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강해2021. 9. 26.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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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지리적 배경이 되는 이스라엘 땅은 그다지 넓은 영토는 아니지만 지역에 따라 매우 다른 기후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가장 대조적인 지리적 특색을 지니고 있는 지역은 북쪽의 갈릴리 지역과 남쪽의 네게브 지역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네게브와 갈릴리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강수량입니다. 갈릴리는 연 강수량이 600mm에서 1000mm 정도가 됩니다. 반면 네게브 지역의 강수량은 갈릴리의 10분의 1도 되지 않는 약 15mm에서 100mm 정도입니다. 당연히 갈릴리 지역은 많은 비가 내리기에 곡식과 초목이 풍성합니다. 그러나 일 년에 100mm의 비도 내리지 않는 네게브 지역은 드넓은 사막이 펼쳐져 있지요. 그나마 100mm 이하로 내리는 비도 11월부터 3월까지 겨울에 집중됩니다. 그러니 4월부터 11월까지 일 년의 대부분의 기간, 네게브의 사막은 비가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아 매우 건조하고 척박한 땅으로 남아 있습니다. 

네게브 지역은 이러한 지리적 특성으로 말미암아 매우 흥미로운 현상이 일어나는데 일년 중 15mm에서 100mm의 매우 적은 비가 그래도 내리는 바로 그때 발생합니다. 이른바, ‘와디’라고 불리는 계절천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일 년의 대부분이 너무도 건조하기에 평소에는 사람이나 차가 이동하는 긴 도로로 사용을 하던 곳이 비가 내리면 물이 흐르는 하천이 되는 현장이지요. 너무도 건조하여 그곳에 물길이 생길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바로 그곳이 순식간에 거대한 물길이 지나는 하천으로 변화는 그 장면을 누군가 촬영했고, 그 영상이 인터넷 공간에 공유되어 있습니다. 그 영상을 딱 1분만 보면, 네게브 지역의 계절천이라는 것이 얼마나 극적인 변화인지를 충분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그 영상을 딱 1분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단 1분의 짧은 영상이지만 건조한 사막에 거대한 물줄기가 일어나는 극적인 변화를 충분히 확인할 수 있지요. 구약의 시편을 보면 네게브 지역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자연 현상에 하나님의 역사를 빗대어 노래하는 대목이 등장합니다. 시편 126편이 그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시편 126편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던 유대인들을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회복시키는 장면을 노래하는 시편입니다. 그리고 시편 126편 4절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려 보내소서 (시 126:4) 

여기에 등장하는 “남방 시내”가 우리가 조금 전 영상으로 보았던, 네게브 사막의 계절천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포로를 돌려보내시는데, 남방 시내들 같이 돌려보내신다는 시편의 표현은 어떤 뜻일까요?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 하나는 오랜 시간의 기다림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네게브 지역의 계절천은 일 년의 대부분을 마른땅으로 존재합니다. 그래서 때가 되어 물길이 들어오기까지는 오랜 세월을 기다려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던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하기까지, 그래서 하나님의 능하신 손을 힘입어 포로에서 해방되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기까지 참고 견디고 인내하며 기다려야 했습니다. 얼마나 기다려야 했습니까? 무려 70년이라는 긴 세월을 참고 견디고 인내하며 기다려야 했습니다. 이것이 “남방 시내”라는 표현에 담긴 첫 번째 의미입니다. 

그러나 시편 126편이 노래하는 “남방 시내”라는 비유에는 또 하나의 매우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네게브 지역의 계절천에 물이 흐르기 위해서는 오랜 세월을 인내하며 기다려야 하지만, 기다리고 고대하던 그 때가 임하면 하나님의 구원은 ‘순식간’에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네게브 지역의 계절천은 일 년의 대부분이 메마른 땅으로 존재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상에서 직접 확인한 것처럼 비가 내리기 시작하니 단 1분 만에 거대한 물줄기가 소용돌이치며 흘러가는 장면을 목도할 수가 있었잖아요. 마찬가지로 7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유대인들은 바벨론의 포로로 살아가며 참고 인내하며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가 임하면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유대인들의 해방과 회복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눈에 보이는 것은 거친 사막이십니까? 지금 여러분이 걸아가는 길이 메마른 대지이십니까? 지금 여러분의 삶에 은혜의 비가 한 방울 내리지 않아 극심한 갈증을 느끼고 계십니까? 조금만 더 참고, 조금만 더 견디며, 조금만 더 기다리십시오. 더딘 것 같지만 하나님의 때는 반드시 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때가 임하기만 하면 사막과도 같은 우리의 삶에 거대한 은혜의 강줄기가 순식간에 흘러가게 될 것입니다. 


형제들아, 길이 참으라

우리가 계속해서 묵상하고 있는 야고보서는 ‘인내’라는 주제를 매우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야고보의 편지를 받아보는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 혹은 박해를 피해 팔레스타인 전역으로 흩어진 초대교회 성도들은 유대인들에게 큰 신앙의 박해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의 바로 앞 단락에서는 부자들을 향한 경고의 말씀이 등장하는데, 부자들이 자신의 재산을 가지고 가난한 사람들을 착치하고 괴롭히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야고보서를 받아보았던 당시의 성도들은 궁핍으로부터 찾아오는 여러 가지 시련과 고난도 당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종교적인 박해와 경제적인 고난에 괴로워하고 있는 성도들을 향하여 야고보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 ‘인내’라는 덕목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7a절)

야고보는 계속해서 하나의 비유를 들어 설명합니다.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7b절) 

농부가 간절히 바라는 것은 귀한 열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일년 열두 달, 사시사철 열매를 맺는 나무가 있나요? 모든 과실수는 열매를 맺는 철이 정해져 있잖아요. 그러므로 농부는 열매가 맺히는 그때까지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특별히 본문 7절에는 ‘이른 비’와 ‘늦은 비’가 등장하지요. 팔레스타인 땅에서 ‘이른 비’는 농부가 파종을 하면 그 씨앗이 땅 속에서 제자리를 찾고 뿌리를 내리는 바로 그때 필요한 비를 말합니다. 농부의 입장에서는 씨앗을 뿌린 후 매우 정확한 시점에 이른 비가 내려야 그해의 농사를 시작할 수가 있게 되지요. 그래서 이른 비가 내리는 타이밍이 매우 중요합니다. 본문 7절에 등장하는 ‘늦은 비’는 그렇게 뿌리를 내린 씨앗이 알찬 결실을 맺기 위해 급성장하는 바로 그 시기에 꼭 필요한 수분을 공급해주는 비를 말합니다. ‘이른 비’와 마찬가지로 ‘늦은 비’ 역시 곡식이 급성장하는 바로 그 시기에 정확히 맞혀 내려주어야 그해의 농사가 풍성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등장하는 농부의 비유, 특별히 이른 비와 늦은 비의 비유는 하나님의 은혜가 정확한 타이밍에 임하게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기다리는 농부의 입장에서는 마음이 조급해지지요. 지금 당장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 않으니 농부는 씨앗을 심으면서도 ‘씨앗이 제자리를 잡아야 하는 바로 그 시점에 이른 비가 내리지 않아 때를 놓치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앞서는 것도 사실입니다. 비록 이른 비가 제때에 내려 씨앗이 뿌리를 내렸더라도 알찬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급성장하는 바로 그때 충분한 비가 내려야 하는데 아무리 하늘을 보아도 비구름이 보이지 않으면 농부의 마음이 얼마나 조급해지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경험이 많은 노련한 농부는 다 알고 있어요. 하나님은 가장 적절한 시기에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내려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하나의 사실을 결코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일찍 오시지도 않고 늦게 오시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정확한 시간에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형제들아, 원망하지 말라

야고보는 종교적인 박해와 경제적인 궁핍 가운데 큰 고통을 당하고 있던 성도들을 향하여 ‘길이 참으라’고 권면하였습니다. 그리고 인내를 실천하기 위해 성도들이 주의해야 할 항목이 무엇인지도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9a절)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야고보서를 처음 받아보았던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과 온갖 고난과 박해를 받아 삶의 근거지를 떠나 팔레스타인 전역으로 흩어진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들의 삶이 참 고달팠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굳건히 지키고 있었지만 삶이 너무도 괴롭다 보니 그 마음에 - 어쩌면 너무도 자연스럽게 - 다른 사람을 향한 원망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본문에 등장하는 원망은 그 대상이 크게 두 가지였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 첫 번째는 성도들을 박해하는 유대교도들, 혹은 성도들을 경제적으로 탄압하고 억누르는 이른바 부자들을 향한 원망과 불평이었겠지요. 만일 성도들의 원망이 자신들을 박해하고 괴롭히는 사람들만을 향한 것이라면 그래도 이해할 만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이 꼭 그렇지가 않거든요. 모르긴 몰라도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신의 삶이 너무도 힘들고 너무도 괴로우니 자신을 박해하고 괴롭히는 유대인들이나 부자들에게만 원망한 것이 아니라, 함께 신앙생활하는 성도들,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그 기나긴 고통의 터널을 함께 지나고 있는 성도들을 향해서도 원망을 쏟아내었던 것 같아요. 나의 삶이 여유가 있다면 얼마든지 넘어갈 수 있는 문제였지만, 지금 나의 삶이 큰 고통을 당하고 있으니 아주 작은 일에도 성도들이 서로를 향해 원망하고 불평하면서 지금의 상황이 마치 내 곁에 있는 다른 성도들 때문인 것처럼 서로를 비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오늘 본문에서 원망하지 말라고, 특별히 “서로” 원망하지 말라고 권면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저는 이 구절의 말씀을 천천히 묵상해보니 성도들의 마음에 자리잡고 있던 원망의 대상이 단지 유대인이나 부자들, 혹은 함께 신앙생활하는 다른 성도들에게만 국한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는 사람의 마음이 모두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큰 고통을 당하게 되면 우리는 먼저 나에게 고통을 준 그 사람을 원망합니다. 또한 나에게 직접적인 고통을 준 것은 아니지만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이 나의 처지와 형편을 이해하고 배려해 주지 않는다고 불평하고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더라고요. 나의 삶에 큰 아픔과 고통이 찾아오면 한 걸음 더 나아가 누구를 향해 원망합니까? 바로 나 자신을 향해 원망합니다. 내가 그때 다른 선택을 했다면 다른 결과가 찾아오지 않았을까? 내가 그때 잘못된 선택을 하여 지금의 고통을 받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나 자신을 향해 불평하고 원망하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는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지금 당하는 그 고통만으로도 충분히 괴로운데, 나 자신을 향해 불평하고 원망하는 우리의 마음이 우리 자신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형제들아, 원망하지 말라.’
‘자매들아, 원망하지 말라.’ 
지금 여러분이 큰 아픔을 당하는 이유는 여러분이 과거에 잘못된 선택을 했기 때문도 아니요, 여러분 곁에 있는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큰 고통을 당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아직 하나님의 때가 임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형제들아, 본으로 삼으라

