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강해2021. 8. 29.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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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19b절) 

세 가지 교훈이지요. 첫째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경청하라는 것이요, 둘째는 나의 입으로 말하는 것은 최대한 자제하라는 말씀이며, 마지막 세 번째는 쉽게 분노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 구절만 똑 떼어서 읽어보면,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든 상관없이 모두에게 적용할 수 있는 삶의 지혜 혹은 삶의 자세를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채, 내 생각만을 주장하다 보면 우리는 말의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성급하게 분노하다 보면 이후 큰 후회를 낳게 되는 경우가 많지요.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이 권면은 신앙생활과 결부시키지 않더라도 우리의 삶을 지혜롭게 살아가는 데 큰 유익이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 가르치는 교훈, 곧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는 말씀은 앞뒤의 문맥을 살펴보면 단순한 삶의 지혜를 넘어 신앙생활에 대한 매우 의미 있는 교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자, 본문에서 ‘듣기는 속히 하라’ 말씀하시는데, 그러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들어야 한다는 말씀일까요? 이에 대한 답을 본문의 앞뒤 문맥을 통해 우리는 어느 정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본문 바로 앞에 위치한 야고보서 1장 18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을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약 1:18) 

여기에 “진리의 말씀”이 등장하지요. 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에 바로 이어 등장하는 야고보서 1장 2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약 1:21) 

여기에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는 명령이 등장하네요. 그러므로 본문 19절에 등장하는 권면, 곧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라’는 말씀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언어생활에 대한 권면으로 적용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 일어나는 관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곧, ‘듣기는 속히 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귀를 쫑긋 세우고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라는 뜻입니다. 동시에 ‘말하기는 더디 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잠잠히 듣고 나의 생각이나 나의 언어를 덧붙이지 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고대 교부 가운데 지금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있지요. (예전에는 영어식 이름인 어거스틴으로 주로 불렸고, 요즘에는 원래의 로마식 이름은아우구스티누스로 주로 부르곤 합니다. 어떻게 부르든 동일 인물이라고 생각하시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어느 날 어느 마니교 신자와 논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마니교는 아우구스티누스가 기독교로 회심하기 이전에 심취하였던 종교였지요. 아우구스티누스가 어느 마니교 신자와 논쟁을 벌이고 있는데, 그 사람이 아우구스티누스에게 계속 화를 내며 이렇게 소리쳤다고 합니다. ‘내 말을 들어보세요! 아니, 내 말을 들어보시라니까요!’ 그때 아우구스티누스가 했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내가 당신 말을 들을 것이 아니라 
또 당신이 내 말을 들을 것도 아니라 
우리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도록 합시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듣느냐에 따라 좌우됩니다. 어떤 분들은 자신의 생각과 주장이 너무도 강합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주관을 가지고 평가하고 분별하는 것은 나름의 유익한 지혜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이 너무도 강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의 믿음이 바르게 성장할 수가 있겠습니까? 또 어떤 분들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너무 쉽게 마음을 빼앗깁니다. 이 사람이 이 말을 하면 이것이 옳은 것 같고, 저 사람이 저 말을 하면 저것이 옳은 것 같습니다. 자신의 의견을 잠시 보류하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것은 참 좋은 덕목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이 든든한 반석 위에 서기 위해서는 주변의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말하든 상관없이 우리의 초점을 하나님의 말씀에 두고 그분의 말씀만을 내 인생의 유일한 지표로 삼아야 합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의 권면은 우리의 믿음과 신앙이 시간이 지날수록 성숙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우리 모두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이야기와 같이 나의 주장을 내세울 것도 아니요,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것도 아니라, 다 함께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신앙생활에 있어 분노의 위험성

야고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해야 합니다. 그런데 본문 19절에는 여기에 한 가지 권면이 추가되어 있지요. 그것이 무엇입니까? “성내기도 더디 하라” 그러면서 본문 20절은 성을 내는 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덧붙여 주고 있습니다.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20절) 

