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강해2022. 5. 8.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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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루에서 선교사로 사역하였고, 이후에는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의 총장으로 재직하였던 존 맥케이(John Mackay)라는 분이 계십니다. 존 맥케이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두 가지 이미지로 설명했는데, 하나는 ‘발코니’이고 또 하나는 ‘길’입니다. 먼저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발코니와 같다고 설명합니다. 존 맥케이는 페루에서 복음을 전한 선교사였다고 말씀을 드렸지요. 그는 선교사 훈련을 받으면서 스페인어를 배우기 위해 스페인 마드리에 머물렀다고 합니다. 그가 이야기하는 발코니는 스페인의 가옥 구조를 염두에 둔 것인데, 건물의 위층 창문 밖으로 돌출되어 있는 공간을 말합니다. 그 발코니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자신의 집 앞의 길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리스도인의 삶이 발코니와 같다는 비유는 시시각각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사건들에 마음을 빼앗기기보다는 그 모든 장면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조망할 수 있는 넓은 시야와 지혜를 얻을 수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자주 사용하는 기독교 용어 가운데 ‘하나님의 뜻’ 혹은 ‘하나님의 섭리’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하루에도 수많은 일들을 일어나고 그 가운데는 우리의 예상이나 계획을 뛰어넘는 경우도 많습니다. 바로 그때 성도들은 개별적인 사건들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의 섭리를 찾으려고 노력합니다. 이것이 존 맥케이가 사용한 ‘발코니’라는 비유에 담겨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존 맥케이는 ‘발코니’라는 비유가 하나의 이상으로 작용할 뿐이지 그리스도인의 삶의 실제는 아니라고 설명했습니다. 성도들은 자신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섭리를 구합니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의 한계 안에 갇혀 있는 인간이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섭리를 충분히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요. 그래서 ‘발코니’의 비유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는 삶의 모습이지만 어디까지나 우리의 현실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추구하는 이상에 머물기 마련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의 삶의 실제 모습을 보여주는 이미지는 무엇일까요? 그 대답은 맥케인이 두번째로 제시한 비유인 ‘길’에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발코니 위에 올라가서 길가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사건을 넓은 시선으로 조망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놓여 있는 자리는 사람들의 머리 위에 설치된 발코니가 아니기에 그 아래에 많은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그 길을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걸어가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많은 사람들이 한데 엉켜 있는 그 길을 걸어가면서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야 하고, 우리 그리스도인은 언제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그 길을 걸어가며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해야 하며, 우리 그리스도인은 때로 기진맥진하여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그 길을 걸아가면서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실제 모습입니다. 


순례자의 길

오늘 본문 시편 23편은 너무도 유명한 시편이지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성도들이 가장 애송하는 시편을 하나 꼽는다면 오늘 본문 시편 23편이 아닐까 싶습니다. 본문 1절부터 얼마나 아름다운 시구가 시작되는지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1절) 계속해서 2절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2절) 시편 23편을 읊조릴 때마다 주님께서 친히 목자가 되어 어린양과 같은 우리를 돌보시는 장면, 주님께서 친히 목자가 되시니 어린양들이 푸른 풀밭과 쉴 만한 물 가에서 평안하게 풀을 뜯으며 물을 마시는 모습이 우리 마음에 아름답게 그려집니다. 본문이 노래하는 이 장면은 많은 화가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었고 많은 성도들도 이 시편을 사랑하고 애송하다 보니, 주님께서 선한 목자가 되어 어린양을 돌보시는 장면의 그림이 많은 성도들의 가정에 액자로 걸려 있기도 합니다. 멀리 갈 것 없이, 저희 집에도 시편 23편의 시구를 그림으로 표현한 액자가 걸려있는데요, 그 액자에는 우리 주님께서 어린양을 품에 안고 계시는 장면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처럼 많은 성도님들이 시편 23편을 낭독하고 암송하면서 떠올리는 장면은 아름다운 초원이 펼쳐져 있는 장면, 혹은 주님께서 어린양을 품에 안고 계시는 장면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 시편 23편의 전체 내용, 곧 1절부터 6절까지의 모든 내용을 한 폭의 그림으로 담아내기는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그 이유는 매우 단순한데, 시편 23편이 묘사하는 성도들의 삶은 발코니에서 그 아래를 내려다보는 하나의 넓은 전망이 아니라, 길을 걸어가면서 여러 가지 장면을 마주치는 지속적인 움직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2절을 보십시오. 주님께서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십니다. 그런데 어린 양은 주님께서 누이신 푸른 풀밭에 그대로 누워만 있을 수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님께서는 푸른 풀밭에서 다시 인도하셔서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기억할 사실은 선한 목자이신 주님께서 우리를 한 곳에 머물러 있게 하시지 않고 계속해서 이동하도록 이끄신다는 점입니다. 고대 사회의 유목민들에게 이것은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는 지극히 당연한 상식이었지요. 그들은 언제나 양 떼를 몰고 다니면서 양들에게 풀을 먹일 수 있고 물을 마시게 할 수 있는 곳을 찾아 이동했기 때문입니다. 자, 이제 ‘이동한다’는 개념을 염두에 두면서 3절을 보십시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그다음에 무엇이라고 말씀하시죠?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아직 목적지에 이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의로움’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계속해서 길을 걷게 하십니다. 이처럼 한 곳에 머물러 있지 않고 길을 따라 계속 걸어가니, 그 과정에서는 본문 4절이 묘사하는 것처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도 등장하고, 때로는 본문 5절이 노래하는 것처럼 마주치고 싶지 않은 원수를 만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친히 우리의 목자가 되시니 이 모든 길의 끝에서 우리는 본문 6절이 노래하듯 ‘여호와의 집’에 안전하게 당도할 수가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시편 23편이 노래하는 성도의 삶을 존 맥케이의 비유를 인용하여 설명한다면, 발코니 위에 푹신한 소파를 놓고 편안하게 앉아서 세상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을 한 걸음 뒤에서 조망하며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섭리를 한가하게 이야기하는 그런 모습이 아닙니다. 시편 23편이 노래하는 성도의 삶은 발코니에서 내려와 사람들이 사이에 끼여 쉴 새 없이 부대끼는 그 길을 걸어가는 모습이요, 저 천국을 향한 ‘순례자의 길’입니다. 

