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설교2021. 4. 4.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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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온 교회가 함께 지키는 부활절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교회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기, 보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AD 2세기 고대교회 안에 부활절의 날짜에 대한 두 가지 전통이 공존하였습니다. 먼저 소아시아 지역의 교회는 유대인들이 지키던 유월절을 부활절 날짜의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유대인은 구약성경에 따라 아빕월 14일 – 그런데 바벨론 포로 이후에는 아빕월을 닛산월이라고 불렀어요 – 그러니까 닛산월 14일에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신약성경을 통해 알고 있는 것처럼 유대인의 유월절에 예수님은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셨고, 그날 저녁에 붙잡혀 바로 다음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지요. 그러니 소아시아 지역의 교회는 그 날짜를 중심으로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을 기념하면서 금식도 하고 성만찬도 행하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정해진 날짜를 기준으로 부활절을 지키면 매년 부활절의 요일이 달라지겠지요. 마치 성탄절을 12월 25일로 정해 놓으니 매년 성탄절의 요일이 달라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AD 2세기경, 소아시아 지역의 교회들이 닛산월 14일이라는 날짜를 기준으로 부활절을 지켰던 것과 달리, 로마 지역의 교회들은 요일을 중심으로 부활절을 지켰습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예수님은 목요일에 제자들과 유월절 식사를 하셨고 그 다음날인 금요일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지요. 안식일인 토요일이 지나고 기독교에서는 주일이라고 부르는 일요일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로마 지역의 교회들은 요일, 곧 주일에 부활절을 지킬 수 있도록 날짜를 계산하였던 것입니다. 닛산월 14일이라는 날짜를 기준으로 하면 매년 부활절의 요일이 달라집니다. 주일이라는 요일을 기준으로 하면 매년 부활절의 날짜가 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AD 2세기 소아시아 교회와 로마의 교회는 서로 다른 날 부활절을 기념하는 두 가지 전통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각주:1]

그런데 이러한 전통에는 날짜와 요일이라는 눈에 보이는 기준보다 더 중요한 신앙 고백이 담겨져 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닛산월 14일, 곧 유대인의 유월절이라는 기준은 예수님께서 유월절 어린양이 되어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신 십자가의 죽음을 기념한다는 의미가 매우 강하지요. 반면, 주일이라는 요일을 기준으로 삼는 전통은 바로 그 요일에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부활을 기념한다는 의미가 중요했습니다. 부활절의 날짜를 정하는 두 가지 전통 가운데 무엇이 더 옳고 무엇이 더 그르다고 판단하기에 앞서, 우리는 부활절에 대한 이러한 역사를 통해 기독교가 고대교회로부터 견지하였던 진리의 두 기둥을 확인하게 됩니다. 기독교가 처음부터 지금까지 결코 놓칠 수 없는 진리, 기독교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진리, 그것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요 또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다시 살아나신 부활입니다. 


복음의 두 기둥

교회는 처음부터 예수님에 대한 이 두 가지 진리를 굳게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도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을 복음의 두 기둥으로 묘사합니다. 먼저 본문 1절을 보시면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라면서 복음이라는 주제를 언급하지요. 그 복음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3절과 4절에 등장합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고린도전서 15장 3-4절) 

