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2022. 3. 27. 16:53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기 위해 잡히셨던 바로 그날 저녁이었습니다. 이제 주님 앞에는 십자가의 고난이 기다리고 있었지요. 그날 저녁 주님께서는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 자신을 팔아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제자들 가운데 리더로 손꼽힐 수 있는 베드로에 대해서는 그날 밤에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게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그날 저녁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나누셨던 유월절 식사 자리는 분위기가 매우 무거웠겠지요.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쁨을 약속하십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 15:11)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기 위해 잡히셨던 바로 그 순간까지도 제자들이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하늘의 충만한 기쁨, 하늘의 풍성한 즐거움을 약속해주셨지요. 그러한 주님이시라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기쁨과 행복으로 가득한 인생을 살아가기를 바라고 계시지 않을까요? 삶의 수많은 고통과 아픔 속에서 기쁨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우리들을 바라보며 주님은 여전히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기쁨의 공동체

오늘 본문은 너무도 유명한 ‘잃은 양의 비유’입니다. 양을 키우는 어느 목자에게 양 백 마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한 마리를 잃어버렸습니다. 지금 그의 눈앞에는 아흔아홉 마리가 있고, 그의 눈에서 벗어난 한 마리의 양이 무리를 떠나 홀로 어딘가에 있을 것입니다. 이때, 목자는 아흔아홉 마리는 들에 내버려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떠나지요. 마침내 잃어버렸던 그 한 마리를 되찾으면 크게 기뻐하면서 잃어버렸던 그 양을 어깨에 메고 들에 놓아두었던 아흔아홉 마리에게 돌아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잃은 양의 비유에서 한 가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비유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하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5절과 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오늘 본문이 묘사하는 잃은 양의 비유만이 아니라, 누가복음 15장에 등장하는 다른 두 개의 비유도 전반적인 분위기는 동일합니다. 본문에 이어 등장하는 비유가 ‘잃어버린 드라크마의 비유’입니다. 누가복음 15장 9절은 이렇게 말씀하네요. “또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의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누가복음 15장에서 마지막에 등장하는 비유는 ‘탕자의 비유’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동일한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누가복음 15장 24절입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이렇게 예수님의 비유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기쁨과 행복으로 가득합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게 됩니다. 천국은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 발을 디디고 살아가면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며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에게는 하늘의 기쁨과 하늘의 즐거움이 가득 넘치기 마련이라는 사실입니다.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은 즐거운 것입니다. 교회 생활은 언제나 기쁨으로 가득해야 합니다. 물론, 때로는 내 마음이 기뻐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는 경우도 있지요. 그러나 우리의 신앙생활을 전체적으로 조망하였을 때, 그 안에는 기쁨과 즐거움이 가득해야 합니다. 그래서 잠시 잠깐 불편한 마음으로 봉사하고 헌신하고 순종하더라도 이내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이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을 압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의 원래 모습입니다. 


잃어버린 기쁨

성경의 가르침은 명백합니다. 신앙생활은 기쁨으로 가득해야 합니다. 그러면 왜 우리의 신앙생활에는 이처럼 기쁨이 사라지고 불평과 짜증으로 점철될 때가 많을까요? 이러한 의문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잃은 양의 비유를 보다 세심하게 들여다보면, 예수님의 비유에는 큰 기쁨을 누리는 대상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대상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누가 기쁨을 누리고 누가 기쁨을 잃어버렸는지 살펴보면 무엇이 우리의 기쁨을 빼앗아 가는지도 알 수 있겠지요. 자, 이 두 그룹의 차이를 보다 명백히 이해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잃은 양의 비유를 말씀하시게 된 배경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 1-2절에 그 배경이 등장합니다. 과연 누가 등장하는지에 주목하면서 본문 1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1절) 

제일 먼저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본문은 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곧 예수님 곁으로 가까이 다가왔다고 말씀합니다. 이 첫 번째 그룹의 사람들, 곧 세리와 죄인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잃은 양의 비유에서 무엇에 해당하는 사람들일까요? 네, 그렇습니다. 이들이 잃은 양, 곧 목자가 돌보았던 백 마리의 양 가운데 목자의 돌봄으로부터 벗어났던 한 마리의 잃은 양입니다. 어떠한 이유로 목자와 양 떼로부터 이탈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그 양 자신의 잘못과 실수가 크게 작용했을지도 모르지요. 그 이유가 무엇이든 이 양은 무리로부터 이탈하였고 스스로의 힘으로는 목자와 양 떼에게 돌아갈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점차 굶주림과 목마름에 시달리게 되었고, 맹수의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되면서 그 양은 생명의 큰 위협을 느꼈겠지요. 그렇게 이제 나에게는 소망이 없고 절망뿐이라고 자포자기할 그때 저 멀리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목자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마침내 목자의 어깨에 업혀 양 떼로 돌아오는 이 양의 마음은 얼마나 큰 기쁨으로 가득했을까요? 잃어버렸다가 다시 목자를 만나 양 떼로 돌아온 한 마리의 양, 곧 본문 1절이 묘사하는 것처럼 말씀을 듣기 위해 주님께 가까이 다가온 세리와 죄인들의 마음은 신앙생활을 통해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했습니다. 

본문 2절에는 또 다른 그룹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2절)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듣기 위해 예수님께 가까이 나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그 장면을 바라보며 수군거리네요. 그러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잃은 양의 비유에서 무엇에 해당할까요? 그들은 잃어버린 적이 없는 아흔아홉 마리의 양에 해당하겠네요. 목자이신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풀을 뜯을 수 있도록 들에 풀어놓았을 때 그 들판에서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울타리에서 한번도 벗어난 적이 없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제 답해보십시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두 번째 그룹의 사람들, 곧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그 마음에 기쁨이 있나요? 아닙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목자가 이끄는 양 떼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지만, 그들의 마음에는 기쁨이 사라지고 그 대신 불평과 원망과 시기심만 가득해졌습니다. 

과연 무엇이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에게는 큰 기쁨을 선사하였고, 과연 무엇이 목자가 인도하는 푸른 들판에 늘 있었던 아흔아홉 마리의 양들에게는 기쁨이 아닌 불평과 불만이 가득하게 만들었을까요? 그 대답은 너무도 명백합니다. 곧, 은혜와 의무의 차이입니다. 잃어버렸던 한 마리 양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은혜입니다. 목자의 들판에서 떨어져 나갔습니다. 목자의 양떼로부터 분리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홀로 남아 맹수들의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자신을 구하기 위해 목자가 찾아왔잖아요. 그러므로 이 한 마리의 양에게는 목자의 울타리, 목자의 들판에 자신이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은혜입니다. 당연히 그 마음에 큰 기쁨과 즐거움이 가득하지요. 반면, 잃어버린 적이 없는 아흔아홉 마리 양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의무감입니다. 그곳을 떠나면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 목자가 어디로 이끌든 그대로 순종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그들로 하여금 목자의 들판을 떠나지 않게 붙잡고 있었어요. 이러한 의무감이 그들을 목자의 보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붙잡아두고는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의 마음에는 기쁨도 없고 즐거움도 없습니다. 은혜의 체험을 가지고 목자의 들판에 앉아있는 양에게는 기쁨이 있지만, 동일한 그 자리에 책임감으로 앉아있는 양에게는 기쁨이 없고 불평과 불만만 가득합니다. 

신앙생활은 기쁨으로 가득한 것이 정상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의 신앙생활은 처음부터 은혜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운데 그 누가 주님의 푸른 들판에 자리를 잡을 수 있는 자격이 있었습니까? 우리 가운데 그 누가 자신의 공로를 내세워서 주님의 울타리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있었나요? 우리 가운데 그 누가 나는 충분한 자격이 있으니 주님께서 주시는 꼴을 받아먹을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아무런 자격이 없어 주님의 들판에서 쫓겨나야 했고 주님의 양 떼로부터 분리되어야 했습니다. 우리는 언제라도 사나운 맹수의 공격을 받아 그들의 먹잇감이 될 수 있는 운명이었습니다. 그렇게 미래에 대한 참된 소망이 없이 자포자기하고 있을 그때 주님의 음성이 우리를 부르지 않았나요? 주님께서 우리를 찾아와 어깨에 짊어지시고 주님의 들판과 주님의 양 떼 가운데로 우리를 이끌어 주셨잖아요. 그리하여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랍다’고 노래하였습니다. 이처럼 은혜로 시작한 신앙생활이니 당연히 그 안에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 채워져야 하는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기쁨이 사라지고 불평과 짜증이 가득해진 이유는 무엇입니까? 은혜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의무와 책임감이 자리를 잡았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주님의 들판에 앉아 있는 것이 은혜였는데, 어느덧 그 자리는 내가 떠나서는 안되는 의무와 책임이 된 것이죠. 그 자리를 떠나면 벌을 받을 것처럼 느껴지고 그 자리를 떠나면 큰일이 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그 자리에 앉아 있어요. 그러니 마음에 기쁨이 사라집니다. 

우리는 오늘도 주일을 맞이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에 나와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지금 이 자리에 어떠한 마음으로 앉아 계시나요? 주일을 맞이했으니 마땅히 예배 자리에 앉아 있어야 한다는 의무감이나 습관으로 앉아 계신 분은 안 계십니까? 만일 그러한 분이 계시다면, 시간이 문제지 그분들의 마음에는 신앙생활에 마땅히 있어야 하는 기쁨이 곧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도 주일을 맞이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지금 이 자리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혜의 자리라고 여기시는 분들은 잠시 잠깐 기쁨이 사라질 수도 있고 삶의 어려움으로 내 마음에 즐거움을 빼앗기는 순간도 있지만, 다시금 하나님을 예배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풍성한 기쁨과 즐거움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목자의 기쁨

신앙생활의 기쁨, 그것은 은혜로부터 우리의 마음에 임합니다. 동시에 우리의 마음에서 기쁨을 빼앗아가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의무과 책임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은 어떻게 의무나 책임이 아니라 은혜로 지속될 수 있을까요? 혹 은혜가 사라지고 의무만이 남았을 때, 그리하여 신앙생활에 기쁨이 사라졌을 때 우리는 어떻게 신앙생활의 기쁨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오늘 분문에서 그 답을 찾기 위해서는 본문 1-2절에 등장하는 세번째 등장인물에 집중해야 합니다. 본문 1-2절에서 발견하는 첫 번째 등장인물은 세리와 죄인들이었지요. 그리고 두 번째 등장인물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더 관찰해보면 이 두 그룹의 사람들 외에 본문에는 또 한 명의 등장인물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본문 2절을 보십시오. “이 사람이” 여기에서 “이 사람”은 예수님을 가리키지요.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그러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잃은 양의 비유에서 예수님에 해당하는 인물은 누구일까요? 당연히 양 백 마리를 돌보는 목자입니다. 양 백 마리 가운데 한 마리라도 잃어버리면 그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고 찾아가는 목자가 바로 우리 예수님이지요.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비유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지배하고 있는 큰 기쁨과 즐거움은 바로 이 목자의 기쁨입니다. 

또 찾아낸즉 즐거워 
(누가 잃은 양을 찾아 기뻐하고 있습니까? 목자가 잃은 양을 찾아 기뻐하고 있습니다)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5-6절) 

이 대목에서 가장 크게 기뻐하고 가장 크게 즐거워하는 분이 누구이십니까?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처음부터 은혜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은혜는 우리의 마음에 큰 기쁨을 부어줍니다. 그런데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신앙생활을 처음부터 기쁨으로 가득 채워주는 원천이 있다면, 절망에 빠진 우리에게 차장오시는 선한 목자가 되시는 예수님의 은혜요 우리를 발견하여 기쁨으로 어깨에 메고 돌아오신 주님의 한없는 기쁨입니다. 그러므로 시간이 흘러 우리의 신앙생활이 은혜에서 의무와 책임으로 바뀌었다면, 나의 신앙생활이 은혜를 잊어버리고 의무와 책임만 남아 기쁨과 즐거움을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다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전히 우리에게 선한 목자가 되어 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십시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찾아 발견하여 하나님의 백성 삼아주시며 그 누구보다 즐거워하셨던 주님의 기쁨이 다시 한번 여러분의 기쁨이 되게 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잡히시던 날, 제자들에게 하셨던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삶의 거대한 풍랑이 몰려와 우리의 마음을 잠식하려 할지라도, 
여러분의 신앙생활, 
여러분의 예배생활, 
나아가 주님과 함께 하시는 여러분의 인생에는 
주님께서 부어주시는 기쁨과 즐거움이 
언제나 충만하게 넘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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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누가복음 강해2022. 3. 21. 10:18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실 때 선포하셨던 핵심 메시지는 ‘회개’였습니다. 마태복음 4장에는 이런 구절이 등장합니다. “이 때부터” 여기에서 ‘이 때’는 예수님의 공생애가 시작되는 그 때입니다.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마 4:17) 그러므로 공생애를 처음 시작하실 때부터 예수님께서 강조하셨던 핵심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회개입니다.

