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2022. 10. 9.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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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시작된 어번 컨페셔널(Urban Confessional)이라는 단체가 있습니다. ‘어번 컨페셔널’이라는 말을 우리말로 번역하면 ‘도시의 고해성사실’ 정도가 됩니다. 이 운동을 처음 시작한 벤 매시스라는 남성은 대학에서 연기를 전공하고 여러 방송과 영화에 출연하면서 연기자로 활동했습니다. 26살에는 결혼도 하고 하던 일도 잘 풀리면서 모든 것이 평탄하고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습니다. 그러나 벤 매시스에게도 인생의 큰 위기는 찾아오고 말았습니다. 그의 결혼 생활은 행복하지 못했고, 결국 이혼으로 끝났지요. 그렇게 인생의 한 부분이 크게 무너진 채 자신의 일터인 스튜디오로 가던 2012년 5월의 어느 날, 벤 매시스에게 어느 노숙인이 찾아와서 돈을 구걸했다고 합니다. 벤 매시스는 그 노숙인에게 당장 나눠줄 수 있는 돈은 없었다고 그래요. 그 대신 그의 마음에 한 가지 마음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안했습니다. “저와 함께 기도하시겠습니까?” 매시스는 그 노숙인과 함께 기도했고 매시스는 두 사람이 서로 교감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벤 매시스는 곰곰히 생각에 잠겼다고 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와 같은 경험을 다시 할 수 있을까? 그러한 생각 끝에 떠올린 것이 “프리 리스닝”(Free Listening)이었습니다. 아래의 이미지는 어번 컨페셔널의 홈페이지 첫 화면입니다. 왼쪽의 한 남성이 허름한 판지에 프리 리스닝이라는 글씨를 쓰고 들고 있지요. 벤 매시스가 거리에서 저런 판지를 들고 서 있었던 것이지요. 예전에 “프리 허그”(Free Hug)라는 운동이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곤 했습니다. 누구든지 원하는 사람은 조건 없이 안아준다는 운동이었지요. 벤 매시스는 “프리 리스닝”이라고 해서 누구든지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그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벤 매시스가 “프리 리스닝”이라는 글씨를 들고 거리에 서 있기 시작한 첫 번째 날, 신기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한 여성이 그에게 다가가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한 거예요. 그렇게 벤 매시스는 일 년 동안 매일 네 시간씩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저 들어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참 놀랍지요. 그렇게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그저 들어주기만 했는데, 이혼으로 망가진 자신의 마음이 조금씩 치유되는 것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Urban Cofessional Home Page (https://urbanconfessional.org)

이후 벤 매시스는 프리 리스닝을 함께 할 자원 봉사자들을 모집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매우 단순한 다섯가지 지침을 주었다고 합니다. 첫째, 프리 리스닝은 봉사자 자신을 위한 일이 아님을 분명히 할 것. 둘째, 80대 20의 불균형 대화를 준수할 것. 봉사자는 전체 대화의 20% 이하만 말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셋째, 공감하고 동의할 것. 상대의 이야기에 반박을 하거나 논쟁하지 말아야 합니다. 넷째, 비언어의 요소를 사용할 것. 예를 들어 상대방과 눈을 마주치거나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이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다섯 번째는 간단해 보이지만 실천하기 꽤 어려운 지침입니다. 침묵을 존중하기입니다. 상대방이 말을 잇지 못할 때에도 그 중간의 침묵을 나의 말로 채우려 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어번 컨페셔널의 다섯 가지 지침에 대해, 임상심리학의 창시자 가운데 한 명인 칼 로저스는 이렇게 평가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공감하며 경청하는 것은 개인을 치유하고, 사회문제를 완화하며, 전쟁을 끝낼 수도 있다.’ 나의 이야기를 대화의 20% 이내로 한정하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공감하며 경청하는 것만으로도 우리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고 사회적 갈등이 완화될 수 있다니,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경청이 얼마나 큰 위력을 발휘하는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말다툼을 하지 말라

