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2017. 11. 21. 19:00

나훔서의 하나님

 

나훔서는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곧 하나님의 성품을 묘사하면서 시작합니다.[1]

 

여호와는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1:2a)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벌 받을 자를 결코 내버려두지 아니하시느니라 (1:3a)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며 인간의 죄악을 인내하시지만, 그렇다고 벌을 거두어주시는 분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기에 노하기를 더디하시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죄에 대해 벌을 내리시는 공의로우신 심판자이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두 가지를 기억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진노와 재앙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훔은 이렇게 반문합니다.

 

누가 능히 그의 분노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의 진노를 감당하랴? (1:6a)

 

우리 자신이 결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비로서 두번째 교훈에 이르게 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얻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 (1:7a)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을 만큼 의로운 사람도 없으며, 하나님의 분노를 이겨낼 수 있을 만큼 힘이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에게 소망이 있다면 재앙과 환난의 날에 하나님께 피할 수 있다는 것,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피할 바위가 되어 주신다는 사실뿐입니다.[2]

 

 

역사 속에 들어나는 하나님의 성품

 

나훔서가 묘사하는 하나님의 두 가지 성품, 곧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과 환난 날에 피난처가 되시는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두 가지 성품이 역사 속에서 분명하게 드러난 사건이 있습니다. 바로 나훔서의 주제이기도 한 앗수르 제국의 수도인 니느웨 성의 멸망입니다.

 

나훔 선지자가 니느웨 성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한 시기는 아마도 앗수르제국의 힘이 가장 왕성했던 시기였을 것으로 보입니다.[3] , 니느웨 성을 수도로한 앗수르 제국이 전 오리엔트 지역을 점령하고 지배하던 시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앗수르 제국의 화려한 겉모습에 감추어진 죄악상을 정확히 꿰뚤어

보고 계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피의 성이여

그 안에는 거짓이 가득하고 포악이 가득하며

탈취가 떠나지 아니하는도다 (3:1)

 

충돌하는 기병, 번쩍이는 칼, 번개 같은 창,

죽임 당한 자의 떼, 주검의 큰 무더기, 무수한 시체여

사람이 그 시체에 걸려 넘어지니 (3:3)

 

그들의 겉모습은 힘이 넘치고 화려하고 영광스러웠지만 그들의 도성에는 거짓, 포악, 탈취가 가득했습니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죽은 시체만이 가득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니느웨의 죄악을 직시하셨던 하나님은 결국 니느웨 성을 심판하시고 벌을 내리실 것입니다.

 

보라 내가 네게 말하노니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네 치마를 걷어 올려 네 얼굴에 이르게 하고 

네 벌거벗은 것을 나라들에게 보이며 

네 부끄러운 것을 뭇 민족에게 보일 것이요

내가 또 가증하고 더러운 것들을 네 위에 던져 능욕하여 

너를 구경 거리가 되게 하리니 (3:5-6)

 

모든 사람들이 니느웨 성의 화려함과 강한 군사력에 넉을 놓고 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의 죄악을 바라보시고 심판을 선언하셨습니다. 이것이 공의로우신 하나님, 오래 참으시지만 벌 받을 자를 결코 내버려 두지 않으시는 공의로운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이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을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요?

 

앗수르 제국은 먼저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나훔 선지자는 이것을 깨우치기 위하여 니느웨 백성들에게 하나의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 애굽의 오랜 수도였던 노아몬입니다.