회개란 하나님을 떠나 죄악된 생활을 일삼았던 나의 삶을 돌이켜 하나님의 뜻을 향해 삶의 방향을 돌이키는 것을 뜻하지요. 그런 점에서 예수님을 처음 믿을 때, 곧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세상에서 수많은 죄를 저지르고 살다가 그 삶을 돌이켜 믿음의 길로 돌이킬 때, 우리에게는 반드시 회개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신앙생활을 10년, 20년, 혹은 그 이상 오랜 해오신 분들의 경우는 어떠할까요? 우리는 이미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매주일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으며,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마음은 너무도 쉽게 복음의 진리에서 떠나 자신이 익숙한 삶의 방식과 세상의 가치관에 이끌리지 않던가요? 복음은 자유를 선포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여전히 얼마나 많은 것들의 종이 되어 살아가는지요? 복음은 차별을 거부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차별의 죄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요? 복음은 자격 없는 자에게 베푸시는 은혜를 선포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교만하여 지금 내가 누리는 것은 내가 그럴 만한 자격이 있기 때문이라고 여깁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더라도 우리는 시시때때로 복음의 진리로부터 벗어나고 있으니 그 방향을 돌이켜 복음의 진리로 돌아와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신앙생활을 매우 오래하신 분들은 아마도 충분히 기억하시리라 생각합니다. 한국 교회가 급격히 부흥하였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넓게 보아 1900년대 후반이었지요. 그때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한국 교회 성도들은 문자 그대로 “쉬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새벽기도는 물론이고 철야기도도 참 많이 했었는데, 당시의 철야기도는 말 그대로 밤을 꼬박 새우면서 기도하고 그 다음날 새벽기도로 이어지는 것이 당시로서는 매우 흔한 일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조금 더 기억을 더듬어 보면, 한국 교회가 크게 성장하던 시기에 성도들은 너나할 것 없이 참 열심히 기도하였는데, 그 기도의 많은 내용이 회개 기도였습니다. 저 장로님, 저 권사님은 회개할 것이 별로 없어 보이는데, 저렇게 열심히 거룩한 삶을 위해 노력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기도를 시작하기만 하면 얼마나 많은 회개의 기도를 드렸는지요. 교회학교에서 수련회나 성경학교를 한다면, 그 기간 내도록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기억하시지요? 수련회나 성경학교에서 쉬지 않고 드렸던 기도는 바로 회개의 기도였습니다. 그에 비하면 오늘날 우리의 기도가 너무 약해진 것은 물론이요, 참된 회개의 기도가 사라져버린 듯하여 애석한 마음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한국 교회 안에 회개의 기도가 사라져버린 이 현상은 한국 교회 성도들이 이제는 회개하지 않아도 될 만큼 복음의 진리에 바르게 서 있다는 의미는 아니겠지요. 아니 그 반대의 의미를 담고 있지 않겠습니까? 참으로 회개하지 않으니, 지금도 복음의 진리에서 멀어져 세상의 가치관에 이끌리는 우리 자신을 내버려두고 있는 것이요 이 땅의 교회는 어느덧 복음의 능력을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회개라는 주제는 듣는 이들에게 편안한 내용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분, 복음의 진리를 떠나려는 우리의 마음을 돌이켜 우리의 삶을 다시금 하나님을 향하게 만드는 회개가 있을 때만 우리의 내일에는 참된 소망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의 마음에 회개의 영이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의 마음에 진심 어린 회개가 터져나오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의 심령에 회개의 참된 능력이 나타나 우리의 앞날이, 우리 교회의 내일이 새로운 소망으로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아니하면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 당시에 일어났던 두 개의 큰 비극적 사건이 등장합니다.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아뢰니”(1절) 빌라도 총독이 갈릴리 사람들을 학살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도 모자라 죽은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이방 신들에게 제사하는 제물로 사용했다는 끔찍한 이야기입니다. 성경 외에도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인 요세푸스가 기록한 <유대전쟁사>에는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최소한 다섯번 등장합니다. 그러니 당시 고대 사회에서 정치권력자가 저지른 학살이 주기적으로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 4절에는 또 하나의 비극적인 사건이 등장합니다.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덞 사람이”라고 시작하네요. 실로암이라는 장소에 세워져있던 망대가 무너졌습니다. 이 사고로 열여덟 명이 생명을 잃어버렸네요. 본문 1절이 묘사하는 사건이 권력자 한 사람의 횡포로 말미암은 비극이라면, 본문 4절이 묘사하는 장면은 그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던 사고였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동일했습니다.여러 사람들이 생명을 잃어버리는 비극을 맞이했다는 점입니다. 

자,이 두 가지 사건에 대해 예수님 시대를 살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예상하지 못했던 큰 재앙을 만나 생명을 잃어버린 이 사람들은 분명히 다른 사람이 저지르지 않은 큰 죄를 범한 죄인이라고 말이지요. 그 죄가 사람들에게는 가려질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조금도 숨길 수 없기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큰 재앙을 내리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에 대해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답하십니까? 본문 5절입니다.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다음이지요. “아니라” 사람들의 생각이 틀렸다고 분명히 선언하십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당시에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에 대한 예수님 자신의 해석을 말씀하시네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5절) 

예수님은 당시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생각에 대해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지요. 그러나 본문 5절의 말씀을 천천히 읽어보면, 당시 유대인들의 생각, 곧 예상치 못했던 재앙으로 목숨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는 분명 그러한 재앙을 당할만한 죄가 있다는 생각 자체를 예수님께서 부정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큰 재앙을 당하여 목숨을 잃기도 하였지만, 하나님께 이것이 부당한 처사라고 항변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당시 유대인들의 생각 가운데 어느 지점을 반대하며 “아니라”고 말씀하셨던 것일까요? 생각지도 못했던 재앙을 만나 죽음을 당한 사람들만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여 징벌을 받아야 하는 대상이라는 생각을 거부하셨던 것입니다. 본문 5절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잖아요? “너희도” 그렇습니다. 큰 재앙으로 죽음을 맞이했던 사람들만이 아니라 “너희도” 하나님 앞에 큰 죄를 범하고 있으니 언제라도 재앙을 당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너희도” 그 다음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기독교의 진리, 곧 기독교가 가르치는 진리의 핵심을 우리는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여러분, 복된 소식이라는 의미의 복음은 그 시작이 비극적인 소식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신가요? 왜 그렇습니까? 복음은 먼저 우리 모든 인간이 죄인이며 하나님의 진노를 결코 피할 수 없다는  사실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3장의 말씀 그대로이지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져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 그리하여 로마서는 이렇게 결론을 내리네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예수님께서 지금 강조하시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너희도” 빌라도에게 학살당한 사람들만이 아니라,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명만이 아니라, “너희도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바로 이것이 하나님 앞에 큰 죄인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는 우리 인간의 운명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운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회개입니다. 


열매를 얻지 않으면

예수님의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어떤 분들은 모든 인간의 운명이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것은 맞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기 이전의 상태이고 예수님을 영접하여 구원받은 우리는 심판이나 멸망의 운명에서 벗어났다고 말씀하실 분도 계실 듯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덧붙이시는 이른바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는 그처럼 쉬운 답을 우리에게 허락하지 않습니다. 

자, 어떤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는 포도원지기를 고용하여 무화과나무가 잘 성장할 수 있도록, 나아가 무화과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무엇 하나 부족함 없이 공급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포도원의 주인은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기에 충분한 시간이 흐를 때까지 기다려주었습니다. 자, 이제는 열매를 맺을 때가 되었겠지라는 마음으로 포도원에 심은 무화과나무를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모든 조건을 다 갖추었고 충분한 시간을 기다려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무화과나무는 열매를 맺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포도원의 주인은 결단을 내립니다. 

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7절) 

지금 포도원에 심겨진 무화과나무의 상황이 어떻습니까? 너무도 위태로운 상황이지요. 지금이라도 주인의 명령에 따라 포도원지기가 도끼를 휘두르면 큰 재앙을 만나 망하게 될 운명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비유에서 무화과나무가 이처럼 위태로운 운명에 처하게 된 이유가 무엇이지요? 무화과나무가 포도원에 심겨지지 않았기 때문인가요? 무화과나무가 포도원 주인이 제공하는 풍성한 돌봄과 영양분을 제공받지 못했기 때문인가요? 아닙니다. 무화과나무는 포도원 주인의 특별한 관심을 받아 잘 조성된 포도원에 심겨졌습니다. 오랜 시간 포도원지기의 보호를 받았습니다. 마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천국의 백성이 된 것처럼, 마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주님의 돌보심과 보살핌을 날마다 누리며 살아가는 것처럼 오늘 본문에 나오는 무화과나무가 꼭 그와 같습니다. 그러면 무화과나무가 지금 당장이라도 도끼에 찍혀 큰 재앙을 만날 운명에 처해진 이유는 무엇입니까? 단 하나죠. 열매를 맺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 곧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오늘 나의 삶에 적용하더라도 여러분은 하나님의 나라 포도원에서 절대로 제거될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자신할 수 있으신가요?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은 아직도 예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저 불신자들만이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의 상황을 너무도 정확히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아니라, 너희도”(X2)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5절) 
 

회개의 열매

우리 인간에 대한 주님의 평가는 냉정합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다 망하게 될 운명입니다. 열매를 맺지 않으니 찍혀 버려질 운명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와 우리 교회에게 이 정도의 평안을 허락해 주시니 그것이 은혜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떠한 이유로 지금 당장 큰 재앙을 당해도 전혀 이상 할 것 없는 우리들에게 이처럼 평안을 허락해 주실까요? 오늘 본문의 마지막 두절이 그 이유에 대해 답하고 있습니다. 

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8-9절) 

포도원지기는 포도원 주인의 앞을 막아서지요. 그리고 간청합니다. 조금 더 유예하여 달라는 요청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이야기하네요.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친히 공급해 주신다는 약속이지요.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지금 포도원 주인은 물론이요 포도원지기가 무화과나무에게 원하는 것은 딱 한가지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열매를 맺을 수만 있다면 일년을 더 기다릴 수도 있고요, 열매를 맺을 수만 있다면 모든 좋은 거름을 다 줄 수도 있어요.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열매에 대해서 다양한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본문의 전반적인 문맥에 따라 본문에 등장하는 ‘열매’의 의미는 회개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본문의 ‘열매’를 ‘회개의 열매’라고 이해하면, 마지막 두 절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그가 올해는 회개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가 회개할 수 있도록 
제가 필요하면 도랑도 파주고, 
필요하면 거름도 줄 터이니 
그가 회개하기만 한다면(X2) 얼마나 좋겠습니까? 

주님께도 지금도 우리에게 기다리며 기대하고 계신 단 한 가지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바로 회개입니다. 성도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회개하지 않으면 우리의 변하지 않는 운명은 심판이요 멸망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에게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아직 기회가 주어졌을 때 우리의 마음을 다하여 회개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회개만이 우리와 우리 교회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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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누가복음 강해2022. 3. 13. 16:52

영화 <300>으로도 많이 알려진 페르시아와 스파르타 사이의 전쟁은 처음부터 승패가 너무도 분명해 보였습니다. 아하수에로 왕이 친히 이끌었던 페르시아의 군대는 25만 명에 이르렀고, 이에 대항하기 위해 급하게 징집한 그리스 군대의 숫자는 칠천 명에 불과하였지요. 그러나 그 칠천 명 중에는 조상 때로부터 전쟁의 용사로 살아왔던 300명의 스파르타 군인들이 있었습니다. 페르시아가 그리스를 점령하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길에는, 한쪽은 높은 절벽이 놓여있고, 또 반대쪽은 깊은 바다가 있는 좁은 통로를 지나가야 했습니다. 가장 좁은 곳은 좌우의 폭이 18m에 불과했던 그곳의 이름은 그리스어로 ‘테르모필레,’ 곧 열문이라는 뜻입니다. 스파르타인 300명은 25만 명의 페르시아 군대를 저지하기 위해 바로 그곳 테르모필레를 막아섰지요. 테르모필레에서 벌어진 첫 번째 전투는 스파르타인들의 완벽한 승리였습니다. 그다음 날 아하수에로는 이들을 물리치기 위해 최정예부대를 투입했지만 속절없이 당하고 말았습니다. 25만 명의 잘 훈련된 대군이 고작 스파르타인 300명에게 막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는 상황이 펼쳐졌던 것입니다. 

이처럼 스파르타인들의 저항은 매우 강력했지만, 이들의 저항은 오래지 않아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리스인 가운데 배신자가 나타났고, 그는 페르시아 군대에게 절벽 위를 돌아가는 길을 안내하였습니다. 좌우폭이 18m인 매우 좁은 지역에서 싸운다면 제아무리 거대한 군대라 하더라도 300명의 용맹한 스파르타인들을 소탕할 수 없었지만, 이제 페르시아 군대는 그들을 앞과 뒤에서 포위할 수 있으니, 스파르타인 300명이 25만 명의 페르시아 군대를 더 이상 막아설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00명의 스파르타 용사들은 자신의 목숨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항전을 포기하지 않았고, 그들이 마지막 순간 가족들에게 남겼던 메시지는 그리스의 역사가 헤르도투스의 글을 통해 지금까지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낯선 이여, 우리는 스파르타인들이 기대한 대로 행동했고 이제 여기에 묻히노라고 그들에게 전해주오” 

300명의 용사로 25만명의 페르시아 군대를 막아선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300명의 스파르타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그 길을 회피하지 않았고, 스파르타인답게 최후의 항전을 다하기로 결심하였던 것이지요. 사순절을 보내는 우리가 기억하는 예수님의 삶은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당당히 걸어가셨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 예수님 주변의 사람들은 상상도 하지 못했지만 예수님은 분명히 알고 계셨습니다.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십자가의 죽음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십자가의 길을 걷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를 통해 구원을 완성하는 메시아의 사명을 단 한순간도 잊으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낯선 이여, 우리는 스파르타인들이 기대한 대로 행동했고 이제 여기에 묻히노라” 이것이 전사로 한평생을 살았던 스파르타인의 삶이었다면, 우리 주님의 일생은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성도들이여, 나는 성부 하나님이 기대하신 대로 행동했고 이제 여기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맞이하노라” 


거부

오늘 본문에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하나의 이야기를 건네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본문 31절입니다. “곧 그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이르되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지금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그들이 거주하고 있던 지역, 그들이 활동하던 장소, 그들의 생활 영역에서 예수님이 제발 떠나면 좋겠다는 그들의 마음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물론,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다른 이유를 댑니다.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헤롯이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다는 이 이야기는 복음서 전체에서 오늘 본문에만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전한 바리새인들의 이야기, 곧 헤롯에 예수님을 죽이려한다는 소식이 정확한 사실이었는지 아니면 바리새인들이 잘못된 정보를 들은 것인지 혹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위협하려고 꾸며낸 이야기인지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분명한 알 수 있는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존재와 예수님의 사역을 탐탁지 않게 여겼고 예수님이 자신들의 생활영역에서 떠나시기를 원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떠나기를 원했던 사람이 헤롯일 수도 있고 그 이야기를 직접 예수님께 전달하는 바리새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 되었든 오늘 본문에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분명히 말했던 이야기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라는 말은 당시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마음을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 역시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님 자신에 대해 어떠한 마음을 품고 있었는지 너무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본문 34절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 사람들에 대해 이렇게 탄식하십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이 구절은 일차적으로 구약성경의 내용을 염두에 두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모든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만을 섬기도록 많은 선지자를 보내주셨습니다.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을 파송하셔서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기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으로 대표되는 유대인들의 반응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의 표현 그대로입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그런데 예수님의 이 한탄은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과거의 이야기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갈릴리에서의 사역을 마치고 예루살렘을 향해 걸아가고 계시지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인류 구원의 역사를 완성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적대시하였던 헤롯이나 바리새인들만이 아니라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일반 시민들도 그 주님을 거부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시네요.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번이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지자를 보내주시고, 하나님의 종들을 보내주신 이유는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로운 품에 돌아오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끝까지 거부하고 하나님의 호의를 거절하는 그들을 향해 성부 하나님은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곧 하나님이신 예수님마저 거부하고 있어요. 그러니 예수님은 이렇게 탄식하십니다.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께 범하는 많은 죄악이 있지요. 우리 인간이 범하는 수많은 죄 가운데 너무도 중요한, 그리하여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우리를 벗어나게 하는 결정적인 죄를 하나 꼽는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죄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어쩌면 살인이나 간음이나 도둑질에 비해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죄에 대해 우리는 너무나 무관심한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죄가 얼마나 크고 중대한 것인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구절을 하나만 꼽는다면 예레미야서의 말씀을 언급할 수 있을 듯합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렘 2:13) 

유대인들이 범한 죄악이 두 가지로 요약되어 있네요. 그 가운데 첫 번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수의 근원이 되어주심에도 불구하고 그 주님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죄악이 단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그리하여 매주 주일이 돌아오지만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 비그리스도인들만 저지르는 죄악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였던 사람들, 하나님의 도성인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사람들, 그리하여 때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을 예배하였던 사람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순절을 보내며 우리가 나 자신을 돌아보아야 하는 가장 중요한 죄의 목록이 있다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가지고 있으면서도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예수님의 그 놀라운 은혜를 잊어버린 채 살아가는 “무감각의 죄”입니다. 


