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은 많은 성도들에게 무서운 책, 쉽게 다가가기 어려운 책, 잘못 읽거나 잘못 이해하면 이단의 가르침에 빠지는 책으로 여겨지곤 합니다. 그래서 교우분들 중에는 요한계시록을 개인적으로 읽는 것을 머뭇거리는 분들도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요한계시록을 개인적으로 읽는 것을 여러분에게 적극 권해드립니다. 요한계시록에 대한 이단적인 해석은 사람의 마음을 미혹하기 위하여 교묘하게 꾸며낸 이론입니다. 그러므로 이단의 가르침을 한번도 접해본 적이 없는 분들이라면 요한계시록 자체만을 여러 차례 읽는다고 하여 이단의 가르침에 빠질 가능성은 별로 없습니다. 오히려, 요한계시록에는 우리의 신앙생활에 큰 유익을 주는 많은 교훈이 담겨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기도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기도의 공동체
요한계시록 전체에 면면히 흐르는 중심 주제 가운데 하나가 바로 기도입니다. 그런 점에서 요한계시록은 기도에 대한 유익한 가르침이 가득하지요. 성경은 성도들의 기도가 금 향로에 담겨 하나님의 보좌에 올라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도의 기도가 금 향로에 담겨 하나님의 보좌에 올라가는 모습은 성경 전체에서 오직 요한계시록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번 찾아볼까요? 요한계시록 5장 8절입니다.
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요한계시록 5장은 천상에서의 예배를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기록하고 있을 그때에 이 세상은 로마 제국이 다스리고 있었고, 세상의 주인은 로마의 황제였습니다. 로마 제국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들은 로마 황제를 신으로 여기며 경배하였습니다. 오직 기독교인들만이 황제가 신이 아니라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만이 인간의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유일하신 분이라고 믿었습니다. 당연히 로마 황제는 기독교인들을 미워하게 되었고 믿음을 간직한 신앙인들은 재산을 몰수당하거나 억울하게 매를 맞거나 심지어 사자굴에 던져지기도 하였지요. 상황이 이렇다 보니 당시 기독교인들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카타콤이라고 불리는 지하 무덤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들은 모든 환란과 박해로부터 자신들을 지켜달라고 그 어두컴컴한 지하 무덤에서 하나님께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그들의 모습은 초라하였고, 그들의 형편은 비참했으며, 그들의 종교활동은 사람들의 비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표현대로 성도들의 겉모습은 ‘세상의 찌꺼기’처럼 보였습니다(고전 4:13).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실상이 있었으니, 저 낮은 지하감옥에서, 저 낮은 지하 무덤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간절히 기도하는 성도들의 기도는 금향로에 담겨 저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의 보좌 앞에 올라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들의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제 아무리 로마 제국이 온 세상을 다스리는 것처럼 보이고, 로마의 황제가 온 세상의 주인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래서 로마 황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며, 로마의 법을 버리고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찌꺼기처럼 보이는 현실일지라도 실상은 온 세상을 주관하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할 수 있기에, 그리고 그들의 기도가 지금도 금향로에 담겨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올라가고 있기에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하는 성도들이 결국에는 최후의 승리를 거머쥐게 된다는 사실을 요한계시록은 역설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때로 여러분의 처지가 초라하다고 여겨지십니까? 때로 여러분의 형편이 비참하다고 여겨지시나요? 여러분의 종교활동이 사람들에게 비웃음거리가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의 눈이 열려 겉모습만이 아니라 영적인 실체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남 모르게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하는 여러분의 기도는 지금도 천사들의 손에 들린 금향로에 담겨 온 우주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 앞에 상달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 견디기 어려운 고난이 찾아올 때, 그 모든 과정을 이겨낼 수 있는 비결도 기도에 있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하는 나의 간구가 지금도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올라간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는 제 아무리 어려운 고난이 찾아올지라도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며 소망을 붙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삶의 방향을 잃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헤매고 있을 때, 신앙인으로서 삶의 바른 방향을 찾을 수 있는 비결 역시 기도에 있습니다. 나의 앞길이 캄캄하여서 한치 앞을 바라볼 수 없을지라도 나의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하나님을 찾는 기도가 지금도 금향로에 담겨 하나님의 귓전에 들린다는 사실을 믿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다시금 기도하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향해 달려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수많은 교회들을 세상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판단하는 잘못을 범하지 마십시오. 교회 안에서 아무리 연약하고 미약한 성도라할지라도 그들의 간절한 기도가 지금도 금 향로에 담겨 하나님의 보좌 앞에 올라가고 있다는 사실을 믿으며, 교회에서 만나는 모든 성도님들을 귀하여 여기시기 바랍니다. 비록 우리 시대 이 땅의 교회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비방을 당하고 부끄러움을 당하여 세상의 찌꺼기처럼 보일지라도, 교회 안에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기도와 예배가 지속되는 한 이 땅의 교회는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찬양의 공동체
