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2020. 6. 14. 07:50
반응형

1628년 영국의 작은 마을에서 땜장이의 맏아들로 태어난 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초등학교에서 그저 글을 읽고 쓸 정도의 교육만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나마도 초등학교를 다 졸업하지 못한 채, 가난한 가정에 도움이 되기 위해 아버지를 따라 항아리와 주전자를 수선하는 땜장이의 일을 배우게 됩니다. 그러나 정규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던 그는 고서를 파는 서점에서 헌책을 수없이 읽으며 자신의 상상력을 키워갑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그는 가난하지만 매우 경건한 여자와 결혼을 하고 되었고, 조금씩 복음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합니다. 그는 복음을 받아들이자 그 복음을 전하려는 열정에 사로잡혔고, 평신도이지만 설교자로서의 사역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당시 영국은 국교회나 국가로부터 허가를 받지 않은 설교는 모두가 불법이었습니다. 정규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던 이 사람의 설교가 국교회나 국가로부터 허가를 받지 못했던 것은 당연했고, 그는 12년 동안이나 옥살이를 했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복음의 열정이 불타오릅니다. 그의 머리에는 넘치는 상상력이 튀어나옵니다. 그러나 그의 몸은 지금 감옥에 갇혀있습니다. 감옥 안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었을까요? 그는 감옥 안에서 조차, 복음에 대한 열정과 넘치는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길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펜을 들어 글을 쓰기 시작합니다. 자신이 지나온 삶의 길을 돌아보며 그는 장장 5년에 걸쳐 위대한 기독교 고전을 집필하게 됩니다. 바로 그 책이 전 세계적으로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혔다고 알려져 있는 『천로 역정』입니다. 그 책의 원제목은 Pilgrim’s Progress, ‘순례자의 여정’ 정도가 될 것입니다. 

『천로 역정』을 통해 존 번연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우리 크리스천은 이 세상에서 주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그네로 순례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존 번연은 감옥에 있으면서 얼마나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겠습니까? 그러나 번연은 깊이 기도하는 가운데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돌아갈 본향은 자신의 집이 아니라, 저 천국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오늘 설교의 본문은 요한계시록입니다. 요한계시록에는 수많은 환상들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수많은 환상들은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요한계시록의 환상들은 개개의 사건이 따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를 전개하는데 그 이야기의 중심에는 저 하늘나라를 바라보며 지금도 땅에 발을 디디며 살아가는 크리스천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그 내용을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요한계시록은 6장부터 16장까지 이 세상을 살아가는 크리스천들이 어떠한 환난과 재앙을 받는지를 묘사합니다. 처음에는 7개의 인이 하나씩 떼어질 때마다 재앙이 내려옵니다. 그런데 일곱 인의 재앙으로 마쳐지지가 않아요. 그 다음에는 일곱 나팔들의 재앙이 찾아옵니다. 천사들이 나팔을 하나씩 불 때마다 재앙임 내려옵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나지도 않아요. 이제 일곱 대접의 재앙이 등장합니다. 대접이 하나씩 쏟아질 때마다 재앙이 임하는 거지요. 여기에서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은 비유입니다. 그리고 이 비유가 알려주는 바는 세상을 살아가는 크리스천의 모습 속에는 고난의 연속, 환난의 연속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사실이지요. 그런데 요한계시록은 우리 크리스천의 삶이 이 세상에서 고난만 받고 마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요한계시록 17장과 18절은 바벨론으로 비유되는 악의 세력이 무너지는 장면이 등장해요. 그리고 19장에 어린양의 혼인잔치가 등장하고, 20장부터 마지막 22장까지 천년 왕국,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의 수많은 환상들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중요한 메시지, 바로 그것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크리스천의 모습은 세상 속에서 고난과 환란을 당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저 하늘 나라를 향해 걸어가는 순례자 혹은 나그네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크리스천의 삶은 이 세상에서 순례자의 길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왜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세상에서 고난을 받을까요? 당연하지요.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거든요. 우리는 순례자이고, 우리는 나그네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자리가 우리의 본토도 아니고, 우리의 돌아갈 고향도 아닙니다. 그러니 괴롭고, 그러니 어려움이 많지요. 집 나가면 고생이잖아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불행하지 않습니다. 절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 걷는 이 길은 하늘의 저 천국을 향한 발걸음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요한계시록 14장의 말씀을 함께 묵상하면서, 우리 모두에게 저 천국에 대한 믿음이 더욱 확고해지며, 이 세상에서 순례자의 길을 걷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금 확인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요한계시록 14장 1절부터 6절까지는 순례자의 길을 걷는 크리스천의 특징이 크게 3가지로 등장합니다.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언약 