디모데전후서의 중요한 주제는 경건입니다. 경건이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것’이지요. 그래서 디모데전서와 디모데후서에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바라게 섬기는 경건의 삶을 살 수 있을지에 대해 다양한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은 언어생활에 대해 말씀합니다. 곧, 경건한 언어생활을 위한 교훈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의 언어는 주로 다른 사람에게 하는 말이지요. 그러므로 언어생활은 일차적으로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현상입니다. 그런데 경건, 곧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수직적인 차원에 있어서도 우리의 언어생활이 중요한 역할을 할까요? 이에 대한 성경의 대답은 확고합니다. 우리의 경건 생활을 위해서는 우리의 언어생활이 반드시 달라져야 합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언어 생활에 대해 권면하는 장면을 묵상하면, 좋은 말, 바른말, 진리의 언어를 말하라고 권면하기에 앞서 언제나 먼저 강조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것은 경건한 언어생활을 위해 반드시 조심하고 피해야 할 것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너는 그들로 이 일을 기억하게 하여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하라 
이는 유익이 하나도 없고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함이라 (14절) 

경건한 언어 생활을 위해 우리가 반드시 피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말다툼입니다. 말다툼이 우리의 경건을 얼마나 크게 해치는지, 사도 바울은 매우 강한 어조로 말다툼을 경고하지요.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그다음을 주목하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하라” 그러므로 말다툼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데, 안 할수록 좋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게 섬기는 경건의 삶을 살기 원한다면 말다툼은 무조건 피해야 합니다. 어느 정도로 회피해야 합니까? 하나님 앞에서 서로에게 엄히 경고할 정도로 말다툼은 반드시 피해야 합니다. 

성도님들에게 전도 훈련을 시킬 때, 반드시 강조하는 교육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이렇게 됩니다. “논쟁에서 이기고 영혼을 잃어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다보면 서로 의견이 다른 지점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 신앙의 열정이 지나치면 불신자들과 논쟁에서 이기려고 달려드는 경우가 있거든요. 그런데 여러분, 그 어떠한 전도 현장에서도 상대방을 논쟁에서 이겼다고 해서 그 사람이 회심하고 예수님을 믿는 경우는 없습니다. 논쟁에서 내가 이겼다고 생각하는 그때,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말만 잘한다고 핀잔을 주면서 그냥 떠나가버리지요. 그래서 전도 훈련을 시킬 때 이 점을 꼭 강조합니다. “논쟁에서 이기고 영혼을 잃어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 전도의 현장이 아니더라도 우리의 신앙생활과 우리의 경건 생활에도 동일한 원리가 적용됩니다. 여러분, 부부 사이의 갈등 혹은 부모와 자녀 사이의 갈등이 말다툼으로 이어졌을 때, 치밀한 논리를 가지고 상대방을 말다툼에서 이기면 그 갈등이 종결되나요? 아닙니다. 말다툼에서 내가 이기려 들면 이기려 들수록 갈등은 더 깊어만 집니다. 

그래서 본문 14절은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하라” 말씀한 뒤에, 말다툼이 낳는 패악에 대해 어떻게 말씀합니까? “이는 유익이 하나도 없고” 네, 그렇습니다. 말다툼은 유익이 하나도 없습니다.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함이라”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의 언어가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경건한 언어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말다툼을 피해야 합니다.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오늘 본문에는 경건한 언어 생활을 위해 성도들이 피해야 할 것이 또 하나 있다고 말씀합니다.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그들은 경건하지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16절) 

여기에 “망령되고 헛된 말”이 등장하지요. 이 구절은 표준새번역에서 “속된 잡담”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경건한 언어생활을 위해 우리가 피해야 할 또 한 가지는 무엇입니까? 속된 잡담입니다. 사도 바울은 속된 잡담이 낳는 결과를 어떻게 설명합니까?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그다음을 주목해 보세요. “그들은 경건하지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여기에서 ‘점점’이라는 표현을 주목해 보십시오. 속된 말들, 그저 아무 의미 없는 잡담을 한 두 번 이야기하는 것은 그렇게 큰 잘못을 범하는 것도 아니고 큰 죄를 짓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나의 입술에서 속된 잡담이 나오기 시작하면 나의 마음과 나의 행동이 ‘점점’, 지금 당장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닌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경건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어 있어요. 

여러분, 우리가 내뱉는 말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좋은 언어를 사용하면 그 언어를 듣는 사람들의 마음이 평안해지기도 하고 즐거워지기도 하죠. 뿐만 아니라 내가 좋은 언어를 사용하면 그 언어를 말하고 듣는 나의 마음에도 좋은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어요.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만일 악한 말이나 상대를 공격하는 언어를 사용하면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의 마음이 편안할리 없지요. 그 말을 듣는 사람의 마음이 상하게 됩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악한 말이나 상대를 공격하는 언어를 말할 때 그것을 말하고 동시에 그 말을 듣는 나의 마음이 사실은 가장 크게 상처를 입어요. 이 모든 것이 사람의 언어에 담겨있는 능력과 힘 때문입니다. 

