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설교2021. 2. 28. 17:21

중세 스콜라 신학의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는 안셀무스의 대표적인 저서가 <하나님은 왜 인간이 되셨는가?>(Cur Deur Homo?)라는 책입니다. 이 책에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질문에 답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곧, 사람들이 이렇게 질문한다는 것이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다면, 단순히 우리 인간의 죄를 용서한다고, 이제 너희 모두가 구원을 받았다고 선언만 하시면 될 것인데 왜 굳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그 모든 고통을 받아야 했느냐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 안셀무스는 꽤 통쾌한 대답을 해줍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만일 그렇게 질문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아직 자신이 지고 있는 죄의 짐이 얼마나 무거운지 숙고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 모든 고통을 당하셔야 했습니까? 우리의 죄가 너무도 심각하여, 하나님께서 그저 너희의 죄를 용서한다고 선언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안셀무스의 표현대로 우리가 지고 있는 죄의 짐이 크고 무거웠던만큼 예수님은 그토록 모진 십자가를 지도록 하셨습니다. 


성도의 고난

오늘 본문 시편 22편은 지난 주에 살펴보았던 시편 25편과 마찬가지로 탄식시입니다. 곧, 깊은 아픔과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탄식하며 기도하는 시편이지요. 성경은 일반적으로 신앙인이 당하는 고통에는 다 목적이 있고, 그에 따르는 유익도 있다고 말씀합니다. 고난은 지금 당장 너무도 아프고 쓰리지만, 우리는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을 의뢰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을 배웁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 모든 아픔에서 우리를 구해주시는 놀라운 경험으로 인도합니다. 이것이 고난 속에 감추어진 성도의 유익입니다. 이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장면은 시편에 너무도 많아요. 그 가운데 하나인 시편 34편의 몇 구절만 읽어보겠습니다.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시편 34편 6절)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시편 34편 18-19절)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고,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하게 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성경은 고난을 통해 우리 신앙인이 하나님의 말씀에 더욱 순종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한다고 강조합니다. 그 대표적인 구절을 시편에서 찾아본다면, 시편 119편이 될 것 같습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시편 119편 67절)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편 119편 71절)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내 삶에 고난이 찾아올 때 낙심하지 않습니다.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이 고난을 통해 또다시 큰 은혜를 베풀어주실 하나님을 기대하고, 이 고난을 통과한 후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훈을 받아 더욱 성숙할 나 자신을 소망하게 됩니다. 


시편 22편의 고난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이 고난에 대한 성경의 ‘일반적인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인 가르침이라는 말에는 이와 같은 교훈이 적용되지 않는 예외적인 상황도 존재한다는 점을 암시합니다. 나의 삶에 고난이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하나님만 의지하면서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번에도 하나님께서 그 모든 환난으로부터 나를 구해주실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보이지 않는 경우가 있다면 어떨까요? 
나의 삶에 큰 아픔이 찾아왔습니다. 그 아픔은 너무도 쓰라렸지만, 하나님께서 이번에도 나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이 모든 과정을 이기게 하시고 나아가 나의 믿음과 신앙을 더욱 성숙하게 만드실 것을 소망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고통은 더해가기만 하고 그 아픔을 통한 하나님의 섭리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 경우가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여러분, 오늘 본문 시편 22편이 꼭 그와 같은 고난을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시편 22편 1절) 

지금 시인은 자신의 몸에 질병이 찾아왔다거나, 지금 당장 극심한 궁핍에 시달린다거나, 지금 자신을 공격하는 대적자들이 많다는 등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그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탄식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 “하나님이 나를 멀리하신다.” “하나님이 나의 신음소리를 외면하신다.”라는 것입니다. 그 구체적인 정황이 그다음 절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시편 22편 2절) 

하나님을 찾지 않아서 고난이 찾아왔다고요? 아닙니다.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기도했다고 말하잖아요. 고난이 찾아왔을 때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으면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고요? 무슨 소리입니까? 밤낮 부르짖고 기도하였지만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셨다고 말하잖아요. 그러니 신앙인들에게도 눈물로 지새우는 밤이 많이 있지만 그때마다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여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 고통을 축복으로 바꾸신다는 말이 최소한 시편 22편에는 안 맞아요. 

시인은 믿음의 사람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 과거에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구원을 기억하며 기도하거든요. 

우리 조상들이 주께 의뢰하고 의뢰하였으므로 
그들을 건지셨나이다 
그들이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였나이다 (시편 22편 4-5절) 

이 구절에서 “우리의 조상들이”라는 표현은 출애굽의 사건을 떠오르게 합니다. 또, ‘다윗의 시’라고 표제어가 붙어 있지만, 시편이 현재의 모습과 같이 150편으로 묶여진 것이 바벨론의 포로에서 돌아온 이후라는 점을 기억하면 여기에 등장하는 “우리의 조상들이”라는 표현은 바벨론에서의 귀환 사건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요. 그 무엇이 되었든, 지금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민족에게 행하셨던 구원의 역사를 분명히 기억하였고, 그것에 근거하여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지금 내가 이 모든 고통과 아픔을 당하고 있지만, 과거에 큰 구원을 베풀어 주셨던 하나님께서 이번에도 구원하여 달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결과는 전혀 예상 밖이었어요.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시편 22편 6절) 

인간이 큰 고통을 당할 때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면 하나님께 들어주십니다. 그렇게 배웠고, 성경을 통해 그렇게 읽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사람이 아니라 벌레인가 봐요. 내가 사람이라면 큰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밤낮 부르짖었으니 하나님께서 구해주셔야 하잖아요. 우리 조상들이 큰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의 탄식소리에 귀를 기울여주셨고 그들을 큰 고통에서 구하여 주셨다면서요. 나는 지금까지 그 사실을 믿으며 밤낮으로 간절히 기도하였지만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만은 외면하고 계시니, 나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사람이 아니라 벌레이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바로 이것이 시편 22편의 깊은 탄식입니다. 


