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2020. 3. 24.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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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화가 알브레쉬트 뒬러(Albrecht Durer)가 그린 <기도하는 손>(praying hands)이라는 작품을 여러분들도 한번쯤은 다 보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그림의 유례와 관련하여 전해져 내려오는 하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뒬러의 가정은 모두 열 여덟명의 자녀들이 있었는데 아버지는 광부로서 열심히 일했지만 18명의 자녀들을 풍족하게 양육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18명의 자녀들 가운데 두 명의 아들이 어린 시절부터 미술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습니다. 그 두 아들 가운데 형의 이름은 알버트(Albert)였고, 동생의 이름이 알브레쉬트였습니다. 이 두 명의 형제는 자신들의 재능을 살려 미술을 전공하고 싶었지만 그들의 가정 형편은 그것을 허락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결국 두 형제는 깊은 고민 끝에 하나의 결론에 도달합니다. 먼저 한 사람이 미술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다른 사람은 아버지와 함께 광산에서 일을 하며 경제적으로 돕자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한 사람이 미술 공부를 마치면 그 다음에는 순서를 바꾸어 다른 사람도 미술을 공부할 수 있도록 서로 돕기로 계획을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리하여 동생이었던 알브레쉬트는 미술 학교에 입학하였고 동생의 공부를 뒷받침하기 위해 형 알버트는 광산에서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그렇게 약 4년 정도가 흐른 뒤 드디어 동생 알브레쉬트 뒬러는 점차 독일 전역에서 명성을 날리는 화가가 되었습니다. 자, 이제 알브레쉬트는 고향에 돌아와 형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이제는 형이 미술 학교에 입학하여 공부를 할 차례라고 내가 최대한 형을 뒷바라지해 주겠다고 이야기하자, 형 알버트는 지금까지 숨겨두었던 자신의 손을 내어 놓으며 말합니다. ‘아니야, 나는 너무 늦어버렸구나. 나의 손은 이미 너무도 상하여 지금 너를 위한 축배도 잘 들 수가 없단다.’ 그러면서 형 알버트 뒬러는 광산에서 일하며 이미 다 상해버린 자신의 두 손을 모아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저의 손은 이미 다 망가졌습니다. 저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아버지, 저의 동생만큼은 저를 대신하여 위대한 화가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 장면을 결코 잊을 수 없었던 동생 알브레쉬트 뒬러는 뼈 마디마디마다 상해버린 형의 손을 그리기 시작했고 바로 그것이 약 5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수많은 이들의 마음에 기도의 영감을 불어넣는 위대한 작품 <기도하는 손>이 되었던 것입니다. 

훗날 동생 알브레쉬트 뒬러는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기도하는 손은 가장 깨끗하고
기도하는 손은 가장 아름답다. 
기도하는 자리야말로 가장 위대한 자리요 
기도하는 자리야말로 가장 고귀한 자리다. 


밤중에 찾아온 친구

하루는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시작하십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하나의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른바 ‘밤중에 찾아온 친구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에는 어느 날 밤 예상치 못한 곤경에 처하게 되었던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 6절입니다. 

내 벗이 여행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그런데 이 지점에서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가 본문에 등장하는 비유를 보다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알아 두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 유대인들은 자신을 방문한 친구를 대접하는 일을 자신의 체면과 연관시켜 생각했다는 사실입니다. 친구관계라면 마땅히, 제 아무리 늦은 밤시간이라 하더라도 도움을 구하며 방문한 친구를 극진히 대접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시되던 시대였습니다. 개인주의가 가득한 오늘날의 시대와는 너무나도 이질적인 문화적 배경이지요. 그래서 예수님 시대 팔레스타인에서는 긴 여행 중에 하룻밤 머물 곳이 필요했던 사람들은 당당하게 친구의 집에 찾아가기도 하였고, 친구의 방문을 받은 사람은 어떠한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그를 극진히 대접했습니다. 그리고 만일 친구를 대접해야 할 의무를 소홀히 여기나면 자신의 체면이 깎인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 다급한 마음에 친구를 찾아온 사람을 빈손으로 돌려보낼 수 있는가? 이러한 생각이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 두루 퍼져있던 공감대였습니다. 

자, 이러한 배경지식을 가지고 오늘 본문 6절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내 벗이 여행중에 내게 왔으나” 이제 친구가 찾아왔으니 이제 그 친구를 맞이하여 극진히 대접할 책임이 주어졌습니다. 지금은 한 밤 중입니다. 밤늦은 시간까지 여행을 했으니 그 친구는 분명 제대로 먹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6절을 계속해서 보십시오. “내 벗이 여행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하는 그 남자는 이미 저녁식사를 끝냈을 것입니다. 이미 가장으로서 식구들에게 음식을 다 먹이고, 그날 자신에게 주어진 책무를 모두 마쳤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는 온 가족이 평안하게 잠자리에 누워 하루를 여유롭게 마무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겠죠. 그런데 도대체 왜 나에게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느닷없이 찾아온 친구로 말미암아 그 남자에게는 또다시 감당해야 하는 책임이 주워졌고 이제 평안할 것으로 기대했던 그날의 밤시간은 뒤죽박죽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남자는 그 깊은 밤 시간에 음식을 구하기 위해 온 마을을 돌아다니며 발을 동동 굴러야 했던 것이지요. 

그러고 보면 우리가 당하는 많은 어려움과 괴로움은 오늘 비유에 등장하는 이 남자와 같이 예상치 못했던 시간, 예상치 못했던 방식으로 느닷없이 우리에게 닥쳐오는 경우가 너무도 많지 않은가요? 물론, 우리가 실수를 하고 우리가 잘못된 선택을 하여 곤란을 당하는 경우도 있지요. 그러나 나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이정도면 이제 좀 쉴 수 있을 거라고, 이정도 열심히 일했으면 이제는 나에게 보상이 올 거라고, 이렇게 조금만 더 달리다 보면 곧 목표했던 바를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이제 목표했던 지점이 거의 눈 앞에 다가온 것처럼 보이는 그때 느닷없이 찾아온 재난, 느닷없이 찾아온 질병, 느닷없이 찾아온 실직, 느닷없이 찾아온 사고, 느닷없이 찾아온 밤손님으로 말미암아 또 다시 발을 동동 굴리며 괴로움을 겪는 것이 우리의 삶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비유에는 한 남자를 밤 늦게 찾아와 그의 평안한 저녁을 망쳐버린 친구도 등장하지만, 그에게 있었던 또 한 사람의 친구 – 곧 그가 그 곤궁한 상황에서도 언제든지 찾아갈 수 있는 – 또 한 사람의 친구가 곁에 있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5절 말씀을 보십시오.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너희에게 누가 있다고요? ‘벗이 있어요’, ‘친구가 있습니다!’ 말씀 드렸잖아요. 예수님 시대 친구란 다급한 처지에 처해있을 때 나에게 달려와 팔을 걷어붙이고 도와주는 사람이었어요. 

5절을 계속해서 보십시오.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꾸어 달라”말한다면, 7절을 계속보십시오. “그 친구가 집 안에서 대답하기를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그 다음 단어가 핵심입니다. “그렇게 말하겠느냐?”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너무도 뻔합니다. “아니요.” 이 세상에 인간의 탈을 쓰고 친구가 다급한 마음으로 찾아와서 도움을 구하는데 밤늦게 좀 왔다는 거, 잠자리에서 일어나야 한다는 것, 잠궈두었던 문을 열어야 한다는 것, 식구들이 좀 깬다는 것, 그런 사소한 이유로 친구의 요청을 거절할 친구가 도대체 누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그 시대에 명확한 대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에 느닷없이 찾아온 재앙이 있으십니까? 여러분의 삶에 느닷없이 찾아오는 좌절과 아픔이 있으시나요? 여러분의 삶에 느닷없이 찾아와 밤늦은 시간에 발을 동동거리게 만드는 삶의 문제가 있으십니까? 바로 그 순간, 여러분 곁에 좋은 친구가 있다는 사실 – 그분은 여러분의 요청을 외면하지 않으시며, 그분은 사소한 번거러움을 조금도 개의치 않으시고, 그분은 제 아무리 늦은 밤이라도 여러분의 요청을 즉각적으로 응답하여 주신다는 사실 – 곧, 여러분 곁에는 가장 좋은 친구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다는 이 한가지 사실을 반드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간청함을 인하여

