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강해2021. 11. 7.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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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대표적인 저서 가운데 하나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입니다. 이 책의 주제는 행복입니다. 우리 인간이 어떻게 행복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답변이지요.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수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내용들이 담겨 있습니다. 이 책에는 행복을 설명하기 위해 몇 가지 비유를 사용하는데, 그 가운데 한 문장을 인용하면 이렇습니다. 

제비 한 마리가 날아온다고 하루 아침에 봄이 오지 않듯, 
사람도 하루 아침에 또는 단 기간에 행복해지지는 않는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1권 7장) 

한 두 가지의 중요한 생각이나 행동 혹은 특별한 체험이 잠시 행복한 감정이 들게 만들어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삶 전체를 행복으로 바꾸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나의 삶을 행복으로 가꾸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을 제비 한 마리가 날아온다고 하루아침에 봄이 되지 않는다는 비유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계속해서 우리의 삶을 행복으로 가꾸기 위한 노력을 강조하는데, 이번에도 비유를 들어 설명합니다. 이를테면, 전쟁을 지휘하는 장군의 예가 등장해요. 그 장군에게 주어진 자원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군인의 숫자가 정해져 있고, 전쟁에서 군마로 활용할 수 있는 말의 숫자가 정해져 있고, 군인들을 먹일 수 있는 군량도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자, 그러면 이 장군에게 주어진 역할은 무엇입니까? 자신에게 주어진 군대로 가장 효과적이고 적절한 전략을 짜는 일이 중요하죠. 아리스토텔레스는 바로 이것이 자신의 삶을 행복으로 가꾸는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또 하나의 비유는 구두를 만드는 제화공입니다. 제화공이 사용할 수 있는 가죽의 종류, 가죽의 양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그러면 그 제화공에게 남겨진 과제는 무엇일까요? 주어진 가죽을 가지고 가장 훌륭한 구두를 만드는 일이죠. 우리가 나의 삶을 행복으로 가꾸는 과정이 꼭 이와 같다는 교훈입니다. 우리에게는 각자에게 주어진 처지와 형편이 다 다릅니다. 왜 저 사람에게는 주어진 것들 것 나에게는 이렇게 부족하냐고 불평하면 내 삶을 행복으로 바꿀 수 없어요. 그 대신 지금 나에게 주어진 것들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가장 아름다운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마치 주어진 군대로 가장 적절한 전략을 짜는 장군처럼, 마치 주어진 가죽을 가지고 최고의 구두를 만들어내는 제화공처럼 말이지요. 

지금까지 소개해드린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내용은 이후 수천년의 세월이 흐르는 지금까지도 인류의 많은 사람들이 동의해온 행복론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형편을 탓하기보다 주어진 형편에서 최선을 다해 나의 행복을 추구하라는 교훈이지요. 그러나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찬찬히 읽어보면 이와 같은 가르침에 치명적인 오류와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아리스토텔레스 자신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트로이의 마지막 왕이었던 프리아모스입니다. 그는 트로이의 왕으로 지혜롭게 자신의 왕국을 다스렸습니다. 그의 통치로 말미암아 트로이는 번영하였고 프리아모스 왕은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으며 행복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노년이 되어 우연히 일어난 트로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그의 장자 헥토르가 아킬레스에게 죽고 말지요. 프리아모스 왕은 적진에 들어가 비굴한 모습으로 아들의 시신을 요청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그리스 사람들에게 프리아모스 왕은 젊은 시절에는 행복했지만, 외부로부터 큰 불행이 거듭되면서 노년에는 불행한 인생을 살았던 사람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들었지요. 그렇게 열심히 성실히 살다 보면 좋은 날이 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처지와 형편이 어떠하든, 주어진 군대로 최선의 전략을 짜는 장군이나 주어진 가죽으로 최고의 구두를 만드는 제화공처럼 오늘 나의 행동이 내일의 행복을 좌우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가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외부로부터 밀려오는 불행으로 말미암아 내가 추구하던 행복이 얼마든지 빼앗겨버릴 수도 있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 아닌까요? 모든 백성에게 칭송을 받던 프리아모스 왕이었지만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외부의 불행이 겹쳐 몰려오니 그의 노년은 불행으로 점철되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인간의 노력이 헛되다

