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설교2021. 3. 2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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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에서 예수님을 믿는다라고 이야기할 때, ‘믿음’에는 3가지 요소가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 세 가지 요소란 지식, 동의, 신뢰입니다. 하나씩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먼저 지식이 필요합니다. 물론 성경 전체의 내용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가르침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먼저 이해하고 알아야 합니다. 그 핵심적인 내용이란 사순절을 보내며 우리가 함께 묵상하였던 것들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신데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성육신의 가르침,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은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신 대속의 죽음이라는 사실, 나아가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우리가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거듭남의 비밀 등을 먼저 머리로 알고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첫 번째 요소인 지식입니다. 

믿음은 지식이 꼭 필요하지만, 지식이 있다고 하여 믿음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지식이 있으면서도 믿음의 두번째 요소인 동의는 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저는 신천지를 비롯한 몇몇 이단종파가 가르치는 요한계시록의 해석에 대해 알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들의 주장에 조금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저는 구원파로 분류되는 이단들이 주장하는 구원론에 대해 알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들의 주장에 결코 동의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의 복음을 알고 있지만 그것을 마음으로부터 동의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라는데,’ (그들은 성육신의 진리를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겠어?’ (동의하지는 못합니다.)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가르치는데’ (그들은 대속의 교리를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해서 죽을 수가 있겠어?’ (마음으로 동의할 수는 없는 것이죠.) 그러므로 믿음의 두 번째 요소는 동의입니다. 복음에 대한 지식이 있다면 이제는 그것이 진리라고 동의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믿음의 마지막 세번째 요소는 신뢰입니다. 기독교의 가르침에 대한 지식이 있고 동의하지만 믿음의 마지막 세 번째 요소인 신뢰는 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물론 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보지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과거 이순신 장군이 군사전문가로서 매우 큰 능력이 있었고 그 능력으로 임진왜란 당시 큰 전공을 세웠다는 사실을 지식으로 알고 있으며, 또 그것이 역사적 사실이라고 동의합니다. 그러나 21세기를 살아가는 대한민국 국민 가운데 그 누구도 이순신 장군이 여전히 우리나라와 민족을 지켜줄 수 있다고 그분을 신뢰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것이 동의와 신뢰의 차이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인간의 죄를 대신 지신 대속의 죽음이라는 사실을 지식으로 알고 마음으로 동의하였다면, 이제 나의 모든 죄를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내어 맡기는 신뢰의 단계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부활이 인간에게 다시 태어나는 거듭남의 은혜를 베풀어주신다는 사실을 지식으로 알고 마음으로 동의하였다면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단계가 꼭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기독교의 믿음은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됩니다. 예수님의 복음에 대한 지식, 예수님의 복음이 진리라는 동의, 그리고 끝으로 예수님에 대한 신뢰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믿음은 지식, 동의, 신뢰 가운데 어느 단계에 있으십니까? 


고통과 신뢰

시편 31편을 노래하는 시인은 지금 극심한 고통에 처해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시인이 처한 상황을 엿볼 수 있는 구절을 한 두개만 소개해보겠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고통 중에 있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근심 때문에 눈과 영혼과 몸이 쇠하였나이다 (시편 31편 9절) 

시편 31편은 지금 극심한 고통 속에 있습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큰지 근심 때문에 눈과 영혼과 몸이 쇠약해진 상태입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아픔이 멈추지 않고 지속된다는 사실입니다. 

내 일생을 슬픔으로 보내며 
나의 연수를 탄식으로 보냄이여 (시편 31편 10a절) 

지금 시인은 고통과 근심 때문에 몸과 마음이 크게 무너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시편 31편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우울해야 하지 않을까요? 시인이 겪고 있는 고통은 하루 이틀의 문제가 아니라 그의 일생동안 그를 따라다니는 만성적인 문제였습니다. 그러면 시편 31편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그 분위기가 암울해야 자연스럽지 않을까요? 그런데 시편 31편의 분위기는 이러한 예상과는 정반대입니다. 큰 고통 중에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큰 아픔이 지속되는 것도 분명합니다. 그런데 시편 31편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오히려 소망이요, 오히려 평안입니다. 참 놀라운 반전이지요. 그러면 여러분,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지속되는 아픔 속에서도 시편 31편은 어떻게 그 마음의 평화를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그 대답은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데 그것은 ‘신뢰’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흔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는 나의 반석과 산성이시니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생각하셔서 나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소서 (시편 31편 3절)

시인은 먼저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표현합니다. “주는 나의 반석과 산성이시니”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밑바탕에 든든히 깔려있고, 그 위에 간구가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생각하셔서 나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소서”