예수님은 ‘밤늦게 찾아온 친구의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좋은 친구가 계시다는 것, 그리하여 우리는 언제든 주님께 나아가 기도할 수 있다는 교훈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를 잘못 해석하는 경우를 종종 발견합니다. 문제가 되는 표현은 바로 8절에 등장합니다. 우리 8절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죠. “비록 벗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이 말씀은 당시의 문화에서는 말도 안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벗됨으로 인하여 일어나 주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그러므로 예수님의 의도는 이것입니다. 설령, 당연히 친구이기에 일어나 줄 것이지만, 설령 친구라는 이유로 일어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다음에 무엇이라고 말씀하시죠?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주리라” 그런데 이 구절을 너무도 많은 분들이 잘못 해석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여기에 등장하는 ‘간청함’이라는 단어는 한글 번역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어요. 헬라어로 ‘아나이데이아’라는 단어인데, 성서학자들 사이에서도 이 단어를 어떻게 번역해야 할 지 논쟁이 참 많습니다. 자, 복잡한 문법적인 설명은 다 뒤로하고 최근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하는 바에 따른 결론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8절에 등장하는 ‘그 간청함’이라는 말의 뜻은 밤늦게 친구를 찾아와 지속적으로 간청하며 떼를 쓰는 그 행위 때문에 요구를 들어준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나의 요구사항을 얻어내기 위해 떼를 쓰는 기도를 하라고 이 본문을 이해하면 잘못된 해석입니다. 8절에 등장하는 ‘그 간청함’이라는 말의 의미는 그가 밤늦은 시간에 친구를 찾아와 간청할 수밖에 없는 그의 다급한 상황, 곧 그의 간절한 처지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의도는 느닷없이 찾아온 불청객으로 말미암아 한밤중에 발을 동동거릴 수밖에 없는 그의 딱한 처지를 보아서라도 그 밤에 일어나 음식을 내어주지 않겠느냐는 말씀인 것이죠. 그러므로 오늘 본문 8절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하나님은 우리의 좋은 친구가 되어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여주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처지와 형편도 다 보고계시며 우리의 딱한 현실을 불쌍히 여겨 주시는 긍휼의 하나님이라는 교훈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의 말씀을 마치신 후 이 비유의 적용점으로 너무나도 중요한 세가지 명령을 주십니다. 9절입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그러므로 여러분, 주저하지 마십시오. 그저 당당하게 우리의 좋은 친구되시는 그분 앞에 나아가십시오. 
우리의 손에 나를 찾아온 손님에게 먹일 양식이 없어도, 우리에게는 좋은 친구가 되어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처지와 형편을 아시는 긍휼이 풍성한 하나님이 계시니 그분께 나아가 구하십시오. 
도대체 어디에 하나님의 뜻이 있는지 알 수 없고, 도대체 어디로 가야 나의 인생길이 기쁨과 행복의 길이 될 수 있을지 알지 못하여도, 우리에게는 좋은 친구가 되시는 주님이 계시니 그 주님께 나아가 하나님의 뜻을 찾으십시오. 
때로는 우리 인생의 문이 모두 굳게 닫혀 도저히 열리지 않을 것처럼 보일 지라도. 이곳 저곳을 아무리 찾아보아도 우리에게는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도 없고 문을 밀어낼 힘도 없으니 좌절하고 포기해버리고 싶을 때가 있을 지라도, 여러분 곁에는 여전히 여러분의 처지와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시는 긍휼의 하나님이 계시니 주님께 나아가 인생의 문을 두드리십시오. 

우리 주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10절)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예수님께서 이정도만 말씀하셔도 기도에 대해 충분히 가르쳐주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로 하여금 더욱 간절히 기도할 수 있도록 기도에 대한 하나의 비유를 더 말씀해 주십니다. 친구의 비유에 덧붙여 이번에는 아버지의 비유를 들어 주십니다. 

오늘 본문 11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네, 여기에 아버지가 등장하네요. 11절 말씀을 계속보십시오.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이번에는 문화적인 배경과 상관 없이 여러분도 그 대답을 쉽게 아시겠죠?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무엇입니까? ‘예수님, 무슨 말씀이십니까?어느 아버지가 생선을 달라는 아들에게 뱀을 주겠습니까? 아들이 생선을 달라하면, 아버지는 당연히 생선을 줄뿐만 아니라 구하지 않은 돼지 고기도 구워주고, 소고기도 구워주는 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이렇게 질문하십니다. 12절입니다.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여러분은 예수님의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예수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알을 달라는 아들에게, 곧 계란을 달라는 아들에게 전갈을 주는 아버지는 아무도 없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계란을 달라고 하면 당연히 계란도 주고 그 계란을 낳은 닭까지도 잡아서 주고 싶은 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아버지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의 하늘 아버지는 우리의 요구대로 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요구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을 소개해주고 계십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기도에 대한 교훈을 이렇게 마무리하십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13절)

그러므로 성도여러분, 우리 곁에는 언제나 놓은 친구가 되시는 주님이 계신 것이요, 우리의 좋은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설교를 시작하며 소개하였던 알브레쉬트 뒬러의 <기도하는 손>(praying hands)을 다시 한번 보시겠습니까? 우리가 보고 있는 저 손의 주인공 형 알버트 뒬러는 동생을 위하여 자신의 꿈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광산에서 일을 하면 할수록 자신의 손 마디 마디는 어그러지고 망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형 알버트 뒬러는 자신의 망가지는 손을 바라보며 더욱 간절히 동생 알브레쉬트를 위해 기도하였겠지요. ‘하나님, 저의 손은 점점 상하여 이제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아버지, 저의 동생만큼은 저를 대신하여 위대한 화가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알버트가 간절히 기도할 때 그의 좋은 친구 되시는 우리 주님께서는 다 듣고 계셨습니다. 알버트가 간절히 기도할 대 그의 하늘 아버지가 되시는 우리 하나님께서는 다 듣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형 알버트가 기도하는 것처럼 그의 동생을 위대한 화가로 만들어 주셨지요. 그러나 형 알버트의 좋은 친구이며 그의 좋은 아버지가 되셨던 우리 하나님은 결코 그 정도 응답으로 만족하실 수가 없으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알버트 뒬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그가 기도하는 대로 동생을 위대한 화가로 만들어주신 것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좋은 것을 알버트에게 주십니다. 곧, 알버트의 두 손이 멋진 그림을 그리지는 못할지라도 그 대신 그의 기도하는 두 손을 화폭에 담아 약 5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수많은 이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위대한 작품이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두 손은 지금 어떠한 모습이십니까? 지금 여러분의 손이 어떠한 모습이든 상관 없이 알버트의 손과 같이 여러분의 두 손을 기도하는 손으로 바꾸지 않으시겠습니까? 알버트의 손과 같이 여러분의 두 손을 모아 우리의 좋은 친구가 되시는 주님께 기도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알버트의 손과 같이 여러분의 두 손을 모아 우리의 좋은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지금 우리의 손이 어떠한 모습이든 상관 없이 우리가 두 손을 모아 하나님께 기도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손을 거룩한 기도의 손을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두 손을 모아 하나님께 기도한다면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기도하는 우리의 손을 통하여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서도,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여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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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누가복음 강해2019. 7. 29.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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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바쁘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모두가 바쁜 일상을 살아갑니다. 무엇이 그리도 바쁜지 가보고 싶은 곳을 가지도 못하고, 만나고 싶은 사람을 찾아가지도 못합니다. 심지어 현대인들은 바쁘다는 것을 자신이 능력이 있고 성실하다는 증거로 제시하기도 하지요. 그래서 ‘아무게는 무척 바쁜 사람이다’라고 이야기하면 그 사람은 능력이 있고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문제는 하루의 일과가 그렇게 바쁘게 흘러가다 보니 어느새 우리의 마음도 분주해졌다는 사실입니다. 

잠언 14장 29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여도
마음이 조급한 자[분주한 자]는 어리석음을 나타내느니라

우리의 삶이 바빠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살아가는 것까지는 좋습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의 마음까지도 분주하여, 우리의 마음까지도 조급해진다면 우리는 어리석은 판단과 어리석은 행동을 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지난 한 주간 여러분의 삶이 제 아무리 치열하였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할 때 여러분에게 조급한 마음이나 분주한 마음이 다 사라지고 그 대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마음의 평강, 마음의 평안이 가득하시기를 바랍니다.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님께서 하루는 마르다가 살고 있던 마을에 들어가셨고 마르다는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영접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였던 마르다의 마음은 매우 순수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마을에 오셨을 때 식사 한끼라도 대접하고 싶은 마음, 주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의 마음이 곧 마르다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우리가 마르다의 입장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기억해야 할 한 가지 사실을 지적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마르다가 오늘 본문에서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 사람들은 대략 몇 명이나 되었을까요? 마르다는 예수님 한 사람만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본문 38절이 어떻게 시작합니까? “그들이 길 갈 때에” 여기에 등장하는 그들은 예수님을 비롯하여 제자들까지 포함하는 사람들이었겠지요. 그러면 대략 몇 명이나 되었을까요?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열 두 명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최소한 예수님을 포함한 남성 열세명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38절에 등장하는 “그들”의 숫자를 그저 열 셋 정도로 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누가복음 10장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두 명씩 나누어 여러 마을에서 복음을 전하게 하시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누가복음 10장에서 예수님께서 파송하신 제자들은 열 두 명이 아니라 칠십 명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칠십인 전도대를 두 명씩 파송하였고 그들이 돌아온 이후 마르다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누가복음 10장의 흐름입니다. 그러니 지금 마르다의 집에 들어간 성인 남성의 수는 최소한 열 세 명이요 많게는 약 칠십명에 이릅니다. 자, 그러면 이제 주부 여러분 한번 대답해 보시겠습니까? 성인 남성 칠십명이 지금 당장 여러분의 집에 방문하였고 여러분이 그들에게 식사 한끼를 대접해야 한다면 여러분 가운데 마음이 조급하거자 분주해지지 않으실 분이 과연 몇 분이나 계실까요? 

