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강해2021. 7. 25.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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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하라의 불꽃>이라는 책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샤를 드 푸코는 프랑스의 군인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하나님을 만난 후에 그는 가톨릭 교회에 귀의하였고, 수도사가 되어 사하라 사막에서 원주민을 대상으로 선교하다가 원주민의 총에 맞아 순교한 인물입니다. 그의 책 <사하라의 불꽃>은 샤를 드 푸코가 사막의 수도사로서 자신이 지나온 영혼의 여정을 기록한 수기입니다. 그는 이 책에서 독자들에게 하나의 질문을 던집니다.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무엇인가?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는 우리 성도들에게 가장 어려운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지속적으로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경건의 시간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어려우십니까? 아니면 나의 물질을 하나님께 드리거나 하나님의 뜻대로 관리하며 사용하는 것이 가장 어려우신가요? 어떤 분들은 일상 속에서 내 곁에 있는 이웃을 배려하고 양보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고 답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한 샤를 드 푸코의 대답은 참 의외입니다. 그는 자신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분명히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믿고,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과 그 안의 모든 것을 만드셨음을 분명히 믿지요.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온 세상을 구원하시는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믿습니다. 그러나 샤를 드 푸코가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어려운 일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라고 했을 때, 그 의미는 하나님께서 지금 이 순간도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믿음, 하나님께서 지금도 나의 생각과 나의 행동을 감찰하고 계시다는 믿음, 그리하여 매 순간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믿음을 말합니다. 

우리의 삶에 때로는 큰 어려움이 찾아옵니다. 질병이 찾아오기도 하고, 오랜시간 준비한 것이 실패하기도 하고, 또 코로나 바이러스와 같이 나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외부의 요인으로 나의 삶에 큰 고통이 찾아오기도 하지요. 그런데 여러분, 이렇게 나의 삶에 큰 어려움이 찾아오면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을 기억하며 더욱 하나님을 찾아요, 하나님께 기도하고 더욱 하나님의 얼굴을 구합니다. 우리는 지금 내가 당하고 있는 현실이 어렵지,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이 그렇게 어렵게 느껴지지는 않지요. 그때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인생의 고비를 만났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주시고 우리를 선하고 아름다운 길로 인도해주시는 경험을 하면 우리 성도들의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 차고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마음으로 충만해집니다. 이러한 때에도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일이 그렇게 어렵지 않아요. 

그러나 우리의 신앙생활에는 하나님의 손길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때만 계속되지 않거든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나의 삶에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이 임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렇게 한두달 기도했지만 아직 하나님의 응답이 보이지 않아요. 어느덧 시간은 흘러 한 달이 1년이 되고, 두 달이 5년이 되고 10년이 되어도 나의 삶에 아무런 변화 없이 시간만 흐르는 경우도 있어요. 그러면 그 오랜 시간 하나님의 손길이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분명히 믿지만 하나님의 손길이 보이지도 않을 때가 있어요. 오늘 설교의 제목과 같이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때’를 맞이하게 되지요. 바로 그때, 샤를 드 푸코의 경고는 우리에게 현실이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지요, 그래서 예배도 참석하고 기도도 합니다. 그러나 나의 삶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으니 지금도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늘 의식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가 너무도 어려워집니다. 


어리석은 자

본문 시편 14편은 하나님이 보이지 않을 때 성도들에게 찾아오는 이 치명적인 위험성에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1절) 