야고보는 큰 고통 속에 빠져있던 성도들을 향하여 “형제들아, 자매들아”라고 부르며 두 가지 권면을 주었지요. 본문 7절에 “형제들아, 길이 참으라” 그리고 본문 9절에서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권면하였습니다. 이제 야고보는 한 번 더 성도들을 향해 “형제들아”라고 따스하게 부르며 한 가지 권면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 (10절) 

야고보는 고난을 당하는 성도들에게 믿음으로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었던 많은 사람들이 있었음을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선지자들이 그들이지요. 그러나 선지자들의 모범이 끝이 아닙니다. 고난을 당하면서도 마지막까지 참고 인내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히 누렸던 대표적인 인물로 이제 욥이 등장합니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11절) 

야고보는 고난을 받으면서도 오래 참았던 선지자들의 예와 욥의 인내를 언급하면서 무엇이라고 선언합니까?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지금 당장 큰 어려움을 당하고, 지금 당장 큰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데 그 모든 과정을 인내하는 사람이 어떻게 복이 있다는 말입니까? 그 대답을 본문 1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지금 당하는 고통이 결말이라면, 지금 당하는 아픔이 우리 인생의 결말이라면,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슬픔이 우리 인생의 최종 결말이라면 어떻게 우리의 삶을 복된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우리가 당하는 아픔과 역경은 과정이지 결말이 아닙니다. 

여러분 가운데 여전히 고난과 아픔의 시간을 보내고 계신 분들이 계십니까? 
그러므로 저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어요. 
지금 여러분이 겪고 있는 고통과 아픔은 하나의 과정이지 결코 최종적인 결말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삶에 펼치실 하나님의 위대한 결말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본문에서 야고보는 성도들에게 구약의 예언자들을 본받으라고 말씀하셨지요. 야고보의 권면을 묵상하면서 제 마음에 떠올랐던 구약 선지서의 한 구절을 여러분과 나누면서 오늘의 설교를 마무리하려 합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사 30:18) 

이 말씀에는 우리 성도들의 인내, 우리 성도들의 기다림만이 아니라 또 다른 누군가의 인내와 또 다른 누군가의 기다림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누구의 인내요, 누구의 기다림입니까? 이사야 말씀을 다시 보세요.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누가 기다리신다고요? 우리 하나님도 친히 기다리신데요.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기다리십니까? 이사야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제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다리시는 지를 말씀합니다.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여러분도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 베푸시는 바로 그 날을 기다리고 계시지요? 그런데 여러분이 기다리시는 바로 그때, 곧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바로 그때를 하나님도 지금 기다리고 계십니다. 다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그 은혜의 때가 구체적으로 언제인지 우리는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알고 계신다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도 그때를 기다리시는 거예요. 가장 정확한 때가 바로 그때이니까, 그것보다 먼저 비를 내리시면 정확한 ‘이른 비’가 되지 못하여 오히려 씨앗이 자리를 잡고 뿌리를 내리는 데 방해가 되니 하나님도 그때까지 기다리십니다. 정확한 그 시간보다 먼저 비를 내리면 ‘늦은 비’가 되지 못하여 곡식이 급격히 성장하지 못하고 썩어버릴 수도 있으니 가장 좋은 그 시간을 정확히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늦은 비를 내리시기 위해 지금도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이 마음을 깨달은 이사야는 분명한 확신 속에서 이렇게 선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그러므로 지금도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기 위하여 친히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기억한다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조금만 더 견디어 주십시오. 조금만 더 참아 주십시오. 서로 원망하지 말고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지금은 비록 네게브의 사막과 같은 인생길을 걷고 있을지라도, 머지않아 여러분의 삶에 은혜의 강줄기가 흘러넘칠 것이니, 하나님을 바라보며 지금도 참고 견디며 기다리는 여러분이야말로 가장 복된 인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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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야고보서 강해2021. 9. 19.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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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난 한 달간 계속해서 야고보서의 말씀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는 성도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그 구체적인 항목들을 명시적으로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의 말씀을 읽는 것만으로도 무엇이 마땅한 성도의 삶인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것처럼 야고보서는 이렇게 명령합니다. “성내기를 더디 하라” 혹은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등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성도들이 마땅히 따라야 할 또 하나의 분명한 가르침을 주고 있는데요. 본문이 시작하는 11절의 처음부터 매우 분명한 어조로 말씀합니다.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11a절) 

야고보가 예루살렘의 감독으로 있을 때,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극심한 박해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믿음을 굳건하게 지켰습니다. 극심한 박해를 피해 삶의 터전을 떠나 팔레스타인의 이곳저곳에 흩어져야 했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만큼은 조금도 타협하지 않았던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여러 가지 허물이 있었으니, 다른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또한 성도들이 서로를 향해서 화를 내고 성을 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상대방을 향한 차별 그리고 분노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성도들 사이에 갈등과 분열을 동반하였고, 그렇게 성도들의 마음이 멀어지고, 성도들 사이에 서로에 대한 미움과 시기의 마음이 가득해지니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비난하는 경우도 많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장면을 너무도 안타깝게 생각했던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을 향해 간절히 권면했던 것입니다.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11a절) 

우리는 오늘 이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야고보의 이 권면이 이천년의 긴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아니 너무도 시급한 권면이라는 사실을 먼저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어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복음 안에서 우리는 옛 생활의 모습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자녀 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도’, 곧 거룩한 무리라는 이름을 가졌고 ‘그리스도인’, 곧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라는 이름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도요 또한 그리스도인인 우리들의 모임 안에 여전히 서로에 대한 비방이 멈추지 않고 서로에 대한 비난과 비판이 계속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지만 여전히 서로에 대한 미움과 시기가 우리의 마음에 자리를 잡아 서로 한 마음을 품어 마땅한 우리의 공동체가 크고 작은 위기에 처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진실로 우리의 모임이 아름다운 신앙의 공동체를 이루기 원한다면 또한 추석 연휴를 앞두고 우리 가정마다 행복과 기쁨이 넘치는 가족 공동체를 이루기 원한다면 우리는 바로 지금 본문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온 마음을 다하여 귀를 기울어야 합니다.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11a절) 


우리는 한 가족

본문은 성도들을 향하여 “서로 비방하지 말라” 권면합니다. 그러면서 성도들이 서로 비방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와 근거, 특별히 신앙의 관점에서 서로를 비난하거나 비판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와 근거를 이야기합니다. 오늘은 우리 신앙인들이 서로 비판하거나 비난하지 말아야 할 신앙적인 이유와 근거를 오늘 본문에 근거해서 한 두 가지만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한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한 가족입니다.” 본문 11절에 이렇게 권면하잖아요.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여기에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 곧 야고보서를 가장 먼저 받아보았던 사람들을 향한 호칭이 등장하지요. 무엇입니까? “형제들아”입니다. 이미 야고보서에는 성도들을 향하여 “형제들아”라고 부르는 장면이 여럿 등장하였습니다. 그러니 이 호칭에는 특별할 것이 없다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인 야고보서 4장 11절만큼은 이 호칭이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본문의 바로 앞에 전혀 다른 호칭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야고보가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을 향해서 어떠한 호칭을 사용하였는지를 찾아보면서 야고보서 4장 8절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약 4:8) 

찾으셨나요? 두 가지 호칭이 등장하지요? 먼저는 “죄인들아”입니다.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그리고 또 하나의 호칭이 무엇입니까?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입니다.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나 혹은 팔레스타인에 흩어진 성도들을 향해서 야고보는 ‘죄인들아’ 그리고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바로 뒤 본문 11절에서 너무도 다른 의미의 호칭인 “형제들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형제들아”라는 호칭은 야고보의 의도가 담겨 있는 표현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자, 이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호칭의 의미를 생각하며 다시 한번 11절의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그 의미를 살려 다시 읽어보면 이렇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서로 형제이니, 너희는 서로 자매이니, 너희는 서로 가족이니 서로 비방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본문 11절은 계속해서 “형제를 비방하는 자” 혹은 “형제를 판단하는 자”에 대해 말씀하지요(11b절). 그런 점에서 본문의 권면은 어디까지나 하나님 안에서 한 가족이 된 성도들 사이의 관계에서 그리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우리의 가정 안에서 지켜야 할 윤리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의 가치관에 근거하여 분명한 분별력을 갖추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일을 멈추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성도들은 마땅히 성경에 근거하여 바른 분별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러나 같은 시간과 같은 공간 안에서 한 분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 성도들은 서로 믿음의 가족이잖아요. 우리는 서로 성씨도 다르고 출신도 다르고 혈연으로 묶여 있는 것은 아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한 가족이 되었잖아요. 한 가족이라면 서로의 잘못을 이야기해 줄 수도 있고 지적할 수도 있겠지만, 비방하기보다는 감싸주고 판단하기보다는 서로의 부족함을 보충해주는 것이 가족의 역할이 아닌가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으로 대답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믿으시나요? 또 한가지, 여러분은 지금 이 자리에서 함께 예배하는 분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마지막으로,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이 자리에서 함께 예배하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안에서 형제와 자매가 되었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믿으시나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위대한 믿음을 제 아무리 입술로 고백하더라도 서로를 향해 비방하고 비난할 뿐 형제를 그리고 자매를 용납하고 품어주지 않는다면 우리의 모임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아름다운 믿음의 공동체가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교회도 마찬가지고 우리의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교회가 아름다운 믿음의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가정이 사랑과 행복이 가득한 가정이 되기 위해서는 서로에게 불만을 품을 만한 것도 많고 상대방의 언어와 행동을 바꾸어주기를 바라는 것도 많이 있지만 그래도 식구이니기에 그래도 가족이기에 그래도 형제이고 자매이기에 비판하고 비난하기보다 받아주고 용납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의 역할: 판단이 아니라 실천

오늘 본문은 성도들을 향하여 “서로 비방하지 말라” 권면합니다. 그러면서 성도들이 서로 비방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와 근거, 특별히 신앙의 관점에서 서로를 비난하거나 비판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와 근거를 이야기하지요. 우리 신앙인들이 서로를 비판하거나 비난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와 근거, 그 첫째는 우리가 한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한 가족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우리의 역할은 판단이 아니라 실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역할은 판단이 아니라 실천입니다.” 본문 11절의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11b절) 

만일 형제라고 하면서, 만일 자매라고 하면서 서로를 비방하거나 판단하는 사람은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네요. 그 이유는 매우 단순한데 하나님의 말씀인 구약의 율법이 명시적으로 형제를 향한 비방과 비난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레위기 19장에는 이러한 말씀이 있습니다. 

