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2022. 3. 21.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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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실 때 선포하셨던 핵심 메시지는 ‘회개’였습니다. 마태복음 4장에는 이런 구절이 등장합니다. “이 때부터” 여기에서 ‘이 때’는 예수님의 공생애가 시작되는 그 때입니다.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마 4:17) 그러므로 공생애를 처음 시작하실 때부터 예수님께서 강조하셨던 핵심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회개입니다.

회개란 하나님을 떠나 죄악된 생활을 일삼았던 나의 삶을 돌이켜 하나님의 뜻을 향해 삶의 방향을 돌이키는 것을 뜻하지요. 그런 점에서 예수님을 처음 믿을 때, 곧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세상에서 수많은 죄를 저지르고 살다가 그 삶을 돌이켜 믿음의 길로 돌이킬 때, 우리에게는 반드시 회개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신앙생활을 10년, 20년, 혹은 그 이상 오랜 해오신 분들의 경우는 어떠할까요? 우리는 이미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매주일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으며,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마음은 너무도 쉽게 복음의 진리에서 떠나 자신이 익숙한 삶의 방식과 세상의 가치관에 이끌리지 않던가요? 복음은 자유를 선포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여전히 얼마나 많은 것들의 종이 되어 살아가는지요? 복음은 차별을 거부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차별의 죄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요? 복음은 자격 없는 자에게 베푸시는 은혜를 선포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교만하여 지금 내가 누리는 것은 내가 그럴 만한 자격이 있기 때문이라고 여깁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더라도 우리는 시시때때로 복음의 진리로부터 벗어나고 있으니 그 방향을 돌이켜 복음의 진리로 돌아와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신앙생활을 매우 오래하신 분들은 아마도 충분히 기억하시리라 생각합니다. 한국 교회가 급격히 부흥하였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넓게 보아 1900년대 후반이었지요. 그때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한국 교회 성도들은 문자 그대로 “쉬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새벽기도는 물론이고 철야기도도 참 많이 했었는데, 당시의 철야기도는 말 그대로 밤을 꼬박 새우면서 기도하고 그 다음날 새벽기도로 이어지는 것이 당시로서는 매우 흔한 일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조금 더 기억을 더듬어 보면, 한국 교회가 크게 성장하던 시기에 성도들은 너나할 것 없이 참 열심히 기도하였는데, 그 기도의 많은 내용이 회개 기도였습니다. 저 장로님, 저 권사님은 회개할 것이 별로 없어 보이는데, 저렇게 열심히 거룩한 삶을 위해 노력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기도를 시작하기만 하면 얼마나 많은 회개의 기도를 드렸는지요. 교회학교에서 수련회나 성경학교를 한다면, 그 기간 내도록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기억하시지요? 수련회나 성경학교에서 쉬지 않고 드렸던 기도는 바로 회개의 기도였습니다. 그에 비하면 오늘날 우리의 기도가 너무 약해진 것은 물론이요, 참된 회개의 기도가 사라져버린 듯하여 애석한 마음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한국 교회 안에 회개의 기도가 사라져버린 이 현상은 한국 교회 성도들이 이제는 회개하지 않아도 될 만큼 복음의 진리에 바르게 서 있다는 의미는 아니겠지요. 아니 그 반대의 의미를 담고 있지 않겠습니까? 참으로 회개하지 않으니, 지금도 복음의 진리에서 멀어져 세상의 가치관에 이끌리는 우리 자신을 내버려두고 있는 것이요 이 땅의 교회는 어느덧 복음의 능력을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회개라는 주제는 듣는 이들에게 편안한 내용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분, 복음의 진리를 떠나려는 우리의 마음을 돌이켜 우리의 삶을 다시금 하나님을 향하게 만드는 회개가 있을 때만 우리의 내일에는 참된 소망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의 마음에 회개의 영이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의 마음에 진심 어린 회개가 터져나오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의 심령에 회개의 참된 능력이 나타나 우리의 앞날이, 우리 교회의 내일이 새로운 소망으로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아니하면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 당시에 일어났던 두 개의 큰 비극적 사건이 등장합니다.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아뢰니”(1절) 빌라도 총독이 갈릴리 사람들을 학살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도 모자라 죽은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이방 신들에게 제사하는 제물로 사용했다는 끔찍한 이야기입니다. 성경 외에도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인 요세푸스가 기록한 <유대전쟁사>에는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최소한 다섯번 등장합니다. 그러니 당시 고대 사회에서 정치권력자가 저지른 학살이 주기적으로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 4절에는 또 하나의 비극적인 사건이 등장합니다.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덞 사람이”라고 시작하네요. 실로암이라는 장소에 세워져있던 망대가 무너졌습니다. 이 사고로 열여덟 명이 생명을 잃어버렸네요. 본문 1절이 묘사하는 사건이 권력자 한 사람의 횡포로 말미암은 비극이라면, 본문 4절이 묘사하는 장면은 그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던 사고였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동일했습니다.여러 사람들이 생명을 잃어버리는 비극을 맞이했다는 점입니다. 