여기에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는 하나의 생각이 등장하네요.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없다”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의 표현을 단순한 무신론이라고 생각하시면 오해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무신론자들 – 이 세상에는 영적인 존재도 없고 신적인 존재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 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않았던 가나안 사람들도 바알과 아세라와 같은 많은 신들을 섬겼지요. 그러니 본문 1절에 등장하는 “하나님이 없다”라는 생각은 모든 영적인 존재와 신적인 존재를 부정하는 무신론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온 우주 만물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셨다는 사실은 분명히 믿습니다. 자신의 조상들이 애굽에서 종살이할 때 하나님께서 위대한 기적으로 이끌어내 주셨다는 사실도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금 자신의 삶에 찾아오셔서 역사하고 계시다는 사실은 믿지 못합니다. 자신의 일상에 하나님의 손길이 구체적으로 보이지 않으니 하나님을 의식하거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잃어버린 채 매일 주어진 하루를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을 믿기는 하지만 실제 나의 삶에는 하나님께서 안 계신 것처럼 살아가는 삶의 태도입니다. 그래서 여러 학자들은 이러한 삶의 방식을 단순한 무신론과 구별하기 위해 ‘실천적 무신론’(practical atheist)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삶의 큰 위기가 찾아왔을 때는 오히려 더 주님을 찾게 됩니다. 거대한 위험 속에서도 우리를 건져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할 때에는 실천적 무신론의 유혹이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나의 삶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을 때, 나의 삶에 행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나 하나님의 역사를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을 그 때 우리의 마음은 실천적 무신론에 너무도 쉽게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래서 시편 14편은 계속해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직접 인간들의 마음을 살펴보시네요.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을 살펴보시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지각이 있는가?’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있는가?’ 본문 1절의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라고 생각하며 그렇게 행동하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 실제로 나의 삶에 하나님께서 역사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을 늘 인식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를 살펴보셨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무엇이지요?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3절) 

이 말씀 역시 불신자나 우상숭배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중에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 중에도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없으니 하나도 없다는 탄식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이지만 하나님의 역사가 지금 눈에 보이지 않으니 하나님을 믿는 것이 이처럼 가장 어려운 일이 되고 맙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지금도 내 곁에 계시는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망각하게 되면 정말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본문 4절입니다.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냐” 여기에 하나님을 찾지 않는 어리석은 사람들의 또 다른 별칭이 등장하는데요. 이들은 ‘죄악을 행하는 자’입니다. 지금도 나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은 채 살아가고 있으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한 삶에서 미끄러져 악을 행하는 자리에 앉고 맙니다. 하나님에 대해 알고 믿는 것 같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머리로 알고 있는 지식일 뿐, 그 믿음이 자신의 삶을 선한 길로 이끌지 못합니다. 계속해서 본문 4절은 어리석은 자, 곧 죄악을 행하는 자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들이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네, 그들은 이처럼 악을 행합니다. 동시에,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하나님을 찾는 지혜도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정말 무서운 말씀은 바로 5절에 등장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그들은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 (5절) 

나의 삶에 하나님의 손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도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조금씩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잊어버린 그 마음에는 무엇이 찾아온다고 말씀합니까? “거기서 그들은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을 잊어버린 마음에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나의 눈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을 때, 나의 눈이 지금 당장 하나님의 손길을 보지 못한다 하여 나의 마음도 하나님을 잊어버리면 그 끝을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내 마음을 사로잡게 됩니다. 그래서 어느 신학자는 오늘 본문을 근거로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은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에도 두려움을 느낀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에 이유를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찾아오시는 분이 계신가요? 여러분의 마음이 끝을 알 수 없는 걱정과 염려로 가득 찬 분은 안 계세요? 그러면 여러분의 마음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있지는 않은 지 반드시 점검하십시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하나님의 역사가 나의 삶에 드러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만 하나님이 보이지 않을 때가 분명히 찾아옵니다. 여러분, 그것은 괜찮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언제든 마주칠 수 있는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눈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나의 마음까지도 하나님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나의 마음이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순간 우리는 죄악을 행하는 자리로 미끄러지고, 그러한 나의 마음에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두려움과 끝을 알 수 없는 걱정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가난한 자

하나님이 보이지 않을 때 우리 성도들에게는 너무도 무서운 유혹이 찾아옵니다. 이른바 실천적 무신론의 유혹, 지금도 내 곁에 계시는 하나님을 마음으로 잊어버리고 그 하나님을 더 이상 경외하지 않게 되는 유혹입니다. 나의 삶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을 때 내 곁에 계시는 하나님을 잊지 않고 늘 경외한다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일이기에 많은 성도들이 이 유혹에 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용기를 내십시오. 오늘 본문에는 실천적 무신론이라는 이 무서운 유혹을 이겨낸 사람들도 등장합니다. 