그래서 오늘 본문 40절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그럼요, 그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집을 방문했으니 당연히 준비하는 일이 많을 수 밖에요.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40절을 계속 보십시오. 해야 할 일이 많아 그녀의 마음이 “분주한지라” 마르다가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 것은 순수한 사랑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랑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일이 많아 그만 그녀의 마음이 분주해졌습니다. 이제 조급해진 마음에 주변 사람들을 공격하기에 이릅니다. 오늘 본문 40절 말씀을 다시 한번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마르다는 그 마음이 분주해지기 시작하자, 먼저 자신의 동생 마리아를 향한 불평합니다. 마르다 자신은 수십명의 식사를 갑자기 준비하느라 너무 바쁜데 자기 동생 마리아는 한가하게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자신을 돕지 않는 동생을 향해 분노를 터트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40절에 등장하는 마르다의 이야기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녀는 지금 동생에게만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40절에 마르다가 하는 이야기를 다시 보십시오.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고 있는데, 그 다음이 무엇입니까? 왜 주님께서는 그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에게 명령하여 나를 도와 주라 말씀하셔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마르다가 이렇게 말하는 것으 보면 그는 지금 누구에게 화가 났습니까? 물론, 동생 마리아에게도 화가 났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 예수님께 화를 내고 있어요. 

예수님이 너무도 좋아서 그 주님을 자신의 집으로 모셨는데, 정작 마음이 분주해지자 자신의 가장 가까운 동생에게 불평을 늘어놓고, 나아가 자신이 초대한 예수님을 향해 분노를 터트리는 마르다의 모습을 생각해보십시오. 그 안에서 우리의 모습이 보이지는 않으시나요? 
처음에는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스스로 선택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식구들을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하였고 많은 것을 헌신하였습니다. 그런데 점차 시간이 흐르며 매일의 바쁜 일과가 늘 지속되는 일상이 되자 어느덧 나의 마음까지도 분주해져 자신의 진심과 자신의 노력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가족들에게 오히려 분노의 화살을 날리는 우리의 모습이 보이지는 않으십니까? 
처음에는 나의 직장과 나의 일터가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였고 그 안에서 보람도 느꼈습니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흐르자 매일의 바쁜 일과는 반복되는 일상이 되었고 어느덧 나의 마음까지도 분주해져서 나의 모든 수고와 열심이 충분히 인정받고 보상받지 못한다 여기며 오히려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우리의 모습이 보이지는 않으십니까? 
나 같은 죄인이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주체할 수 없는 감격을 느꼈고 그러한 내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봉사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한 감사의 이유가 되었건만, 점차 교회에서 감당해야 하는 봉사의 종류와 양이 늘어나면서 어느덧 나의 마음까지도 분주하여 교회에서 만나는 주변 성도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고 나아가 예수님을 향해서도 불평과 불만을 쏟아놓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 보이지는 않으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이 분주해지는 순간, 여러분의 마음이 조급해지는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을 향한 사랑도, 내 곁에 있는 이웃을 향한 배려도 모두 사라지고 맙니다.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르다는 자신의 마음이 분주해지자 먼저 동생 마리아를 향해 불평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도 공격적인 언어를 사용하지요. 그런데 여러분, 마르다의 마음이 분주했던 그때 마르다의 초대를 받아 그곳에 계셨던 예수님의 마음에는 여전히 여유가 넘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르다의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시며 그녀의 마음에 분주함이 사라지고 다시금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위한 배려의 마음이 일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시지요. 

본문 41절을 보십시오. 주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십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예수님께서 마르다의 이름을 따뜻하게 두 번 불러주시네요. “마르다야 마르다야” 그리고 그녀의 마음을 정확하게 이해하여 주십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고 있구나.’ ‘마르다야 너가 일이 많아서 걱정도 되고 참 힘들겠구나.’ 그렇게 마르다의 입장을 이해해 주신 뒤 이제 그녀의 마음이 가벼워질 수 있도록 처방을 내려 주십니다. 42절입니다.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예수님의 해법이 무엇입니까? 지금 수십명의 장정들을 먹이는데 잔칫상 차리지 않아도 되니 그저 몇 가지 – 김치에 된장국 – 이면 족하고, 그것도 준비하기에 힘들면 그저 한 가지 – 컵라면에 뜨거운 물만 – 부어주어도 충분하다, 이것이 예수님의 처방입니다. 

사람들은 일을 하다 보면 조금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요. 예수님께서 여러 가정을 방문하셨지만 마르다의 집에 가셨을 때 최고의 식사를 대접받으셨다는 이런 이야기가 마르다는 듣고 싶은 거에요. 그런데 여러분, 이러한 평가나 이러한 관심은 예수님의 평가나 예수님의 관심과 다르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시잖아요. ‘마르다야 음식 종류를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충분하다.’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고는 설마 여러 마을과 여러 가정을 돌아다니면서 어느 가정은 해산물로 전골을 내어 왔고, 어느 가정은 일등급 고기로 구이를 내어 왔고, 어느 가정은 식재료는 평범했지만 음식 솜씨가 뛰어나서 간이 내입에 딱 맞았다고 그렇게 평가하며 다니실까요? 수십명의 장정들을 먹이기에는 지금 준비된 것이 없어 마르다가 그저 컵라면에 뜨거운 물만 부어서 드린다고 예수님께서 무슨 식사 대접을 이렇게 하냐고 지적하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랑의 실천이 어떠한 것인지 무엇인지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합니다. 최고의 음식으로 대접하고 싶은 것이 비록 마르다의 마음이었지만 그렇게 욕심을 부리다 그만 마음까지 분주하여 주변 사람들에게 불평을 발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쏳아낸다면 예수님은 그러한 섬김과 봉사를 기쁘게 여기지 않으십니다. 비록 적은 것이라도, 아니 딱 하나라도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실천한다면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여러분의 섬김과 봉사를 기쁘게 받아 주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마음이 분주해지지 않을 정도로 일을 줄이십시오. 우리의 손과 발은 열심히 움직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손과 발을 넘어서서 우리의 마음까지도 분주해지는 지점에 이르렀다면, 그리하여 주변 사람들에게 짜증을 내고 불평을 쏟아내어 오히려 사람들에게 불편을 끼친다면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 하더라도 충분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여러분의 일을 줄이십시오. 그리하여 단 한 가지 봉사만을 하더라도 여러분의 마음에 기쁨이 넘치고 여유가 가득할 때 우리 주님께서 여러분의 섬김과 봉사를 기쁘게 받아 주시는 것입니다. 


좋은 것을 택하라

예수님은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 마르다에게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 하더라도 충분하다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제 매우 중요한 권면을 마르다에게 주십니다. 42절 뒷부분입니다.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많은 사람들은 이 구절을 예수님께서 마리아는 칭찬하시고, 반면에 마르다는 꾸짖는 말씀으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을 마르다에 대한 책망이나 꾸짖음으로 이해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이 구절은 마르다를 위한 예수님의 권면입니다. ‘너도, 마르다 너도 좋은 것은 선택하여 그것을 빼앗기지 않았으면 좋겠구나.’라는 권면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 좋은 것을 선택하라’는 권면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좋은 편”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 39절에 그 대답이 등장합니다. 우리 조금 위로 올라가서 39절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예수님 당시 팔레스타인에서는 랍비가 제자들을 가르치는 장면을 묘사할 때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는다’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좋은 편’이라는 구절의 일차적인 의미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지만, 보다 깊은 의미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예수님과의 일대일의 관계에서 그분 교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마르다야, 너도 나와의 일대일로 대화하고 교제하는 이 좋은 기회를 잃어버리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마르다는 지금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초대하였잖아요.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모셨으니 예수님과 함께 식탁을 나누고, 예수님과 차도 마시며 그 주님과 깊이 교제할 수 있는 황금 같은 기회를 가졌잖아요. 그러면 그 기회를 놓치지 말고 누리라는 예수님의 권면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함께 읽은 39절의 모습을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가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꼭 기억해야 할 사실이 하나있습니다. 당시 문화에서는 39절의 장면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마리아가 여성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시대, 랍비나 율법교사들은 결코 여성을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여성에게 말씀을 가르친다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했거든요. 그러니 마리아라는 여성이 예수님이라는 스승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그 시대에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본문 39절이 묘사하듯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주님의 말씀을 듣는 이 장면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 하나의 전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당시의 문화적 관습을 깨고 여성을 자신의 제자로 삼아 그 여성에게 조근 조근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고 보니 예수님께서 마르다의 초대를 받아 그녀의 집에 들어가신 이유와 목적은 그저 식사 한끼를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르다의 집에 들어가신 진짜 이유는 예수님을 사랑하여 자신의 가정으로 초대한 여성 마르다와 그녀의 여동생 마리아에게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그분의 발치에 앉아 주님의 말씀을 들으며 주님과 깊은 교제를 나눌 수 있는 특권 중의 특권을 나누어 주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귀한 선물을 가지고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을 방문하였는데 정작 예수님을 초대한 마르다는 그 선물을 누리지 못하고 있으니, 예수님은 그 장면을 안타깝게 느끼며 음식 준비는 벌써 충분하다고, 이제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그 갚진 선물을 받아 누리라고 권면하셨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과연 무엇 때문에 여러분의 마음은 그리도 분주하십니까? 과연 무엇 때문에 여러분의 마음은 그리도 분주하여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계십니까? 과연 무엇 때문에 여러분의 마음은 그리도 분주하여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도 모자라 지금도 여러분의 가정을 찾아가시며, 지금도 여러분의 직장을 찾아가시고, 지금도 여러분의 삶의 자리를 찾아가시는 그 주님을 외면하고 계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분주한 마음을 잠시라도 내려 놓으십시오. 필요하다면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충분하다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믿고 여러분이 지금 하시는 그 일을 잠시라도 멈추십시오. 그리고 지금도 여러분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계 3:20)

