 행하는 것과 행하지 않는 것이 매우 많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 모든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실천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의 말씀 묵상을 통해 본문이 가르치는 진실한 사랑의 특징, 곧 우리가 실천해야 할 사랑의 덕목을 단 하나만이라도 실천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풍요로워질까요? 사랑은 소중히 여기는 구체적인 행위를 통해 우리의 삶과 가정과 인생을 새롭게 변화시킨다는데, 본문이 소개하는 진실한 사랑의 특징을 단 하나만이라도 구체적으로 실천하여 우리 모두의 삶에 진실한 사랑의 마법이 펼쳐지기를 바랍니다. 

 


진실한 사랑의 특징 – 멈춤


오늘 본문에는 진실한 사랑의 특징이 길게 나열되어 있지요. 이러한 서술은 크게 두 가지고 구분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지 않는다’이고, 다른 하나는 ‘행한다’입니다. 이렇게 구분을 해놓고 보면, 진실한 사랑의 특징을 서술하는 본문의 말씀에는 진실한 사랑이 행하는 것보다 진실한 사랑이 행하지 않는 것이 더 많이 나열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4절을 보십시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이것은 진실한 사랑이 행하는 것에 대한 서술이지요. 그러나 그 뒤에는 진실한 사랑이라면 결코 행하지 않는 것들이 길게 나열되어 있습니다. 4절 뒷부분부터 보십시오.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절도 보십시오.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그러므로 진실한 사랑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이러한 모든 것을 멈추는 행위입니다. 우리가 나의 마음에 새겨진 하나님의 사랑을 따라 진실한 사랑을 실천한다고 말할 때, 여러분 오해하지 마십시오. 반드시 무엇을 행하는 것, 분주하고 바쁘게 무엇을 행하는 것이 사랑이나 소중히 여김이 아닐 때가 굉장히 많다는 사실입니다. 그 대신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가 말하고 싶은 것, 지금 내 마음이 나에게 충동한 그것을 멈추는 것이 때로는 더 귀한 사랑이요 상대를 최고로 소중히 여기는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에는 하나님 백성이 따라야 할 율법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지요? 그러면 율법의 가장 중요한 정신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율법의 핵심을 두 가지로 요약하셨습니다. 곧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요 또한 이웃을 향한 사랑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의 정신을 담고 있는 율법을 구약성경에서 압축적으로 기록해둔 말씀이 십계명이지요. 그러면 십계명의 구절을 ‘하라’는 명령과 ‘하지 말라’는 명령으로 구분해 보십시오. 제1계명부터 제10계명까지 무엇을 ‘행하라’는 명령이 많습니까? 아니면 ‘하지 말라’는 명령이 많습니까? ‘하지 말라’는 명령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무엇을 행하라는 명령은 열 가지 계명 중에서 딱 두 개입니다. 제4계명,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그런데 여러분, 안식일이라는 것이 무엇이지요? ‘멈춤’이거든요. 하던 일을 멈추고, 열심히 달려가던 걸음을 멈추고 하나님께서 안식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쉼을 누리는 것이 안식일이잖아요. 그러니 제4계명 역시 문자적으로는 ‘행하라’고 되어 있지만, 그 의미는 ‘하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결과적으로 십계명 가운데 ‘무엇을 행하라’는 명령은 딱 하나가 남네요. 제5계명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그렇습니다. 십계명에서 적극적으로 행하라고 명령하는 말씀은 이것 하나입니다. 저는 한때 십계명의 말씀이 지나치게 부정 명령으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떨쳐버리기가 어려웠습니다. 하나님 백성의 대헌장을 말씀하시는 십계명에서 ‘너희는 정의를 행하여라,’ 혹은 ‘너희는 인애를 실천하여라’와 같은 멋진 명령을 주시지 않고, 고작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말씀하시는 데 의문을 품었을 때도 있었지요. 그런데 여러분, 시간이 흐르면서 다시 생각을 해보니 우리 사회에 큰 해악을 끼치는 것은 상대방의 입장은 고려하지 않은 채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적극적으로 행할 때 일어나지, 소극적인 자세로 행동을 멈추었을 때는 다른 사람에게 별로 큰 해악을 끼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오히려 행동을 멈추는 것이 가장 멋진 행위가 되고, 말하지 않는 것이 가장 강력한 웅변이 되고, 나의 주장을 멈추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이 참된 지혜가 될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의 구체적인 실천 방법은 분주하게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듯 시기하는 마음이 올라올 때에도 그 마음을 멈추어 세우는 것, 자랑하고 싶지만 상대방의 감정을 생각해서 절제하는 것, 상대에게 좀더 친근하게 다가가고 싶지만 무례히 행하지 않기 위해 조심하는 것, 나의 유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하지 않는 것, 내 마음이 상했다고 상대방의 마음까지도 상하게 만드는 화를 내지 않는 것, 한 마디로 내 마음은 하고 싶지만 상대를 위해 그것을 멈추는 것, 바로 그것이 진실한 사랑이요 상대를 소중히 여기는 구체적인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에 새겨진 주님의 진실한 사랑을 실천하기 원하신다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엇을 행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지 마십시오. 그 대신 여러분의 지금 행동을 멈추십시오. 그리고 나의 행동이 혹시라도 상대방을 불편하게 만들지는 않았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상대방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주는 것, 상대방의 언어습관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는 것, 상대방의 행동을 그 사람의 당연한 권리로 인정해주는 것, 그것이 진실한 사랑의 마음으로 상대방을 소중히 여기는 최고의 행동입니다. 