너희가 가난한 자의 계획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의 피난처가 되시도다 (6절) 

여기에 누가 등장합니까? ‘가난한 자’입니다. 구약성경에서 가난한 자는 경제적 가난을 포함해서 정치적 권력도 없고 사회적 지위도 없으며 때로는 신체적 건강도 없는 장애인들을 가리킵니다. 이른바 사회적 약자를 통칭하는 용어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더하여, 구약성경의 가난한 자는 그의 마음이 가난하여 하나님을 바라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사람을 의미하지요. 분명히 본문 2절과 3절에서는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없으니 한 사람도 없다고 노래했습니다. 그런데 본문 6절에 이르면 느닷없이 ‘가난한 자’가 등장하네요. 그러면 우리는 이 장면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시편 14편을 묵상하며 우리는 구약성경의 여러 장면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고 한탄하시는 장면을 묵상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는 노아의 홍수 사건이 떠오르지요. 하나님께서 온 지면에 큰 홍수를 쏟아붓는 이 사건의 배경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들이 너 나할 것 없이 큰 죄악에 빠진 현상이었거든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을 잊어버렸습니다. 하늘 보좌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지켜보시던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그 자리에 악한 생각이 가득한 것을 보시고 한탄하시고 근심하셨습니다(창 6:5-6). 그래서 하나님은 근심하며 온 세상을 홍수로 심판하기로 결정하십니다. 그러나 여러분, 바로 그 시대에도 마음이 가난하여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있었지요? 바로 노아입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열심히 방주를 만들고 있는 그 순간에도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마음에 하나님을 잊어버린 채 자신의 욕심을 따라 살아가고 있었어요. 그들의 눈에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았거든요. 열심히 방주를 만들어 있었던 노아의 눈에도 하나님이 보이지 않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아직은 하나님의 홍수 심판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그 오랜 시간, 노아는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 끝까지 붙들고 방주를 마지막까지 건조해 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 본문 6절의 말씀은 노아의 삶에 현실이 되었지요. 

[어리석은 자들은] 가난한 자의 계획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의 피난처가 되시도다 (6절) 

우리는 코로나의 시대를 지나가고 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몰려오기 전, 함께 모여 예배하다 보면 우리는 그곳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함께 모여 기도하다보면 우리는 그곳에서 하나님의 응답이 임하는 것을 체험할 수 있었지요. 우리가 함께 모여 봉사하면 그곳에서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예배가 온라인으로 전환되었고, 그만큼 교회의 모든 활동이 위축되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그 어느 때보다 우리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시간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바로 이때 우리 앞에는 두 가지 갈림길이 놓여 있습니다. 첫 번째 갈림길은 세상의 대부분 사람들이 그렇듯, 심지어 교회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대부분의 성도들이 그러하듯 우리 마음에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실천적 무신론의 유혹에 빠져드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무엇인지는 이미 말씀을 드렸지요. 그 마음에 하나님을 잊은 어리석은 사람은 죄악을 행하는 자리로 미끄러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바로 이때에도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가능성이 있으니,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되어 더욱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고 여기며 살아가는 어리석은 사람들은 두려워하고 두려워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가난하여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의 피난처가 되어 주십니다. 


구원의 기쁨

시편 14편은 전반적으로 하나님이 보이지 않을 때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마지막 구절에 이르면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때가 끝나고 하나님의 임재가 모든 사람들 앞에 분명히 드러나는 그때를 노래합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노라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포로된 곳에서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7절) 

히브리인들은 430년 동안 애굽에서 종살이를 했지요. 그 430년의 세월은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세월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70년 동안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했지요. 그 70년이라는 세월은 그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 임하지 않았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이 보이지 않던 세월이었어요. 그러나 70년이라는 정해진 시간이 이르자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포로 된 곳에서 돌이켜 주시잖아요. 430년이라는 세월은 너무도 길어 모든 사람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약속을 잊어버리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을 결코 잊어버리지 않으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셨잖아요. 그러므로 아무리 오랜 세월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시간이 지속된다 할지라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구원의 때는 반드시 찾아옵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으십니까? 여러분 괜찮습니다. 그것은 신앙생활의 자연스러운 과정입니다. 다만 한가지, 날마다 하나님을 찾는 그 마음만큼은 반드시 간직하십시오. 하나님이 보이지 않을지라도, 아니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지금이야말로 더욱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십시오. 그리하여 지금 여러분이 계신 바로 그곳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여러분의 피난처로 삼으십시오. 지금은 하나님이 보이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은 지금도 여러분의 삶에 놀라운 일을 행하고 계시니 마침내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여러분의 삶에 나타날 것이요, 여러분의 마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큰 기쁨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포로된 곳에서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7b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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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