대속의 고난

여러분, 어떠세요? 성경이 고난에 대해 일반적으로 가르치는 교훈이 시편 22편과 부합하지 않죠. 그래서 고난에 대한 성경의 일반적인 가르침으로는 시편 22편의 탄식이 해석되지 않아요. 그러므로 시편 22편의 탄식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고난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시편 22편을 해석하기 위해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고난에 대한 새로운 이해, 그것은 ‘대속의 고난’입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 인류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게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속죄한다는 의미로 우리는 그것을 ‘대속’이라고 부르지요. 예수님께서 인간의 모든 죄악을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예수님은 큰 소리로 외치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그리고 마태복음은 그 의미를 이렇게 번역합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태복음 27장 46절)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이 외침은 시편 22편 1절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1절 외에도, 시편 22편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묘사하는 장면이 참 많아요.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16절입니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시편 22편 16절)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그의 손과 발에 못이 박히셨잖아요.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그들이 나를 주목하여 보고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시편 22편 17-18절)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 앞에 조금도 죄를 범한 것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기 위해 성부 하나님을 향하여 밤과 낮으로 부르짖으며 기도하였어요. 성부 하나님을 향한 예수님의 믿음과 신뢰에는 조금의 문제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극심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바로 그때, 성부 하나님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외면하였고 성부 하나님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에 귀를 닫으셨으며 성부 하나님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철저하게 버리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성부 하나님을 향해 이렇게 탄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님께서 그토록 무섭고 그토록 처절하게 고통을 당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이 대속의 고난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악이 그토록 무거웠기에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은 그렇게 무서워야 했고, 우리의 죄악이 그토록 치명적이었기에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은 그렇게 참혹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은 우리 인간들이 겪는 그런 종류의 고통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온 인류의 모든 죄악을 홀로 감당하시는 대속의 고난이었기에,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비참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겪으셔야 했던 대속의 고난을 예언한 또 다른 예언자인 이사야는 예수님의 고난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사야 53장 4-6절) 


구원의 은혜

시편 22편에는 우리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홀로 견디셔야 했던 대속의 고난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시편 22편의 후반부는 대속의 고난을 통한 구원의 모습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너무도 당연한 말씀이지만, 시편 22편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모든 내용의 대전제는 시편 22편의 전반부, 곧 1절부터 21절이 묘사하는 대속의 고난이 전제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시편 22편의 후반부는 22절부터 시작됩니다.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 가운데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시편 22편 22절)

이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형제들에게 선포됩니다. 성도들 가운데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는 소리가 울리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다고요? 예수님께서 극심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한 대속의 고난을 당하셨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구원의 은혜를 찬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얼굴을 그에게 숨기지 아니하시고 
그가 울부짖을 때에 들으셨도다 (시편 22편 24절) 

우리가 곤고함을 당하고 고통을 당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는 그 얼굴을 숨기지 않으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선하기 때문입니까? 우리가 의롭게 살아왔기 때문인가요?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만큼 위대한 기도이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마땅한 죄인이지만,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극심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기에 하나님은 더 이상 우리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울부짖는 기도에 응답하여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철저히 버림받아 마땅한 죄인이지만,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성부 하나님께 철저히 버림을 받으셨기에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의 저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 대목에서 전반부, 곧 1절부터 21절까지와 후반부, 곧 22절 이후의 중요한 차이점 하나를 집고 넘어가는 것이 유익할 것 같습니다. 21절 이전, 곧 전반부에서는 극심한 고통에 빠져있는 주인공의 주변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를 괴롭히는 대적들에게 둘러 쌓여 있을 뿐, 그를 도와주는 사람도 없고(11절) 심지어 하나님조차 그를 버리셨지요. 철저히 한 사람의 고독한 고난이었습니다. 그러나 22절 이후, 곧 후반부에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회중이 등장하고 그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복음의 매우 중요한 특징 하나를 확인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홀로, 고독하게 대속의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 한 분의 십자가 고난으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가 죄 용서의 은혜를 누리게 되었고,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구원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이렇게 오늘도 함께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신앙의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한 분의 고독한 대속의 고난이 우리 모두의 구원과 축복이 되었던 것입니다. 

중세 스콜라 신학자였던 안셀무스는 <하나님은 왜 인간이 되셨는가?>라는 책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그 극심한 고통을 당하셔야 했던 이유를 설명합니다. 우리 인간이 지고 있는 죄의 짐이 너무도 크고 무거워 하나님은 그 죄를 벌하지 않고는 사람들을 향해 이제 너희 죄가 용서를 받았다고, 너희가 구원을 받았다고 선언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그토록 모질었던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셔야 했던 이유는 우리 인간의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계속해서 안셀무스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그 무서운 고난을 당하셔야 했던 또 하나의 이유를 제시합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범죄 한 인간이지만, 그리하여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받아 마땅한 인간이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냥 내버릴 수가 없으셨던 것이죠. 하나님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던지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 버리시면서까지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사랑하셨습니다. 

이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예수님을 통해 직접 체험하였던 사도 요한은 자신의 서신서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요한일서 4장 9-10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 그 안에서 
우리는 나의 죄악이 얼마나 크고 무거운지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 그 안에서 
우리는 또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그 모든 것을 뒤덮을 만큼 크고 위대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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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