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2022. 1. 9.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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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설교의 제목은 “오직 예수”입니다. “오직 예수”라는 선언은 기독교의 핵심 가르침을 내포하고 있지요. 그것이 무엇입니까?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기독교는 세계의 주요한 종교를 창시하였던 석가모니나 마호메트나 공자 등 세계의 성인들을 통해 인간에게 구원의 길이 열린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지요. 그뿐이 아닙니다. 인간이 깊은 깨달음을 얻는다든지, 스스로 고행의 길을 선택한다든지, 혹은 선행을 많이 한다고 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분명한 믿음이 무엇입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라는 선언에 담겨있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그 누구도, 그리고 그 무엇도 우리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빈 들에서

누가복음 3장은 세례 요한의 사역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3장은 세례 요한이 활동하였을 때 세상의 통치자들이 누구였는지를 나열하며 시작합니다.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 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 왕으로,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눅 3:1-2) 

구약 성경에서 선지자들이 하나님께 소명을 받은 장면을 묘사할 때 통치자들의 연대를 기록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러한 방식은 선지자들의 소명이 분명한 사실이라는 역사적 신빙성을 부여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더욱 중요한 의미가 있으니, 세속 권력과 구별되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와 역사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할 때에도 로마 제국의 디베료 황제가 지중해 전역을 다스렸습니다. 그가 임명한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헤롯, 빌립, 루사니아와 같은 분봉왕들이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습니다. 만일 세례 요한의 시대에 신문과 방송의 기자들이 있었다면 그들은 대부분 로마의 황제를 취재했겠지요. 그들은 총독의 행동이나 분봉왕들의 발언에 집중하였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시대, 세속 권력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에는 종교 권력을 틀어잡고 있었던 대제사장이 두 명이나 있었습니다. 누가복음은 그들의 이름이 안나스와 가야바였다고 기록하여 주네요. 그러므로 요한의 시대에 사람들이 영적인 목마름을 느끼면 가장 먼저 어디로 갔을까요? 당시 사람들은 영적인 갈망을 채우기 위해 제일 먼저 대제사장들이 매일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있는 예루살렘 성전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어디에 임합니까? 황제와 총독과 분봉왕들이 거주하는 권력의 중심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곳은 대제사장들이 제사를 집례하는 화려한 예루살렘 성전도 아닙니다. 2절을 다시 보십시오.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아니, 하나님의 말씀이 로마의 황제가 살던 황궁에 임하지 않은 것은 그래도 이해가 되지요. 하나님의 말씀이 빌라도 총독이나 누가복음 3장에 등장하는 여러 분봉 왕들에게 임하지 않는 것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돼요. 그런데 여러분, 본문 2절에는 버젓이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었다고 기록해 놓고는 하나님의 말씀이 예루살렘 성전의 대제사장들에게 임한 것이 아니라 빈 들에서 요한에게 임하였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우리나라에 대통령 선거가 있는 해이지요. 국가의 미래를 위해 매우 중요한 선거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모든 국민은 바른 판단력을 가지고 선거에 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는 마음으로 선거에 임해야 하겠지요. 그러나 여러분, 대통령 한 명을 잘 뽑는다고 우리 나라가 문화 강국이 되는 것도 아니고, 대통령 한 명을 잘 뽑았다고 경제가 살아나는 것도 아니며, 대통령 한 명을 잘 뽑았다고 우리나라가 행복이 가득한 나라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지난 수많은 선거를 통해 우리는 그와 같은 사실을 경험하였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언론은 차기 대권주자들에게 향하고 있습니다. 그에 따라 모든 국민들의 이목도 청와대와 여의도를 향해 있는 것 같아요.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로마에는 디베료 황제가 있었고, 유대에는 빌라도 총독이 있었으며, 분봉 왕으로는 헤롯과 빌립과 루사니아가 있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그 어디에도 임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교회가 참 많이 있지요. 요한의 시대에 예루살렘 성전은 매우 화려한 성전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서울 시내에는 규모도 크고 건물도 화려하며 내부시설도 잘 갖추어진 많은 교회들이 있습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요한의 시대에 예루살렘 성전에 대제사장이라는 직분을 가지고 사람들 앞에서 제사를 주도하던 사람들이 있었지요. 오늘 우리 시대에도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은 그 이름을 들어보았을 만한 유명한 설교자들도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언론은 대선 주자들의 말과 행동에 온통 귀를 기울이고 있지요. 마음과 영혼의 갈증을 느끼는 사람들은 유명하다는 설교자들에게 귀를 기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곳에 임합니다. 그곳이 어디입니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빈 들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눈에 무엇이 보이십니까? 주변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왕궁의 화려함도 없고, 왕궁에 있을 법한 힘과 권세를 가진 사람도 안 보이고, 사람들의 시선이 주목할 그 어떠한 것도 보이지 않아 지금 내가 있는 이 자리는 그저 황량한 빈 들처럼 보이는 분들이 계신가요? 여러분이 계신 바로 그 빈 들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의 시선은 주목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위대하신 역사가 여러분의 삶을 온전히 사로잡으시기를 바랍니다. 