그들이 나를 위하여 비밀히 친 그물에서 빼내소서 
주는 나의 산성이시니이다 (시편 31편 4절) 

지금 대적자들이 쳐놓은 그물에 빠져있어요. 그래서 그물에서 나를 빼내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신뢰는 변함이 없습니다. “주는 나의 산성이시니이다” 

고난 중에도 변하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는 시편 31편의 뒷부분에도 등장합니다.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 (시편 31편 14절)

참 놀라운 고백입니다. 여기에 “그러하여도”라는 표현을 주목해 보십시오. 그 앞에 9절부터 13절까지 시인이 처한 위기의 상황을 매우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어요. 그리고나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하여도’ 나는 주님을 의지하고 신뢰합니다. 그러한 일이 모두 자신의 삶에 닥쳐오고 있지만, 여전히 그의 마음은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고백합니다. 

저는 시편 31편을 읽을수록 이 시를 노래하는 시인이 너무도 부럽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든든한 신뢰가 형성되어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소망을 포기하지 않는 그의 당당함이 참으로 부럽습니다. 어떠한 상황이 닥쳐와도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무너지지 않으니 그 마음에 드넓은 대양과도 같은 평강이 넘치는 그의 모습이 너무도 부럽습니다. 물론 그에게도 큰 아픔과 슬픔이 찾아왔지요. 물론 그 고통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그의 일생 동안 뼈아픈 가시가 되었지요.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바탕으로 삶의 모든 역경에 당당히 맞설 수 있는 이 사람을 누가 불쌍한 인생이라 말할 수 있을까요? 표제어에 ‘다윗의 시’라고 되어 있지만 굳이 다윗의 삶을 이 시편에 대입하지 않더라도, 그래서 다윗이 누렸던 권력과 다윗이 이룬 성취를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시편 31편은 그 자체만으로도 너무도 부러운 신앙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요? 

신앙생활의 연수가 더해지고 특별히 목사로 살아가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저도 시편31편을 노래하는 시인의 모습을 너무도 닮고 싶어요. 나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께 늘 기도하였더니 재정의 문제도 사라지고 건강에 대한 걱정도 사라지고 자녀들에 대한 근심도 모두 다 사라졌다, 뭐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오히려 부끄러운 일 같아요. 그 대신 한 평생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자로 살아가는 동안 근심과 걱정이 끊이지 아니하였고 때로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여도 그러한 문제가 쉽게 해결되지 않았지만, 그 과정에서 하나님을 향한 신뢰의 마음은 더욱 풍성해져서 이제는 나의 마음에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가 가득하다고 간증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큰 슬픔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놓치지 않고 그 안에서 큰 확신과 평안을 누렸던 한 신앙인의 믿음의 깊이를 헤아려보십시오. 그에게 닥친 고통이나 환란이 사라졌든 그렇지 않든, 그가 당한 아픔이 이후에 전화위복이 되었든 그렇지 않든 그런 것은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습니다. 오랜 세월 인생의 굴곡을 자신의 온몸으로 받아내면서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뿌리 깊게 내렸기에 이제는 그 어떠한 아픔도 감히 넘볼 수 없는 위대한 평안이 그의 마음에 가득 차 있는 이 사람이야말로 신앙의 거인이라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곳에서 함께 모여 예배하는 우리 모두가 세월이 흐를수록 믿음의 거인, 믿음의 어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삶에는 끊임없이 고통과 아픔의 순간이 몰려옵니다. 시편 31편이 노래하듯이 우리의 삶에 찾아오는 고통은 나의 일생동안 지속되며 나의 모든 날은 괴로움의 연속일지도 모르죠. 그러니 나에게 찾아오는 고통의 크기나 그 아픔의 결과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겠습니까? 그러나 나의 삶에 거대한 고난의 쓰나미가 몰려올 때 우리의 신앙은 정말 위대한 능력을 발휘하는데, 하나님을 향한 흔들리지 않는 신뢰로 말미암아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그 마음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망과 평화를 누리며 그 모든 과정을 이겨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신뢰와 수용

오늘은 종려주일이고 오늘부터 우리는 고난주간을 맞이합니다. 고난주간을 시작하는 오늘 교회가 시편 31편을 묵상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실 때 시편 31편을 인용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구절은 시편 31편 5절입니다.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시편 31편 5a절) 