지금 야보고서는 사람이 성을 내는 것, 곧 화를 내는 것을 단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간관계를 무너트린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물론 화를 조절하지 못하는 사람은 사람들과의 관계에 큰 어려움을 겪게 되지요. 그러나 분노라는 주제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넘어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데 큰 장애물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본문이 성내기를 더디 하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도 단지 인간관계에 대한 조언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생활과 관련된 문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자, 그러면 성을 내고 화를 내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에는 어떠한 영향을 미칠까요? 이 질문을 가지고 19절에 등장하는 3가지 권면의 순서를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라’ 곧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서 들으라고 권면합니다. 두 번째로, ‘말하기는 더디 하라’ 곧 하나님의 말씀에 인간적인 생각을 덧붙이지 말라고 교훈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큰 장애물이 되는 것을 걷어 치우라고 말씀하지요. 그것이 무엇입니까? ‘성내기도 더디 하라’입니다. 계속 이어지는 21절의 말씀을 보면 이 점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어떻게 받으라고요?) 온유함으로 받으라 (약 1:21)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자세는 어떠해야 합니까? 온유함으로 받아야 합니다. 여기에 성내는 마음과 온유한 마음이 서로 대조를 이루고 있어요. 만일 나의 마음에 분노가 쌓이고, 그 분노가 나의 말과 나의 행동을 지배하고 있다면,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와도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마음에 심겨지지 않습니다. 반대로 분노의 감정을 가라 앉히고 온유한 마음을 간직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 깊이 받아들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마음이 분노로 가득 차 있느냐, 아니면 온유한 마음을 유지하느냐는 문제는 곧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의 문제가 됩니다. 그리고 이제 이것은 더 큰 주제로 확대됩니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22절) 

야고보서는 이제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지, 말씀을 듣기만 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힘주어 강조합니다. 말씀을 듣기만 하는 사람은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네요. 그러니 지금 내가 화를 내느냐 그렇지 않으냐, 분노를 조절하느냐 조절하지 못하느냐의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마음으로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의 문제입니다. 또한 그것은 한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이 되느냐 아니면 말씀을 들을 뿐 실천하지 않아 스스로를 속이는 사람이 되느냐의 문제가 됩니다. 그리고 여러분, 야고보서 1장의 흐름을 조금 더 따라가다 보면 분노의 문제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또 하나의 주제로 확장됩니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여기에 경건이라는 주제가 등장하네요)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26절)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으니까 내가 예배에 잘 출석하고 있으니까 내가 신앙생활 열심히 하니까 경건한 사람이라고 스스로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상은 자기의 혀를 재갈물리지 않아요.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라’ 말씀하였는데, 실제로는 자신의 입을 절제하지 않고 온유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이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말씀을 들을 뿐이지 그 말씀을 실천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본문 26절의 표현처럼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어떻다고요? 헛것입니다. 반면 본문 27절은 참된 경건에 대해서도 말씀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27절) 

참된 경건은 무엇입니까? 말씀을 듣되 온유한 마음으로 받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듣는데서 멈추지 않고 그 말씀을 실천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 세상의 어떠한 유혹이 찾아와도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이라고요.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마음에 일어나는 분노의 감정을 제어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는 너무도 중요한 주제입니다. 나의 마음에 분노를 쌓아두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유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로 이어집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삶 속에 실천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로 이어지고, 결국에는 하나님 앞에서 경건한 사람이 되느냐 아니면 스스로를 속이는 위선적인 신앙인이 되느냐의 문제로까지 발전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과정의 시작점이 무엇이라고요? 지금 내 마음에 일어나는 분노를 다스릴 수 있느냐 없느냐 라는 어찌 보면 매우 작은 그 문제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힘주어 우리에게 권면하는 것이지요.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나의 사랑하는 자매들이여, 나의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내기도 더디 하라 (19절) 


