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2020. 6. 9. 15:45
반응형

신앙생활의 핵심이 되는 ‘기도’를 생각할 때, 기도가 점점 깊어지는 기도의 단계에 대해 많은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나름대로의 의견을 많이 내어 놓았습니다. 그 가운데 한 분이 미국 텍사스 주에 있는 햄린 제일침례교회의 존 포웰 목사님입니다. 존 포엘 목사님은 기도의 단계를 네 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하였습니다. 물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존 포엘 목사님이 제시한 네 가지 단계를 예외 없이 따라가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기도에 대해 생각할 때 참고가 될 수 있기에 한번 소개를 하겠습니다. 

존 포웰 목사님이 이야기하는 기도의 첫번째 단계, 곧 기도의 시작은 다른 사람들의 기도를 따라 하는 단계입니다. 어린 시절 주일학교나 미션스쿨을 다녔던 분들은 그곳에서 목사님이나 선생님들이 들려주었던 기도 가운데 일부를 그저 따라 하는 것이지요. 성인이 되어 교회를 출석하였더라도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기도가 아니라 교회에서 들었던 기도를 자신의 입으로 흉내 내며 기도하는 것, 이것이 기도의 첫 번째 단계입니다. 
존 포웰 목사님이 이야기하는 기도의 두번째 단계는 다른 사람의 기도를 따라 하는 것을 넘어 자신의 생각을 자신의 언어로 표현하여 자신만의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는 단계입니다. 두 번째 단계에 이르러 비로소 우리는 다른 누군가의 기도가 아니라, 나 자신의 기도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것은 기도의 네 단계 가운데 두 번째 단계에 불과합니다. 
존 포웰 목사님이 이야기하는 기도의 세번째 단계는 자신의 생각을 자신의 언어로 표현할 뿐만 아니라 나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감정을 하나님께 토로하는 기도입니다. 나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슬픔, 아픔, 괴로움, 뿐만 아니라 즐거운, 기쁨, 감사, 찬양 등. 나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 아뢰는 기도죠. 존 포웰 목사님은 시편의 기도가 자신의 마음 깊은 것을 표현하는 세 번째 단계 기도의 대표적인 예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정도의 기도라면 충분히 깊이가 있는 훌륭한 기도가 되겠지요. 
그런데 존 포웰 목사님은 이와 같은 세번째 단계를 넘어서는 더 깊은 단계, 곧 마지막 네 번째 단계가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더 이상 언어가 필요 없는 단계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거하는 단계,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 속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평안을 누리는 단계, 바로 이러한 단계가 가장 깊은 기도의 단계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각주:1]  

말씀 드린 것처럼, 존 포웰 목사님이 제시한 기도의 단계는 모든 사람들에게 어느 때나 어느 상황이나 모두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 포웰 목사님이 제시한 가장 깊은 단계, 곧 더 이상 그 어떠한 언어를 하나님 앞에 쏟아놓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고,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속에서 참된 평화를 누리는 그 깊은 기도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한 번쯤은 꿈꾸는 기도의 깊이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의 언어들 가운데, 그와 같은 가장 깊은 단계의 기도를 나타내는 가장 대표적인 표현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아빠” “아바 아버지”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 더 이상 어떠한 인간의 언어를 계속해서 쏟아놓지 않더라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누리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하는 가장 깊은 기도를 통한 하나님의 교제가 아니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었다고 선언합니다. 그렇다면 첫번째 질문, ‘어떻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두 번째 질문, ‘무엇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의 특권일까요? 오늘 본문은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대답을 제공합니다. 

 


‘어떻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가? 

