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2020. 6. 12.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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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은 그의 일생을 다하여 최선을 다해 복음을 전하고, 또 자신이 전한 복음을 믿어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을 최선을 다해 양육하였습니다. 이제 시간이 지나 바울도 어느덧 늙었습니다. 그러자 이제 바울의 사역이 맺은 열매가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로마 제국 전역에 바울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나타났고, 그에게 양육받은 사람들이 믿음의 일꾼들로 자라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빌레몬입니다. 빌레몬은 부유한 사람이어서 그의 집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도 있었고, 집안의 다양한 일들을 담당하는 여러 명의 노예, 곧 종들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부유한 빌레몬이 사도 바울을 통해 예수님을 믿고 신실한 하나님의 일꾼이 되자, 그는 자신의 집을 개방하였고 빌레몬의 집에서 매주 하나님을 예배하는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니 빌레몬을 생각할 때마다 빌레몬의 영적인 아버지요, 믿음의 스승인 사도 바울은 큰 기쁨이 그 마음에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하루는 빌레몬의 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오네시모라는 이름의 종이 주인을 피해 도망을 갔습니다. 당시 로마 사회에서 종이 주인을 피해 도망을 가는 것은 종종 발생하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로마 사회는 워낙 넓은 영토에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일단 주인의 눈을 피해 멀리 도망을 가면 주인에게 붙잡히지 않을 수 있었던 거지요. 그런데 문제는 주인의 눈을 피하고 나서부터 찾아옵니다. 바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구하기가 어렵다는 점이죠. 그래서 당시 주인의 집을 도망쳐 나오는 대부분의 종들은 단지 자신의 몸만 빠져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집에서 값나갈 만한 재물들을 훔쳐서 나오곤 했지요. 모르기는 몰라도 빌레몬의 집을 도망쳐온 그 오네시모라는 종도 주인의 재물을 한 손에 움켜쥐고 나왔을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역사는 참으로 놀랍습니다. 오네시모가 로마 제국 전역을 돌아다니다가 하나님의 사람 사도 바울을 만났어요. 그리고 그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할렐루야. 

오네시모가 사도 바울을 만나 복음을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자, 자꾸 과거의 일이 생각이 나요. 계속해서 과거의 잘못이 자신의 마음을 힘들게 해요. 그래서 하루는 사도 바울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 앞에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합니다. ‘제가 원래는 종이었거든요. 제가 주인집에서 나올 때 재물도 훔쳐왔어요. 그런데 지금 예수님을 믿고 보니 그때의 일이 너무도 회개가 됩니다.’ 오네시모가 사도 바울에게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고백합니다. 사도 바울이 오네시모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어~~’ ‘어~~’하는 거예요. 오네시모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사도 바울에게는 더 분명해져요. ‘오네시모 네가 브루기아에 있는 바로 그 빌레몬의 종이었다는 거야!!’ 사도바울은 오네시모가 섬겼던 주인이 사도 바울을 영적인 스승으로 모시는 바로 그 빌레몬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제 모든 일의 자초지종을 다 알게 되었습니다. 빌레몬의 종 오네시모가 주인의 돈을 훔쳐서 도망쳤어요. 그 장면만 놓고 보면 당시 로마의 법에 의하면 사도 바울 자신은 오네시모를 그의 원래 주인 빌레몬에게 넘겨서 죄의 댓가를 받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미 오네시모가 사도 바울을 통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잖아요. 자신이 전도해서 예수님을 믿게 된 오네시모를 어떻게 죄의 대가를 받으라고 무정하게 주인에게 보낼 수가 있어요? 사도 바울에게는 참으로 어려운 상황이지요. 바로 이때 사도 바울은 오네시모의 주인 빌레몬에게 편지를 씁니다. 비록 오네시모가 그의 주인 빌레몬에게 큰 잘못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받아주라는 권면의 편지죠.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인 빌레몬서입니다. 


권위와 명령이 아닌 사랑의 간구 

자, 바울이 어떻게 빌레몬에게 편지를 쓰는지, 8절 말씀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아주 담대하게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도 있으나” 

사도 바울은 빌레몬에게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너에게 마땅한 일로 명령할 수도 있지만’ 사도 바울과 빌레몬의 관계를 보면 얼마든지 권위를 가지고 명령을 내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빌레몬에게는 영적인 스승이기 때문에 바울이 가진 영적인 권위를 가지고 얼마든지 빌레몬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어요.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면서 명령을 내기지 않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도리어 사랑으로써 간구하노라” 

계속해서 보십시오. “도리어 사랑으로써 간구하노라” “나아기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사도 바울은 이제 나이가 많은 노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지금까지 복음을 위해 달려왔고, 복음을 위해 헌신했다는 사실을 바울 자신도 알고, 지금 이 편지를 받아볼 빌레몬도 알고 있어요. 그렇게 한 평생 최선을 다해 주님을 섬겼던 사도 바울이 지금도 – 백발이 무성해진 지금도 복음을 위해서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바울의 헌신과 노력 가운데 (10절을 보세요)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너 빌레몬에게 간구하노라. 

