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2022. 9. 25. 14:56
반응형

행복은 모든 사람이 추구하는 것이기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많은 사상가들이 행복의 조건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지요. 그 가운데 고대 철학자 플라톤은 행복의 조건으로 다섯 가지를 제시했다고 합니다. 플라톤이 이야기한 행복의 조건 다섯 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먹고사는 욕망의 수준에 약간 미달하는 재산. 둘째, 모든 사람이 칭찬하기에는 약간 부족한 용모. 셋째, 자신의 자만에 비하여 절반 정도밖에 남이 알아주지 않는 명예. 넷째, 힘을 겨루어서 한 사람에게는 이기고 두 사람에게는 질 정도의 체력. 마지막 다섯째, 자신의 연설에 청중의 절반 정도는 박수를 보내지 않을 만한 언변.

플라톤이 이야기하는 다섯 가지 행복의 조건은 그 주제만 나열하면 재물, 용모, 명예, 체력, 언변으로 사람들이 흔히 이야기하는 행복의 조건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플라톤의 이야기가 오늘까지도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는 이유는 각각의 항목이 독특하기 때문이 아니라 각 항목을 어느 정도 소유했을 때 행복한지에 대한 플라톤의 의견이 독특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재물과 용모와 명예와 체력과 언변이 최고의 수준에 도달하였을 때 우리는 행복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는 갖추었지만 동시에 조금은 부족한 듯 느껴질 때 행복한 삶을 위한 가장 적합한 조건이 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성경에도 행복을 위한 비슷한 지혜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지혜의 책이라 불리는 잠언에는 아굴의 기도가 소개되어 있지요. 그 기도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잠 30:8-9) 

성경은 분명히 아굴의 기도가 행복한 삶을 위한 가정 적절한 조건이라고 말씀합니다. 일찍이 플라톤이 깨달은 것처럼, 재물과 용모와 명예와 체력과 언변에 있어서 최고 수준에 이르는 것이 행복의 조건이 아니라 어느 정도는 갖추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부족한 것이 행복을 위한 가장 좋은 조건이라는 지혜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행복을 위한 조건을 갖추고 계신가요? 여러분은 자신의 욕망을 충분히 채울 수 있는 차고 넘치는 재물을 소유하고 계시지는 않으시죠? 여러분의 용모는 보는 모든 사람들이 칭찬할만큼은 안되시지요? 여러분들이 소유한 명예는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관심을 가지고 칭찬할 정도가 아니시잖아요. 그러나 우리는 지난 과거의 삶을 돌아보면서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님의 크신 은혜라” 노래할 수 있을 만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쓸 것을 부족함 없이 베풀어 주셨잖아요. 그러니 플라톤이 이야기하는 행복의 조건, 아굴의 기도가 가르치는 행복에 대한 지혜에 따르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행복을 위한 최고의 조건을 이미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처지와 형편을 너무 비관적으로 바라보지 마십시오. 지금 우리 모두에게는 행복을 위한 가장 좋은 조건이 이미 갖추어진 줄 깨닫고,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오늘도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경건의 장애물: 다른 교훈

오늘 본문의 핵심 주제는 경건입니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경건이 무엇입니까? 단순히 설명하면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한글 성경에서 경건으로 번역하는 헬라어 단어는 ‘유세베이아’인데, ‘좋은’ 혹은 ‘옳은’이라는 의미의 접두어 “유”와 ‘경배한다’ 혹은 ‘섬긴다’는 의미의 어근 “세보”의 합성어입니다. 그러니 경건이라는 뜻의 헬라어 ‘유세베이아’ 는 하나님을 바르게 섬긴다는 뜻이지요. 오늘 본문이 담겨 있는 디모데전서는 사도 바울이 노년이 되었을 때, 자신의 사역을 마무리하면서 그의 뒤를 이어 교회를 목양할 디모데에게 사역의 목표와 자세를 권면하는 편지입니다. 당연히 디모데전서는 어떻게 성도들이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도록 목양할 것인지, 곧 그들이 경건한 삶을 살도록 이끌 것인지에 대해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성도들이 경건, 곧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그 일에 장애물이 되는 요소가 무엇인지를 꼭 집어 알려주지요. 