 

네가 어찌 노아몬보다 낫겠으냐

그는 강들 사이에 있으므로 물이 둘렸으니

바다가 성루가 되었고 바다가 방어벽이 되었으며

구스와 애굽은 그의 힘이 강하여 끝이 없었고

붓과 루빔이 그를 돕는 자가 되었으나

그가 포로가 되어 사로잡혀 갔고

그의 어린 아이들은 길 모퉁이 모퉁이에

메어침을 당하여 부서졌으며

그의 존귀한 자들은 제비 뽑혀 나뉘었고

그의 모든 권세자들은 사슬에 결박되었나니 (3:8-10)

 

애굽의 수도였던 노아몬(지금의 테베)는 앗수르의 수도였던 니느웨보다 더욱 힘이 강하였고 동맹국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날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 장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니느웨 백성들에게 나훔 선지자는 그들 역시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날에 자신의 의로움이나 능력으로 재앙을 이겨낼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그러나 니느웨 백성은 나훔 선지자의 경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그들이 알아야 했던 두 번째 진리 곧 하나님만이 환난 날에 피할 산성이 되어주신다 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결국 앗수르 제국은 메대와 바사 연합군에 의해 철저하게 무너지게 되지요.

 

 

재앙의 날을 이겨내는 두 가지 진리

 

재앙과 아픔의 시간이 때로는 우리 앞을 막아 설 때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때마다 하나님께 기도하지요. 그러면 기도를 통해 깨닫는 첫번째 진리는 이것입니다. “우리 자신에게는 재앙과 아픔을 이겨낼 수 있는 아무런 능력이 없구나.” 기도를 통해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는 사람은 하나님을 향해 재난과 아픔을 당하지 않을 만큼 스스로가 의로운 삶을 살았노라고 자신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울러,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벌과 재앙을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이겨낼 수도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우리는 기도를 통해 또 하나의 진리를 듣게 됩니다.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1:7a) 사방이 막혀있는 현실 속에서도 이 하나의 진리가 들려오기에 우리는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며 새로운 피난처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1] 나훔 1:2-8은 운율을 갖춘 알파벳노래로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묘사다.

[2] 하나님의 두 가지 성품 공의와 사랑, 심판과 용서 은 니느웨에 대한 두 권의 예언서(나훔&요나)가 상호 보완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나훔서가 끝까지 거스르는 자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더욱 강조하고(1:3) 요나서가 죄인이라도 회개한다면 용서하시는 하나님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지만(4:2), 나훔서 역시 하나님을 환난 날에 피난처가 되어주신다고 선언하며(1:7) 요나서 역시 죄악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등장한다(1:2). Cf. 노세영, <나훔, 하박국, 스바냐>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8), 48-49. 

[3] Ralph L. Smith, <미가-말라기>, vol. 19 of WBC (서울: 솔로몬: 2000),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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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17. 7. 1. 06:30

[현상] 인간의 무지

 

오래전 어느 부유한 남성이 마차를 타고 어두운 밤 길을 달리고 있었습니다. 그 부유한 남성은 밤의 차가운 바람을 피하기 위해 마차 안에 있었고 그 안에 환하게 등불을 켜 놓고 있었습니다. 제 아무리 어두운 밤 길을 달리고 있었지만 그 부유한 남성에게는 따뜻한 공기가 있었고 밝은 빛이 있었습니다. 반면, 그 마차를 끌기 위해 차가운 밤 기운을 온 몸으로 맞으며 어두움 속에서 열심히 말을 모는 마부가 있었습니다. 가난한 마부에게는 어두운 밤 길을 비춰주는 등불도 없었고, 차가운 밤 기운을 막아줄 따뜻한 마차도 없었습니다. 같은 방향을 향해 달려가는 이 두 사람에게는 큰 차이가 있었지요. 한 사람은 마차 안에서 따뜻한 공기와 밝은 등불을 누리고 있었지만, 다른 한 사람은 차가운 밤 공기를 맞으며 어두움 속에서 말을 몰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바로 그 시간 마차 안에서 따뜻한 공기와 밝은 등불을 누리던 부유한 남성은 결코 볼 수 없었던 한 가지, 그러나 어두움 속에서 차가운 밤공기와 싸우며 말을 몰고 있던 가난한 마부에게는 너무도 분명하게 그의 눈에 들어왔던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바로 밤 하늘에 빛나는 찬란한 별들의 행진이었지요. 마차 안에서 인간이 켜놓은 등불을 누리던 부자는 결코 밤 하늘의 영광스러운 별빛을 바라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떠한 빛도 자신의 앞길을 비춰주지 않는다고 여겼던 가난한 마부에게는 하늘의 찬란한 별 빛이 쏟아지고 있었던 것입니다.[1]