오직 주님만이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세례 요한에게 임하였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세례 요한을 찾아 빈 들로 갔지요. 그곳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을 들을 수도 있었고, 그곳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직접 체험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체험은 사람들로 하여금 세례 요한에 대한 기대를 갖게 만들었어요.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생각하니 (15절)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였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은혜입니다. 요한을 통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다는 것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축복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은혜와 이러한 축복이 사람들의 마음을 헛된 기대로 이끌었다는 사실이죠. 15절은 어떻게 시작합니까?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한계를 알고 있습니다. 자신이 극복할 수 없는 그 지점에서 더 나아가기 위해,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나의 밖에서 나를 도와주고 나를 이끌어주고 나아가 나를 구원해줄 구원자의 손길을 간절히 원하게 되어 있어요. 그것이 연약한 인생을 살아가는 모든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장면을 보고, 세례 요한을 통해 지금 나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경험을 하니 사람들의 마음에 헛된 기대감이 가득해졌어요. 그것이 무엇입니까? 15절의 뒷부분이지요.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생각하니” 그러나 우리 모두는 그 대답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그리스도인가요? 아니요. 요한은 절대로 그리스도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구원자가 됩니다. 

우리 주변에는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기도하고 때로는 그분들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에 자연스럽게 바로 그 사람을 의지하는 마음이 생겨요. 이것이 연약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본성이거든요. 세례 요한은 분명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였고, 사람들은 세례 요한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입니다. 더 나아가면 안 됩니다.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생각하니”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커다란 실망입니다. 

사람들이 세례 요한에 대해 헛된 기대를 품기 시작했습니다. 요한은 그 사실을 민감하게 눈치 챘던 것 같아요. 그래서 세례 요한은 모든 사람들에게 분명히 대답해줍니다.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16절) 

요한의 대답은 먼저 요한 자신과 예수님에 대한 비교로 시작됩니다.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세례 요한은 자신의 능력과 예수님의 능력 사이에는 비교할 수 없는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먼저 언급하지요. 그리고 또 한 가지,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그러면 예수님은 어떠하십니까?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세례 요한은 자신이 베푸는 세례와 예수님께서 베푸실 성령의 세례를 대조적으로 비교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사람들이 회개하였다는 증표로 물로 세례를 줍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과 심령이 온전히 변화시켜주시는 성령의 세례를 주시는 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는 분, 우리의 삶을 참된 행복의 삶으로 변화시켜주시는 분, 오늘 우리의 삶에 은혜 위에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유일한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역사의 주관자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실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 곧 우리의 심령을 변화시키는 참된 구원을 주시는 분으로 소개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마지막 절에는 예수님의 또 다른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17절) 

본문 17절이 묘사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심판자이신 예수님입니다. 농부가 가을 추수 때에 행하는 일을 비유로 설명하고 있지요. 키를 들고 알곡과 쭉정이를 구분하는 장면입니다. 그렇게 알곡과 쭉정이를 구분하면 어떻게 행동합니까?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의인과 악인을 구별하여 세상을 심판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심판자가 되신다는 것의 일차적인 의미는 마지막 때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 온 세상을 공의로 심판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마지막 날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까지는 모든 심판을 보류하고 계실까요? 우리는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심판을 목격하기 위해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인류의 마지막 그날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심판자가 되신다는 것은 마지막 날 온 세상을 공의로 심판하신다는 의미이지만,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이 임하기 전에도 주님께서 친히 역사의 주관자가 되신다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자, 세상에는 세상의 권력자들이 있습니다. 로마의 황제일 수도 있고 총독이나 분봉왕이 될 수도 있지요. 심지어 예루살렘 성전의 대제사장들처럼 종교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일 수도 있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의 말씀은 어디에 임하였지요? 빈 들에 임합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머물지 않는 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임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펼쳐집니다. 그러니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내면이 달라지고 우리의 삶이 변화하고 우리의 심령이 회복하는 장소는 어디입니까? 세상의 통치자들이 있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빈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바로 이 지점에서 하나님 나라의 놀라운 특징 하나가 등장합니다. 세상의 권력자들이 있는 왕궁이나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빈 들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는 점점 자라나 마침내 이 세상의 역사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 품어버립니다. 

예수님께서 하루는 이렇게 천국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마 13:31-32) 

성도 여러분, 비록 아무리 둘러 보아도 보이는 것 하나 없는 빈 들에 서 있다 할지라도 그곳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기만 한다면, 그리하여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모셔들이기만 한다면 여러분이 계신 바로 그 자리에 하나님의 나라는 시작된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작은 겨자씨와 같아서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반드시 자라날 것이요, 자라난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될 것이요, 그 안에 많은 이들이 찾아와 하나님의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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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