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강해2021. 9. 26.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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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지리적 배경이 되는 이스라엘 땅은 그다지 넓은 영토는 아니지만 지역에 따라 매우 다른 기후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가장 대조적인 지리적 특색을 지니고 있는 지역은 북쪽의 갈릴리 지역과 남쪽의 네게브 지역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네게브와 갈릴리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강수량입니다. 갈릴리는 연 강수량이 600mm에서 1000mm 정도가 됩니다. 반면 네게브 지역의 강수량은 갈릴리의 10분의 1도 되지 않는 약 15mm에서 100mm 정도입니다. 당연히 갈릴리 지역은 많은 비가 내리기에 곡식과 초목이 풍성합니다. 그러나 일 년에 100mm의 비도 내리지 않는 네게브 지역은 드넓은 사막이 펼쳐져 있지요. 그나마 100mm 이하로 내리는 비도 11월부터 3월까지 겨울에 집중됩니다. 그러니 4월부터 11월까지 일 년의 대부분의 기간, 네게브의 사막은 비가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아 매우 건조하고 척박한 땅으로 남아 있습니다. 

네게브 지역은 이러한 지리적 특성으로 말미암아 매우 흥미로운 현상이 일어나는데 일년 중 15mm에서 100mm의 매우 적은 비가 그래도 내리는 바로 그때 발생합니다. 이른바, ‘와디’라고 불리는 계절천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일 년의 대부분이 너무도 건조하기에 평소에는 사람이나 차가 이동하는 긴 도로로 사용을 하던 곳이 비가 내리면 물이 흐르는 하천이 되는 현장이지요. 너무도 건조하여 그곳에 물길이 생길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바로 그곳이 순식간에 거대한 물길이 지나는 하천으로 변화는 그 장면을 누군가 촬영했고, 그 영상이 인터넷 공간에 공유되어 있습니다. 그 영상을 딱 1분만 보면, 네게브 지역의 계절천이라는 것이 얼마나 극적인 변화인지를 충분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그 영상을 딱 1분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단 1분의 짧은 영상이지만 건조한 사막에 거대한 물줄기가 일어나는 극적인 변화를 충분히 확인할 수 있지요. 구약의 시편을 보면 네게브 지역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자연 현상에 하나님의 역사를 빗대어 노래하는 대목이 등장합니다. 시편 126편이 그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시편 126편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던 유대인들을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회복시키는 장면을 노래하는 시편입니다. 그리고 시편 126편 4절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려 보내소서 (시 126:4) 

여기에 등장하는 “남방 시내”가 우리가 조금 전 영상으로 보았던, 네게브 사막의 계절천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포로를 돌려보내시는데, 남방 시내들 같이 돌려보내신다는 시편의 표현은 어떤 뜻일까요?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 하나는 오랜 시간의 기다림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네게브 지역의 계절천은 일 년의 대부분을 마른땅으로 존재합니다. 그래서 때가 되어 물길이 들어오기까지는 오랜 세월을 기다려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던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하기까지, 그래서 하나님의 능하신 손을 힘입어 포로에서 해방되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기까지 참고 견디고 인내하며 기다려야 했습니다. 얼마나 기다려야 했습니까? 무려 70년이라는 긴 세월을 참고 견디고 인내하며 기다려야 했습니다. 이것이 “남방 시내”라는 표현에 담긴 첫 번째 의미입니다. 

그러나 시편 126편이 노래하는 “남방 시내”라는 비유에는 또 하나의 매우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네게브 지역의 계절천에 물이 흐르기 위해서는 오랜 세월을 인내하며 기다려야 하지만, 기다리고 고대하던 그 때가 임하면 하나님의 구원은 ‘순식간’에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네게브 지역의 계절천은 일 년의 대부분이 메마른 땅으로 존재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상에서 직접 확인한 것처럼 비가 내리기 시작하니 단 1분 만에 거대한 물줄기가 소용돌이치며 흘러가는 장면을 목도할 수가 있었잖아요. 마찬가지로 7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유대인들은 바벨론의 포로로 살아가며 참고 인내하며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가 임하면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유대인들의 해방과 회복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눈에 보이는 것은 거친 사막이십니까? 지금 여러분이 걸아가는 길이 메마른 대지이십니까? 지금 여러분의 삶에 은혜의 비가 한 방울 내리지 않아 극심한 갈증을 느끼고 계십니까? 조금만 더 참고, 조금만 더 견디며, 조금만 더 기다리십시오. 더딘 것 같지만 하나님의 때는 반드시 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때가 임하기만 하면 사막과도 같은 우리의 삶에 거대한 은혜의 강줄기가 순식간에 흘러가게 될 것입니다. 