십자가의 길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을 향해 걸어가셨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의 사역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헤롯이나 바리새인들과 같은 사람들은 예수님께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라고 요청했지요. 그들의 이러한 마음이 예수님께 직접 전달되었을 때, 예수님은 매우 확고한 대답을 주십니다. 

이르시되 너희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32절)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칠 것이다’ 여기에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나 병을 고치시는 것은 누가복음을 비롯한 공관복음 전체에서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핵심적으로 묘사하는 활동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과 내일은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시겠다는 이 말씀은 아직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멈추거나 중단할 때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자신의 공생애 사역이 멈출 때가 언제인지 분명히 말씀해 주시네요.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여기에서 제 삼일은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지만, 가장 적절한 해석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그 이후에 삼일 만에 부활하신 장면을 가리킨다는 해석입니다. 예수님은 누가 무엇이라 이야기하든 상관없이 성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공생애의 사역을 묵묵히 감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은 마침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온 인류를 구원하는 메시아의 사명을 완수하시는 것으로 이어졌습니다. 동일한 내용이 33절에도 반복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33절) 

예수님은 지금 메시아로서 걸어가야 하시는 공생애의 길을 걷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선언하시죠.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그런데 그 길의 최종 목표지가 어디입니까?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자신이 온 인류의 모든 죄악을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 길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길인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마침내 성부 하나님께도 외면받는 길이라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분명히 선포하십니다. “내가 나의 길을 가리라”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 길을 걸으셨고, 십자가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한 구원을 완성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주님의 은혜를 거부할 때가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참 다행이지요. 우리가 주님의 은총을 거부할 때마다 주님께서도 우리에 대한 호의를 거두신다면 우리에게는 아무런 소망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그때에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베푸시는 구원의 역사를 쉬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여전히 우리에게는 기회가 남아 있는 거예요. 오늘 본문의 마지막절인 35절을 보십시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35a절)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들이지 않은 결과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삶이 황폐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여전히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시니 여전히 우리에게는 마지막 기회가 남아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35b절) 

예수님의 말씀을 분명히 부정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동일한 뜻을 담고 있는 긍정문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동일한 뜻을 담고 있는 긍정문으로 바꾸면 이렇게 됩니다.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가 되면 나를 보게 되리라’ 곧, 아직은 기회가 있으니 돌이켜 주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를 받아들이면, 그들의 삶에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진다는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아직 우리에게는 기회가 남아있습니다. 


300명의 스파르타인들은 아하수에로 왕이 이끄는 25만명의 군대에 대항하여 결사 항전하였습니다. 그들은 그 싸움이 결말을 처음부터 예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스파르타인으로서 스파르타인답게 행동하며 죽는 길을 선택하였지요. 그런데 그들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낯선 이여, 우리는 스파르타인들이 기대한 대로 행동했고 이제 여기에 묻히노라고 그들에게 전해주오” 스파르타인들의 이 메시지는 모든 그리스 사람들에게 전해졌고 그들의 마음에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그리스의 여러 도시국가들은 서로에 대한 미움과 다툼을 그치고 자신들을 공격하기 위해 쳐들어온 페르시아 군대를 방어하기 위해 모든 힘과 지혜를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살라미스 전투와 플라타에아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이끌어낸 그리스 군대는 페르시아의 대군을 모두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훗날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드 몽테뉴는 테르모필레에서 마지막까지 항전하였던 300명의 스파르타인들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고 합니다. “승리에 필적하는 성공적인 패배가 있었다.”

예수님은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사역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 순간에도 예루살렘을 향해 묵묵히 걸어가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의 외면을 받고 제자들에게는 배신을 당하며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지요. 여기까지 보면 예수님의 이야기는 하나의 실패한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야기는 결코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멸시를 받으면서도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십자가의 죽음을 향하여 당당히 걸어가셨던 예수님의 이야기는 사순절을 보내며 예수님께서 걸으신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는 우리의 마음에도 큰 울림을 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요? 만일 이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지금도 우리의 마음을 울리고 있다면 우리에게 남겨진 역할은 더 이상 주님의 십자가 은혜를 외면하지 않는 것, 이제는 주님의 십자가 은혜를 내 생의 가장 귀한 것으로 여기는 것, 그리하여 우리도 주님과 함께 십자가의 그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순절을 보내는 우리의 심령마다 십자가를 지기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던 예수님의 발자취가 분명히 새겨지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은총을 거부하는 죄에서 돌이켜 주님의 십자가 은혜를 풍성히 누리는 은혜의 자리에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주님의 십자가 은혜를 외면할지 모르지만, 주님께서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으셨던 십자가의 길을 지금도 따라가시는 여러분에게는 주님의 따스한 품에 품어 주시는 그 은혜가 언제나 충만히 흘러 넘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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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누가복음 강해2022. 3. 6. 16:49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기적이 많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기적 혹은 하나님의 이적을 가만히 살펴보면, 하나님의 기적이 한두 번 간헐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많은 기적이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특정한 시대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초자연적인 기적이 집중적으로 나타났던 시대가 크게 두 번 있었는데 그 두 번의 시대는 과연 언제였을까요? 그 첫 번째는 모세의 시대입니다. 곧 출애굽의 과정에서 그리고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많은 기적을 집중적으로 행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모세의 시대 이후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기적이 무더기로 나타났던 시대는 또 언제였을까요? 엘리야와 엘리사의 시대입니다. 엘리야와 엘리사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에 하나님은 갈멜산에 모여있는 사람들에게 하늘에서 불도 내려주시고, 온갖 신기한 기적을 집중적으로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더욱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을 집중적으로 경험했던 모세 시대의 사람들과 엘리야-엘리사 시대의 사람들은 구약 성경의 그 어떠한 시대보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신앙이 더욱 견고하고 든든했을까요? 하나님의 기적을 그토록 많이 보고 체험했으니, 모세 시대의 사람들과 엘리야-엘리사 시대의 사람들은 하나님만을 믿고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그 믿음과 신앙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을까요? 정답은 ‘아니요’입니다. 모세의 시대를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애굽에 열 가지 재앙, 곧 열 가지 기적으로 베풀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위대한 기적으로 자신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냈으면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신앙이 생길만하지요. 그러나 그들은 시내산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겼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라, 그 땅을 점령해라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였고, 그들의 믿음 없음으로 말미암아 결국 40년 동안 광야에서 유리방황하는 신세가 되지요. 엘리야와 엘리사의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시대에 하나님은 많은 기적을 행하여 주셨고, 심지어 엘리야 선지자가 기도하자 하늘에서 불이 갈멜산에 내려오기도 했습니다. 그 모든 장면을 직접 보았다면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 온전히 회개하고 바알 신이 나 아세라 신과 같은 모든 우상들을 버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완전히 회복될 만하지 않은가요?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께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세벨은 엘리야를 잡아 죽이겠다고 달려들었지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기적을 많이 경험한다고 해서 믿음이 성숙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광야 같은 인생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시험을 당하시는 장면이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은 가장 먼저 장소의 변화를 언급합니다.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 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1절) 

오늘 본문 이전까지 예수님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요단 강에 계셨습니다. 그런데 성령에게 이끌리어 어디로 이동하시죠? 광야로 이동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요단 강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장소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아름다운 영광이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누가복음 3장은 그 장면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첫째로 하늘이 열리고, 둘째로 성령께서 예수님의 위에 임하시고, 마지막 세 번째로 하늘에서 성부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눅3:22) 한 마디로 요단 강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드러나는 장소요, 하나님의 아름다운 영광이 드러나는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무엇을 말씀합니까? 예수님께서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 요단 강을 떠나 광야에 들어갔습니다. 광야는 요단 강과는 정반대의 의미를 담고 있지요.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광야는 고난의 장소요 시련의 장소요 시험을 당하는 장소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1절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예수님이 처음부터 누리셨던 하나님의 영광이 아름답게 드러나는 곳인 요단 강을 떠나, 고난의 땅이요 고통의 땅이요 시험의 장소인 광야로 들어가셨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또 한 가지 사실을 관찰할 수 있는데, 예수님께서 요단 강에 머무신 시간과 예수님께서 광야에 머무신 시간은 큰 차이가 난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 요단강에 가신 이유는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요단 강에 머무신 시간은 세례를 받고 아오시는 정도의 그렇게 길지 않은 시간이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 광야에 계신 기간은 어떻습니까?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거주하신 기간은 모두 40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아름다운 영광이 드러나는 요단 강은 예수님께서 짧은 시간만 머무셨습니다. 그러나 고통의 장소요 시험의 장소인 광야에는 40일이라는 오랜 기간을 거주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경험하신 체험과 광야에서 겪으신 시험, 그리고 예수님께서 요단 강에 머무셨던 짧은 시간과 광야에서 오랫동안 고난을 당하신 기간을 생각해보십시오. 이것은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모습과 너무도 닮아 있지 않나요?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잊을 수 없는 놀라운 체험을 경험하곤 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예배하는 여러분에게 간증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아마 한 분도 빠짐 없이 각자의 삶에 찾아온 하나님의 아름다운 손길을 이야기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나님의 아름다운 영광이 예수님에게 나타났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지금 우리가 처해있는 삶의 모습을 바라본다면 지금도 여전히 요단 강에 머물러 계신 분들이 얼마나 될까요? 여기에 계신 모든 분들의 현재 삶을 제가 다 알지 못하기에 단언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우리 대부분은 요단 강에 머물러 있기보다는 고통도 많고 고난도 많고 그래서 시험을 당할 수밖에 없는 광야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도 짧은 요단 강의 체험을 뒤로하고 오랜 시간 광야에 들어가 시험을 받으셨다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때는 요단 강의 아름다움을 경험하였는데, 한때는 요단 강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운 영광을 체험하기도 하였는지 왜 지금은 광야 같은 인생을 살아가고 있느냐고 불평하지 마시고도 말고 원망하지도 마십시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 모두의 삶이 광야 같은 인생일진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마주치는 그 모든 시험을 이기고 승리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나에게 찾아오는 모든 시험을 이겨내어 우리 주님과 함께 승리의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기적의 떡 VS 약속의 말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사단에게 세 가지 시험을 받으셨지요. 오늘 본문은 그 가운데 첫번째 시험에 대해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본문 2절을 보십시오.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2절) 

여기 2절의 말씀은 시험의 구체적인 내용이라기보다는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생활하시면서 겪으셨던 고통스러운 과정을 묘사해주고 있지요. 지금 예수님께서 광야에 계십니다. 광야에는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이 아무것도 없잖아요. 먹을 음식, 마실 물, 거주할 집 등을 구하기가 너무도 어려운 장소가 광야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절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어요.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나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이것은 광야에서 생활했던 예수님의 모습이기도 하고, 광야 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자, 이제 예수님에 대한 사단의 시험이 시작됩니다. 

마귀가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을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 (3절) 

지금 사단이 예수님께서 던진 시험, 곧 사단의 첫번째 시험의 주제는 오늘 설교의 제목입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돌보심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광야에서 음식을 얻지 못하여 굶주리고 계셨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광야 같은 인생을 살아가며 여러 가지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보호와 하나님의 돌보심은 과연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사단의 대답은 매우 단순합니다. 그것은 “기적의 떡”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들이 광야 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께서 그들을 진정으로 돌보신다면, 돌로 떡을 만들든 혹은 하늘에서 음식이 떨어지게 하시든 필요할 때마다 기적의 떡을 만들어 주셔야 한다는 생각이지요. 모든 사람이 코로나로 건강의 위협을 받을지라도 하나님의 자녀라면 기적적으로 바이러스를 이겨내야 한다고, 모두가 경제적으로 힘겨운 시간을 보내는 동안에도 하나님의 자녀라면 기적적으로 재물의 축복을 받는 것이라고, 모두가 실패와 좌절을 경험하더라도 하나님의 자녀는 기적적으로 승승장구하고 언제나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를 돌보고 계신다는 증거라고 사단은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러한 사단의 시험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 보다 구체적으로 광야 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돌보심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무엇일까요? 그것이 본문 4절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된 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4절) 

예수님의 말씀을 무심코 읽으면 우리 육신의 양식이 되는 떡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로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마태복음에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다음에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는 말씀이 덧붙여져 있습니다(마 4:4). 그래서 성도들 중에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육신의 양식인 떡을 중요하게 여기지 말고 그보다는 영혼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고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단이 예수님을 시험하는 그 첫 번째 시험의 주제가 무엇입니까? 광야 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의 돌보심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그러면 본문 4절에서 예수님은 이 질문에 대해 어떻게 답하고 계신 것일까요? 예수님의 말씀을 보다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인용하시는 신명기 8장의 흐름을 찬찬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명기 8장을 찾아보시겠습니다. 신명기 8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내가 오늘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명령이네요. 그리고 이제 이 명령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등장합니다.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신 8:1)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언약의 말씀입니다. 모세가 신명기 8장의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포하고 있을 때,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40년을 살아왔습니다. 오늘 본문 누가복음 4장과 마찬가지로 이 장면에서도 광야 40년은 시험의 장소요, 시험의 때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 시험을 통과하는 방법에 대해 신명기 8장 1절은 무엇이라고 말씀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서,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시험을 통과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대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신다는 약속입니다. 