사도 바울은 빌레몬에게 자신의 권위를 내세울 수 있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사도라는 권위, 빌레몬에게 영적 스승이라는 권위, 그와 같은 권위를 내세워 명령할 수 있지만 사도 바울은 사랑으로 간구합니다. 자신이 감옥에 갇혀있는 상태를 언급하면 간청합니다. 자신이 이제는 나이가 많아져 기력이 세하고 있으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감옥에 갇혀있는 현실을 이야기하면서 사랑으로 간청하는 거지요. 누구를 위해서요? 빌레몬에게 큰 해를 끼쳤던 오네시모를 위해 간청합니다. 

여러분, 오늘 함께 예배하는 우리 모두가 권위를 가지고 명령을 내리는 자세를 벗어버리고 사랑으로 간구하는 사도 바울의 자세를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원칙에 대해서는 너무도 잘 알고 있어요. 교회의 직분은 계급이 아니라고, 교회에서는 신앙생활을 오랜 한 사람들 믿음이 좋은 분들이 그렇지 못한 분들을 섬겨야 한다고, 예수님께서도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말씀하셨다고 우리는 원칙에 대해서 너무도 잘 알아요.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삶은 우리의 지식과 정반대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죠. 

여러분에게 참으로 겸혼하고 낮아진 마음이 있는지, 여러분에게 참으로 다른 사람을 섬기는 손길이 있는지를 알아볼 수 있는 매우 확실한 기준이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빌레몬에게 편지를 쓰는 것처럼 권위를 가지고 명령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간구하는 언어가 여러분에게 있는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참으로, 여러분의 삶에 어느 한 사람을 향해 사랑으로 간구해보신 적이 있으세요? 최근 여러분의 입술에는 같은 교회에서 함께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참으로 애타는 심정을 가지고 한번 생각해보라고, 이렇게 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젊은 시절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많은 박해를 받고도 지금 또다시 복음을 위해 감옥에 갇힌 내가 참으로 부탁한다고, 사랑으로 간구하는 말이 여러분의 입술이 있다면 여러분은 이 교회를 낮은 마음으로 섬기는 분들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봐도 나의 권위와 지식과 지위를 가지고 누군가를 향해 명령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설득하고 권면하고 간구하는 말이 없다면 여러분은 이 교회를 낮은 마음으로 섬기시는 겸손한 일꾼은 아직 아닙니다. 


오네시모의 변화 

사도 바울은 오네시모를 위해서 빌레몬에게 간절한 마음으로 간구합니다. 그러면서 오네시모가 그 동안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이야기합니다. 오늘 본문 11절과 12절의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네게 그를 돌려 보내노니 그는 내 심복이라” 

여러분, 오네시모라는 이름의 뜻은 ‘유용한 자’, ‘쓸모가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런 오네시모에 대해서 사도 바울도 인정하는 바가 한 가지 있어요. 11절 말씀을 다시 보시면, “[오네시모]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그것은 사도 바울도 인정하는 바예요. 오네시모가 그의 주인 빌레몬에게 무익한 종이었지요. 아니, 정확히 말하면 오네시모는 그 주인 빌레몬에게 그저 무익한 정도가 아니라, 주인의 재산을 훔쳐 달아났으니 오히려 손해를 끼치는 종이었지요. 이름은 유익한 자, 쓸모가 있는 자라는 뜻인데 그의 행동은 오히려 주인에게 무익했고 해를 끼쳤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복음의 놀라운 능력은 무엇인지 아세요? 복음의 능력은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데 있습니다. 11절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그 다음에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오네시모는 그의 이름의 뜻과는 전혀 상반되게 주변 사람들에게 무익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사도 바울을 만났고, 그러자 사도 바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러자 주변 사람에게 해를 끼치던 사람에게 드디어 주변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었고. 12절 뒷부분을 보시면, 이제는 오네시모가 사도 바울의 무엇이 되었습니까? “심복”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심장과도 같은 사람이 되었어요. 드디어 참된 의미의 오네시모, 곧 유용한 사람, 필요한 사람, 쓸모가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입술에는 권위를 내세우고 권세를 내세워서 누군가에게 명령을 내리는 언어가 아니라, 그저 사랑으로 간구하고 애타는 마음으로 간절히 부탁하는 언어가 있었어요. 그러한 언어로 사도 바울이 오네시모를 대하자 과거에는 그의 주인과 주변 사람들에게 무익하고, 해를 끼치던 오네시모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주변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치는 사람이 되었던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네시모가 사도 바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던 것처럼, 여러분의 사랑이 담긴 간구, 사랑이 넘치는 권면을 통해 여러분 주변의 다른 누군가가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를 바랍니다. 그 옛날 오네시모가 사도 바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의 삶이 변화되었던 것처럼, 여러분 주변의 누군가가 여러분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의 삶이 변화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사도 바울을 처음 만났을 때의 오네시모를 여러분은 생각해보신 적이 있으세요? 주인에게서 도망쳐나왔어요. 처음에는 자신의 주인 빌레몬의 집에서 훔쳐서 나온 재물이 있었기에 이렇게 저렇게 먹고살 수 있었겠지요.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자신의 수중에 있던 재물도 사라지고 더 이상 그 어디에서도 자신을 받아줄 곳도 없어요. 정처 없이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며 하루하루 생명을 연장하고 있었을 겁니다. 그런 사람이 한 평생 복음을 위해 충성하였던 사도 바울을 만났어요. 사도 바울은 로마제국 전역에 오네시모의 주인이었던 빌레몬과 같은 영적인 제자들이 가득했던 사람이에요. 그런 사도 바울이 주인에게서 도망쳐 나온 오네시모를 만난 거예요. 사도 바울의 입장에서 굳이 오네시모를 환대하고 그를 따뜻하게 대해줄 어떠한 인간적인 이유도 없었어요.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오네시모를 맞이했고, 결국 그의 심령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심었습니다. 그러자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오네시모는 사도 바울의 심복과 같은 사람이 된 거예요.