 

덴마크의 신학자 쇠렌 키에르케고르는 이 비유를 통해 과학이라는 등불을 켰지만, 그로 말미암아 온 세상에 밝히 비추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지 못하던 19세기 유럽 지식인들의 무지를 비판하였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비유는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다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에게 던져지는 일침이기도 합니다. 나의 마음에 있는 조그마한 등불과 같은 진리, 기껏해야 조그마한 마차 안을 밝힐 수 있는 등불을 켜 놓고는 그곳에 만족하며 온 하늘에 펼쳐져 있는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을 바라보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이지요. 바로 이와 같은 신앙인들의 어리석은 모습을 오늘 본문 3절이 정확히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욥기 전체는 인간들의 말잔치처럼 보입니다. 욥기에서 사건을 묘사하는 대목은 그저 1-2, 그리고 마지막 42장이 조금 등장할 뿐입니다. 우리는 욥기가 의인의 고난을 다루고 있다고 알고 있지만, 욥이 당한 고난에 대한 내용은 그저 욥기 1-2장에 조금 묘사되어 있을 뿐입니다. 그 대신 욥기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는 내용은 욥이 쏟아놓은 언어, 욥의 세 친구들이 쏟아놓은 말의 잔치입니다. 욥과 그의 친구들은 욥의 고난이라는 단 하나의 사건을 놓고 이렇 궁 저렇 궁 참 많은 말을 합니다. 끝도 없고 결론도 없이 하나님에 대해 나름대로의 생각을 계속해서 쏟아놓는 것입니다. 그런데 욥기의 마지막 장인 42장에 이르러 욥이 드디어 깨달았습니다. 3절을 다시 보십시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입니까?’ 바로 내가” ‘깨닫지도 못하고 말을 했습니다.’ 바로 내가” ‘하나님에 대해 무엇인가 안다고 하지만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거저 입술로만 떠들어대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욥과 같이 고백할 수 밖에 없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셔서 우리를 벌하기를 원하지 않으시지만, 하나님은 또한 의로우시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반드시 벌하셔야 합니다라고 배웠어요. 그래서 그 문장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줄 수는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공의가 얼마나 넓고 얼마나 깊은지 그 한 문장의 참된 의미를 충분히 체득하지 못하고 있는 나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게 되지는 않으십니까? ‘천국 영생은 값 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라고 배웠기에 그렇게 선언하고 있지만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를 다 헤아려보지 못한 나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워지고 있지는 않으신지요?

 

여러 가지 훈련을 통해 나의 마음에 조그마한 등불은 켰지만 오히려 그 등불 때문에 밤하늘에 가득 펼쳐진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은 바라보지 못하는 것이 오늘 우리의 모습이라면 제 3기 전도폭발훈련을 마치는 지금, 우리는 욥과 같이 고백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입니까?’

바로 내가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변화] 하나님의 개입

 

욥과 그의 친구들은 하나님에 대해 알기는 알았어요. 그런데 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그저 마차 안에서 누리는 밝은 등불 정도의 지식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 다 아는 것처럼,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을 자신의 언어로 다 설명할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에 대해 이렇게 저렇게 떠들어대고 있었지요. 그런데 욥기 42장에 이르러 욥은 하나님께 대한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5)

 

욥이 친구들에게 하나님에 대해 이렇궁 저렇궁 많은 이야기를 했을 때, 그러니까 하나님께 대한 풍문만을 가지고 하나님에 대해 이렇게 저렇게 이야기하고 있을 때, 욥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생각할 때마다 몰려오는 공허함과 허무함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욥은 자신의 그러한 마음을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욥이 이렇게 이야기한 대목이 등장해요.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23:8-9)

 

욥은 당대 의인으로 인정을 받는 사람이었고, 하나님께 대해 많은 지식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이런 저런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의 마음 깊은 곳에서 울리는 탄식이 있었어요. ‘내가 앞으로 가도 하나님이 안 보이고 뒤로 가도 하나님이 안보인다는 탄식입니다. 하나님께서 분명 나의 왼쪽과 오른쪽에서 일하고 계신 것 같은데 아무리 찾아도 하나님을 만날 수 없고 하나님을 뵈올 수 없다는 탄식. 그 깊은 탄식이 욥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어요.

