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2020. 6. 9. 16:02

오늘 설교의 제목은 기쁨의 공동체입니다. 여러분, 교회는 기쁨의 공동체입니다. 

교회가 다른 여타의 모임이나 조직과 비교했을 때 눈에 띄는 차이점, 가장 현저하게 눈에 보이는 차이점이 있다면 그것은 교회의 모임이 매주 일요일마다 있다는 사실입니다. 교회를 제외하고 그 어떠한 조직이나 집단이 매주 일요일에 정기적인 모임을 가지며, 일요일에 모이는 정기모임을 그 공동체의 가장 중요한 모임으로 여기고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어요. 이것이 기독교의 눈에 띄는, 가장 직접적으로 눈에 띄는 특징 가운데 하나입니다. 기독교는 구약성경이 매주 토요일에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까지도 바꾸어 일요일을 ‘주일’이라고 부르며 매주 그 주일을 지키고 있으니 얼마나 독특한 특징입니까? 이처럼 기독교는 주일을 거의 생명처럼 지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독교가 이처럼 주일에 집중하고 집착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두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여주시기 위하여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날이기 때문이지요. 여러분,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중요하게 여기지만 매주 성 금요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기쁨이 충만한 주일을 지키는 기쁨의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기쁨과 즐거움의 공동체이지요. 세상 속에서 슬픔과 괴로움이 나의 마음을 가득 채웠더라도,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기쁨과 즐거움을 되찾을 수 있는 곳이 바로 교회가 아니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빌립보서는 성경 안에서도 ‘기쁨의 서신’이라는 별칭이 붙을 만큼 교회가 얼마나 기쁨의 공동체가 되어야 하는지를 강조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7절 뒷부분을 보시면,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 자신에게 기쁨이 충만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8절을 보면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빌립보교회 성도들 역시 기쁨이 넘쳐야 한다는 거죠. 그런데 이뿐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는 바울의 기쁨, 그리고 빌립보교회 성도들의 기쁨 외에도 하나님의 기쁨이 등장해요. 13절을 보시면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그 뒤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실 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교회란 모든 성도들이 함께 기뻐하고, 그 모습을 바라보며 목회자들이 또한 즐거워하고, 이 모든 장면을 위에서 내려다보시는 하나님께서 미소 지으시는 기쁨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이러한 기쁨의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모든 성도들이 즐거워하고, 그것을 바라보며 목회자들이 기뻐하고, 나아가 그 모든 장면을 내려다보시며 하나님께서 미소 지으실 만한 기쁨의 공동체가 바로 우리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바라보시며 기뻐하실 만한 교회는 과연 어떠한 교회일까요? 오늘 본문은 이에 대한 대답을 세 가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교회 내부의 관계에서, 둘째는 교회 밖 세상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과연 어떠한 교회가 기쁨이 넘치는 교회요, 하나님께서도 바라보시며 기뻐하실 만한 교회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원망과 시비가 없는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라보시며 기뻐하실 교회, 그 첫 번째 특징은 - 교회 내부의 관계에서 - 원망과 시비가 없는 교회입니다. 오늘 본문 14절에 그 내용이 등장합니다. 우리 다 함께 14절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하라” 

구약 성경 사사기를 보면 흥미로운 사건이 등장합니다. 이스라엘은 암몬 나라의 침략을 받아 그들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또 당시 이스라엘은 암몬 나라를 몰아낼 수 있는 힘이 없었어요. 그러게 짧지 않은 시간이 흘르고 있을 때, 하나님은 민족 영웅 입다를 세우셔서, 암몬 군대를 몰아내게 하십니다. 입다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이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순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이 임했던 바로 그때에 이스라엘 민족에게 모든 기쁨을 빼앗아가는 비극적인 사건이 등장합니다. 암몬 나라의 군대를 모두 몰아낸 입다와 그의 군대가 전쟁터에서 돌아오자, 이스라엘의 12지파 가운데 하나였던 에브라임 지파의 지도자들이 입다를 찾아와 시비를 붙습니다. 그 장면을 성경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지요. 

“에브라임 사람들이 모여 북쪽으로 가서 입다에게 이르되 네가 암몬 자손과 싸우러 건너갈 때에 어찌하여 우리를 불러 너와 함께 가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우리가 반드시 너와 네 집을 불사르리라”(삿 12:1)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의 주장은 사실 정당한 주장이 아닙니다. 암몬 나라의 지배를 받고 있을 때 그들은 용기를 내어서 그들과 싸우러 나갔던 사람들이 아니죠. 입다는 그들의 주장이 부당함을 주장하면서 입다 에브라임 사람들 사이에 큰 싸움이 일어나 결국에는 이스라엘의 내전으로 확대됩니다. 그리고 이 싸움에서 4만 2천 명의 에브라임 사람이 죽고 말죠.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땅에 가족을 잃은 탄식과 고통의 눈물이 가득하지 않았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바로 그 시점, 하나님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할 바로 그 시점에,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원망과 갈등으로 말미암은 시비가 일어났고, 하나님께서 주신 큰 기쁨의 사건이 슬픔과 통곡과 눈물로 바뀌고 말았던 것입니다.  

중국 교회의 워치만 니가 자신의 저서에서 소개하고 있는 한 가지 이야기입니다. 중국에 농사를 짓는 크리스천 형제가 있었습니다. 이 크리스천 형제는 교회에서도, 그리고 자신이 일하는 일터인 논에서도 매우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크리스천 형제는 열심히 일하여 자신의 논에 물길을 내고 충분한 물을 공급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자신의 논에 나가보니, 누군가 자신의 논에 물을 공급하는 수로를 터트려 자신의 논에 물이 흘러가도록 했던 것입니다. 그 장면을 보고 올라오는 분노가 있었지만, 그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금 수로를 복귀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다음 날도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여러 날이 지나도 그와 같은 일은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이 크리스천 형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를 놓고 기도하는 가운데, 그는 교회 지도자들에게 이 문제를 놓고 기도해 달라고 기도 요청을 하게 됩니다. 크리스천 형제의 기도제목을 다 들은 어니 교회 지도자 한 분이 크리스천 형제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형제여, 당신은 아무 잘못이 없고. 형제가 항의를 해서 권리를 찾는 것은 올바른 일이라고 생각하오. 그러나 형제여, 형제는 주께서 우리가 올바른 일을 하는 것으로 만족하실 것이라고 생각하시는지 묻고 싶소. 주께서는 올바른 일보다도 더 위대한 일을 원하시지는 않을지 기도해 보시가로 말씀드리고 싶소.” 

크리스천 형제는 집으로 돌아와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오늘 교회 지도자를 통해 들은 이야기가 정말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십니까? 하나님께서 정말로 제가 옳은 일보다 더 위대한 일을 하기 원하십니까? 만일 그렇다면 옳은 일보다 더 위대한 일이 무엇인지 저에게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일찍 그는 자신의 논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논에 있는 물을 주변의 논에 흘러가게 해 주었다고 합니다. 이 장면을 놓고 워치만 니는 이렇게 묘사하였습니다. 그 크리스천 형제의 마음에 하늘의 기쁨이 가득했다고 말입니다. 

여러분, 말씀과 기도 가운데 큰 은혜를 받은 우리에게서 촉촉한 하나님의 은혜를 한 순간에 날려버릴 수 있는 사단의 탁월한 공격 무기가 있다면, 그것은 원망과 시비입니다. 나는 열심히 교회를 섬겼는데, 다른 누군가로 인하여 나의 헌신이 열매를 맺지 못했다면 원망스러운 마음이 일어납니다. 지금까지 내가 쌓아 올린 정성과 노력을 생각한다면 마땅히 나에게 주어져야 할 것 같은 권리를 되찾기 위해 때로는 시시비비를 가릴 수도 있겠지요. 우리의 원망이나, 우리의 시시비비가 옳고 정당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원망과 시비가 고개를 들고일어나는 순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늘의 기쁨을 잃어버리고 만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에 흠 잡히지 않는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교회는 어떠한 교회 일까요? 둘째로, - 교회 밖 세상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 하나님께서 바라보시며 기뻐하실 만한 교회는 세상에 흠 잡히지 않는 교회입니다. 오늘 본문 15절에 그 내용이 나와있습니다. 우리 한 목소릴 봉독하겠습니다.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오늘 본문을 보면, 세상을 무엇이라고 묘사합니까?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입니다. 사람들은 우리 시대를 가리켜 포스트모던 시대라고 말합니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특징은 절대적인 진리를 부정한다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진리가 없으니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그른지에 대한 가치판단의 기준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고 싶은 것, 자신이 좋아하는 것, 자신에게 즐거움과 쾌락을 주는 것만을 따라갑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을 보니 포스트모던시대라 불리는 우리 시대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옛날 바울 시대에도 세상 사람들의 모습은 동일했던 것 같습니다. 세상은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없이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절대적인 진리를 부정하며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은 채, 자신의 마음이 이끄는 대로 살아갑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을 믿는 크리스천들, 그리고 그들의 모임인 교회가 자신들과 다르기를 기대합니다. 교회와 크리스천들이 그 높은 기대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그들은 실망하고 때로는 비판도 하죠. 우리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크리스천의 삶이 그래도 세상 사람들보다는 올곧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그것이 사실일 수도 있겠죠. 그러나 세상에 실망감을 안겨주고, 심지어 그들로부터 비판을 받는 교회라면 – 설령 그들의 주장에 맹점이 있더라도 – 그 교회가 어떻게 기쁨의 공동체가 될 수 있겠습니까? 