첫째로, 순례자의 길을 걷는 크리스천에게는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언약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요한계시록 14장 1절에 그 내용이 등장하지요. 우리 다 함께 1절의 말씀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 

1절 말씀을 보면, 시온 산에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 곁에 서 있는 14만 4천 명이 등장합니다. 최근 극성을 부리고 있는 신천지가 다른 이단들에 비해 큰 힘을 발휘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계시록에 등장하는 14만 4천 명에 대한 그들의 해석 때문입니다. 많은 이단들은 구약의 다니엘서와 신약의 요한계시록을 근거로 예수님의 재림 날짜를 계산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오래전 큰 물의를 일으켰던 다미선교회입니다. 그들은 1992년 10월 28일, 예수님 다시 오신다는 주장이지요. 그런데 어때요? 그들이 주장했던 날짜에 주님이 안 오셨거든요. 

이러한 상황을 보면서, 신천지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짜를 못박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신천지에 들어온 선택받은 사람들의 숫자가 14만 4천 명이 차면 그때 예수님이 재림하신다고 가르치는 거지요. 그러므로 예수님의 재림을 하루라도 앞당기기 위해 그들은 열심히 포교를 하는 것이죠. 그런데 성경을 정확하게 보세요. 어린양의 혼인잔치는 19장에 가서야 나오거든요, 천년왕국,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은 20장부터 등장해요. 그러나 14장에서 이미 14만 4천 명이 등장해요. 사실, 14만 4천 명이라는 용어는 요한계시록 7장에 이미 등장해요. 그런 점에서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14만 4천 명은 그 숫자가 채워져야 천년왕국이 도래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상징이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자, 오늘 본문에서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바로 이것입니다. 14만4천명이라는 성도들, 곧 세상에서 순례자의 길을 걷는 크리스천들이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 무엇이 있습니까?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 구원받은 크리스천들에게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 이마에 하나님의 이름이 쓰여 있어요. 다시 말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치신 하나님의 아들과 하나님의 딸이라는 분명한 언약과 약속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이 위치해 있는 자리에 주목해 보십시오. 이미 말씀 드린 것처럼 요한계시록은 6장부터 16장까지 계속되는 재앙의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일곱 인의 재앙이 있어요, 그 다음에 일곱 나팔 재앙이 따라옵니다. 그리고 일곱 대접의 재앙이 이어져요. 그런데 오늘 본문 14장은 지속적으로 재앙이 이어지는 그 한 중앙에 위치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 세상을 살아가는 크리스천의 삶이 꼭 이와 같아서 환난과 고난이 멈추는 날이 없어요. 그런데 여러분,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 아세요? 우리가 비록 세상에서 고난을 받고 환난을 당하는 그 순간에라도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과 하나님의 딸이라고 인치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천국의 백성이 되었다는 그 사실만큼은 그 어느 순간에도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 다음에 어떠한 말씀이 이어집니까?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8-19) 여러분, 우리는 천국에 시민권을 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속하지 않고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천국을 향해 순례자의 길을 걷는 우리들은 세상에서 고난을 받는 것이 당연해요. 세상에서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요. 

여러분, 지금 세상 속에서 괴로움과 어려움을 당하십니까?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려는 데, 어려움과 괴로움이 따르세요? 바로 그때 확신하십시오. 순례자의 길을 걷는 우리 모두에게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언약, 약속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약속, 마지막 날 우리를 저 천국으로 인도하신다는 분명한 약속에 대한 믿음이 우리 가운데 더욱 든든해지기를 바랍니다. 