시편 23편을 순례자가 걸어가는 신앙의 여정으로 이해하면, 이제 본문 1절의 말씀이 더욱 풍성한 의미로 다가오게 됩니다. 본문 1절이 무엇이라고 노래합니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주님께서 나의 목자가 되신다는 말씀, 그리하여 내게 부족함이 전혀 없다는 그 말씀은 내가 사람들과 부대끼지 않는 높은 발코니에 올라가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나의 목자가 되시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위험하고 무서운 곳은 모두 피하고 언제나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만 지나게 된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나의 목자가 되시어 나에게는 부족한 것이 전혀 없으니 나를 괴롭히는 원수와 같은 존재는 처음부터 주님께서 다 물리쳐 주신다는 의미도 결코 아닙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 1절이 노래하는 것처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말씀은 도대체 어떤 의미입니까?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를 벗어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걸어갈 때도 있지만,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를 벗어나 원수들이 가득한 이 세상으로 들어가야 할 때도 많지만 바로 그때에도 주님께서 나의 목자가 되어 나를 지켜 보호하여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리하여 본문 4절은 이렇게 노래하잖아요.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바로 지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분이 계신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가는 바로 그때도 주님께서 여러분의 목자가 되어 주시고, 여러분이 원수를 마주치는 바로 그 장소에서도 주님께서 여러분의 선한 목자가 되어 주십니다. 


출애굽부터 가나안까지

시편 23편이 묘사하는 신앙의 여정을 한절 한절 묵상하다보면, 구약성경의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던 출애굽부터 가나안 입성까지의 여정과 많이 닮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내기 위하여 먼저 모세를 부르시지요.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면서 ‘여호와’라는 자신의 이름을 모세에게 처음 알려주십니다. 모세 이전에도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같은 믿음의 조상이 있었지만 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신 적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오늘 본문 3절은 무엇이라고 노래합니까?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그다음 구절입니다.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시편 23편을 묵상할 때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셨던 장면이 떠오르는 대목이지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종으로 살고 있던 애굽 땅에서 이끌어내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을 빠져나오고 홍해를 건널 때까지만 해도 이제 곧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갈 것이라고 기대감에 부풀었겠지요. 그러나 그 이후의 진행과정을 여러분도 잘 아시잖아요. 그들 앞에 펼쳐진 신앙의 여정은 가나안 입성이 아니라 40년의 광야 생활이었습니다. 하루나 이틀 혹은 한주 정도 광야를 체험한 것 아닙니다. 그들은 4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광야가 그들의 집이고 광야가 그들의 모든 생활공간이었어요. 광야에는 먹을 것이 없습니다. 마실 것이 없습니다. 더위나 추위를 피할 건물이 없습니다. 반면에 광야이기에 만날 수 있는 것도 있으니, 사람의 안전을 위협하는 들짐승의 공격이요, 밤마다 찾아오는 살을 에일 듯한 추위와 한낮에 내리쬐는 태양으로 말미암은 뜨거운 열기입니다. 그렇게 열악한 환경에서 온 민족이 40년의 세월을 살아가야 했으니 아말렉 사람들이 호시탐탐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그나마 가지고 있던 것을 약탈하려고 시도합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은 오늘 본문 4절과 5절이 묘사하듯 원수의 목전에서 살아가는 삶이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니는 것과 같았어요. 그런데 여러분, 광야 40년이 마쳐가는 바로 그 시점에 모세가 지난 40년을 돌아보며 모든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선포하였던 믿음의 고백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하십니까? 먼저 신평기 29장의 한 구절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주께서 사십 년 동안 너희를 광야에서 인도하게 하셨거니와
너희 몸의 옷이 낡아지지 아니하였고
너희 발의 신이 해어지지 아니하였으며 (신 29:5)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40년 동안 살아야 했습니다. 그것은 원수들의 목전에서 살아가는 삶이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는 기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40년 동안 하나님께서 그들의 발걸음을 인도하시니 옷이 낡아지지 않았고, 신이 헤어지지 않았고, 그들의 발이 부르트지 않았습니다(신 8:4). 신명기 2장에는 더 놀라운 모세의 고백이 등장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고
네가 이 큰 광야에 두루 다님을 알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을 너와 함께 하셨으므로
네게 부족함이 없었느니라 (신 2:7) 