생명의 말씀을 붙잡고 그 말씀을 선포하는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교회는 어떠한 교회일까요? 셋째로, -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 하나님께서 바라보시며 기뻐하실 만한 교회는 생명의 말씀을 붙잡고 그 말씀을 선포하는 교회입니다. 오늘 본문 16절에 그 내용이 등장합니다. 우리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16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생명의 말씀을 밝혀” 여기서 ‘밝혀’라고 번역되어 있는 헬라어 단어는 오늘 본문에서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붙든다’는 의미이고, 두 번째는 ‘제시한다’(밝힌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개역한글성경에는 ‘밝혀’라고 번역해 놓고는 거기에 각주를 달아서 ‘붙들어’라고 적어놓았습니다. 저는 사도 바울이 16절의 말씀을 기록할 때 ‘붙든다’는 의미와 ‘제시한다’ 혹은 ‘밝힌다’는 의미를 모두 포함하는 의미로 이 단어를 기록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바라보시며 기뻐하시는 교회의 특징은 생명의 말씀을 붙잡고 살아가는 것이요, 나아가 생명의 말씀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을 밝히 보여주는 교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히 옳은 것을 행하라고 명령합니다. 지극히 상식적으로 옭은 것을 명령하죠.  예를 들어 십계명에서 ‘살인하리 말라’ 얼마나 상식적인 명령입니까? ‘간음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남의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 얼마나 상식적인 명령이십니까? 그러나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우리에게 옳은 것을 넘어 더욱 위대한 일을 명령하기도 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를 들어보라면,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지극히 상식적이고 옳은 것을 명령하십니다. 그러면서도 때로는 그 이상의 위대한 것을 권면하시죠. 그래서 어느 목사님은 크리스천의 삶을 “상식에 준해 살면서도 상식의 한계를 넘어서 사는 삶”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상식적으로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요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았기에 때로는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는 것이 크리스천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조금 전에 드렸던 중국의 한 크리스천 형제 이야기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가 자신의 논에 있는 물을 다른 농부의 논에 나누어주자, 그의 마음에 하늘의 기쁨이 가득 찼습니다. 그리고 수일이 못되어 주변의 한 농부가 그를 찾아와 이렇게 질문했다고 합니다. “왜 당신은 스스로 내 논에 물을 대 주었는가?” 그러자 이 크리스천 형제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나의 주님이 그렇게 하라고 명하셨다네.” 그러자 깜짝 놀란 이 동부가 다시 한번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아니, 자네가 소작농이었나?. 그렇다면 자네의 주인은 누구인가?” 그러자 크리스천 형제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의 주인은 나에게 생명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라네. 그분은 나에게 옳은 일, 그 이상의 위대한 일을 명령하셨다네. 그리하여 내가 나의 논에 있는 물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준 것이라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그 농부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 이와 같이 아름다운 사건들, 기쁨과 즐거움의 사건들이 가득 넘쳐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옳은 일을 주장할 수 있습니다. 상식에 기준하여 나의 권리를 찾기 위해 시시비비를 가릴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가 옳은 일만이 아니라, 옳은 일 이상의 더욱 위대한 일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욱 위대한 일을 요구하시기에, 하나님의 말씀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시기에, 그 말씀에 순종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모습 안에 참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옳은 일, 그 이상의 위대한 일을 실천할 때 그러한 우리의 모습을 바라보며 누군가 예수 그리스도 앞에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우리의 참된 기쁨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교회와 우리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옳은 것을 넘어 더욱 위대한 사랑을 실천하며 생명의 말씀을 우리의 언어와 삶으로 선포할 때, 우리 교회에 하늘의 기쁨이 쏟아지는 것이요, 그러한 교회가 하나님 앞에 참된 기쁨의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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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0. 6. 9. 15:49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신 목적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 목적이란 곧 ‘자유’입니다.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재물, 곧 돈의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물질을 모으기 위해 최선을 다 하지만, 왜 그 재물을 얻어야 하고 그토록 노력하여 얻은 재물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모르면서 그저 재물을 모으려는 돈의 노예로 살아갑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술의 노예로 살아가고 또 어떤 사람들은 쾌락의 노예로 살아갑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명예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기도 하며, 또 다른 사람들은 학벌이나 권력의 노예로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죄와 사망의 종으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수많은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 아닌 다른 것들의 종으로 살아가는 우리들, 궁극적으로 죄와 사망의 종이로 고통하며 신음하던 우리를,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곧, 모든 얽매었던 것으로부터, 특별히 죄와 사망으로부터 참된 자유를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온전한 자유가 넘쳐흐르시기를 바랍니다. 때로는 남편에게 얽매어 있는 것 같고, 때로는 자녀들에게 얽매어 있는 것 같고, 때로는 시댁에 얽매어 있는 것 같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언제나 참된 자유를 누리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바로 ‘참된 자유’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참된 자유를 어떻게 사용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십니다. 갈라디아서 5장 13절의 말씀을 우리가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참된 자유를 이미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를 가지고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나 자신만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지 말로, “오직  서로 종노릇”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유인입니다. 그런데 그 자유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섬기는 종의 자리를 선택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자유가 있어요. 그러나 그 자유를 가지고 여러분의 가정에서 사랑으로 남편을 섬기고 자녀들을 섬기는 종의 자리를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은 바로 그 자유를 가지고 교회 안에서 다른 성도들을 섬기는 종의 자리를 선택하십시오. 이것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악을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마땅한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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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0. 6. 9. 15:45

신앙생활의 핵심이 되는 ‘기도’를 생각할 때, 기도가 점점 깊어지는 기도의 단계에 대해 많은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나름대로의 의견을 많이 내어 놓았습니다. 그 가운데 한 분이 미국 텍사스 주에 있는 햄린 제일침례교회의 존 포웰 목사님입니다. 존 포엘 목사님은 기도의 단계를 네 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하였습니다. 물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존 포엘 목사님이 제시한 네 가지 단계를 예외 없이 따라가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기도에 대해 생각할 때 참고가 될 수 있기에 한번 소개를 하겠습니다. 

존 포웰 목사님이 이야기하는 기도의 첫번째 단계, 곧 기도의 시작은 다른 사람들의 기도를 따라 하는 단계입니다. 어린 시절 주일학교나 미션스쿨을 다녔던 분들은 그곳에서 목사님이나 선생님들이 들려주었던 기도 가운데 일부를 그저 따라 하는 것이지요. 성인이 되어 교회를 출석하였더라도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기도가 아니라 교회에서 들었던 기도를 자신의 입으로 흉내 내며 기도하는 것, 이것이 기도의 첫 번째 단계입니다. 
존 포웰 목사님이 이야기하는 기도의 두번째 단계는 다른 사람의 기도를 따라 하는 것을 넘어 자신의 생각을 자신의 언어로 표현하여 자신만의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는 단계입니다. 두 번째 단계에 이르러 비로소 우리는 다른 누군가의 기도가 아니라, 나 자신의 기도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것은 기도의 네 단계 가운데 두 번째 단계에 불과합니다. 
존 포웰 목사님이 이야기하는 기도의 세번째 단계는 자신의 생각을 자신의 언어로 표현할 뿐만 아니라 나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감정을 하나님께 토로하는 기도입니다. 나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슬픔, 아픔, 괴로움, 뿐만 아니라 즐거운, 기쁨, 감사, 찬양 등. 나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 아뢰는 기도죠. 존 포웰 목사님은 시편의 기도가 자신의 마음 깊은 것을 표현하는 세 번째 단계 기도의 대표적인 예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정도의 기도라면 충분히 깊이가 있는 훌륭한 기도가 되겠지요. 
그런데 존 포웰 목사님은 이와 같은 세번째 단계를 넘어서는 더 깊은 단계, 곧 마지막 네 번째 단계가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더 이상 언어가 필요 없는 단계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거하는 단계,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 속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평안을 누리는 단계, 바로 이러한 단계가 가장 깊은 기도의 단계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각주:1]  

말씀 드린 것처럼, 존 포웰 목사님이 제시한 기도의 단계는 모든 사람들에게 어느 때나 어느 상황이나 모두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 포웰 목사님이 제시한 가장 깊은 단계, 곧 더 이상 그 어떠한 언어를 하나님 앞에 쏟아놓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고,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속에서 참된 평화를 누리는 그 깊은 기도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한 번쯤은 꿈꾸는 기도의 깊이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의 언어들 가운데, 그와 같은 가장 깊은 단계의 기도를 나타내는 가장 대표적인 표현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아빠” “아바 아버지”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 더 이상 어떠한 인간의 언어를 계속해서 쏟아놓지 않더라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누리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하는 가장 깊은 기도를 통한 하나님의 교제가 아니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었다고 선언합니다. 그렇다면 첫번째 질문, ‘어떻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두 번째 질문, ‘무엇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의 특권일까요? 오늘 본문은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대답을 제공합니다. 

 


‘어떻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가? 

첫째로, 어떻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까? 오늘 본문 갈라디아서 4장 4절과 5절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도록 하겠습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타임 테이블에 따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께서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 태어나게 하셨지요. 오늘 본문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동정녀 마리아에게 태어나신 것은 곧 예수님께서 율법 아래에서 태어나신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율법 아래에서 종노릇 하는 사람들을 위해 스스로 율법의 아래에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5절을 보시면, 율법 아래 태어나신 예수님은 율법 아래 있는 인간들을 속량 하셨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인간을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놀라운 속량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분을 얻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하는 우리가 그 무엇보다 먼저 기억해야 할 사실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위대한 명분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며 우리의 소원을 아뢸 수 있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속량하시는 은혜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롬 8:31-32)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셨다는 사실,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아들의 명분을 얻도록 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주셨다는 그 놀라운 은혜를 생각할 때 우리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위해 내어 주신 하나님께서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얼마 전 교회에 등록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새가족을 심방하였습니다. 그 가정은 오래전 다른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참 열심히 하셨던 분들이었습니다. 교회의 구석구석 보이지 않는 곳에서 봉사하고 최선을 다해 교회를 섬겼던 가정이었지요. 자연스럽게 자녀들도 교회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고 교회에서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운영하던 사업이 어려움을 겪으면서 가정에 큰 위기가 찾아왔어요. 그것을 계기로 지난 10여 년간 신앙생활을 멀리하고 교회를 멀리하였던 가정이지요. 
그날 모임에 대학생 딸이 함께 참여하였습니다. 그래서 대학생인 그 자매에게 제가 질문했습니다. “예전에 신앙생활도 해보았고, 지금은 교회를 쉬고 있는데 자매의 마음에 하나님을 생각할 때 교회를 생각할 때 기독교를 생각할 때 어떠한 마음과 생각이 드나요?” 그러자 그 청년이 솔직한 자신의 심정을 이야기하는 거에요. 어린 시절 초등학교를 다닐 때까지만 해도 교회에서 자라났고 교회에서 친구들과 함께 지내는 것이 언제나 기쁘고 즐거운 일이었답니다. 그런데 자신이 중학생이 되었을 때 아빠의 사업이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온 식구들이 그 문제를 놓고 하나님께 진심으로 기도했다는 거예요. 어린 중학생의 마음에 아빠와 엄마를 비롯해 온 식구들이 간절히 기도하니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을 지켜주실 거라고 믿었데요. 그런데 현실은 자신의 믿음과 반대 방향으로 진행되었고, 하나님은 우리 가정을 도와주지 않으셨데요. 
대학생 청년이 그때의 이야기를 하는데, 옆에서 딸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엄마가 그저 눈물을 흘리시더라고요. 온 식구들이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였지만, 온 식구들이 하나님의 일이라면 압장서서 감당하였지만, 그리고 그 가정을 향해 몰아치는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서 온 식구들이 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지만 하나님께서 자신과 자신의 가정을 외면하고 등을 돌리신 것처럼 느껴질 때. 온 식구들은 하나님을 멀리 떠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 청년의 이야기를 한참 들은 뒤에 제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원망, 하나님을 향한 실망, 하나님을 생각할 때 느껴지는 배신감 등 자매의 마음에 있는 부정적인 생각들을 가슴에 품었기에 하나님을 더욱 멀리한다면 자매의 마음에 있는 실망감은 도저히 해결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불평, 불만, 배신감을 간직한 채 그러한 감정들을 하나님께 쏟아놓는다면 자매를 향한 하나님의 또 다른 마음도 경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한 가지 비유를 들었어요. 지금까지 자라면서 부모님께 실망하고 서운했던 적이 왜 없겠어요? 부모님이 왜 나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실까 원망스러웠던 적이 분명히 있지 않겠어요? 그러나 때로는 그와 같은 부정적인 마음이 들어도 계속해서 부모님과 함께 살아가다 보면 자매를 향한 부모님의 더 깊은 사랑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 아니겠냐고,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실망하고, 원망스럽고, 서운한 감정을 간직한 채 하나님께 나아가면 좋겠다고 권면을 했지요. 

