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2021. 11. 28. 16:46

연말과 연시가 되면 우리 사회의 이른바 전문가들이 내일에 대한 예측을 내어 놓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시간이 흐른 뒤 전문가들의 예측이 얼마나 실현되었는지를 조사한 연구를 보면 과연 이것이 각 분야 전문가들의 예측이었나라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전문가들의 예측과 그 이후에 일어난 현실 사이에 큰 괴리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 시대 전문가들의 예측이 가장 정확한 분야가 있다면 기상 예측입니다. 참 의외이지요. 얼마나 많은 국민들이 기상청의 예보에 불만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런데 기상예측이 가장 정확한 분야라고 하니 참 흥미롭습니다. 경제계의 예측 – 예를 들어 내년 경제성장률에 대한 전망 – 이나 정치계의 예측 – 이를 테면 내년 선거의 향방이 어떠하리라 – 는 것은 정확히 맞추는 경우보다 틀린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프로이센과 독일제국의 군인으로 근대적 참모 제도의 창시자로 평가받는 헬무트 폰 몰트케는 이렇게 말했다고 하지요. “전쟁에서는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 그러나 전쟁만 불확실한 것이 아닙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등 우리 사회의 모든 분야는 불확실한 것들로 가득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것을 ‘예측 불가능성’이라고 이름을 붙이기도 합니다. 

성경에서도 예측 불가능성에 대해 매우 강력한 어조로 말씀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전도서의 말씀이지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전 3:11) 

때를 따라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손안에 우리의 모든 삶이 좌우됩니다. 그런데 전도자의 중요한 관찰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의 처음과 끝을 사람은 측량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측 불가능성에 대한 성경의 선언이지요. 여기에는 각 분야의 전문가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여기에는 어떤 직감이나 신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람도 예외가 아닙니다. 여기에는 기도를 많이 하여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고 자부하는 사람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 중에는 그런 분이 한 분도 안 계시다고 생각하지만 내년의 운세를 알아보기 위해 이곳저곳을 기웃거리지 마십시오. 새해를 맞이하며 축복의 말씀을 받기 위해 이곳저곳을 기웃거리지도 마십시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내 인생의 모든 생사화복이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그 일을 우리 인간은 그 누구도 다 깨달을 수 없다고 분명히 믿습니다. 그러므로 한 해를 마무리하고 또 한 해를 준비하는 연말과 연시, 우리 그리스도인의 바른 자세는 내일에 대한 예측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측이 아니라 바로 준비입니다. 


언제 VS 어떻게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질문에 답변하신 내용의 일부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 세워진 멋진 성전을 자랑하듯 예수님께 소개하였지요. 그러자 예수님께서 날이 이르면, 곧 때가 이르면 예루살렘 상전이 모두 무너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께 다시 한번 질문합니다. 그날은 언제 임하게 될까요? 과연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무너지는 그 위기의 날, 대변동의 그날이 가까이 왔다는 징조를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사람들의 이러한 질문을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언제’입니다. 언제, 나의 삶에 큰 변화를 일으키는 그날이 찾아오겠습니까?라는 질문이지요. 다른 말로 하면, 사람들의 이 질문은 내일에 대한 예측을 원하는 질문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오늘 본문이 포함되어 있는 누가복음 21장의 대부분의 내용이 사람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긴 대답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천천히 읽어보면, 예수님은 언제라는 질문에는 답을 주지 않으십니다. 그 대신 ‘어떻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주십니다. 사람들의 질문, 곧 그날이 언제 올 것인지 ‘예측’에 대해서는 답변하지 않으시고, 그날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지를 말씀해주고 계십니다. 이와 관련하여 오늘 본문에도 매우 중요한 한 구절이 등장합니다. 그것이 본문 35절입니다.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35절) 