너는 네 백성 중에 돌아다니며 사람을 비방하지 말며 (레 19:16) 

레위기의 율법은 서로를 비방하지 말라고 명령하신 뒤에 곧 이어 더욱 강력한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레 19:18) 

율법의 말씀은 분명합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면, 그리하여 하나님 안에서 한 가족이 되었다면 우리는 서로를 비방하거나 비난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대신 서로의 허물과 약점을 감싸주어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을 사랑하듯 해야 합니다. 이것이 구약의 율법이든 신약의 서신서든 동일하게 가르치는 교훈입니다. 그런데 만일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게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함께 신앙생활을 하며 하나님 안에서 서로 형제라고 서로 자매라고 입술로 말은 하지만, 뒤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향해 비방하고 비난한다면 그것은 단지 한 사람을 향한 비방을 넘어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율법을 거부하고 판단하는 행동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문 11절은 율법을 대하는 자세를 두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합니다.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곧 율법의 말씀에 순종하여 형제와 자매에 대한 비방과 비난을 멈추지 않는다면 그는 율법의 준행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는 스스로 율법의 재판관이 되는 것입니다(11c절). 여기에 율법을 대하는 두 가지 자세가 등장하네요. 그 첫째가 무엇입니까? 율법의 준행자입니다. 또 하나는 무엇입니까? 율법의 재판관입니다. 계속해서 본문 1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12a절) 

입법자, 곧 율법을 제정하시는 분도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또한 재판관, 곧 율법에 따라 사람을 심판하실 분도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 인간에게는 율법을 제정할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그래서 모세조차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율법을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전달자였지 율법의 제정자는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이었던 야고보조차 율법에 명시되어 있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며 성도들을 교훈할 뿐이지 자기 스스로 성도들이 따라야 할 삶의 규정을 제정할 수는 없었습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율법에 따라 사람을 심판할 권한이 없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수많은 선지자들도 자신의 생각을 따라 다른 사람을 판단할 수 없었기에, 그저 하나님께서 직접 판단하신 내용을 백성들에게 전해주며 회개를 촉구할 뿐이었지요.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율법의 제정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율법의 재판관도 아닙니다. 우리가 감당해야 할 역할은 오직 율법을 실천하는 말씀의 준행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너무도 많은 성도들이 율법의 준행자가 되기 위해서는 노력하지 않고, 스스로 율법의 제정자나 재판관이 되려 한다는 점이지요. 그래서 메튜 헨리(Mathew Henry)라는 분은 오늘 본문의 말씀을 해설하면서 이렇게 탄식했어요. “재판관이 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율법에 복종하기를 싫어한다.” 부인하고 싶지만 우리의 마음 깊은 곳을 너무도 정확히 저적하고 있지 않습니까? 율법의 말씀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분명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너무도 분명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서로 형제가 되었다면, 너희가 서로 자매가 되었다면 서로 비방하지 말라” 하나님의 뜻이 이토록 분명할진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 말씀의 재판관이 되지 마십시오. 그 대신 말씀의 준행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너는 누구이기에

본문은 너무도 분명하고 명백한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고 있지요.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그런데 오늘의 메시지를 더욱 힘있게 만드는 것은 본문의 마지막 질문입니다. 우리가 흔히 수사 의문문이라고 부르는 형태의 질문이지요. 그 질문은 무엇입니까?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12b절) 

로마서를 읽다 보면 사도 바울도 거의 동일한 수사의문문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로마교회 안에도 성도들이 서로 비판하고 비난하는 일이 일어났거든요. 로마교회 성도들이 서로를 비판했던 중요한 이슈는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느냐 먹지 않느냐의 문제였습니다. 성도들 중에는 우상에게 마쳐진 고기를 먹는 사람도 있었고 먹지 않는 사람도 있었어요. 그런데 문제는 고리를 먹는 사람은 먹지 않는 사람을 비판하고 먹지 않는 사람은 먹는 사람을 비방했다는 사실입니다. 야고보가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서로 비방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안타까운 마음에 ‘형제 들이여 서로 비방하지 말라’ 권면하였던 것처럼, 이번에는 사도 바울이 로마교회 성도들이 서로를 비판하는 장면을 바라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에 “서로 비판하지 말라”라고 권면합니다(롬 14장). 그러면서 이렇게 질문해요.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롬 14:4) 

사도 바울의 이 질문,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야고보가 던지는 질문,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이 두 가지 질문은 바울의 목소리나 야고보의 육성이 우리의 귓가에 지금도 들리는 것만 같은 강력한 호소력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지요. 그리고 “너는 누구냐?”라는 이 질문은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비방하기에 앞서 ‘너 자신을 살피라’고 우리를 촉구합니다. 

미국 역사상 지금까지도 최고의 신학자로 손꼽히는 조나단 에드워즈라는 분이 계십니다. 미국이 영국의 식민지였을 시절, 미국에서 강력한 부흥운동이 일어났고 역사가들은 이때의 부흥운동을 이른바 미국의 제1차 부흥운동이라고 부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 운동의 선두주자였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조나단 에드워즈는 부흥운동의 어두운 면도 분명히 관찰할 수가 있었습니다. 성령을 체험하고 하나님을 향해 열정을 품은 사람들이 시간이 조금 더 흐르면서 그들의 신앙이 변색되거나 신앙의 부정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관찰할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군가의 신앙적인 열정이 참된 것인지 혹은 거짓된 것인지 분별할 수 있을까를 깊이 연구하여 지금까지도 기독교 신학의 매우 중요한 고전으로 남게 되었던 한 권의 책을 집필하게 되었는데, 그 책의 제목이 <종교 감정론>(Religious Affection)입니다. 자, 이 책에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거짓된 신앙의 열정의 중요한 특징 한 가지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거짓된 열심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미워하는 열심은 없으면서, 
다른 사람의 죄를 미워하는 열심은 있다. (X2) 

언듯 보기에 신앙의 열정으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거론하기도하고, 성경을 인용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잘못됐다, 저것이 잘못됐다는 그들의 이야기는 하나부터 열까지 틀린 말이 없습니다. 다 옳은 말이고, 그 사람의 말대로 잘못을 고쳐나가면 모든 것이 완벽해질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거짓된 열심인 이유는 다른 사람들의 죄를 미워하는 열심은 있지만, 정작 자기 자신의 죄를 미워하는 열심은 찾아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거짓 열정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을 향해 야고보는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질문합니다.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사도 바울도 이처럼 거짓된 열정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을 향해 분명히 질문합니다.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성도 여러분, 혹시 주변 사람들에게 믿음 좋다고 평가받는 우리가 거짓된 신앙의 열정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닐까요? 다른 사람들이 나서지 않을 때 당당히 바른 이야기를 하는 정의의 사도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죄를 미워하는 열심은 있지만, 정작 나 자신의 죄를 미워하는 열심이 없다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번 추석 가족들의 잘못을 비판하고 비난하기에 앞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깊이 성찰하기를 바랍니다. 교회 안에서 함께 예배하는 다른 성도들의 잘못을 비판하고 비방하기에 앞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율법의 재판관이 되시니 모든 판단은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말씀의 재판관이 아닌 준행자가 되어 형제들을, 그리고 자매들을 용서하고 품어주며 사랑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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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야고보서 강해2021. 8. 29.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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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19b절) 

세 가지 교훈이지요. 첫째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경청하라는 것이요, 둘째는 나의 입으로 말하는 것은 최대한 자제하라는 말씀이며, 마지막 세 번째는 쉽게 분노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 구절만 똑 떼어서 읽어보면,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든 상관없이 모두에게 적용할 수 있는 삶의 지혜 혹은 삶의 자세를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채, 내 생각만을 주장하다 보면 우리는 말의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성급하게 분노하다 보면 이후 큰 후회를 낳게 되는 경우가 많지요.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이 권면은 신앙생활과 결부시키지 않더라도 우리의 삶을 지혜롭게 살아가는 데 큰 유익이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 가르치는 교훈, 곧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는 말씀은 앞뒤의 문맥을 살펴보면 단순한 삶의 지혜를 넘어 신앙생활에 대한 매우 의미 있는 교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자, 본문에서 ‘듣기는 속히 하라’ 말씀하시는데, 그러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들어야 한다는 말씀일까요? 이에 대한 답을 본문의 앞뒤 문맥을 통해 우리는 어느 정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본문 바로 앞에 위치한 야고보서 1장 18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을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약 1:18) 

여기에 “진리의 말씀”이 등장하지요. 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에 바로 이어 등장하는 야고보서 1장 2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약 1:21) 