그리고 함께 예배를 드리며 나누었던 말씀이 로마서 8장 31-32절이었습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롬 8:31-32) 

때로는 하나님께서 지금 당장 나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나를 외면하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분명히 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사랑이 나와는 상관이 없다고 여겨질 때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신 것은 아닌지 의심이 생깁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우리가 기억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사실이 있다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시셨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여 주셨고,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는 그 놀라운 사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 그 한 가지를 기억한다면 우리는 사도 바울과 같이 선포할 수 있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롬 8:32)

지금 내가 겪는 삶의 무게가 제 아무리 무거울 지라도, 그 인생의 무게에 눌려 도저히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볼 수 없는 그 순간에도 여러분 단 하나의 사건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다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그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삶의 고난 앞에서도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자녀 된 특권인가? 

바울은 먼저,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지를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제, 무엇이 하나님의 자녀 된 특권인지를 보여주고 있지요. 하나님의 자녀 된 특권 역시, 사도 바울은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특권은 하나님을 향해 ‘아버지’라고 부르는 특권입니다. 

오늘 본문 갈라디아서 4장 6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우리가 아들이기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담대히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가 있다는 말씀이지요. 

경기도 포천에 팔호교회라는 조그마한 시골교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의 창립과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어요. 그 지역은 휴전선과 가까운 지역이어서 예나 지금이나 군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한국전쟁 때 가족을 모두 잃은 어느 군인 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짙게 내리면, 어김없이 술을 얼큰하게 한 잔 하고는 강원도와 경기도를 가로질러 흐르는 한탄강 강가에 나가 홀로 적적함을 달래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가족이 너무도 보고 싶고,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부모님이 몹시도 그리웠다고 합니다. 그날도 어김없이 많은 술을 마신 채 한탄강 강변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해서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생각이 갑자기 머리를 스쳤대요.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아버지’라고 큰 소리로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몇 차례나 불렀을까요? 마음의 모든 그리움을 담아 ‘아버지’라고 크게 부르는데 어디선가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한 목소리가 들렸다고 합니다. “왜 부르느냐?” 그 음성을 듣고 주위를 아무리 둘러보아도 아무도 없었다고 합니다. 

예상치 못했던 음성에 갑자가 술이 다 깨고, 정신이 바짝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 아버지가 되어 주시는 군요. 하나님 아버지께서 언제나 제 곁에 계셨군요.’ 그때부터 그분은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여 교회 장로님이 되셨고, 자신이 ‘아버지’를 찾았던 바로 그 자리, 제8호 한탄강 강변에 교회를 세웠는데 그것이 바로 팔호교회입니다. 

팔호교회를 창립하신 장로님의 경우처럼, 우리 주변에는 아버지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한 분들이 계세요. 아니면 시간이 흘러 부모님께서 세상을 떠나셔서 아버지라는 이름, 어머니라는 이름을 언제 불렀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 분들도 계시죠. 어디 그뿐인가요? 가정이 깨어지고 갈라지면서 그 안에서 부모님의 사랑을 충분히 느끼지 못한 분들도 계십니다. 설령 행복하고 아름다운 가정에서 자랐을지라도, 그래서 부모님의 사랑을 충분히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마음에는 하나님 아버지로서만 채워질 수 있는 한이 없이 깊은 그리움과 외로움이 자리 잡고 있지 않은가요? 그래서 70여 년을 무신론자로 살았던 이어령 박사는 무신론자에 대해 이렇게 정의를 내립니다. ‘겉으로는 태연한 체, 강한 체 오기를 부리다가도 누가 옆에서 조금만 보고 싶다 사랑한다고 손을 내밀면 금시 울음을 터트릴 그런 사람들이’ 바로 무신론자라고 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각주:2]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라고 부르며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잖아요. 수많은 기도의 제목을 다 아뢰지 못했도, 나의 마음을 충분히 하나님께 쏟아 놓을 수 있는 언어가 우리의 입술는 부족할 지라도 하나님을 향해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는 그 하나의 사실만으로도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아시고, 우리의 생각을 아시고, 우리의 심령을 헤아려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주신다는 사실, 세상의 그 어떠한 아버지보다도 나를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을 향해 기도할 수 있다는 사실이 우리로 하여금 놀라운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받는 두 번째 특권은 하나님의 유업을 받는 특권, 곧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는 특권입니다. 오늘 본문 갈라디아서 4장 7절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우리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아들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무엇이라고 선언합니까?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자입니다. 여기서 ‘유업을 받을 자’, 곧 상속자라는 의미가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여러 차례 복음을 믿어 크리스천이 된 사람들은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었다고 설명하거든요.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의 상속자는 구약에서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약속이 그의 후손들에게, 곧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이어졌던 그 장면을 염두에 둔 개념입니다. 한 마디로 설명하면, 여기서 하나님의 상속자라는 말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참여한 사람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속량, 곧 죄용서와 구원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아버지라고 불러요. 나아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의 중요한 특권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참여한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넌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상관없이 살아갑니다. 그래서 인생의 주인이 자기 자신이지요. 자신의 힘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큰 위기나 어려움이 찾아올 때 쓰러져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크리스천들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달라요.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지금 하루하루가 하나님의 구원 계획, 하나님의 구원 섭리 안에 있습니다. 

때로는 나의 계획이 실패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때로는 나의 앞길이 막막하게만 보입니다. 그러나, 그 위기의 순간에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많은 말과 화려한 언어로 기도하지 못할지라도 그저 하나님을 향해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하는 우리는 하나님의 딸이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우리의 삶을 인자하게 인도해가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상속자의 특권, 곧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 아버지’라 부르며 기도하는 우리 모두의 특권인 것입니다. 


  1. The PCC. Equipping Elders (Toronto: PCC, 2010), 122. [본문으로]
  2. 이어령, 『지성에서 영성으로』 (서울: 열림원, 2010), 26-27.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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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0. 6. 9. 15:33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호통을 치면서 시작을 하지요. 1절을 보십시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3절도 보십시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이토록 쓴소리를 쏟아 놓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갈라디아서를 통해 사도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분명합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누리며 살아가는 것은 율법을 잘 지키는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된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 두 가지 단어가 대조를 이루고 있지요. 곧 믿음과 행위입니다. 기독교의 진리 가운데 가장 중요한 핵심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 인간이 무엇을 행함으로, 무엇을 행했다는 공로로 구원을 받으려는 모든 노력을 거부하고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이 호통을 치면서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을 책망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믿음의 원리, 곧 은혜의 복음으로부터 조금씩 멀어져서 행함의 원리, 곧 율법의 원리를 따라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전적으로 부인했던 것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선포할 때,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은 그것이 아니라고 율법을 잘 지켜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했던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고 선포할 때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도 ‘아멘’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믿음 위에 행위를 덧붙이기 시작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받지요. 그러나 어떻게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습니까? 교회에 잘 출석해서 헌금도 하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야 구원을 받지 않을까요?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습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열심히 살아야 구원을 받지 않을까요? 이렇게 믿음 위에 행위를 덧붙였던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백 번 양보해서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구원을 받은 이후에는 열심히 신앙생활 하고, 열심히 봉사하고, 열심히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시고 우리에게 복을 주신다는 생각입니다.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그와 같은 신앙생활이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호통을 쳤던 것입니다. “어리석도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이여”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의 이와 같은 잘못된 생각을 교정하기 위해 질문을 던집니다. 먼저 2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하노니”  이제 질문이 등장하죠.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여기서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성령의 특별한 은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신앙생활을 처음 시작할 때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여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2절에 등장하는 사도 바울의 질문은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이 처음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율법을 행하는 행위 때문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의 복음을 듣고 믿었기 때문입니까?  

사도 바울은 계속하여 3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처음 신앙의 길을 시작할 때에는 믿음으로, 은혜로 - 3절의 표현대로 성령으로 – 시작하여 놓고, 이제 와서 왜 율법으로 행위로 공로로 - 3절의 표현대로 육체로 - 신앙생활을 마치려 하느냐고 질책하였던 것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시고, 우리가 성령을 받았다는 것이 오늘 본문에서는 특별한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 성령이 우리 마음에 임하여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뜻이라고 말씀을 드렸죠. 이제 사도 바울은 구원받은 이후의 일을 이야기합니다. 5절을 계속 보시면,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 여기에서도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이라는 것이 일생에 한두 번 경험하는 특별한 기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매일 경험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뜻합니다. 5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곧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곧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을 매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그다음에 무엇이라고 말씀하시죠?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사도 바울이 의도한 대답은 무엇일까요? 당연히 듣고 믿기 때문이라고, 당연히 하나님의 은혜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을 향해 어리석다고 호통을 쳤던 이유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고 하나님의 은혜로 하루를 살아가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어리석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까지 살아왔으면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나의 생각과 나의 의지로 나의 삶을 이끌어가려는 모든 노력이 어리석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가운데 행위로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믿음으로,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가운데 행위로, 공로로, 자격으로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지혜요, 이 사실을 날마다 기억하며 하나님의 은혜만을 간구하는 사람만이 자신의 삶을 지혜롭게 경영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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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0. 6. 7. 15:15

율법의 궁극적 지향점은 ‘사랑’입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면 율법의 모든 요구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은 율법의 모든 조항을 단 두 개의 명령으로 요약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구체적인 행동의 지침을 포함한 율법 조항의 최종 지향점이 다른 사람들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라니 참으로 놀라운 가르침입니다. 

율법의 지향점이 ‘사랑의 마음’이라는 가르침은 우리에게 격려가 되면서도 아울러 절망감을 안겨줍니다. ‘격려’라는 의미는 수많은 율법의 조항들을 따라가지 않더라도 사랑의 마음을 품기만 하면 율법의 완성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요, ‘절망감’이라는 의미는 제 아무리 노력을 해도 마음에 진실한 사랑의 마음을 품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 율법의 시작이요 완성이라는 위대한 가르침은 ‘어떻게 사랑의 마음을 품을 수 있는가?’라는 어려운 도전에 직면하고 맙니다. 