아직 부족한 것이 많고 아직 준비해야 할 것이 많아 보여도 이제는 여러분의 분주한 마음을 내려놓고 주님께서 주시는 특권 중의 특권, 곧 주님을 여러분의 마음과 여러분의 가정과 여러분의 일터로 모셔 그분과 깊이 교제하는 특권을 누리십시오. 그리하여 우리 주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들어오시면 여러분의 마음은 곧 천국으로 변하는 것이요, 우리 주님께서 여러분의 가정에 임재하시면 여러분의 가정이 곧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되는 것이요, 우리 주님을 여러분이 계신 삶의 자리로 모셔들이기만 한다면 바로 그곳이 천국의 잔치가 벌어지는 천국의 식탁이 된다는 사실을 이제는 여러분의 삶으로 체험하십시오, 이제는 여러분의 삶 속에서 누리십시오.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우리 주님의 이 약속의 말씀이 여러분 모두의 삶 가운데 가득히 실현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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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누가복음 강해2019. 7. 12.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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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했던 시간도 조금씩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셨는지 열 두 명의 제자들을 여러 마을로 보내셔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고 병자를 치유하게 하십니다. 곧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행하였던 사역을 제자들도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여러 마을에서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께 돌아왔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의 전도와 그들의 치유 사역을 경험했던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소문을 들었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몰려듭니다. 그렇게 남자만 약 오천 명이 되는 대단히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 상태에서 또 다시 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습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자, 이제 날이 저물어가자 제자들에게 걱정이 찾아옵니다. 곧, 저녁 식사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의 문제였습니다. 예수님과 열두명의 제자들만 있다면 그것 역시 작은 수는 아니었지만 그럭저럭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앞에는 지금 큰 무리가 몰려와 있습니다. 제자들은 자신을 따라온 이 사람들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것에 대해 너무도 큰 부담을 느끼며 예수님께 이렇게 제안합니다. 오늘 본문 12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날이 저물어 가매 열두 사도가 나아와 여짜오되
무리를 보내어 두루 마을과 촌으로 가서
유하며 먹을 것을 먹게 하소서 
우리가 있는 여기는 빈 들이니이다

제자들의 이야기는 무리들로 하여금 마을과 촌으로 내려가서 각자가 저녁식사를 해결하도록 하자는 제안이었습니다. 조금 냉정하게 평가한다면, 이들의 제안은 책임을 피하자는 뜻입니다. 무리들을 데리고 있으면 그들의 필요를 채우고 그들의 안전을 보장해야 할 책임이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흩으면 개인의 안전과 필요는 각자의 책임이 됩니다. 그러니 일단 제자들은 그 막중한 책임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함께 읽은 12절에서 제자들을 ‘제자’라고 부르지 않고 ‘사도’로 부르는 것이 특이합니다. 본문 12절이 어떻게 시작합니까? ‘날이 저물어 가매 열두 사도가 나아와 말하였다’고 되어 있잖아요. 우리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후 오순절에 성령께서 임재하신 뒤에 제자들이 사도로서의 사명을 멋지게 감당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특이하게도 아직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며 예수님으로부터 교육을 받고 있는 제자들을 벌써부터 ‘사도’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단지 배우는 학생이나 제자가 아니라 사도로서, 성도들을 돌보고 교회를 책임지는 사도로서 그들은 자신들을 찾아온 무리들에게 책임을 다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 곧 사도들은 무리를 흩어 자신들의 책임을 벗어 버리자고 제안하였던 것입니다. 

열 두 사도들의 이야기를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너무도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예수님의 말씀은 너무도 단호합니다. 군더더기가 없습니다. 책임을 회피하려 했던 제자들의 마음을 정확히 집어 내십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예수님의 단호한 말씀을 듣는 순간 열 두 명의 제자들, 아니 열 두 명의 사도들은 그 마음이 무너져 내리고 말지요. 사도라는 이름은 가졌지만, 예수님의 보내심을 받고 여러 마을을 다니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고 병자를 고치기도 하였지만 남자만 약 오천 명이 되는 사람들을 먹인다는 것은 자신들의 능력을 넘어서는 사명이요, 자신들의 한계를 월등히 뛰어넘는 예수님의 터무니 없는 요구사항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열 두 명의 사도들은 변명이라도 하기 위해 예수님께 이렇게 말하지요. 13절을 계속 보십시오. “우리에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으니 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먹을 것을 사지 아니하고서는” 그 다음이 핵심이지요. “할 수 없사옵나이다” 예수님의 명령, 곧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말씀에 사도라는 이름을 가진 제자들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할 수 없사옵나이다” 

오늘 본문을 여러 가지로 묵상을 하면서 저는 13절에 등장하는 제자들의 모습, 아니 사도들의 모습이 오늘날 이 땅의 교회와 저를 비롯한 목회자들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땅의 교회는 예수님의 몸 된 교회라는 영광스러운 이름은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은 그에 따르는 사명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곧, 이 세상에 여전히 몸과 마음과 영혼의 아픔으로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찾아가고, 이 세상에 여전히 참된 쉼과 참된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을 찾아가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사명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땅에 있는 교회는 그 위대한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힘도 능력도 위상도 모두 잃어버린 것이 현실이 아닌가요? 그리하여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말씀하시는 주님의 명령 앞에 이 땅의 교회는 “할 수 없사옵나이다” 울부짖을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은 아닙니까? 

저를 비롯한 이 땅의 모든 목회자들도 동일하게 부르짖으며 탄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열 두 명의 제자들에게 사도라는 위대한 이름이 주어진 것처럼, 우리 목회자들에게도 ‘목사’라는 영광스러운 칭호가 주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칭호에는 반드시 사명이 뒤따르는데 성도들을 말씀으로 먹이며 보다 성숙한 신앙인으로 양육할 책임과 사명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에 목사라는 이름을 가진 수많은 이들의 탈선적인 행태는 단지 그들만이 아니라 저를 비롯한 우리 시대의 모든 목회자들이 우리의 내면 안에 성도들을 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는 영성과 역량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우리 목회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명령하시지만 우리는 주님께 “할 수 없사옵나이다”라고 울부짖을 수밖에 없습니다. 

