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2020. 6. 9.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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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설교의 제목은 기쁨의 공동체입니다. 여러분, 교회는 기쁨의 공동체입니다. 

교회가 다른 여타의 모임이나 조직과 비교했을 때 눈에 띄는 차이점, 가장 현저하게 눈에 보이는 차이점이 있다면 그것은 교회의 모임이 매주 일요일마다 있다는 사실입니다. 교회를 제외하고 그 어떠한 조직이나 집단이 매주 일요일에 정기적인 모임을 가지며, 일요일에 모이는 정기모임을 그 공동체의 가장 중요한 모임으로 여기고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어요. 이것이 기독교의 눈에 띄는, 가장 직접적으로 눈에 띄는 특징 가운데 하나입니다. 기독교는 구약성경이 매주 토요일에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까지도 바꾸어 일요일을 ‘주일’이라고 부르며 매주 그 주일을 지키고 있으니 얼마나 독특한 특징입니까? 이처럼 기독교는 주일을 거의 생명처럼 지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독교가 이처럼 주일에 집중하고 집착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두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여주시기 위하여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날이기 때문이지요. 여러분,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중요하게 여기지만 매주 성 금요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기쁨이 충만한 주일을 지키는 기쁨의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기쁨과 즐거움의 공동체이지요. 세상 속에서 슬픔과 괴로움이 나의 마음을 가득 채웠더라도,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기쁨과 즐거움을 되찾을 수 있는 곳이 바로 교회가 아니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빌립보서는 성경 안에서도 ‘기쁨의 서신’이라는 별칭이 붙을 만큼 교회가 얼마나 기쁨의 공동체가 되어야 하는지를 강조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7절 뒷부분을 보시면,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 자신에게 기쁨이 충만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8절을 보면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빌립보교회 성도들 역시 기쁨이 넘쳐야 한다는 거죠. 그런데 이뿐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는 바울의 기쁨, 그리고 빌립보교회 성도들의 기쁨 외에도 하나님의 기쁨이 등장해요. 13절을 보시면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그 뒤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실 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교회란 모든 성도들이 함께 기뻐하고, 그 모습을 바라보며 목회자들이 또한 즐거워하고, 이 모든 장면을 위에서 내려다보시는 하나님께서 미소 지으시는 기쁨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이러한 기쁨의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모든 성도들이 즐거워하고, 그것을 바라보며 목회자들이 기뻐하고, 나아가 그 모든 장면을 내려다보시며 하나님께서 미소 지으실 만한 기쁨의 공동체가 바로 우리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바라보시며 기뻐하실 만한 교회는 과연 어떠한 교회일까요? 오늘 본문은 이에 대한 대답을 세 가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교회 내부의 관계에서, 둘째는 교회 밖 세상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과연 어떠한 교회가 기쁨이 넘치는 교회요, 하나님께서도 바라보시며 기뻐하실 만한 교회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원망과 시비가 없는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라보시며 기뻐하실 교회, 그 첫 번째 특징은 - 교회 내부의 관계에서 - 원망과 시비가 없는 교회입니다. 오늘 본문 14절에 그 내용이 등장합니다. 우리 다 함께 14절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하라” 

구약 성경 사사기를 보면 흥미로운 사건이 등장합니다. 이스라엘은 암몬 나라의 침략을 받아 그들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또 당시 이스라엘은 암몬 나라를 몰아낼 수 있는 힘이 없었어요. 그러게 짧지 않은 시간이 흘르고 있을 때, 하나님은 민족 영웅 입다를 세우셔서, 암몬 군대를 몰아내게 하십니다. 입다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이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순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이 임했던 바로 그때에 이스라엘 민족에게 모든 기쁨을 빼앗아가는 비극적인 사건이 등장합니다. 암몬 나라의 군대를 모두 몰아낸 입다와 그의 군대가 전쟁터에서 돌아오자, 이스라엘의 12지파 가운데 하나였던 에브라임 지파의 지도자들이 입다를 찾아와 시비를 붙습니다. 그 장면을 성경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지요. 