자,이 두 가지 사건에 대해 예수님 시대를 살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예상하지 못했던 큰 재앙을 만나 생명을 잃어버린 이 사람들은 분명히 다른 사람이 저지르지 않은 큰 죄를 범한 죄인이라고 말이지요. 그 죄가 사람들에게는 가려질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조금도 숨길 수 없기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큰 재앙을 내리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에 대해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답하십니까? 본문 5절입니다.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다음이지요. “아니라” 사람들의 생각이 틀렸다고 분명히 선언하십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당시에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에 대한 예수님 자신의 해석을 말씀하시네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5절) 

예수님은 당시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생각에 대해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지요. 그러나 본문 5절의 말씀을 천천히 읽어보면, 당시 유대인들의 생각, 곧 예상치 못했던 재앙으로 목숨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는 분명 그러한 재앙을 당할만한 죄가 있다는 생각 자체를 예수님께서 부정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큰 재앙을 당하여 목숨을 잃기도 하였지만, 하나님께 이것이 부당한 처사라고 항변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당시 유대인들의 생각 가운데 어느 지점을 반대하며 “아니라”고 말씀하셨던 것일까요? 생각지도 못했던 재앙을 만나 죽음을 당한 사람들만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여 징벌을 받아야 하는 대상이라는 생각을 거부하셨던 것입니다. 본문 5절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잖아요? “너희도” 그렇습니다. 큰 재앙으로 죽음을 맞이했던 사람들만이 아니라 “너희도” 하나님 앞에 큰 죄를 범하고 있으니 언제라도 재앙을 당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너희도” 그 다음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기독교의 진리, 곧 기독교가 가르치는 진리의 핵심을 우리는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여러분, 복된 소식이라는 의미의 복음은 그 시작이 비극적인 소식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신가요? 왜 그렇습니까? 복음은 먼저 우리 모든 인간이 죄인이며 하나님의 진노를 결코 피할 수 없다는  사실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3장의 말씀 그대로이지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져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 그리하여 로마서는 이렇게 결론을 내리네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예수님께서 지금 강조하시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너희도” 빌라도에게 학살당한 사람들만이 아니라,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명만이 아니라, “너희도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바로 이것이 하나님 앞에 큰 죄인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는 우리 인간의 운명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운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회개입니다. 


열매를 얻지 않으면

예수님의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어떤 분들은 모든 인간의 운명이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것은 맞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기 이전의 상태이고 예수님을 영접하여 구원받은 우리는 심판이나 멸망의 운명에서 벗어났다고 말씀하실 분도 계실 듯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덧붙이시는 이른바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는 그처럼 쉬운 답을 우리에게 허락하지 않습니다. 

자, 어떤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는 포도원지기를 고용하여 무화과나무가 잘 성장할 수 있도록, 나아가 무화과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무엇 하나 부족함 없이 공급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포도원의 주인은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기에 충분한 시간이 흐를 때까지 기다려주었습니다. 자, 이제는 열매를 맺을 때가 되었겠지라는 마음으로 포도원에 심은 무화과나무를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모든 조건을 다 갖추었고 충분한 시간을 기다려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무화과나무는 열매를 맺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포도원의 주인은 결단을 내립니다. 

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7절) 

지금 포도원에 심겨진 무화과나무의 상황이 어떻습니까? 너무도 위태로운 상황이지요. 지금이라도 주인의 명령에 따라 포도원지기가 도끼를 휘두르면 큰 재앙을 만나 망하게 될 운명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비유에서 무화과나무가 이처럼 위태로운 운명에 처하게 된 이유가 무엇이지요? 무화과나무가 포도원에 심겨지지 않았기 때문인가요? 무화과나무가 포도원 주인이 제공하는 풍성한 돌봄과 영양분을 제공받지 못했기 때문인가요? 아닙니다. 무화과나무는 포도원 주인의 특별한 관심을 받아 잘 조성된 포도원에 심겨졌습니다. 오랜 시간 포도원지기의 보호를 받았습니다. 마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천국의 백성이 된 것처럼, 마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주님의 돌보심과 보살핌을 날마다 누리며 살아가는 것처럼 오늘 본문에 나오는 무화과나무가 꼭 그와 같습니다. 그러면 무화과나무가 지금 당장이라도 도끼에 찍혀 큰 재앙을 만날 운명에 처해진 이유는 무엇입니까? 단 하나죠. 열매를 맺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 곧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오늘 나의 삶에 적용하더라도 여러분은 하나님의 나라 포도원에서 절대로 제거될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자신할 수 있으신가요?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은 아직도 예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저 불신자들만이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의 상황을 너무도 정확히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아니라, 너희도”(X2)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5절) 
 

회개의 열매

우리 인간에 대한 주님의 평가는 냉정합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다 망하게 될 운명입니다. 열매를 맺지 않으니 찍혀 버려질 운명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와 우리 교회에게 이 정도의 평안을 허락해 주시니 그것이 은혜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떠한 이유로 지금 당장 큰 재앙을 당해도 전혀 이상 할 것 없는 우리들에게 이처럼 평안을 허락해 주실까요? 오늘 본문의 마지막 두절이 그 이유에 대해 답하고 있습니다. 

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8-9절) 

포도원지기는 포도원 주인의 앞을 막아서지요. 그리고 간청합니다. 조금 더 유예하여 달라는 요청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이야기하네요.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친히 공급해 주신다는 약속이지요.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지금 포도원 주인은 물론이요 포도원지기가 무화과나무에게 원하는 것은 딱 한가지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열매를 맺을 수만 있다면 일년을 더 기다릴 수도 있고요, 열매를 맺을 수만 있다면 모든 좋은 거름을 다 줄 수도 있어요.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열매에 대해서 다양한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본문의 전반적인 문맥에 따라 본문에 등장하는 ‘열매’의 의미는 회개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본문의 ‘열매’를 ‘회개의 열매’라고 이해하면, 마지막 두 절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그가 올해는 회개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가 회개할 수 있도록 
제가 필요하면 도랑도 파주고, 
필요하면 거름도 줄 터이니 
그가 회개하기만 한다면(X2) 얼마나 좋겠습니까? 

주님께도 지금도 우리에게 기다리며 기대하고 계신 단 한 가지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바로 회개입니다. 성도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회개하지 않으면 우리의 변하지 않는 운명은 심판이요 멸망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에게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아직 기회가 주어졌을 때 우리의 마음을 다하여 회개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회개만이 우리와 우리 교회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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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