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2022. 3. 13.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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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300>으로도 많이 알려진 페르시아와 스파르타 사이의 전쟁은 처음부터 승패가 너무도 분명해 보였습니다. 아하수에로 왕이 친히 이끌었던 페르시아의 군대는 25만 명에 이르렀고, 이에 대항하기 위해 급하게 징집한 그리스 군대의 숫자는 칠천 명에 불과하였지요. 그러나 그 칠천 명 중에는 조상 때로부터 전쟁의 용사로 살아왔던 300명의 스파르타 군인들이 있었습니다. 페르시아가 그리스를 점령하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길에는, 한쪽은 높은 절벽이 놓여있고, 또 반대쪽은 깊은 바다가 있는 좁은 통로를 지나가야 했습니다. 가장 좁은 곳은 좌우의 폭이 18m에 불과했던 그곳의 이름은 그리스어로 ‘테르모필레,’ 곧 열문이라는 뜻입니다. 스파르타인 300명은 25만 명의 페르시아 군대를 저지하기 위해 바로 그곳 테르모필레를 막아섰지요. 테르모필레에서 벌어진 첫 번째 전투는 스파르타인들의 완벽한 승리였습니다. 그다음 날 아하수에로는 이들을 물리치기 위해 최정예부대를 투입했지만 속절없이 당하고 말았습니다. 25만 명의 잘 훈련된 대군이 고작 스파르타인 300명에게 막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는 상황이 펼쳐졌던 것입니다. 

이처럼 스파르타인들의 저항은 매우 강력했지만, 이들의 저항은 오래지 않아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리스인 가운데 배신자가 나타났고, 그는 페르시아 군대에게 절벽 위를 돌아가는 길을 안내하였습니다. 좌우폭이 18m인 매우 좁은 지역에서 싸운다면 제아무리 거대한 군대라 하더라도 300명의 용맹한 스파르타인들을 소탕할 수 없었지만, 이제 페르시아 군대는 그들을 앞과 뒤에서 포위할 수 있으니, 스파르타인 300명이 25만 명의 페르시아 군대를 더 이상 막아설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00명의 스파르타 용사들은 자신의 목숨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항전을 포기하지 않았고, 그들이 마지막 순간 가족들에게 남겼던 메시지는 그리스의 역사가 헤르도투스의 글을 통해 지금까지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낯선 이여, 우리는 스파르타인들이 기대한 대로 행동했고 이제 여기에 묻히노라고 그들에게 전해주오” 

300명의 용사로 25만명의 페르시아 군대를 막아선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300명의 스파르타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그 길을 회피하지 않았고, 스파르타인답게 최후의 항전을 다하기로 결심하였던 것이지요. 사순절을 보내는 우리가 기억하는 예수님의 삶은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당당히 걸어가셨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 예수님 주변의 사람들은 상상도 하지 못했지만 예수님은 분명히 알고 계셨습니다.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십자가의 죽음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십자가의 길을 걷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를 통해 구원을 완성하는 메시아의 사명을 단 한순간도 잊으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낯선 이여, 우리는 스파르타인들이 기대한 대로 행동했고 이제 여기에 묻히노라” 이것이 전사로 한평생을 살았던 스파르타인의 삶이었다면, 우리 주님의 일생은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성도들이여, 나는 성부 하나님이 기대하신 대로 행동했고 이제 여기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맞이하노라” 


거부

오늘 본문에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하나의 이야기를 건네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본문 31절입니다. “곧 그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이르되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지금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그들이 거주하고 있던 지역, 그들이 활동하던 장소, 그들의 생활 영역에서 예수님이 제발 떠나면 좋겠다는 그들의 마음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물론,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다른 이유를 댑니다.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헤롯이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다는 이 이야기는 복음서 전체에서 오늘 본문에만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전한 바리새인들의 이야기, 곧 헤롯에 예수님을 죽이려한다는 소식이 정확한 사실이었는지 아니면 바리새인들이 잘못된 정보를 들은 것인지 혹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위협하려고 꾸며낸 이야기인지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분명한 알 수 있는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존재와 예수님의 사역을 탐탁지 않게 여겼고 예수님이 자신들의 생활영역에서 떠나시기를 원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떠나기를 원했던 사람이 헤롯일 수도 있고 그 이야기를 직접 예수님께 전달하는 바리새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 되었든 오늘 본문에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분명히 말했던 이야기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라는 말은 당시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마음을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 역시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님 자신에 대해 어떠한 마음을 품고 있었는지 너무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본문 34절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 사람들에 대해 이렇게 탄식하십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이 구절은 일차적으로 구약성경의 내용을 염두에 두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모든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만을 섬기도록 많은 선지자를 보내주셨습니다.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을 파송하셔서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기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으로 대표되는 유대인들의 반응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의 표현 그대로입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그런데 예수님의 이 한탄은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과거의 이야기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갈릴리에서의 사역을 마치고 예루살렘을 향해 걸아가고 계시지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인류 구원의 역사를 완성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적대시하였던 헤롯이나 바리새인들만이 아니라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일반 시민들도 그 주님을 거부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시네요.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번이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지자를 보내주시고, 하나님의 종들을 보내주신 이유는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로운 품에 돌아오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끝까지 거부하고 하나님의 호의를 거절하는 그들을 향해 성부 하나님은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곧 하나님이신 예수님마저 거부하고 있어요. 그러니 예수님은 이렇게 탄식하십니다.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께 범하는 많은 죄악이 있지요. 우리 인간이 범하는 수많은 죄 가운데 너무도 중요한, 그리하여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우리를 벗어나게 하는 결정적인 죄를 하나 꼽는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죄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어쩌면 살인이나 간음이나 도둑질에 비해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죄에 대해 우리는 너무나 무관심한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죄가 얼마나 크고 중대한 것인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구절을 하나만 꼽는다면 예레미야서의 말씀을 언급할 수 있을 듯합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렘 2:13) 