본문 17절에서 바울은 언어가 발휘하는 영향력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의 말은 악성 종양이 퍼져나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17절) 

사람들의 언어에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선한 말과 더불어 악한 말도 사람들에게 전파되고 확산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속된 잡담이 쌓이다 보면, 결국 진리를 거스르게 됩니다. 

진리에 관하여는 그들이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함으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18절) 

처음에는 그저 우스개 소리로 시작되었는지도 모르지요. 그저 속된 잡담이었어요. 그런데 한두 마디 할 때마다, 우리의 마음이 조금씩 경건으로부터 멀어지더니 마침내 진리에 대하여 그릇되고, 믿음이 무너지더라는 사실입니다. 


경청으로부터 배우는 대화법

설교를 시작하면서 벤 매시스라는 남성이 시작한 프리 리스닝 운동에 대해 말씀을 드렸지요. 프리 리스닝이 점차 확대되면서, 애리조나주립대학의 세라 트레이시 교수가 프리 리스닝을 자신들이 가르치는 대학의 학생들에게 과제로 내주었다고 합니다. 세라 트레이시 교수가 프리 리스닝을 과제로 내준 중요한 이유는 점점 미국의 대학생들이 스마트폰과 SNS에서의 소통에 익숙해지면서 다른 사람과의 대면 접촉이 줄어들고 소외감이나 외로움에 시달리는 현실에서 조금이라도 학생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고 합니다. 과제를 수해하는 과정에서 학생들이 캠퍼스 안에서 더 많은 학생들을 친구로 사귈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이 과정에서 세라 트레이시 교수가 예상하지 못했던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프리 리스닝을 할 때 준수해야 할 지침들이 있었지요. 이 모든 지침은 경청, 곧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는 훈련을 목적으로 합니다. 그런데 프리 리스닝 과제를 수행했던 대부분의 학생들은 경청, 곧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는 이 훈련을 시행하면서 비로소 다른 사람과 함께 이야기하는 대화법을 터득했다는 사실입니다. 이 과제를 수행했던 대부분의 학생들이 이렇게 말했어요. “경청하면서 비로소 대화하는 법을 배운 것 같았다.”  

저는 동일한 원리가 경건한 언어 생활에도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언어가 나의 신앙생활을 넘어 나의 경건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깨달아 우리의 언어를 경건한 언어로 바꾸고자 한다면, 우리는 먼저 나의 주장과 나의 목소리를 낮추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말다툼을 피하고 망령되고 헛된 말 곧 속된 잡담을 버리는 것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나의 목소리를 줄이고 나의 주장을 죽이면 비로소 우리의 언어에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가 가득하게 되는 경건의 언어가 시작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 (19절)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견고한 터를 말씀합니다. 여기서 ‘터’라는 단어는 건물의 기초를 뜻합니다. 당시 로마 사회에서 성전과 같이 중요한 건물에는 기초석을 세울 때 그 돌에 유명한 글귀를 새겼다고 합니다. 그래서 본문 19절에도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라고 말씀하면서, “인침이 있어 이르시되”라고 말씀하며 구약의 두 구절이 마치 성전의 기초석에 새겨진 듯 묘사하고 있지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진리의 기초는 언제나 든든히 서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언어로 세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인간들의 말다툼이나 헛되고 망령된 말에 무너지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무수한 거짓을 이야기하더라도 하나님 말씀의 진리의 터는 언제나 든든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사람들 사이에 말다툼이 일어납니다. 망령되고 헛된 잡담이 계속됩니다. 그러니 우리 신앙의 기초이며 교회의 터가 되는 진리의 말씀이 점점 사람들의 눈과 마음에서 가려지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다시금 인간의 헛된 언어가 아니라 하나님 말씀의 든든한 기초를 발견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진리를 찾는답시고 우리의 언어를 계속해서 더해가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아요. 그 대신 말다툼을 멀리하고,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림으로 말미암아 나의 목소리를 줄이고 나의 주장을 죽이다 보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자연스럽게 우리의 삶에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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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