첫째로, 어떻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까? 오늘 본문 갈라디아서 4장 4절과 5절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도록 하겠습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타임 테이블에 따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께서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 태어나게 하셨지요. 오늘 본문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동정녀 마리아에게 태어나신 것은 곧 예수님께서 율법 아래에서 태어나신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율법 아래에서 종노릇 하는 사람들을 위해 스스로 율법의 아래에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5절을 보시면, 율법 아래 태어나신 예수님은 율법 아래 있는 인간들을 속량 하셨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인간을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놀라운 속량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분을 얻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하는 우리가 그 무엇보다 먼저 기억해야 할 사실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위대한 명분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며 우리의 소원을 아뢸 수 있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속량하시는 은혜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롬 8:31-32)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셨다는 사실,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아들의 명분을 얻도록 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주셨다는 그 놀라운 은혜를 생각할 때 우리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위해 내어 주신 하나님께서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얼마 전 교회에 등록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새가족을 심방하였습니다. 그 가정은 오래전 다른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참 열심히 하셨던 분들이었습니다. 교회의 구석구석 보이지 않는 곳에서 봉사하고 최선을 다해 교회를 섬겼던 가정이었지요. 자연스럽게 자녀들도 교회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고 교회에서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운영하던 사업이 어려움을 겪으면서 가정에 큰 위기가 찾아왔어요. 그것을 계기로 지난 10여 년간 신앙생활을 멀리하고 교회를 멀리하였던 가정이지요. 
그날 모임에 대학생 딸이 함께 참여하였습니다. 그래서 대학생인 그 자매에게 제가 질문했습니다. “예전에 신앙생활도 해보았고, 지금은 교회를 쉬고 있는데 자매의 마음에 하나님을 생각할 때 교회를 생각할 때 기독교를 생각할 때 어떠한 마음과 생각이 드나요?” 그러자 그 청년이 솔직한 자신의 심정을 이야기하는 거에요. 어린 시절 초등학교를 다닐 때까지만 해도 교회에서 자라났고 교회에서 친구들과 함께 지내는 것이 언제나 기쁘고 즐거운 일이었답니다. 그런데 자신이 중학생이 되었을 때 아빠의 사업이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온 식구들이 그 문제를 놓고 하나님께 진심으로 기도했다는 거예요. 어린 중학생의 마음에 아빠와 엄마를 비롯해 온 식구들이 간절히 기도하니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을 지켜주실 거라고 믿었데요. 그런데 현실은 자신의 믿음과 반대 방향으로 진행되었고, 하나님은 우리 가정을 도와주지 않으셨데요. 
대학생 청년이 그때의 이야기를 하는데, 옆에서 딸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엄마가 그저 눈물을 흘리시더라고요. 온 식구들이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였지만, 온 식구들이 하나님의 일이라면 압장서서 감당하였지만, 그리고 그 가정을 향해 몰아치는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서 온 식구들이 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지만 하나님께서 자신과 자신의 가정을 외면하고 등을 돌리신 것처럼 느껴질 때. 온 식구들은 하나님을 멀리 떠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 청년의 이야기를 한참 들은 뒤에 제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원망, 하나님을 향한 실망, 하나님을 생각할 때 느껴지는 배신감 등 자매의 마음에 있는 부정적인 생각들을 가슴에 품었기에 하나님을 더욱 멀리한다면 자매의 마음에 있는 실망감은 도저히 해결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불평, 불만, 배신감을 간직한 채 그러한 감정들을 하나님께 쏟아놓는다면 자매를 향한 하나님의 또 다른 마음도 경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한 가지 비유를 들었어요. 지금까지 자라면서 부모님께 실망하고 서운했던 적이 왜 없겠어요? 부모님이 왜 나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실까 원망스러웠던 적이 분명히 있지 않겠어요? 그러나 때로는 그와 같은 부정적인 마음이 들어도 계속해서 부모님과 함께 살아가다 보면 자매를 향한 부모님의 더 깊은 사랑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 아니겠냐고,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실망하고, 원망스럽고, 서운한 감정을 간직한 채 하나님께 나아가면 좋겠다고 권면을 했지요. 

그리고 함께 예배를 드리며 나누었던 말씀이 로마서 8장 31-32절이었습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롬 8:31-32) 

때로는 하나님께서 지금 당장 나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나를 외면하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분명히 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사랑이 나와는 상관이 없다고 여겨질 때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신 것은 아닌지 의심이 생깁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우리가 기억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사실이 있다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시셨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여 주셨고,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는 그 놀라운 사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 그 한 가지를 기억한다면 우리는 사도 바울과 같이 선포할 수 있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롬 8:32)

지금 내가 겪는 삶의 무게가 제 아무리 무거울 지라도, 그 인생의 무게에 눌려 도저히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볼 수 없는 그 순간에도 여러분 단 하나의 사건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다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그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삶의 고난 앞에서도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자녀 된 특권인가? 

바울은 먼저,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지를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제, 무엇이 하나님의 자녀 된 특권인지를 보여주고 있지요. 하나님의 자녀 된 특권 역시, 사도 바울은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특권은 하나님을 향해 ‘아버지’라고 부르는 특권입니다. 

오늘 본문 갈라디아서 4장 6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우리가 아들이기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담대히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가 있다는 말씀이지요. 

