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2020. 6. 9.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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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駐) 서독 미국 대사로 활동하였던 아더 번즈(Arthur Burns)는 미국 정가에서 매우 비중 있는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여러 대통령의 경제 자문관 역할을 하기도 했던 아더 번즈는 신실한 유대인이었지요. 그런데 아더 번즈는 예수님을 믿는 크리스천들로 구성된 백악관의 비공식 기도 모임에 참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기도 모임을 인도하던 분이 모임의 마지막 기도를 유대인이었던 아더 번즈에게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아더 번즈는 이렇게 기도했죠. 


“주님,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회교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해주시길 기도합니다. 
끝으로 주님,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아멘.” [각주:1]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도록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자연스럽지요. 회교도, 곧 무슬림들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예수님을 알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기도 역시 자연스러워요.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사람들, 예수님이 우리의 구세주와 우리의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크리스천들 역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정확히 알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아더 번즈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크리스천들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해 달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아더 번즈의 이 기도가 오늘 우리에게도 유효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요. 그분의 십자가 죽음이 나를 위한 죽음이라는 사실을 믿어요.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나에게 부활과 영원한 생명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확신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의 삶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삶이 부족한 것이 우리의 현실은 아닌가요?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이 땅 위에서 살아가셨던 삶의 방식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이해하고 있으며, 여러분들도 지금 예수님의 삶의 방식을 따라 살아가고 계시다고 자신 있게 말씀하실 수 있으십니까? 


나를 본받으라!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17절)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자기 자신을 본받으라고 자신 있게 말씀하는 장면을 보면서, 우리는 위축이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과연 믿음의 수준이, 믿음의 경지가 어느 정도로 높아져야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은 높은 신앙의 경지에 이미 올랐고,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여전히 수준 낮은 신앙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바울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 자신이 완성된 믿음의 상태에 있기 때문에, 여전히 온전한 믿음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바울이 오늘 본문 바로 앞에 기록한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3장 12절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바울이 무엇이라고 고백합니까?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이미 잡았나요? 아닙니다. 아직 잡지 못했기 때문에 잡아보려고 이제도 “달려가노라”라고 말씀합니다. 

바로 다음 절인 빌립보서 3장 13절과 14절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바울이 계속해서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바울은 자신이 무엇인가를 이미 이루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여전히 그의 앞에는 달려가야 할 푯대가 있다고 여겼던 것이지요. 

바울은 자신이 온전한 상태에 이르렀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전히 자신 앞에 놓여 있는 푯대를 향해 달려간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어떠한 의미입니까? 온전한 수준에 이른 자신을 본받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 다 이루지 못했지만, 지속적으로 푯대를 향해 걸아 가는 자기 자신, 쉬지 않고 보다 높은 수준을 향해 달려가는 자기 자신을 본받으라는 말씀이지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그 누구도 자신이 크리스천으로서 ‘완전한 상태’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속적으로 그리스도의 제자다운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설교하면 여러분들은 속으로 이렇게 반문하실 지도 모릅니다. “당연하지요. 과연 우리 중에 누가 자기 자신은 ‘완전한 상태’에 이르렀다고 생각하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교회 안의 신앙생활을 가만히 지켜보면, 마치 자신은 완전한 상태에 이른 듯 착각하는 경우가 없지 않아 있어요. 

1970년대 한국 교회 안에 이른바 제자 훈련이라는 것이 시작되었습니다. 제자 훈련의 기본 취지는 신앙생활을 하는 크리스천들로 하여금 단지 예배당을 찾는 것만이 아니라, 그들의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모습을 지속적으로 훈련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런데, 1980년 대 이후, 여러 교회가 제자 훈련을 시행하면서, 점차적으로 교회 안에 나타난 부작용이 무엇인지 아세요? 제자 훈련을 수료한 사람과, 제자 훈련을 수료하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 차이가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제자 훈련을 수료한 성도들은 마치 자기 자신이 제자 훈련의 모든 과정을 마쳤기에 더 이상은 별도의 훈련이 없어도 되는 것처럼 착각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제자 훈련을 이미 수료한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의 보이지 않는 차별로 연결되었던 것입니다. 

