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강해2021. 9. 19.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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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난 한 달간 계속해서 야고보서의 말씀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는 성도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그 구체적인 항목들을 명시적으로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의 말씀을 읽는 것만으로도 무엇이 마땅한 성도의 삶인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것처럼 야고보서는 이렇게 명령합니다. “성내기를 더디 하라” 혹은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등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성도들이 마땅히 따라야 할 또 하나의 분명한 가르침을 주고 있는데요. 본문이 시작하는 11절의 처음부터 매우 분명한 어조로 말씀합니다.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11a절) 

야고보가 예루살렘의 감독으로 있을 때,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극심한 박해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믿음을 굳건하게 지켰습니다. 극심한 박해를 피해 삶의 터전을 떠나 팔레스타인의 이곳저곳에 흩어져야 했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만큼은 조금도 타협하지 않았던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여러 가지 허물이 있었으니, 다른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또한 성도들이 서로를 향해서 화를 내고 성을 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상대방을 향한 차별 그리고 분노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성도들 사이에 갈등과 분열을 동반하였고, 그렇게 성도들의 마음이 멀어지고, 성도들 사이에 서로에 대한 미움과 시기의 마음이 가득해지니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비난하는 경우도 많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장면을 너무도 안타깝게 생각했던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을 향해 간절히 권면했던 것입니다.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11a절) 

우리는 오늘 이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야고보의 이 권면이 이천년의 긴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아니 너무도 시급한 권면이라는 사실을 먼저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어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복음 안에서 우리는 옛 생활의 모습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자녀 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도’, 곧 거룩한 무리라는 이름을 가졌고 ‘그리스도인’, 곧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라는 이름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도요 또한 그리스도인인 우리들의 모임 안에 여전히 서로에 대한 비방이 멈추지 않고 서로에 대한 비난과 비판이 계속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지만 여전히 서로에 대한 미움과 시기가 우리의 마음에 자리를 잡아 서로 한 마음을 품어 마땅한 우리의 공동체가 크고 작은 위기에 처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진실로 우리의 모임이 아름다운 신앙의 공동체를 이루기 원한다면 또한 추석 연휴를 앞두고 우리 가정마다 행복과 기쁨이 넘치는 가족 공동체를 이루기 원한다면 우리는 바로 지금 본문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온 마음을 다하여 귀를 기울어야 합니다.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11a절) 


우리는 한 가족

본문은 성도들을 향하여 “서로 비방하지 말라” 권면합니다. 그러면서 성도들이 서로 비방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와 근거, 특별히 신앙의 관점에서 서로를 비난하거나 비판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와 근거를 이야기합니다. 오늘은 우리 신앙인들이 서로 비판하거나 비난하지 말아야 할 신앙적인 이유와 근거를 오늘 본문에 근거해서 한 두 가지만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한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한 가족입니다.” 본문 11절에 이렇게 권면하잖아요.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여기에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 곧 야고보서를 가장 먼저 받아보았던 사람들을 향한 호칭이 등장하지요. 무엇입니까? “형제들아”입니다. 이미 야고보서에는 성도들을 향하여 “형제들아”라고 부르는 장면이 여럿 등장하였습니다. 그러니 이 호칭에는 특별할 것이 없다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인 야고보서 4장 11절만큼은 이 호칭이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본문의 바로 앞에 전혀 다른 호칭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야고보가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을 향해서 어떠한 호칭을 사용하였는지를 찾아보면서 야고보서 4장 8절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약 4:8) 