경기도 포천에 팔호교회라는 조그마한 시골교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의 창립과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어요. 그 지역은 휴전선과 가까운 지역이어서 예나 지금이나 군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한국전쟁 때 가족을 모두 잃은 어느 군인 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짙게 내리면, 어김없이 술을 얼큰하게 한 잔 하고는 강원도와 경기도를 가로질러 흐르는 한탄강 강가에 나가 홀로 적적함을 달래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가족이 너무도 보고 싶고,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부모님이 몹시도 그리웠다고 합니다. 그날도 어김없이 많은 술을 마신 채 한탄강 강변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해서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생각이 갑자기 머리를 스쳤대요.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아버지’라고 큰 소리로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몇 차례나 불렀을까요? 마음의 모든 그리움을 담아 ‘아버지’라고 크게 부르는데 어디선가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한 목소리가 들렸다고 합니다. “왜 부르느냐?” 그 음성을 듣고 주위를 아무리 둘러보아도 아무도 없었다고 합니다. 

예상치 못했던 음성에 갑자가 술이 다 깨고, 정신이 바짝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 아버지가 되어 주시는 군요. 하나님 아버지께서 언제나 제 곁에 계셨군요.’ 그때부터 그분은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여 교회 장로님이 되셨고, 자신이 ‘아버지’를 찾았던 바로 그 자리, 제8호 한탄강 강변에 교회를 세웠는데 그것이 바로 팔호교회입니다. 

팔호교회를 창립하신 장로님의 경우처럼, 우리 주변에는 아버지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한 분들이 계세요. 아니면 시간이 흘러 부모님께서 세상을 떠나셔서 아버지라는 이름, 어머니라는 이름을 언제 불렀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 분들도 계시죠. 어디 그뿐인가요? 가정이 깨어지고 갈라지면서 그 안에서 부모님의 사랑을 충분히 느끼지 못한 분들도 계십니다. 설령 행복하고 아름다운 가정에서 자랐을지라도, 그래서 부모님의 사랑을 충분히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마음에는 하나님 아버지로서만 채워질 수 있는 한이 없이 깊은 그리움과 외로움이 자리 잡고 있지 않은가요? 그래서 70여 년을 무신론자로 살았던 이어령 박사는 무신론자에 대해 이렇게 정의를 내립니다. ‘겉으로는 태연한 체, 강한 체 오기를 부리다가도 누가 옆에서 조금만 보고 싶다 사랑한다고 손을 내밀면 금시 울음을 터트릴 그런 사람들이’ 바로 무신론자라고 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각주:2]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라고 부르며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잖아요. 수많은 기도의 제목을 다 아뢰지 못했도, 나의 마음을 충분히 하나님께 쏟아 놓을 수 있는 언어가 우리의 입술는 부족할 지라도 하나님을 향해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는 그 하나의 사실만으로도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아시고, 우리의 생각을 아시고, 우리의 심령을 헤아려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주신다는 사실, 세상의 그 어떠한 아버지보다도 나를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을 향해 기도할 수 있다는 사실이 우리로 하여금 놀라운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받는 두 번째 특권은 하나님의 유업을 받는 특권, 곧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는 특권입니다. 오늘 본문 갈라디아서 4장 7절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우리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아들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무엇이라고 선언합니까?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자입니다. 여기서 ‘유업을 받을 자’, 곧 상속자라는 의미가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여러 차례 복음을 믿어 크리스천이 된 사람들은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었다고 설명하거든요.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의 상속자는 구약에서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약속이 그의 후손들에게, 곧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이어졌던 그 장면을 염두에 둔 개념입니다. 한 마디로 설명하면, 여기서 하나님의 상속자라는 말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참여한 사람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속량, 곧 죄용서와 구원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아버지라고 불러요. 나아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의 중요한 특권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참여한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넌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상관없이 살아갑니다. 그래서 인생의 주인이 자기 자신이지요. 자신의 힘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큰 위기나 어려움이 찾아올 때 쓰러져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크리스천들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달라요.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지금 하루하루가 하나님의 구원 계획, 하나님의 구원 섭리 안에 있습니다. 

때로는 나의 계획이 실패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때로는 나의 앞길이 막막하게만 보입니다. 그러나, 그 위기의 순간에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많은 말과 화려한 언어로 기도하지 못할지라도 그저 하나님을 향해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하는 우리는 하나님의 딸이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우리의 삶을 인자하게 인도해가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상속자의 특권, 곧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 아버지’라 부르며 기도하는 우리 모두의 특권인 것입니다. 


  1. The PCC. Equipping Elders (Toronto: PCC, 2010), 122. [본문으로]
  2. 이어령, 『지성에서 영성으로』 (서울: 열림원, 2010), 26-27. [본문으로]
반응형
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