이와 동일한 일들이 교회의 직분 속에서도 나타납니다. 우리 교회를 포함한 많은 교회가 장로님, 집사님, 권사님들을 세웁니다. 직분을 세우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디모데전서의 말씀을 보면 교회가 직분을 세우는 이유는 “선한 일을 사모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딤전 3:1). 성도들로 하여금 지속적으로 선한 일을 사모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적지 않은 직분자들이 직분을 받으면, 이미 직분을 받았으면 선한 일을 사모하는 일, 곧 지속적인 믿음의 성장과 성숙이 이미 다 이루어진 것처럼 착각을 하지요. 그리고 어느덧 선한 일을 사모하는 열심이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지금 이 자리에서 목사라는 직분을 받아 여러분에게 설교를 하는 저를 포함하여, 이곳에서 예배하는 우리 모두는 보다 높은 성숙, 보다 높은 믿음의 단계를 향해 걸어가는 도상에 서 있는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일반적으로 어느 목사님께서 교회 성도들에게 성경 말씀을 가르치려 할 때, 성경을 가르치기 가장 어려운 분들은 누구일까요? 이미 성경에 대하 많이 알고 계신 분들입니다. 성경을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성경 해석에 대한 선입관 역시 강하다는 의미도 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런 점에서 과거에 성경 말씀을 많이 읽고, 오랜 시간 성경 말씀을 묵상하셨던 분들에게, 성경에 대한 열정을 다시 한 번 불태우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다시 말씀을 보셔야 합니다. 다시 성경을 묵상하셔야 해요. 그러면서 더욱더 깊은 말씀에 대한 이해가 가능하고, 그때에야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다시 한번 말씀에 비추이게 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어느 목사님께서 교회 성도들에게 기도 훈련을 시키려 할 때, 기도 훈련을 받기 가장 어려운 분들은 어떤 분들일까요? 기도에 대해 잘 모르시는 분들은 오히려 쉽게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과거에 기도를 많이 하셨던 분들이 오히려 교육 받기가 어려워요. 자신만의 기도 방식이 강하신 분들일수록 자신의 기도 습관을 깨치고 나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시간이 흐르면서 보다 깊은 기도의 단계, 보다 깊은 기도의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일 여러분들 가운데 과거에 많이 기도하신 분들이 계시다면 다시 한번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보다 깊은 기도의 단계를 향해 달려가셔야 합니다. 

제가 한 가지만 더 질문해보죠. 일반적으로 어느 목사님께서 교회 성도들에게 전도 훈련을 시키려 할 때, 훈련 받기 가장 어려운 분들이 어떤 분들인지 아시나요? 교회 성도들 가운데, 과거에 전도 훈련을 이미 받았던 분들, 과거에 이미 전도를 많이 해 보았던 분들입니다. 전도 훈련, 이미 받았다는 겁니다. 전도 나만큼 많이 해 본 사람도 별로 없다는 거지요. 그런데 여러분,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신앙생활의 완성을 말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여러분들 가운데 과거에 전도 훈련도 받고, 열심히 전도하셨던 분들이 계시다면 다시 한번 전도의 열정을 가슴에 지피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의 고백과 같이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세요. 그리고 다시 한번 믿음의 성숙과 신앙생활의 높은 단계를 위해 앞으로 달려가는 도상에 서 있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의 원수 VS 그리스도의 제자