형제들아, 길이 참으라

우리가 계속해서 묵상하고 있는 야고보서는 ‘인내’라는 주제를 매우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야고보의 편지를 받아보는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 혹은 박해를 피해 팔레스타인 전역으로 흩어진 초대교회 성도들은 유대인들에게 큰 신앙의 박해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의 바로 앞 단락에서는 부자들을 향한 경고의 말씀이 등장하는데, 부자들이 자신의 재산을 가지고 가난한 사람들을 착치하고 괴롭히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야고보서를 받아보았던 당시의 성도들은 궁핍으로부터 찾아오는 여러 가지 시련과 고난도 당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종교적인 박해와 경제적인 고난에 괴로워하고 있는 성도들을 향하여 야고보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 ‘인내’라는 덕목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7a절)

야고보는 계속해서 하나의 비유를 들어 설명합니다.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7b절) 

농부가 간절히 바라는 것은 귀한 열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일년 열두 달, 사시사철 열매를 맺는 나무가 있나요? 모든 과실수는 열매를 맺는 철이 정해져 있잖아요. 그러므로 농부는 열매가 맺히는 그때까지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특별히 본문 7절에는 ‘이른 비’와 ‘늦은 비’가 등장하지요. 팔레스타인 땅에서 ‘이른 비’는 농부가 파종을 하면 그 씨앗이 땅 속에서 제자리를 찾고 뿌리를 내리는 바로 그때 필요한 비를 말합니다. 농부의 입장에서는 씨앗을 뿌린 후 매우 정확한 시점에 이른 비가 내려야 그해의 농사를 시작할 수가 있게 되지요. 그래서 이른 비가 내리는 타이밍이 매우 중요합니다. 본문 7절에 등장하는 ‘늦은 비’는 그렇게 뿌리를 내린 씨앗이 알찬 결실을 맺기 위해 급성장하는 바로 그 시기에 꼭 필요한 수분을 공급해주는 비를 말합니다. ‘이른 비’와 마찬가지로 ‘늦은 비’ 역시 곡식이 급성장하는 바로 그 시기에 정확히 맞혀 내려주어야 그해의 농사가 풍성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등장하는 농부의 비유, 특별히 이른 비와 늦은 비의 비유는 하나님의 은혜가 정확한 타이밍에 임하게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기다리는 농부의 입장에서는 마음이 조급해지지요. 지금 당장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 않으니 농부는 씨앗을 심으면서도 ‘씨앗이 제자리를 잡아야 하는 바로 그 시점에 이른 비가 내리지 않아 때를 놓치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앞서는 것도 사실입니다. 비록 이른 비가 제때에 내려 씨앗이 뿌리를 내렸더라도 알찬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급성장하는 바로 그때 충분한 비가 내려야 하는데 아무리 하늘을 보아도 비구름이 보이지 않으면 농부의 마음이 얼마나 조급해지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경험이 많은 노련한 농부는 다 알고 있어요. 하나님은 가장 적절한 시기에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내려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하나의 사실을 결코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일찍 오시지도 않고 늦게 오시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정확한 시간에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형제들아, 원망하지 말라

야고보는 종교적인 박해와 경제적인 궁핍 가운데 큰 고통을 당하고 있던 성도들을 향하여 ‘길이 참으라’고 권면하였습니다. 그리고 인내를 실천하기 위해 성도들이 주의해야 할 항목이 무엇인지도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9a절)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야고보서를 처음 받아보았던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과 온갖 고난과 박해를 받아 삶의 근거지를 떠나 팔레스타인 전역으로 흩어진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들의 삶이 참 고달팠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굳건히 지키고 있었지만 삶이 너무도 괴롭다 보니 그 마음에 - 어쩌면 너무도 자연스럽게 - 다른 사람을 향한 원망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본문에 등장하는 원망은 그 대상이 크게 두 가지였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 첫 번째는 성도들을 박해하는 유대교도들, 혹은 성도들을 경제적으로 탄압하고 억누르는 이른바 부자들을 향한 원망과 불평이었겠지요. 만일 성도들의 원망이 자신들을 박해하고 괴롭히는 사람들만을 향한 것이라면 그래도 이해할 만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이 꼭 그렇지가 않거든요. 모르긴 몰라도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신의 삶이 너무도 힘들고 너무도 괴로우니 자신을 박해하고 괴롭히는 유대인들이나 부자들에게만 원망한 것이 아니라, 함께 신앙생활하는 성도들,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그 기나긴 고통의 터널을 함께 지나고 있는 성도들을 향해서도 원망을 쏟아내었던 것 같아요. 나의 삶이 여유가 있다면 얼마든지 넘어갈 수 있는 문제였지만, 지금 나의 삶이 큰 고통을 당하고 있으니 아주 작은 일에도 성도들이 서로를 향해 원망하고 불평하면서 지금의 상황이 마치 내 곁에 있는 다른 성도들 때문인 것처럼 서로를 비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오늘 본문에서 원망하지 말라고, 특별히 “서로” 원망하지 말라고 권면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저는 이 구절의 말씀을 천천히 묵상해보니 성도들의 마음에 자리잡고 있던 원망의 대상이 단지 유대인이나 부자들, 혹은 함께 신앙생활하는 다른 성도들에게만 국한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는 사람의 마음이 모두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큰 고통을 당하게 되면 우리는 먼저 나에게 고통을 준 그 사람을 원망합니다. 또한 나에게 직접적인 고통을 준 것은 아니지만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이 나의 처지와 형편을 이해하고 배려해 주지 않는다고 불평하고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더라고요. 나의 삶에 큰 아픔과 고통이 찾아오면 한 걸음 더 나아가 누구를 향해 원망합니까? 바로 나 자신을 향해 원망합니다. 내가 그때 다른 선택을 했다면 다른 결과가 찾아오지 않았을까? 내가 그때 잘못된 선택을 하여 지금의 고통을 받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나 자신을 향해 불평하고 원망하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는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지금 당하는 그 고통만으로도 충분히 괴로운데, 나 자신을 향해 불평하고 원망하는 우리의 마음이 우리 자신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형제들아, 원망하지 말라.’
‘자매들아, 원망하지 말라.’ 
지금 여러분이 큰 아픔을 당하는 이유는 여러분이 과거에 잘못된 선택을 했기 때문도 아니요, 여러분 곁에 있는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큰 고통을 당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아직 하나님의 때가 임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형제들아, 본으로 삼으라

