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설교2021. 6. 24. 11:02
반응형

지금으로부터 약 70여 년 전,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 한반도에는 큰 전쟁의 소용돌이기 휘몰아치고 있었습니다. 자료마다 숫자의 차이가 있지만, 625 전쟁에서 전사한 국군의 숫자가 약 19만 4천 명, 북한군 전사자는 약 52만 명, 중공군과 유엔군의 전사자는 약 30만 7천 명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625 전쟁에서 전사한 군인의 숫자만 해도 100만 명을 훨씬 넘어섭니다. 그런데 625 전쟁은 군인들만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이 아니죠. 625 전쟁으로 사망한 민간인의 숫자는 약 24만 4천 명이요, 그 외에도 실종자나 부상자는 더욱 많으며 그 과정에서 부모를 잃고 버려진 전쟁고아도 속출하게 되었습니다. 

625 전쟁은 인명피해만 입힌 것이 아니었습니다. 625 전쟁으로 인해서 남북한의 경제는 사실상 초기화되었습니다. 국가기록원에 의하면 남한 제조업의 약 42%, 북한 공업의 약 60%가 파괴되었다고 하는데 그 외에 학교를 비롯한 공공시설의 파괴와 도로, 교량, 철도 등의 사회 기반시설이 모두 황폐해졌습니다. 625 전쟁은 예배당을 비롯한 기독교 시설을 무너트렸습니다. 그리고 우리 민족은 민족상잔의 비극을 겪으며 그 마음에 서로에 대한 미움과 분노가 가득해졌습니다. 이처럼 이 땅 한반도에서 일어난 전쟁은 우리의 생명을 빼앗고 삶의 터전을 파괴하며 우리의 영혼을 피폐하게 만들었으니, 우리 모두는 이 땅 한반도에서 일어난 625 전쟁을 기억하며 더 이상 이 땅에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고 평화가 깃들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나아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역사의 주관자가 우리 하나님이라고 믿습니다. 이 땅에 전쟁이 그치고 평화가 임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노력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시는 은혜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그리하여 이 자리에 함께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는 오늘도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 나라와 우리 민족을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그리하여 이 땅에 하나님의 샬롬을 허락해 주시기를, 나아가 하루속히 복음 안에서 남과 북이 통일되기를 기도합니다. 


전쟁의 시대, 평화의 시대

모세의 시대, 그리고 그의 뒤를 이은 여호수아의 시대에 이스라엘은 큰 전쟁을 치렀습니다. 모세의 시대에는 요단 동편을 정복하기 위한 전쟁을 치렀고, 여호수아의 시대에는 요단 서편을 점령하기 위한 전쟁을 치렀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이 40년 간 광야에서 생활했던 시대에 태어난 이스라엘 자손은 성인이 되어 모세의 지위 아래 요단 동편을 점령하였고, 나아가 여호수아의 지위를 받으며 요단 서편을 점령하였습니다. 가히 그들의 일생은 전쟁의 삶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 본문 여호수아 22장에 이르면 전쟁의 시대가 마치고 평화의 시대를 맞이합니다. 

본문에는 여호수아가 요단 동편에 정착한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렇게 이야기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그 때에 여호수아가 르우벤 사람과 갓 사람과 므낫세 반 지파를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을 너희가 다 지키며 
또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일에 너희가 내 말을 순종하여 (수 22:1-2) 

여기에서 모세의 명령과 여호수아의 명령에 순종했다는 것은 율법의 말씀을 지키며 사랑과 봉사를 실천했다는 듯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말씀하는 모세의 명령과 여호수아의 명령은 가나안 정복을 위해 전쟁을 수행하라는 명령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오늘까지 날이 오래도록 너희가 너희 형제를 떠나지 아니하고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그 책임을 지키도다 (수 22:3) 

지금 여호수아가 대면하여 이야기하는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지파만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가 오랫동안 가나안 정복을 위해 전쟁이라는 그 치열한 과정을 거쳐와야 했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전쟁의 시대가 끝나고 안정의 시대, 정착의 시대가 찾아왔습니다. 