바울이 말하는 복음의 두 기둥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위하 당하신 예수님의 죽음이요, 또한 우리를 위해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하여 죽지 않으셨다면, 십자가의 죽음이 없이 하나님의 아들로 영원히 살아계시기만 하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지 않으셨다면 예수님께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곧 거룩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지만 우리는 여전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기에 감히 하나님 앞에 설 수도 없고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최후의 심판대에서 무서운 형벌을 피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그래서 예수님께서 죽음의 세력에 굴복하셨다면 이번에도 우리는 구원받을 길이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예수님을 믿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나의 죄를 대신 지신 대속의 죽음이라고 확신할지라도, 예수님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죽음의 상태에서 조금 더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살아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길게는 지난 사순절이요 짧게는 지난 고난주간을 보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묵상하셨다면 이제는 부활의 복음이 여러분의 마음에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십자가의 은혜가 너무도 귀합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복음만 있으면 안돼요, 그것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도 없고 인생의 참된 소망을 품을 수도 없습니다. 십자가의 은혜가 여러분에게 주어졌다면,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바로 오늘 여러분의 심령에 부활의 복음이 살아 역사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부활의 주님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삶에 기쁨이 회복되고 감사가 회복되고 새로운 희망이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보이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복음을 설명하면서 복음의 두 기둥으로 예수님의 죽음과 예수님의 부활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는 사도 바울이 복음의 내용을 다시 한번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이야기하는 목적이 나와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고린도전서 15장 1a절) 그런데 여러분, 이 장면에서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세요? 우리가 일반적으로 복음을 전한다고 이야기하면, 이미 예수님을 잘 믿고 있는 성도들에게 전한다고 생각하나요? 아니면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를 대상으로 복음을 전한다고 생각하나요?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미 예수님을 잘 믿고 있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복음을 가르치겠다고 말씀합니다. 1절을 다시 보시면 ‘내가 이미 너희에게 전한 복음,’ 그 복음은 ‘너희가 이미 받은 것이요 또한 너희가 이미 그 가운데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을 이미 알고 있고, 그 복음을 마음으로 받아들였고, 그 복음을 믿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의미인데, 사도 바울은 그러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다시 복음을 알려주고 가르치겠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에 매우 중요한 교훈이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나를 위한 대속의 죽음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셔서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주셨다는 사실을 처음 믿으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어요. 복음의 은혜가 나의 마음에 가득 넘쳐서 찬양을 한 곡 불러도 감격이 되고, 기도를 한마디 해도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주님을 섬기기 위해 수고하고 봉사하는 것이 조금도 힘들지 않고 오히려 큰 기쁨이 됩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구원의 감격’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 마음에 구원의 감격이 찾아오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1~2년이 아니라, 10년이나 20년, 혹은 그 이상 하신 여러분 한번 스스로에게 질문해보십시오. 내가 예수님을 처음 믿을 때 느꼈던 그 구원의 감격이 1년이 지나도, 5년이 지나도, 혹은 10년이 지나도 여러분의 마음에 계속해서 남아 있던가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는 나의 죄를 대신 지신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가 그렇게 감격적일 수가 없었어요,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는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부활이 그렇게 나의 삶에 소망과 희망을 줄 수가 없었지요. 그러나 시간이 흐르다보니 구원의 감격은 어디 갔는지 모르게 다 흩어져 버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도 이미 다 아는 이야기,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들어도 이미 수없이 들었던 이야기로 치부하는 우리의 모습이 아니던가요? 그렇게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 점차 우리의 마음에서 사라지면서 세상의 걱정, 세상의 염려, 세상의 자랑, 세상의 관심사에 우리의 마음을 빼앗긴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 인간들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본문 1절에서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다시)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여기에서 알게 한다는 것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복음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알려준다는 뜻이 아닙니다. 복음이 진리라는 사실을 그들이 몰라서 알려주겠다는 사실도 아닙니다. 복음의 진리를 알죠, 설명할 수 있죠. 마음으로 동의하죠. 그러나 그 복음이 그들의 삶에 살아서 역사하지 못하니, 사도 바울은 다시 한번 복음의 진리를 성도들에게 전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던 것입니다. 

이 점을 마음에 품고 오늘 본문을 고린도전서 15장을 다시 읽어보면 너무도 중요한 하나의 단어가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강조되는 것이 눈에 띕니다. 자, 이미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3절과 4절에서 바울은 복음의 두 가지 기둥을 서술하였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입니다. 그리고 5절부터 보세요.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 (보이시고)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중략)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 (보이시고)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고린도전서 15장 5-8절)

지금 반복되면서 강조되는 단어가 무엇입니까? “보이셨다”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부활은 객관적인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객관적인 사실이 지금 나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객관적인 사실이 지금도 죽음의 그림자 아래에서 괴로워는 우리 각 사람을 생명의 빛으로 이끌어내지 못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부활하신 뒤, 곧 객관적인 진리로서 부활을 실현하신 뒤 부활하신 주님께서 베드로를 찾아가 만나주시고 열두 사도를 찾아가 만나주시고 오백여 형제를 찾아가 만나주시고 야고보를 찾아가 만나주시고 나아가 교회를 핍박하고 박해하던 사도 바울을 찾아가 만나 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을 한 명씩 찾아가 만나주시니 그들의 삶에 부활의 은혜가 임하게 되었고, 그들의 삶에 참된 소망이 임하게 되었고, 그들은 더 이상 죽음이 끝이 아니라 죽음까지도 이겨낼 수 있는 부활의 능력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절을 맞이하는 여러분의 삶에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바랍니다. 
부활절을 맞이하는 여러분의 심령 깊은 곳에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친히 찾아가시고 임재하시기 바랍니다. 
부활하신 우리 주님께서 여러분 마음의 문을 여시고 들어가 영생의 충만한 은혜를 가득 채워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부활절 논쟁