신명기 8장 2절은 이것을 조금 더 풀어서 설명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광야 40년의 목적이 무엇인지 곧이어 그 목적이 등장합니다.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여기에 시험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네요. 그러면 시험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신8:2) 자, 이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말씀이 신명기 8장 3절에 등장합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여기에 만나가 등장하죠? 만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양식으로 일반적인 음식이 아니라 기적의 떡입니다. 기적의 떡인 만나를 먹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기에서 떡은 일반적인 양식이 아니라 기적의 떡인 만나를 말합니다. 광야 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의 살 길은 기적의 떡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8:3) 

광야 같은 인생 속에서 하나님의 돌보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사단은 그 대답이 기적의 떡이라고 속삭입니다. 그러나 신명기 8장을 인용하시며 예수님은 어떻게 대답하십니까? 광야 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돌보심은 하나님의 말씀, 보다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언약의 말씀 안에 있습니다. 그리하여 지금 나의 삶은 광야같고 지금 나의 삶에는 기적의 떡이 하늘에서 내려오지 않을 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에 마지막 순간까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신명기 8장 1절의 약속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 마침내 그곳에서 우리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보호와 돌보시는 손길을 참으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승리

모세 시대는 구약 성경에서 손에 꼽힐 만큼 많은 기적이 일어난 때였지요. 그들은 광야에서 40년 동안 단 하루도 빠짐 없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기적의 떡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제는 아시잖아요. 그들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기적의 떡을 매일 먹으면서도 그들에게 찾아온 시험에 철저히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의 마음은 언제나 기적의 떡을 원했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언약의 말씀을 믿으며 그 모든 시험을 참고 견디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신약 성경으로 넘어오면, 또다시 수많은 기적이 집중적으로 등장하는 시기가 등장합니다. 바로 예수님의 시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역시 유대인들에게 기적의 떡을 먹여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사건을 오병이어라고 부르지요. 그러면 여러분, 기적의 떡을 먹었던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은 그 마음이 변하여 예수님을 자신들의 구세주로 받아들였나요?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본디오 빌라도를 향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이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기적의 떡을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른 신앙인으로 변화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셨던 복음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채 기적의 떡에만 머물러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것이 오늘 본문이 소개하는 사단의 첫 번째 유혹입니다. 

성도 여러분, 광야 같은 인생을 살아가며 여러분의 마음은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물론,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때로 우리에게 기적의 떡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기적의 떡에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사단의 유혹에 넘어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의 삶은 늘 광야 같아서 기적의 떡을 갈망하기 마련이지요. 광야 같은 이 세상을 살아가며 우리의 마음을 기적의 떡이 아닌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에 둔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 모세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도 넘어지고, 엘리야-엘리사 시대의 북이스라엘 사람들도 실패했으며,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도 사단의 시험에 쓰러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른 사람들은 모두 사단의 이 시험에 넘어졌을지라도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은 사단의 시험을 넉넉히 이겨내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리하여 오늘 우리도 주님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신뢰하며 광야 같은 이 세상에서 사단의 시험을 물리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오늘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X2)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 (신 8:1) 

비록 지금은 광야 같은 인생을 살아갈지라도, 하나님의 이 말씀은 반드시 현실이 되어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서 우리는 주님의 선하신 손이 지금도 우리를 돌보아 주셨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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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누가복음 강해2022. 1. 9. 16:53

오늘 설교의 제목은 “오직 예수”입니다. “오직 예수”라는 선언은 기독교의 핵심 가르침을 내포하고 있지요. 그것이 무엇입니까?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기독교는 세계의 주요한 종교를 창시하였던 석가모니나 마호메트나 공자 등 세계의 성인들을 통해 인간에게 구원의 길이 열린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지요. 그뿐이 아닙니다. 인간이 깊은 깨달음을 얻는다든지, 스스로 고행의 길을 선택한다든지, 혹은 선행을 많이 한다고 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분명한 믿음이 무엇입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라는 선언에 담겨있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그 누구도, 그리고 그 무엇도 우리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빈 들에서

누가복음 3장은 세례 요한의 사역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3장은 세례 요한이 활동하였을 때 세상의 통치자들이 누구였는지를 나열하며 시작합니다.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 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 왕으로,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눅 3:1-2) 

구약 성경에서 선지자들이 하나님께 소명을 받은 장면을 묘사할 때 통치자들의 연대를 기록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러한 방식은 선지자들의 소명이 분명한 사실이라는 역사적 신빙성을 부여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더욱 중요한 의미가 있으니, 세속 권력과 구별되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와 역사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할 때에도 로마 제국의 디베료 황제가 지중해 전역을 다스렸습니다. 그가 임명한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헤롯, 빌립, 루사니아와 같은 분봉왕들이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습니다. 만일 세례 요한의 시대에 신문과 방송의 기자들이 있었다면 그들은 대부분 로마의 황제를 취재했겠지요. 그들은 총독의 행동이나 분봉왕들의 발언에 집중하였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시대, 세속 권력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에는 종교 권력을 틀어잡고 있었던 대제사장이 두 명이나 있었습니다. 누가복음은 그들의 이름이 안나스와 가야바였다고 기록하여 주네요. 그러므로 요한의 시대에 사람들이 영적인 목마름을 느끼면 가장 먼저 어디로 갔을까요? 당시 사람들은 영적인 갈망을 채우기 위해 제일 먼저 대제사장들이 매일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있는 예루살렘 성전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어디에 임합니까? 황제와 총독과 분봉왕들이 거주하는 권력의 중심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곳은 대제사장들이 제사를 집례하는 화려한 예루살렘 성전도 아닙니다. 2절을 다시 보십시오.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아니, 하나님의 말씀이 로마의 황제가 살던 황궁에 임하지 않은 것은 그래도 이해가 되지요. 하나님의 말씀이 빌라도 총독이나 누가복음 3장에 등장하는 여러 분봉 왕들에게 임하지 않는 것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돼요. 그런데 여러분, 본문 2절에는 버젓이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었다고 기록해 놓고는 하나님의 말씀이 예루살렘 성전의 대제사장들에게 임한 것이 아니라 빈 들에서 요한에게 임하였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우리나라에 대통령 선거가 있는 해이지요. 국가의 미래를 위해 매우 중요한 선거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모든 국민은 바른 판단력을 가지고 선거에 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는 마음으로 선거에 임해야 하겠지요. 그러나 여러분, 대통령 한 명을 잘 뽑는다고 우리 나라가 문화 강국이 되는 것도 아니고, 대통령 한 명을 잘 뽑았다고 경제가 살아나는 것도 아니며, 대통령 한 명을 잘 뽑았다고 우리나라가 행복이 가득한 나라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지난 수많은 선거를 통해 우리는 그와 같은 사실을 경험하였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언론은 차기 대권주자들에게 향하고 있습니다. 그에 따라 모든 국민들의 이목도 청와대와 여의도를 향해 있는 것 같아요.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로마에는 디베료 황제가 있었고, 유대에는 빌라도 총독이 있었으며, 분봉 왕으로는 헤롯과 빌립과 루사니아가 있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그 어디에도 임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교회가 참 많이 있지요. 요한의 시대에 예루살렘 성전은 매우 화려한 성전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서울 시내에는 규모도 크고 건물도 화려하며 내부시설도 잘 갖추어진 많은 교회들이 있습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요한의 시대에 예루살렘 성전에 대제사장이라는 직분을 가지고 사람들 앞에서 제사를 주도하던 사람들이 있었지요. 오늘 우리 시대에도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은 그 이름을 들어보았을 만한 유명한 설교자들도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언론은 대선 주자들의 말과 행동에 온통 귀를 기울이고 있지요. 마음과 영혼의 갈증을 느끼는 사람들은 유명하다는 설교자들에게 귀를 기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곳에 임합니다. 그곳이 어디입니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빈 들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눈에 무엇이 보이십니까? 주변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왕궁의 화려함도 없고, 왕궁에 있을 법한 힘과 권세를 가진 사람도 안 보이고, 사람들의 시선이 주목할 그 어떠한 것도 보이지 않아 지금 내가 있는 이 자리는 그저 황량한 빈 들처럼 보이는 분들이 계신가요? 여러분이 계신 바로 그 빈 들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의 시선은 주목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위대하신 역사가 여러분의 삶을 온전히 사로잡으시기를 바랍니다. 


오직 주님만이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세례 요한에게 임하였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세례 요한을 찾아 빈 들로 갔지요. 그곳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을 들을 수도 있었고, 그곳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직접 체험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체험은 사람들로 하여금 세례 요한에 대한 기대를 갖게 만들었어요.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생각하니 (15절)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였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은혜입니다. 요한을 통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다는 것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축복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은혜와 이러한 축복이 사람들의 마음을 헛된 기대로 이끌었다는 사실이죠. 15절은 어떻게 시작합니까?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한계를 알고 있습니다. 자신이 극복할 수 없는 그 지점에서 더 나아가기 위해,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나의 밖에서 나를 도와주고 나를 이끌어주고 나아가 나를 구원해줄 구원자의 손길을 간절히 원하게 되어 있어요. 그것이 연약한 인생을 살아가는 모든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장면을 보고, 세례 요한을 통해 지금 나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경험을 하니 사람들의 마음에 헛된 기대감이 가득해졌어요. 그것이 무엇입니까? 15절의 뒷부분이지요.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생각하니” 그러나 우리 모두는 그 대답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그리스도인가요? 아니요. 요한은 절대로 그리스도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구원자가 됩니다. 

우리 주변에는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기도하고 때로는 그분들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에 자연스럽게 바로 그 사람을 의지하는 마음이 생겨요. 이것이 연약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본성이거든요. 세례 요한은 분명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였고, 사람들은 세례 요한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입니다. 더 나아가면 안 됩니다.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생각하니”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커다란 실망입니다. 

사람들이 세례 요한에 대해 헛된 기대를 품기 시작했습니다. 요한은 그 사실을 민감하게 눈치 챘던 것 같아요. 그래서 세례 요한은 모든 사람들에게 분명히 대답해줍니다.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16절) 

요한의 대답은 먼저 요한 자신과 예수님에 대한 비교로 시작됩니다.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세례 요한은 자신의 능력과 예수님의 능력 사이에는 비교할 수 없는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먼저 언급하지요. 그리고 또 한 가지,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그러면 예수님은 어떠하십니까?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세례 요한은 자신이 베푸는 세례와 예수님께서 베푸실 성령의 세례를 대조적으로 비교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사람들이 회개하였다는 증표로 물로 세례를 줍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과 심령이 온전히 변화시켜주시는 성령의 세례를 주시는 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는 분, 우리의 삶을 참된 행복의 삶으로 변화시켜주시는 분, 오늘 우리의 삶에 은혜 위에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유일한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역사의 주관자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실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 곧 우리의 심령을 변화시키는 참된 구원을 주시는 분으로 소개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마지막 절에는 예수님의 또 다른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17절) 

본문 17절이 묘사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심판자이신 예수님입니다. 농부가 가을 추수 때에 행하는 일을 비유로 설명하고 있지요. 키를 들고 알곡과 쭉정이를 구분하는 장면입니다. 그렇게 알곡과 쭉정이를 구분하면 어떻게 행동합니까?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의인과 악인을 구별하여 세상을 심판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심판자가 되신다는 것의 일차적인 의미는 마지막 때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 온 세상을 공의로 심판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마지막 날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까지는 모든 심판을 보류하고 계실까요? 우리는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심판을 목격하기 위해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인류의 마지막 그날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심판자가 되신다는 것은 마지막 날 온 세상을 공의로 심판하신다는 의미이지만,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이 임하기 전에도 주님께서 친히 역사의 주관자가 되신다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자, 세상에는 세상의 권력자들이 있습니다. 로마의 황제일 수도 있고 총독이나 분봉왕이 될 수도 있지요. 심지어 예루살렘 성전의 대제사장들처럼 종교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일 수도 있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의 말씀은 어디에 임하였지요? 빈 들에 임합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머물지 않는 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임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펼쳐집니다. 그러니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내면이 달라지고 우리의 삶이 변화하고 우리의 심령이 회복하는 장소는 어디입니까? 세상의 통치자들이 있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빈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바로 이 지점에서 하나님 나라의 놀라운 특징 하나가 등장합니다. 세상의 권력자들이 있는 왕궁이나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빈 들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는 점점 자라나 마침내 이 세상의 역사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 품어버립니다. 

예수님께서 하루는 이렇게 천국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마 13:31-32) 

성도 여러분, 비록 아무리 둘러 보아도 보이는 것 하나 없는 빈 들에 서 있다 할지라도 그곳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기만 한다면, 그리하여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모셔들이기만 한다면 여러분이 계신 바로 그 자리에 하나님의 나라는 시작된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작은 겨자씨와 같아서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반드시 자라날 것이요, 자라난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될 것이요, 그 안에 많은 이들이 찾아와 하나님의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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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누가복음 강해2021. 11. 28. 16:46

연말과 연시가 되면 우리 사회의 이른바 전문가들이 내일에 대한 예측을 내어 놓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시간이 흐른 뒤 전문가들의 예측이 얼마나 실현되었는지를 조사한 연구를 보면 과연 이것이 각 분야 전문가들의 예측이었나라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전문가들의 예측과 그 이후에 일어난 현실 사이에 큰 괴리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 시대 전문가들의 예측이 가장 정확한 분야가 있다면 기상 예측입니다. 참 의외이지요. 얼마나 많은 국민들이 기상청의 예보에 불만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런데 기상예측이 가장 정확한 분야라고 하니 참 흥미롭습니다. 경제계의 예측 – 예를 들어 내년 경제성장률에 대한 전망 – 이나 정치계의 예측 – 이를 테면 내년 선거의 향방이 어떠하리라 – 는 것은 정확히 맞추는 경우보다 틀린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프로이센과 독일제국의 군인으로 근대적 참모 제도의 창시자로 평가받는 헬무트 폰 몰트케는 이렇게 말했다고 하지요. “전쟁에서는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 그러나 전쟁만 불확실한 것이 아닙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등 우리 사회의 모든 분야는 불확실한 것들로 가득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것을 ‘예측 불가능성’이라고 이름을 붙이기도 합니다. 

성경에서도 예측 불가능성에 대해 매우 강력한 어조로 말씀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전도서의 말씀이지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전 3:11) 

때를 따라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손안에 우리의 모든 삶이 좌우됩니다. 그런데 전도자의 중요한 관찰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의 처음과 끝을 사람은 측량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측 불가능성에 대한 성경의 선언이지요. 여기에는 각 분야의 전문가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여기에는 어떤 직감이나 신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람도 예외가 아닙니다. 여기에는 기도를 많이 하여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고 자부하는 사람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 중에는 그런 분이 한 분도 안 계시다고 생각하지만 내년의 운세를 알아보기 위해 이곳저곳을 기웃거리지 마십시오. 새해를 맞이하며 축복의 말씀을 받기 위해 이곳저곳을 기웃거리지도 마십시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내 인생의 모든 생사화복이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그 일을 우리 인간은 그 누구도 다 깨달을 수 없다고 분명히 믿습니다. 그러므로 한 해를 마무리하고 또 한 해를 준비하는 연말과 연시, 우리 그리스도인의 바른 자세는 내일에 대한 예측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측이 아니라 바로 준비입니다. 