구역장, 교회학교 교사, 일대일지도자 등과 같은 이름들을 가졌기에 교회에서 다른 이들을 돌보아야 하는 사명을 받으신 분들. 가정에서 부모라고 하는 가장 아름다우면서도 동시에 무한한 책임을 져야하는 그 이름을 가지신 분들. 직장에서 상관, 경영자, 혹은 책임자라는 이름을 가졌기에 조직이 요구하는 막중한 책임을 감당해야 하는 모든 분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정직하게 바라볼 수만 있다면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명령하시는 주님의 말씀 앞에 우리는 우리의 두 손이 텅 비어 있는 것을 바라보며 “할 수 없사옵나이다”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뼈아픈 현실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의 공급, 제자들의 나눔

사도의 사명, 곧 무리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명령에 절망하고 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다시 한번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구체적인 행동의 지침을 주시지요. 14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떼를 지어 한 오십 명씩 앉히라” 15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다 자리에 앉혔습니다. 남자만 오 천명이 되는 큰 무리가 한데 뒤섞여 있을 때에는 그 규모가 쉽게 파악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대로 약 50명씩 자리를 잡고 앉히니 비로소 대략적인 규모를 파악할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준비를 마치자 예수님께서 떡과 물고기를 가지고 축사하여 나누어 주십니다. 오늘 본문 16절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니

16절이 묘사하는 이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지금 누구의 손에 있습니까? 예수님의 손에 있지요. 예수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감사와 축복의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떼어 누구에게 주시죠? 제자들에게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무리들에게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떡과 물고기를 떼어서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고, 제자들이 예수님께 받은 떡과 물고기를 무리들에게 나누어 주었어요. 무리들을 약 50명씩 그룹을 지어 앉혀 놓았으니 제자들은 무리들이 앉은 자리를 대략 열 두 개의 영역으로 나누어 자신이 맡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열심히 돌아다니며 예수님께 받은 음식을 계속 나누어 줄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역할과 제자들, 곧 사도들의 역할이 너무도 명백하게 구분됩니다. 음식을 주시는 분, 우리 인간의 필요를 공급하여 주시는 분, 곧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풍성한 은혜의 원천은 누구이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보다 정확히 답한다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모든 필요를 풍성하게 채워 주시는 은혜의 원천이 되십니다. 그러면 제자들, 곧 사도들의 역할은 무엇이지요? 떡과 물고기를 가지고 축사하여 많은 음식을 만드는 것은 제자들의 역할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역할입니다. 제자들, 곧 사도들의 역할은 예수님께서 주신 음식을 받아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풍성한 은혜를 받아서 그것을 무리들에게 열심히 나누어 주는 역할입니다. 

제자들의 손에는 남자만 오천 명이 되는 큰 무리를 먹일 수 있는 음식이 전혀 없었고, 사도들에게는 사람들의 필요를 채울 수 있는 영적인 풍성함이 전혀 없지만, 그들 곁에는 모든 것을 풍성하게 베풀어 주시는 은혜의 원천,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곁에 계셨습니다. 그들과 함께 계셨던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떡을 떼어 나누어 주시고, 물고기를 나누어 주시니 그들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풍성한 은혜를 무리들에게도 나누어 줄 수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은혜의 원천이 되시는 주님께서 지금도 여러분 곁에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물고기와 떡을 나누어 주시는 장면을 묘사하는 16절에서 우리가 특별히 주목해야 할 몇 개의 단어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행동을 나타내는 동사들입니다. 16절을 다시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떡과 물고기를 어떻게 하셨어요? 첫째로 ‘가지사’ 둘째로 ‘축사하시고’ 셋째로 ‘떼어’ 넷째로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이 네 가지 동사를 생각할 때 떠오르는 장면이 있지 않으세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식탁을 나누시면서 성만찬을 제정하신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잡히시던 바로 그날 밤, (먼저) 떡을 가지시고 (두번째로) 축사하시고 (세번째로) 떼어 (마지막 네번째로)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나의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전 11:24) 또한 식후에 잔을 가지시고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전 11:25) 성만찬의 식탁에서도 예수님과 제자들의 역할은 분명하게 구분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린 자신의 살과 피로 우리 인간에게 영혼의 양식을 풍성하게 베풀어 주시니 제자들은 그 주님으로부터 떡과 잔을 받아 – 제자들의 역할이 무엇입니까? – 떡과 잔을 받아 은혜의 식탁에 참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손에 풍성한 떡과 풍성한 물고기가 없다고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인 부모라는 이름은 가지고 있지만 자녀들에게 나누어 줄 은혜와 사랑이 턱없이 부족하다고 걱정하지 마십시요, 낙심하지 마십시오. 교회 안에서 여러분이 돌보고 양육해야 할 사람들은 점점 늘어나지만 나에게는 사랑도 부족하고 다른 사람을 선한 길로 인도할 역량도 턱없이 부족하다고 걱정하지 마십시요, 절망하지 마십시오. 시간이 지날수록 이 세상이 여러분에게 지워주는 여러 가지 책임과 역할을 다하기에 나에게는 능력도 없고 지혜도 턱없이 부족하다고 걱정하지 마십시요,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비록 여러분의 손이 텅 비어 있을지라도, 아니 여러분의 손이 텅 비어 있기 때문에 지금도 우리에게 풍성한 은혜를 공급하여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우리의 양손을 내밀어 하늘의 양식을 받을 수 있는 것이요, 내가 마땅히 나누어 주어야 하는 바로 그들에게 우리는 양손을 내밀어 주님께서 주신 하늘의 은총을 베풀어 줄 수가 있습니다. 


충만한 은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떡과 물고기를 떼어 주셨고, 제자들은 예수님께 받은 것으로 무리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 결과를 묘사하는 오늘 본문 마지막 17절 말씀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먹고 다 배불렀더라
그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거두니라

17절 말씀에는 오병이어 사건의 결과를 두 가지로 묘사합니다. 먼저는 ‘먹고 다 배가 물렀습니다.’ 누가요? 남자만 오천 명 정도 되는 그 많은 사람들이 다 먹고 배불렀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17절은 또 한 가지 사실을 묘사합니다. ‘남은 조각을 열 두 바구니에 거두었더라’ 이번에는 누가 거두었다는 뜻입니까? 제자들이죠. 열 두 명의 제자들이 열 두 바구니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니 제자들 모두가 각각 한 바구니씩 음식을 가득 거두었다는 의미가 아니었을까요? 예수님께서 떡과 물고기를 손에 잡고 축사하여 나누어 주시자, 먼저는 남자만 약 오천 명이 되는 사람들이 다 먹고 배가 불렀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떼어 주시는 떡과 물고기를 열심히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던 제자들의 그 바구니도 모두 가득 넘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예수님의 갚진 선물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풍성,’ 곧 ‘충만한 은혜’입니다. 우리에게 풍성한 은혜를 주시는 예수님의 선물은 그것을 누리는 사람들에게도 충만한 만족이 되지만, 또한 예수님의 그 선물을 나누기 위해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일꾼들에게도 그들의 바구니가 차고 넘치는 풍성한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우리의 손에는 아무것도 잡히는 것이 없고,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성취될 것인지 도저히 알 수 없으며, 우리에게 주어진 책임은 시간이 갈수록 커지고 무거워져 그 옛날 벳새다의 빈 들에서 어떻게 해서 든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려 하다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명령하시는 주님의 말씀 앞에 “할 수 없사옵나이다” 부르짖을 수밖에 없던 제자들의 모습이 곧 우리의 현실이지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결코 여러분의 마음을 인색하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비어 있는 손을 하나님과 사람 앞에 숨기지 마십시오. 그 대신 지금도 여러 가지 면에서 궁핍한 우리에게 풍성한 은혜, 충만한 은혜를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시오. 그리고 텅 비어 있는 여러분의 두 손을 주님께 벌려 주님께서 떼어 주시는 떡과 주님께서 나누어 주시는 물고기와 주님께서 부어 주시는 잔을 받으십시오. 우리에게는 아무 것도 없지만 지금도 여러분 곁에서 여러분에게 풍성한 은혜를 부어 주시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은 가정을 축복하고, 여러분은 직장을 축복하고, 여러분은 교회를 축복하는 축복의 통로가 되실 것입니다. 

 

 

누가복음 4장 38-44절 "예수님의 선물" – 치유 –

신약성경, 특별히 복음서를 읽다 보면, 예수님께서 행하신 사역의 중심에 병자를 고쳐시는 치유와 귀신을 내어 쫓는 축귀가 놓여 있음을 알게 됩니다. 과학시대라 불리는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는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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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6장 6-10절 “예수님의 선물” – 안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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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누가복음 강해2019. 7. 11.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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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실리콘밸리에 있는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연구원이었던 알렉스 팡(Alex Pang)이라는 분이 약 3년 전 책을 한권 썼습니다. 그 책의 제목이 <휴식>(Rest)입니다. 그 책에서 알렉스 팡은 미국 사회의 근로 문화에 대해 이렇게 적었습니다. “미국인들은 세계 그 어느 나라 사람들보다 많이 일하고 적게 쉰다. 경제학자들의 예측이나 통념과 달리 기술과 환경은 나날이 생산적으로 발전하는데 업무 시간은 짧아지기는 커녕 더 길어진다. 휴가는 고스란히 반납되기 일쑤이며 어쩌다 휴가를 가더라도 수시로 업무 이메일을 확인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마치 한국의 현실을 기록해 놓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업무의 생산성과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술의 발전은 눈이 부실만큼 빠르지만, 직장인들의 하루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바빠진다는 알렉스 팡의 지적은 오늘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현실을 대변하고 있지요. 직장인만이 아닙니다. 가사 노동을 돕는 생활가전이나 로봇의 기능은 나날이 발전하고 있으며, 필요한 것을 핸드폰이나 인터넷으로 주문하면 24시간 안에 우리 집 문 앞에까지 배달되는 서비스가 발달하고 있지만, 이곳에 계신 주부 여러분, 시간이 지날수록 여러분의 가사 노동은 줄어들고 여러분의 육아는 여유로워지며 그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삶에는 쉼과 여유가 넘쳐나고 계십니까? 그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기술이 얼마나 더 발전을 해야 우리에게 ‘여유’라는 것이 찾아오게 되며, 도대체 얼마나 많은 재화와 재정을 소유해야 비로소 우리는 여유로운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우리는 언젠가 참된 쉼, 참된 안식을 얻을 수 있기는 한 것입니까?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영혼의 참된 쉼과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쉼이 없는 사람들