신약성경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말씀이 모두 일곱가지로 기록되어 있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십자가 위에서 하신 일곱 가지 말씀이라는 뜻으로 ‘가상칠언’이라고 부릅니다. 그 가운데 가장 마지막에 남기신 말씀이 무엇이었는지 누가복음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누가복음 23장 46절)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온 인류의 죄악을 대신 지신 대속의 십자가였기에 예수님은 시편 22편을 인용하며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탄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고통을 다 인내한 후, 이제 마지막으로 자신의 숨을 멈추는 바로 그때 예수님은 시편 31편을 인용하며 성부 하나님을 향한 흔들리지 않는 신뢰를 표현하였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장면을 여러분의 마음에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십자가 위에서 모든 고통을 인내하신 뒤 마지막으로 숨을 거두시기 직전 시편 31편을 인용하시는 예수님을 떠올려 보십시오. 자신의 생명이 끝나가는 바로 그 순간, 자신의 영혼을 성부 하나님께 맡겨드렸던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십자가의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성부 하나님을 향한 신뢰로 그 마음이 평안으로 가득 차 있는 예수님의 모습을 묵상해보십시오. 시편 31편을 읽으며 우리가 그토록 부러워하였던 모습, 곧 어떠한 순간에도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리지 않고 그 마음에 넘치는 평안을 누리며 모든 역경에 당당히 맞서는 신앙의 거인은 결국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인 것입니다.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자신의 영혼을 성부 하나님께 맡겨드렸던 예수님의 모습을 묵상하며, 저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에 대한 매우 중요한 교훈 하나를 얻게 됩니다. 곧 신뢰는 수용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성부 하나님을 신뢰하셨지요. 그래서 자신의 영혼까지도 성부 하나님께 내어 맡기며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기도하시잖아요.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의 기도에 곧 이어지는 누가복음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을 마지막까지 신뢰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신뢰는 예수님을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구해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결과를 가져왔지요.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였기에 죽음까지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넉넉히 받아들이며 수용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신뢰하십니까? 하나님만이 여러분의 견고한 바위와 구원의 산성이 되신다는 사실을 믿으며 하나님을 신뢰하십니까? 만일 우리에게 하나님을 향한 참된 신뢰의 마음이 있다면 그 신뢰는 하나님의 뜻을 수용하는 태도로 자연스럽게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어떻게 이끌어 가실지 몰라도, 하나님께서 나의 인생을 어떻게 빚어가실지 몰라도, 심지어 지금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고 나에게 복이 아닌 화가 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냐고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곧 지식, 동의, 신뢰입니다. 지식은 있지만 동의하지 않을 수 있고, 지식과 동의의 단계까지는 나아갔지만 여전히 신뢰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할 때 그것은 지식과 동의와 신뢰를 모두 포함한 개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신뢰를 생각할 때마다 저에게 떠오르는 하나의 이미지가 있습니다. 그림으로 보여드리죠. 바로 이것입니다. 어린아이가 높은 바위 위에 올라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밑에는 아빠가 지켜보고 있었죠. 아빠는 높은 바위에 올라간 아이에게 아빠를 향해 뛰어내리라고 말합니다. 그 아이가 어떻게 했을까요? 그런데 여러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만일 저 높은 바위 위에 서 있는 아이의 눈에 아빠가 보이지 않았다면 혹은 바위 아래에 건장한 남자가 서 있기는 하지만 아이의 아빠가 아니라면 그때에도 이 아이는 바위에서 뛰어내릴 수 있었을까요? 여러분, 이것이 바로 신뢰입니다. 

지금 보여드리는 이미지에서 저의 시선이 머무는 장명은 아이의 표정입니다. 잘 보이시는지 모르겠지만, 밑에 있는 아빠의 표정을 보면 어금니가 보일만큼 웃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아이의 얼굴에도 웃음이 가득하지요. 여러분, 다시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만일 저 아래에 아빠가 없다면, 동일한 위치에서 동일한 동작을 취하고 있는 아이의 얼굴이 어떻게 변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지금 저 사진에서 아이에게 불안한 마음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 이유, 저 아이의 얼굴에 웃음이 떠나지 않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저 아래에 나의 아빠가 있고 나는 그 아빠를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나의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자신의 영혼까지도 성부 하나님께 내어 맡기셨던 예수님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늘의 평강을 잃어버리지 않으셨던 예수님의 모습이 오늘 우리의 모습이 되기를 바랍니다. 심지어 십자가의 비참한 죽음이라도 그것이 성부 하나님의 뜻이라면 얼마든지 받아들이고 수용하셨던 예수님의 모습이 오늘 우리의 모습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시간이 흐를수록 시편 31편을 노래하였던 시인과 같이, 십자가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시는 순간까지도 성부 하나님을 신뢰하셨던 예수님과 같이 믿음의 거인이요, 믿음의 어른으로 성숙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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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