이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미 말씀하신 대로 너희 형제에게 안식을 주셨으니
그런즉 이제 너희는 여호와의 종 모세가 요단 저쪽에서 너희에게 준 소유지로 가서 
너희의 장막으로 돌아가되 (수 22:4) 

가나안 정복을 위해 이스라엘은 오랜 시간 전쟁을 수행했습니다. 이제 전쟁이 끝나고 평화의 시대가 찾아왔습니다. 물론, 완벽한 평화는 아닙니다. 지파별로 가나안 땅을 완전히 차지하기 위한 국지전은 계속되었어요. 그러나 지금까지 모세의 시대, 나아가 여호수아의 시대에 펼쳤던 전면전은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전쟁의 시대였다면, 이제부터는 정착의 시대요 평화의 시대입니다. 

이 대목에서 한 사람이 어느 시점에 태어났는지에 따라 그의 운명이 달라진다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구약의 역사에서 어떤 이들은 광야에서 태어나 성장하였습니다. 그들은 모세를 따라 요단 동편을 점령하기 위해 전쟁을 치르고, 또한 여호수아를 따라 요단 서편을 점령하기 위해 치열한 전쟁의 시대를 살았습니다. 반면, 그들의 다음 세대는 본문에서 여호수아가 이야기하는 그 전쟁의 책임을 감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전 세대에 비해 한 지역에 편안히 정착할 수 있었고, 그곳에서 평화로운 시대를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왜 어떤 사람은 전쟁의 시대를 살아가고 또 어떤 사람은 평화의 시대를 살아가는지 답할 수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기 때문이지요. 

약 70여년 전 이 땅에서 벌어졌던 625 전쟁을 기억한다면,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전쟁의 시대라기보다는 평화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지금의 남과 북은 전쟁을 끝낸 종전이 아니라 전쟁을 쉬고 있는 휴전이지요. 그래서 625 전쟁 이후에도 크고 작은 무력충돌과 국지전이 계속 있어 왔습니다. 그러나 약 70여 년 전 이 땅의 모든 것을 파괴해버린 민족상잔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에 비교한다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분명 평화의 시대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다고 믿고 고백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전쟁의 시대를 살아가며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하였던 수많은 이들의 희생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며, 그 무엇보다 전쟁의 시대를 지나 안정과 평화의 시대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의 마음을 간직해야 할 것입니다. 


평화의 시대, 가장 중요한 과제

이제 가나안 정복을 위한 전쟁이 마쳤습니다. 그리고 이제 평화의 시대를 맞이했으니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이스라엘 내부에 잠재되어 있던 가장 큰 위험성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전쟁의 시대, 곧 이스라엘 12지파가 함께 힘을 합해 적군을 상대할 때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평화의 시대에는 직면할 수밖에 없었던 문제가 그들에게 놓여 있었습니다. 그 문제의 시작은 이스라엘이 지리적으로 동쪽과 서쪽으로 나뉘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가나안 땅은 요단 강과 사해를 기준으로 이스라엘은 동쪽과 서쪽으로 분명하게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그렇게 동쪽과 서쪽으로 분명히 나뉘어 있는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열 두 지파가 나누어 가지게 되었지요. 그래서 요단 동쪽에는 두 지파와 반지파가 정착하고, 나머지 아홉 지파와 반지 파는 요단 서편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요즘이야 강이나 바다가 있어도 그 위에 다리를 놓고 차도나 철도를 이용하여 얼마든지 왕래할 수 있지만, 여호수아 시대에는 요단강과 사해를 건너 다른 지역으로 이동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어요. 여러분, 여호수아 3장에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이 요단강을 건너는 장면을 기억하시지요? 하나님께서 베푸신 기적으로 요단강의 물이 멈추게 되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요단강을 건널 수 있었습니다. 그 정도로 요단강을 건넌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기적과도 같은 일이에요. 그런데 전쟁의 시대도 아니고 정착의 시대, 평화의 시대에 요단 동편에 정착한 두 지파와 반 지파가 요단 서편으로 건너올 일도 없거니와 요단 서편에 정착한 아홉 지파와 반 지파가 요단 동편으로 건너갈 일도 없겠지요.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 보면 요단 동편과 요단 서편이 서로 왕래를 하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정서적으로, 문화적으로 분리되지 않겠어요? 이러한 위험이 지금 평화의 때를 맞이하는 이스라엘 앞에 놓인 위험성이었습니다. 