여기에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는 명령이 등장하네요. 그러므로 본문 19절에 등장하는 권면, 곧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라’는 말씀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언어생활에 대한 권면으로 적용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 일어나는 관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곧, ‘듣기는 속히 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귀를 쫑긋 세우고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라는 뜻입니다. 동시에 ‘말하기는 더디 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잠잠히 듣고 나의 생각이나 나의 언어를 덧붙이지 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고대 교부 가운데 지금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있지요. (예전에는 영어식 이름인 어거스틴으로 주로 불렸고, 요즘에는 원래의 로마식 이름은아우구스티누스로 주로 부르곤 합니다. 어떻게 부르든 동일 인물이라고 생각하시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어느 날 어느 마니교 신자와 논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마니교는 아우구스티누스가 기독교로 회심하기 이전에 심취하였던 종교였지요. 아우구스티누스가 어느 마니교 신자와 논쟁을 벌이고 있는데, 그 사람이 아우구스티누스에게 계속 화를 내며 이렇게 소리쳤다고 합니다. ‘내 말을 들어보세요! 아니, 내 말을 들어보시라니까요!’ 그때 아우구스티누스가 했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내가 당신 말을 들을 것이 아니라 
또 당신이 내 말을 들을 것도 아니라 
우리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도록 합시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듣느냐에 따라 좌우됩니다. 어떤 분들은 자신의 생각과 주장이 너무도 강합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주관을 가지고 평가하고 분별하는 것은 나름의 유익한 지혜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이 너무도 강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의 믿음이 바르게 성장할 수가 있겠습니까? 또 어떤 분들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너무 쉽게 마음을 빼앗깁니다. 이 사람이 이 말을 하면 이것이 옳은 것 같고, 저 사람이 저 말을 하면 저것이 옳은 것 같습니다. 자신의 의견을 잠시 보류하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것은 참 좋은 덕목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이 든든한 반석 위에 서기 위해서는 주변의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말하든 상관없이 우리의 초점을 하나님의 말씀에 두고 그분의 말씀만을 내 인생의 유일한 지표로 삼아야 합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의 권면은 우리의 믿음과 신앙이 시간이 지날수록 성숙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우리 모두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이야기와 같이 나의 주장을 내세울 것도 아니요,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것도 아니라, 다 함께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신앙생활에 있어 분노의 위험성

야고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해야 합니다. 그런데 본문 19절에는 여기에 한 가지 권면이 추가되어 있지요. 그것이 무엇입니까? “성내기도 더디 하라” 그러면서 본문 20절은 성을 내는 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덧붙여 주고 있습니다.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20절) 

지금 야보고서는 사람이 성을 내는 것, 곧 화를 내는 것을 단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간관계를 무너트린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물론 화를 조절하지 못하는 사람은 사람들과의 관계에 큰 어려움을 겪게 되지요. 그러나 분노라는 주제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넘어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데 큰 장애물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본문이 성내기를 더디 하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도 단지 인간관계에 대한 조언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생활과 관련된 문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자, 그러면 성을 내고 화를 내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에는 어떠한 영향을 미칠까요? 이 질문을 가지고 19절에 등장하는 3가지 권면의 순서를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라’ 곧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서 들으라고 권면합니다. 두 번째로, ‘말하기는 더디 하라’ 곧 하나님의 말씀에 인간적인 생각을 덧붙이지 말라고 교훈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큰 장애물이 되는 것을 걷어 치우라고 말씀하지요. 그것이 무엇입니까? ‘성내기도 더디 하라’입니다. 계속 이어지는 21절의 말씀을 보면 이 점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어떻게 받으라고요?) 온유함으로 받으라 (약 1:21)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자세는 어떠해야 합니까? 온유함으로 받아야 합니다. 여기에 성내는 마음과 온유한 마음이 서로 대조를 이루고 있어요. 만일 나의 마음에 분노가 쌓이고, 그 분노가 나의 말과 나의 행동을 지배하고 있다면,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와도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마음에 심겨지지 않습니다. 반대로 분노의 감정을 가라 앉히고 온유한 마음을 간직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 깊이 받아들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마음이 분노로 가득 차 있느냐, 아니면 온유한 마음을 유지하느냐는 문제는 곧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의 문제가 됩니다. 그리고 이제 이것은 더 큰 주제로 확대됩니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22절) 

야고보서는 이제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지, 말씀을 듣기만 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힘주어 강조합니다. 말씀을 듣기만 하는 사람은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네요. 그러니 지금 내가 화를 내느냐 그렇지 않으냐, 분노를 조절하느냐 조절하지 못하느냐의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마음으로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의 문제입니다. 또한 그것은 한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이 되느냐 아니면 말씀을 들을 뿐 실천하지 않아 스스로를 속이는 사람이 되느냐의 문제가 됩니다. 그리고 여러분, 야고보서 1장의 흐름을 조금 더 따라가다 보면 분노의 문제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또 하나의 주제로 확장됩니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여기에 경건이라는 주제가 등장하네요)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26절)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으니까 내가 예배에 잘 출석하고 있으니까 내가 신앙생활 열심히 하니까 경건한 사람이라고 스스로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상은 자기의 혀를 재갈물리지 않아요.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라’ 말씀하였는데, 실제로는 자신의 입을 절제하지 않고 온유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이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말씀을 들을 뿐이지 그 말씀을 실천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본문 26절의 표현처럼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어떻다고요? 헛것입니다. 반면 본문 27절은 참된 경건에 대해서도 말씀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27절) 

참된 경건은 무엇입니까? 말씀을 듣되 온유한 마음으로 받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듣는데서 멈추지 않고 그 말씀을 실천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 세상의 어떠한 유혹이 찾아와도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이라고요.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마음에 일어나는 분노의 감정을 제어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는 너무도 중요한 주제입니다. 나의 마음에 분노를 쌓아두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유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로 이어집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삶 속에 실천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로 이어지고, 결국에는 하나님 앞에서 경건한 사람이 되느냐 아니면 스스로를 속이는 위선적인 신앙인이 되느냐의 문제로까지 발전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과정의 시작점이 무엇이라고요? 지금 내 마음에 일어나는 분노를 다스릴 수 있느냐 없느냐 라는 어찌 보면 매우 작은 그 문제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힘주어 우리에게 권면하는 것이지요.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나의 사랑하는 자매들이여, 나의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내기도 더디 하라 (19절) 


고통의 상황과 점화 사고

분노는 감정이기 때문에 내가 원하지 않는다고 일어나지 않는 것도 아니고, 내가 원한다고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여러 가지 감정은 주변 환경이나 우리가 마주친 사건에 따라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이요, 분노도 이와 같은 감정이기에 특정한 상황에 마주치면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분노의 감정이 일어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권면하는 말씀을 잘 생각해보십시오. ‘너희는 분노의 감정을 전혀 품지 말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무엇을 명령하시죠? ‘성내기를 더디 하라’ 분노라는 감정이 일어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 있습니다. 문제는 분노라는 감정이 일어날 때 성을 내는 것, 곧 나의 언어와 나의 행동으로 화를 내는 것을 더디 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분노에 대해 연구하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인간이 화를 내기 위해서, 곧 분노를 발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 첫 번째는 고통의 상황입니다. 나의 마음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상황을 만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분노라는 감정이 일어나게 되지요. 바로 이것이 고통의 상황입니다. 비유로 이것을 설명하면, 마음에 분노의 감정을 일으키는 고통의 상황은 마치 연료와 같습니다. 가스가 되었든, 기름이 되었든 연료가 있어야 불을 붙일 수 있잖아요. 우리에게 찾아오는 고통의 상황이 그러한 연료가 됩니다. 그런데 고통의 상황, 곧 나에게 분노의 감정을 일으키는 특정한 상황이 주어진다고 모든 사람들이 분노를 발하지는 않습니다. 연료가 있다고 해서 그 모든 곳에 불이 타는 것은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불이 타오르려면 연료를 공급해줄 뿐만 아니라 그곳에 불꽃을 점화하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불을 붙이는 것을 ‘점화 사고’라고 말합니다. 한 마디로 우리의 생각이죠. 그러므로 고통의 상황이 일어나고 그로 말미암아 분노의 감정이 내 마음에 일어나는 것은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현상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고통의 상황은 화를 내고 분노를 폭발시킬 수 있는 연료를 충분히 제공하지요. 그러나 문제는 바로 그때 우리의 생각이 어느 쪽으로 향하느냐에 따라, 곧 연료가 가득한 그곳에 불길을 당기느냐 당기지 않느냐에 따라 나의 말과 나의 행동이 분노를 폭발시킬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누구에게나 고통의 상황은 찾아옵니다. 그 가운데 누구의 고통이 객관적으로 더 크고 누구의 고통이 객관적으로 더 작은지 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의 상황을 다른 사람의 고통보다 언제나 더 크게 느낀다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렇게 자신에게는 너무도 크고 무겁게 여겨지는 고통의 상황이 찾아왔을 때, 우리 앞에는 두 가지 선택지가 놓여 있지요. 고통의 상황에 대해 지속적으로 부정적인 생각을 이어가며 나의 마음과 행동에 분노가 가득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동일한 고통의 상황 속에서도 부정적인 생각을 끊어 버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분노의 감정이 사그라들게 만들 수도 있어요. 그리고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이 두 가지 선택의 결과는 우리의 신앙생활을 너무도 극명하게 달라지게 만듭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에 큰 고통이 몰려와 분노의 감정이 일어나고 계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내기를 더디하라’는 말씀을 실천하는 위대한 성령의 은혜가 여러분에게 임하기를 바랍니다. 고통의 상황 자체가 사라지는 것도 참 감사한 은혜입니다. 그러나 고통의 상황이 변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내기를 더디 하는 은혜’를 주신다면, 그리하여 우리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분노의 감정을 조절하고 다스릴 수 있다면 바로 그때 우리는 참된 경건을 향하여 한걸음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서의 복음