언제 VS 어떻게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질문에 답변하신 내용의 일부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 세워진 멋진 성전을 자랑하듯 예수님께 소개하였지요. 그러자 예수님께서 날이 이르면, 곧 때가 이르면 예루살렘 상전이 모두 무너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께 다시 한번 질문합니다. 그날은 언제 임하게 될까요? 과연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무너지는 그 위기의 날, 대변동의 그날이 가까이 왔다는 징조를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사람들의 이러한 질문을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언제’입니다. 언제, 나의 삶에 큰 변화를 일으키는 그날이 찾아오겠습니까?라는 질문이지요. 다른 말로 하면, 사람들의 이 질문은 내일에 대한 예측을 원하는 질문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오늘 본문이 포함되어 있는 누가복음 21장의 대부분의 내용이 사람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긴 대답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천천히 읽어보면, 예수님은 언제라는 질문에는 답을 주지 않으십니다. 그 대신 ‘어떻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주십니다. 사람들의 질문, 곧 그날이 언제 올 것인지 ‘예측’에 대해서는 답변하지 않으시고, 그날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지를 말씀해주고 계십니다. 이와 관련하여 오늘 본문에도 매우 중요한 한 구절이 등장합니다. 그것이 본문 35절입니다.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35절) 

여기에 등장하는 ‘이 날’은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무너지는 바로 그날입니다. 이 지점에서 먼저 한 가지 사실을 지적하고 넘어가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다는 것은 단지 종교시설 하나가 파괴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금,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바라보았던 성전은 예루살렘에 세 번째로 세워진 성전으로 헤롯 왕이 세웠다고 하여 ‘헤롯 성전’으로 불리는 성전입니다. 예루살렘에 역사상 처음으로 세워진 성전은 솔로몬이 건축했다고 하여 이른바 ‘솔로몬 성전’으로 부르지요.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솔로몬 성전은 바벨론 군대에 의해 무너졌습니다. 그러니 솔로몬 성전이 무너지는 그날에도 단지 성전 하나만 무너진 것이 아니라, 바벨론이라는 이민족의 침략으로 말미암아 모든 토지가 황폐해지는 역사적 현장이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바라보고 계시는 헤롯 성전도 AD 70년에 티투스 장군이 이끄는 로마 군대에 의해 무너졌습니다. 그러니 그날의 참화는 단지 종교시설 하나가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유대인들에게 민족적 비극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 35절에 등장하는 ‘그날’은 단지 종교시설 하나가 무너지는 날이 아니라 지금까지 살아왔던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위기의 날이요, 대변동의 날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모든 것이 뒤흔들리는 그 위기의 날, 그 대변동의 날이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일어난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분들에게는 건강했던 몸에 질병이 찾아오는 것이 그날의 시작이 될 수 있어요. 어떤 분들에게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실직이 그날의 시작이 될 수도 있지요. 어떤 분들에게는 큰 사고가 일어나기도 하고, 어떤 분들에게는 자녀에게 예상치 못했던 일이 발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우리 중에는 그날이 이미 찾아온 분들도 계시지요? 그리고 우리 가운데 어떤 분들에게는 바로 지금이 그날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가운데는 아직 그날이 찾아오지 않은 분들도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 그날이 나에게 찾아올지 알 수 없습니다. 나에게 찾아오는 그날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모습을 띄고 있는지도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한다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삶의 큰 위기와 대변동의 날이 불현듯 찾아오겠지만,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나의 삶을 송두리째 뒤 흔드는 대변동의 날을 피해 갈 수 있을까요? 그 정도로 부족하다면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하나님께 늘 기도하며, 말씀대로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면 이 위기의 날을 피해갈 수 있지 않을까요? 성도 여러분, 이러한 모든 기대는 헛된 기대입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시잖아요.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 임하리라”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그리고 지금도 열심히 하나님을 예배하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만 나의 삶에도 큰 위기의 순간이 찾아올 수 있다는 사실, 아니 나의 삶에도 대변동의 그날이 반드시 찾아온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 사실을 기억하고 인정할 때 비로소 우리는 그날을 착실하게 준비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조심하라

자, 우리의 삶에도 위기의 그날이 찾아오고 나의 삶에도 대변동의 그 순간이 찾아온다면 우리는 지금 어떻게 그날을 준비해야 할까요? 예수님의 대답은 매우 단순합니다. 본문 34절입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계속해서 예수님은 스스로 조심하지 않았을 때 일어나는 일에 대해 설명하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곧 스스로 조심하지 않으면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집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스스로 조심하라”는 말씀의 의미는 구체적으로 3가지입니다. 첫째로, 방탕함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둘째로, 술 취함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마지막 셋째로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먼저 방탕과 술 취함이 등장하지요. 주일예배에 참여하는 여러분들은 본문에 등장하는 방탕함이나 술 취함에 깊이 빠져 계신 분은 별로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언급하신 것은 조금 다른 차원입니다. 우리 신앙인들도 쉽게 그 유혹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것이 무엇입니까? “생활의 염려”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루는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비유에서 농부가 뿌린 씨앗은 길가에도 떨어지고, 돌밭에도 떨어지고, 가시떨기에도 떨어지죠. 길가에 떨어진 씨앗은 떨어지자마자 새가 와서 먹어버렸으니, 우리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묘사와는 조금 다릅니다. 돌밭에 떨어졌다는 것은 삶의 고통이 찾아왔을 때 믿음을 포기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데 수십 년 신앙생활을 해온 신앙인들은 어느 정도 이 단계를 넘어섰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세 번째로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앗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께서 이렇게 설명해 주십니다.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그다음을 주목하세요.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마 13:22) 이 단계만 넘어서면 좋은 밭에 떨어진 씨앗처럼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오래 하였다는 분들, 그래서 믿음이 좋다고 하는 분들도 너무도 쉽게 넘어질 수 있는 영역이 있으니 그것은 생활의 염려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너무도 쉽게 자주 넘어지는 ‘생활의 염려’를 가만히 분석해보면 그 깊은 밑바닥에는 불신앙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왜 염려합니까? 우리가 왜 걱정합니까? 우리가 왜 근심합니까? 그 이유를 신앙적으로 표현하면 매우 단순합니다. 지금도 내 인생을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는 여전히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 자리 잡고 있어요. 바로 불신앙이 우리 마음을 사로잡으면 생활의 염려가 내 마음을 사로잡게 되는 것이요, 내 마음이 생활의 염려로 가득 차 있다면 그것은 나의 마음에 불신앙이 가득 일어났다는 증거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지 않도록 “스스로 조심하라”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만일 스스로 조심하지 않으면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해집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 결과가 본문 34절의 마지막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뜻밖에” 나에게 위기와 대변동의 순간이 오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스스로 조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뜻밖에 그날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그날이 찾아와서 우리 삶에 무서운 덫이 되고 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번 한 주간 여러분의 마음이 굳건한 믿음에서 흔들리지 않도록 스스로 조심하십시오. 염려와 걱정과 근심의 거리들이 많이 몰려올지라도 믿음으로 그 모든 것을 이겨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스스로 조심하여 우리의 마음을 지키는 날들이 하루하루 쌓일 때 모든 사람에게 찾아오는 위기의 그날, 대변동의 그날이 찾아오더라도 우리는 신앙의 중심을 잡고 그 모든 과정을 이겨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오늘 본문이 시작하는 34절에서 예수님은 “스스로 조심하라”고 말씀하시지요. 그러면서 스스로 조심하여 마음을 지키지 못할 때 일어나는 일들을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마지막 구절인 36절에서는 스스로 조심하여 우리의 마음을 지킬 때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 지를 가르쳐주십니다.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36절) 

우리가 스스로 조심하여 나의 마음을 지킬 때 어떠한 일이 일어납니까?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이 구절은 나에게 그날이 찾아오지 않는다거나 나에게 위기의 때나 대변동의 시간이 찾아오는 않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예수님께서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본문 36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그리고 넉넉히 감당할 수 있다는 의미지요. 거기에 더하여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네요. “인자 앞에 서도록” 우리 성도들에게도 거대한 고통의 시기는 반드시 찾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조심하여 우리의 마음을 믿음으로 지키는 성도들은 그 모든 일을 넉넉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순간에도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과 함께 동행하기 때문입니다. 

자, 이제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이 모든 일을 주님과 동행함으로 능히, 넉넉히 감당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권면하십니다. 그 말씀은 무엇입니까?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깨어 있다는 것은 나의 마음을 수시로 점검하라는 말씀이지요. 본문이 시작하는 첫 구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방탕함이나 술 취함이나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해지지 않도록 날마다 영적인 민감성을 유지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문이 시작하는 34절의 “스스로 조심하라”는 말씀이나 본문이 마치는 36절의 “깨어 있으라”는 말씀은 동일한 의미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마지막 36절에는 깨어 있기 위한 하나의 구체적인 방법이 덧붙여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기도”입니다.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AD 3세기경, 하나님 앞에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도시를 떠나 사막에서 기도와 수도에 전념하던 분들이 계셨습니다. 역사가들은 이들을 가리켜 사막의 수도사들이라고 부릅니다. 사막의 수도사들 사이에 전해져 내려오는 하나의 일화가 있습니다. 하루는 이제 막 사막에 들어와 수도자의 길을 시작한 사람이 명망이 높은 스승님에게 질문했다고 합니다. “선생님, 제가 하나님과 더욱 친밀해지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나요?” 그러자 스승님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침에 태양이 떠오르도록 자네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아침에 태양이 떠오르도록 하기 위해 자네가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는 것처럼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위해서도 자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전혀 없네.” 이 대답에 만족할 수 없었던 이 수련생은 다시 한번 스승님께 질문하지요. “그러면 우리가 매일 기도하며 수련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러자 스승님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태양이 떠오를 때 우리가 잠들지 않고 깨어 있기 위함일세”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의 빛이 되시는 주님께서 매일 아침 여러분의 마음에 밝은 진리의 빛을 비추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항상 기도하여 깨어 있으십시오. 그리하여 매일 아침 태양이 떠오르듯 매일 우리의 삶을 찾아오시는 주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십시오. 우리 모두에게 큰 위기의 날, 모든 것이 뿌리째 뒤흔들리는 대변동의 날은 반드시 찾아올 것입니다. 그러나 매일 기도함으로 깨어 주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는 여러분들은 그 모든 시련을 넉넉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며 깨어 있기만 한다면, 그 모든 위기의 순간에도 우리의 인생을 여전히 붙잡고 계시는 하나님의 든든한 손길을 우리도 붙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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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누가복음 강해2020. 6. 4. 16:05

어느 건망증이 심한 40대 아주머니의 이야기입니다. 

아주머니께서 아파트 단지에서 쓰레기를 버리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아파트 경비원이 이렇게 소리 지르는 겁니다. “동수 어머니, 지금 뭐하세요!!” 그때야 이 아주머니께서 깨달으셨습니다. 지금 자신이 의류를 버리는 곳에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려고 하던 참이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리고 의류를 버리는 곳에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려 했다는 자신의 행동을 인식함과 동시에, 그 마음에 불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신은 집에서 나오면서 음식물 쓰레기만이 아니라, 못 입는 옷가지들도 한 봉지 가지고 왔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지금 자기 손에는 못 입는 옷가지들은 안 보이고 음식물 쓰레기만 들려있는 거지요. 

아주머니는 황급한 마음에 음식물 쓰레기장으로 달려가 코를 부여잡고 음식물 쓰레기통을 열어보았습니다. 그 안에 무엇이 있었을까요? 네, 그 안에는 음식 쓰레기와 함께 뒤엉켜있는 옷가지들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아주머니는 자신의 건망증을 한탄하고 또 한탄하면서 코를 부여잡고 옷가지들을 치웠습니다. 그리고 다짐했습니다. “이제는 정신을 좀 차리자.” “이제는 정신을 좀 차리자.” “내가 벌써부터 이러면 안 된다.” 계속해서 결심하면서 집에 들어왔지요. 그리고 이제 건망증은 멀리하고 스마트한 삶을 살려는 마음으로 시원한 냉수 한잔을 하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냉장고 문을 활짝 여는 순간. 

냉장고 안에는 버젓이 섬유유연제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고 합니다. 

내가 결심하고, 또 결심한다고 하여 건망증이 사라지고 스마트한 생활이 시작되지 않는 것처럼, 우리 안에 있는 죄성 역시 우리의 결심과 우리의 노력과 우리의 간절한 바람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이제는 정신을 좀 차려야지.” “이제는 정신을 좀 차려야지.”라고 결심하였지만, 냉장고 안에 버젓이 자리잡고 있는 섬유유연제를 바라보며 절망하듯,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살고자 결심하였고 나름대로 노력했지만, 여전히 죄악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우리의 마음을 바라볼 때 우리는 절망하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시죠.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정직하여도 여호와는 마음을 감찰하시느니라” (잠 16:2) 


바리새인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 

예수님께서 하나의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두 사람이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하였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간 사람 가운데 한 명은 바리새인이었고, 또 한 사람은 세리였지요. 당시 유대인들 가운데 모세를 통해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들려주신 율법의 말씀을 가장 열심히 실천하고 지켰던 사람이 바리새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율법과는 상관없이 살았던 사람들, 나아가 주변 사람들에게 죄인이라고 손가락질당했던 사람이 세리입니다. 이 두 사람이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갔습니다. 

먼저 바리새인이 기도합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합니다. 그러면서 큰 소리로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가만히 보십시오. 그는 자신이 죄를 전혀 짓지 않았다고 하나님께 자랑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한다고 자랑합니다. 자신에게 수입이 생기면 그 가운데 10분의 1을 하나님께 바치고 있다고 자랑합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한마디로 ‘자랑’입니다. 