야고보는 큰 고통 속에 빠져있던 성도들을 향하여 “형제들아, 자매들아”라고 부르며 두 가지 권면을 주었지요. 본문 7절에 “형제들아, 길이 참으라” 그리고 본문 9절에서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권면하였습니다. 이제 야고보는 한 번 더 성도들을 향해 “형제들아”라고 따스하게 부르며 한 가지 권면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 (10절) 

야고보는 고난을 당하는 성도들에게 믿음으로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었던 많은 사람들이 있었음을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선지자들이 그들이지요. 그러나 선지자들의 모범이 끝이 아닙니다. 고난을 당하면서도 마지막까지 참고 인내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히 누렸던 대표적인 인물로 이제 욥이 등장합니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11절) 

야고보는 고난을 받으면서도 오래 참았던 선지자들의 예와 욥의 인내를 언급하면서 무엇이라고 선언합니까?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지금 당장 큰 어려움을 당하고, 지금 당장 큰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데 그 모든 과정을 인내하는 사람이 어떻게 복이 있다는 말입니까? 그 대답을 본문 1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지금 당하는 고통이 결말이라면, 지금 당하는 아픔이 우리 인생의 결말이라면,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슬픔이 우리 인생의 최종 결말이라면 어떻게 우리의 삶을 복된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우리가 당하는 아픔과 역경은 과정이지 결말이 아닙니다. 

여러분 가운데 여전히 고난과 아픔의 시간을 보내고 계신 분들이 계십니까? 
그러므로 저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어요. 
지금 여러분이 겪고 있는 고통과 아픔은 하나의 과정이지 결코 최종적인 결말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삶에 펼치실 하나님의 위대한 결말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본문에서 야고보는 성도들에게 구약의 예언자들을 본받으라고 말씀하셨지요. 야고보의 권면을 묵상하면서 제 마음에 떠올랐던 구약 선지서의 한 구절을 여러분과 나누면서 오늘의 설교를 마무리하려 합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사 30:18) 

이 말씀에는 우리 성도들의 인내, 우리 성도들의 기다림만이 아니라 또 다른 누군가의 인내와 또 다른 누군가의 기다림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누구의 인내요, 누구의 기다림입니까? 이사야 말씀을 다시 보세요.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누가 기다리신다고요? 우리 하나님도 친히 기다리신데요.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기다리십니까? 이사야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제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다리시는 지를 말씀합니다.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여러분도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 베푸시는 바로 그 날을 기다리고 계시지요? 그런데 여러분이 기다리시는 바로 그때, 곧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바로 그때를 하나님도 지금 기다리고 계십니다. 다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그 은혜의 때가 구체적으로 언제인지 우리는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알고 계신다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도 그때를 기다리시는 거예요. 가장 정확한 때가 바로 그때이니까, 그것보다 먼저 비를 내리시면 정확한 ‘이른 비’가 되지 못하여 오히려 씨앗이 자리를 잡고 뿌리를 내리는 데 방해가 되니 하나님도 그때까지 기다리십니다. 정확한 그 시간보다 먼저 비를 내리면 ‘늦은 비’가 되지 못하여 곡식이 급격히 성장하지 못하고 썩어버릴 수도 있으니 가장 좋은 그 시간을 정확히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늦은 비를 내리시기 위해 지금도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이 마음을 깨달은 이사야는 분명한 확신 속에서 이렇게 선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그러므로 지금도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기 위하여 친히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기억한다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조금만 더 견디어 주십시오. 조금만 더 참아 주십시오. 서로 원망하지 말고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지금은 비록 네게브의 사막과 같은 인생길을 걷고 있을지라도, 머지않아 여러분의 삶에 은혜의 강줄기가 흘러넘칠 것이니, 하나님을 바라보며 지금도 참고 견디며 기다리는 여러분이야말로 가장 복된 인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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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