그런데 오늘 본문 5절은 그 답답한 심정이 해결되었다는 선언을 하고 있잖아요. 예전에는 그저 하나님께 대해 귀로 들은 풍월 밖에는 없었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하나님에 대해 입술로만 이야기할 뿐이었어요. 그러나 이제는 내가 눈으로 주님을 직접 뵈옵게 되었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욥이 하나님에 대해 귀로 들은 풍월만을 가지고 많은 이야기를 했던 모습에서 이제는 하나님을 직접 뵙고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게 된 이 장면 사이에 과연 어떠한 계기가 있었던 것일까요? 우리는 욥기 전체를 통해 두 가지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첫째는 고난입니다. 여러분은 욥의 고난을 다 알고 계시잖아요. 의인으로 살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이 닥쳐왔어요. 그러나 그 이전까지 하나님에 대해 알았던 지식이 이제는 더 이상 자신의 경험을 설명할 수가 없는 거에요. ‘하나님, 왜 나에게 이와 같은 고난이 찾아왔나요?’ 아무리 기도를 하고, 아무리 나 자신을 돌아보고, 아무리 친구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봐도 답이 나오지 않아요. 그 어디에서도 답을 얻을 수 없는 고난의 현장이 욥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욱 깊이 만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죠. 그런데 고난이 전부가 아닙니다.

두번째, 매우 중요한 과정이 필요했어요. 바로,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욥과 친구들의 대화가 평생선을 그리며 끝도 없이 달려가고 있던 그때 드디어 하나님께서 친히 나타나셔서 욥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욥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욥이 당한 고난의 사건이나, 욥이 고난을 당하게 된 구체적인 이유에 대한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그 대신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가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선언하십니다. 바다를 창조하신 하나님,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 그 안에 일어나는 수많은 자연 현상들을 주도하시는 하나님, 나아가 수많은 생물들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선언하는 것이죠.

욥에게는 두 가지 중요한 경험이 있었는데, 첫째는 고난의 현장이고, 둘째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쇠렌 키에르케고르의 비유를 생각해보십시오. 마차 안에 있는 부유한 남성과 같이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조그마한 지식을 가지고 그 안에 안주하며 살아가고 있어요.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신다는 등불과 같은 조그마한 진리의 빛 가운데 살아요,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마차 안에 있는 따뜻한 공기를 누리며 살아가는 거지요. 그런데 어느 순간 고난의 광풍이 찾아와요. 그 거대한 광풍은 마차를 지금이라도 뒤집어 놓을 것처럼 무섭게 휘몰아칩니다. 그 거대한 광풍이 과연 어디에서 오는지, 도대체 무엇때문에 이러한 고난을 겪어야 하는지 아무도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아요. 사람들은 지금 일어나는 고난의 광풍에 대해 다양한 분석을 내어놓기도 하지만 그 어떠한 분석도, 그 어떠한 해석도 그 무서운 광풍을 피하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마차 안에서는 도무지 지금 불어닦치는 광풍을 이겨낼 방법이 없어요. 그래서 마지못해 조그마한 마차로부터 밖으로 뛰어나오는 거에요. 처음 마차를 뛰쳐나올 때에는 어두움의 공포가 몰려옵니다. 처음 마차에서 뛰쳐나올 때에는 한 밤의 차가운 바람이 우리의 온 몸을 엄습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의 눈에는 비로서 하늘에 가득한 밤하늘의 쏟아지는 별들이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욥은 고난으로 말미암아 안락한 마차를 벗어나게 되었고, 그의 눈을 들어 하늘에 가득한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을 바라보았던 것이죠.