구약성경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주일에 단 하루는 모든 일을 멈추라고 명령합니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의 백성은 일주일에 하루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쉼과 안식을 누리도록 한 것이 안식일의 규정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매주 안식일을 맞이하지만, 매주 안식일을 맞아 안식일의 규례대로 아무런 노동을 하지 않고 회당을 찾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매주 듣지만 그의 마음과 그의 영혼에는 참된 쉼과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묘사로 시작합니다. 오늘 본문 6절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실새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여기에 한 남성이 등장합니다. 그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의 가족 관계에 대해서도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저 ‘오른손 마른 사람’이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이 사람의 직업은 벽돌공이었다고 합니다. 자,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전설에서와 같이 그가 벽돌공이었다면, 그는 벽돌을 쌓으면서 하루하루 열심히 일하여 자신의 노동의 대가로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가 벽돌공으로 열심히 일을 하고 있을 때, 그는 안식일의 규정 – 곧 안식일에는 아무런 노동도 하지 말라 – 는 규정을 지키는 것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안식일의 규정 때문에 공사 일정을 빨리 앞당기기도 하고, 안식일이 지난 후에는 그 날 하지 못했던 일을 하기 위해 또 열심히 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게 왠 일입니까? 그의 오른 손이 시간이 흐를수록 마르기 시작합니다. 성경의 의미를 좀더 정확히 묘사한다면,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손이 말라서 고부라지기 시작합니다. 시간이 더욱 지나자 그는 오른손을 도무지 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 벽돌공으로 일할 수가 없었지요. 직업을 잃어버렸습니다. 이제 일주일에 하루 안식일을 지켜서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율법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너무도 쉽습니다. 아니, 일주일에 하루만 일을 쉬는 게 아니라, 일주일 내도록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안식일 규례대로 안식일에 아무런 일도 하지 않지만 그의 마음에는 쉼이 없습니다. 생계에 대한 걱정, 가족에 대한 걱정, 내일에 대한 절망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이지요. 매주 안식일을 맞이하고 안식일의 규례대로 아무런 노동도 하지 못한 채 회당에 앉아있지만 그의 마음에는 안식이 사라졌고, 그의 영혼에는 평안이 없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교훈을 한 가지 얻습니다. 안식일에, 혹은 주일에 아무런 일을 하지 않는다고 참된 쉼을 누리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도 지금 피곤하시죠? 지난 한 주 동안 생활 전선에서 최선을 다하여 수고하시고 주일을 맞이하여 교회에 출석하여 예배를 드리니 우리의 몸이 피곤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난 일주일 동안 최선을 다해 수고했으니 이제 주일에는 좀 쉬어야겠다고 그저 집에 들어가서 방에 누워있으면 그곳이 여러분 영혼의 참된 쉼터가 될까요? 아닙니다. 오른손 마른 사람은 일을 못해요. 그래서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키는 것은 너무 쉬워요. 그래도 그의 마음은 피곤하고 그의 마음은 곤고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오늘 본문에는 매주 안식일을 맞이하고 있지만, 안식일을 맞이하여 안식일의 규례대로 아무런 노동을 하지 않고 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지만, 그 마음과 영혼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쉼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먼저는 오른손이 말라 고부라진 사람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는 안식일에 쉼을 누리지 못하는 또 다른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7절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고발할 증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가 엿보니

여기에 등장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안식일 규정을 철저하게 지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누가 보더라도 그 어떠한 규정을 적용하더라도 그들은 안식일을 철저하게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제 대답해 보십시오. 안식일 규정을 철저하게 지키고, 안식일에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회당에 참여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이 바리새인들은 마음에 참된 평화와 참된 휴식을 누리고 있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의 몸은 아무런 노동을 하지 않고 회당에 들어와 있지만, 지금 그들의 마음은 너무도 분주하고 너무도 바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이 병을 고치나 안 고치나 감시하고 있잖아요. 겉모습으로는 안식일을 더 이상 잘 지킬 수가 없어요. 그러나 옆에 있는 사람들이 안식일을 잘 지키는지 못 지키는지 감시하느라 그들의 마음은 분주하고 바쁘요 그래서 피곤합니다. 

혹, 여러분 중에 오늘은 우리 구역 식구 중에 누가 예배에 빠진 사람은 없나? 내 옆에 앉아서 예배 드리는 사람이 오늘 헌금을 드리나? 찬양을 부를 때 입을 다물고 있는 사람은 없나? 뭐, 이런 것에 집중하다 보면 내 마음에 쉼이 없어요. 매주 주일만 되면 아침 일찍부터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나의 몸과 마음과 영혼이 참된 안식과 참된 쉼을 누리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들 눈치만 보다 왔잖아요. 교회에서 사람은 많이 만났지만, 우리에게 참된 평화와 쉼을 주시는 하나님은 만나지 못했잖아요. 그 옛날 바리새인들이 안식일 규정이라는 자신들의 고정관념에 사로잡혀서 다른 사람들을 감시하다가 정작 자신은 안식을 누리지 못했던 것처럼, 주일을 철저히 지키고 교회를 위해 온갖 봉사는 다 하지만 정작 나의 영혼에 쉼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다면 공허한 마음만 안고 집으로 향할 수도 있습니다. 


시선을 바꾸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안식일 규례에만 몰두하며 자신의 몸과 마음을 피곤으로 몰아가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십니다. 우리 8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서거늘

예수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그리고 한 가운데 서라” 그러자 손 마른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합니다. 8절 마지막입니다. “그가 일어나 서거늘” 자, 이제 회당에 있는 모든 사람이 일어나 한 가운데 서 있는 그 사람을 주목하기 시작합니다. 특별히 회당에 있는 사람 가운데 누가 그 장면을 주목하고 있을까요? 예수님이 안식일에도 병자를 고치시는 지 주시하고 있던 사람들, 곧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이 장면을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장면을 기획하시면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정확히 보아라. 마땅히 보아야 할 것을 보아라.” 물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지금까지 오른손 마른 사람을 수도 없이 보았지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그 사람이 손이 말라 고부라진 사람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지요. 그러므로 그들에게 오른손 마른 사람이 누구인지 굳이 소개할 필요가 없어요. 그런데 문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자신이 그토록 잘 알고 있었던 손 마른 사람에 대해 반드시 주목해야 할 사실, 반드시 관심을 기울여야 할 사실에 대해 그들이 무관심했다는 점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을 찾아보며 오늘 본문 9절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며

여러분, 찾으셨습니까?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이 손 마른 사람을 보면서 진심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 있으니, 그 사람의 생명이 죽어가고 있지는 않은지 그 사람의 죽어가는 생명의 다시 살아나지는 않는지를 보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장면을 통해 예수님께서 그 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주자 하셨던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지금 손이 마른 사람은 단지 손만 말라 꼬부라진 것이 아니라 그의 영홍이 메마르고 시들어 초라하게 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보라야 합니다. 그리고 오른 손이 마른 사람, 그의 가장 힘이 있는 오른 손이 시들어 비틀어 지고 있는 사람. 그것은 단지 회당의 중앙에 서 있는 한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그를 바라보고 있는 회당에 모인 모든 사람들 자신의 모습이라는 사실. 겉으로 보기에는 건강에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고,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멀쩡해보이지만 실상은 그 사람의 오른 손이 말라 비틀어지듯이 안식일을 맞이하여 회당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마음과 영혼도 시들어 비틀어져 초라한 모습이 되어 버렸다는 사실. 곧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로 하여금 손마른 사람의 모습이 곧 자신들의 영적인 상태임을 스스로 돌아볼 수 있도록 예수님은 그들에게 기회를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반드시 보아야 할 또 하나의 장면이 있었으니, 그렇게 병들어 손이 마르고 시들어 비틀어진 그 사람을 예수님께서 치유하시는 장면입니다. 안식일이 돌아오고, 사람들은 회당에 앉아 말씀을 듣지만 그 안에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고 그저 자신들의 마음과 영혼이 시들어가고 있던 바로 그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른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시고 그에게 새로운 쉼과 안식을 주시는 장면을 목격하면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로 대표되는 그들의 시선이 더 이상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향하지 않고 오직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치유하시며 우리에게 새로운 쉼과 안식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시선을 고정하도록 예수님은 요구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이 참된 쉼과 안식을 누리기 원하신다면 여러분의 시선을 돌리십시오.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선, 사람들을 평가하고 판단하던 시선, 나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와 사람들의 칭찬에 관심을 두었던 여러분의 시선을 거두십시오. 그리고 먼저 여러분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십시오. 여러분의 몸과 마음과 영혼이 얼마나 쉼 없이 달려왔는지, 얼마나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지, 그리하여 오른손 마른 사람과 같이 여러분의 마음과 여러분의 영혼이 얼마나 피폐해져 있는지를 보십시오. 그리고 또 한가지, 지금도 여러분을 찾아오시며 여러분의 삶에 새로운 쉼과 안식을 주셔서 다시 한번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힘차게 달려가게 하시는 우리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여러분의 시선을 돌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에게 시선을 맞출 때 우리는 비로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 곧 쉼과 안식의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너의 손을 내밀라

