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후서 강해2022. 2. 13.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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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부르는 찬송가에는 많은 곡이 수록되어 있지요. 그 가운데 많은 찬양의 가사가 우리에게 큰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가운데 한 소절을 언급하며 설교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찬송가 9장의 4절에는 이런 가사가 등장합니다. “고난도 슬픔도 이기게 하시옵고 영원에 잇대어 살아가게 하소서이 짧은 하나의 문장, 이 짧은 하나의 기도문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찬송가 9장은 이렇게 기도하네요. “고난도 슬픔도 이기게 하시옵고여기에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고난도 있고 슬픔도 가득하다는 것을 전제하지요? 우리는 땅을 디디며 죄악 가득한 이 세상을 살아가기에 우리의 삶에는 고난도 많고 슬픔도 가득하기 마련입니다. 그때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고난도 슬픔도 이기게하여 달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가사의 정수는 바로 그 뒤에 이어지는 구절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고난도 슬픔도 이기게 하시옵고그 다음이 무엇입니까? “영원에 잇대어 살아가게 하소서.” 고난도 많고 슬픔도 많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그 모든 과정을 이기게 하여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신앙의 정수는 고난과 슬픔을 기도하며 이겨낼 수 있다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신앙의 더욱 중요한 본질은 이 세상을 살아가며 고난도 경험하고 슬픔도 경험하지만 그 모든 과정 속에서도 영원에 잇대어 살아가는 것에 있습니다.

 

여기에 ‘잇대어 있다’라는 표현이 참 독특하지요. ‘잇대다’는 단어의 문자적인 의미는 ‘맞닿아 있다,’ ‘기대어 있다’는 의미잖아요. 그러므로 영원에 잇대어 살아간다는 의미는 우리가 지금 저 영원한 천국에 완전히 들어가 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우리는 여전히 유한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고, 우리의 몸은 시간의 흐름 속에 철저히 묶여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인생은 어디까지나 유한한 인생이요, 고난과 슬픔이 가득한 세상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영원에 잇대어 살아간다는 것은 저 영원한 천국 안에 들어가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영원에 잇대어 살아간다는 의미가 그저 영원한 저 천국을 멀리서 바라보는 정도를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잇대어 있다는 것은 떨어져 있지 않고 맞닿아 있고 기대어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면 영원한 천국에 잇대어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지금 내가 살아가는 자리는 고난도 많고 슬픔도 많은 이 유한한 세상이지만, 유한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저 영원한 천국을 경험하고 저 영원한 천국을 체험하며 살아가는 것, 바로 그것이 영원한 천국에 잇대어 살아가는 것이요, 우리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방식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난 한 주간도 고난도 많고 슬픔도 많은 이 세상을 살아가셨지요?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고난도 이기고 슬픔도 이길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우리 모두가 유한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영원에 잇대어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저 영원한 천국을 경험하고 체험하실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지나갈 것

 

우리는 오늘까지 세주 째 고린도전서 13장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먼저 은사와 능력과 재능이 아무리 크고 화려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그것이 고린도전서 13장 1절부터 3절까지 말씀으로, 두주 전 우리가 함께 묵상했던 내용입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진실한 사랑의 특징이 무엇인지 노래합니다. 그것이 고린도전서 13장 4절부터 7절의 내용인데 우리는 지난주에 그 본문을 함께 묵상해 보았습니다. 자, 이제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은 영원이라는 관점에서 사랑의 가치를 노래합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인 고린도전서 13장 8절부터 13절까지의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이야기하는 모든 내용은 하나의 관점에서 서술되고 있는데 그것은 ‘영원’이라는 관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아직 영원한 시간, 곧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 살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우리 그리스도인은 영원에 잇대어 살아가는 사람들이지요. 그러면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세요. 영원이라는 관점에서 지금 우리의 눈앞에 있는 것들을 평가한다면 우리는 이 세상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요? 그 내용이 본문 8절부터 등장합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여기까지는 사랑에 대한 노래입니다. 그 다음을 주목하십시오.)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8절)

 

여기에 등장하는 예언의 은사, 방언의 은사, 지식의 은사는 당시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서로 자랑하며 뽐내던 은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영원의 관점에서 바라보니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한다는 사실이 명확해진다는 말씀이지요. 어디 예언이나 방언과 같은 은사뿐이게습니까? 우리가 지금 중요하게 여기는 것, 그래서 때로는 사람들에게 자랑도 하고 싶고 다른 누군가가 자랑하면 내심 부러운 마음이 드는 바로 그것을 영원의 관점으로 한번 바라보면 우리는 어떠한 평가를 내리게 될까요? 지금 여러분의 눈에 그토록 크고 중요하게 여기는 그것을 영원의 관점으로 바라보아도 여전히 중요할까요? 아니면 영원의 관점으로 바라보니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모두 사라져 버릴 덧없는 것들은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영원에 잇대어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지금이라는 관점이 아니라 영원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지금 내가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는 수많은 것들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모두 흘러가버리는 덧없는 것들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그토록 중요하게 여겼던 지식과 예언과 방언의 은사를 영원이라는 관점에서 평가했습니다. 그러자 어떤 결론에 이르렀지요?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이제 사도 바울은 영원이라는 동일한 관점으로 우리 자신을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결론을 내리네요. 본문 9절입니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9절)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지식이 많은 사람도 있고 지식이 부족한 사람도 있습니다. 지금의 관점에서 평가하면 신앙이 성숙한 사람도 있고 신앙이 미숙한 사람도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을 영원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니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많이 배운 사람이나 적게 배운 사람이나, 성령의 은사를 충만하게 받은 사람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이나 아무런 구별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 모두는 지금 부분적으로만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그 누구도 예외 없이 부분적인 지식만 가지고 예언하고 부분적인 정보만 가지고 불완전한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본문 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네요. “온전한 것이 올 때는” 영원의 때는 반드시 찾아옵니다. 그 때가 되면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어떻게 됩니까? 다 “폐하리라”

