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2022. 3. 27. 16:53
반응형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기 위해 잡히셨던 바로 그날 저녁이었습니다. 이제 주님 앞에는 십자가의 고난이 기다리고 있었지요. 그날 저녁 주님께서는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 자신을 팔아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제자들 가운데 리더로 손꼽힐 수 있는 베드로에 대해서는 그날 밤에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게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그날 저녁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나누셨던 유월절 식사 자리는 분위기가 매우 무거웠겠지요.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쁨을 약속하십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 15:11)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기 위해 잡히셨던 바로 그 순간까지도 제자들이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하늘의 충만한 기쁨, 하늘의 풍성한 즐거움을 약속해주셨지요. 그러한 주님이시라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기쁨과 행복으로 가득한 인생을 살아가기를 바라고 계시지 않을까요? 삶의 수많은 고통과 아픔 속에서 기쁨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우리들을 바라보며 주님은 여전히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기쁨의 공동체

오늘 본문은 너무도 유명한 ‘잃은 양의 비유’입니다. 양을 키우는 어느 목자에게 양 백 마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한 마리를 잃어버렸습니다. 지금 그의 눈앞에는 아흔아홉 마리가 있고, 그의 눈에서 벗어난 한 마리의 양이 무리를 떠나 홀로 어딘가에 있을 것입니다. 이때, 목자는 아흔아홉 마리는 들에 내버려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떠나지요. 마침내 잃어버렸던 그 한 마리를 되찾으면 크게 기뻐하면서 잃어버렸던 그 양을 어깨에 메고 들에 놓아두었던 아흔아홉 마리에게 돌아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잃은 양의 비유에서 한 가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비유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하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5절과 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오늘 본문이 묘사하는 잃은 양의 비유만이 아니라, 누가복음 15장에 등장하는 다른 두 개의 비유도 전반적인 분위기는 동일합니다. 본문에 이어 등장하는 비유가 ‘잃어버린 드라크마의 비유’입니다. 누가복음 15장 9절은 이렇게 말씀하네요. “또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의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누가복음 15장에서 마지막에 등장하는 비유는 ‘탕자의 비유’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동일한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누가복음 15장 24절입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이렇게 예수님의 비유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기쁨과 행복으로 가득합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게 됩니다. 천국은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 발을 디디고 살아가면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며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에게는 하늘의 기쁨과 하늘의 즐거움이 가득 넘치기 마련이라는 사실입니다.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은 즐거운 것입니다. 교회 생활은 언제나 기쁨으로 가득해야 합니다. 물론, 때로는 내 마음이 기뻐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는 경우도 있지요. 그러나 우리의 신앙생활을 전체적으로 조망하였을 때, 그 안에는 기쁨과 즐거움이 가득해야 합니다. 그래서 잠시 잠깐 불편한 마음으로 봉사하고 헌신하고 순종하더라도 이내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이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을 압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의 원래 모습입니다. 


잃어버린 기쁨

성경의 가르침은 명백합니다. 신앙생활은 기쁨으로 가득해야 합니다. 그러면 왜 우리의 신앙생활에는 이처럼 기쁨이 사라지고 불평과 짜증으로 점철될 때가 많을까요? 이러한 의문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잃은 양의 비유를 보다 세심하게 들여다보면, 예수님의 비유에는 큰 기쁨을 누리는 대상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대상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누가 기쁨을 누리고 누가 기쁨을 잃어버렸는지 살펴보면 무엇이 우리의 기쁨을 빼앗아 가는지도 알 수 있겠지요. 자, 이 두 그룹의 차이를 보다 명백히 이해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잃은 양의 비유를 말씀하시게 된 배경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 1-2절에 그 배경이 등장합니다. 과연 누가 등장하는지에 주목하면서 본문 1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1절) 