 

그러고보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훈련시키시는 교재의 내용을 글로 읽고 암기하고 입술로 고백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참으로 우리를 훈련시키시는 방식은 고난이었고, 아픔이었고, 인생의 광풍이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안다고 자부하였지만 실상은 하나님께 대해 아는 것이 없었고, 하나님에 대해 예수님에 대해 전한다고 하였지만 실상은 깨닫지도 못한 일을 입술로만 떠들어 댔던 우리에게 강풍을 보내어 조그마한 마차를 벗어나라고 비록 칠흑같은 어두움 속에서 길을 찾기 위해 싸워야 하며, 차가운 밤의 기운을 온 몸으로 받아내야 하지만 조그마한 마차를 벗어난 바로 그 자리에서 온 땅을 뒤엎는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을 바라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는 오늘 본문 5절의 이 고백은 성경 말씀을 달달 암기한 사람들의 고백이 결코 아닙니다. 교재의 내용을 달달 외운 사람들은 오늘 본문 5절이 아니라 3절을 고백해야 합니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그러나 가정의 문제, 자녀의 문제, 건강의 문제, 재정의 문제, 그리고 주변 사람들과의 문제로 눈물 흘리고 괴로워하며 눈물로 밤을 지새우셨던 분들, 그래서 그동안 안주하였던 조그마한 마차를 박차고 나아갈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 더 이상 나를 막아주는 조그마한 마차라는 보호막이 사라져버렸을 때 비로서 등장하는 하늘의 쏟아지는 별들을 바라보았던 바로 여러분들이야말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도저히 알 수 없는 인생의 광풍 앞에서 눈물 흘리셨던 분들이 많으시죠? 지금도 고난의 광풍을 만났지만 아직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을 바라보지 못하신 분들 많으시죠? 여러분, 여러분이 안주하고 계신 그 조그마한 마차를 박차고 나가십시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조그마한 등불도 안락하지만, 때로는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가야 할 때가 있어요. 그곳에는 등불이 주는 편안함도 없고, 그곳에는 차가운 밤바람을 막아주는 천막 하나 없지만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찬란한 영광을 여러분에게 보여 주십니다.

 

 

[결과] 인식의 확대

 

욥은  고난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게 되었고, 비로서 하나님에 대해 들었던 풍문 정도를 넘어,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하나님을 만나뵙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욥은 새로운 영적인 단계로 진입하게 되지요.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6)

 

여기에 등장하는 거두어들이고라는 말은 풀어졌다, 녹았다는 의미입니다. 특별히 욥의 마음에 있던 갈등과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의미죠.[2] 아울러, 6절 마지막에 등장하는 회개라는 단어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1차적 의미의 회개가 아닙니다. 실제로 욥은 자신의 구체적인 행동이나 말에 대해 회개한다는 내용이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회개는 하나님에 대해 지금까지 생각지도 못했던 깨달음, 도저히 그 무엇과 비교할 수는 하나님에 대한 깊은 체험[3], 곧 영적으로 크게 성숙하는 거대한 발걸음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6절의 의미는 하나님을 깊이 체험한 욥이 자신의 마음에 있던 문제가 해결되었고,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믿음이 놀랍도록 성숙하였다고 고백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6절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핵심이 되는 단어는 따로 있습니다. 바로 티끌과 재라는 구절입니다. 욥은 고백하지요.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티끌과 재라는 구절은 욥기를 제외하면 구약성경에서 딱 한번 등장하는데 바로 창세기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소돔 성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소돔성에 의인 50명만 있어도, 아니 45, 아니 40, 아니 30, 아니 20, 하나님 소돔성에 의인이 최소한 10명만 있어도 그 성을 멸하지 말아주세요라고 아브라함이 소돔성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장면이 나오죠. 바로 그때 아브라함이 자기 자신을 묘사하며 티끌과 재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아브라함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 ( 18:27)

 