여기에 등장하는 ‘이 날’은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무너지는 바로 그날입니다. 이 지점에서 먼저 한 가지 사실을 지적하고 넘어가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다는 것은 단지 종교시설 하나가 파괴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금,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바라보았던 성전은 예루살렘에 세 번째로 세워진 성전으로 헤롯 왕이 세웠다고 하여 ‘헤롯 성전’으로 불리는 성전입니다. 예루살렘에 역사상 처음으로 세워진 성전은 솔로몬이 건축했다고 하여 이른바 ‘솔로몬 성전’으로 부르지요.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솔로몬 성전은 바벨론 군대에 의해 무너졌습니다. 그러니 솔로몬 성전이 무너지는 그날에도 단지 성전 하나만 무너진 것이 아니라, 바벨론이라는 이민족의 침략으로 말미암아 모든 토지가 황폐해지는 역사적 현장이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바라보고 계시는 헤롯 성전도 AD 70년에 티투스 장군이 이끄는 로마 군대에 의해 무너졌습니다. 그러니 그날의 참화는 단지 종교시설 하나가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유대인들에게 민족적 비극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 35절에 등장하는 ‘그날’은 단지 종교시설 하나가 무너지는 날이 아니라 지금까지 살아왔던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위기의 날이요, 대변동의 날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모든 것이 뒤흔들리는 그 위기의 날, 그 대변동의 날이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일어난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분들에게는 건강했던 몸에 질병이 찾아오는 것이 그날의 시작이 될 수 있어요. 어떤 분들에게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실직이 그날의 시작이 될 수도 있지요. 어떤 분들에게는 큰 사고가 일어나기도 하고, 어떤 분들에게는 자녀에게 예상치 못했던 일이 발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우리 중에는 그날이 이미 찾아온 분들도 계시지요? 그리고 우리 가운데 어떤 분들에게는 바로 지금이 그날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가운데는 아직 그날이 찾아오지 않은 분들도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 그날이 나에게 찾아올지 알 수 없습니다. 나에게 찾아오는 그날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모습을 띄고 있는지도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한다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삶의 큰 위기와 대변동의 날이 불현듯 찾아오겠지만,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나의 삶을 송두리째 뒤 흔드는 대변동의 날을 피해 갈 수 있을까요? 그 정도로 부족하다면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하나님께 늘 기도하며, 말씀대로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면 이 위기의 날을 피해갈 수 있지 않을까요? 성도 여러분, 이러한 모든 기대는 헛된 기대입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시잖아요.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 임하리라”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그리고 지금도 열심히 하나님을 예배하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만 나의 삶에도 큰 위기의 순간이 찾아올 수 있다는 사실, 아니 나의 삶에도 대변동의 그날이 반드시 찾아온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 사실을 기억하고 인정할 때 비로소 우리는 그날을 착실하게 준비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조심하라

자, 우리의 삶에도 위기의 그날이 찾아오고 나의 삶에도 대변동의 그 순간이 찾아온다면 우리는 지금 어떻게 그날을 준비해야 할까요? 예수님의 대답은 매우 단순합니다. 본문 34절입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계속해서 예수님은 스스로 조심하지 않았을 때 일어나는 일에 대해 설명하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곧 스스로 조심하지 않으면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집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스스로 조심하라”는 말씀의 의미는 구체적으로 3가지입니다. 첫째로, 방탕함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둘째로, 술 취함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마지막 셋째로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먼저 방탕과 술 취함이 등장하지요. 주일예배에 참여하는 여러분들은 본문에 등장하는 방탕함이나 술 취함에 깊이 빠져 계신 분은 별로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언급하신 것은 조금 다른 차원입니다. 우리 신앙인들도 쉽게 그 유혹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것이 무엇입니까? “생활의 염려”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루는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비유에서 농부가 뿌린 씨앗은 길가에도 떨어지고, 돌밭에도 떨어지고, 가시떨기에도 떨어지죠. 길가에 떨어진 씨앗은 떨어지자마자 새가 와서 먹어버렸으니, 우리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묘사와는 조금 다릅니다. 돌밭에 떨어졌다는 것은 삶의 고통이 찾아왔을 때 믿음을 포기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데 수십 년 신앙생활을 해온 신앙인들은 어느 정도 이 단계를 넘어섰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세 번째로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앗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께서 이렇게 설명해 주십니다.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그다음을 주목하세요.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마 13:22) 이 단계만 넘어서면 좋은 밭에 떨어진 씨앗처럼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오래 하였다는 분들, 그래서 믿음이 좋다고 하는 분들도 너무도 쉽게 넘어질 수 있는 영역이 있으니 그것은 생활의 염려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너무도 쉽게 자주 넘어지는 ‘생활의 염려’를 가만히 분석해보면 그 깊은 밑바닥에는 불신앙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왜 염려합니까? 우리가 왜 걱정합니까? 우리가 왜 근심합니까? 그 이유를 신앙적으로 표현하면 매우 단순합니다. 지금도 내 인생을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는 여전히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 자리 잡고 있어요. 바로 불신앙이 우리 마음을 사로잡으면 생활의 염려가 내 마음을 사로잡게 되는 것이요, 내 마음이 생활의 염려로 가득 차 있다면 그것은 나의 마음에 불신앙이 가득 일어났다는 증거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지 않도록 “스스로 조심하라”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만일 스스로 조심하지 않으면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해집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 결과가 본문 34절의 마지막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뜻밖에” 나에게 위기와 대변동의 순간이 오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스스로 조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뜻밖에 그날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그날이 찾아와서 우리 삶에 무서운 덫이 되고 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번 한 주간 여러분의 마음이 굳건한 믿음에서 흔들리지 않도록 스스로 조심하십시오. 염려와 걱정과 근심의 거리들이 많이 몰려올지라도 믿음으로 그 모든 것을 이겨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스스로 조심하여 우리의 마음을 지키는 날들이 하루하루 쌓일 때 모든 사람에게 찾아오는 위기의 그날, 대변동의 그날이 찾아오더라도 우리는 신앙의 중심을 잡고 그 모든 과정을 이겨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오늘 본문이 시작하는 34절에서 예수님은 “스스로 조심하라”고 말씀하시지요. 그러면서 스스로 조심하여 마음을 지키지 못할 때 일어나는 일들을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마지막 구절인 36절에서는 스스로 조심하여 우리의 마음을 지킬 때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 지를 가르쳐주십니다.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36절) 