바울은 다른 사람을 향한 사랑을 ‘빚’이라고 주장합니다. 그 누구에게도, 그 무엇도 빚을 지지 말라고 권면하면서, 동시에 누군가를 지속적으로 사랑해야 하는 빚만큼은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고 강조합니다. 빚이란 내가 먼저 다른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받을 때 시작됩니다. 이미 받았으니 빚이 발생하였고, 이미 받았으니 나에게는 빚을 갚아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미리 받았기에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빚이 될 수 있습니까?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 대답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으니 사랑의 빚이 발생하였고, 이미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고 있으니 빚을 갚는 심정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기독교는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행하였으니 하나님께서 보상을 주신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 반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받았기에 우리도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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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0. 6. 7. 15:13

로마서는 기독교의 복음이 가장 분명하고 명확하게, 또한 웅장하고 화려하게 담겨있는 성경의 책입니다. 한 평생 복음을 전했던 사도 바울이 자신이 전한 복음에 대해 심혈을 기울여 설명한 글이 바로 로마서입니다. 그런데 다른 한 편으로 로마서는 편지입니다. 편지란 특정인이 편지를 받는다는 전제 하에 그 사람에게 무엇인가 전하고 싶은 내용을 기록한 것이죠. 로마서는 사도 바울이 편지를 보내는 발신자가 되고, 로마교회 성도들이 편지를 받는 수신자가 됩니다. 곧, 사도 바울이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특별히 무엇인가 전하고 싶은 내용이 있어 편지를 써서 보낸 것이 로마서인데,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었던 그 내용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장 15절을 보면,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대목에서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세요? 일반적으로 우리가 복음에 대해 알려주고, 복음을 전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기존 신자인가요? 아니면 불신자인가요? 우리가 전도를 한다고 할 때 주로 불신자를 만나 전도를 한다고 생각하나요? 아니면 기존 신자들에게도 전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나요? 불신자에게 전도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죠.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미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 편지를 작성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 곧 갈라디아 지방, 마게도냐 지방, 아가야 지방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로마를 거쳐 아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저 서바나까지 복음을 전하려는 간절한 소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동시에 기억해야 할 한 가지 사실은 사도 바울이 이미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았고,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이 모여 교회를 이룬 로마 교회 성도에게도 복음을 전하기 원한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여기에 아주 귀한 교훈이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이미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알고, 복음의 능력을 체험한 교회 성도들에게도 복음을 다시 듣는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미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미 그 복음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이미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미 오랜 시간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우리에게도 무엇이 필요해요? 복음을 다시 듣는 것이 필요합니다. 

처음 예수님을 믿고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면 내 마음에서 기쁨이 샘솟듯 솟아납니다. 너무나 즐겁습니다. 내 마음에 감격이 흘러넘칩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감히 눈을 들 수조차 없는 죄인인데 나의 그 많은 죄악이 예수님께서 흘리신 보혈로 깨끗해졌다는 사실이 너무도 감격적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의롭다고 선언하시고, 나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나님의 아들과 하나님의 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너무 좋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이것을 구원의 감격이라고 말하죠. 처음 예수님을 믿으면 이러한 구원의 감격이 넘쳐나요. 이때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좋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는 것이 좋습니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내어서 기도하고, 성경 읽고 내가 체험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어요. 이것이 구원의 감격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시간이 흐르면 불행히도, 안타깝게도, 슬프게도 내 마음에 구원의 감격이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하다 보면 복음의 감격이 껍데기만 남아요. 복음에 대해 알지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서 알지요.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수도 있지요. 그러나 내 마음에 그 감격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복음을 들어야 하고, 다시 복음을 묵상해야 하며, 다시금 복음을 마음에 새겨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은 은혜가 더욱 풍성해지기를 바랍니다. 신앙생활은 오래하였고, 교회에서 생활하는 것이 이제는 익숙해지는 것 같은데 언제부턴가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이 땅에 오셨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내가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에 대하여 감격이 사라지셨다면 다시금 우리가 바른 믿음 위에 굳건하게 서고 우리 안에 구원의 감격이 회복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복음 –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인지 편지를 시작하는 로마서 1장 1절부터 복음이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1-2절)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까지 예수님을 반대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던 사람입니다. 그날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 가두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지요.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께서 바울을 만나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바울의 길을 막아서고 그로 하여금 새로운 믿음의 길을 시작하도록 하여주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도 바울의 회심을 그저 다메섹 도상에서 있었던 한 순간의 일로 치부해서는 안됩니다. 한 순간, 예수님을 대면했던 그 신비한 체험이 바울이 회심하는 전체 과정이라고 오해해서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2절이 그 근거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는 이 선언은 예수님에 대해 깊이 묵상하고 그 예수님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이후에나 가능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를 보면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직후 아라비아로 갔다고 회상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cf 갈 1:17). 아무도 없는 아라비아 사막에서 바울은 자신에게 너무도 익숙한 구약성경을 다시 읽으며 자신이 만난 예수님이 누구인지 원점에서부터 다시 시작하여 진지하게 탐구하였을 것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거부하고 박해하였던 예수님이 과연 누구인가? 다메섹 도상에서 나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이 과연 누구인가? 이 질문을 가지고 씨름을 하면서 구약 성경을 다시 한번 꼼꼼하게 읽기 시작하는 거지요. 

그 과정에서 창세기 12장 2절에 등장하는 열방에 복을 주시는 메시야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사야 7장에 등장하는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은 임마누엘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사야 11장에서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와 인류를 구원하는 구원자가 된다는 예언이 바로 예수님을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무엇보다 이사야 53장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바로, 이사야 53장에 등장하는 고난 받는 종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사도 바울이 얼마나 많이 울었을까요? 자신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님이 메시아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박해했어요. 그런데 다시금 성경을 읽고, 다시금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보니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야 말로 온 인류를 구언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메시아요, 사도 바울 자신을 구원하신 구원자가 되셨던 거예요. 사도 바울은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가 어떠한 분인지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 깨달음으로 바울은 복음을 설명하며 바로 2절을 기록하게 된 것입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다” 3절을 계속 보십시오.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이 모든 것을 구약 성경을 통해 분명히 확인하였습니다. 그리고 4절,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을 직접 대면하는 다메섹에서의 단 한번의 체험은 바울이 회심하는 계기는 될 수 있었지만, 그것이 바울이 회심하는 전체 과정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의 체험 이후, 구약 성경을 깊이 읽었고, 예수님의 생애를 깊이 묵상하였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바르게 알기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며 탐구하였습니다. 그 결과 바울은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복음을 깨닫게 되었고, 복음의 은혜가 그의 마음에 흘러넘쳤으며, 어떠한 고난이 찾아와도 복음을 전하는 일에 충성하는 복음의 사도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놀라운 체험을 했지만, 자신의 믿음을 위해서 신비한 체험을 계속해서 추구한 것이 아니라, 성경을 묵상하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였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 성장할 수 있는 바른 길입니다. 

여러분도 사도 바울과 같이, 마음 가득히 복음의 은혜가 넘치기를 바라십니까? 여러분의 마음에도 구원의 감격이 다시금 풍성하게 흘러 넘치시기를 원하시나요? 만일 그렇다면, 여러분도 사도 바울과 같이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신비한 체험을 쫓아 여기저기 기웃거리지 마십시오. 다시금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일에 집중하시고, 다시금 여러분의 마음에 예수님의 삶을 깊이 묵상하십시오. 이미 다 아는 내용이라고,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들려 달라고 요청하지 마십시오. 너무 새로운 이야기를 좋아하지 마세요. 성경 저 구석에서 한 구절을 찾아내어 뭔가 새로운 이야기인 양 사람들을 현혹하는 것은 바로 이단들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전 1:22-24)


부르심 – 복음이 일으키는 변화

사도 바울은 로마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먼저 복음에 대해 간단히 서술합니다. 그리고 그 복음이 오늘 우리에게 어떠한 변화를 일으키는지 묘사하지요.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 (5-6절)

바울은 먼저 자신의 변화를 이야기합니다. 5절을 다시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사도 바울이]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았습니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은혜와 사도의 직분”이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이것은 직역입니다. 본문에는 ‘이사일의’라는 수사학적인 방법이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복잡한 설명은 다 뒤로 하고 결론만 말씀드리면, 우리말 성경의 ‘은혜와 사도의 직분’이라는 표현의 뜻은 ‘은혜, 곧 사도의 직분’이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를 받았습니다. 곧 사도의 직분이라는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복음을 깨닫기 전, 바울은 복음을 박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그의 마음에 자리 잡자 복음의 박해자였던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던 것입니다. 삶의 정체성이 변화되고, 삶의 목적이 바뀐 것, 이것이 사도 바울이 이야기하는 복음의 은혜입니다. 

바울은 먼저 자신의 변화를 이야기했지요. 바울은 다음으로 이방인들의 변화를 이야기합니다. 5절을 계속 보십시오. “그의 이름을 위하여” 그 다음에 누가 등장하지요? “모든 이방인”이 등장합니다. 그들도 “믿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어요 그리고 은혜를 받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믿어 순종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모르던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선포되니, 그들도 복음을 믿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바울은 먼저 자신의 변화를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의 변화를 설명했지요. 마지막으로 로마 교회 성도들이 등장합니다. 6절을 보십시오. “너희도” 여기서 너희는 당연히, 로마교회 성도들입니다. 로마교회 성도들인 너희도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복음은 로마의 시민으로 살아가던 사람들을 성도로 부르셔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변화시켜주셨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박해자였던 사울을 불러 바울 사도로 삼으시고, 이방의 우상을 섬기던 이방인들을 불러 하나님께 순종하는 신앙인으로 변화시키고, 로마의 시민들을 불러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였습니다. 곧, 복음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요,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삶의 정체성과 삶의 목적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에서 너무나도 중요한 사실이 있어요. 복음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복음이 우리 마음에 들어오면, 우리의 삶이 변화됩니다. 그런데 그 변화라는 것이 만사형통으로의 변화가 아닙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변화되는 내 삶의 변화는 하는 일마다 성공하는 인생으로의 변화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죠. 사도 바울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사도라는 직분, 감당해야 하는 사명을 받았어요. 이방인들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뜻대로 살아가던 삶에서 이제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 되었고요. 로마교회 성도들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무엇을 소유한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것으로 자신들이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은 은혜가 마음에 가득한 사람의 중요한 특징을 발견하게 됩니다. 곧, 복음의 은혜가 마음에 가득한 사람은 자아가 죽어 있는 사람이에요. 나의 자아는 죽고 예수님만 살아있는 사람이지요. 그에게는 자신의 의지, 자신의 욕망, 자신의 고집이 없어요. 그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만 있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순종만 있고, 하나님의 소유라는 정체성만 있어요. 내 손에 있다고 내 것이라고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려 합니다. 나에게 조그마한 힘이 있다고 그 힘을 행사하기보다는 언제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그 마음에 너무도 풍성하기에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성숙이고, 신앙으로 말미암은 인격의 성숙입니다. 

신앙생활의 경륜이 한 해 한 해 더 늘어날수록 우리의 믿음도 성숙을 경험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스도인으로서 올해보다 내년에 나의 믿음이 더 성장하고, 신앙으로 말미암아 나의 인격이 더 성숙되고자 하는 열망이 우리에 필요하지 않을까요? 

여러분, 그 해답, 그 비결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있습니다. 