교회의 역사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좀더 구체적으로 AD 2세기 고대교회에는 부활절의 날짜를 정하는 두 가지 전통이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소아시아 지역에 있는 교회들은 닛산월 14일이라는 날짜를 기준으로 부활절을 지켰고, 로마 지역에 있는 교회들은 주일이라는 요일을 기준으로 부활절을 계산하여 지켰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부활절을 계산하는 기준이 다르다 보니, 한쪽에서는 부활절을 맞이하였다고 기뻐하며 잔치를 벌이고 있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아직 고난주간을 보내며 금식하는 기이한 풍경이 벌이지곤 하였지요. 그래서 교회는 매년 부활절이 언제인지에 대한 통일된 견해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자, 그러면 닛산월 14일이라는 고정된 날짜를 기준으로 하는 전통과 주일이라는 요일을 기준으로 하는 전통 가운데 무엇이 점차 기독교 전역에 확산되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따르는 기준이 되었을까요? 우리는 그 답을 알고 있지요. 21세기 이 땅의 교회가 지키는 성탄절은 12월 25일로 날짜가 정해져 있지만 그 대신 매년 요일이 다르고, 부활절은 날짜가 정해져 있지 않지만 매년 주일에 지키고 있잖아요. 그런데 여러분, AD 2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면 그것이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 주일이라는 요일을 기준으로 하면 교회가 큰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그것은 매년 복잡한 계산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지키는 부활절 계산법을 간단히만 말씀을 드릴까요? “매년 춘분이 지나고 첫 번째 맞이하게 되는 만월, 바로 그다음 주일”이 부활절입니다. 여러분, 어느 것이 더 편할까요? 닛산월 14일이라고 규정하는 것이 편할까요? 아니면 ‘춘분이 지나고 첫 번째로 맞이하는 만월, 바로 그다음 주일’이 편할까요? 당연히 사람들이 부활절 절기를 지키는 데는 닛산월 14일이 훨씬 편하죠? AD 2세기는 지금처럼 인터넷에 검색을 할 수 있는 시대도 아니었어요. 그런데 역사의 흐름은 손쉬운 닛산월 14일이라는 고정된 날짜를 포기하고 주일이라는 요일을 선택하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두 가지 진리의 기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이 가운데 더욱 중요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그래서 그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하여 고난주간과 부활절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면 교회는 당연히 부활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닛산월 14일은 예수님의 수난을 의미하잖아요. 그러나 주일은 예수님의 부활을 의미하지요. 계산이 복잡하다고요? 기억하기 어렵다고요?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됩니까? 계산하기 아무리 어려워도, 기억하기 힘들어도 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을 부활절의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곧 교회는 예수님의 부활을 신앙생활의 기준으로 삼았고,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부활을 우리 인생의 기준으로 삼으며 살아왔던 것입니다. 

창세로부터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후 수많은 영웅들이 있었고, 그들이 행한 위대한 사건과 업적은 무수히 많았습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단 하나의 사건을 꼽으로 한다면, 저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사건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지금까지 살아온 내 개인의 삶 속에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귀한 사건이 있었다면 그것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의 마음에 나타나신 일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의 삶에도 크고 작은 일이 많이 있었으며 앞으로도 여러분의 삶에 너무도 크고 중요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겠지만, 여러분의 인생을 변화시키고 여러분의 삶을 그 토대부터 바꾸어 놓는 단 하나의 사건이 있었다면, 바로 그것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나타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의 삶에 나타나실 때 절망의 상황에서 소망이 찾아오는 것이요,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의 삶에 찾아오실 때 허무한 우리 인생이 비로소 값진 인생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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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필립 샤프, <니케아 이전의 기독교> 이길상 역 (고양: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04), 205-21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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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