오늘 본문 요한계시록 7장은 바로 이 교회의 영광을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 9절과 10절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
9절 말씀에,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큰 무리가 함께 모여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물론, 이 장면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전 세계에서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성도들이 함께 모여 찬양하는 장면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전체의 구성을 보면 예수님께서 세상의 심판주로 다시 오시는 장면은 요한계시록 19장에 이르러서야 나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본문 요한계시록 7장의 찬양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의 모습으로만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을 기다리는 지금도 실제로 일어나는 모습으로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어떤 성도들은 로마 제국의 극심한 박해로부터 끝까지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지하감옥에 갇힌 상태에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또 다른 성도들은 로마 제국의 감시를 피해 카타콤이라 불리는 지하무덤에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어떤 성도들은 로마 제국을 벗어나 동서남북으로 흩어지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로 헌신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향해 찬양을 드립니다. 그들에게는 한 자리에 모여 하나님을 찬양하며 예배할 수 있는 장소도 없고, 그럴 만한 형편도 안됩니다. 그러나 그들이 어디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든 세계 각지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성도들의 찬양과 경배는 하나님께서 좌정하고 계시는 하늘 보좌에까지 상달되어 그곳에서 아름다운 화음을 이루며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고 있음을 오늘 본문 말씀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10절은 온 세계 각처에서 성도들이 부르는 찬양의 내용이 무엇인지도 알려줍니다. 오늘 본문 10절을 다시 보십시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
어떤 이들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 재산의 손해를 감수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을 이기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고 찬양합니다. 어떤 이들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 로마 제국에서 높은 지위를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모든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구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고 찬양합니다. 어떤 이들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 생명의 위협을 당하면서도 그 모든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구원하심이 오직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고 찬양합니다. 비록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들의 모습이 초라할 지라도, 사람들의 눈길을 피해 어두컴컴한 지하 감옥, 지하 동굴, 지하 무덤에서 드리는 금새 사라질 듯한 연약한 목소리라 할지라도 그 찬양의 가사 하나 하나는 하나님의 보좌에까지 상달되는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찬양이었던 것입니다.
어찌 로마시대 그리스도인들 뿐이겠습니까? 우리는 지금 이렇게 크고 넓은 예배당에 많은 성도들이 함께 모여 예배하지만, 여전히 조그마한 예배 처소에서 몇몇 되지 않는 교우들이 함께 예배하는 이른바 많은 개척교회들의 예배도 하나님의 도우심과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여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고 찬양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상달되는 아름다운 찬양이요 영광의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어찌 주일 예배뿐이겠습니까? 구역 식구들이 삼삼오오 모여 드리는 구역예배에서도, 그저 부부 두 사람이 거실에 앉아 자신의 목소리만으로 부르는 찬양 속에서도, 때로는 내 곁에 함께 예배할 사람이 아무도 없어 골방에서 홀로 기도하고 홀로 찬양을 부르는 개인의 예배에서도. 우리를 모든 환란에서 구원하시고, 그 무엇보다 우리를 죄악으로부터 깨끗이 씻어주시어 모든 어두움과 죄의 세력으로부터 구원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며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고 고백하는 우리의 찬양과 경배는 지금도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모든 성도들의 찬양과 함께 어우러져 하나님의 보좌 앞에 울려퍼지는 영광의 찬양, 영광의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장막
하나님께서 사도 요한에게 보여주신 환상은 참으로 놀라운 장면이었습니다. 이 정도만 보여주셔도 이 땅의 교회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교회인지, 이 땅의 성도들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백성인지 충분히 알려주신 것 같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요한에게 보여주신 장면을 이제는 보다 구체적인 언어로 다시 한번 설명해 주십니다. 오늘 본문 13절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장로 중 하나가 응답하여 나에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