이스라엘은 분명히 광야에서 생활했습니다. 먹을 것도 없고 마실 것도 없고 입을 것도 없고 더위와 추위를 피할 장소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들짐승의 공격은 늘 있었고 힘겹게 살아가는 이스라엘을 호시탐탐 노리는 아말렉 군대의 위협은 늘 있었어요. 그러나 그 모든 과정을 뒤돌아보면서 모세는 깨달았습니다. 바로 그 40년 동안 하나님께서 그들의 목자가 되어 그들의 발걸음을 인도해주시니, 결론이 무엇입니까?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을 너와 함께 하셨으므로” 이제 결론입니다. “네게 부족함이 없었느니라” 오늘 본문 1절의 고백 그대로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1절의 말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믿음의 고백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간 이후 이스라엘 백성이 노래하는 찬양이 아닙니다. 오히려 광야 40년 동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니고 있을 그때 이스라엘 백성이 체험하였던 믿음의 고백이지요. ‘다윗의 시’라는 표제어가 붙어있는 시편 23편의 1절 말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다윗의 고백은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예루살렘의 왕궁에서 평안한 삶을 살아갈 때 불렀던 찬양의 가사가 아닙니다. 오히려 사울의 칼날을 피해 이스라엘 전역을 떠돌아다니며 노래했던 믿음의 고백입니다. 
마찬가지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즐겨 암송하는 시편 23편의 1절 말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는 고백은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이 마지막 날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우리를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실 때 부르는 찬양이 아닙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며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를 만났을 때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나의 목자가 되어 주시니 내게는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다고 노래하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며 힘겨운 시간을 통과하는 바로 그때에도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가 되어주시니 비록 원수들에게 둘러싸여 있을 지라도,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걸어가고 있을지라도, 나에게는 부족함이 전혀 없다고 우리는 온 마음을 다해 노래할 수 있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오늘 본문을 비롯하여 구약성경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목자가 되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신약성경에 이르면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신다고 가르쳐주지요. 요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선한 목자로 소개하시는 대목이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그 다음의 말씀이 무엇인지 기억하시나요?)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요한복음 10장 15절) 

성도들의 인생은 저 높은 발코니에 편안하게 앉아 있는 모습이 아닙니다. 성도들의 인생은 사람들과 부대끼며 크고 작은 일들을 온몸으로 맞아들이는 순례자의 길이지요. 그리하여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갈 때도 있고, 원수들에게 에워싸여 위태로운 순간을 맞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목자가 되어 주시니 주님과 함께 걸어가는 순례자의 길에는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 다윗의 고백이었고, 구약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으로 넘어오면 저 안락한 하늘의 보좌, 편안하게 이 세상을 내려다볼 수 있는 하늘나라의 발코니에서 스스로 내려와 우리를 위하여 이 세상의 가장 험한 길을 걸어가신 분에 대해 이야기해줍니다. 그분이 누구십니까?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인생의 험한 길을 걸어가는 우리를 위하여 스스로 죽음의 음침한 골짜기에 들어가시고, 스스로 죽음의 십자가를 지시며, 바로 그곳에서 우리의 모든 죄와 우리의 모든 고통을 대신 감당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 선한 목자이신 우리 주님께서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 주셔서 평안한 삶을 살아가고 계신 분이 계십니까? 지금 여러분이 누리는 평안은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대신하여 죽음의 골짜기를 걸어가신 희생의 결과인 줄 깨달아 이제는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기대하시는 의의 길을 향해 힘껏 달려 가십시오. 반대로, 여러분 가운데 원수들에게 둘러싸여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걸어가시는 분이 계신가요? 여러분의 눈을 들어 먼저 그 길을 앞장서서 가시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그 주님께서 친히 여러분의 선한 목자가 되어 여러분의 발걸음을 인도하시니 조금만 더 힘을 내어 그 주님을 따라가십시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X2)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6절) 

선한 목자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여러분 모두의 순례길에 
이 약속의 말씀이 반드시 성취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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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