우리가 스스로 조심하여 나의 마음을 지킬 때 어떠한 일이 일어납니까?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이 구절은 나에게 그날이 찾아오지 않는다거나 나에게 위기의 때나 대변동의 시간이 찾아오는 않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예수님께서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본문 36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그리고 넉넉히 감당할 수 있다는 의미지요. 거기에 더하여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네요. “인자 앞에 서도록” 우리 성도들에게도 거대한 고통의 시기는 반드시 찾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조심하여 우리의 마음을 믿음으로 지키는 성도들은 그 모든 일을 넉넉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순간에도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과 함께 동행하기 때문입니다. 

자, 이제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이 모든 일을 주님과 동행함으로 능히, 넉넉히 감당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권면하십니다. 그 말씀은 무엇입니까?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깨어 있다는 것은 나의 마음을 수시로 점검하라는 말씀이지요. 본문이 시작하는 첫 구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방탕함이나 술 취함이나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해지지 않도록 날마다 영적인 민감성을 유지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문이 시작하는 34절의 “스스로 조심하라”는 말씀이나 본문이 마치는 36절의 “깨어 있으라”는 말씀은 동일한 의미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마지막 36절에는 깨어 있기 위한 하나의 구체적인 방법이 덧붙여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기도”입니다.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AD 3세기경, 하나님 앞에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도시를 떠나 사막에서 기도와 수도에 전념하던 분들이 계셨습니다. 역사가들은 이들을 가리켜 사막의 수도사들이라고 부릅니다. 사막의 수도사들 사이에 전해져 내려오는 하나의 일화가 있습니다. 하루는 이제 막 사막에 들어와 수도자의 길을 시작한 사람이 명망이 높은 스승님에게 질문했다고 합니다. “선생님, 제가 하나님과 더욱 친밀해지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나요?” 그러자 스승님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침에 태양이 떠오르도록 자네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아침에 태양이 떠오르도록 하기 위해 자네가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는 것처럼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위해서도 자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전혀 없네.” 이 대답에 만족할 수 없었던 이 수련생은 다시 한번 스승님께 질문하지요. “그러면 우리가 매일 기도하며 수련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러자 스승님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태양이 떠오를 때 우리가 잠들지 않고 깨어 있기 위함일세”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의 빛이 되시는 주님께서 매일 아침 여러분의 마음에 밝은 진리의 빛을 비추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항상 기도하여 깨어 있으십시오. 그리하여 매일 아침 태양이 떠오르듯 매일 우리의 삶을 찾아오시는 주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십시오. 우리 모두에게 큰 위기의 날, 모든 것이 뿌리째 뒤흔들리는 대변동의 날은 반드시 찾아올 것입니다. 그러나 매일 기도함으로 깨어 주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는 여러분들은 그 모든 시련을 넉넉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며 깨어 있기만 한다면, 그 모든 위기의 순간에도 우리의 인생을 여전히 붙잡고 계시는 하나님의 든든한 손길을 우리도 붙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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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