아브라함은 소돔성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면서 아브라함은 자기 자신을 티끌과 같다고 와 같다고 말합니다. 그 의미는 분명하지요. 온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 한 없이 나약하고 보잘것 없는 존재라는 고백이지요. 오늘 본문에서 욥 역시 동일한 의미로 티끌과 재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어요.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을 바라보았던 욥은 자기 자신이 초라하기 짝이 없는 티끌로 보이고 로 보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티끌과 재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표면상으로는 보이지 않는 두 번째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아브라함 자신은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인생, 그래서 티끌이요 재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티끌과 재와 같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대화 파트너로 삼아주십니다. 하나님은 티끌과 재와 같은 아브라함을 소돔성을 멸망시킬 것인가 용서할 것인가의 문제를 놓고 함께 의견을 나누는 협상의 대상자, 대화의 파트너, 더 나아가 하나님의 동역자로 삼아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사용했던 티글과 재라는 용어에는 영광스러운 하나님 앞에 수치스럽고 나약한 인간의 연약함이 표현되어 있는 동시에, 그러한 인간을 하나님의 파트너요 하나님의 동역자요 하나님의 일꾼으로 삼아주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은혜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욥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커다란 고난 앞에서 자신이 만족하고 안주하였던 마차 안이 작은 등불로부터 뛰쳐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자리는 어두운 밤 길을 헤매는 방황의 장소였고 칠흑간은 어두움 속에서 살갗을 애이는 온갖 추위를 온 몸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고통의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는 하늘에 가늑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장소였지요. 비로서 욥은 하나님에 대한 풍문을 듣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삶으로 하나님을 경험하는 영적 성숙을 경험합니다. 나아가 바로 그때로부터 하나님은 티끌과 재와 같은 욥을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위한 하나님의 파트너요, 하나님의 동역자요, 하나님의 일꾼으로 인정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풍문을 듣고 마치 다 깨달은 듯 유창하게 이야기는 하지만, 깨닫지도 못한 바를 말하는 것이요 스스로 알 수 도 없는 일을 말하는 미련함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의 터널을 지나면서 그동안 만족하며 안주하고 있던 마차 안의 작은 등불을 과감히 벗어버리는 그 경험을 통해 여러분은 하나님의 위대한 영광을 바라보며 하나님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복음에 대하여 그저 풍문으로 들은 정도가 아니라 여러분이 직접 경험하고 깨달은 바를 마음으로부터 진실되게 선포하는 참된 전도자가 될 수 있는 것이요, 하나님은 그러한 여러분을 하나님의 파트너, 하나님의 동역자, 하나님의 일꾼으로 삼아주십니다.

  

 

 


 

[1] 쇠렌 키에르케고르의 비유. 필립 얀시, 홍종락 , <수상한 소문> (서울: 포이에마: 2013), 21.

[2] J. Gerald Janze, <욥기> (한국장로교출판사, 2007), 333. 

[3] Francis L. Anderson, Job: An Introduction and Commentary (Downers Grove, Illinois: IVP Academic, 2015), 287. 한편, 이군호는 욥의 회개가 교만에 대한 회개였다고 주장한다. 이군호, <욥기>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8), 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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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연구 07 “욥의 회개와 결말” (32장)

욥은 자신이 왜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 질문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두 번에 걸친 폭풍우 언설을 통해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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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성경공부" 목차 (Contents)

욥기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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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16. 12. 20. 14:16

예수님께서 마르다의 집을 심방하셨습니다. 만일 목사님이 여러분의 가정을 오후 5시에 심방하기로 약속하셨는데 갑자기 오전 10시에 목사님이 도착하셨다고 생각해보세요. 정신이 하나도 없지요. 당장 청소하고, 음식 준비하고마음이 조급해집니다.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39)

 

마르다는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모시는 특권 중의 특권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이 자신의 집을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지 못하고 주방일에 집중하면서 그의 마음은 분주해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우리의 신앙생활에 이와 같은 일이 너무도 많이 일어나고 있지 않나요? 처음에는 기쁨과 감사로 시작했지요. 내가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에 감격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덧 하는 일들이 많아지면서 우리의 마음까지도 분주해지죠.