제일 먼저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본문은 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곧 예수님 곁으로 가까이 다가왔다고 말씀합니다. 이 첫 번째 그룹의 사람들, 곧 세리와 죄인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잃은 양의 비유에서 무엇에 해당하는 사람들일까요? 네, 그렇습니다. 이들이 잃은 양, 곧 목자가 돌보았던 백 마리의 양 가운데 목자의 돌봄으로부터 벗어났던 한 마리의 잃은 양입니다. 어떠한 이유로 목자와 양 떼로부터 이탈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그 양 자신의 잘못과 실수가 크게 작용했을지도 모르지요. 그 이유가 무엇이든 이 양은 무리로부터 이탈하였고 스스로의 힘으로는 목자와 양 떼에게 돌아갈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점차 굶주림과 목마름에 시달리게 되었고, 맹수의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되면서 그 양은 생명의 큰 위협을 느꼈겠지요. 그렇게 이제 나에게는 소망이 없고 절망뿐이라고 자포자기할 그때 저 멀리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목자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마침내 목자의 어깨에 업혀 양 떼로 돌아오는 이 양의 마음은 얼마나 큰 기쁨으로 가득했을까요? 잃어버렸다가 다시 목자를 만나 양 떼로 돌아온 한 마리의 양, 곧 본문 1절이 묘사하는 것처럼 말씀을 듣기 위해 주님께 가까이 다가온 세리와 죄인들의 마음은 신앙생활을 통해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했습니다. 

본문 2절에는 또 다른 그룹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2절)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듣기 위해 예수님께 가까이 나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그 장면을 바라보며 수군거리네요. 그러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잃은 양의 비유에서 무엇에 해당할까요? 그들은 잃어버린 적이 없는 아흔아홉 마리의 양에 해당하겠네요. 목자이신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풀을 뜯을 수 있도록 들에 풀어놓았을 때 그 들판에서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울타리에서 한번도 벗어난 적이 없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제 답해보십시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두 번째 그룹의 사람들, 곧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그 마음에 기쁨이 있나요? 아닙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목자가 이끄는 양 떼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지만, 그들의 마음에는 기쁨이 사라지고 그 대신 불평과 원망과 시기심만 가득해졌습니다. 

과연 무엇이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에게는 큰 기쁨을 선사하였고, 과연 무엇이 목자가 인도하는 푸른 들판에 늘 있었던 아흔아홉 마리의 양들에게는 기쁨이 아닌 불평과 불만이 가득하게 만들었을까요? 그 대답은 너무도 명백합니다. 곧, 은혜와 의무의 차이입니다. 잃어버렸던 한 마리 양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은혜입니다. 목자의 들판에서 떨어져 나갔습니다. 목자의 양떼로부터 분리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홀로 남아 맹수들의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자신을 구하기 위해 목자가 찾아왔잖아요. 그러므로 이 한 마리의 양에게는 목자의 울타리, 목자의 들판에 자신이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은혜입니다. 당연히 그 마음에 큰 기쁨과 즐거움이 가득하지요. 반면, 잃어버린 적이 없는 아흔아홉 마리 양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의무감입니다. 그곳을 떠나면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 목자가 어디로 이끌든 그대로 순종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그들로 하여금 목자의 들판을 떠나지 않게 붙잡고 있었어요. 이러한 의무감이 그들을 목자의 보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붙잡아두고는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의 마음에는 기쁨도 없고 즐거움도 없습니다. 은혜의 체험을 가지고 목자의 들판에 앉아있는 양에게는 기쁨이 있지만, 동일한 그 자리에 책임감으로 앉아있는 양에게는 기쁨이 없고 불평과 불만만 가득합니다. 

신앙생활은 기쁨으로 가득한 것이 정상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의 신앙생활은 처음부터 은혜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운데 그 누가 주님의 푸른 들판에 자리를 잡을 수 있는 자격이 있었습니까? 우리 가운데 그 누가 자신의 공로를 내세워서 주님의 울타리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있었나요? 우리 가운데 그 누가 나는 충분한 자격이 있으니 주님께서 주시는 꼴을 받아먹을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아무런 자격이 없어 주님의 들판에서 쫓겨나야 했고 주님의 양 떼로부터 분리되어야 했습니다. 우리는 언제라도 사나운 맹수의 공격을 받아 그들의 먹잇감이 될 수 있는 운명이었습니다. 그렇게 미래에 대한 참된 소망이 없이 자포자기하고 있을 그때 주님의 음성이 우리를 부르지 않았나요? 주님께서 우리를 찾아와 어깨에 짊어지시고 주님의 들판과 주님의 양 떼 가운데로 우리를 이끌어 주셨잖아요. 그리하여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랍다’고 노래하였습니다. 이처럼 은혜로 시작한 신앙생활이니 당연히 그 안에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 채워져야 하는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기쁨이 사라지고 불평과 짜증이 가득해진 이유는 무엇입니까? 은혜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의무와 책임감이 자리를 잡았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주님의 들판에 앉아 있는 것이 은혜였는데, 어느덧 그 자리는 내가 떠나서는 안되는 의무와 책임이 된 것이죠. 그 자리를 떠나면 벌을 받을 것처럼 느껴지고 그 자리를 떠나면 큰일이 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그 자리에 앉아 있어요. 그러니 마음에 기쁨이 사라집니다. 