분명한 찬양의 이유 

순례자의 길을 걷는 크리스천의 특징, 그 첫 번째는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언약이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순례자의 길을 걷는 크리스천에게는 “분명한 찬양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 내용이 오늘 본문 2절과 3절에 등장합니다. 우리 함께 2절과 3절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 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데 내가 들은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이 그 거문고를 타는 것 같더라 그들이 보좌 앞에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오늘 본문에서 사도 요한은 아름다운 찬양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2절을 다시 보십시오. “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그 소리가 어떤 소리입니까? “많은 물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데 내가 들은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이 그 거문고를 타는 것 같더라” 이 모든 말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바로 천상의 소리지요. 그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운 천상의 소리를 듣습니다. 3절을 보시면, 사도 요한이 들었던 이 소리는 “그들이”, 곧 십사만사천명으로 표현되는 크리스천들이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른 찬양이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다음입니다.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이 세상이 마치 영원토록 머무를 수 있는 고향 땅인 것처럼 착각하는 넌크리스천들은 이 노래를 따라 부를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결코 따라 부르지 못합니다. 그러나 순례자의 길을 걷는 크리스천들은 그 누구든 이 천상의 찬양을 함께 부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에게는 하나님을 찬양할 분명한 이유가 있잖아요. “속량함을 받은”,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의 성도들은 하나님을 온전히 찬양합니다. 왜냐하면 나를 속량하신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경험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 나를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인도하시리라는 분명한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에 조니라는 이름의 어린 여자 수영 선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남부러울 것이 없는 어린 시절을 보내며 수영 선수로서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가슴에 품은 소녀로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세상의 가치관을 모두 내려놓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의 모든 삶을 드리겠다는 결심도 합니다. 특별히 자신이 수영선수이니 자신의 달란트를 이용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는 결심을 하지요. 

그러던 어느 날 조니는 다이빙을 하다 그만 목이 부러지는 큰 사고를 당하게 됩니다. 그는 응급수술을 받았지만 결국 팔과 다리를 사용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수영선수로서 꿈을 키워가던 조니라는 어린 소녀가 팔과 다리를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은 얼마나 큰 비극입니까? 더 이상 수영 선수로서의 삶이 끝난 것이죠. 조니는 비록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겠다고 헌신하였지만, 자신이 불구가 되었다는 현실을 받아들이며 장애인으로서의 생활에 익숙해지는 데에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조니의 가장 큰 장점은 자신의 모든 고난을 믿음으로 이겨내었다는 점입니다. 그는 수영을 포기하고 자신의 입에 붓을 들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조니는 자신이 그린 그림마다 조니(Joni)라는 자신의 이름과 함께 PTL이라는 영어 대문자를 반드시 적어 놓았다고 합니다. 

조니가 자신의 그림에 적어 놓았던 PTL은 “Praise The Lord”(주님을 찬양하라)는 문장의 영문 이니셜이었습니다. 조니는 어떻게 자신에게 찾아온 그 불행 속에서도 새로운 희망을 찾으며 PTL, 주님을 찬양하라고 고백할 수 있었을까요? 

조니는 견디기 어려운 고난 속에서 자신의 인생이 순례자의 길이라는 사실을 기억했던 것이죠. 자신의 모든 달란트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드렸잖아요. 자신은 천국을 향해 여행을 떠나는 나그네에 불과하잖아요.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의 좌절도 딛고 일어설 수가 있었던 거죠. 그러면서 조니에게는 흔들리지 않는 분명한 찬양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해 주셨다는 사실, 나아가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해 – 비록 수영이 아니라 입으로 그린 그림이라 할지라도 – 자신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며, 마지막 날 천국으로 들어가는 그 순간까지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리라는 분명한 믿음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여러분의 생활은 어떠십니까? 순례자의 길을 걷는 우리는 비록 조니와 같은 고난을 당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분명한 이유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이미 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성탄절을 준비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이 땅에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는 다시 이 땅에 오실 것입니다. 바로 그 날에 우리는 우리의 주님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새 하늘과 새 땅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 소망이 있는 우리가 다시 오실 주님을 기대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너무도 마땅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독특한 삶의 방식 

순례자의 길을 걷는 크리스천의 특징, 그 첫 번째는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언약이 있다는 것입니다. 순례자의 길을 걷는 크리스천의 특징, 그 두 번째는 분명한 찬양의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로, 순례자의 길을 걷는 크리스천에게는 “독특한 삶의 방식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4절과 5절에 그 내용이 등장합니다.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이 사람들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4절에 등장하는 ‘여자’는 당시의 로마 제국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라는 의미는 로마 제국이 강요하는 삶의 방식, 곧 우상과 쾌락을 가장 높은 가치로 여기며 살아가는 세상의 방식을 거부한다는 의미입니다. 세상의 가치를 거부해요, 세상의 가치관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 대신 4절 중반부를 보시면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입니다. 순례자의 길을 걷는 크리스천들은 세상의 가치관을 거부하고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따라가는 사람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순례자의 길을 걷는 크리스천의 독특한 삶의 방식입니다. 