사도 바울이 오네시모를 만났을 때, 권위를 가지고 권세를 내세우며 명령을 하였을까요? ‘아무리 봐더 네가 지금까지 인생을 잘못 살아왔으니 지금 당장 회개해라. 지금 당장 자세를 바꿔야 한다.’ 이렇게 명령조로 이야기했을까요? 아니면, 사랑으로 간구하듯 이야기했을까요? ‘지금까지 얼마나 힘겨운 삶을 살아왔니? 어디 갈 곳이 없으면 이제 내 곁에 머물러라? 그리고 너에게 꼭 전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들어보지 않겠느냐?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식인데,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참 좋겠다.’ 이렇게 사랑으로 간구하지 않았겠어요? 그러자 오네시모의 마음이 열리고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어요. 어디 그뿐인가요? 이제는 주변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치는 사람이 되었고, 사도 바울에게는 심복과 같은 – 심장과도 같은 –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전히 죄성을 가진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바라볼 때 자꾸 인간적인 눈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저 사람이 과연 우리 교회에 나와서 적응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저 사람이 우리 교회에 나오면 내가 불편해지지 않을까? 저 사람이 교회에 나온들 예수님을 믿고 변화될 수 있을까? 여러분, 이러한 생각이 들 때마다 오네시모를 따뜻하게 맞아주고 그에게 복음의 씨앗을 심었던 사도 바울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의 노력이 있었기에 그를 통해 오네시모라는 귀한 일꾼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겁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가 참으로 복음을 증거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하고, 참으로 복음의 능력으로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가 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면서 다른 사람에 대한 선입관부터 무너트려야 합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바라볼 때, 참으로 피하고 싶고, 별로 만나고 싶지 않고, 다른 사람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사람을 바로 지금 하나님께서 붙잡고 계시고 그 사람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오늘 여러분 한 사람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바로 그 한 사람을 향해 사랑으로 간구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들 

사도 바울은 드디어 그의 영적인 제자 빌레몬이 니고데모를 어떻게 처리하기를 원하는지 자신의 바람을 이야기합니다. 오늘 본문 13절과 14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그를 내게 머물러 있게 하여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것도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 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함이라” 

사도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자유인으로 해방해줄 것을 말씀합니다. 13절을 다시 보시면, “그를 내게 머물러 있게 하여” 종으로서 다시금 빌레몬의 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으로 있게 하지 말고, 자유인이 되어서 사도 바울 곁에 있도록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빌레몬에게 요구하는 것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13절을 다시 보시면, “그를 내게 머물러 있게 하여” 그다음에 무엇입니까?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복음을 전하는 바울 곁에서 바울을 도와 복음을 증거 하는 동역자로 삼게 해 달라는 요청입니다. 