예수님께서는 오른손 마른 사람을 회당의 중앙에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마땅히 보아야 할 것을 보라고 말씀하시죠. 그리고 이제 손 마른 사람을 바라보며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10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무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그리하매 그 손이 회복된지라

예수님께서 그 사람에게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너의 손을 내밀라’ 오른손이 말라 구부러진 채로 회당에 앉아 있던 한 사람, 매주 안식일을 맞이하여 회당을 찾았고 회당에서 말씀을 들었던 한 사람, 그리하여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안식일의 규정을 자의든 타의든 철저히 지켰던 사람, 그러나 그의 마음에 참된 쉼과 참된 안식이 없었던 바로 그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이것입니다. ‘너의 손을 내밀라.’ 

그런데 여러분, ‘너의 손을 내밀라’는 예수님의 말씀에는 이해할 수 없는 측면이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이 사람은 오른 손이 말라서 꼬부라져있습니다. 지금 이 사람에게 가장 큰 문제는 손을 쭉~ 펼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너의 손을 내밀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손을 내민다는 것은 손을 펼친다는 뜻으로, 대부분의 영어성경에서는 ‘stretch out’으로 번역하고 있어요. 아직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고쳐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의 손은 여전히 말라 있고, 그의 손은 여전히 꼬부라져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손이 마른 그 사람에게 너의 손을 쭉 펴서 내어 밀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었는데, 예수님의 말씀대로 자신이 손을 펼칠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지금까지 자신의 손이 꼬부라져 너무도 오랜 세월 손을 펴본 적이 없었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니 내가 손을 펼 수 있으리라는 믿음으로 가지고 오른 손과 팔에 힘을 주어 펼치려는 행동. 바로 그것을 예수님께서 요구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른손이 말랐던 그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자신의 손을 예수님께 내어 밀었고 그의 손은 회복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가운데 지금 오른손이 말라 꼬부리진 사람과 같으신 분은 안 계십니까? 주일을 맞아 예배는 드립니다. 예배에 참석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옆에서 보면 주일을 참 잘 지키는 것 같지만, 여전히 마음에는 참된 쉼과 참된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분들은 안 계십니까? 어떤 분들은 질병의 문제 때문에 마음에 쉼이 없습니다. 어떤 분들은 재정의 문제 때문에 마음에 쉼이 없어요. 또 어떤 분들은 가정의 문제, 직장의 문제로 마음에 쉼을 누리지 못하는 분들이 계시지요. 만일 우리 가운데 그와 같은 분이 계시다면, 지금도 여러분을 향하여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너의 손을 나에게 내밀라.’
‘너의 마르고 시들고 비틀어진 바로 그 손을 믿음으로 나에게 내밀라’

지금도 여러분을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믿음으로 여러분의 손을 쭉~ 펴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내어 놓으십시오. 지금도 여러분의 모든 문제의 해결자가 되어 주시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주님 앞에 여러분의 모든 문제를 내어 놓으십시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회복시켜 주시며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에게 풍성한 안식과 평안을 부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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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누가복음 강해2019. 7. 10. 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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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 특별히 복음서를 읽다 보면, 예수님께서 행하신 사역의 중심에 병자를 고쳐시는 치유와 귀신을 내어 쫓는 축귀가 놓여 있음을 알게 됩니다. 과학시대라 불리는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는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내어 쫓는 이야기가 별로 현실감 있게 다가오지 않을 수도 있지요. 그러나 혹 여러분의 마음에 예수님의 치유 사건이 나와는 별로 상관이 없다고 여겨지시는 분이 계시다면 저는 이렇게 질문하고 싶습니다. 여러분, 정말 괜찮으십니까? 여러분은 몸의 건강을 정말로 장담하실 수 있으십니까? 여러분의 마음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단 한번도 다치지 않았고 상처도 없으십니까? 여러분의 영혼은 지금도 죄악으로 말미암아 병들어 있지 않으십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의 치유가 없이도 정말로 괜찮으십니까? 

우리가 교회를 출석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너무도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삶의 기준을 잡고 삶의 방향을 찾아갑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 가운데 그 누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만으로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삶, 이 세상을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여전히 나의 몸이 질병으로 괴로워하며, 나의 마음은 크고 깊은 상처로 아파하고, 나의 영혼은 죄악으로 말미암아 신흠하고 있으면서 과연 누가 예수님의 치유하시는 은혜가 없이 변화된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모두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하는 능력, 우리를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간절히, 너무도 간절히 필요합니다. 


병자를 향한 발걸음

하루는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맞아 가버나움이라는 동네의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회당에서 나와 장소를 이동하십니다. 오늘 본문 3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시몬의 집에 들어가셨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시몬의 집으로 이동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38절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을 앓고 있는지라”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시몬의 집으로 가신 이유는 그곳에 병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심한 열병으로 스스로 움직일 수 없고, 그래서 자신의 발로 예수님께 나올 수 없는 그 병자를 예수님께서 친히 찾아가셨던 것입니다. 

39절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그 다음 단어가 참 중요합니다.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어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자, 예수님은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시몬이 참석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굳이 시몬의 집에 가시지 않더라도 회당에서 시몬 베드로에게 ‘너의 장모가 나았느니라’ 말씀하시면 그녀는 분명 치유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선택하신 방식은 직접 심한 열병으로 누워있는 시몬의 장모를 찾아가신 것이요, 예수님의 목소리, 예수님의 숨소리까지도 들릴 만큼 가까이 접근하셔서 열병을 고쳐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 장면에서 발견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치유가 필요한 사람에게 직접 찾아가시는 예수님, 가까이 다가가시는 예수님입니다.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은 치유가 필요한 사람, 회복이 필요한 사람, 질병과 상처로 고통하는 사람들에게 ‘나를 찾아 오라’ 말씀하시지 않고 예수님께서 직접 찾아 가십니다. 그리고 그를 고쳐주십니다. 

그러면 여러분 가운데 이렇게 질문하고 싶으신 분이 계실 겁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를 직접 찾아가시고, 예수님께서 직접 병자를 고쳐주신다면, 예수님의 치유를 받기 위해 인간이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그 질문에 대한 대답, 곧 우리가 해야 할 단 하나의 조건이 있다면 여러분을 치유하시는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신 후 시몬의 집으로 이동하실 때, 베드로가 예수님께 나의 집에는 들어오실 수 없다고 거부하거나, 우리 집에는 심한 열병으로 아파하는 환자가 있으니 다음에 오시면 좋겠다고 예수님을 막아섰다면 예수님은 시몬의 장모를 만날 수도 없었겠지요. 

그러므로 여러분,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치유하기를 원하신다면 예수님을 여러분의 집으로 모셔들여야 합니다. 예수님을 환자가 누워있는 침상으로 모셔들여야 합니다. 여러분의 마음과 여러분의 영혼에 보이고 싶지 않은 상처를 예수님께 보여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상처 나고 아파하는 바로 그 자리에 예수님을 모실 때 우리에게 주시는 치유의 은혜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의 장모를 고쳐주셨습니다. 그 결과를 오늘 본문 39절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여기에서 ‘수종들었다’는 표현은 봉사의 일을 한다는 단어입니다. 여러분도 한번쯤은 들어보셨을 만한 헬라어 단이, ‘디아코네오’입니다. 이후 초대교회의 일꾼으로 일곱 분의 집사님이 세워지는데, 집사라는 의미의 영어 단어가 ‘deacon’이지요. 모두가 유사한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시몬의 장모를 치유하여 주시자, 그녀는 예수님을 섬기는 사람이 되었고 교회의 일꾼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에서 순서가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시몬이 장모를 찾아가는 것이 먼저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녀를 치유하여 주시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렇게 치유를 받은 이후에 그녀가 예수님을 섬기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순서를 바꾸면 안 됩니다. 교회에서 여러 가지로 봉사하다 보면 예수님의 치유를 경험하게 될까요? 아닙니다. 순서가 틀렸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나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치유하여 주시는 은혜를 경험한 사람만이 교회에 덕을 세우는 참된 일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을 향한 정성