우리를 온갖 죄악에서 구원하여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기억하시고, 우리 마음에 구원의 감격이 회복되시기를 바랍니다. 날마다 말씀을 더욱 깊이 묵상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깊이 생각함으로 말미암아 박해자 바울을 사도로 부르신 은혜,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신앙인으로 부르신 은혜, 로마의 황제가 정해놓은 법률에 따라 살아가던 로마의 시민들을 천국에 그 시민권을 두고 살아가는 하나님 백성으로 삼으신 그 은혜가 이 자리에서 예배하는 우리 모두에게도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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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0. 5. 16. 13:48

본문 느헤미야 7장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읽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익숙하지 못한 이름들이 계속해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특별히 구약 성경을 읽다 보면 오늘 본문과 같이 생소한 이름들이 열거되어 있어서 성경을 읽는데 어려움을 겪을 때가 있지요. 

그러면 왜 하나님은 성경에 이와 같은 이름들을 나열하셨을까요? 과연 오늘 본문 느헤미야 7장에 등장하는 이름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의 명단일까요? 나아가 오늘 본문 느헤미야 7장에 등장하는 수많은 이름들은 오늘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을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느헤미야 7장의 명단이 시작하는 5절과 6절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다 함께 5절과 6절 말씀을 함께 봉독 하겠습니다. 

“내 하나님이 내 마음에 감동하사 귀족들과 민장들과 백성을 모아 그 계보대로 등록하게 하시므로 내가 처음으로 돌아온 자의 계보를 얻었는데 거기에 기록된 것을 보면 옛적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사로잡혀 갔던 자들 중에서 놓임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다에 돌아와 각기 자기들의 성읍에 이른 자들 곧”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의 성벽을 모두 건축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성벽 안에 사는 사람들의 인구 조사를 실시했다는 말씀입니다. 5절 말씀을 다시 보시면, “내 하나님이 내 마음을 감동하사 귀족들과 민장들과 백성을 모아 그 계보대로 등록하게 하시므로” 인구조사를 실시한다는 의미지요. 그런데 여기에서 인구조사에 포함되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5절을 계속해서 보십시오. “내가 처음으로 돌아온 자의 계보를 얻었”다고 말씀합니다. 곧, 바벨론의 포로에서 돌아온 사람들의 명단을 확보했고, 그 명단을 기준으로 인구조사를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바벨론에서 처음으로 예루살렘에 돌아온 사람들과 지금 느헤미야가 그때의 명단을 확보해서 인구조사를 하는 시점까지는 어느 정도의 시간적인 차이가 있었을까요? 학자들은 바벨론에서 처음으로 예루살렘에 돌아온 사람들을 편의상 ‘1차 포로 귀환’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느헤미야와 함께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사람들을 편의상 ‘3차 포로 귀환’이라고 부르지요. 그리고 1차 귀환으로부터 3차 귀환에 이르는 시간의 차이는 대략 100년 정도가 됩니다. 

그러므로 느헤미야 7장 5절에 등장하는 “처음으로 돌아온 자의 계보를 얻었”다고 했을 때 이 명단은 100년 전의 명단입니다. 

뿐만 아니라, 계속되는 느헤미야 7장 6절은 느헤미야가 확보한 명단, 곧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다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사람들의 명단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6절을 보십시오. “옛적에” 옛적의 일을 언급하는데, 그 옛적의 일이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사로잡혀 갔던” 일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사건 곧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게 사로잡혀서 포로의 신분으로 끌려간 일이 있은 후, 그들이 처음으로 예루살렘에 돌아오기까지는 모두 70년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정리하자면,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끌려갔다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데 70년이 걸렸어요. 그리고 그때로부터 다시금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와서 성벽을 건축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약 100년입니다. 그 170년의 오랜 세월 속에는 바벨론이라는 이방 나라에서 포로생활을 하는 고난의 시간이 있었고,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의 성벽을 재건하려고 노력하는데 도비아와 산발랏과 같은 사람들의 공격을 받아야 하는 등의 시련이 끊이지 않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 무엇인지 아세요? 그렇게 파란만장했던 17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하나님은 바벨론으로 끌려갔다가 다시금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사람들의 이름, 그들의 명단을 보존하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입니다. 왜 느헤미야 7장에는 생소한 사람들의 이름을 그토록 길게 나열하고 있을까요? 사람들의 생각에는 잊혀졌지만,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유다가 바벨론 군대에 의해 멸망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유대인들에게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이제는 끝이라고 생각했지만, 바로 그때에도 하나님은 유대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셨고 그들을 보존하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에른스트 라이트라는 분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행위, 하나님의 일하심이라고 말했습니다.  성경의 기록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다는 것도 담고 있지만, 그보다 더욱 많은 내용이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셨고 어떻게 행동하셨는지를 보여준다는 의미이지요. 바로 느헤미야 7장이 그렇습니다. 느헤미야 7장에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다는 내용은 하나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기억하셨고, 하나님의 손바닥에 새기셨고(사 49:16), 하나님께서 끝까지 붙잡고 보호하셨던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지요. 

여러분, 여러분의 이름은 지금도 하나님께서 보존하시는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여러분의 이름은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으며, 하나님은 여러분이 저 영원한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까지 여러분을 기억하시고, 여러분을 붙잡으시며, 여러분을 지켜주십니다. 이것이 느헤미야 7장이 소개하는 하나님의 일하시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느헤미야 7장은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보존하셨던 이름들을 모두 기록한 뒤에 마지막 73절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문지기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백성 몇 명과 느디님 사람들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다 자기들의 성읍에 거주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보존하신 사람들 중에는 제사장들도 있었습니다. 레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성전의 문지기들도 있었고, 성전에서 찬양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각각의 역할이 달랐지만, 그 마지막은 동일합니다. 73절 마지막을 다시 보십시오. “온 이스라엘 자손이 다 자기들의 성읍에 거주하였느니라” 

하나님은 자신의 택한 백성들을 한사람 한사람 인도하여 주셨고, 그들을 각자의 성읍에 거주하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제사장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레위인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문지기나 노래하는 자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을 그 누구보다 잘 아시고 우리 개인을 각자에게 꼭 필요한 자리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오늘 나의 하루가 사람들에게는 잊혀진듯 보일지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이름을 아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손바닥에 새기시고, 지금도 우리에게 꼭 필요한 장소로 우리를 인도해주시고 계십니다. 바로 그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며 오늘 하루도 하나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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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0. 5. 13. 10:38

올해 우리 삶에 가장 큰 변화를 초래한 요인이 있다면, 단연코 코로나 바이러스일 것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여파는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끼치고 있지요. 교회도 예외는 아니어서 우리 교회도 올해 상반기 약 두 달여 동안 함께 모여 예배하지 못하였습니다. 몇 주 전부터 주일예배를 성도님들이 함께 예배하고, 이번주부터 새벽예배와 수요예배도 성도님들에게 예배당을 개방할 수 있게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코로나 바이러스의 위협은 그치지 않고 있으며, 교회의 예배는 여전히 예전의 모습으로 회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던 중 저의 눈에 크게 들어왔던 한 구절이 있었습니다. 예레미야서 있는 말씀인데요.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이 백성에게 이 큰 재앙을 내린 것 같이 
허락한 모든 복을 그들에게 내리리라(렘 32:42) 

이 구절에 제 시선이 고정되었던 이유는 분명합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큰 재앙”이라는 단어가 먼저 저의 시선을 사로잡았고, 그 이후에 하나님께서 ‘허락한 모든 복’을 내려 주시겠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때로 큰 재앙을 내리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크고 작은 재앙을 만납니다. 그러나 그 재앙이 지나간 후에는 허락한 모든 복을 내리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예상치 못했고, 상상도 하지 못했던 큰 재앙이 우리 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지금, 이 땅의 모든 국민들, 특별히 이 땅의 기독교인들이 간절히 바라고 기대하는 것이 있다면, 다시금 예레미야에게 하셨던 하나님의 약속이 오늘 우리 모두에게도 선포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구절을 표준새번역으로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이 백성에게 이토록 큰 모든 재앙이 미치게 하였으나,
이제 내가 이에 못지않게
그들에게 약속한 모든 복을 베풀어 주겠다.

약속하신 모든 복

하나님께서 큰 재앙을 내리셨지만, 그 재앙이 지난 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모든 복을 받아 누렸던 사람을 성경에서 찾아본다면 단연코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욥을 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욥은 큰 재앙을 만났습니다. 하루 아침에 재산을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이것만으로도 큰 고통입니다. 그런데 같은 날 일곱명의 아들과 세명의 딸이 모두 세상을 떠나고 말지요. 얼마나 큰 재앙입니까? 그런데 사탄은 이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욥의 몸을 쳐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심한 종기가 일어나게 합니다. 재산을 잃었습니다. 가족을 잃었습니다. 마침내 건강까지 잃었습니다. 그러니 생각지도 못했던, 상상하지도 못했던 큰 재앙이 그의 삶에 닥쳐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시간은 지나가기 마련입니다. 그토록 고통스러웠던 시간이 점차 지나가고 있습니다. 마침내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았던 욥의 큰 재앙이 모두 지난 후, 하나님은 욥에게 약속하신 모든 복을 부어 주십니다. 오늘 본문 1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욥의 말년에 욥에게 처음보다 더 복을 주시니

이제 하나님께서 주신 욥의 재산 목록이 등장합니다. 양이 만사천 마리, 낙타가 육천 마리, 소가 천 겨리, 암나귀가 천 마리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욥의 재산은 욥이 고난을 당하기 전, 곧 욥기 1장에 등장하는 욥의 재산과 비교하면 정확히 두 배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큰 재앙이 지난 후, 하나님께서 욥에게 허락하신 모든 복은 단지 재물의 축복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13절을 보십시오.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두었으며” 계속해서 14절에는 세 딸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여미마와 긋시아와 게렌합북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15절은 계속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모든 땅에서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더라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그들의 오라비들처럼 기업을 주었더라

가부장적 사회에서 딸들에게도 풍성한 기업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러니 어찌 딸들에게만 기업을 주었겠습니까? 욥은 하나님께서 주신 열명의 자녀들에게 풍성한 기업을 나누어 주며 그들도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풍성한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큰 재앙이 지난 후, 하나님께서 욥에게 재물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자녀의 축복을 주십니다. 그러니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언했던 것처럼, 큰 재앙이 지난 후 욥은 약속하신 모든 복을 받아 누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에는 우리가 한 번쯤 생각해 보아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자, 욥기 1장은 욥이라는 인물을 소개하면서 그가 부자였고 많은 자녀들이 있었으며 하나님께 때를 따라 제사를 드리는 의인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함께 묵상하고 있는 욥기의 마지막장인 42장에는 큰 재앙이 지난 후 욥이 잃어버렸던 재물도, 잃어버렸던 자녀도, 잃어버렸던 건강도 다시 되찾았다는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욥의 겉모습은 큰 재앙을 만나기 이전이나 큰 재앙을 만난 이후나 별로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욥의 인생 전체를 놓고 볼 때 정말로 큰 재앙을 만나기 이전의 삶과 그 이후의 삶은 별로 큰 차이가 없었을까요?