‘성내기를 더디 하라’ 이것은 우리 성도들에게 요청하시는 하나님의 분명한 뜻입니다.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는 말씀도 이제는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분노의 감정이 찾아왔을 때, 노하기를 더디 해야 마침내 경건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도 수긍이 됩니다. 그러나 여전히 분노를 조절하고, 화를 억제하기가 너무도 어려우신 분들이 계시지 않나요?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모든 이야기에 감추어진 하나의 대전제가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야고보서 1장 19절 이후의 말씀을 오늘 설교의 본문으로 함께 묵상하고 있기에 너무도 중요한 하나의 대전제를 살펴보지 않고 본문이 가르치는 ‘성내기를 더디 하라’는 말씀만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 바로 앞 구절은 참으로 위대한 하나님의 선물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야고보서의 복음, 곧 야고보서가 선포하는 복음이라고 표현하고 싶어요.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무엇을 속지 말아야 할까요?)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약 1:16-17a) 

여기에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하나님께부터 내려오는 선물이라고 말씀하시네요. 그러면 오늘 설교의 주제인 성내기를 더디 하는 것, 곧 나의 마음에 일어나는 분노의 감정을 조절하고 자제하는 힘도 내 스스로의 결단이나 내 스스로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 아닐까요? 야고보서는 계속해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약 1:18) 

야고보서가 선포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로 하여금 첫 열매가 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거듭남, 곧 다시 태어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옛 성품이 죽고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창조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시는 능력이 된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성내기를 더디 하라’는 이 하나의 말씀을 실천하며 온유한 마음을 품는 것이 뭐 그리 어려운 일이 되겠습니까? 나의 의지로는 힘들지요. 나의 결단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성품을 새롭게 빚으시는 하나님의 손길 안에서 우리는 얼마든지 분노를 조절할 수 있고 노하기를 더디 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복음의 능력을 모두 믿으시지요? 그러면 그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며 이번 한주 딱 한 가지만 실천해보자고요. 무엇을 실천할까요? ‘성내기를 더디 하라,’ ‘노하기를 더디 하라’ 이 말씀 한 구절만 실천해보자고요. 노하기를 더디 하면 그것이 연쇄반응을 일으켜 우리로 하여금 참된 경건에 이르게 한다고 말씀하시니, 너무 멀리 있는 것 바라보지 말고 ‘노하기를 더디 하라’는 이 한 가지 말씀만 실천해보자고요. 이번 한 주도 우리에게 고통의 상황은 찾아올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분노의 감정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미 복음의 은혜를 허락하셨으니, 이번 한 주간 ‘노하기를 더디 하라’는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이 은혜도 반드시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성내기를 더디 하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오늘보다는 내일 참된 경건의 삶에 한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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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야고보서 강해2020. 6. 12. 0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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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실과 수다쟁이

기독교의 영원한 고전 가운데 하나인 <천로역정>이라는 책은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순례자의 길을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은유적으로 풀어놓고 있지요. 존 번연이 기록한 <천로역정>에는 순례자인 크리스천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길에 신실(faithful)이라는 사람을 만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천로역정>의 주인공 크리스천은 자신을 앞서가는 ‘신실’이라는 인물을 힘껏 찾아가 그의 매우 유익한 신앙의 대화를 나눕니다. ‘신실’은 자신이 겪은 수많은 어려움, 유혹, 모욕 등을 이야기하면서 어떻게 그 모든 장애물을 뛰어넘고 여기까지 달려올 수 있었는지를 설명해줍니다. 그리고 신실은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나오는 노래를 한 곡 부르기 시작하지요. 

거룩한 부르심을 좇아 순종하는 자들에게 
때마다 시험이 찾아오네 
육신의 평안을 갈망하는 수많은 유혹이 
쉼 없이 나를 공격해오니, 
때로는 유혹에 사로잡혀 
굴복당한 채 버려지는 구나. 
오, 주의 길을 가는 순례자들이여! 
항상 깨어 담대하게 유혹에 맞서세

우리가 하나님 앞에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과정에는 시험도 찾아오고, 유혹도 찾아옵니다. 때로는 시험과 유혹에 넘어지는 경우도 없지 않지만, 존 번연은 ‘신실’이라는 등장인물을 통해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하는 것입니다. “오, 주의 길을 가는 순례자들이여! 항상 깨어 담대하게 유혹에 맞서세” 그리고 마침내 ‘신실’이라는 인물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수많은 시험과 유혹을 넉넉히 이기게 하여 주신다고 힘주어 말합니다. 

그런데, <천로역정>의 주인공 크리스천이 ‘신실’이라는 이름의 사람을 만나 신앙의 유익한 대화를 하고 있을 때 그들 곁을 지나가는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여러 가지 유혹과 여러 가지 시험을 모두 이겨내었던 ‘신실’이란 사람까지도 거의 넘어트릴 뻔 했던 한 사람입니다. 그의 이름은 ‘수다쟁이’(talkative)입니다. ‘수다쟁이’는 하나님에 대해서, 진리에 대해서, 성경에 대해서 거침없이 아름다운 언어들을 쏟아 놓습니다. 그러자 ‘신실’이라는 사람이 ‘수다쟁이’의 말에 빨려 들어가기 시작하는 거예요. ‘수다쟁이’와의 대화에 진리가 있고 생명이 있는 것처럼 그의 말을 믿고 신뢰하기 시작합니다. 그때 <천로역정>의 주인공 크리스천이 ‘신실’이라는 사람이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영혼이 없는 육체는 시체나 다름없듯이, 행동을 수반하지 않는 말 또한 시체에 불과하지.
실천이야말로 종교에서는 영혼이나 다름 없다네.”

그리고 존 번연은 이 장면을 저술하면서 성경구절을 하나 인용하는데, 그 구절은 우리가 계속해서 묵상하는 야고보서의 핵심 구절, 곧 야고보서 1장 27절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약 1:27)

여러분, 야고보서가 강조하는 참된 경건은 입술의 화려한 언어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존 번연이 ‘신실’이라는 인물과 ‘수다쟁이’라는 인물을 대조시켜 이야기하는 것처럼, 화려한 언변이나 능숙한 말이나 박식한 지식이 어쩌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신실하게 제자의 길을 걸어가는데 방해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존 번연은 <천로역정>에서 ‘신실’이라는 사람의 입술을 통해 ‘수다쟁이’에 대해 이렇게 노래합니다. 

수다쟁이가 처음에 얼마나 득의양양했는지 기억하는가! 
무엇이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아니하고, 
그 누구를 만나든지 거칠 것이 없었도다! 
그러나 신실이 영혼의 은혜를 논하자
마치 달이 기울 듯 그도 허망하게 쓰러져 가는구나. 
영혼의 은혜를 모르는 자 모두 그와 같이 되리. 

입술로 제 아무리 교회 생활에 대해, 신앙생활에 대해, 하나님에 대해, 성경에 대해 줄줄 읊어대어도 그의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풍성한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였다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신실하게 경건의 삶을 살아가지 않는다면, 마치 달이 기울어지는 것처럼 한 순간에 그의 믿음도 넘어지게 되리라는 경고입니다. 


입술의 경건

오늘 본문은 경건에 있어 우리의 입술, 우리의 언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한 번 더 강조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중심 주제가 되는 구절이 바로 2절에 등장합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나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2절)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나”라는 구절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경건한 삶을 이루어나감에 있어서 사람들에 따라 다양한 영역에서 실수하고 넘어진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사람에 따라서 쉽게 이기지 못하는 유혹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재물에 대한 욕심이 경건에 장애물이 되기도 하고, 어떤 분들은 명예에 대한 욕심이 경건에 장애물이 되기도 합니다. 어떤 분들은 취미생활이, 어떤 분들은 특별히 음식이, 어떤 분들은 술이나 담배가. 이렇게 다양한 영역에서 유혹을 받아 넘어지게 되더라는 것이죠. 그런데 사람마다 경건한 삶을 위해 나아가다 보면, 다양한 영역에서 넘어지게 되는데 공통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영역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언어의 실수, 말의 실수입니다. 2절을 다시 보십시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곧, 사람들마다 다양한 영역에서 실수하고 넘어집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넘어지고 실수하는 영역이 어디라고요? 언어의 실수이고, 말의 실수입니다. 2절을 계속보십시오. 그런데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 전한 사람”이 됩니다. 왜냐하면 말에 술수가 없는 사람이라면 “능히 온몸도 굴레”를 씌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분들은 재물에 대한 욕심, 다른 분들은 명애에 대한 욕심, 또 다른 분들은 술이나 담배, 또 다른 분들은 식탐이나 취미활동 등. 우리가 경건을 이루는 데 다양한 영역에서 유혹을 받아 실수도 하고 넘어지지만, 그러한 실수와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는 첫걸음이 있는데 그것은 입술에 대한 절제입니다. 언어에 대한 절제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 사실을 3 가지 비유를 통해 설명합니다. 첫째로 말의 입에 물린 재갈입니다. 