그런데 함께 기도하기 위해 성전에 올라갔던 세리는 감히 눈을 높이 들거나, 큰 소리로 기도하지 못합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기도합니다. 그에게는 자랑 거리가 전혀 없습니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가슴을 치며 기도할 뿐입니다. ‘하나님이여 불상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세리의 기도는 짧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바리새인은 정말 많은 자랑 거리를 늘어놓았지만 세리는 내세울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그저 하나님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모든 이야기를 들려주신 이후에 이렇게 결론 내리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 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눅 18:14) 

적지 않은 크리스천들이 이 본문을 묵상하면서, 자기 자신을 바리새인이 아닌 세리의 모습과 일치시키곤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비유에서 주인공은 세리가 아니라 바리새인이라는 사실을 아시나요? 그 분명한 증거가 누가복음 18장 9절입니다.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바리새인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를 비교하신 이 비유의 말씀은 세리와 같은 이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바리새인은 자신 있었습니다. 그는 여려서부터 성경을 열심히 배웠습니다. 율법의 말씀을 거의 다 외우고, 그 말씀대로 자신의 행동으로 살아갔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죄라고 생각하는 것들, 토색, 불의, 간음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 기도했습니다. 금식기도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 그들은 매주 두 번씩 금식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소득 가운데 10분의 1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의롭게 살아가는 것 아닙니까? 이 정도면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사람, 의로운 사람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신앙생활도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 있고, 잘못을 저지르면 회개 기도를 올리기도 하고, 말씀에 비추어 나 자신을 돌아보며 스스로의 말과 행동을 교정하려는 노력을 하기에, 그래도 나는 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의 평가는 우리가 여전히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한 관원 

누가복음 18장에는 또 하나의 사건이 나옵니다. 바로 오늘 본문의 이야기죠. 어떤 관리가 예수님께 찾아옵니다. 그는 큰 부자였으며 율법에 있어서도 열심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율법을 열심해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계명을 하나도 어기지 않고 모두 지켰던 사람입니다. 이 관리에 대해 이렇게 소개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 중 딸이 있으신 분들에게는 정말이지 사위 삼고 싶은 사람, 그가 바로 이 관원입니다. 부자입니다. 관원이니 사회적 지위도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율법을 다 지킬 정도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합니다. 그러면서도 ‘영원한 생명’, 곧 영생에 대한 관심이 있습니다. 

여러분 어떠세요? 우리가 결론을 다 알고 있어서 그렇지, 오늘 본문의 스토리를 배제한 채, 이 관원의 조건만 놓고 본다면 어떻게 해서든 사위삼고 싶은 사람 아니에요?  바로 그 관원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질문합니다. 18절입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님을 찾아왔던 한 관원은 재물을 많이 모으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율법을 다 지키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그렇게 열심히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영원한 생명,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더 높은 차원의 신앙이 필요합니까?라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그가 지금까지 성실하게 지키고 있는 율법, 곧 십계명을 지켜야 한다고 대답하십니다. 예수님 말씀의 핵심을 아직 파악하지 못했던 그는, 그 모든 계명을 지켜왔다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그는 아직 율법을 지키는 이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왔던 관원은 열 개의 계명을 잘 지켰지만, 예수님께서 보시기에는 아직 부족합니다. 왜냐하면 십계명의 핵심은 바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율법과 십계명이 지향하는 최고의 가치는 바로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 명령이 십계명 1 계명부터 4 계명까지의 내용입니다. 또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 명령이 십계명 5 계명부터 10 계명까지의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 관리에게 십계명을 지키라고 다시 한번 명령하신 것은 그 관리가 십계명을 문자 그대로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십계명의 정신, 곧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그에게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이 관리는 아직 십계명을 지키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왔던 관리는 자신을 위해 많은 재산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십계명을 지키고 율법을 지켰던 것도, 관리로서 열심히 일했던 것도 모두 자신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진정 영원한 생명, 영생을 얻기 원한다면 십계명과 율법이 지향하는 최고의 가치인 “사랑”을 실천하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과 사람들보다 더 사랑하는 재물을 버리라는 말씀입니다. 이제부터는 하나님과 이웃을 ‘너를 위한 도구’가 아닌 ‘진실한 사랑의 대상’으로 받아들이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재물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라는 명령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을 찾아온 관원은 고민하며 머뭇거리기 시작합니다. 누가복음은 그 이유를 설명하면서 그가 부자였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지금까지 자신을 위해 살아왔던 그에게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아무런 기대나 보상도 없이 나누어주라는 말씀은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던 것입니다. 


모두가 죄인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어려서부터 열심히 율법을 배웠던 바리새인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 대해 많은 비판의 말씀을 하셔서 우리는 바리새인 하면 대단히 악한 사람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사실 우리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묵상하고 공부하는 열심을 결코 따라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려는 그 열심을 조금도 따라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왔던 한 관원은 어떻습니까? 그 역시 어려서부터 율법을 배웠고, 열심히 실천했습니다. 예수님께 자신 있게 모든 율법을 지키고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마 성실했던 사람인 것 같습니다. 율법의 말씀을 지키는데 성실했고, 국가 공무원으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수행할 때도 그는 성실했던 것 같습니다. 누가 보아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딸 가진 부모가 사위 삼고 싶은 사람이었죠. 그런데 예수님은 바리새인도, 그리고 예수님을 찾아왔던 한 관원도 모두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율법을 모르는 죄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바라보시고 너는 참 의롭다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만하다고 말씀하시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죄인으로 드러날 뿐입니다. 물론 노력합니다.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죄인 된 우리의 모습인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필요합니다. 


복음의 능력 

기독교 복음은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결코 인정받을 수 없는 철저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끊임없이 노력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선을 행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롬 7:19-21) 

같은 본문을 표준새번역 성경은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나는 내가 원하는 선한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한 일을 합니다. 
내가 해서는 안 되는 것을 하면, 그것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죄입니다. 
여기서 나는 법칙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곧 나는 선을 행하려고 하는데, 그러한 나에게 악이 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롬 7:19-21) 

악이 붙어 있어요. 마치 건망증을 내보내고 싶지만 냉장고 안에 자리 잡은 섬유유연제를 보며 절망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사도바울은 열심히,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려 노력했던 분입니다. 그러나 그분 역시 고백하기를 자신은 선을 행하고 싶지만, 그 안에 죄가 있어서, 악이 있어서 죄를 짓도록 한다고 합니다. 하물며 우리야 어떻겠습니까? 우리도 작은 노력을 기울여 보지만 여지없이 죄의 유혹에 빠져드는 죄인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바로 이때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의롭게 되는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에 있는 말씀입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옛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롬 3:21-22) 

이 본문 역시 표준새번역 성경으로 다시 읽어드립니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율법과 예언자들이 증언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오는 것인데, 
모든 믿는 사람에게 미칩니다. 거기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롬 3:21-22)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을 행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하나도 부족함이 없이 다 살아가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완벽하게 살아가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께 의롭게 나타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셨고, 그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음으로서 가능한 것입니다. 이 사실이 복음이요, 이 사실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 놀라운 은혜를 믿으며 감사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크리스천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을 찾아왔던 한 관원이 실망한 표정으로 되돌아가는 장면을 바라보면서 그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그러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눅 18:26)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이르시되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눅 18:27) 

만일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삶에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언제부터인가 우리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렸기 때문이 아닐까요? 

사람은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게 여기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하나님은 죄 많은 우리들을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자랑을 늘어놓았던 바리새인도 결국에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에 비해서, 우리에 비해서 의로울지 몰라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결국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내세울 것 없었던 세리가 하나님 앞에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했을 때, 예수님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고 되돌아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의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세리가 선하고 아름다운 일을 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우리는 죄인이지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내세울 것이 전혀 없지만, 그러한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복음, 곧 죄인을 위한 복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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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누가복음 강해2020. 6. 4. 15:53

예수님의 비유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여기에는 두 사람의 공통점이 등장합니다. 곧 두 사람 모두 기도하는 사람이었다는 점입니다. 특별히 두 사람이 기도하기 위해 성전에 올라간 때는 공적인 기도의 시간이 아닙니다. 주일예배, 수요예배, 새벽기도 시간 외에 개인적으로 기도하기 위해 성전을 찾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한결같이 기도를 자신의 하루 일과 중에서 중요하게 여겼던 사람, 곧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이야기의 결론을 잘 알고 있지요. 두 사람 모두 성전에서 기도하였지만, 두 사람의 기도가 모두 하나님께 열랍된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동일한 성전에서 기도하였던 두 사람의 기도가 전혀 다른 결과에 다다르게 한 것입니까? 



바리새인의 기도 

먼저 바리새인의 기도입니다.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9절) 

바리새인의 기도, 그 첫번째 특징은 ‘자기를 의롭다고 믿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표현하면 “이만하면 됐지 !”라는 생각입니다. 신앙생활을 이제 막 시작하는 사람들에게는 이와 같은 마음이 일어나기 어렵겠지요. 그러나 신앙생활의 경륜이 늘어나고, 오랜 세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 사람들에게 이와 같은 유혹이 찾아옵니다. 
우리 가운데 누가 자신의 완벽하다고, 자신은 의롭다고, 자신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부족한 것이 없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자기 나름대로 신앙생활에 최선을 다했고, 주변 사람들이 계속해서 칭찬하면 그의 마음에 자신도 모르게 교만한 마음이 찾아옵니다.
게다가 주변 사람들도 계속해서 칭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참 열심히 신앙생활 한다고, 참 아릅답게 신앙생활을 한다고 옆에서 칭찬을 합니다. 그러면 나도 모르게 우쭐해지는 마음이 들면서 자기 자신을 속이게 됩니다. 

“이만하면 됐지!” 

바리새인의 기도, 그 첫번째 특징은 자신을 의롭게 여기는 것입니다. 곧, “이만하면 됐지”라는 생각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의롭게 여기는 사람은 다음 단계로 그의 시선을 다른 사람에게 돌립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9b절) 나는 이정도로 신앙생활을 하고, 나는 이 정도로 예배생활, 기도생활, 말씀생활, 헌금생활을 하는데 저 사람은 왜 그렇게 못하는가? 주변을 바라보면서 계속해서 비판하고 정죄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래서 바리새인은 기도할 때 계속해서 다른 사람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토색, 불의, 간음을 행하는 사람들이 잘못을 행하지 않았다는 말씀이 결코 아닙니다. 그들의 잘못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의 오류는 자신이 의롭다고 믿기 때문에 더 이상 자기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며 자신을 가꾸려는 노력보다 다른 사람을 향해 비판하고 비난하려는 마음이 더욱 강하다는 사실입니다. 

만일 여러분의 눈에 다른 사람의 부정적인 면이, 다른 사람의 잘못하는 모습만이 여러분의 눈에 들어온다면 여러분의 마음에 ‘이미 나는 이제 됐다’, ‘이만하면 됐다’는 교만의 마음이 들어와 있지는 않은지 점검해 보셔야 합니다. 

바리새인의 기도, 그 첫번째 특징은 자신을 의롭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나아가 두번째 특징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고 공격하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바리새인 기도의 특징, 그 마지막 세번째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보다는 자신이 행하는 일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만 하면 됐지”라는 생각이 가득했어요. 그러니 더 이상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무엇을 해주실 것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이미 나는 의롭고, 이미 나는 거룩한 삶을 살고 있잖아요. 그래서 바리새인의 기도를 아무리 살펴보아도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은 보이지 않고 자기 자신의 행동만 등장합니다. 11절부터 다시 보십시오. “나는” 토색하지 않았고, “나는” 불의하지 않았고, “나는” 간음하지 않았습니다. 12절도 보십시오. “내가”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내가” 소득의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모두가 “내가”한 일이지 도무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 등장하지 않아요. 


세리의 기도 

자, 바리새인 기도의 세 가지 특징을 말씀드렸습니다. 먼저 자신을 의롭게 여깁니다. 그러자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지 못한 채 상대방의 행동을 비판합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일하심은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행한 것만을 이야기합니다. 
이제 세리의 기도입니다. 그런데 세리의 기도를 바리새인의 기도와 비교해보니 바리새인 기도의 세 가지 특징에 있어서 전혀 다른 모습이 보입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더라”

바리새인은 자신을 의롭다고 여겼지요. 그러나 세리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잘 압니다. 자신은 죄인입니다. 바리새인은 “이만하면 됐다”고 말하지만, 세리는 결코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13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래서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자신은 의인이 아니라 자신은 죄인입니다. 

바리새인의 기도, 그 두번째 특징은 다른 사람의 행동을 바라보며 비판하고 비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리의 기도를 보십시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누구의 가슴을 칠까요? ‘자기 자신의’ 가슴을 치며”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그 다음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다른 사람이 잘못한것, 다른 사람의 죄를 따지고 있을 여유가 없어요. 나의 가슴을 치며 내가 죄인이라고 나 자신의 모습을 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바리새인은 자신이 의롭다고 여겼기에 하나님의 행하심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저 자신들이 행하는 일만 이야기해도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자신의 행동에 내세울 것,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기에 하나님의 은혜로운 역사만을 기대합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무엇이라고 기도합니까?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내가 행한 것 없고, 내가 자랑할 것 없고, 내가 내세울 수 있는 것이 전혀 없으니, 하나님이여 하나님께서 행하여 주십시오. 하나님이여, 하나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기도는 바리새인의 기도입니까? 세리의 기도입니까? 

물론 처음부터 바리새인의 기도를 드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처음에는 겸손한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처음에는 세리와 같이 하나님의 긍휼하심만을 간구하며 기도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신앙생활이 익숙해지다보면, 어느세 조금씩 조금씩 바리새인의 자리로 이동하는 우리 자신을 바라봅니다. 그때마다 다시금 우리의 마음을 쳐서 내가 여전히 죄인임을 깨닫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긍휼하심만을 간구하며 기도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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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누가복음 강해2020. 6. 4. 15:47

기도는 실천이 중요하다 

성경을 읽다 보면, 성경의 어떤 본문은 이해하기 매우 어려운 구절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러한 성경 본문을 난해 구절이라고 부르기도 하죠. 예를 들면, 누가복음 15장에 등장하는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는 일반적으로 난해 구절이라고 –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이라고 – 사람들이 말을 합니다. 반면, 성경의 어떤 본문들은 읽기만 해도 이해가 되고, 그 뜻이 어떠한 의미인지 누구나 알 수 있는 본문도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본문이 바로 오늘의 성경 본문입니다. 누구든지 읽기만 하면 그 의미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를 소개하기에 앞서 그 비유의 교훈이 무엇인지 너무도 명확하게 알려주고 있어요. 

오늘 본문의 주제는 본문이 시작하는 바로 1절에 명확하게 이미 나와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과부와 재판장의 비유는 어떠한 교훈을 담고 있습니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담고 있어요. 비유가 무엇인지 소개하기도 전에 1절 말씀에서 그 교훈을 명확하게 요약해 주고 있지요. 그리고 이 비유를 한번 읽기만 하면, 혹은 한번 듣기만 해도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왜 말씀하셨는지 우리는 다 알 수 있어요. 

