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2020. 6. 13.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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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진리를 표현하는 방식 가운데 ‘역설’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얼핏 보면 모순된 내용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인생의 진리를 정확하게 표현하는 방법이지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문자적으로 보면 말이 되지 않지요. 지는 것은 지는 것이고 이기는 것은 이기는 것인데, 우리는 흔히 ‘참아~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야’라고 이야기하고 듣는 사람도 그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합니다. 이것이 바로 역설입니다. 언듯 보기에는 모순된 내용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인생의 진리를 정확하게 집어내는 표현이지요. 

성경에도 역설을 통해 기독교의 진리를 설명하는 대목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예수님은 참 인간이시면서 참 하나님이십니다.’ 역설이지요. 인간이면 인간이고 하나님이면 하나님이지 어떻게 참 인간이면서 참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까? 언듯 보기에는 말이 되지 않지만 이것은 기독교의 너무도 중요한 진리입니다. 만일 누군가 예수님께서 참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참 인간이라는 이 가르침은 모순처럼 보이니 나는 그 가운데 하나만 받아들이겠다고 하면, 그는 결코 참된 구원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십니다. 동시에 예수님은 참 인간이십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을 모두 받아들여야 비로소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만 더 예를 들어 볼까요?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임하였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가르침인데,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가 왔다는 것입니까? 안 왔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왔으면 온 거고, 아직 안 왔으면 안 온 것이지 ‘이미 임하였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언듯 보기에는 모순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고 체험하며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했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 땅에는 죄악이 가득하고 어둠의 세력이 힘을 쓰고 있으니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역설입니다. 아직 믿음의 세계에 들어오지 않은 분들에게는 그저 유치한 말장난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체험한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진리의 말씀이지요. 그래서 이러한 진리를 우리는 역설이라고 부릅니다. 


동일한, 그러나 새로운

오늘 본문에도 역설이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 7절을 보십시오.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쓴다’라고 되어 있는 것은 사도 요한이 초대교회 성도들을 대상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 곧 요한복음을 비롯하여 요한일이삼서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조금 더 넓게 해석한다면 신약성경 전체, 혹은 신구약성경 전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자, 그러면 오늘 본문 7절을 다시 보십시오.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가 이미 오래전부터 들어왔던 말씀이거니와” 무슨 말씀입니까? 요한일이삼서를 비롯하여 신약성경이 가르치는 모든 내용은 누군가 새롭게 고안한 말씀이 아니고 성도들이 예전부터 들었던 내용, 성도들이 예전부터 들어서 알고 있는 내용, 그래서 그것은 새 계명이라고 보다는 옛 계명이라고 할 수 있는 익히 잘 알려진 내용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도 마찬가지이지만,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를 기록하고 있을 그 때에도 많은 이단의 가르침이 교회를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한결같이, 무엇인가 새로운 내용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의 계명 – 곧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교훈은 – 언제나 옛 계명입니다. 과거에도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선포되었고 오늘 우리 시대에도 동일하게 선포되며, 이후 제 아무리 시간이 흘러 세상이 변해도 예수님의 계명, 곧 예수님의 가르침은 동일하게 선포되고, 동일하게 가르쳐야 하는 변하지 않는 말씀입니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의 가르침, 성경의 교훈은 언제나 옛 계명입니다. 