유대인들이 범한 죄악이 두 가지로 요약되어 있네요. 그 가운데 첫 번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수의 근원이 되어주심에도 불구하고 그 주님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죄악이 단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그리하여 매주 주일이 돌아오지만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 비그리스도인들만 저지르는 죄악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였던 사람들, 하나님의 도성인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사람들, 그리하여 때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을 예배하였던 사람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순절을 보내며 우리가 나 자신을 돌아보아야 하는 가장 중요한 죄의 목록이 있다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가지고 있으면서도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예수님의 그 놀라운 은혜를 잊어버린 채 살아가는 “무감각의 죄”입니다. 


십자가의 길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을 향해 걸어가셨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의 사역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헤롯이나 바리새인들과 같은 사람들은 예수님께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라고 요청했지요. 그들의 이러한 마음이 예수님께 직접 전달되었을 때, 예수님은 매우 확고한 대답을 주십니다. 

이르시되 너희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32절)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칠 것이다’ 여기에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나 병을 고치시는 것은 누가복음을 비롯한 공관복음 전체에서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핵심적으로 묘사하는 활동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과 내일은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시겠다는 이 말씀은 아직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멈추거나 중단할 때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자신의 공생애 사역이 멈출 때가 언제인지 분명히 말씀해 주시네요.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여기에서 제 삼일은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지만, 가장 적절한 해석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그 이후에 삼일 만에 부활하신 장면을 가리킨다는 해석입니다. 예수님은 누가 무엇이라 이야기하든 상관없이 성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공생애의 사역을 묵묵히 감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은 마침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온 인류를 구원하는 메시아의 사명을 완수하시는 것으로 이어졌습니다. 동일한 내용이 33절에도 반복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33절) 

예수님은 지금 메시아로서 걸어가야 하시는 공생애의 길을 걷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선언하시죠.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그런데 그 길의 최종 목표지가 어디입니까?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자신이 온 인류의 모든 죄악을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 길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길인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마침내 성부 하나님께도 외면받는 길이라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분명히 선포하십니다. “내가 나의 길을 가리라”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 길을 걸으셨고, 십자가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한 구원을 완성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주님의 은혜를 거부할 때가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참 다행이지요. 우리가 주님의 은총을 거부할 때마다 주님께서도 우리에 대한 호의를 거두신다면 우리에게는 아무런 소망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그때에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베푸시는 구원의 역사를 쉬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여전히 우리에게는 기회가 남아 있는 거예요. 오늘 본문의 마지막절인 35절을 보십시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35a절)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들이지 않은 결과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삶이 황폐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여전히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시니 여전히 우리에게는 마지막 기회가 남아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35b절) 

예수님의 말씀을 분명히 부정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동일한 뜻을 담고 있는 긍정문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동일한 뜻을 담고 있는 긍정문으로 바꾸면 이렇게 됩니다.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가 되면 나를 보게 되리라’ 곧, 아직은 기회가 있으니 돌이켜 주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를 받아들이면, 그들의 삶에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진다는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아직 우리에게는 기회가 남아있습니다. 


300명의 스파르타인들은 아하수에로 왕이 이끄는 25만명의 군대에 대항하여 결사 항전하였습니다. 그들은 그 싸움이 결말을 처음부터 예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스파르타인으로서 스파르타인답게 행동하며 죽는 길을 선택하였지요. 그런데 그들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낯선 이여, 우리는 스파르타인들이 기대한 대로 행동했고 이제 여기에 묻히노라고 그들에게 전해주오” 스파르타인들의 이 메시지는 모든 그리스 사람들에게 전해졌고 그들의 마음에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그리스의 여러 도시국가들은 서로에 대한 미움과 다툼을 그치고 자신들을 공격하기 위해 쳐들어온 페르시아 군대를 방어하기 위해 모든 힘과 지혜를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살라미스 전투와 플라타에아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이끌어낸 그리스 군대는 페르시아의 대군을 모두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훗날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드 몽테뉴는 테르모필레에서 마지막까지 항전하였던 300명의 스파르타인들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고 합니다. “승리에 필적하는 성공적인 패배가 있었다.”

예수님은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사역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 순간에도 예루살렘을 향해 묵묵히 걸어가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의 외면을 받고 제자들에게는 배신을 당하며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지요. 여기까지 보면 예수님의 이야기는 하나의 실패한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야기는 결코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멸시를 받으면서도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십자가의 죽음을 향하여 당당히 걸어가셨던 예수님의 이야기는 사순절을 보내며 예수님께서 걸으신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는 우리의 마음에도 큰 울림을 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요? 만일 이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지금도 우리의 마음을 울리고 있다면 우리에게 남겨진 역할은 더 이상 주님의 십자가 은혜를 외면하지 않는 것, 이제는 주님의 십자가 은혜를 내 생의 가장 귀한 것으로 여기는 것, 그리하여 우리도 주님과 함께 십자가의 그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순절을 보내는 우리의 심령마다 십자가를 지기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던 예수님의 발자취가 분명히 새겨지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은총을 거부하는 죄에서 돌이켜 주님의 십자가 은혜를 풍성히 누리는 은혜의 자리에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주님의 십자가 은혜를 외면할지 모르지만, 주님께서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으셨던 십자가의 길을 지금도 따라가시는 여러분에게는 주님의 따스한 품에 품어 주시는 그 은혜가 언제나 충만히 흘러 넘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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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