진실한 사랑의 특징 – 오래 참음과 온유


사도 바울은 진실한 사랑의 특징을 서술하면서 사랑은 ‘하지 않는다’는 표현을 반복해서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앞에서도 확인한 것처럼, 진실한 사랑이 무엇을 행하는지에 대해서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4절에는 그것이 두 가지로 나타나지요?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그리고 “사랑은 온유합니다.” 우리말 ‘온유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를 조금 더 풀어서 번역하면 ‘친절하게 행하다’가 됩니다. 설교를 시작하며 인용하였던 게리 토마스의 책 제목인 영어 단어 ‘cherish’와 거의 같은 의미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네요. 그러므로 진실한 사랑의 또 다른 특징이 무엇입니까? 오랜 세월 변하지 않고 동일한 자세로 상대방을 소중히 여기며 친절하게 대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오래 참음’과 ‘온유’라는 덕목은 구약 성경에서 주로 하나님의 성품을 묘사할 때 사용되는 용어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본문이 출애굽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종살이하였던 애굽에서 이끌어 내셨습니다. 그리고 시내산에서 그들과 언약을 맺으셨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그 언약을 시내산 언약이라고 부릅니다. 시내산 언약을 통해, 이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영원히 변하지 않는 언약이 채결되었습니다. 곧,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언약입니다. 이 언약은 이스라엘 백성의 입장에서 볼 때 너무나도 감격적인 사건이었어요. 마치, 신약 시대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새 언약을 맺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죄인이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한 존재였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언약이지요. 그러니 신약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그리고 그 옛날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하나님과 우리가 언약을 맺었다는 사실은 너무도 큰 감격의 사건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스라엘이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뒤, 그 시내산을 채 떠나기도 전에 이스라엘 백성이 큰 죄악을 저질렀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금 송아지를 만들어서 숭배했던 사건이었습니다. 아니,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등지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기다니…. 이 정도면 조금 전에 맺은 시내산의 언약은 파기될만하지 않나요? 이 정도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큰 벌을 내리셔도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향해 불평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요? 바로 그때 하나님의 성품이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 4절에 등장하는 두 가지 덕목입니다. ‘오래 참음’과 ‘온유’이지요. 금송아지 사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바로 그 장면에서 출애굽기는 하나님의 성품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출 34:6) 