특별히 이단의 공격이 갈수록 대범해지는 우리 시대에, 여러분 모두에게 분명하게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교회를 출석하면서 배웠던 복음의 내용 이외에 무엇인가 특별한 계시, 무엇인가 특별한 복음의 내용, 무엇인가 특별한 하늘의 비밀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누군가 여러분에게 찾아와서 ‘집사님, 권사님, 제가 신앙생활을 수십 년 했지만 지금까지 이런 성경공부는 없었어요’ 이런 이야기를 들으신다면 여러분 마음속에 ‘아~ 뭔가 이상한 것을 가르치나 보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우리가 선포하고, 우리가 듣고, 우리가 믿는 복음의 내용 – 곧 예수님의 계명은 – “옛 계명”입니다. 그러므로 이른바 특별한 계시를 받았다는 사람들, 이른바 기도 가운데 특별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조금도 현혹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 8절로 내려가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8절을 보십시오.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여기서는 또 새 계명이라고 말씀하네요. 그러면 7절에 등장하는 옛 계명과 8절에 등장하는 새 계명은 다른 계명을 말씀하는 것일까요? 결코 아닙니다. 7절에 등장하는 옛 계명과 전혀 다른 내용의 새로운 계명을 다시 쓴다는 의미가 아니라, 7절에 이야기했던 바로 그 옛 계명이 동시에 새 계명도 된다는 것입니다. 8절을 계속해서 보십시오.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그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그 다음을 주목하십시오. “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침이니라” 이것이 새 계명의 특징입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을 비롯하여 요한일이삼서에서 기록하고 있는 말씀은 이미 성도들이 들어서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 ‘내용’에 있어서는 전혀 새로울 것이 없어요. 그러나 그 옛 계명은 그저 과거의 유물로 지금 우리 시대에는 아무런 의미도, 감동도, 영향력도 미치지 못하는 단지 옛 계명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새 계명이 되어서 우리의 삶에 어둠이 지나가게 하시고 하나님의 밝은 진리의 빛을 비추는 능력의 말씀이요 능력의 계명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이 다시금 활력을 얻고, 다시금 새로운 은혜로 가득하기를 원하신다면 어떤 새로운 내용,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했던 새로운 말씀을 찾으시면 안됩니다. 그런 것은 없어요.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기독교의 진리는 옛 계명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우리의 신앙생활이 다시금 새 힘을 얻고, 활력을 얻고, 새로운 은혜로 가득하게 될까요? 이미 알고 있는 옛 계명, 이미 알고 있으며 믿고 있는 그 복음의 내용이 우리의 마음에 새롭게 움직일 때 우리는 비로소 신앙생활의 새로운 활력을 찾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말씀생활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은 지난 2000년의 기독교 역사에서 변함없이 기독교의 경전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런 점에서 성경 말씀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지요. 그런 점에서 성경은 옛 언약입니다. 그런데 똑같은 말씀이 어느 순간 나의 마음에 큰 감동을 일으키고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으로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그 순간만큼은 수 천년 동안 동일한 내용으로 전해오던 옛 언약의 말씀이 동시에 나의 심령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새 언약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말씀 생활이 깊어지고, 나의 말씀 생활에 늘 활력이 넘치기를 원한다면 성경 이외에 다른 자료를 찾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저 여러분의 손때가 뭍은 성경을 다시 읽고, 다시 묵상하고, 다시 생각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은혜를 주시고, 성경 말씀은 지금도 살아 역사하는 새 언약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여름 행사가 모두 은혜 가운데 마치고, 새로운 계절이 시작되는 9월을 맞이합니다. 여러분, 다시 한번 말씀생활, 기도생활, 예배 생활에 힘을 내십시오. 지금까지 우리가 해왔던 신앙생활과 다른 어떤 것을 찾지 마시고, 그저 교회에서 드려지는 주일예배, 새벽기도회, 수요예배, 금요기도회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하십시오. 여러분의 일상 속에서 말씀 생활과 기도생활이 더욱 힘을 내십시오. 그리하여 여러분의 신앙생활은 그 내용에 있어서는 언제나 동일하지만, 매일 시간이 지날수록, 매월 시간이 흐를수록, 매년 신앙생활의 연수가 더해질수록 여러분의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지기를 주님의 이름을 축복합니다. 