예수님께서 마르다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41-42)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몇 가지 혹은 한 가지는 일차적으로 음식의 숫자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단지 음식의 종류를 이야기하는 것을 넘어 더 깊은 의미가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많은 성경 학자들이 동의합니다. 예수님께서 참으로 의도하신 바가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있지만, 저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범이 그 하나의 대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39)

 

예수님 당시 여성은 율법 교육의 대상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 시대, 그 어떠한 율법의 교사도 남성의 소유물에 불과하였던 한 여성에게 집중하여 말씀을 전하거나 말씀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르다라는 한 여인의 집에 들어가셨고, 그곳에서 만난 마리아라는 한 여인에게 집중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그 보잘것없는 한 여인이 하나님의 백성 될 수 있도록 온 마음을 다하여 권면하는 예수님의 모습.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몇 가지만 하든지, 아니 한 가지만이라도 충분하다는 말씀의 참된 의미입니다.

 

우리의 전도폭발은 수많은 사람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전도의 모습은 내 앞에 있는 바로 그 한 사람에게 온전히 집중하며 그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 한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돕는 데 있습니다. 지난 달 전도폭발팀 25명이 경기도 양평으로 전도여행을 다녀왔습니다. 25명의 잘 훈련된 팀이 2 3일 동안 전도여행을 다녀왔다면, 아마도 100명 이상의 사람들을 만나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고 보고해야 이해가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실제 통계를 보면, 전도폭발팀 25명이 2 3일 동안 복음을 전한 사람의 숫자는 고작 36명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전도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스치듯 지나가며 최대한 빨리, 그리고 최대한 많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과의 진지한 대화를 시도합니다. 그분과 최대한 많은 대화를 나누며 그분의 삶과 그분의 생각을 알아가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 한 사람에게 최선을 다해 예수님을 소개하고, 또한 그분이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와 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 이해합니다.

 

몇 명만 만나든지 혹은 한 사람에게만 복음을 전해도 충분하다

 

처음부터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 대중을 대상으로 한 사역,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알아주고 많은 사람들에게 자랑할 수 있는 사역을 꿈꾼다면 그 열매는 보잘 것 없는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예수님에게 이것 저것 많은 것, 풍성한 것, 사람들이 칭찬할만한 어떤 것으로 준비하려다 그 마음만 분주했던 마르다의 실수를 범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참으로 의미 있는 몇가지, 아니 내 앞에 있는 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바로 그 한 사람이 예수님을 믿도록 안내하는 바로 그 한 가지 일에 집중할 때 하나님은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분주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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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16. 11. 7. 07:30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의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하기를 언제나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교회의 부흥에 방해가 되는 행동을 하곤 합니다. 의도적이기보다는 인식하지 못하면서 그런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이 소개하는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 속에서 꼭 그와 같은 예를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을 향하여 전파되다보니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중에는 유대인뿐만이 아니라 이방인들도 있었습니다.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을 때 교회 안에 있던 어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그것이 선행조건이 되어야 그들도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을 수가 있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율법을 지킨다는 것, 좋은 일이죠? 구약의 말씀을 귀하게 여기고 그 말씀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칭찬받을 일이죠? 그래서 유대 출신 교사나 바리새인 중에서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은 마음의 확신을 가지고 주장했겠지요. 아무리 예수님을 믿어도 율법은 지켜야지, 아무리 예수님을 믿어도 할 것은 해야지! 그런데 여러분, 그들이 선한 동기를 가지고 확신 속에서 주장을 하고 있지만, 그들의 이러한 주장은 이방인을 위한 전도와 선교에 커다란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우리 안에도 그와 같은 모습은 없을까요? 선한 의도에서 시작된 거지요. 그 주장이 전적으로 틀린 것도 아니요. 그래서 본인은 확신을 가지고 주장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자신의 주장이 지나치게 강조될 때, 때로는 우리 자신이 전도와 선교의 문을 굳게 닫아버리고 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가로막는 커다란 장애물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이방인을 위한 목적이다.