이 질문의 대답을 얻기 위해 우리는 욥기의 마지막 구절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16절과 17절입니다. 16절과 17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그 후에 욥이 백사십 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 대를 보았고
욥이 늙어 나이가 차서 죽었더라

어찌 보면 매우 평범한 서술처럼 보입니다. 큰 재앙이 지나고 140년이라는 긴 세월 장수하였고, 이후 늙고 나이가 차서 죽었다는 서술입니다. 그런데 구약 성경의 내용에 친숙하신 분들이라면, 이 구절을 읽으며 창세기에 등장하는 이스라엘의 족장들을 떠올리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욥기의 마지막 구절은 큰 재앙의 터널을 지나온 욥의 후반기 삶은 고난을 당하기 이전의 삶과 겉모습은 비슷할지 몰라도, 실제로는 전혀 다른 삶이었다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욥은 큰 재앙을 만나기 전에도 많은 재물을 소유한 부자였습니다. 욥은 큰 재난을 겪기 전에도 이미 열 명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욥은 큰 아픔을 겪기 전에도 때를 따라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의인이라는 칭호를 받은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풍요도, 이러한 행복도 사탄이 마음먹고 달려들자 하루 아침에 무너져 버립니다. 이렇듯 허무하게 붕괴될 수 있는 것이 욥기 1장이 묘사하는 욥의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욥은 큰 재앙을 인내하였고, 마침내 그 모든 재앙이 물러가자 욥에게는 새로운 세상이 찾아왔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주신 재물도, 자녀도, 건강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중요한 변화가 있었으니 욥의 세계는 더 이상 사탄의 유혹에 쉽게 붕괴되지 않는 견고한 토대 위에 세워질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큰 재앙을 지난 후 140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욥의 인생은 거대한 풍파가 몰려와도 결코 흔들리지 않았으며 창세기의 족장들이 그러하였듯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충만한 삶을 살다가 하나님의 품에 안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성도의 삶에 있어 고난은 더욱 견고한 믿음의 반석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욥의 변화 – 하나님 체험

욥은 자신의 삶에서 커다란 재앙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 재앙이 지난 후 욥의 삶은 이전과 달랐습니다. 겉모습은 비슷했지요, 그러나 그 내용은 전혀 달랐습니다. 그렇다면 고난을 겪는 동안 욥의 삶에는 어떠한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요? 과연 욥에게 어떠한 변화가 있었기에 큰 재앙이 지난 후 욥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충만한 삶, 결코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일까요? 큰 재앙을 겪으며 경험했던 욥의 변화를 욥기 전체에서 찾아본다면 두 가지로 요약해서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그 첫째는 ‘하나님 체험’입니다. 

자, 욥은 큰 재앙을 만나기 전부터 하나님을 섬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있었고 주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소개하고 하나님을 전했던 사람입니다. 심지어 욥은 하나님께 의인이라고 인정을 받았던 사람이지요.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정도이니 더 이상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주변 사람들은 욥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이라고 칭찬하였을 것입니다. 욥 자신도 이만하면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욥의 삶에 큰 재앙이 찾아오니 그 모든 것이 헛된 자랑이었습니다. 고난의 순간이 찾아오자 그제서야 욥은 자신이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지 못한 채 그저 풍월로 들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그리하여 하나님에 대해 자신이 이야기하는 내용은 실체가 없고 그저 입술의 말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급기야 욥은 이렇게 탄식하지요.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욥 23:8-9)

그런데 여러분, 큰 재앙을 만난 욥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사람들에게 들은 풍월로만 하나님을 알았던 욥인데, 그저 입술로만 하나님에 대해 떠들어댔던 욥인데 큰 재앙을 지나며 욥은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였던 것입니다. 그 내용이 욥기의 마지막 장인 42장 5절에 등장합니다. 욥기 42장 5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우리는 몇 달 전만하더라도 그 이름조차 알지 못했던 코로나 바이러스로 우리는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지난 두 달 여 동안 교회는 문을 닫아야 했고 심지어 주일예배까지도 온라인 예배로 전환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많은 성도님들이 이 기간을 통해 더 깊은 영적인 체험을 경험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코로나 이전에는 교회 활동이 바빴어요. 교회 모임에 참여하는 데 시간을 많이 썼어요. 그러나 이제는 모임에 참여하지 못하는 대신 주일예배, 새벽예배, 수요예배 등 한주에 10개 가까이 교회에서 제공하는 예배 영상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가정에서 영상을 시청하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다른 사람의 방해 없이 열심히 성경도 읽고, 하나님과 깊이 기도하는 시간을 보내면서 코로나 바이러스로 교회의 활동이 위축된 이 시기에 오히려 개인의 믿음과 신앙이 더 깊어지는 분들이 많이 계시더라고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직 멈추지 않은 코로나의 시기를 보내며 여러분도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교회의 여러 활동이 멈추었지만 여러분의 개인 경건의 시간을 결코 멈추어서는 안됩니다. 아니 이 기회를 통해 하나님께 더욱 기도하십시오. 이 기회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더욱 가까이 하십시오. 이 기회를 통해 가정에서 드리는 개인 예배와 가정 예배가 더욱 풍성해지기를 바랍니다. 

결국, 코로나 바이러스도 물러 갈 것입니다. 마침내, 이 큰 재앙도 지나갈 것입니다. 이 모든 재앙이 지난 후 우리도 욥과 같이 고백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욥의 변화 – 우정의 회복

큰 재앙을 겪으며 경험했던 욥의 변화, 그 두번째는 ‘우정의 회복’입니다. 

큰 재앙을 만나기 전, 욥에게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욥에게 재앙이 찾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욥을 위로하기 위해 찾아오지요. 욥이 평안하고 부유하고 무엇하나 부족하지 않았을 때 그의 곁에는 친구들이 많이 있는 것처럼 보였어요. 그런데 정작 욥에게 큰 재앙이 찾아오자 친구들은 위로하기는커녕 욥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만듭니다. 이것이 욥기 전체에서 대부분의 분량을 차지하는 욥과 세 친구들의 대화입니다. 욥은 친구들과 대화를 하면 대화를 할수록 그들로부터 위로받기보다는 마음에 큰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러한 아픔을 표현하는 욥의 이야기를 들어 보십시오. 

너희는 거짓말을 지어내는 자요
다 쓸모 없는 의원이니라(욥 13:4) 

이런 말은 내가 많이 들었나니
너희는 다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이로구나(욥 16:2)

욥의 주변에는 친구가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 그들은 욥의 마음을 위로하기보다는 그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큰 재앙을 겪으면서 욥과 친구들의 관계가 변했습니다. 욥의 마지막 장인 42장 10절입니다.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큰 재앙을 겪으며 먼저 욥의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친구들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욥이 친구들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욥이 곤경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본문 11절도 보십시오. “이에 그의 모든 형제와 자매와 이전에 알던 이들이 다 와서” 먼저 모든 형제와 자매들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전에 욥이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11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의 모든 형제와 자매와 이전에 알던 이들이 다와서 욥의 집에서 그와 함께 음식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욥에게 내리신 모든 재앙에 관하여 욥을 위하여 슬퍼하며 위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 욥은 큰 재앙을 겪었지만 그 과정에서 친구를 얻었고, 형제와 자매들을 얻었으며, 마침내 이웃을 얻었던 것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확산으로 사람들 사이의 만남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을 적게 만나다 보니 우리에게 소중한 사람들을 더욱 그리워하게 되지 않으셨나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가 어려운 이 시기를 보내며 여러분의 형제와 자매를 돌아보십시오. 모두가 어려운 이 시기를 보내며 여러분 곁에 있는 이웃을 돌아보십시오. 모두가 어려운 이 시기를 보내며 그 누구보다도 함께 모여 예배하지 못하여 더욱 그리운 우리 교회 교우분들을 서로 돌아보십시오. 여전히 멈추지 않은 바이러스의 위협 속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성도의 교제와 사랑을 풍성하게 경험하십시오. 그리하여 하나님을 보다 깊이 체험할 뿐만 아니라, 참된 우정을 회복하십시오. 

마침내 이 모든 재앙이 지난간 후,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허락하신 모든 복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와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이 백성에게 이토록 큰 모든 재앙이 미치게 하였으나,
이제 내가 이에 못지않게 
그들에게 약속한 모든 복을 베풀어 주겠다. 

하나님의 이 약속의 말씀이 여러분의 삶에 충만하게 실현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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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연구 07 “욥의 회개와 결말” (32장)

욥은 자신이 왜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 질문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두 번에 걸친 폭풍우 언설을 통해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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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성경공부" 목차 (Contents)

욥기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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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19. 5. 13. 12:36

요한계시록은 많은 성도들에게 무서운 책, 쉽게 다가가기 어려운 책, 잘못 읽거나 잘못 이해하면 이단의 가르침에 빠지는 책으로 여겨지곤 합니다. 그래서 교우분들 중에는 요한계시록을 개인적으로 읽는 것을 머뭇거리는 분들도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요한계시록을 개인적으로 읽는 것을 여러분에게 적극 권해드립니다. 요한계시록에 대한 이단적인 해석은 사람의 마음을 미혹하기 위하여 교묘하게 꾸며낸 이론입니다. 그러므로 이단의 가르침을 한번도 접해본 적이 없는 분들이라면 요한계시록 자체만을 여러 차례 읽는다고 하여 이단의 가르침에 빠질 가능성은 별로 없습니다. 오히려, 요한계시록에는 우리의 신앙생활에 큰 유익을 주는 많은 교훈이 담겨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기도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기도의 공동체

요한계시록 전체에 면면히 흐르는 중심 주제 가운데 하나가 바로 기도입니다. 그런 점에서 요한계시록은 기도에 대한 유익한 가르침이 가득하지요. 성경은 성도들의 기도가 금 향로에 담겨 하나님의 보좌에 올라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도의 기도가 금 향로에 담겨 하나님의 보좌에 올라가는 모습은 성경 전체에서 오직 요한계시록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번 찾아볼까요? 요한계시록 5장 8절입니다. 