우리가 말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 몸을 제어하는 것이라 (3절)

인간이 길들인 짐승들 중에서 특별히 성공적인 사례가 바로 말이라고 합니다. 강아지 같은 경우는 크기가 작잖아요. 그런데 말은 얼마나 몸집이 커요, 그리고 특별히 야생의 습성을 여전히 지니고 있는 동물이 말이랍니다. 그런데 그 말을 인간은 아주 작은 하나의 도구, 곧 말의 입에 물리는 재갈을 통해 길들이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3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말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은” 그 목적이 무엇입니까? 말로 하여금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이것이 목적입니다. 인간에서 순종하게 하려고 입에 재갈을 물린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입술을 제어한다면, 마치 말의 입에 재갈을 물리는 것처럼 우리의 입술을 제어할 수만 있다면, 우리의 언어를 제어할 수만 있다면 우리의 온몸과 우리의 모든 삶은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건의 시작점은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의 언어를 절제하는 것, 우리의 입술을 절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동일한 내용을 설명하는 두 번째 비유는 선박의 방향을 정하는 작은 키입니다.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써 사공의 뜻대로 운행하나니 (4절)

여기에 등장하는 배는 작은 돛단배가 아닙니다. 거대한 유람선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웬만한 광풍에는 끄떡도 없고요, 바다 위의 얼음도 다 뚫고 나아가는 거대한 유람선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거대한 유람선이라도 그 배의 방향을 정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조그마한 키, 선장이나 선원의 손에 잡혀있는 조그마한 키로 거대한 유람선이 나아갈 방향이 정해진다는 말씀입니다. 4절에서 특별히 관심을 기울일 단어는 “사공의 뜻대로”입니다. “지극히 작은 키로서”, 그 다음에 무엇이라 말씀합니까? “사공의 뜻대로” 운행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입술, 우리의 언어가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있기만 한다면 우리의 몸,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대로 순조롭게 항해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언어를 제어하고, 우리의 입술이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있으면 마치 말의 입에 재갈을 물린 것처럼, 마치 거대한 유람선을 작은 키가 조절하는 것처럼 우리의 삶과 우리의 행동 모두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경건의 삶으로 이끌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제 아무리 경건한 삶을 위해 노력하고 최선을 다하더라도 우리의 입술을 제어하지 못하면, 우리의 언어를 제어하지 못하면 그 모든 경건을 위한 노력은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맙니다. 바로 그 사실을 보여주는 비유가 오늘 본문에서 세 번째로 등장하는 비유, 곧 많은 나무를 태워버리는 불의 비유입니다.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5-6절)

6절을 다시 보십시오. 제어할 수 없는 입술, 제어할 수 없는 언어, 제어할 수 없는 혀는 곧 무엇입니까? “불”입니다.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 곧 경건을 위한 수레바퀴를 다 불살라버립니다. 오늘 본문은 그 사르는 불이 얼마나 무서운지 우리의 입술과 우리의 혀가 내뿜는 불의 출처를 어디라고 이야기합니까?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입술에 경건이 전혀 없는 사람, 언어를 조금도 제어할 수 없는 사람, 그래서 입술에서 불을 뿜는 사람이 다른 영역에서 제 최선을 다해 경건을 연습한다면 하나님은 그의 경건을 기쁘게 받으실까요? 오늘 본문의 대답은 명확합니다. 입술을 제어하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경건에 이를 수 없습니다. ‘내가 말만 조금 세게 말하지 마음은 그렇지 않다고.’ 성경은 그 말을 믿지 않습니다. 다른 영역은 사람들에 따라 조금 차이가 있을 수 있어요. 그러나 입술의 경건은 예외가 없습니다. 입술이 먼저 경건하지 못하면, 여러분의 삶 전체도 경건할 수 없습니다. 


혀를 제어하는 지혜

성경의 가르침은 분명합니다. 우리 삶의 경건, 우리 온몸의 경건은 어디로부터 시작할까요? 바로 우리의 입술로부터 시작됩니다. 제 아무리 경건한 삶을 위해 노력을 해도 입술을 제어하지 못하면 그 모든 노력을 허사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입술을 제어할 수만 있다면 그때부터 우리는 경건의 항로에 접어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야 입술의 경건을 이룰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분명한 대답이 잠언에 등장합니다.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잠 10:19) 

입술의 경건을 이루는 단 하나의 방법, 말을 적게 하시는 겁니다. 말을 안 하면 더 좋습니다. 최근 어느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교회 안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 누구인가?라고 질문하고는 이렇게 답하셨어요. “교회 안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은 전화를 걸 때마다 언제나 통화 중인 사람이다.” 마치 <천로역정>에 나오는 ‘수다쟁이’(talkative)와 같은 사람들이지요. 말이 많으면 나의 영혼을 파괴하고, 교회 공동체를 힘들게 합니다. 그러나 침묵하는 사람, 침묵 가운데 하나님과 깊이 대화하는 사람에게는 경건이라는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중세 수도원에서 사용하였던 경건 훈련의 중요한 방법 가운데 하나가 침묵입니다. 침묵이에요. 침묵 속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침묵 속에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고, 침묵 속에서 내 안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잠잠한 음성을 들을 수 있어요. 그런 점에서 기독교 역사 2000년 동안 존경받는 고대 교부 가운데 한 분이신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예수님을 가장 많이 닮을 때는 당신이 입을 다물고 있을 때다.” 

어느 성자는 말을 하기에 앞서 늘 스스로에게 세 가지 질문을 먼저 던졌다고 하지요? 첫 번째, 지금 내가 하려는 말이 사실인가? 사실로 확인되지 않았다면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두 번째, 지금 내가 하려는 말이 다른 사람에게 덕을 끼치는가? 사실이라도 덕을 세우지 못하면 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지금 내가 하려는 말이 꼭 내가 해야 하는가? 사실이고 그것이 덕을 세운다 하더라도 꼭 내가 해야 할 말이 아니라면 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세 가지 기준을 적용한다면 할 말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어요. 그러니 침묵하게 되는 것이지요. 

물론, 감사의 말, 사랑의 말, 칭찬의 말은 참으로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언어 속에 그와 같은 말은 그저 극소수에 불과하다는 것을 다 알고 계시잖아요. 그러므로 잠언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잠 10:19)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다윗도 입버릇처럼 이렇게 기도하잖아요.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시 19:14)

특별히 다윗은 자신이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악인이 자신의 눈 앞에 있을 때 더욱 조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행위를 조심하여 내 혀로 범죄하지 아니하리니 
악인이 내 앞에 있을 때에 
내가 내 입에 재갈을 먹이리라 (시편 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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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야고보서 강해2020. 6. 12. 0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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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의 전체 주제는 1절에 담겨 있습니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누구라도 한번 읽기만 하면 쉽게 이해가 되는 말씀이지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특별히 영광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졌다면 – 조금 더 풀어 볼까요?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낮아지셨지만 지금은 하늘의 영광 가운데 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우리가 가지고 있다면 –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들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1절의 말씀은 누구든 읽기만 하면 쉽게 이해가 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한 구절의 말씀을 우리의 삶 속에서 실현하기는 왜 그토록 어려울까요? 너무도 단순한 이 한 구절의 말씀을 교회 공동체 안에서 실천하는 것은 왜 그토록 어려운 것입니까? 


차별하는 신앙인

야고보서는 전통적으로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기록한 것으로 알고 있지요. 야고보서의 저자가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라면 그는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이었기에 야고보서의 기록 장소는 예루살렘이 유력합니다. 그리고 야고보서를 받아보는 독자는 예루살렘에 큰 박해(Cf. 행 8:1)가 일어난 후 팔레스타인이나 시리아에 흩어져 있던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될 것입니다. [각주:1] 그들은 복음을 위해 박해를 받았던 사람들이고, 박해 가운데서도 믿음을 지키기 위해 기나긴 여정을 떠났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그렇게 믿음이 좋았던 사람들, 그렇게 믿음을 지키기 위해 고난까지도 감내하였던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다른 사람들을 차별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만일 너희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2절)

2절에 등장하는 두 사람은 회당을 처음 찾아온 새가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교회 성도들이 그에게 자리를 안내해주기 때문입니다. 이미 교회 생활을 오래 하신 분들에게는 굳이 자리를 안내해줄 필요가 없어요. 이미 자신들이 편한 자리가 다 있거든요. 그런데 새가족은 처음 교회를 오면 어느 자리에 앉아야 하는지 잘 몰라요. 아마도 2절은 그와 같은 상황을 묘사해주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무튼 두 명의 새가족이 회당을 찾아왔습니다. 

먼저 부유한 사람이 회당에 들어옵니다. 오늘 본문 2절은 그 장면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금 가락지를 깨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그의 손을 보니 금 가락지가 있고, 그의 옷을 보니 값이 나가는 아름다운 옷을 입었습니다. 누가 보아도 그의 모습은 부티가 났습니다. 그런데 조금 시간이 지나, 이제는 가난한 사람이 들어옵니다. 그 모습을 2절은 계속해서 이렇게 묘사합니다.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그의 손에는 아무런 장신구가 없고 그의 옷은 누가 보아도 남루하여 그의 형편이 궁핍하다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는 복장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팔레스타인과 시리아에 흩어져 있던 믿음 좋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행했던 모습을 오늘 본문 3절이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3절)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은 부자가 회당에 들어올 때 그의 아름다운 옷, 값나가는 옷을 눈여겨보았다고 말씀합니다. 그 사람이 부자라고 누가 알려준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의 손에 있는 금가락지를 눈여겨보았고, 그의 아름다운 옷을 눈여겨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사회적으로 높은 신분의 사람이며 부유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감각적으로 알아채고는 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아마도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초대교회의 리더급이었던 것 같아요. 부유한 사람에게 “여기,” 곧 자기와 가까운 자리에 에 앉으라고 하잖아요. 회당에서 좋은 자리를 먼저 차지하고 있었던 교회의 리더급이 부유한 새가족이 오자 자기 곁으로 안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잠시 후 회당에 또 한 명의 새가족이 찾아옵니다. 그의 손에는 아무런 장신구가 없었고, 그의 옷은 남루하였습니다. 그러자 교회 성도들이 그의 가난한 형편을 직감적으로 알아채고는 교회의 리더가 다시 한번 이야기합니다. 3절입니다.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그와 같은 초대교회 성도들의 모습을 오늘 본문은 ‘죄’라고 명백히 선언합니다.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4절)

이렇게 부자와 가난한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악한 생각을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곧, 모든 것을 판단하시고 최후에 심판하시는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관점으로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은 최후의 심판자 되시는 하나님의 자리에 스스로 올라가는 커다란 죄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문제는 이와 같은 초대교회의 믿음 좋다고 하는 성도들의 모습이 오늘 날에도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야고보서의 기록이 있은 지 약 2000년의 세월이 흐른 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명연설로 잘 알려진 미국의 흑인 해방 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이 1960년 4월 17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현재 미국에서 가장 비극적인 인종 차별이 벌어지는 현장은 매주 일요일 아침 11시 교회입니다. 
이러한 차별은 분명히 예수님의 가르침이나 예수님의 정신과 불일치할 뿐 아니라 오히려 반하는 모습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일에 실패하였습니다.’ [각주:2]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은 백인들이 모이는 교회와 흑인들이 모이는 교회의 그 건널 수 없는 구분을 이렇게 아파했던 것이지요. 이에 대해 미국 클레어몬트 신학교의 학장이었던 필립 클레이톤(Philip Clayton) 교수는 믿음이 좋다는 수많은 미국의 백인 중산층 성도들이 Amazing Grace,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워”라고 찬양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지만, 그 동일한 은혜가 흑인과 멕시칸을 비롯한 가난한 사람들에게까지도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은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비판하였던 것입니다. [각주:3]  