오늘 본문 시편 127편은 우리 신앙인들이 애송하는 시편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본문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읽어보면, 본문 1절과 2절은 매우 부정적인 인간의 실존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1절) 

여기에 인간의 노력과 수고가 ‘헛되다’는 말이 두 번 반복해서 나오네요. 그런데 여기가 끝이 아닙니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2a절) 

이 짧은 구절에 ‘헛되다’는 말이 세번이나 나오는데 그 의미는 인간의 모든 수고가 헛되다는 말씀입니다. 이 구절을 읽어보면 구약 전도서의 가장 유명한 구절이 떠오르지 않으세요.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 

전도서의 이 구절에서 헛되다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헤벨’입니다. ‘헤벨’이라는 단어는 의성어로 시작했습니다. 인간의 숨소리를 ‘헤벨’이라는 발음으로 나타내었던 것이죠. 이 단어가 조금 더 의미를 확장해서 수증기, 연기, 안개와 같은 구체적인 현상을 나타내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눈에 보이는 현상을 넘어 추상적인 개념까지 포괄하게 되었는데 무상 혹은 덧없음이라는 의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추상적 개념과 관련하여 구약성경에서 사용된 ‘헤벨’이라는 단어의 용례를 보면 독특한 쓰임새가 있습니다. 곧, 여호와 하나님이 아닌 이방의 우상을 이야기할 때 ‘헤벨’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사람들이 열심히 우상을 숭배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복을 받기 위함이지요. 정성을 다해 우상을 숭배해서 그 우상의 도움으로 물질의 복, 건강의 복, 자녀의 복을 받으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구약성경은 이방 우상에 대해 ‘헤벨,’ 헛되다고 말합니다. 그것들에게 아무리 정성을 다하고 노력을 기울여도 우상은 우리 인간에게 단 하나의 복도 가져다줄 수 없어요. 그러니 그것들은 ‘헤벨,’ 헛된 우상입니다. 

구약의 전도자(코헬렛)는 인간의 일생이 ‘헤벨,’ 헛되다고 말했습니다. 마치 우상을 열심히 숭배해도 그것이 우리에게 복을 줄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나의 힘으로는 우리의 행복으로 이끄는데 큰 한계가 존재합니다. 그것이 우리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자신이 관찰한 인간의 삶을 이렇게 서술하였습니다.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보니
빠른 경주자들이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용사들이라고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들이라고 음식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명철자들이라고 재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지식인들이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
이는 시기와 기회는 그들 모두에게 임함이니라 (전 9:11) 

우리는 마땅히 최선을 다해 우리의 삶을 행복으로 이끌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전도자의 지혜는 무엇입니까? 달리기 연습을 열심히 해서 빠른 경주자가 된다고 먼저 도착하는 것도 아닙니다. 뛰어난 장군이라고 언제나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도 아닙니다. 지혜가 있고 명철하다고 하여 큰 재물을 얻는 것도 아닙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을 행복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우리의 한계를 인정해야 합니다. 나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 없습니다. 나의 노력으로 이룰 수 있는 것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나의 모든 노력과 수고가 ‘헤벨,’ 아침 안개와 같이, 우상을 숭배하는 일과 같이 헛되다는 사실을 먼저 인정해야 합니다. 


넘치는 하나님의 축복

시편 127편은 하나님의 도움이 없는 인간의 모든 노력과 수고가 얼마나 헛된 것인지를 노래하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러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축복을 노래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2b절)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잠, 곧 휴식을 주신다고 말씀하시네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수고하는 인생, 고생하는 인생, 아침 이른 시간부터 늦은 밤까지 아등바등 살아가는 인생들에게 쉼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헛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예배하는 여러분 모두에게 이와 같은 하나님의 축복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지난 한 주도 고생 많으셨잖아요. 다른 사람은 알아주지 않아도 여러분 모두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사셨잖아요. 열심히 수고하였지만 열매가 없는 것 같아 자신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신 분도 계시잖나요? 오늘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하는 여러분 모두에게 쉼을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2절의 구절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는 말씀은 다른 방식으로 번역할 수도 있는 구절입니다. 여러 번역이 존재하지만, 표준새번역성경의 번역만 소개해 드리면 이렇습니다.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에게는 그가 잠을 자는 동안에도 복을 주신다.”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지 않으면 우리 인간의 삶은 헛된 인생입니다. 행복한 인생을 가꾸기 위해 열심히 수고하지만 그 수고에는 열매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축복은 무엇입니까? 잠을 자는 동안에도 복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축복은 우리가 수고한 대로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우리가 수고한 것 이상으로, 우리가 노력한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심지어 잠을 자고 있는 그때도 베풀어 주시는 넘치는 축복입니다. 