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요한계시록 5장은 천상에서의 예배를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기록하고 있을 그때에 이 세상은 로마 제국이 다스리고 있었고, 세상의 주인은 로마의 황제였습니다. 로마 제국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들은 로마 황제를 신으로 여기며 경배하였습니다. 오직 기독교인들만이 황제가 신이 아니라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만이 인간의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유일하신 분이라고 믿었습니다. 당연히 로마 황제는 기독교인들을 미워하게 되었고 믿음을 간직한 신앙인들은 재산을 몰수당하거나 억울하게 매를 맞거나 심지어 사자굴에 던져지기도 하였지요. 상황이 이렇다 보니 당시 기독교인들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카타콤이라고 불리는 지하 무덤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들은 모든 환란과 박해로부터 자신들을 지켜달라고 그 어두컴컴한 지하 무덤에서 하나님께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그들의 모습은 초라하였고, 그들의 형편은 비참했으며, 그들의 종교활동은 사람들의 비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표현대로 성도들의 겉모습은 ‘세상의 찌꺼기’처럼 보였습니다(고전 4:13).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실상이 있었으니, 저 낮은 지하감옥에서, 저 낮은 지하 무덤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간절히 기도하는 성도들의 기도는 금향로에 담겨 저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의 보좌 앞에 올라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들의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제 아무리 로마 제국이 온 세상을 다스리는 것처럼 보이고, 로마의 황제가 온 세상의 주인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래서 로마 황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며, 로마의 법을 버리고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찌꺼기처럼 보이는 현실일지라도 실상은 온 세상을 주관하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할 수 있기에, 그리고 그들의 기도가 지금도 금향로에 담겨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올라가고 있기에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하는 성도들이 결국에는 최후의 승리를 거머쥐게 된다는 사실을 요한계시록은 역설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때로 여러분의 처지가 초라하다고 여겨지십니까? 때로 여러분의 형편이 비참하다고 여겨지시나요? 여러분의 종교활동이 사람들에게 비웃음거리가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의 눈이 열려 겉모습만이 아니라 영적인 실체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남 모르게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하는 여러분의 기도는 지금도 천사들의 손에 들린 금향로에 담겨 온 우주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 앞에 상달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 견디기 어려운 고난이 찾아올 때, 그 모든 과정을 이겨낼 수 있는 비결도 기도에 있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하는 나의 간구가 지금도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올라간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는 제 아무리 어려운 고난이 찾아올지라도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며 소망을 붙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삶의 방향을 잃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헤매고 있을 때, 신앙인으로서 삶의 바른 방향을 찾을 수 있는 비결 역시 기도에 있습니다. 나의 앞길이 캄캄하여서 한치 앞을 바라볼 수 없을지라도 나의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하나님을 찾는 기도가 지금도 금향로에 담겨 하나님의 귓전에 들린다는 사실을 믿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다시금 기도하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향해 달려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수많은 교회들을 세상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판단하는 잘못을 범하지 마십시오. 교회 안에서 아무리 연약하고 미약한 성도라할지라도 그들의 간절한 기도가 지금도 금 향로에 담겨 하나님의 보좌 앞에 올라가고 있다는 사실을 믿으며, 교회에서 만나는 모든 성도님들을 귀하여 여기시기 바랍니다. 비록 우리 시대 이 땅의 교회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비방을 당하고 부끄러움을 당하여 세상의 찌꺼기처럼 보일지라도, 교회 안에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기도와 예배가 지속되는 한 이 땅의 교회는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찬양의 공동체

오늘 본문 요한계시록 7장은 바로 이 교회의 영광을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 9절과 10절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

9절 말씀에,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큰 무리가 함께 모여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물론, 이 장면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전 세계에서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성도들이 함께 모여 찬양하는 장면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전체의 구성을 보면 예수님께서 세상의 심판주로 다시 오시는 장면은 요한계시록 19장에 이르러서야 나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본문 요한계시록 7장의 찬양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의 모습으로만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을 기다리는 지금도 실제로 일어나는 모습으로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어떤 성도들은 로마 제국의 극심한 박해로부터 끝까지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지하감옥에 갇힌 상태에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또 다른 성도들은 로마 제국의 감시를 피해 카타콤이라 불리는 지하무덤에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어떤 성도들은 로마 제국을 벗어나 동서남북으로 흩어지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로 헌신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향해 찬양을 드립니다. 그들에게는 한 자리에 모여 하나님을 찬양하며 예배할 수 있는 장소도 없고, 그럴 만한 형편도 안됩니다. 그러나 그들이 어디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든 세계 각지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성도들의 찬양과 경배는 하나님께서 좌정하고 계시는 하늘 보좌에까지 상달되어 그곳에서 아름다운 화음을 이루며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고 있음을 오늘 본문 말씀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10절은 온 세계 각처에서 성도들이 부르는 찬양의 내용이 무엇인지도 알려줍니다. 오늘 본문 10절을 다시 보십시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

어떤 이들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 재산의 손해를 감수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을 이기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고 찬양합니다. 어떤 이들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 로마 제국에서 높은 지위를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모든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구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고 찬양합니다. 어떤 이들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 생명의 위협을 당하면서도 그 모든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구원하심이 오직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고 찬양합니다. 비록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들의 모습이 초라할 지라도, 사람들의 눈길을 피해 어두컴컴한 지하 감옥, 지하 동굴, 지하 무덤에서 드리는 금새 사라질 듯한 연약한 목소리라 할지라도 그 찬양의 가사 하나 하나는 하나님의 보좌에까지 상달되는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찬양이었던 것입니다.

어찌 로마시대 그리스도인들 뿐이겠습니까? 우리는 지금 이렇게 크고 넓은 예배당에 많은 성도들이 함께 모여 예배하지만, 여전히 조그마한 예배 처소에서 몇몇 되지 않는 교우들이 함께 예배하는 이른바 많은 개척교회들의 예배도 하나님의 도우심과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여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고 찬양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상달되는 아름다운 찬양이요 영광의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어찌 주일 예배뿐이겠습니까? 구역 식구들이 삼삼오오 모여 드리는 구역예배에서도, 그저 부부 두 사람이 거실에 앉아 자신의 목소리만으로 부르는 찬양 속에서도, 때로는 내 곁에 함께 예배할 사람이 아무도 없어 골방에서 홀로 기도하고 홀로 찬양을 부르는 개인의 예배에서도. 우리를 모든 환란에서 구원하시고, 그 무엇보다 우리를 죄악으로부터 깨끗이 씻어주시어 모든 어두움과 죄의 세력으로부터 구원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며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고 고백하는 우리의 찬양과 경배는 지금도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모든 성도들의 찬양과 함께 어우러져 하나님의 보좌 앞에 울려퍼지는 영광의 찬양, 영광의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장막

하나님께서 사도 요한에게 보여주신 환상은 참으로 놀라운 장면이었습니다. 이 정도만 보여주셔도 이 땅의 교회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교회인지, 이 땅의 성도들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백성인지 충분히 알려주신 것 같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요한에게 보여주신 장면을 이제는 보다 구체적인 언어로 다시 한번 설명해 주십니다. 오늘 본문 13절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장로 중 하나가 응답하여 나에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

여기에 하나의 질문이 등장하지요. 이 흰 옷 입은 사람들이 누구인가? 라는 질문입니다. 여기서 흰 옷 입은 사람들은 세계 곳곳에서 모여와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다”고 찬양을 부르는 무리들을 말합니다. 곧 13절의 질문은 바로 이러한 뜻입니다. ‘교회는 무엇이며, 교회를 구성하는 성도들은 누구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14절 이후부터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 15절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우리가 이미 살펴본 것처럼 성도들은 세상의 찌꺼기처럼 보이지만 그들의 기도는 금 향로에 담겨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올라갑니다. 성도들의 겉모습은 초라하고 비참하지만 그들이 부르는 한 곡조의 노래는 천상을 울리는 영광스러운 예배의 일부분입니다. 그래서 15절은 성도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로 묘사합니다. 그런데 15절 말씀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매우 놀라운 비밀 하나를 말씀하십니다. 15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그 다음을 주목하십시오. “보좌에 앉으신 이가” 누구입니까? 바로 하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이시죠.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 위에”, 곧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향하여 간절히 기도하며,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찬양을 쉬지 않았던 성도들 위에 무엇을 치신다고요? 장막을 치십니다. 이 장막은 눈에 보이지 않는 장막, 세상 사람들은 결코 상상도 할 수 없는 장막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힘도 없고, 권력도 없고, 재물도 없고. 그래서 이방의 우상을 섬기는 로마제국에서 살면서 모진 고난과 환란을 당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하늘 보좌에 앉으셔서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고 그들을 친히 보호하여 주십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보호하시기 위하여 쳐 놓으신 장막 안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지 구체적으로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우리 16절과 17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주실 것임이라

16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합니다’ 마지막까지 믿음을 지키는 성도들은 먹고 마시는 것이 풍족하지 않아서 늘 배고프고, 늘 목마를 것같지만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주리지 않아요, 목마르지 않습니다. 16절을 계속 보십시오.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합니다.’ 위태위태하고, 다칠 것 같고, 저렇게 세상과 등지고 살아가다가는 만신창이가 될 것 같지만 실상은 하나님께서 보호하여주시니 상하지도 않고 다치지도 않습니다. 마지막 17절입니다.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주시고 닦아 주십니다.’ 

여러분, 오해하지 마십시오. 오늘 본문의 말씀이 요한계시록에 기록되어 있다고 마지막 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의 모습을 묘사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 드렸잖아요. 예수님께서 심판주로 다시 오시는 장면은 요한계시록 19장에 이르러서야 나와요. 그러므로 오늘 본문 요한계시록 7장은 마지막 종말의 때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지금 바로 이 자리에 계신 성도들의 모습 그 자체입니다. 비록 지금은 고난 가운데 있고, 비록 지금은 환난을 만나지만 – 먼 미래가 아니라 – 바로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의 위에 장막을 치시고 우리를 보호하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마다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주리지 않습니다. 목마르지 않습니다. 바로 지금,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목자가 되시어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비록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환난을 당하지만,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로 기도하는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 친히 찾아가셔서 여러분의 눈에 흐르는 눈물을 친히 닦아주십니다. 
그러고보니,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펼쳐놓으신 이 장막이야말로 성도들에게 이미 허락하신 하나님의 천국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난 뒤에, 예수님께서 심판주로 다시 오신 뒤에 들어가는 천국만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 위에 쳐 놓으신 장막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위로와 따스한 사랑을 느끼며 천국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비록 나의 삶에 고난이 많고, 비록 우리 시대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으며,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세상의 찌꺼기처럼 보일지라도, 금향로에 담겨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올라가는 기도의 끈을 놓지 마십시오. 지금 내가 있는 이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며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고 찬양하십시오. 비록 이 세상에서 고난이 많고 슬픔이 많을 지라도 여러분의 마음으로부터 간절한 기도와 진실한 찬양이 흘러나온다면 여러분이 계신 바로 그 자리, 여러분이 계신 바로 그 가정, 여러분이 계신 바로 그 공동체가 하나님의 장막이요, 곧 하나님의 천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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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19. 3. 19. 07:30

사람들에게는 대부분 모방심리가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하는 대로 따라하려는 마음이지요. 인간의 모방심리는 매우 어린시절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첫돌이 되지 않은 아이들도 엄마가 자신을 바라보며 혀를 내밀면 아이도 혀를 내밀고, 엄마가 자신을 바라보며 머리를 흔들면 아이도 머리를 흔드는 것이 모든 인간의 본성 가운데 하나인 모방심리 때문이라는 설명입니다. 모방심리는 어린이나 어른이나 별로 차이가 없어서 드라마 속의 유명 연예인이 특정한 가방을 메고 나오면, 사리를 분별할 수 있는 성인들 사이에서도 그와 비슷한 제품이 불티나게 팔리기 마련입니다.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선택할 때에도 누적관객의 숫자가 백만이다, 천만이다라고 하면 그 영화를 먼저 보게 되고 식당에 들어가 음식을 주문할 때에도 그 집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먹는 메뉴가 있다면 그것을 선택하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모방심리입니다.