“에브라임 사람들이 모여 북쪽으로 가서 입다에게 이르되 네가 암몬 자손과 싸우러 건너갈 때에 어찌하여 우리를 불러 너와 함께 가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우리가 반드시 너와 네 집을 불사르리라”(삿 12:1)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의 주장은 사실 정당한 주장이 아닙니다. 암몬 나라의 지배를 받고 있을 때 그들은 용기를 내어서 그들과 싸우러 나갔던 사람들이 아니죠. 입다는 그들의 주장이 부당함을 주장하면서 입다 에브라임 사람들 사이에 큰 싸움이 일어나 결국에는 이스라엘의 내전으로 확대됩니다. 그리고 이 싸움에서 4만 2천 명의 에브라임 사람이 죽고 말죠.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땅에 가족을 잃은 탄식과 고통의 눈물이 가득하지 않았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바로 그 시점, 하나님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할 바로 그 시점에,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원망과 갈등으로 말미암은 시비가 일어났고, 하나님께서 주신 큰 기쁨의 사건이 슬픔과 통곡과 눈물로 바뀌고 말았던 것입니다.  

중국 교회의 워치만 니가 자신의 저서에서 소개하고 있는 한 가지 이야기입니다. 중국에 농사를 짓는 크리스천 형제가 있었습니다. 이 크리스천 형제는 교회에서도, 그리고 자신이 일하는 일터인 논에서도 매우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크리스천 형제는 열심히 일하여 자신의 논에 물길을 내고 충분한 물을 공급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자신의 논에 나가보니, 누군가 자신의 논에 물을 공급하는 수로를 터트려 자신의 논에 물이 흘러가도록 했던 것입니다. 그 장면을 보고 올라오는 분노가 있었지만, 그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금 수로를 복귀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다음 날도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여러 날이 지나도 그와 같은 일은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이 크리스천 형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를 놓고 기도하는 가운데, 그는 교회 지도자들에게 이 문제를 놓고 기도해 달라고 기도 요청을 하게 됩니다. 크리스천 형제의 기도제목을 다 들은 어니 교회 지도자 한 분이 크리스천 형제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형제여, 당신은 아무 잘못이 없고. 형제가 항의를 해서 권리를 찾는 것은 올바른 일이라고 생각하오. 그러나 형제여, 형제는 주께서 우리가 올바른 일을 하는 것으로 만족하실 것이라고 생각하시는지 묻고 싶소. 주께서는 올바른 일보다도 더 위대한 일을 원하시지는 않을지 기도해 보시가로 말씀드리고 싶소.” 

크리스천 형제는 집으로 돌아와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오늘 교회 지도자를 통해 들은 이야기가 정말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십니까? 하나님께서 정말로 제가 옳은 일보다 더 위대한 일을 하기 원하십니까? 만일 그렇다면 옳은 일보다 더 위대한 일이 무엇인지 저에게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일찍 그는 자신의 논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논에 있는 물을 주변의 논에 흘러가게 해 주었다고 합니다. 이 장면을 놓고 워치만 니는 이렇게 묘사하였습니다. 그 크리스천 형제의 마음에 하늘의 기쁨이 가득했다고 말입니다. 

여러분, 말씀과 기도 가운데 큰 은혜를 받은 우리에게서 촉촉한 하나님의 은혜를 한 순간에 날려버릴 수 있는 사단의 탁월한 공격 무기가 있다면, 그것은 원망과 시비입니다. 나는 열심히 교회를 섬겼는데, 다른 누군가로 인하여 나의 헌신이 열매를 맺지 못했다면 원망스러운 마음이 일어납니다. 지금까지 내가 쌓아 올린 정성과 노력을 생각한다면 마땅히 나에게 주어져야 할 것 같은 권리를 되찾기 위해 때로는 시시비비를 가릴 수도 있겠지요. 우리의 원망이나, 우리의 시시비비가 옳고 정당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원망과 시비가 고개를 들고일어나는 순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늘의 기쁨을 잃어버리고 만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에 흠 잡히지 않는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교회는 어떠한 교회 일까요? 둘째로, - 교회 밖 세상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 하나님께서 바라보시며 기뻐하실 만한 교회는 세상에 흠 잡히지 않는 교회입니다. 오늘 본문 15절에 그 내용이 나와있습니다. 우리 한 목소릴 봉독하겠습니다.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오늘 본문을 보면, 세상을 무엇이라고 묘사합니까?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입니다. 사람들은 우리 시대를 가리켜 포스트모던 시대라고 말합니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특징은 절대적인 진리를 부정한다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진리가 없으니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그른지에 대한 가치판단의 기준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고 싶은 것, 자신이 좋아하는 것, 자신에게 즐거움과 쾌락을 주는 것만을 따라갑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을 보니 포스트모던시대라 불리는 우리 시대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옛날 바울 시대에도 세상 사람들의 모습은 동일했던 것 같습니다. 세상은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없이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절대적인 진리를 부정하며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은 채, 자신의 마음이 이끄는 대로 살아갑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을 믿는 크리스천들, 그리고 그들의 모임인 교회가 자신들과 다르기를 기대합니다. 교회와 크리스천들이 그 높은 기대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그들은 실망하고 때로는 비판도 하죠. 우리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크리스천의 삶이 그래도 세상 사람들보다는 올곧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그것이 사실일 수도 있겠죠. 그러나 세상에 실망감을 안겨주고, 심지어 그들로부터 비판을 받는 교회라면 – 설령 그들의 주장에 맹점이 있더라도 – 그 교회가 어떻게 기쁨의 공동체가 될 수 있겠습니까? 