여기에 하나의 질문이 등장하지요. 이 흰 옷 입은 사람들이 누구인가? 라는 질문입니다. 여기서 흰 옷 입은 사람들은 세계 곳곳에서 모여와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다”고 찬양을 부르는 무리들을 말합니다. 곧 13절의 질문은 바로 이러한 뜻입니다. ‘교회는 무엇이며, 교회를 구성하는 성도들은 누구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14절 이후부터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 15절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우리가 이미 살펴본 것처럼 성도들은 세상의 찌꺼기처럼 보이지만 그들의 기도는 금 향로에 담겨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올라갑니다. 성도들의 겉모습은 초라하고 비참하지만 그들이 부르는 한 곡조의 노래는 천상을 울리는 영광스러운 예배의 일부분입니다. 그래서 15절은 성도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로 묘사합니다. 그런데 15절 말씀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매우 놀라운 비밀 하나를 말씀하십니다. 15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그 다음을 주목하십시오. “보좌에 앉으신 이가” 누구입니까? 바로 하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이시죠.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 위에”, 곧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향하여 간절히 기도하며,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찬양을 쉬지 않았던 성도들 위에 무엇을 치신다고요? 장막을 치십니다. 이 장막은 눈에 보이지 않는 장막, 세상 사람들은 결코 상상도 할 수 없는 장막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힘도 없고, 권력도 없고, 재물도 없고. 그래서 이방의 우상을 섬기는 로마제국에서 살면서 모진 고난과 환란을 당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하늘 보좌에 앉으셔서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고 그들을 친히 보호하여 주십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보호하시기 위하여 쳐 놓으신 장막 안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지 구체적으로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우리 16절과 17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주실 것임이라
16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합니다’ 마지막까지 믿음을 지키는 성도들은 먹고 마시는 것이 풍족하지 않아서 늘 배고프고, 늘 목마를 것같지만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주리지 않아요, 목마르지 않습니다. 16절을 계속 보십시오.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합니다.’ 위태위태하고, 다칠 것 같고, 저렇게 세상과 등지고 살아가다가는 만신창이가 될 것 같지만 실상은 하나님께서 보호하여주시니 상하지도 않고 다치지도 않습니다. 마지막 17절입니다.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주시고 닦아 주십니다.’
여러분, 오해하지 마십시오. 오늘 본문의 말씀이 요한계시록에 기록되어 있다고 마지막 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의 모습을 묘사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 드렸잖아요. 예수님께서 심판주로 다시 오시는 장면은 요한계시록 19장에 이르러서야 나와요. 그러므로 오늘 본문 요한계시록 7장은 마지막 종말의 때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지금 바로 이 자리에 계신 성도들의 모습 그 자체입니다. 비록 지금은 고난 가운데 있고, 비록 지금은 환난을 만나지만 – 먼 미래가 아니라 – 바로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의 위에 장막을 치시고 우리를 보호하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마다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주리지 않습니다. 목마르지 않습니다. 바로 지금,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목자가 되시어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비록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환난을 당하지만,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로 기도하는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 친히 찾아가셔서 여러분의 눈에 흐르는 눈물을 친히 닦아주십니다.
그러고보니,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펼쳐놓으신 이 장막이야말로 성도들에게 이미 허락하신 하나님의 천국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난 뒤에, 예수님께서 심판주로 다시 오신 뒤에 들어가는 천국만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 위에 쳐 놓으신 장막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위로와 따스한 사랑을 느끼며 천국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비록 나의 삶에 고난이 많고, 비록 우리 시대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으며,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세상의 찌꺼기처럼 보일지라도, 금향로에 담겨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올라가는 기도의 끈을 놓지 마십시오. 지금 내가 있는 이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며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고 찬양하십시오. 비록 이 세상에서 고난이 많고 슬픔이 많을 지라도 여러분의 마음으로부터 간절한 기도와 진실한 찬양이 흘러나온다면 여러분이 계신 바로 그 자리, 여러분이 계신 바로 그 가정, 여러분이 계신 바로 그 공동체가 하나님의 장막이요, 곧 하나님의 천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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