성도들이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경건의 길을 걸어가는데 장애물로 작용하는 요소로 가장 먼저 오늘 본문은 “다른 교훈”을 말씀합니다. 우리 함께 본문 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3절) 

3절에 “다른 교훈”이라는 표현이 등장하지요. 다른 교훈을 따라간다는 것을 3절은 계속해서 어떻게 설명합니까?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 한마디로 바른 복음의 진리를 따라가지 않는 것이 다른 교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은 구원의 메시지가 너무도 분명하지만, 애써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반박하고 복음의 진리로부터 떨어져 나가려는 모든 노력들이 “다른 교훈”이지요. 한마디로 이단의 사설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네요. 

그러면 다른 교훈, 곧 복음의 바른 진리를 따르지 않고 이단의 사설을 따라가는 결과는 무엇입니까? 4절부터 나옵니다. 

그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4-5절) 

이 모든 해악의 출발점이 무엇입니까? 3절에 등장하는 “다른 교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바른 진리에서 벗어난 거짓 진리요 이단의 사설이지요. 

복음의 진리를 믿는 우리 성도들은 교회를 출석하다가 다른 교훈, 곧 이단의 사설을 따라가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다는 사실이 의아하게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금도 열심히 예배를 출석하셨던 분들이 이단 사설에 빠지는 경우는 너무도 많지요. 그런데 여러분,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이단의 유혹에 쉽게 넘어지는 분들의 일반적인 특징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크게 보아 두 가지 특징을 갖춘 분들이 이단의 위협에 쉽게 노출되는 것 같습니다. 그 첫 번째는 신앙생활에 열심이신 분들입니다. 이것은 조금만 생각해보면 당연한 결론입니다. 신앙생활에 열심이 없는 사람들, 종교적인 열정이 없는 분들, 그래서 교회를 출석할 때도 주변에서 열심히 권면해야 한번 예배에 참석해주시는 분들은 교회 활동도 열심히 안 하지만 이단에 대해서도 별과 관심이 없어요. 그러니 이단에 속한 사람들이 성경에 대해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이상한 질문을 아무리 던져도 별로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단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 분들의 첫번째 특징이 신앙생활에 열심을 내시는 분들이라고 말씀드렸지요. 그런데 두 번째 특징이 더 중요합니다. 신앙생활은 열심히 하고 종교에 대한 열정은 있는데, 그의 마음에 구원의 확신이나 구원의 감격이 없다는 것이 그 두 번째 특징입니다. 나의 마음에 구원의 확신이 있고 나의 마음에 구원의 감격이 가득 넘치면 본문 3절의 표현 그대로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라가게 되어 있지요. 당연히 다른 교훈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종교적인 열심은 있고 신앙에 대해 관심도 많지만 그리하여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지만 그 마음에 복음에 대한 확신도 없고 구원의 감격도 없으니 귀에 솔깃한 이야기가 들려오면 거기에 쉽게 넘어가는 것이죠. 

지금 이 자리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 가운데 아직 구원의 확신이 없고 구원의 감격을 경험하지 못하신 분들이 계신가요? 바로 지금 성령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찾아가셔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바로 나의 죄값을 치르기 위한 대속의 죽음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부활로 말미암아 나의 영혼도 다시 살아나고 나의 인생도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났다는 구원의 확신과 감격이 여러분의 마음에 가득해지기를 바랍니다. 나아가, 이 자리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 모두의 마음이 다시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확신과 구원의 감격이 충만히 흘러넘쳐 이단의 사설이 조금도 발 붙이지 못하고 바른 경건의 말씀만 따라가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경건의 장애물: 욕심

오늘 본문에서 성도들이 바른 경건의 길을 걸어가는데 장애물이 되는 요소를 지적하고 있는데, 가장 먼저 다른 교훈이지요. 그러면 다른 교훈을 따라가지 않고 나의 마음에 구원의 확신과 구원의 감격이 있으면,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경건의 길을 걸어가는 데 아무런 장애물이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바른 진리의 말씀만 따라간다 하더라도 우리가 경건의 바른 길을 걸어가는 것을 방해하는 많은 장애물이 있으니, 그 가운데 하나는 바로 욕심입니다. 본문 9절을 보십시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9절) 

