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은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에게 매우 실제적인, 그리고 매우 중요한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곧,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확신에 찬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가”라는 주제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확신에 찬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가라는 주제가 왜 그토록 우리 성도들에게 중요할까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믿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과 성경이 약속하는 하나님 자녀로서의 권세를 누리며 살아가는 것은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설명을 해볼까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입니다. 세상에 많은 아버지와 아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생물학적으로, 혹은 법적으로 그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아버지와 아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시잖아요. 세상의 모든 아버지와 아들이 늘 친밀하고 서로 마음을 나누고 따뜻한 부자의 정을 나누며 사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과 우리 그리스도인의 관계도 그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기에 우리 모두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딸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언제나 변함없이 하나님과 친밀함을 누리고 그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며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내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요 지금도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누리며 살아간다는 사실을 확신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이 바로 그와 같이 실제적이고 중요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비유를 들어 설명해보겠습니다. 여기에 우물이 하나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땅 깊은 곳까지 파고 들어간 우물은 그 누가 보아도 우물입니다. 그런데 그 지방에 가뭄이 어찌나 극심하였는지 우물이 말라 그곳에서는 더 이상 한 방울의 물도 길어낼 수 없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우물이라는 이름과 모습은 가지고 있지만 한 방울의 물도 나오지 않는 우물이 우리의 영적 상태를 묘사하고 있다면, 그러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얼마나 비참하겠습니까? 우물이 아닌 것은 아닌 것처럼, 예수님을 믿고 죄 용서를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고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단 한 바가지의 물도 길어 올리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생활이 메말라 성경이 묘사하는 그 충만한 하늘의 은총을 조금도 경험하지 못한다면 얼마나 비참하고 힘겨운 신앙생활이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또다시 질문하게 되지요.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해 확신에 찬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은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 모두에게 너무도 실질적이고 너무도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자
자,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확신에 찬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은 그 질문에 명확한 답을 제시해 주는데요. 먼저 오늘 본문 16절입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16절)
본문 16절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명령하시는 바가 무엇입니까? 먼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목숨을 버리신 그 사랑을 알고.’ 네, 나를 향한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먼저 예수님의 이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나를 사랑하셨는지, 죄인인 나를 위하여 어떠한 사랑을 베풀어주셨는지를 깊이 깨닫고 나면, 이제는 무엇이 필요합니까? 본문 16절을 계속 보십시오.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다하기까지 사랑하는 것이 어떠합니까? “마땅하니라”그리하여 본문 18절은 이렇게 권면하네요.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18절)
우리는 예수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그 놀라운 사랑을 기억하여서 나도 형제와 자매들에게, 내가 늘 만나는 이웃들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말과 혀로만 사랑하는 정도로는 안되고, 행함으로 그리고 진실함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지금도 나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에 대하여 확신에 찬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비결이 되는 것입니다.
자, 제가 지금 드린 질문과 대답, 곧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확신에 찬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과 내 곁에 있는 이웃을 서로 사랑하되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해야 합니다라는 대답이 별로 연관성이 없다고 여겨지는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윤리적 측면이고, 하나님의 은총을 확신하는 삶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인데 이들 사이에 어떠한 연관성이 있는지 의아해하시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은 이 두 가지가 매우 깊이 연결되어 있다고 선언하는데요. 계속 이어지는 본문 19절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본문 19절이 어떻게 시작합니까? “이로써” 어떻게요? “이로써”, 곧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기억하여 나도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말과 혀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함으로써, 19절을 계속 보십시오.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확신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우리 마음을 주님 앞에서 굳세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은혜와 축복에 대한 확신으로부터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진리 안에 거하고 있다는 확신, 예수님 안에 거하고 있다는 확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나의 인생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확신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합니까?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마음으로 믿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제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권세를 실제로 누리며 확신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합니까? 말과 혀로만 사랑하는 정도로는 안되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도 인생의 풍파가 찾아옵니다. 계획이 무너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나님의 때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여 그저 눈물로 기도할 때도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어두운 광야길을 걸어가다 보면 예수님을 분명히 믿기는 믿지만 우리 마음에 확신이 사라지고 의심을 생길 때도 분명히 있지요. 과연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 것은 맞나? 과연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이 맞나? 과연 지금 내가 걸아가는 이 길이 하나님께서 예비해놓으신 생명의 길, 기쁨과 행복의 길이 맞나? 물론, 하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을 분명히 믿지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저버린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때로는 의문이 들고 걱정이 찾아는 경우가 있어요.
바로 그때 누가 확신을 가지고 그 마음을 굳세게 붙잡을 수가 있을까요? 과연 누가 지금도 나의 인생을 하나님께서 은혜의 손길로 붙들고 계시다고 확신하며 그 믿음에서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까요? 매일 새벽에 나와 기도하는 사람입니까? 어디를 가든 성경을 손에서 놓지 않는 사람입니까? 다른 사람들보다 예배에 참여하는 획수가 월등히 많은 사람들일까요? 오늘 본문은 그와 같은 대답을 전혀 내어 놓지 않습니다. 그러면 과연 누가 위기의 순간에도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확신에 찬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까? 바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아 그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사랑을 실천하되 말과 혀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제 아무리 강력한 폭풍우가 몰려와도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고 믿음 안에 굳세게 설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나를 사랑하신 예수님의 그 사랑을 생각하며 다른 사람을 행함으로 그리고 진실함으로 사랑하는 것은 내가 사랑을 실천하는 그 사람에게도 유익이 되겠지만, 궁극적으로 누구에게 가장 큰 유익이 될까요?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나 자신에게 가장 큰 영적인 유익이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은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고, 때로는 누군가를 미워해도 그것이 여러분의 사회 생활, 여러분의 가정생활, 심지어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별로 큰 손해를 끼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반면에 나를 사랑하시고 용납하시고 모든 잘못과 죄를 용서해 주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을 용납하고 용서하고 사랑해도 그것이 나에게 별로 유익이 없는 것처럼 여겨지고 때로는 나만 바보가 되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하지요. 그러나 여러분 앞에 있는 그 사람을 사랑하느냐 그렇지 않으냐, 그 한 사람을 용서하느냐 용서하지 않느냐 하는 문제는 단지 그 사람과 여러분의 개인적인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여러분과의 관계로 이어진다는 것이 바로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 사람들과의 관계가 아니라 - 흔들리지 않는 확신 가운데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 를 날마다 누리며 살아가기를 원하신다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서로 사랑하십시오. 먼저 용서하십시오. 마지막까지 이해하고, 끝까지 사랑하십시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여러분의 신앙생활을 풍성하게 만드는 최고의 선택입니다.