너무도 쉽고 간단한 단 한 구절의 말씀.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2000년 전 박해를 받으면서도 믿음을 지키기 위해 팔레스타인과 시리아에 흩어져 있던 성도들은 이 간단한 한 절의 말씀을 실천하는 데 실패하였습니다. 그리고 1900년대 중반 미국의 믿음이 좋다고 평가를 받았던 백인 중산층 개신교도들 역시 이 간단한 한 구절의 말씀을 자신의 삶으로 실천하는데 실패하고 말았지요. 
그렇다면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신앙생활을 하며 그 누구보다도 믿음이 좋다고 자타가 인정하는 우리는 이 간단한 한 구절의 말씀을 삶 속에서 실천하고 계십니까? 만일 화려한 옷을 입고 그 누가 보아도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으며 부유한 사람은 정성을 다하여 맞이하면서도 옷이 남루하고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궁핍한 사람들에게는 마음을 다하지 않는 차별이 우리에게 있다면, 오늘 본문 4절이 묘사하는 바와 같이 우리는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죄,’ 곧 ‘악한 생각으로 최후의 심판자 되시는 하나님의 자리에 스스로 올라가 앉는 반역의 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신뢰하는 분명한 믿음이 있다고 하여 다른 사람을 차별하는 죄 – 곧 악한 생각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죄 – 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 교회 안에 힘 없고 가난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면서도 그 어디에 하소연할 수 없는 그러한 분들에게 더욱더 의도적으로 여러분의 관심을 집중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믿음을 지키기 위해 고난까지도 감내하였던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회당에서 부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을 차별하였던 것처럼, 믿음으로 신대륙을 개척하며 세계 초강대국을 이루었던 믿음 좋았던 미국의 백인 개신교인들이 인종차별에 앞장섰던 것처럼, 우리 역시 교회 안에 다른 사람들을 차별하는 커다란 잘못을 범하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최후의 심판자 되시는 하나님의 자리에 나 스스로 올라가는 무거운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를 부요하게 하시는 하나님 

야고보서는 교회 안에 있는 차별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다른 사람을 차별하는 행동은 그저 하나의 잘못을 저지르는 것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을 경제적인 이유로 차별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과 역행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곧 가난의 역설에 대해 오늘 본문은 계속해서 말씀합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5절)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을 통해서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가난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하시는 분이십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누구를 통해 이루어집니까?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비단 오늘 본문만이 아니라 구약성경으로부터 시작하여 신약성경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주제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는 그저 ‘가난한 자’라고 되어있지만, 구약성경의 전통에서 ‘가난한 자’는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궁핍한 삶을 살면서도 그 마음으로부터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경건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궁핍하지만, 그래서 회당에 올 때 무엇하나 아름다운 장신구를 걸치지 못하고 남루한 옷을 입을 수밖에 없지만 마음으로부터 마음으로부터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경건한 사람들로부터 이 땅에 실현되는 것입니다. 

이쯤 되면 여러분의 마음에 반론이 생기겠지요. 어떻게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가난한 사람들에게만 나타날 수 있는가? 가난한 사람이든 부한 사람이든 상관 없이 누구든지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이 생각하면서 성경이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구별하는 구절들을 애써 외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이러한 생각에 대해 명확히 답을 줍니다. 

오늘 본문 6절과 7절은 이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하기 위해 부자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합니다.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업신 여겼도다 
부자는 너희를 억압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그들은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아름다운 이름을 비방하지 아니하느냐

말씀드린 것처럼 야고보서를 받아보게 되는 독자는 예루살렘에서 박해를 받아 팔레스타인과 시리아에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러면 그들을 박해한 사람들이 누구였을까요? 사회적으로 가난하고 경제적으로 궁핍한 사람들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한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올라있고,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던 사람들입니다. 부유한 사람들 가운데,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와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오늘 본문 2절과 같이 초신자로 교회를 찾는 경우도 있지만, 오늘 본문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부유한 자들은 교회를 억압하고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들이다. 7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들은 [부자들,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앉아서 화려한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은]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 –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그 아름다운 이름을 – (어떻게 하나요?) 비방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 6절과 7절이 묘사하는 부자들은 단지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부자들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회당에 들어온 부자들을 대하는 성도들의 태도를 지적하면서 부자들의 특징을 이야기하는 본문이에요. 그러므로 6절과 7절이 이야기하는 부자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교회 밖의 부자들이 아니라, 이미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 곧 초대교회 성도들이 부자들이라고 환영을 하고 환대를 했던 바로 그 교회 안의 부자들의 실제 모습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본문 6절과 7절은 이렇게 질문하는 것입니다. 과연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고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사람이 교회에 출석한다고 그들을 통해 교회가 부흥하고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것 같은가? 아니다. 절대 아니다. 헛된 기대에서 벗어나라. 오히려 부유한 사람들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 교회를 어렵게 하고 복음의 진보를 막는 주체다. 

참으로 죄송한 말씀이지만, 저는 설교자로서 오늘 본문인 야고보서의 말씀이 이야기하는 그대로 전할 수 밖에 없어요.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앉아 있는 사람들,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사람들, 그래서 어디를 가든 사람들로부터 환영받고 대접받는 사람들, 그들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믿음을 박해하는 사람들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그 아름다운 이름을 비방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명백한 주장이에요. 

여러분이 지금까지 지나오셨던 삶의 여정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래도 지금까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이 여러분에게 풍성한 재물이 있었기 때문인가요? 아니면, 궁핍하고 가난하고 약했던 적도 많이 있지만, 그때마다 하나님만을 붙잡고 하나님의 보호하심 가운데 하루하루 살아오셨기 때문이 아닌가요? 


우리 교회가 지금까지 지나온 역사도 생각을 해보세요. 우리 교회가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우리 교회로 말미암아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이 우리 교회에 그 누구와 도 비교할 수 없는 거액의 헌금을 하는 분들이 계셨기 때문이었습니까? 아니면 우리 교회에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굉장히 높은 자리에 올랐던 분들이 계셨기 때문인가요? 아닙니다. 아니에요. 그보다는 가난한 사람들, 약한 사람들, 억울한 일을 당해도 그 어디에 하소연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고 매일매일 받은 은혜에 감사해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다른 사람들이 하기 싫은 궂은일이라도 먼저 찾아가 헌신하고 봉사하셨던 분들이 요소요소에서 수고하셨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하나님의 역사는 경제적으로 부유한 사람들,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앉은 사람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난하지만 약하지만 그래서 아무런 힘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서 하나님만을 붙잡고 기도하는 경건한 사람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존 위슬리의 중대한 결정

영국으로부터 시작된 감리교 운동의 선구자였던 존 웨슬리가 감리교 운동을 시작할 때 그의 마음 속에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만 하는 고민이 있었습니다. 조 웨슬리의 출신 성분을 보면 그는 영국의 최고 엘리트였습니다. 그는 영국의 최고 명문, 지금도 세계적으로 최고의 명문 학교로 전혀 손색이 없는 옥스퍼터대학교(Oxford) 출신입니다. 그리고 옥스퍼드 대학교에서도 뛰어난 리더여서 학교 동료들과 함께 성경을 연구하고 공부하는 모임을 만들어 운영하였는데 그 이름이 “거룩한 공동체”라는 뜻의 Holy Club입니다. 그러니 영국의 최고 인제들이 모인 옥스퍼드에서 하나님을 향한 열정을 가지고 성경을 열심히 연구했던 동료들로 구성된 Holy Club의 리더가 요한 웨슬리였던 것이죠. 그리고 이 Holy Club이 웨슬리가 주도했던 감리교 운동의 산실이었다는 데에는 그 어떠한 역사가들도 이견이 없습니다. 

그런데 존 웨슬리가 본격적으로 감리교운동을 시작할 때, 그의 마음에 깊은 고민이 있었습니다. 자신이 지금까지 주로 교제하였던 Holy Club을 중심으로, 곧 영국의 상류층과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감리교 운동을 시작하여 그 운동의 영향력이 전 영국에 미칠 수 있도록 할 것인가? 이른바 Top-Down의 전략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당시 산업화로 도시와 공장에 내몰렸던 수많은 블루 칼라들과 몸을 부대끼며 그들과 새로운 부흥운동인 감리교 운동을 시작하여 그 영향력이 영국 사회의 상층부를 강타하도록 할 것인가? 곧 아래로부터 위로 올라가는 Bottom-Up의 전략을 선택할 것인가? 그 기로에 서 있었던 것이죠. 그리고 존 웨슬레는 자신이 익숙하였던 옥스퍼드 출신의 상류층보다 산업화의 그림자였던 공장의 노동자들과 함께 새로운 부흥운동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역사는 존 웨슬리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해 주었지요. 