생명의 말씀을 붙잡고 그 말씀을 선포하는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교회는 어떠한 교회일까요? 셋째로, -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 하나님께서 바라보시며 기뻐하실 만한 교회는 생명의 말씀을 붙잡고 그 말씀을 선포하는 교회입니다. 오늘 본문 16절에 그 내용이 등장합니다. 우리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16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생명의 말씀을 밝혀” 여기서 ‘밝혀’라고 번역되어 있는 헬라어 단어는 오늘 본문에서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붙든다’는 의미이고, 두 번째는 ‘제시한다’(밝힌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개역한글성경에는 ‘밝혀’라고 번역해 놓고는 거기에 각주를 달아서 ‘붙들어’라고 적어놓았습니다. 저는 사도 바울이 16절의 말씀을 기록할 때 ‘붙든다’는 의미와 ‘제시한다’ 혹은 ‘밝힌다’는 의미를 모두 포함하는 의미로 이 단어를 기록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바라보시며 기뻐하시는 교회의 특징은 생명의 말씀을 붙잡고 살아가는 것이요, 나아가 생명의 말씀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을 밝히 보여주는 교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히 옳은 것을 행하라고 명령합니다. 지극히 상식적으로 옭은 것을 명령하죠.  예를 들어 십계명에서 ‘살인하리 말라’ 얼마나 상식적인 명령입니까? ‘간음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남의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 얼마나 상식적인 명령이십니까? 그러나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우리에게 옳은 것을 넘어 더욱 위대한 일을 명령하기도 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를 들어보라면,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지극히 상식적이고 옳은 것을 명령하십니다. 그러면서도 때로는 그 이상의 위대한 것을 권면하시죠. 그래서 어느 목사님은 크리스천의 삶을 “상식에 준해 살면서도 상식의 한계를 넘어서 사는 삶”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상식적으로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요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았기에 때로는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는 것이 크리스천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조금 전에 드렸던 중국의 한 크리스천 형제 이야기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가 자신의 논에 있는 물을 다른 농부의 논에 나누어주자, 그의 마음에 하늘의 기쁨이 가득 찼습니다. 그리고 수일이 못되어 주변의 한 농부가 그를 찾아와 이렇게 질문했다고 합니다. “왜 당신은 스스로 내 논에 물을 대 주었는가?” 그러자 이 크리스천 형제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나의 주님이 그렇게 하라고 명하셨다네.” 그러자 깜짝 놀란 이 동부가 다시 한번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아니, 자네가 소작농이었나?. 그렇다면 자네의 주인은 누구인가?” 그러자 크리스천 형제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의 주인은 나에게 생명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라네. 그분은 나에게 옳은 일, 그 이상의 위대한 일을 명령하셨다네. 그리하여 내가 나의 논에 있는 물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준 것이라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그 농부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 이와 같이 아름다운 사건들, 기쁨과 즐거움의 사건들이 가득 넘쳐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옳은 일을 주장할 수 있습니다. 상식에 기준하여 나의 권리를 찾기 위해 시시비비를 가릴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가 옳은 일만이 아니라, 옳은 일 이상의 더욱 위대한 일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욱 위대한 일을 요구하시기에, 하나님의 말씀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시기에, 그 말씀에 순종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모습 안에 참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옳은 일, 그 이상의 위대한 일을 실천할 때 그러한 우리의 모습을 바라보며 누군가 예수 그리스도 앞에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우리의 참된 기쁨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교회와 우리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옳은 것을 넘어 더욱 위대한 사랑을 실천하며 생명의 말씀을 우리의 언어와 삶으로 선포할 때, 우리 교회에 하늘의 기쁨이 쏟아지는 것이요, 그러한 교회가 하나님 앞에 참된 기쁨의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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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