 

중국의 전자상거래 사이트 가운데 최근 몇 년간 급부상한 기업이 있습니다. ‘핀둬둬라는 기업입니다. 이미 중국의 전자상거래 시장을 선점한 기업이 여럿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핀둬둬라는 회사는 여러 가지 신화를 만들어내며 짧은 시간에 거대한 중국의 전자상거래 시장을 잠식해 나갔습니다. 그런데 최근 핀둬둬가 이룩한 급성장의 배후에는 이른바 짝퉁이라는 모조품을 묵인하고 판매하였기 때문이라는 분석과 의혹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선망하는 명품을 나도 소유하고 싶은 마음과 그것을 좀더 저렴하게 구입하고 싶은 마음이 함께 작용하여 모조품의 생산과 소비가 이루어지고 바로 그 점을 활용하여 핀둬둬와 같은 기업이 호황을 맞이했다는 분석이지요. 그러고 보면 명품을 따라하는 모조품의 생산과 판매, 나아가 모방 범죄나 베르테르 효과라고 불리는 모방 자살 등은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모방 심리가 매우 부정적인 형태로 표출된 현상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모방심리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으니, 한 가지만 더 언급하겠습니다. 최근 신경과학자들은 사람의 뇌에서 거울신경세포라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거울신경세포는 다른 사람을 모방하게 만드는 기능을 합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우리의 뇌 안에 다른 사람을 모방하는 거울신경세포가 자리잡고 있다는 발견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실 때부터 다른 사람을 모방하게 만드셨다는 이야기이기도 하지요. 그러니 모든 사람이 중국집에서 자장면을 시키는 상황에서 혼자만 짬뽕을 먹겠다고 주문하는 것은 우리 인간의 본성에 상충하는 행동입니다. 야구장이나 축구장에서 모든 사람이 대한민국을 외치며 응원하는 현장에서 혼자 일본 대표팀을 응원하는 것은 목숨을 내놓을 듯한 용기가 필요한 행동인 것이지요.

 

 

모방 금지

 

그런데 오른 본문에서 하나님은 모방을 금지하십니다. 다른 사람, 특별히 다른 민족이 살아가는 방식과 그들의 문화를 따라하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오늘 본문 3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거주하던 애굽 땅의 풍속을 따르지 말며

내가 너희를 인도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도 행하지 말고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이방민족의 문화와 풍속을 따르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3절이 언급하는 두 개의 나라는 이스라엘 백성이 그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매우 어려운 나라들입니다. 먼저는 애굽이 등장하지요. 3절은 애굽을 어떻게 묘사합니까? “너희가 거주하던 애굽 땅의 풍속이스라엘 백성은 430년이라는 오랜 세월 애굽에서 생활했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문화와 그들의 풍속이 너무도 익숙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애굽의 문화와 애굽의 풍속을 모두 끊어버리고 벗어버리라고 말씀합니다.

 

한 사람이 어린시절 형성된 습관이나 행동방식을 성인이 되어 바꾼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나온 지 채 1년도 되지 않았습니다. 레위기의 말씀을 듣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 대부분은 애굽에서 태어났고, 애굽에서 지금까지 살아왔던 사람들입니다. 자신만 애굽에서 태어나 생활했던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생활한 역사가 430년이니 그들의 아버지도 애굽에서 태어나 애굽에서 죽었고, 그들의 할아버지도 애굽에서 태어나 애굽에서 죽었습니다. 여러 세대가 내려오도록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태어나 애굽에서 죽었습니다. 그런데 애굽에서 나온 지 일년도 채 되지 않은 백성을 향해 하나님은 분명히 요구하십니다. ‘너희가 거주하였던 애굽 땅의 풍속을 따르지 말라.’

 

하나님은 지금까지 익숙하게 살아왔던 애굽의 모든 문화를 벗어버리라고 말씀합니다. 아울러,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앞으로 들어가게 될 가나안 땅의 문화도 본받아서는 안된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3절 뒷부분입니다. “내가 너희를 인도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도 행하지 말고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데려와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실 계획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익숙한 애굽의 문화와 풍속도 모두 벗어버리고, 앞으로 들어가 살게되는 가나안 땅의 문화와 풍속도 따르지 말라고 분명히 명령하십니다.

 

애굽이 당시 거대한 문명을 창조하였던 제국이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계시죠? 그렇다면 가나안 땅은 어떨까요? 가나안도 나름대로 풍요로운 문화를 발전시키고 살았습니다. 가나안 땅이 애굽만큼 거대한 제국을 건설한 것은 아니지만, 그 문화에 있어서는 당시의 유행을 주도하는 문화였어요. 실제로 광야에서 40년 동안 나그네 생활을 하였던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자 그들은 가나안의 문화에 넉을 잃고 맙니다. 그만큼 가나안의 문화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매력적이 것이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이번에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거주하던 애굽 땅의 풍속을 따르지 말며,” “내가 너희를 인도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도 행하지 말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변의 믿지 않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은 결코 우리가 따라갈 삶의 방식이 될 수 없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제 아무리 이 세상의 행복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갈지라도 우리는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합니다. 주변 사람들이 제 아무리 힘과 재물과 명성을 따라 살아간다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 인생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주변 사람들이 제 아무리 자신의 유익만을 위해 살아간다 할지라도 우리는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을 돌아보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야 합니다. 비록 우리 모두의 마음에는 모방심리가 작용하고, 우리의 머리 안에는 거울신경세포가 있어서 우리 마음의 모방심리를 자극하겠지만 그렇다고 우리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들의 삶을 따라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외길 인생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애굽의 문화도, 가나안의 풍속도 따르지 말라고 분명히 명령하셨습니다. 그 대신 그들이 따라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 분명히 보여주십니다. 오늘 본문 4절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너희는 내 법도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그대로 행하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하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 법도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그대로 행하라이것이 목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의 문화를 배척하고 모두 벗어버리라고 명령하신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른 민족은 나름대로의 문화와 풍속을 창조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만큼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식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4절 말씀을 다시 보세요.

 

너희는 내 법도를 따르며 내 규레를 지켜 그대로 행하라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애굽이 가지고 있던 문화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습니다. 가나안의 문화는 당시 유행을 주도하는 화려한 문화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은 눈에 보이는 화려함이나 눈에 보이는 웅장함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하나님의 율법과 하나님의 규례를 따라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고,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의 문화를 따르지 말고 하나님 말씀에 입각한 삶을 살아가라고 명령하신다면,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의 표현대로 우리는 세상 풍조를 따르며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라 다니던 사람이었습니다(2:2). 우리는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2:3). 그때에 우리는 이방인이었고,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언약에 대해서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던 사람이었습니다(2:11-12). 그러나 긍휼이 풍성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크신 사랑으로 인하여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주셨습니다(2:4-5).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 곧 하나님의 아들과 딸 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사람이 하나님과 상관 없이 자신의 소견에 옳은대로 살아갈지라도, 우리 그리스도인만큼은 세상의 모든 문화와 풍속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대로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보여주신 삶의 방식을 따라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12:1)

 

로마서 12장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12:2)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따라가야 하는 외길인생입니다.

 

 

생명의 길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애굽의 문화를 따르지 말고, 가나안의 풍속도 본받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계명과 규례를 지켜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시죠. 그리고 하나님은 이와 같은 명령에 한 가지 약속을 첨가하십니다. 오늘 본문 5절입니다.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어떻게 됩니까?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세상의 문화와 세상의 풍속을 따르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삶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외길 인생만이 우리에게 생명의 길이요 행복의 길이라는 말씀입니다. 당시 세계를 지배하였던 애굽의 문화가 대단해 보이지만, 가나안의 풍속이 대단히 화려보이지만 그것이 우리 인생을 행복으로 인도할 수는 없습니다. 세상의 문화와 풍속을 뒤로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외길인생을 살아갈 때 비로서 참된 생명의 길과 행복의 길은 우리를 찾아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구절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약속, 곧 하나님의 법도와 하나님의 규례를 행하면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살게되라는 약속을 가만히 묵상해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겪었던 광야 40년의 세월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가능하더라고요.

 

여러분도 아시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나온 후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 그 사이에 40년 동안 광야에서 생활했습니다. 물론, 그들이 광야에서 생활해야 했던 이유는 가데스 바네아에서 그들이 행한 범죄, 그들이 저지른 반역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생각해보면, 특별히 오늘 본문 마지막 절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준으로 생각해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40년을 생활한 것은 그들이 떠나온 애굽의 문화를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율법대로 살아가는 삶을 훈련하는 시간이었어요.

 

이스라엘 백성은 430년 동안 애굽에서 살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애굽의 문화가 너무도 익숙합니다. 오늘 말씀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살 수 있는 길, 곧 생명과 행복의 외길을 걸어가려면 먼저 430년 동안 익숙해진 애굽에서의 삶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이를 위해 광야만큼 좋은 장소가 또 있었을까요?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40년의 세월을 보내며 지금까지 익숙하게 살아왔던 애굽의 문화를 비로소 벗어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울러,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나와 바로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애굽에서 나와 홍해를 건너는 경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지금까지 익숙했던 애굽과의 단절을 의미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내산에서 언약을 채결한 후 이스라엘 백성이 곧바로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면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법도와 하나님의 규례를 따르는 삶이 익숙해지기도 전에 가나안의 문화에 익숙해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 40년 동안 광야에서 생활을 하였기에 가나안의 화려한 문화에 물들기 전에 하나님의 법도와 하나님의 규례를 따라가는 삶의 방식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40년의 세월을 보낸 것은 그들로 하여금 애굽의 모든 문화를 벗어버리고 가나안의 풍속에도 물들지 않고, 그 대신 하나님의 법도와 하나님의 규례를 실천하여 결국 행복과 생명의 길에 들어서기를 간절히 원하셨던 하나님의 섭리였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 광야와 같은 인생길을 걸어가고 계신분이 계십니까? 내 곁의 누군가는 크고 웅장하여 사람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 애굽의 길을 걸어가는데, 왜 나는 초라한 광야 길을 걸어가야 하는지 가슴 답답해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내 곁의 누군가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가나안의 길을 걸어가는데, 왜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외로운 광야길을 걸어가야 하는지 마음 아파하시는 분은 안 계십니까? 지금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으로서 걷는 그 외길 인생이 지금 당장은 힘들고 괴롭더라도, 광야길을 통하여 세상의 모든 풍속과 문화를 멀리하고 하나님의 법도와 하나님의 계명을 따르는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보십시오. 비록 지금 내가 걷는 광야 길이 척박하고 메마를지라도, 그로 말미암아 세상의 풍속과 문화를 벗어버리며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외길인생을 걸어갈 수만 있다면 여러분이 지금 걷는 바로 그 길이 행복의 길이요, 생명의 길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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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