 

사도 바울은 진실한 사랑의 특징을 말하면서 사랑은 자랑하지 않는다고 말했지요? 그럼요. 영원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능력, 재능, 은사, 재물, 권세 그 모든 것이 잠시 있다 사라질 덧없는 것인데 자랑할 것이 무엇이 있겠어요. 바울은 진실한 사랑의 특징을 말하면서 사랑은 교만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네, 물론이죠. 영원이라는 관점에서 우리 자신을 바라보면 모두가 불완전한 것뿐인데 어떻게 교만할 수 있겠어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 모두가 영원에 잇대어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영원이라는 관점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며 나 자신을 바라볼 때, 우리는 시기하지 않습니다. 자랑하지 않습니다. 교만하지 않습니다. 결국 진실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영원한 것

 

사도 바울은 영원이라는 관점에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자랑거리를 바라보며 평가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의 자랑거리가 그렇게 자랑할 것이 못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사도 바울은 영원이라는 관점으로 우리 자신을 바라보며 평가해보았습니다. 우리에게는 교만할 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그런데 여러분, 사도 바울이 영원이라는 동일한 관점으로 계속 살펴보니 시간이 지나면서 사라지고 폐하여지는 것도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아름다워지고 더욱 완전해지는 것도 있었습니다. 자, 본문 1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이아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1절)

 

본문 11절의 이 말씀은 앞에서 언급한 내용, 곧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을 한다는 말씀의 반복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조금 더 자세히 관찰하면 앞의 내용과는 강조점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앞에서 바울은 영원의 관점에서 지금 우리의 모습을 평가하면서,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을 하는 불완전한 모습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본문 11절로 넘어와서는 새로운 강조점을 첨가하였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11절의 뒷부분입니다.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물론 지금 우리의 모습은 불완전한 미완성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의 모습이 결코 마지막 결론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마치 어린 아이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장성한 사람이 되는 것처럼, 우리도 때가 되어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에는 우리의 영적인 모습도 완전해진다는 사실입니다. 동일한 강조점이 본문 12절에도 등장합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이것은 지금 우리의 모습을 묘사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지요.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것이 우리가 도달하게 될 궁극적인 모습입니다. 본문 12절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네, 이것은 지금 우리의 모습이 맞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강조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우리의 영적인 지식이 얼마나 완전해진다고요? 주님께서 우리를 아시는 것처럼 완전한 상태가 마침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영원에 잇대어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시간이 지나도, 아니 시간이 지날수록 사라지기는커녕 날로 새로워지며 마지막 날에는 온전해지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 영원한 천국을 향한 소망, 그리고 내 곁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성도들을 향한 사랑입니다. 물론, 지금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나의 믿음이 연약하지요. 지금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천국에 대한 나의 소망은 너무도 자주 흔들리지요. 지금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내 곁의 이웃을 향한 나의 사랑은 미약하기 짝이 없지요. 그러나 영원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우리의 믿음과 우리의 소망과 우리의 사랑은 반드시 완전해질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이 확신을 이렇게 선언합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소유한 재능, 능력, 은사, 지식, 사회적 지위 이러한 것들로 자랑하지도 말고 교만하지도 말고 시기하지도 마십시오. 영원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그 모든 것은 지나가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마음에 지금은 작은 믿음이지만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으신가요? 여러분의 마음에 지금은 많이 흔들리기도 하지만 영원한 천국에 대한 소망이 있으신가요? 여러분의 마음에 지금은 식어질 때도 많지만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을 향한 사랑이 있으신가요? 그러면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영원토록 사라지지 않는 가장 귀한 세 가지를 모두 소유한 사람입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13절)

 

이제 지난 세 주에 걸친 고린도전서 13장에 대한 설교를 정리할 때가 되었네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에는 마치 도장을 새겨 놓은 것처럼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진실한 사랑이 깊이 새겨져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에 새겨진 주님의 사랑은 그 무엇으로도 지워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마음에 새겨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진실한 사랑을 따라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을 소중히 여기며 사랑을 실천하십시오. 그렇다고 여러분의 손과 발을 분주히 움직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나의 생각과 나의 마음이 추동하는 모든 말과 행동을 멈추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나의 말과 나의 행동이 상대를 불편하게 만들지는 않는 돌아보며 오래 참고 온유하여 상대에게 친절하게 행하십시오. 지금 여러분의 마음에 새겨진 주님의 사랑, 그리고 주님의 그 진실한 사랑을 따라 오늘도 여러분이 행하는 사랑의 실천은 시간이 지나도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아니 시간이 지날 수도록 더욱 아름답고 더욱 온전하게 빛날 것입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X2)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변하지 않는 진실한 사랑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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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