세상의 방식을 따르지 않고 말씀에 순종하면 지금 당장 손해를 보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에 발을 딛고 살면서도 세상의 가치관을 따르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늘의 본향을 향해 순례자의 길을 걷는 크리스천들이기 때문이지요. 

저희 부부의 결혼기념일은 11월인데 그해 12월 말 저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결혼한지 약 한 달 뒤에 유학을 떠난 것이죠. 이제 막 결혼식을 마치고 유학을 앞두고 있는 저희에게 제 아버지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당시 저희 부모님께서 출석하시는 교회가 교회 건축을 목표로 헌금을 작정하고 있었습니다. 제 아버지 마음에 적지 않은 금액을 헌금하고 싶다는 소망이 일어나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희 어머니에게 그 이야기를 하셨겠지요. 어떤 분들에게는 적은 금액일지 모르지만, 저희 부모님에게는 결코 적지 않은 금액을 건축헌금으로 내어 놓으면 좋겠다고 아버지께서 어머니에게 제안을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제안을 듣고, 어머니께서 딱 짤라 거절하셨답니다. 그 이유는 단순했지요. 이제 아들이 결혼을 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으로 유학을 갈 텐데, 유학하는 동안 한 푼이 아쉬울 것 아니겠냐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생각하신 금액의 헌금을 하기 위해서는 정말 아끼고 절약해야 했습니다. 만일 그렇게 노력해서 헌금을 할 것 같으면 그 돈으로 아들 유학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 어머니의 생각이었습니다. 

어머니의 말씀을 듣고 저희 아버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답니다. “여보, 이제 나는 아들의 유학을 도와줄 수 있는 능력이 없소. 앞으로는 나이가 계속 들기 때문에 나의 능력은 더더욱 없을 것이요. 내가 그 작은 돈을 어렵게 모아서 우리 아들에게 도와주고는 더욱 크게 하나님께서 공급해주시는 손길을 우리가 차단할까 봐 그것이 두렵소. 그보다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해야 할 일, 하나님께서 마땅히 바쳐야 할 것을 드리고, 우리 아들은 하나님의 손에 맡겨 드립시다.” 저희 아버지의 이 말씀이 어머니의 마음을 움직이셨어요. 그리고 이제 막 결혼한 아들 내외를 앉혀놓고는 그 다음날 주일 예배에 참석하면서 헌금을 작정하려 한다고, 아버지 어머니의 이 마음을 이해해 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혹시라도 나중에 소식을 듣고 우리에게 유학 자금은 한 푼도 안 도와주셨으면서, 어떻게 그 큰돈을 건축헌금하실 수 있느냐고 서운해하지 말라는 당부였지요. 그리고 실제로 유학기간 부모님의 경제적인 도움은 전혀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그 말씀을 듣고 저희 부부가 부모님께 서운한 마음이 들었을까요? 우리는 한 푼이라도 아쉬운 데, 어떻게 부모님은 그것을 헌금하실 수가 있느냐고 서운한 마음이 들었을까요? 어쩌면 유학을 떠나는 우리에게는 조금도 도와주지 않으시면서 건축헌금을 할 수 있느냐고 서운해 했을까요? 아니지요. 결코 그렇지 않죠. 그날 저녁, 저의 아내가 저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당신은 참으로 훌륭한 부모님 밑에서 자라셨군요.” 

여러분, 이것이 순례자의 길을 걷는 크리스천의 독특한 삶의 방식이 아닐까요?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든 자신의 것을 챙기려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든 자녀에게 도움이 주려고 합니다. 그러나 저 천국을 향하여 순례자의 길을 걷는 크리스천들은 자신의 것을 챙기기에 앞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더욱 좋아합니다. 내 자녀에게 한 가지라도 더 챙겨주기에 앞서 주님의 일에 헌신하기를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소망은 이 땅이 아니라 저 세상에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저 천성을 향해 순례자의 길을 걷는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세가지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첫째로, 여러분의 인생을 향한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의 계획이 반드시 있다는 사실입니다. 둘째로, 여러분이 어떠한 환경과 상황을 만나든 상관없이 우리의 주님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찬양할 분명한 이유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셋째로, 순례자의 길을 걷는 우리는 세상의 가치관을 과감히 거부하고 우리 주님께서 알려주시는 삶의 방식을 따라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세가지 사실을 기억하며 저 천성을 향하여, 마지막 순간까지 흔들림 없이 순례자의 길을 걷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반응형
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