그런데 여러분, 신앙생활의 놀라운 비밀 가운데 하나는 성경의 어느 구절을 우리가 다 안다고 다 이해한다고 해서 그 말씀이 나의 말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마크 트웨인이라는 분은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 때문에 괴로워 하지만, “성경말씀 중에 내게 이해되는 내용이 나를 더 괴롭힌다.” 성경의 말씀을 잘 모르고 이해가 되지 않을 때는 그 말씀을 더 알고 싶고 잘 이해하면 좋겠다는 아쉬운 마음이 들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성경의 말씀을 참으로 알게 된다면 성경의 한 구절 혹은 한 단락의 의미를 참으로 알게 된다면 우리는 더욱더 괴로움에 빠질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내가 그 말씀을 바르게 실천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알고 있어요. 예수님의 말씀이 옳아요,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과부가 매일같이 찾아가 재판장에서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이야기했을 때, 그 재판장이 하나님을 경외하지도 않고 사람을 무시하지만 이 과부가 자신을 매일같이 찾아오는 것이 번거러워서 귀찮아서 그의 송사를 처리해 주었지요. 불의한 재판장도 과부의 계속되는 청을 들어주었는데 하물며 하늘에 계시는 우리의 아버지께서 간절히 요청하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시겠어요? 속히 이루어 주시겠지요. 머리로는 알아요.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이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의 응답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 순간까지 쉬지 않고 기도하며 낙심하지 않는 “실천력”이 우리에게 부족하다는 사실입니다. 

하루는 어느 율법 교사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질문하지요.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게 될까요?”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율법 교사에게 반문하십니다. “너가 율법의 교사인데 네가 가르치는 율법에는 어떻게 하라고 쓰여있느냐?” 그러자 그 율법 교사가 정답을 말합니다. 율법을 보니까요, 성경을 보니까요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되어 있고요, 또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되어 있었던 데요?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시죠. “그래, 너 말이 맞아. 그대로 실천해, 그러면 살게 될 거야.” 

여러분, 예수님을 참아온 율법 교사에게 무엇이 부족했습니까? 그에게 지식이 부족했나요? 성경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이해가 필요했나요? 아니면 이미 알고 있는 말씀, 이미 자신의 머리 속에 잘 정리되어 있는 바로 그 말씀을 실천하는 실천력이 부족했습니까? 네, 그 율법 교사에게는 지식이 풍부했지만, 그 지식을 실천할 수 있는 실천력이 부족했어요. 

우리는 얼마나 많은 말씀을 듣고 있는지 모릅니다. 매주 주일마다 예배에 참석해서 말씀을 듣지요. 우리 가운데는 매일 열심히 큐티를 하는 분들도 있고, 여러 가지 양육 과정에 참여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 말씀 가운데 단 한 구절이라도 나의 마음에 담고 그 말씀을 실천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여러분, 한해를 시작하면서 여러 가지 결심을 하셨을 줄로 압니다. 특별히 우리 신앙인들은 신앙생활에 대해 몇 가지 결심을 하지요. 올해는 매일 큐티로 하루를 시작하겠다. 올해는 성경을 한번 이상 읽어야 하겠다. 올해는 열심히 기도해야 되겠다. 올해는 전도를 해야 하겠다. 올해는 교회에서 어느 어느 부서를 열심히 섬기겠다. 뭐 이런 결단을 하지요. 그런데 여러분, 혹시 연초에 세웠던 계획이나 목표를 이미 오래전에 포기하신 분 계신가요? 오늘 본문 1절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여 주십니다. “항상 기도하고” 그다음이 무엇입니까? ‘낙심하지 말아라’ 

 

기도의 실천을 방해하는 요소 - 더딤 

오늘 본문의 주제는 너무도 분명합니다.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라” 그런데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비유 – 곧 과부와 재판장의 비유 – 를 가만히 묵상해보면 우리가 기도하는 일에 낙심하고, 신앙 생활에 계속해서 넘어지는 중요한 이유를 한 가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응답이 더디게 느껴지기 때문이지요. 오늘 본문 4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과부는 억울한 일을 당한 직후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재판장을 찾아가서 자신의 억울한 사연을 풀어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재판장은 처음에는 과부의 청을 들어주었나요?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4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여러분, 이 짧은 한 마디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이 짧은 한 구절이 때로는 사람들을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 잘 아시잖아요. 

제가 아는 어느 목사님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최선을 다해 교회를 섬기시는데, 결혼한지 3년이 지나고, 5년이 지나고 7년이 지나도 자녀가 안 생기는 거예요. 물론 목사님과 사모님도 열심히 기도하셨지요. 그리고 목사님께서 사역하시던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밤낮 목사님 가정을 위해 기도할 때 무엇을 위해 기도하셨을까요? 목사님에게 자녀를 주시라고 기도했어요. 그 목사님께서 그 교회에서 사역하신 지 7년, 결혼한 지 9년 만에 하나님께서 예쁜 딸을 주신 거예요. 지금도 그 딸 이야기만 나오면 얼굴에 미소가 넘쳐요. 그 목사님에게는 4절에 등장하는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는 몇 년의 시간을 의미할까요? 그 목사님에게는 9년을 의미하는 거예요. 

이와 비슷한 예를 성경에서 찾아볼까요? 여러분은 창세기에 등장하는 아브라함을 기억하시죠?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 그의 나이가 75세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자손으로 말미암아 큰 민족을 이루겠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아직 아들 하나 없잖아요. 10년을 기다렸어요. 아브라함의 나이 85세에 하갈이 잉태하여 아브라함의 나이 86세에 아들 이스마엘을 낳았어요. 11년을 기다렸거든요. 오래 기다렸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마엘이 아니래요. 조금 더 기다리래요. 그래서 또 얼마를 기다렸습니까? 아브라함의 나이 99세에 사라가 잉태를 했고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에 아들 이삭을 낳았어요. 아브라함에게는 오늘 본문 4절에 등장하는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의 ‘얼마 동안’이 아브라함에게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었어요? 모두 25년의 시간이었어요. 

아브라함의 증손자 가운데 한 명인 요셉은 어때요?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꿈을 주셨습니다. 형들의 곡식 단이 요셉의 곡식 단에게 절하는 꿈을 꾸었어요. 그리고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요셉에게 절을 하는 꿈을 꾸었어요. 아마 요셉은 이때부터 열심히 기도했을 거에요. 하나님께서 꿈으로 보여주셨으니, 하나님께서 그 꿈을 이루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겠지요.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께서 주신 꿈이 현실이 되는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필요했습니까? 

요셉이 꿈을 꾸었을 때의 나이는 17세였습니다. 그로부터 13년의 시간이 흘러 요셉의 나이 30세에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그러면 요셉에게는 꿈을 이루는데 13년이 필요했던 것일까요? 아닙니다. 요셉이 총리가 된 이후, 7년의 풍년이 있었어요 그리고 연이어 2년의 흉년이 있었어요. 바로 그때 요셉의 앞에 형들과 요셉의 동생 베냐민이 무릎을 꿇고 앉아있게 돼요. 그리고 그 장면을 통해서 그 옛날 하나님께서 요셉 자신에게 주셨던 꿈이 자신을 통해 온 이집트와 자신의 가족을 포함하여 오리엔트 전역의 모든 사람들을 7년의 거대한 가뭄으로부터 지키시려는 하나님의 비전이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 요셉이 꿈을 꾼 후 총리가 될 때까지 13년 형들을 다시 만날 때까지 9년, 총 22년의 세월이 필요했어요. 그러므로 요셉에게는 오늘 본문 4절에 등장하는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의 ‘얼마 동안’은 총 몇 년의 시간을 의미해요? 22년 동안 재판장이 들어주지 않은 거예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오늘 본문 4절에 등장하는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의 ‘얼마 동안’이 참 길고 힘겹게만 느껴지거든요. 그 유명한 사영리의 제1원리인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며 당신을 향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라는 말은 수 없이 들어보았지만. 과연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향한 그 놀라운 계획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도대체 언제까지 내가 기다리고 인내해야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알 수 있을까 라는 의구심이 들기도 하죠.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농부 

그래서 우리가 잘 아는 말씀 시편 126편 5절과 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우리는 시편 126편을 묵상할 때 주로 그 결과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어요. 씨를 뿌리를 때는 눈물을 흘리지만 기쁨으로 거두게 된다고, 울면서 씨를 뿌리지만 기쁨으로 단을 가지고 돌아오게 된다고. 그렇지만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알게 되는 한 가지 사실, 씨를 뿌리기 위해 눈물을 흘리는 과정이 너무나도 고단하고 힘이 든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시편 126편을 읽으면 여러분은 그 내용이 쉽게 이해가 되시나요? 저는 시편 126편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한 대목이 있어요. 시편 126편 5절을 다시 보세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씨를 뿌리는 사람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씨를 뿌리는 농부의 눈에 지금 무엇이 있어요? 씨를 뿌리는 농부는 지금 눈물을 흘리며 울고 있어요. 
시편 126편 6절도 보십시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씨를 뿌리러 나가는 농부의 지금 심정이 어떻습니까? 씨를 뿌리러 나가는 농부의 마음이 지금 매우 슬퍼요. 그래서 눈에는 눈물이 주르륵 흐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장면이 쉽게 이해가 되세요? 여러분은 농부들이 논이나 밭에 씨를 뿌리러 나갈 때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보신 적이 있으세요? 대부분의 농부들은 씨를 뿌릴 때 눈물을 흘리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농부들은 봄에 씨앗을 뿌리면 가을이면 추수를 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가지고 논이나 밭으로 나갑니다. 그래서 씨를 뿌리는 과정이 고단하기는 하지만 눈물을 흘리거나 울음이 가득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왜 시편 126편에 등장하는 농부는 눈물을 흘리며 씨앗을 뿌리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시편 126편 5절과 6절 안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농부는 씨앗을 뿌리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거에요. 여러분, 이해하세요?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릴까요? 시편 126편에 등장하는 농부는 씨앗을 심는 것이 아니라 뿌리기 때문에 눈물을 흘린다고요. 
만일 여러분이 농부라면 씨앗을 그저 논이나 밭에 뿌리겠어요? 아니면 흙을 조금이라고 헤치고 땅 속에 씨앗을 심어놓겠어요? 당연히 씨앗을 심지요. 바람이 불면 날아가고 비가 내리면 씻겨나가도록 씨앗을 왜 뿌리겠어요. 그런데 시편 126편에 등장하는 농부는 그 땅이 얼마나 척박했는지, 그 땅이 얼마나 건조했는지 씨앗을 심지 못하고 그저 뿌리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 가운데 ‘씨를 뿌리는 비유’가 있지요. 이 비유에서도 농부는 씨앗을 심지 못하고 씨를 뿌립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씨를 심지 못하고 씨를 뿌리기 때문에 그 씨앗의 4분의 1은 길 가에 떨어져요. 씨앗을 심지 못하고 그져 뿌리기 때문에 4분의 1은 돌짝밭에 떨어지죠. 씨앗을 심을 수 있는 땅이 없어요. 그래서 그저 씨앗을 뿌려요. 그러니 농부가 뿌리는 씨앗의 4분의 1은 가시덤불에 떨어지는 거예요. 오직 농부가 뿌린 씨앗의 4분의 1만이 좋은 밭에 떨어지는 겁니다. 그러니 그 농부의 눈에 눈물이 주르룩 주르륵 흐르죠. 나의 손에서 씨앗이 떠남과 동시에 바람이 부는 대로 씨앗이 길가, 돌밭, 가시덤불에 떨어지는 그 장면을 바라보는 농부 가운데 그 누가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겠어요. 

여러분, 이것이 시편 126편이 묘사하는 우리의 신앙생활입니다. 열심히 기도해요. 예수님의 말씀처럼 항상 기도하려고 노력하지요. 그런데 그러면 뭐해요. 내가 뿌린 씨앗이 지금 나의 손에서 떠나는 그 순간 그 씨앗의 4분의 1이 길가에 떨어지는데요, 그 씨앗의 4분의 1이 돌짝밭에 떨어지고, 또 4분의 1이 가시덤불에 떨어지잖아요. 그러니 아침과 저녁으로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거예요. 이 눈물의 깊이를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은 이제 시편 126편을 따라 이렇게 노래할 수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그 다음이 무엇입니까?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그 다음이 무엇입니까?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여러분이 지금 흘리는 그 눈물을 통해 하나님은 나머지 4분의 1의 씨앗을 통해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실 것입니다.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인 과부와 재판장의 비유를 통해 항상 기도하라고, 그리고 무엇보다 낙심하지 말라고 교훈하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오늘 본문 4절에 등장하는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의 그 ‘얼마 동안’의 시간이 참으로 고난의 시간이고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시간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십니다. 오늘 본문 7절과 8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네, 여기까지는 이해가 되요. 낙심하지 않고 항상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언젠가는 – 그러니까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 언젠가는 응답을 해 주시겠지요. 그런데 그 뒤의 말씀은 참 이해하기 어려워요.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네, 하나님. 어떤 목사님에게는 9년을 기다리게 하셨고, 아브라함에게는 25년을 기다리게 하셨고, 요셉에게는 22년을 기다리게 하셨잖아요. 우리에게는 씨앗을 심지 못하고 뿌려야 하기에 오랜 시간 눈물을 흘리게 하셨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다음에 어떠한 단어가 등장합니까? “속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아니 예수님, 해도 너무하시지. 온 성도들이 기도하였더니 9년 만에 자녀 주신 것도 ‘속히’ 주신건가요? 아브라함에게는 25년 만에 아들을 주신 것도 ‘속히’ 이루어 주신 건가요? 요셉에게 22년 만에 꿈을 이루어주신 것도 ‘속히’ 이루어 주신 건가요? 그토록 오랜 세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게 하신 것도 ‘속히’ 이루신 건가요? 우리의 관점에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요. 속히 이루어 주신 것이 아니라, 오래 기다리도록 하셨다가 이루어주신 것처럼 보이거든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제가 가만히 묵상해보니, 이 본문을 해석할 수 있는 별 다른 방법이 없어요. 그저 하나님께는 9년 도 속히고, 25년도 속히고, 22년도 속히 이루어 주신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더라고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려야 하기에 하루도 너무나 길게 느껴지지만 그것도 속히 이루어 주셨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길어 보이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가장 적절한 시간에 가장 좋은 것을 주신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에 굉장히 중요한 교훈이 있어요. 우리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간구할 때, 때로는 우리의 관점에서 인간적인 우리의 시각에서 볼때 기도의 응답이 굉장히 늦어진다고 생각될 수 있어요.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응답이 조금 늦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 괜찮아요.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지 아세요? 하루를 기도하고, 이틀을 기도하고, 일주일을 기도하고 한 달을 기도했어요. 그것도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농부의 심정으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어요. 그런데도 하나님의 응답이 보이지 않잖아요. 바로 그때 우리의 마음에는 의심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하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시나봐?’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신 것을 보면, 이제 이 기도는 하지 않는 것이 좋겠어?’ 그러면서 기도를 쉬게 된다면 그것이야 말로 사단의 속임수에 넘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입장에서는 오랜 시간을 기도하고 기다렸지만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셨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아직 얼마 안 지난 거에요. 아직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가장 좋은 시간이 오지 않은 겁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지만 여전히 기도의 응답이 보이지 않아서 낙심하고 계세요?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의 기도를 물리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적절한 때를 기다리고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다시금 기도의 자리로 나오십시오.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구약성경 하박국서에 있는 구절을 소개하면서 오늘 설교를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하박국 2장 3절의 말씀을 함께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유대 민족의 참상을 보면서, 하나님께 따지듯이 기도했어요. ‘하나님, 도대체 언제예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참된 구원의 날은 도대체 언제 오는 거예요?’ 바로 그때 하박국 선지자에게 주신 말씀이 2장 3절의 말씀이지요.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첫번째,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반드시 있어요. 두 번째,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속히 임한데요.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데요. 그런데 세 번째로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시죠. “비록 더딜지라도” 어떻게 하라고요?  “기다리라” 하박국 네가 보기에,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에 조금 더딘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성취될 것이기에 비록 더딜 지라도 기다리라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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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누가복음 강해2020. 6. 4. 15:33

오래 전 단지 책의 제목이 흥미로워서 잠시 훓어보게 된 책이 한 권 있습니다. 그 책의 제목은 <고수의 생각법>입니다. 바둑에 큰 관심이 없는 분들도 한번쯤은 그 이름을 들어보셨을 만한 바둑의 전설적인 고수 조훈현 9단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기록한 책입니다. 그 책에 이른 내용이 있습니다. 바둑을 두다보면 이른바 ‘수읽기’를 하쟎아요. 내가 여기에 돌을 놓았을 때, 상대방은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그것들을 머리속으로 그려보는 것이 수읽기인데, 바둑의 전설적인 고수인 조훈현 9단은 바둑에서 수읽기를 방해하는 가장 큰 적이 ‘욕심’이라고 말합니다. 