옛 계명과 새 계명 – 사랑의 계명

오늘 본문에는 옛 계명, 그리고 새 계명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다른 두개가 아니라 하나입니다. 곧, 변함없는 옛 계명이 지금도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만드는 새 계명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이 조금이라도 익숙하신 분들은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옛 계명, 그리고 새 계명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 무엇인지 떠오르실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서로 사랑하라’입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붙잡히시는 바로 그날 밤,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요 13:34-35)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새 계명을 가르치시는 이 말씀을 잘 관찰해보면, 이 말씀에는 평서문과 명령문이 함께 등장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먼저 평서문은 무엇입니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네,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여 주셨다는 선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 3:16)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요 13:1)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요 10:15)

이 모든 말씀은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구절들입니다. 이러한 성경 구절들은 예수님께서 다 헤아릴 수 없는 그 큰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여 주셨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지요.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여 주셨습니다. 그 크신 사랑으로 죄인 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고 내어 놓으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이 믿는 복음의 핵심 메시지죠. 예수님의 계명, 옛 계명이면서 동시에 새 계명이기도 한 예수님의 계명 안에는 예수님께서 먼저 죄인이었던 우리를 그 크신 사랑으로 사랑하여 구원하여 주셨다는 복음의 핵심 내용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에는 평서형 문장이 등장합니다. 말씀 드린 것처럼,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에는 명령형 문장도 등장합니다.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여 주신 것 같이,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여 주셨으니, 예수님의 그 크신 사랑을 깨달았다면 마땅히, 우리도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옛 언약이요, 동시에 새 언약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9절을 보면 교회 안에 입술로는 믿음을 말하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사랑을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9절 말씀을 보십시오. “빛 가운데 있다”고 입으로 말은 하지만 실상 자신의 삶에서는 “형제를 미워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들에 대해 평가하기를 믿음은 있는데 그에 따르는 행함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평가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믿음이 있다고, 하나님의 복음의 빛을 깨달아 알고 있다고 말만 하는 사람들. 말로는 하나님의 빛 가운데 살아간다고 이야기하지만 그러한 믿음의 고백이 자신의 삶을 조금도 변화시키지 못하여 여전히 그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들에 대한 성경의 평가는 무엇입니까? 9절의 마지막을 주목하여 보십시오.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성도 여러분, 혹 여러분의 마음에 믿음의 형제를, 믿음의 자매를 미워하는 마음이 가슴에 가득하신 분이 계십니까? 오늘 9절의 말씀에 여러분의 영적인 상태를 반드시 비추어 보셔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빛 가운데 있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라도 여전히 여러분의 마음에 미움이 있다면 하나님은 여러분의 영적인 상태를 “여전히 어둠 가운데 있는 사람”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의 빛 안에 거한다고 말을 하면서도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아울러,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그 크신 사랑으로 사랑하신다는 복음의 내용을 듣고, 믿을 뿐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그 믿음으로 자신의 삶을 변화시켜 내 곁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사랑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묘사되어 있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계명대로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10절에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참으로 빛 가운데 거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10절의 마지막 구절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느니라” 

여기에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느니라”는 말씀이 등장하죠. 이 문장에서 거리낌이라는 것이 ‘스칸달론’이라는 헬라어 단어인데요, 이 단어의 번역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 복음서에 등장하는 ‘실족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10절의 의미는 예수님의 계명대로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그 크신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을 실천하기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교회에서 함께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을 실족하게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당연하지요. 모든 사람을 사랑으로 대하고 모든 것을 사랑으로 용납하니, 누가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실족하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거리낌이 없다’는 의미는 다른 사람을 넘어지게 하지 않는다는 것과 함께 자신의 믿음도 크게 흔들리거나 넘어지지 않는다는 뜻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걸리는 돌이 되지 않을뿐더러 그 자신의 믿음이 굳건한 반석 위에 놓여서 제 아무리 크고 위협적인 비바람과 풍랑이 몰려와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튼튼합니다. 견고합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으로 형제와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누리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서로 사랑하십시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서로 사랑하십시오. 내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면 내 곁에 있는 사람이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면 우리 교회가 따뜻한 교회가 되고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사랑와 은혜를 풍성하게 누리는 교회가 됩니다. 뿐만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면 우리 자신의 믿음이 든든한 반석 위에 놓이는 것이요, 우리의 믿음을 무너트리려는 수많은 공격이 몰려올 지라도 우리는 믿음의 반석 위에 든든히 설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바로 여기에도 또 하나의 역설이 있네요. 

여러분과 함께 신앙생활하는 형제와 이웃을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이웃을 사랑하는 바로 것이 여러분 자신을 사랑하는 최고의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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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