625 전쟁이 끝나고 약 7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 우리 민족이 겪고 있는 아픔이 무엇입니까? 625 전쟁 이후, 남과 북은 크고 작은 국지전이 계속되었지만 온 한반도를 뒤덮었던 625 전쟁을 생각해본다면 지금 우리는 평화의 시대를 보내고 있지요. 그러나 평화의 시대를 보낸다고 하여 모든 문제가 사라진 것은 결코 아닙니다. 남과 북이 휴전선으로 나뉘어 있잖아요. 서로 왕래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산가족이 서로 만나지도 못하고, 전쟁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오신 분들이 고향 땅을 밟지도 못합니다. 이렇게 지리적으로 남과 북이 나뉘어 있으니, 시간이 흐를수록 정서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분단이 고착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이스라엘이 요단 강과 사해를 기준으로 동쪽과 서쪽이 서로 나뉘어 있는 문제는 단지 정서적으로 나뉘고, 문화적으로 괴리감이 생긴다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훨씬 더 치명적인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요단 동편에 정착한 르우벤 지파, 갓 지파, 므낫세 지파 사람들은 그 위험성을 직감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들이 하는 이야기 안에 그 위험성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말하거든요. 

우리가 목적이 있어서 주의하고 이같이 하였노라 
곧 생각하기를 
후일에 너희의 자손이 우리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희 르우벤 자손 갓 자손아 여호와께서 우리와 너희 사이에 요단으로 경계를 삼으셨나니
너희는 여호와께 받을 분깃이 없느니라 하여
여호와 경외하기를 그치게 할까 하여 (수 22:24-25) 

여러분, 지금 요단 동편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걱정은 결코 괜한 걱정이 아니었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당시에는 요단강을 건너 서로 왕래한다는 것이 매우 힘들었어요. 그런데 당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성소가 있는 장소로 가야 했습니다. 지금 우리 시대야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임재하시니 어디에서든 하나님을 영과 진리로 예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 시대에는 아니었어요.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장소, 곧 성소에 가야 제사를 드릴 수 있고 그곳에서만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소는 요단 동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요단 서편에 있거든요. 그러니 요단 동편에 정착해야 하는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 사람들이 걱정을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자신들이야 요단 동편에 정착을 해도 한평생 전쟁의 시대를 보내며 하나님을 섬겨왔으니 그 믿음이 변하지 않겠지요.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세대가 바뀌면 요단 동편에 거주한 지파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전쟁의 시대를 마감하고 평화의 시대를 맞이하는 요단 동편 지파 사람들의 큰 걱정거리였습니다. 

본문 여호수아 22장을 읽고 묵상하면서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가 했던 그 걱정이 실제로는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 한반도에서 현실이 된 것만 같아 안타까움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625 전쟁 이후, 남과 북은 휴전선이라는 경계를 사이에 두고 서로의 왕래가 멈추었지요. 이산가족이 서로를 만나지 못하는 아픔도 크고 시간은 흐르는데 그리운 고향 땅을 찾아가지 못하는 실향민들의 슬픔도 헤아리기 어려울 것입니다. 전쟁 후 70여년이 흐르면서, 남과 북은 문화도 다르고 생각하는 방식도 다르며 살아가는 모습도 참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전쟁 후 분단이 고착화되면서 우리 민족이 겪는 가장 큰 아픔은 남한과 북한에 있는 모든 성도들이 자유롭게 왕래하고, 자유롭게 교제하며 함께 모여 마음껏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다는 사실이 아닐까요? 남쪽에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당이 가득 차 있어요. 서울의 밤하늘은 십자가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휴전선 이북에는 십자가가 보이지 않아요. 