바울이 “부하려 하는 자들”이라고 표현하였는데, 과연 얼마나 욕심을 부리면 바울이 지적하는 탐심의 올무에 걸려들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까요? 아마도 그 기준은 사람들마다 다를 것입니다. 바울은 부유한 사람이 시험과 올무와 욕심에 떨어진다고 말씀하지 않고 부유해지기 위해 온통 마음과 정신을 재물이 쏟는 사람, 곧 부하려는 사람이 해로운 욕심에 떨어진다고 말씀하기 때문이지요. 본문 10절도 보십시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10절) 

돈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면 얼마나 돈을 좋아해야, 그것이 악의 뿌리가 되어 우리를 믿음에서 떠나게 만들까요? 이 역시 사람들마다 그 기준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성도들에게 적용할 수 있는 분명한 교훈은 이것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마음, 곧 욕심과 탐심은 경건을 방해하는 매우 무서운 장애물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루는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중략)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 6:24) 

혹 여러분 가운데, 오늘 본문의 말씀 그리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마음으로 거부하고 싶은 분들이 계신가요? 아니, 세상에 돈을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하고 더 많은 돈을 모으기 위해 투자하고 더 많은 돈을 얻기 위해 관심을 가지고 노력하는 것이 무엇이 문제냐고, 그렇게 하면서도 얼마든지 하나님도 사랑하고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경건의 길을 걸어갈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씀하고 싶으신 분이 계신가요? 성도 여러분,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그러한 생각은 여러분 자신에 대한 오만한 착각입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은 처음부터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합니다. 재물을 사랑하기 시작하는 순간, 돈에 마음을 빼앗기는 순간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참된 경건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이 두 가지 사이에서 결단을 촉구합니다. 재물에 대한 욕심을 따라가며 참된 경건을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참된 경건을 위해 욕심을 포기할 것인가? 오늘 본문 6절 말씀을 함께 읽어볼까요?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6절) 

경건, 곧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의 기본 바탕이 무엇이 되어야 합니까? 욕심과는 정반대의 마음이지요. 자족하는 마음입니다.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자족하는 마음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7-8절) 

이 세상에 올 때 빈손으로 태어났다고 말씀하시네요. 그런데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지금까지 매일 양식을 먹었고 의복을 입었고 집에 거주하고 있으며 필요한 모든 것을 사용하며 살아왔잖아요. 그러면 그 모든 것은 어디에서 왔습니까?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책임져 주신 결과가 아닌가요? 그러므로 내가 지금 소유하고 있는 것이 나의 노력이나 나의 능력으로 성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임을 깨달아 더 많은 것을 성취하기 위해 노력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즐거워하는 것이 바로 성경이 강조하는 자족이요, 그러한 자족을 배울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경건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경건과 행복의 길

고대 철학자 플라톤은 행복을 위한 조건을 이야기했지요. 재물, 용모, 명예, 체력, 그리고 언변입니다. 그런데 플라톤이 이야기했던 행복의 조건은 극소수의 사람들만 소유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재물이나 용모나 명예가 아니기에, 실상 이 세상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미 갖추고 있는 조건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플라톤이 이야기했던 행복의 조건은 갖추고 있으면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마음에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지는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는 오늘 본문에서 그 하나의 대답을 찾게 됩니다. 그것은 나에게 이미 주어진 조건에 자족하지 못하고 더 많이 가지기 위해 욕심을 부리기 때문이지요. 내가 소유한 모든 것이 나의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지금도 더 많은 것을 성취하기 위해 노력할 뿐 하나님께서 이미 선물로 주신 것들을 누리기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지금 나에게 주신 선물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자족은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경건의 조건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 이미 우리에게 충분히 베풀어 주신 행복의 조건을 실제로 나의 삶 속에서 행복으로 바꾸는 능력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성도들에게는 즐겁고 행복한 삶을 위한 또 하나의 기가 막힌 조건을 하나님께서 주셨네요. 그것 역시 우리들의 노력이나 성취로 얻은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네, 그렇습니다. 바로 복음의 은혜죠. 시편 34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복음의 은혜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 34:10) 

하나님은 이미 우리 모두에게 행복의 조건을 모두 갖추어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성도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모든 좋은 것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복음의 은혜를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른 교훈은 쳐다보지도 마십시오. 더 많이 가지려는 욕심도 내버리십시오. 지금 나에게 있는 것이 나의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임을 깨달아 더 많이 성취하기보다 아미 선물로 주신 것에 감사하며 즐거워하십시오. 그리하여 오늘도 바른 경건의 길을 걸어가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반응형
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