찾으셨나요? 두 가지 호칭이 등장하지요? 먼저는 “죄인들아”입니다.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그리고 또 하나의 호칭이 무엇입니까?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입니다.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나 혹은 팔레스타인에 흩어진 성도들을 향해서 야고보는 ‘죄인들아’ 그리고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바로 뒤 본문 11절에서 너무도 다른 의미의 호칭인 “형제들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형제들아”라는 호칭은 야고보의 의도가 담겨 있는 표현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자, 이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호칭의 의미를 생각하며 다시 한번 11절의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그 의미를 살려 다시 읽어보면 이렇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서로 형제이니, 너희는 서로 자매이니, 너희는 서로 가족이니 서로 비방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본문 11절은 계속해서 “형제를 비방하는 자” 혹은 “형제를 판단하는 자”에 대해 말씀하지요(11b절). 그런 점에서 본문의 권면은 어디까지나 하나님 안에서 한 가족이 된 성도들 사이의 관계에서 그리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우리의 가정 안에서 지켜야 할 윤리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의 가치관에 근거하여 분명한 분별력을 갖추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일을 멈추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성도들은 마땅히 성경에 근거하여 바른 분별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러나 같은 시간과 같은 공간 안에서 한 분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 성도들은 서로 믿음의 가족이잖아요. 우리는 서로 성씨도 다르고 출신도 다르고 혈연으로 묶여 있는 것은 아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한 가족이 되었잖아요. 한 가족이라면 서로의 잘못을 이야기해 줄 수도 있고 지적할 수도 있겠지만, 비방하기보다는 감싸주고 판단하기보다는 서로의 부족함을 보충해주는 것이 가족의 역할이 아닌가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으로 대답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믿으시나요? 또 한가지, 여러분은 지금 이 자리에서 함께 예배하는 분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마지막으로,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이 자리에서 함께 예배하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안에서 형제와 자매가 되었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믿으시나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위대한 믿음을 제 아무리 입술로 고백하더라도 서로를 향해 비방하고 비난할 뿐 형제를 그리고 자매를 용납하고 품어주지 않는다면 우리의 모임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아름다운 믿음의 공동체가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교회도 마찬가지고 우리의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교회가 아름다운 믿음의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가정이 사랑과 행복이 가득한 가정이 되기 위해서는 서로에게 불만을 품을 만한 것도 많고 상대방의 언어와 행동을 바꾸어주기를 바라는 것도 많이 있지만 그래도 식구이니기에 그래도 가족이기에 그래도 형제이고 자매이기에 비판하고 비난하기보다 받아주고 용납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의 역할: 판단이 아니라 실천

오늘 본문은 성도들을 향하여 “서로 비방하지 말라” 권면합니다. 그러면서 성도들이 서로 비방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와 근거, 특별히 신앙의 관점에서 서로를 비난하거나 비판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와 근거를 이야기하지요. 우리 신앙인들이 서로를 비판하거나 비난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와 근거, 그 첫째는 우리가 한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한 가족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우리의 역할은 판단이 아니라 실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역할은 판단이 아니라 실천입니다.” 본문 11절의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11b절) 

만일 형제라고 하면서, 만일 자매라고 하면서 서로를 비방하거나 판단하는 사람은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네요. 그 이유는 매우 단순한데 하나님의 말씀인 구약의 율법이 명시적으로 형제를 향한 비방과 비난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레위기 19장에는 이러한 말씀이 있습니다. 

너는 네 백성 중에 돌아다니며 사람을 비방하지 말며 (레 19:16) 

레위기의 율법은 서로를 비방하지 말라고 명령하신 뒤에 곧 이어 더욱 강력한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레 19:18) 

율법의 말씀은 분명합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면, 그리하여 하나님 안에서 한 가족이 되었다면 우리는 서로를 비방하거나 비난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대신 서로의 허물과 약점을 감싸주어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을 사랑하듯 해야 합니다. 이것이 구약의 율법이든 신약의 서신서든 동일하게 가르치는 교훈입니다. 그런데 만일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게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함께 신앙생활을 하며 하나님 안에서 서로 형제라고 서로 자매라고 입술로 말은 하지만, 뒤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향해 비방하고 비난한다면 그것은 단지 한 사람을 향한 비방을 넘어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율법을 거부하고 판단하는 행동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문 11절은 율법을 대하는 자세를 두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합니다.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곧 율법의 말씀에 순종하여 형제와 자매에 대한 비방과 비난을 멈추지 않는다면 그는 율법의 준행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는 스스로 율법의 재판관이 되는 것입니다(11c절). 여기에 율법을 대하는 두 가지 자세가 등장하네요. 그 첫째가 무엇입니까? 율법의 준행자입니다. 또 하나는 무엇입니까? 율법의 재판관입니다. 계속해서 본문 1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12a절) 

입법자, 곧 율법을 제정하시는 분도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또한 재판관, 곧 율법에 따라 사람을 심판하실 분도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 인간에게는 율법을 제정할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그래서 모세조차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율법을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전달자였지 율법의 제정자는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이었던 야고보조차 율법에 명시되어 있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며 성도들을 교훈할 뿐이지 자기 스스로 성도들이 따라야 할 삶의 규정을 제정할 수는 없었습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율법에 따라 사람을 심판할 권한이 없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수많은 선지자들도 자신의 생각을 따라 다른 사람을 판단할 수 없었기에, 그저 하나님께서 직접 판단하신 내용을 백성들에게 전해주며 회개를 촉구할 뿐이었지요.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율법의 제정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율법의 재판관도 아닙니다. 우리가 감당해야 할 역할은 오직 율법을 실천하는 말씀의 준행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너무도 많은 성도들이 율법의 준행자가 되기 위해서는 노력하지 않고, 스스로 율법의 제정자나 재판관이 되려 한다는 점이지요. 그래서 메튜 헨리(Mathew Henry)라는 분은 오늘 본문의 말씀을 해설하면서 이렇게 탄식했어요. “재판관이 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율법에 복종하기를 싫어한다.” 부인하고 싶지만 우리의 마음 깊은 곳을 너무도 정확히 저적하고 있지 않습니까? 율법의 말씀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분명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너무도 분명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서로 형제가 되었다면, 너희가 서로 자매가 되었다면 서로 비방하지 말라” 하나님의 뜻이 이토록 분명할진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 말씀의 재판관이 되지 마십시오. 그 대신 말씀의 준행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너는 누구이기에