 

이방인에게 율법을 지키도록 할 것인가의 문제를 가지고 사도들과 장로들 사이에 많은 변론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베드로 사도가 드디어 결정적인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7)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선택하셨어요. 그리고 베드로를 사도로 세우기 위해 예수님께서 3년 동안 베드로와 동고동락하셨지요.

여러분, 인류역사에서 베드로만큼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아 누린 사람이 있을까요? 하나님의 아들이요, 곧 하나님이신 예수님과 3년 동안 동고동락했어요.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님과 가장 가까이 지내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고,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으면서, 예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3년 동안 풍성히 받아 누렸던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바로 그 베드로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하나님께서 베드로 자신을 선택하고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주신 이유는 하나님의 분명한 목적이 있기 때문인데, 그 이유와 목적이란 아직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도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즐겁고 기쁘신가요? 교회 안에서 다른 성도들과 함께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즐겁고 기쁘신가요? 여러분, 오랜 시간 교회를 출석하면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가 많고 하나님께서 나와 우리 가정을 위해 행하신 일들에 대한 간증이 풍성하신가요?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먼저 선택하여 주시고 교회 안에서 은혜의 풍성함을 먼저 누리게 하신 것은 여러분에게 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특권 임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시는 무거운 사명이라는 점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교회 안에서 누리는 은혜가 풍성하면 풍성할 수록 여러분은 아직도 교회 밖에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이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다

 

이제 베드로는 논쟁의 핵심을 찌르는 선언을 합니다.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9)

 

하나님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에는 차이도 없고 차별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수긍하실 수 있으신가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지난 수천년 동안 제사를 드리고 예배를 드려온 유대인이나 하나님과 상관 없이 살아왔던 이방인이나 조금도 차이가 없고 차별도 없습니다. 어떤 점에서 차이가 없을까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죄인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이방인들이 죄인이지요.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율법과 상관 없이 살았지요. 그러니 그들이 죄인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면 유대인은 어떻습니까? 유대인은 율법을 알고 율법을 지키고 율법을 실천했기에 의인일까요? 과연 구약성경은 유대인이 하나님의 율법을 온전히 지키고 순종하는 의인들이었다고 선언하고있습니까? 아닙니다.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구약성경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만드는 주범이었다고 정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하나님 앞에서는 똑같이 죄인이지요.

 

여러분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셨다고요? 여러분은 지금까지 주일을 성수하고, 여러 가지 기도회에도 참여하고, 나름대로 교회를 위해 봉사도 하신다고요? 그것이 이제 막 교회에 등록한 새가족이나 아직도 하나님을 거부하는 불신자들과의 차이라고요? 아닙니다.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제 아무리 열심히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교회를 위해 봉사했을 지라도 우리의 행위와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언어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 드러난다는 점에서 우리는 불신자들과 다를 것이 없어요.

 

이방인과 유대인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에는 차이가 없고, 차별도 없습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이방인과 유대인 모두가 믿음으로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점에서 차이나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 줄을 믿노라” (11)

 

신앙생활을 10, 20, 30년을 하신 분들 혹은 교회를 위해 대단히 크고 위대한 업적을 이루신 분들이나 이제 막 예수님을 믿어 교회에 등록한 새가족이나 하나님 앞에서는 차이가 있을 수 없고,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어떤 점에서 그러합니까? 신앙생활을 오래하신 분들이나 이제 등록한 새가족이나 모두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점에서 차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아울러, 교회를 위해 온갖 봉사와 충성을 다 바쳤던 분이나 이제 교회에 막 등록한 분이나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점에서 차이도 없고 차별도 없는 것입니다.

 

무거운 짐을 지우지 마십시오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가 예루살렘에 모인 교회 지도자들에게 간곡하게 권면 했던 것처럼, 저도 여러분 모두에게 간절히 호소합니다. 우리 교회 주변에 있는 불신자나 새가족을 괴롭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이나 경험이나 신앙의 경륜 등을 가지고 새가족과 불신자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지 마십시오.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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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