사랑의 축복 – 기도의 응답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 곧 말과 혀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풍성한 축복을 누립니다. 이것은 성경이 일관되게 가르치는 너무도 귀한 교훈인데요. 특별히 오늘 본문에는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할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축복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가운데 두 가지만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자,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아 우리도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얻게 되는 축복, 그 첫째는 기도의 응답입니다. 오늘 본문 22절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22절)
본문 22절이 무엇을 약속합니까?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 예수님에게서 – 받게 됩니다.’ 기도의 응답이지요. 성도 여러분, 이 말씀 그대로 여러분 모두에게 풍성한 기도의 응답이 날마다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본문 22절은 계속해서 기도 응답의 비결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면서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시잖아요. 그러면 여러분, 예수님의 계명 곧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본문 23절에 그 답이 등장해요.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23절)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계명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을 기억하며,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지요. 서로 사랑하되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이 무엇을 약속하십니까? 그렇게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고,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그 사랑을 실천하면,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예수님에게 받는” 기도 응답의 복을 누리게 되는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 본문에 따르면 누가 하나님으로부터 풍성한 기도의 응답을 받으며 살아가게 됩니까? 밤낮으로 매일 같이 교회에 나와 울부짖으며 기도하지만, 내 곁에 있는 한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못하고 나아가 누군가를 끝까지 미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그러한 사람의 기도를 과연 들어주실까요? 그러면 하나님은 과연 누구의 기도를 들어주시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대답은 너무도 명백합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그 풍성한 사랑을 받아 누릴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는 사람. 나의 마음을 조금 속상하게 한 사람이라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용서하는 사람. 하나님은 예수님의 새 계명을 실천하며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의 기도에 하나님은 풍성히 응답하여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주시는 풍성한 복을 받기 원하십니까?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마다 모두 응답받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이 참으로 성경의 말씀을 믿으신다면 여러분의 이웃을 사랑하십시오.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십시오. 예수님의 사랑으로 다른 이들을 사랑하고 섬기면, 바로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큰 복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축복 – 하나님과의 교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 곧 말과 혀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풍성한 축복을 누립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는 사랑을 실천할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축복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는데요. 그 첫 번째는 기도의 응답이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만 더 나눈다면 그것은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입니다. 오늘 본문 24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24절)
24절이 어떻게 시작합니까?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예수님의 계명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더 이상 말씀드리지 않아도 되겠지요. 자, 예수님께서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축복이 약속되어 있습니까? 24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합니다.’ 그리고 ‘주님도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그 사람 안에 거하십니다.’ 한마디로, 이제는 주님과 친밀한 교제를 누리게 된다는 약속입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은 나에게서 멀리 계신 분처럼 느껴지는 분들이 계십니까?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만 주님이 내 삶에 가까이 오신다는 것이 별로 실감나지 않는 분들이 계십니까? 주님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주님 안에 계신다는 성경의 표현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무리 예수님을 믿고 교회를 출석해도 경험하지 못하는 분들이 계십니까?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위해 찬양하고, 기도하고, 예배하고 말씀을 읽는 개인의 경건 생활이 당연히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누리는 가장 확실한 방법, 그것은 여러분 곁에 있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덧 2025년의 사순절 다섯번째 주일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사순절을 지나며 말씀과 기도 가운데 예수님과 더깊이 교제하시는 성도님들이 많이 계시지요. 그러나 성도 여러분, 단지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며 혼자 기도하고 혼자 묵상하는 것만으로는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체험하는 데는 분명한 한계가 있습니다. 사순절을 보내며 하나님과 더욱 깊이 교제하기를 원하신다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는 예수님의 사랑으로 여러분 곁에 있는 이웃을 사랑하십시오.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십시오. 여러분 곁에 있는 한 사람을 사랑하고 용서하고 관용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십시오.
물론, 그 사람이 여러분의 사랑에 긍정적으로 응답할 수도 있고 반대로 부정적으로 대응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상관없습니다. 그것은 사람들과의 관계입니다. 이미 수차례 말씀 드린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계명을 실천하는 것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넘어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나에 대한 사람들의 행동과 반응에 상관하지 말고 여러분은 끊임없이 여러분 곁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십시오. 그렇게 여러분 곁에 있는 한 사람을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할 때 여러분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큰 확신을 얻게 되고, 그렇게 내 곁에 있는 사람을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할 때 여러분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기도의 응답을 받으며, 그렇게 행함과 진실함으로 끝까지 사랑할 때 여러분은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누리며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풍성한 삶을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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