바로 그 부분을 잠시 읽어드리겠습니다. “수읽기를 방해하는 건 욕심이다. … 꼭 이겨야 한다는 욕심이 꿈틀거리면 수를 제대로 보지 못한다. 당장의 이익에 눈이 멀면 서너 수 앞이 안 보인다. 그래서 수읽기를 제대로 한다는 건 마음속에서 솟아오르는 욕심을 버리는 것이다.” 수읽기를 제대로 한다는 것은 어떠한 뜻이랍니까? 마음 속에서 솟아오르는 욕심을 버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바둑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판단하여 행동하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의 마음에 욕심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한 사람의 청원 

오늘 본문에서도 마음에 가득한 욕심 때문에 주변 환경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 13절 말씀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13절의 말씀은 어떻게 시작합니까? “한 사람이”라고 시작하나요? 아닙니다. 성경을 다시 자세히 보시면 “무리 중에 한 사람이”라고 시작합니다. 성경은 이 사람이 무엇인지 알려주지 않습니다. 이 사람이 어떤 직접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알려주지 않아요. 이사람이 몇세였는지 성경은 말하지 않아요. 그런데 성경이 분명히 기록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그 사람은 무리 가운데 섰여 있었던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은 무리들 가운데 섞여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행위를 보았던 사람들 가운데 한명이었어요. 

그런데 여러분, 참으로 놀랍지요. 이 사람은 자신의 눈으로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놀라운 기적도 바라보고, 자신의 귀로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어보고, 자신의 손으로 예수님께서 나누어주신 떡과 물고기를 직접 만져보았어요. 그러면 예수님께 손을 들어 질문을 할 때 어떤 질문을 던져야 되겠어요? 영생의 문제에 대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지금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 질문해보아야 되지 않겠어요? 그런데 이 사람은 아무리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행동을 보아도 그의 마음에 있는 관심사가 변하지를 않는 거에요. 그의 관심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어디에 있었습니까? 돈에 있었죠. 재물에 있었어요. 그래서 예수님께 이렇게 요청하는 거죠.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우리의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나는데 가장 큰 장애물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귓가에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지 않기 때문도 아니고, 지금 우리 시대에 하나님의 역사가 멈춰버렸기 때문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도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고,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도 우리 교회를 통해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펼쳐나가고 계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마음이 세상의 욕심, 물질에 대한 탐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역사나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바로 그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14절과 15절의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예수님은 이 사람의 요청을 단호하게 거절하십니다. 14절 말씀을 다시 보시면,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라고 말씀하셨어요. 단호한 거절이죠. 예수님은 재산 나누는 일을 거절하셨어요. 그러면 예수님은 재물에 대해서, 돈에 대해서 아무런 말씀도 안하시고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인가요? 그렇지는 않아요. 14절에서 한 사람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하셨지만, 15절에서는 재물과 물질에 대해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15절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예수님은 물질을 나누는 일은 거절하셨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정말하고 싶으셨던 일, 꼭 하셔야만 하는 일을 지금 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사람의 마음에 도사리고 있는 ‘탐심의 문제’를 해결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예수님께 기도하면 로또에 당첨이 되고, 교회에 헌금하면 이 땅에 살면서 더 크고 좋은 집으로 이사하게 되고, 주님을 위해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면 자자손손 엄청난 부자가 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지금 이 자리에 앉아계세요? 여러분, 잘못 오셨어요. 그런 마음으로 이 자리에 앉아계신 분이 계시다면, 여러분의 로또는 꽝입니다. 예수님이 분명히 말씀하시잖아요. ‘나는 물질을 나누러 온 사람이 아니다.’ ‘나는 너에게 더 많은 재산을 소유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 아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분명히 말씀하시잖아요. 그러나 여러분, 잘 오셨습니다. 이 자리에 앉아계신 것이 놀라운 축복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로또에 당첨되는 것보다 더 큰 복을 여러분에게 주시거든요. 그 복이 무엇입니까? ‘탐심을 물리치는 복’입니다. 

“아니, 목사님! 해도 너무 하십니다. 탐심을 무리치는 것이 무슨 복이에요, 내 손에 재물이 들어오는 게 복이지요.” 이런 생각이 사실 마음에서 일어나시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생각이 마음에 일어나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왜 탐심을 물리치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인지 곧 이어 설명하시잖아요. 오늘 본문 15절을 다시 보세요.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이렇게 말씀하시고, 왜 탐심을 물리치는 것이 놀라운 축복인지 설명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주변을 조금만 둘러보세요. 물질도 있고, 재물도 있고, 겉으로 보기에는 무엇하나 부족함이 없을 것 같은데 조그마한 스트레스를 이겨내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저 정도면 충분히 행복할 것같은데, 아니 저 사람이 가진 재산의 절반만 나에게 있어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춤을 출 것 같은데 그 사람의 마음에는 조금도 기쁨이 없고 오히려 슬픔과 걱정과 탄식의 소리가 가득한 모습을 우리가 많이 보잖아요. 여러분, 물질이나 재물이 우리의 행복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우리는 하박국의 고백도 기억합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았아요. 그리고 무엇이라고 기도합니까? 무화과나무에 소출이 가득하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나요? 아니잖아요.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합 3:17) 그 다음에 무엇이라고 고백합니까?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8) 

예수님은 우리에게 남부러울만한 물질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지는 않으셨어요.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놀라운 축복을 허락하시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구원의 감격으로 말미암아 나의 마음이 모든 탐심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어 오직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구원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감사하고 감격하며 행복하고 즐거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축복입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예수님께서 이 정도 말씀하시면 좀 알아들어야 하는데, 우리 인간들이 참 어리석어요. 그러니, 예수님께서 아주 쉬운 비유를 통해 다시 한 번 말씀해주십니다. 우리가 잘 아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지요. 이 비유는 한 부자의 등장으로 시작합니다. 오늘 본문 16절 말씀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한 부자가” 여러분, 부자는 이미 재산이 그득한 사람입니다. 이미 그에게는 풍성한 재물이 있어요. 쓰기에 부족하지 않은 재물이 그에게 있어요. 그래서 그는 부자입니다. 그런데 그 부자에게 더 많은 재물이 찾아옵니다. 16절을 다시 보세요.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그러니 물질의 축복을 얼마나 많이 받은거에요. 하나님께서 이 부자에게 물질을 마구 부어주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부자에게는 무엇이 문제입니까? 물질이 부족해서 문제도 아니고, 지금 먹고 입을 것이 없어서 문제가 아니라, 물질도 있고 재물도 있지만 그의 마음에는 그 무엇으로도 만족할 수 없는 탐심과 욕심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 문제지요. 예수님께서 주시는 참된 복, 곧 예수님을 만나 구원의 감격을 누리며 우리 마음에 도사리는 탐심을 물리치는 참된 축복을 받지 못한 이 부자는 물질이 채워지면 채워질 수록, 물질을 더욱 많이 소유하면 소유할 수록 더큰 걱정과 근심에 사로집히게 됩니다. 오늘 본문 17절의 말씀입니다.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하고” 

부자가 말합니다. ‘내가 곡식을 쌓아 둘 곳이 없구나, 어떻게 할까?’ 곡식이 많아지니 오히려 큰 걱정과 근심에 싸여요. 이 말씀에서 ‘어찌할까’라는 말은 단지 ‘어떤 좋은 방법이 있을까’ 정도의 의미가 아닙니다. 어느 성서 주석가는 오늘 본문을 해설하면서 ‘어찌할까’라는 단어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한끼의 식사를 어디에서 해결해야 할지 몰랐던 그 지방에서 가장 가난한 거지라도 이것보다 더 걱정스러운 말을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지금 당장 한 끼의 식사를 해결하지 못해서 어떻하지, 우리 가족들 식사를 어떻게 하지라고 걱정하는 그 지방의 거지보다 이 부자의 걱정과 근심이 더 깊었다는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의 말씀은 참으로 진리입니다.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급기야 그는 아주 어리석은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오늘 본문 18절과 19절입니다.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이 부자는 자신의 재산이 들어날수록 더욱 고민이 깊었졌습니다. 그리고 급기야 아주 어리석은 결정을 내립니다. 18절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어떻게 하기로 결정했습니까?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여러분, 지금 당장 소출이 많아서 곳간의 공간이 부족해요. 그래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 부자는 제일 먼저 곳간을 헐겠데요. 여러분, 지금 있는 곳간을 헐면, 지금 당장 곳간을 허는 동안에는 곡식을 어디에 저장할 건데요? 곳간을 헐고 다시 짓겠다는데 그 과정에서 필요한 인력이나 자제 등은 어떻게 조달할 건가요? 더 크게 곳간을 만들었다면 그것을 관리하기 위해 지금보다 더 많은 관심과 정성이 필요할텐데 그건 어떻게 하죠? 이 부자는 풍성한 소출을 저장할 곳이 없다는 고만 하나를 해결하기 위해서 곳간을 아예 부서버리고 다시 더 크게 짓겠다고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재물을 더많이 모아두려고 곳간을 더 크게 지으면 고민거리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고민 거리가 생겨나고 더 많은 걱정 거리가 생기는 거에요. 

19절도 보십시오. 부자가 스스로에게 말합니다.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여러분, 지금 부자가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새로 지었나요? 더큰 곳간을 만들고 매년 그 곳간을 채월만큼 풍성한 수확을 거두고 있나요? 전혀 그렇지 않아요. 그저 자신의 마음에서만 더 큰 곳간을 만들었고, 그의 마음 속에서만 곡식과 재산이 풍성해요. 혼자 생각에, 그의 마음에서만 곳간을 더 크게 지어놓으면 만사가 형통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 모든 과정과 결과가 자신의 생각되로 될지 안될지는 아무도 몰라요. 그런데 자신의 계획대로 더 많은 재산을 모아놓기만 하면 나의 인생에 평안이 찾아오리라고 생각해요. 그러니 어리석은 생각이죠. 

이 부자의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지를 명확히 알 수 있는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바로 전도서 5장 11절과 12절 말씀입니다. 전도서 5장 1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재산이 많아지면 먹는 자들도 많아지나니 그 소유주들은 눈으로 보는 것 외에 무엇이 유익하랴” 

재산이 많아지면, 그래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어리석은 부자의 생각처럼 곳간을 더 크게 짓게 되면 그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요. 그러면 어리석은 부자의 곡식은 누가 먹게 될까요? 부자가 아무리 많이 먹어도 하루에 밥은 세끼밖에는 못먹어요. 그 많은 곡식은 그 집에 일하는 사람들이 먹는 거에요. 그러니 전도서의 말씀처럼 “그 소유주들은 눈으로 보는 것 외에 무엇이 유익하냐”고요. 저 사람들이 먹는 곡식 저거 내거야라고 생각하는 유익밖에는 없어요. 전도서 5장 12절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노동자는 먹는 것이 많든지 적든지 잠을 달게 자거니와 부자는 그 부요함 때문에 자지 못하느니라” 

지금 있는 곳간을 부수고 새로 큰 곳간을 지으면 평안히 쉬고 즐거워할 수 있을 것 같지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부자가 그렇게 생각했잖아요? 천만에 말씀입니다. 그 집에 일하는 노동자들은 만든지 적든지 주는 만큼 먹고 마음 편하게 잠들 수 있어요. 그러나 부자는 그렇지 못해요. 누군가 나의 재산을 노리고 있지는 않을까? 이 큰 재산을 어떻게 관리할까? 계속해서 걱정이고, 계속해서 스트레스예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부자는 바로 이 사실을 몰랐어요. 그래서 그의 이름은 “어리석은 부자”입니다. 

자, 드디어 하나님께서 이 부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누가복음 12장 20절과 21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하나님은 이 땅에 자신의 재물을 가득가득 쌓아놓으려고 아둥바둥하는 이 부자를 향해 어떻게 부르십니까? “어리석은 자여” 이 부자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이 부자가 어리석은 자라고 불리는 이유는 크게 보면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몰랐어요. 그래서 어리석은 자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이 부자는 이 세상의 재물만을 모으려고 노력했지 죽음 이후의 문제를 조금도 준비하지 않았다기에 그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여러분, 다시 한번 반복합니다.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도 물론이요, 죽음 이후의 삶에서는 더욱더 그렇습니다. 돈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재물이 많다고 천국에서 풍족하게 생활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는 일어나, 저 영원한 천국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급을 받아누리는 일이나 그 어디에도 우리가 얼마나 많은 재물을 모았느냐는 결코 중요하지가 않습니다. 죽음 이후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재물을 모았느냐로 판가름 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많은 재물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했느냐에 달려 있어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죽음 이후를 준비하기 위해 여러분의 재물을 사용하십시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이 땅의 재물이 많고 적음을 떠나 저 영원한 천국을 위하여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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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