고통의 상황과 점화 사고

분노는 감정이기 때문에 내가 원하지 않는다고 일어나지 않는 것도 아니고, 내가 원한다고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여러 가지 감정은 주변 환경이나 우리가 마주친 사건에 따라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이요, 분노도 이와 같은 감정이기에 특정한 상황에 마주치면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분노의 감정이 일어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권면하는 말씀을 잘 생각해보십시오. ‘너희는 분노의 감정을 전혀 품지 말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무엇을 명령하시죠? ‘성내기를 더디 하라’ 분노라는 감정이 일어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 있습니다. 문제는 분노라는 감정이 일어날 때 성을 내는 것, 곧 나의 언어와 나의 행동으로 화를 내는 것을 더디 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분노에 대해 연구하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인간이 화를 내기 위해서, 곧 분노를 발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 첫 번째는 고통의 상황입니다. 나의 마음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상황을 만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분노라는 감정이 일어나게 되지요. 바로 이것이 고통의 상황입니다. 비유로 이것을 설명하면, 마음에 분노의 감정을 일으키는 고통의 상황은 마치 연료와 같습니다. 가스가 되었든, 기름이 되었든 연료가 있어야 불을 붙일 수 있잖아요. 우리에게 찾아오는 고통의 상황이 그러한 연료가 됩니다. 그런데 고통의 상황, 곧 나에게 분노의 감정을 일으키는 특정한 상황이 주어진다고 모든 사람들이 분노를 발하지는 않습니다. 연료가 있다고 해서 그 모든 곳에 불이 타는 것은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불이 타오르려면 연료를 공급해줄 뿐만 아니라 그곳에 불꽃을 점화하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불을 붙이는 것을 ‘점화 사고’라고 말합니다. 한 마디로 우리의 생각이죠. 그러므로 고통의 상황이 일어나고 그로 말미암아 분노의 감정이 내 마음에 일어나는 것은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현상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고통의 상황은 화를 내고 분노를 폭발시킬 수 있는 연료를 충분히 제공하지요. 그러나 문제는 바로 그때 우리의 생각이 어느 쪽으로 향하느냐에 따라, 곧 연료가 가득한 그곳에 불길을 당기느냐 당기지 않느냐에 따라 나의 말과 나의 행동이 분노를 폭발시킬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누구에게나 고통의 상황은 찾아옵니다. 그 가운데 누구의 고통이 객관적으로 더 크고 누구의 고통이 객관적으로 더 작은지 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의 상황을 다른 사람의 고통보다 언제나 더 크게 느낀다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렇게 자신에게는 너무도 크고 무겁게 여겨지는 고통의 상황이 찾아왔을 때, 우리 앞에는 두 가지 선택지가 놓여 있지요. 고통의 상황에 대해 지속적으로 부정적인 생각을 이어가며 나의 마음과 행동에 분노가 가득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동일한 고통의 상황 속에서도 부정적인 생각을 끊어 버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분노의 감정이 사그라들게 만들 수도 있어요. 그리고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이 두 가지 선택의 결과는 우리의 신앙생활을 너무도 극명하게 달라지게 만듭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에 큰 고통이 몰려와 분노의 감정이 일어나고 계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내기를 더디하라’는 말씀을 실천하는 위대한 성령의 은혜가 여러분에게 임하기를 바랍니다. 고통의 상황 자체가 사라지는 것도 참 감사한 은혜입니다. 그러나 고통의 상황이 변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내기를 더디 하는 은혜’를 주신다면, 그리하여 우리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분노의 감정을 조절하고 다스릴 수 있다면 바로 그때 우리는 참된 경건을 향하여 한걸음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서의 복음

‘성내기를 더디 하라’ 이것은 우리 성도들에게 요청하시는 하나님의 분명한 뜻입니다.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는 말씀도 이제는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분노의 감정이 찾아왔을 때, 노하기를 더디 해야 마침내 경건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도 수긍이 됩니다. 그러나 여전히 분노를 조절하고, 화를 억제하기가 너무도 어려우신 분들이 계시지 않나요?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모든 이야기에 감추어진 하나의 대전제가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야고보서 1장 19절 이후의 말씀을 오늘 설교의 본문으로 함께 묵상하고 있기에 너무도 중요한 하나의 대전제를 살펴보지 않고 본문이 가르치는 ‘성내기를 더디 하라’는 말씀만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 바로 앞 구절은 참으로 위대한 하나님의 선물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야고보서의 복음, 곧 야고보서가 선포하는 복음이라고 표현하고 싶어요.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무엇을 속지 말아야 할까요?)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약 1:16-17a) 

여기에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하나님께부터 내려오는 선물이라고 말씀하시네요. 그러면 오늘 설교의 주제인 성내기를 더디 하는 것, 곧 나의 마음에 일어나는 분노의 감정을 조절하고 자제하는 힘도 내 스스로의 결단이나 내 스스로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 아닐까요? 야고보서는 계속해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약 1:18) 

야고보서가 선포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로 하여금 첫 열매가 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거듭남, 곧 다시 태어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옛 성품이 죽고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창조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시는 능력이 된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성내기를 더디 하라’는 이 하나의 말씀을 실천하며 온유한 마음을 품는 것이 뭐 그리 어려운 일이 되겠습니까? 나의 의지로는 힘들지요. 나의 결단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성품을 새롭게 빚으시는 하나님의 손길 안에서 우리는 얼마든지 분노를 조절할 수 있고 노하기를 더디 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복음의 능력을 모두 믿으시지요? 그러면 그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며 이번 한주 딱 한 가지만 실천해보자고요. 무엇을 실천할까요? ‘성내기를 더디 하라,’ ‘노하기를 더디 하라’ 이 말씀 한 구절만 실천해보자고요. 노하기를 더디 하면 그것이 연쇄반응을 일으켜 우리로 하여금 참된 경건에 이르게 한다고 말씀하시니, 너무 멀리 있는 것 바라보지 말고 ‘노하기를 더디 하라’는 이 한 가지 말씀만 실천해보자고요. 이번 한 주도 우리에게 고통의 상황은 찾아올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분노의 감정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미 복음의 은혜를 허락하셨으니, 이번 한 주간 ‘노하기를 더디 하라’는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이 은혜도 반드시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성내기를 더디 하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오늘보다는 내일 참된 경건의 삶에 한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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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