구약성경에 매우 익숙하였던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을 기록하며 출애굽기의 이 장면을 떠올리고 있었는지도 모르지요. 그리고 진실한 사랑의 특징을 서술하면서 가장 먼저 이 두 가지 덕목을 서술하고 있네요.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이것은 진실한 사랑의 원형이신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진실한 사랑을 가슴에 새기며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바로 이러한 사랑을 실천하라고 요구합니다. 진실한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라고, 진실한 사랑은 온유하여 상대방을 소중히 여기며 친절하게 대한다고 말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오래 참음이나 온유함도 상대방을 위해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과는 거리가 있지 않나요? 아니, 오히려 적극적으로 무엇을 분주하게 행하기보다는 나의 말을 멈추거나 나의 행동을 멈출 때 우리는 오래 참을 수 있으며 온유, 곧 상대방을 친절하게 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지난 한 주간 오래 참음과 온유에 대해 여러 가지고 묵상하면서, 과연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오래 참지 못하고 온유하지 못하게 만드는지, 오래 참음과 온유의 자세를 잃어버리게 만드는 가장 무서운 요소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물론 여러 가지 대답이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의 마음에 가장 크게 떠올랐던 답이 하나 있었어요. 그것은 ‘조급한 마음’입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이 복잡한 거리를 지나고 있는데 약속 시간에 늦어 마음이 조급해졌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 사람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빨라지겠지요. 그러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돌아볼 여유가 있을까요? 약속 시간이 촉박하여 발걸음을 재촉하다 보면 지나가던 사람을 툭 치고 지나가는 일도 생기죠. 혹은 함께 동행하는 사람들을 다그칠 수도 있지요. 그러나 그의 마음은 지금 조급하기에 곁에 있는 사람들을 친절하게 대할 수 없습니다. 한 마디로, 무례해집니다. 그 모든 것의 시작이 무엇입니까? 조급한 마음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상대방을 향해서 오래 참고 온유하며 상대방을 향해 친절해질 수 있을까요? 먼저 나의 마음에 조급함이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로 나의 마음이 좀 넉넉해져야 발걸음을 옮기며 주변의 풍경도 볼 수 있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지금 행하고 계신 손길도 바라볼 수 있는 것이요, 결국 내 곁에 있는 이웃을 귀하게 여기며 그들에게 친절을 베풀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도 바울은 진실한 사랑의 첫 번째와 두 번째 특징으로 “사랑은 오래 참는다.” “사랑은 온유하다”라고 선언한 뒤, 계속해서 이것도 하지 말고 저것도 하지 말라고 이야기했던 것이지요. 


진정한 사랑의 특징을 서술하는 오늘 본문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13장 4절에서 시작하여 7절에서 마칩니다. 그리고 마지막 7절에는 진실한 사랑의 특징이 무엇인지에 대해 결론을 내리고 있는데, 7절의 중요한 특징은 동일한 단어가 네 번이나 반복된다는 점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네 번이나 반복되고 있는지 찾아보면서 7절의 말씀을 잃어보지요.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7절) 


무엇이 반복되고 있습니까? “모든 것”이라는 단어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리 능력이 있고 재능이 있고 은사가 있어도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그런데 진실한 사랑만 있다면 모든 것을 성취한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진정한 사랑의 특징으로 멈춤을 강조하였습니다.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고 상대방을 소중히 여기기 위해서는 나의 말을 멈추고 나의 행동을 멈추고 상대방의 생각과 행동을 오래 참아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멈춤이라는 진실한 사랑의 특징이 마침내 모든 것을 성취하게 된다는 사실이예요.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상대방을 사랑하고 상대방을 소중히 여기기 위해 나의 말과 행동을 멈추십시오. 그리하여 진실한 사랑의 특징인 오래 참음과 온유의 자세를 유지하십시오. 바로 그때, 여러분의 삶에 사랑이 움직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사랑을 통해 모든 것을 이루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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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