안식일을 맞이하여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시몬의 집에서 그의 장모를 고쳐주셨습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해가 질 무렵이 되었을 때 가버나움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예수님께 몰려오기 시작합니다. 그날 해가 저물 때에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온 이유가 있습니다. 그날은 안식일이었거든요. 저녁에 해가 지면 유대인의 시간으로 안식일이 끝났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전해 들었던 가버나움 사람들은 안식일이 끝나는 저녁시간을 기다렸다가 주변에 있는 모든 병자를 데리고 예수님을 찾아왔던 것입니다. 이 장면을 묘사하는 40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온갖 병자들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

우리가 함께 읽은 40절 말씀에서 주목하고 싶은 표현이 두 개가 있습니다. 첫째는 “온갖 병자”입니다. 누가는 오늘 본문에서 사람들이 ‘온갖 병자’를 데려왔다고 서술하지요. 그러므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환자를 데려왔는지는 정확히 나와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그들의 질병이 다양했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단순한 육신의 질병이었습니다. 그것도 참으로 고통스럽고 괴로웠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마음에 질병이 찾아왔습니다. 살아오는 과정이 너무도 괴롭고 아파 마음 깊은 곳에 도저히 잊혀지지 않는 아픔과 슬픔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그들의 영혼이 병들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멀정해 보였지만 그의 마음 깊은 곳에는 죄악이 가득하였고, 어두움의 세력에 온통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이처럼 다양한 종류의 환자들, 오늘 본문의 표현대로 온갖 병자들이 그날 저녁 모두 다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을 모두, 어떠한 질병이든 상관 없이 모두 고쳐 주십니다. 

함께 읽은 40절 말씀에는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표현이 등장합니다. 40절을 다시 보십시오. “해질 무렵에 사람들이 온갖병자들을 데리고 나아오매” 그 다음입니다. “예수께서 일일이” 우리가 주목해야 할 단어가 바로 ‘일일이’입니다. 예수님께서 ‘일일이’ 그 상처 위에 손을 얹어 고쳐 주셨습니다. 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님은 병자를 치유하실 때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손을 얹기도 하시지만, 침을 바르기도 하시고, 말씀만 하실 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굳이 손을 얹어야 치유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말씀 한 마디면 모든 질병을 치유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만큼은 예수님을 찾아온 모든 사람들에게 일일이 손을 얹어서 치유하여 주셨어요. 그때 예수님께서 손만 얹으셨을까요? 틀림없이 대화도 하셨을 것 같아요. 어디가 아프냐고, 얼마나 고생했는냐고, 이렇게 찾아왔으니 참 잘하였다고, 너의 믿음대로 될 것이라고, 이제는 건강해졌으니 새로운 삶을 살라고....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나 일일이 손을 대시며 대화하시고 그들의 질병과 함께 그들의 마음과 그들의 영혼까지도 치유하시고, 그들의 삶을 변화시켜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여러분이 어떠한 질병으로 아파하든 상관없이 예수님은 넉넉히 치유하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질병이 육신의 질병이든, 마음의 상처든, 영혼의 아픔이든 상관없이 예수님은 모두 치유하여 주십니다. 여러분 개인의 질병만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아파하고 있으신가요? 여러분의 자녀들이 질병으로 괴로워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친척, 여러분의 친구, 여러분이 속한 공동체가 큰 질병에 걸려 아파하고 죽음의 길을 걷고 있습니까? 그날 밤 온갖 병자를 예수님께 데려온 가버나움 사람들처럼 여러분도 예수님께 나오십시오. 여러분이 여러분의 아픔과 상처를 있는 그대로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가기만 한다면 예수님은 그 누구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아픈 상처에 손을 대어 주시고, 사랑의 음성을 들려주시고, 여러분의 아픔과 상처를 치유하여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온갖 병자를 고치실 때 귀신이 쫓겨나갔습니다. 그런데 귀신이 귀신답지 않은 이야기를 하면서 쫓겨갑니다. 41절입니다.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귀신이 한 말이긴 한데, 너무도 정확한 말입니다. 이처럼 확실한 진리를 귀신이 말하고 있다는 것이 너무도 어색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도 의외입니다. 41절을 계속 보십시오. “예수께서 꾸짖으사 그들이 말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 이는 자기를 그리스도인 줄 앎이러라” 아직 사람들은 예수님이 어떠한 분인지 잘 모릅니다. 그런데 귀신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 곧 세상의 구원자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은 귀신들이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리는 것을 금지하십니다. 그렇다고 예수님 본인이 사람들에게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세상의 구원자 그리스도라고 선포하지도 않으십니다. 그 대신 예수님은 병자를 고치고 세상의 질병과 아픔을 치유하심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누구인지 사람들에게 알리는 방법을 선택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여러분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듣고’ 믿으신다면 잘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구원자, 곧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듣고’ 믿으신다면 참으로 잘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예수님께서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치유하시는 은혜를 체험하여서 예수님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단지 지식으로 알고, 이성적으로 동의하는 것을 넘어서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삶을 고치시고, 여러분의 가정을 고치시고, 여러분의 모든 면을 새롭게 회복하시는 체험을 통해 예수님을 알아가셔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바르게 알아가는 과정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한 파송

예수님께서 자신을 찾아온 온갖 종류의 병자를 모두 고쳐주셨습니다. 모든 환자를 한 곳에 모아놓고 단 한 번의 기도로 모든 질병을 고치셨다면 예수님의 능력이 더욱 대단하게 보였을지도 모르죠. 그러나 예수님은 일일이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나주셨고, 그들과 일대일로 대화하셨고, 각 사람에게 손을 얹어 고쳐주셨습니다. 안식일이 끝나는 해가 저무는 때부터 시작하여 모든 병자들을 일일이 고쳐주셨기에 많은 시간이 흘렀고, 어느덧 날이 밝았습니다. 그래서 42절은 “날이 밝으매”라고 시작하는 것입니다. 날이 밝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본문 43절입니다.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을 말씀합니다. 곧, 여러 동네에서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나라”라는 단어가 인상적입니다.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이라는 동네에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안식일을 맞이하여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곳에서도 귀신들린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시몬의 집에 들어가서 심한 열병으로 고생하는 시몬의 장모를 고쳐주셨습니다. 그날 저녁 그 동네의 온갖 병자들이 다 몰려왔을 때, 그 누구도 외면하지 않으시고 일일이 모든 사람에게 손을 대어 고쳐주셨습니다. 그렇게 가버나움 동네에 질병이 떠나고 귀신이 쫓겨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바로 그 장면은 가버나움 동네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현장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예수님의 말씀이 들리고, 예수님의 치유가 임하고, 예수님께서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영혼의 질병과 아픔을 치유하여 주시면 바로 그곳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는 것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와 목적이라고 선언하시고 또 다시 다른 동네로 가십니다. 예수님은 여러 마을을 계속 다니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어떻게 전하셨을까요? 말씀으로만 전하셨을까요? 아니면, 귀신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이분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전파했을까요? 아닙니다. 오늘 본문이 보여주는 것처럼, 가버나움에서 시몬의 장모를 직접 찾아가셨던 것처럼, 그날 저녁 자신을 향해 몰려오는 온갖 병자를 단 한 사람도 외면하지 않으시고 일일이 손을 얹어 고치셨던 것처럼, 갈릴리와 유대의 여러 마을을 다니시며 그저 한 사람 한 사람을 찾아가시고 일일이 손을 얹으시며 그들을 치유하여 주셨던 것이지요. 그리하여 바로 그 마을도 하나님의 나라로 바꾸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가운데 여전히 육신의 질병, 마음의 상처, 영혼의 아픔을 겪으며 고통의 눈물을 흘리고 계신 분들이 계시다면 우리에게 치유의 선물을 주시는 예수님을 여러분의 마음에 모셔 들이십시오.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모셔 들였던 시몬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여러분의 상처가 있는 바로 그 자리로 모셔 들이십시오. 그 옛날 안식일이 지나기만을 기다리다가 날이 저물자 예수님을 찾아나섰던 온갖 종류의 병자들처럼 여러분의 아픔과 상처를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 가십시오. 예수님은 결코 여러분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친히 그 손으로 여러분의 환처를 치유하여 주십니다. 

혹, 여러분 가운데 예수님께서 주시는 치유의 은혜, 치유의 선물을 받아 여러분의 몸과 마음과 영혼이 회복되신 분들이 계십니까? 그 옛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극심한 열병으로부터 치유되어 예수님과 제자들을 섬겼던 시몬의 장모를 본받아 이제는 예수님을 섬기며 교회를 위해 봉사하십시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여러 동네를 다니며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파하셨던 예수님을 본받아 여러분도 주변에 몸과 마음과 영혼의 질병으로 여전히 아파하는 이들을 찾아가 그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십시오.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치유하시는 예수님의 은혜가 이 자리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여러분 모두에게, 나아가 여러분의 이웃에게도 전파되어 여러분이 계신 바로 그 자리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재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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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