여러분, 여러분은 참으로 우리 교회가 오늘날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열방을 축복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라십니까? 여러분은 참으로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손에 들려 열방에 복음의 빛을 전하는 구원의 도구가 되기를 바라십니까?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에 주목하십시오. 하나님은 세상의 부한 사람들, 세상의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통해, 그들이 가진 재물과 그들이 가진 사회적 지위와 그들이 획득한 세상의 지식을 가지고 일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세상의 천하게 여겨지는 사람들, 세상의 어리석게 여겨지는 사람들, 곧 그 무엇도 내세울 것 없고 자랑할 것 없어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우리와 같은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펼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스스로 부유한 자가 되지 마십시오. 영적으로, 그리고 심령으로부터 가난한 사람이 되십시오. 마음이 가난하여 하나님만을 믿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경건한 사람이 되십시오. 바로 그때 하나님을 여러분을 통해 일하십니다. 나아가 우리 교회를 방문하는 새가족을 그들의 외모나 그들의 옷차림으로 차별하지 마십시오. 아니, 오히려 허름한 옷차림의 약하고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여러분의 정성 어린 마음을 보여주십시오. 바로 그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펼쳐 보이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시고, 곧 가난의 역설을 경험한 사도 바울은 바로 이 진리를 이렇게 선포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1:28-29)


  1. 야고보서의 저자, 독자, 저술 시기 및 장소에 대해서는 Douglas J. Moo, <야고보서>, trans. by 이승호, vol 16 of TNTC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 46-48를 참고하라. [본문으로]
  2. www.youtube.com/watch?v=1q881g1L_d8 [본문으로]
  3. Philip Calyton, Transforming Christian Theology: For Church and Society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09), 108.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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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야고보서 강해2017. 5. 18.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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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야고보서에 대해서는 선입관을 갖고 계신 듯합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믿음이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되는 기쁜 소식이 바로 복음인데, 야고보서는 믿음을 부정하고 행위만을 강조하는 서신으로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야고보서는 복음의 핵심을 기록하고 있는 바울 서신들 예를 들어 로마서나 갈라디아서 에 비해 그 가치가 부족한 것이 아닌가라는 오해를 받기도 합니다. 때로는 적지 않은 분들이 야고보서의 대표적인 암송구절인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는 말씀을 생각하면서 바른 복음의 진리로부터 그 마음이 흔들리는 경우도 있지요. 실제로, 야고보서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아무리 읽어보아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복음의 진리, 인간은 아무런 자격이 없지만 우리를 받아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집중적으로 설명하고 선포하는 구절은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야고보서는 기독교의 신앙을 알아보고 싶은 사람에게, 곧 복음의 진리를 찾고 있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누구이며 우리를 위해 어떠한 일을 행하셨는 지를 설명하는 서신이 아닙니다. 복음의 진리에 대해서는 이미 다 알고 있다는 전제입니다. 오히려 복음의 진리를 알고 있지만, 복음의 진리를 어떻게 삶 속에서 실천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주어진 말씀인 것이지요. 그렇다고 성경 전체에 흐르는 복음의 진리,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의 진리와 상충되는 말씀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복음의 진리를 대전제로 하고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경건한 삶을 살 수 있는가를 집중적으로 이야기해주는 말씀이지요.


많은 분들이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 복음의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내가 하나님께 인정받고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행해야 한다고, 무엇인가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 드릴 수 있는 우리의 공로나 자격이나 행위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선언하지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구원은 우리의 자격이나 행위나 공로로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얻는 선물입니다. 바로 이 점을 강조하고 또 강조하는 대표적인 신약성경의 책이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을 지라도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의 경건을 위해 달려가야 합니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 경건생활을 쌓아나가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은 받았잖아요. 그러나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조금이라도 보답하고자 하는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내고 싶은 것이지요. 그 감사와 감격의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경건입니다. 야고보서는 바로 이 점을 강조하는 신약성경의 대표적인 책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믿었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였다면 이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경건의 삶을 구체적으로 살아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부터 야고보서를 묵상하는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 곧 경건한 삶을 향한 거룩한 소원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오늘부터 야고보서의 말씀을 순차적으로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원하시는 경건한 삶의 모습을 깨닫고 어제보다는 오늘이,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욱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경건한 삶을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시련: 경건을 위한 피할 수 없는 과정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경건에 대한 첫번째 가르침, 곧 야고보서의 첫번째 주제는 바로 고난입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 1:2)

 

말씀 드린 것처럼, 야고보서는 이미 예수님의 복음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누리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그렇기에 단도직입적으로 고난의 주제를 언급합니다. 만일 누군가 기독교의 진리, 곧 복음의 진리를 찾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고난에 대해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겠지요. 여러분이 누군가를 전도하는데 당신은 교회에 나오면 수입의 10%를 꼬박꼬박 교회에 헌금하게 될 것이라고, 물질만이 아니라 시간도 헌신을 해야 한다고, 신앙생활을 시작하면 무수한 고난을 당하게 될 거라고. 이렇게 전도하시는 분은 없지요. 그 대신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신다고, 하나님께서 당신을 향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면서 복음을 전하겠지요. 그러나 야고보서는 이미 복음을 믿는 사람들이에요. 이미 믿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이들이 결코 지나칠 수 없는 하나의 주제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고난입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우리가 믿음의 길을 걸아가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경건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시험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고 야고보서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 16:24)


사도 바울도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와 같은 사실을 분명히 지적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딤후 3:12)


우리가 참으로 경건하게 살려고 노력하면, 우리가 참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인생을 살아가려고 노력하면 노력할 수록 우리의 눈 앞에는 고난의 문제가 가로막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 3절은 너희 믿음의 시련”, 곧 믿음의 시련이라고 부릅니다.


우리의 삶에서 경건이라는 아름다운 꽃을 피우려 한다면, 그 과정에는 거센 바람도 맞아야 하고, 비에 온 몸을 적시기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치 어느 시인이 봄 날에 피는 아름다운 꽃은 한결같이 바람과 비에 이리저리 흔들리며 피는 꽃이라고 노래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믿음의 길, 경건의 길을 걸어가는 여러분에게 때로는 바람이 불어 흔들리고, 때로는 비가 내려 젖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지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약 1:3-4)



고난을 바라보는 복음의 관점


그러데 오늘 본문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2절을 다시 보십시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그 뒤에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그 이유를 3절이 말씀합니다.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사도 바울도 로마서에서 이와 비슷한 말씀을 합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 5:3-4)


그러고 보면 이와 같은 말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쁨게 여기라는 야고보서의 말씀이나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와 같은 로마서의 말씀은 제 아무리 생각을 해도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아요. 세상의 관점에서는 결코 있을 수도 없는 교훈이지요. 도저히 우리의 본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고, 우리의 상식으로는 결코 동의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제가 또 생각을 하고 묵상을 해보았습니다. 여러 가지 고난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니.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2] 그러면서 제 마음에 한 가지 참 중요한 교훈이 떠오르는 겁니다. 오늘 본문 야고보서 1 2절의 말씀은 도저희 납득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이 딱 하나 있어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기억하면 가능해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큼 믿음의 길, 순종의 길, 경건의 길을 걸어가기 위해 극심한 고난을 받은 믿음의 시련이 어디에 또 있을까요? 그러나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고난을 인내하여 이겨내셨기에 그 뒤에 찬란한 부활의 영광을 얻으셨고 만민에게 참된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실 수가 있었잖아요. 그러니 복음을 이야기하는 로마서와 인간의 행위를 이야기하는 야고보서가 그 내용에 있어 서로 상충한다는 주장은 틀렸습니다. 로마서 역시 복음의 능력으로 어떠한 환란 속에서도 기뻐한다고 선언하고, 야고보서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그 기초로 하여 여러 가지 고난을 당하여도 온전히 기뻐하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났을 때 온전히 기쁘게 여길 수가 있느냐구요? 우리는 이미 그 해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기억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마음에 온전히 믿는다면 우리는 고난의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가슴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심기어졌기에 그 복음이 아름다운 경건의 꽃과 경건의 열매로 이어지기 위해 때로는 강풍과 비바람을 맞을 지라도 그 모든 것을 우리 가슴에 새겨진 복음으로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성경이 가르치고 우리가 추구하는 바른 경건은 고난이 없는 삶이 아닙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바른 경건은 고난이 찾아왔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힘입어 그 고난을 이겨내는 삶입니다.[3]



지혜를 후히 주시는 하나님


야고보서는 믿음의 시련이 찾아올 때 온전히 기뻐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나 고난의 현장에서 기뻐할 수 있는 것은 복음으로 말미암는 기쁨이 아니라면 불가능하죠. 다시 말해, 고난의 현장까지도 복음의 빛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 곧 복음의 관점이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은 그것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라고 표현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약 1:5)


여기에서 말하는 지혜는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지혜는 우리의 모든 상황을 복음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지혜입니다. 그런데 그 지혜를 누가 주시나요? 바로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야고보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이야기하지 않고 인간의 행위만을 이야기한다고요? 아닙니다. 틀렸습니다. 야고보서는 고난 중에 온전히 기뻐할 수 있는 하늘의 지혜를 하나님께서 선물로, 은혜로 주신다고 선언합니다.


5절을 다시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어떠한 분이시라고 선언합니까?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께 구하면 하나님은 언제든지 우리의 연약함을 꾸짖으시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풍성한 삶을 살수 있도록 기쁨을 누리며 살 수 있도록 하늘의 지혜를 넉넉히 부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모습은 변함이 없어요. 언제나 넉넉히 주시는 분이시고, 언제든 우리가 하나님을 찾기만을 기다리며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실 준비를 하고 계시지요. 그런데 문제는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변덕이 심하고 믿을 수 없는지를 오늘 본문 6절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약 1:6)


의심하는 사람은 마치 무엇과 같습니까?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습니다. 바닷가에서 넘실거리는 파도를 생각해보십시오. 바람이 불어 올 때는 파도가 높이 솟구쳐올라갑니다. 그러나 곧 아래쪽으로 푹빠지고 말지요. 이렇게 높이 솟구쳤다가 다시 바닥으로 푹 내려가는 파도의 모습이 우리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지 못하니 오히려 자신의 능력과 자신의 계획을 신뢰합니다. 잠시 잠깐 자신의 뜻대로 되는 것 같으면 마음이 교만해져서 높이 올라갑니다. 그런데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자신의 계획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하지요. 그러면 마음이 바닥까지 내려가는 겁니다. 마치 파도가 높이 솟구쳤다가 떨어지는 것처럼 언제나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그 마음이 한층 고양되었다가 금방 가라앉고 마는 모습이지요.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 1:8)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하늘의 지혜로 고난까지도 바라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이곳 저곳 마음이 흘러가는대로 정처 없이 방황하는 인생이 되고 맙니다.


바로 그때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행동을 흔들리지 않도록 붙잡아 줄 수 있는 믿음의 항구는 오직 우리에게 풍성한 하늘의 지혜를 예비하신 우리 하나님 한 분 밖에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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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