우리는 오늘도 주일을 맞이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에 나와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지금 이 자리에 어떠한 마음으로 앉아 계시나요? 주일을 맞이했으니 마땅히 예배 자리에 앉아 있어야 한다는 의무감이나 습관으로 앉아 계신 분은 안 계십니까? 만일 그러한 분이 계시다면, 시간이 문제지 그분들의 마음에는 신앙생활에 마땅히 있어야 하는 기쁨이 곧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도 주일을 맞이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지금 이 자리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혜의 자리라고 여기시는 분들은 잠시 잠깐 기쁨이 사라질 수도 있고 삶의 어려움으로 내 마음에 즐거움을 빼앗기는 순간도 있지만, 다시금 하나님을 예배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풍성한 기쁨과 즐거움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목자의 기쁨

신앙생활의 기쁨, 그것은 은혜로부터 우리의 마음에 임합니다. 동시에 우리의 마음에서 기쁨을 빼앗아가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의무과 책임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은 어떻게 의무나 책임이 아니라 은혜로 지속될 수 있을까요? 혹 은혜가 사라지고 의무만이 남았을 때, 그리하여 신앙생활에 기쁨이 사라졌을 때 우리는 어떻게 신앙생활의 기쁨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오늘 분문에서 그 답을 찾기 위해서는 본문 1-2절에 등장하는 세번째 등장인물에 집중해야 합니다. 본문 1-2절에서 발견하는 첫 번째 등장인물은 세리와 죄인들이었지요. 그리고 두 번째 등장인물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더 관찰해보면 이 두 그룹의 사람들 외에 본문에는 또 한 명의 등장인물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본문 2절을 보십시오. “이 사람이” 여기에서 “이 사람”은 예수님을 가리키지요.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그러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잃은 양의 비유에서 예수님에 해당하는 인물은 누구일까요? 당연히 양 백 마리를 돌보는 목자입니다. 양 백 마리 가운데 한 마리라도 잃어버리면 그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고 찾아가는 목자가 바로 우리 예수님이지요.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비유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지배하고 있는 큰 기쁨과 즐거움은 바로 이 목자의 기쁨입니다. 

또 찾아낸즉 즐거워 
(누가 잃은 양을 찾아 기뻐하고 있습니까? 목자가 잃은 양을 찾아 기뻐하고 있습니다)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5-6절) 

이 대목에서 가장 크게 기뻐하고 가장 크게 즐거워하는 분이 누구이십니까?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처음부터 은혜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은혜는 우리의 마음에 큰 기쁨을 부어줍니다. 그런데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신앙생활을 처음부터 기쁨으로 가득 채워주는 원천이 있다면, 절망에 빠진 우리에게 차장오시는 선한 목자가 되시는 예수님의 은혜요 우리를 발견하여 기쁨으로 어깨에 메고 돌아오신 주님의 한없는 기쁨입니다. 그러므로 시간이 흘러 우리의 신앙생활이 은혜에서 의무와 책임으로 바뀌었다면, 나의 신앙생활이 은혜를 잊어버리고 의무와 책임만 남아 기쁨과 즐거움을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다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전히 우리에게 선한 목자가 되어 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십시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찾아 발견하여 하나님의 백성 삼아주시며 그 누구보다 즐거워하셨던 주님의 기쁨이 다시 한번 여러분의 기쁨이 되게 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잡히시던 날, 제자들에게 하셨던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삶의 거대한 풍랑이 몰려와 우리의 마음을 잠식하려 할지라도, 
여러분의 신앙생활, 
여러분의 예배생활, 
나아가 주님과 함께 하시는 여러분의 인생에는 
주님께서 부어주시는 기쁨과 즐거움이 
언제나 충만하게 넘치기를 바랍니다. 



반응형
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