오늘 본문 시편 127편은 하나님의 축복을 노래하면서 그 축복의 대표적인 예로 가정의 행복을 말합니다. 시편 127편이 시작하는 1절부터 가정에 대한 소재는 다루고 있거든요.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않으시면”(1a절) 여기서 ‘집’은 건물이 아니라 ‘가정’입니다. 계속해서 3절부터 5절까지 자녀에 대한 내용을 노래하지요.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3절) 

인간의 행복에 있어서 가정 생활만큼 중요한 요소가 있을까요?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가정의 행복만큼 인간의 노력이나 인간의 수고가 그 성공을 보장하지 못하는 영역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가정의 행복에 있어 부모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런데 우리가 노력하고 수고한다고 좋은 부모를 만나는 것이 아니지요. 가정의 시작은 결혼입니다. 그런데 배우자를 찾기 위해 더 노력하고 더 수고할수록 나에게 적합한 배우자를 만날 수 있다고 그 누가 장담할 수 있습니까?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는 자녀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 그 누가 자신의 수고와 자신의 노력으로 우리의 자녀를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바꿀 수 있겠습니까? 가정생활은 인간의 행복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이지만, 가정생활만큼 인간의 수고와 노력이 헛된 영역도 없어요. 그리하여 시편 127편은 인간의 행복을 가장 크게 좌우하는 가정의 행복이 전적인 하나님의 축복에 달려 있다고 선언합니다.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3절) 

가정의 행복, 그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축복

시편 127편은 크게 두 가지를 노래하지요. 첫째는 인간의 모든 노력과 수고가 우리의 삶을 행복으로 이끄는데 헛되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인간의 헛된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축복만이 우리의 삶을 참된 행복으로 인도할 수 있다는 사실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이렇게 시편 127편의 주제를 정리하고 나면 이것이 우리가 믿는 복음의 진리와 동일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시나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믿고 고백하는 복음의 진리도 이처럼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 첫째는 인간이 구원을 받는 일에 있어 우리의 모든 노력과 수고는 모두 헛되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이 고행을 하고 선하게 살기 위해 참선을 하고 철학과 윤리와 종교를 제 아무리 연구하여도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 절대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둘째로 인간이 도저히 찾아 나설 수 없는 그 구원의 길을 하나님께서 친히 열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에게 임하게 된 것이지요.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 시편 127편을 묵상하며 우리는 이렇게 결론을 내릴 수 있어요. 우리의 삶을 행복으로 이끄는 것, 우리의 가정이 행복한 가정이 되는 것은 우리 인간의 노력 여하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은”(X2)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이라는 책에서 인간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마치, 주어진 군대로 최선의 전략을 짜는 장군이나 주어진 가죽으로 최고의 구두를 만드는 제화공처럼 말이지요.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지요. 행복을 위한 인간의 노력과 인간의 수고에는 너무도 분명한 한계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이라는 책에서 자신의 행복론을 주장한 뒤 약 500년이 흘렀을 때, 기독교의 위대한 교부였던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는 <행복한 삶>이라는 책을 저술하게 됩니다. 이 책에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성도들에게 행복한 삶을 위해 권면하는 내용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 <행복한 삶>이라는 책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저술한 <니코마코스 윤리학> 사이에 존재하는 너무도 분명한 차이는 이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위해 인간이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도 인간의 노력과 수고에 분명한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는데서 그쳤습니다. 반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한계를 분명히 인식하면서 그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으니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으로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참으로 행복한 가정을 원한다면 이제는 여러분의 마음에 간직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그 복음의 진리를 더욱 확신하십시오.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2절)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에게는 
그가 잠을 자는 동안에도 복을 주신다 (2절, 표준새번역)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어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녀가 된 여러분들을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고 
반드시 행복의 길로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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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