그런데,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자유인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물론이요, 그를 복음의 일꾼으로 쓰임받도록 해 달라는 요청을 하는 13절에서 주목해야 할 구절이 있습니다. 곧, 13절에 사도 바울이 다시 한번 자신의 감옥에 갇혔다는 사실을 언급한다는 점입니다. 13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를 내게 머물러 있게 하여” 그 다음에 무엇입니까?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사도 바울이 지금 자신이 감옥에 갇혔다는 사실을 언급하는 이유는 단순히 생각하면 나이가 많은 상태에서 감옥에 갇힌 사도 바울에게 곁에서 수종을 들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니 오네시모가 바울 자신을 섬길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말하기 위함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생각하면 사도 바울이 지금 이 시점 – 오네시모를 복음의 일꾼으로 쓰임받게 해 달라고 요청하는 바로 이 시점 – 에 자신이 감옥에 갇혔다는 점을 언급하는 보다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은 물론이요, 사도 바울을 통해 예수님을 믿어 그의 삶이 변화된 오네시모는 물론이요, 지금 사도 바울의 편지를 읽고 있는 빌레몬 너를 포함하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위해 매인 사람들,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위해 묶여 있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은 한 평생 복음을 위해 수고하였지만, 그의 나이가 많은 지금까지도 그는 복음을 위해 감옥에 갇히는 등 수고를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오네시모는 그의 신분이 종이었지만, 그래서 인간 주인을 섬기는 사람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자 그는 더 이상 인간을 섬기는 종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일하는 그리스도의 종이 된 것입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빌레몬은 사회적인 신분으로 보면 자유인이고 빌레몬이라는 악한 종을 처벌할 수 있는 주인의 입장에 있지만, 그러한 빌레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더 이상 그는 자신의 삶을 자신의 뜻대로 살아가는 자유인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모든 재물, 자신이 가진 모든 사회적인 위치, 자신이 가진 모든 힘과 능력을 총동원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사용해야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기를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14절의 말씀을 보시면 이 점이 더욱 분명합니다.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것도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 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라” 

사도 바울은 빌레몬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그를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세워주기를 부탁하고 있어요. 그것은 단지 오네시모만을 위한 부탁이 아닙니다. 자신이 지금 편지를 쓰고 있는 빌레몬 자신도 자원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권위와 자신의 재산과 자신의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바치는 그리스도의 종이 되기를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노(老)스승의 간곡한 부탁 

사도 바울은 그의 한 평생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매인 자가 되었고, 묶인 자가 되었고, 실제고 감옥에 갇힌 자가 되었습니다. 이제 시간이 많이 흘러 사도 바울도 나이가 많아졌지요 어쩌면 그의 머리에 백발이 성성하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여전히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으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로 인식하면서 주변에 있는 그의 제자들에게 간곡히 부탁합니다. 너희도 나와 같이 그리스도의 종이 되자, 너희의 사회적 신분이 어떠하든 상관없이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헌신하는 그리스도의 종이 되자. 사도 바울은 권위와 권세를 가지고 명령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간구합니다. 그리고 노 스승인 사도 바울의 간곡한 부탁으로 말미암아 오네시모는 물론이고, 빌레몬은 물론이고, 그의 주변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의 귀한 사역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이 듭니다. 과연 어떻게 사도 바울은 권위와 권세로 명령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간구로 주변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종이로 바꾸어갈 수 있었을까요? 사도 바울은 젊은 시절 공격적인 사람이었고, 그의 언어는 권세를 부리며 명령을 내리는 사람이었잖아요.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박해했던 사람이고, 때로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죽이기까지 했던 사람이었죠. 그런데 어떻게 그의 언어가 바뀔 수 있었을까요? 

가만히 생각해보면, 사도 바울에게 먼저 사랑의 간구로 다가왔던 분이 계십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죠.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고 있을 때, 예수님게서 바울을 찾아오셨어요. 그리고 훈계하거나 심판을 선언하시거나 명령을 내리신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권면하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핍박하느냐?’ ‘사울아 사울아 네가 가시채를 열심히 발로 차고 있지만, 그러면 너의 발만 아프지 않으냐?’ 바울을 만나 그에게 사랑으로 간구하고 사랑으로 권면하신 분이 계셨어요. 그분의 사랑을 조금씩 깨달아가면서 사도 바울은 그의 입술에 판단과 권위와 명령의 언어가 사라지고 사랑으로 간구하고 애타는 마음으로 권면하는 언어가 가득하게 되었던 거지요. 

여러분, 우리가 지금 하나님께 나아와 예배하는 것도 마찬가지가 아닌가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을 내려서, 하나님의 위엄을 가지고 강요하여서 예배 자리에 나와 계신분은 안 계시잖아요. 우리가 여전히 범죄하고 있을 그때에, 우리가 여전히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살아가고 있는 그때,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찾아오셔서 돌이키라고, 생명의 길로 나아오라고, 하나님과 등진 삶에서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는 길로 나아오라고 사랑으로 권면하셨기에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를 사랑으로 권면하셨던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묵상하며, 우리의 입술에 권위를 내세우고 명령을 내리는 언어가 사라지고 사랑으로 권면하며 애타는 마음으로 간구하는 언어가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바로 그때 우리를 통해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들도 우리와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헌신하는 그리스도의 일꾼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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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