사도 바울은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사도 바울은 자신이 온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신앙의 완성에 이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푯대를 향해 지속적으로 달려가면서, 그러한 자신의 모습을 빌립보교회 성도들 역시 본받기를 원했지요. 그런데 바울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 시대에, 그리고 오늘 우리의 시대에도,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크리스천이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이름은 가졌지만 그분의 진정한 제자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그들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 18절을 우리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바울은 빌립보서를 쓰기 이전에도 이미 여러 차례 말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빌립보서를 쓰고 있는 바울의 눈가에 이슬이 맺히며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과연 사도 바울이 여기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은 누구였을까요? 여러 가지 주장이 있어요. 율법주의자들이다, 혹은 복음을 위한 고난을 회피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러한 주장 가운데 존 칼뱅의 설명을 소개하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하다 판단됩니다. 칼뱅은 설명하기를 “그들은 복음의 친구인 척하지만 복음의 가장 큰 원수가 되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겉으로는 이미 크리스천이 되었습니다. 이미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나아가 정기적으로 교회를 출석하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겉모습만 본다면 복음의 친구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을까요? 성경은 분명하게 “그렇다”라고 대답합니다. 오늘 본문 19절을 보시면 그들의 특징이 나타납니다. 그들이 섬기는 우상은 그들의 배, 곧 식욕과 탐심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영광을 구하지만 그 마지막은 그들의 부끄러움이지요. 그리고 19절 마지막을 보시면, 그들은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이미 크리스천이 되었다니까요. 이미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한다니까요. 나아가 정기적으로 교회를 출석하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요. 겉모습만 본다면 복음의 친구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크리스천으로서의 성숙을 아직은 이루지 못하였다고 고백하며, 멈추지 않는 열심과 열정으로 자기 자신을 훈련하지 않는다면, 제 아무리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을 가졌을 지라도 식욕과 명예욕과 같은 땅의 일만을 생각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들이 바울 시대에도 존재했고, 오늘 우리 시대에도 존재합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오늘 본문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들만 등장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라는 푯대를 향해 걸어가는 도상에 서있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모습도 보여줍니다. 

다 함께 오늘 본문 20절과 21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 그들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20절을 보시면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는 그 시민권이 하늘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늘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립니다. 그들이 기다리는 예수님은 21절 뒷부분을 보시면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는 분’이지요.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보다 깊은 신앙, 보다 높은 믿음의 수준에 이르기 위해 오늘도 내일도 걸어가는 그리스도의 제자는 그들의 소망을 하늘에 두며, 마지막 날 우리를 온전하게 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과,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 된 사람들의 특징을 상반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중요한 하나의 질문이 남게 됩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로서의 길을 걸어가고 계십니까?” 아니면, “겉모습은 복음의 친구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리스도의 복음의 원수로 행하고 계십니까?” 

우리는 스스로 중간 지대에 있는 사람들이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성경은 너무나도 자주 중간지대를 생략합니다. 

시편 1편의 말씀을 기억하시지요?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행사가 다 형통하리라” 

그런데 시편 1편 4절에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지요?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시편은 복 있는 사람과 악인으로 사람을 구분합니다. 그 중간지대는 없어요. 

예수님도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말씀하셨지요.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가 넓어서 그리고 들어가는 자가 많고” 
반면에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마 7:13-14)  

우리는 그 두 가지가 적절히 섞였으면 좋겠습니다. 문도 크고 길도 넓어서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많은데, 결국에는 그 길이 멸망이 아닌 생명의 길이기를 원하죠. 그런데 예수님은 멸망의 길과 생명의 길 두 가지를 말씀하시면서 그 중간지대를 언급하지 않으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기 위해 쉬지 않고 믿음의 여정을 계속하는 사람들이 있고, 겉모습은 복음의 친구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리스도의 복음의 원수로 행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중간지대를 이야기하지 않아요.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이제 마지막 질문이 남은 것이죠. 


“여러분은 믿음의 성숙과 신앙생활의 더 깊은 단계를 향해 오늘도 걸어가고 있는 도상 위의 그리스도의 제자이십니까?” 

우리 마음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시는 예수님은 오늘도 사도 바울의 입을 빌어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실까요?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1. 오스 기니스, 『소명』(서울: IVP, 2009), pp. 173-174.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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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