본문은 너무도 분명하고 명백한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고 있지요.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그런데 오늘의 메시지를 더욱 힘있게 만드는 것은 본문의 마지막 질문입니다. 우리가 흔히 수사 의문문이라고 부르는 형태의 질문이지요. 그 질문은 무엇입니까?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12b절) 

로마서를 읽다 보면 사도 바울도 거의 동일한 수사의문문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로마교회 안에도 성도들이 서로 비판하고 비난하는 일이 일어났거든요. 로마교회 성도들이 서로를 비판했던 중요한 이슈는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느냐 먹지 않느냐의 문제였습니다. 성도들 중에는 우상에게 마쳐진 고기를 먹는 사람도 있었고 먹지 않는 사람도 있었어요. 그런데 문제는 고리를 먹는 사람은 먹지 않는 사람을 비판하고 먹지 않는 사람은 먹는 사람을 비방했다는 사실입니다. 야고보가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서로 비방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안타까운 마음에 ‘형제 들이여 서로 비방하지 말라’ 권면하였던 것처럼, 이번에는 사도 바울이 로마교회 성도들이 서로를 비판하는 장면을 바라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에 “서로 비판하지 말라”라고 권면합니다(롬 14장). 그러면서 이렇게 질문해요.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롬 14:4) 

사도 바울의 이 질문,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야고보가 던지는 질문,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이 두 가지 질문은 바울의 목소리나 야고보의 육성이 우리의 귓가에 지금도 들리는 것만 같은 강력한 호소력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지요. 그리고 “너는 누구냐?”라는 이 질문은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비방하기에 앞서 ‘너 자신을 살피라’고 우리를 촉구합니다. 

미국 역사상 지금까지도 최고의 신학자로 손꼽히는 조나단 에드워즈라는 분이 계십니다. 미국이 영국의 식민지였을 시절, 미국에서 강력한 부흥운동이 일어났고 역사가들은 이때의 부흥운동을 이른바 미국의 제1차 부흥운동이라고 부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 운동의 선두주자였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조나단 에드워즈는 부흥운동의 어두운 면도 분명히 관찰할 수가 있었습니다. 성령을 체험하고 하나님을 향해 열정을 품은 사람들이 시간이 조금 더 흐르면서 그들의 신앙이 변색되거나 신앙의 부정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관찰할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군가의 신앙적인 열정이 참된 것인지 혹은 거짓된 것인지 분별할 수 있을까를 깊이 연구하여 지금까지도 기독교 신학의 매우 중요한 고전으로 남게 되었던 한 권의 책을 집필하게 되었는데, 그 책의 제목이 <종교 감정론>(Religious Affection)입니다. 자, 이 책에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거짓된 신앙의 열정의 중요한 특징 한 가지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거짓된 열심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미워하는 열심은 없으면서, 
다른 사람의 죄를 미워하는 열심은 있다. (X2) 

언듯 보기에 신앙의 열정으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거론하기도하고, 성경을 인용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잘못됐다, 저것이 잘못됐다는 그들의 이야기는 하나부터 열까지 틀린 말이 없습니다. 다 옳은 말이고, 그 사람의 말대로 잘못을 고쳐나가면 모든 것이 완벽해질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거짓된 열심인 이유는 다른 사람들의 죄를 미워하는 열심은 있지만, 정작 자기 자신의 죄를 미워하는 열심은 찾아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거짓 열정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을 향해 야고보는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질문합니다.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사도 바울도 이처럼 거짓된 열정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을 향해 분명히 질문합니다.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성도 여러분, 혹시 주변 사람들에게 믿음 좋다고 평가받는 우리가 거짓된 신앙의 열정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닐까요? 다른 사람들이 나서지 않을 때 당당히 바른 이야기를 하는 정의의 사도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죄를 미워하는 열심은 있지만, 정작 나 자신의 죄를 미워하는 열심이 없다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번 추석 가족들의 잘못을 비판하고 비난하기에 앞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깊이 성찰하기를 바랍니다. 교회 안에서 함께 예배하는 다른 성도들의 잘못을 비판하고 비방하기에 앞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율법의 재판관이 되시니 모든 판단은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말씀의 재판관이 아닌 준행자가 되어 형제들을, 그리고 자매들을 용서하고 품어주며 사랑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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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