요단의 서편이든, 요단의 동편이든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참된 하나님 백성의 모습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민족도 38선 이북이든 38선 이남이든, 휴전선 이북이든 휴전선 이남이든 상관없이 우리 민족 모두가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요단 서편의 아홉지파와 반지파가 아무리 하나님께 온전한 제사를 드리며 율법에 순종하는 삶을 살더라도 요단 동편의 두 지파와 반지파가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에서 멀어진다면 그것이 온전한 하나님 백성의 모습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휴전선으로 나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남쪽에서 살아가는 우리만 아름다운 예배당에 함께 모여 마음껏 예배하고, 북녘의 동포들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 깊은 지하 교회로 숨어 들어가야 한다면 우리의 이러한 모습이 어찌 온전한 하나님 백성의 모습이 될 수 있겠습니까? 


여호와께서 하나님이 되시는 증거

요단 동편에 정착하였던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지파는 자신들의 후손이 너무도 걱정이 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요단 동편에 거주한다는 이유만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서 벗어나버릴 것 같은 두려움이었지요. 그리하여 그들은 요단강 가에 제단을 하나 쌓았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엣이라고 불렀지요. 여호수아 22장 마지막절은 그 제단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이 그 제단을 엣이라 불렀으니
우리 사이에 이 제단은 여호와께서 하나님이 되시는 증거라 함이었더라 (수 22:34) 

본문이 설명하듯이 ‘엣’이라는 이름은 ‘여호와께서 하나님이 되시는 증거’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본문 34절은 그 앞에 매우 중요한 표현을 첨가하고 있네요. “우리 사이에” 여기에서 우리는 구체적으로 누구를 말할까요? 요단 서편에 거주하는 이스라엘 지파와 요단 동편에 거주하는 이스라엘 지파를 모두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엣이라는 의미는 바로 이것이지요. 요단 서편에 거주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도 여호와께서 하나님이 되시고, 뿐만 아니라 요단 동편에 거주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도 여호와께서 하나님이 되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로 이것이 625전쟁을 기억하며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하나님은 휴전선 남쪽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하나님이 되시고, 하나님은 휴전선 북쪽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동포들에게도 하나님이 되십니다. 

요단 동편에 정착한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은 그들의 후손이 요단 동편에 거주하든지 요단 서편에 거주하든지 상관없이 이스라엘 열두 지파 모두에게 여호와께서 하나님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엣이라는 이름의 제단을 쌓았습니다. 바로 이 마음이 625 전쟁을 기억하며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우리의 마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요단 동편에 거주하는 지파들이 ‘엣’이라는 제단을 쌓으며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그 누구도 예외 없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기를 간절히 바랬던 그 마음으로 오늘 우리도 우리 민족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의 기도 가운데 응답하여 주셔서 우리 민족을 불쌍히 여겨 주시고, 휴전선 이남이든 휴전선 이북이든 이 땅 한반도에는 어디에서나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흘러넘치며 이 땅 한반도에서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참된 예배자들이 넘쳐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마침내 복음 안에서 남과 북이 통일되는 그날을 허락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절기설교 목록 (Contents)

[대림절] 시편 72편 11-17절 “만왕의 왕” 목회자로서 교인들의 가정을 심방하다 보면, 성도님들께 함께 기도하고 싶은 기도 제목을 질문하곤 합니다. 대부분은 가족을 위해, 자녀들을 위해 그리

hanjin0207.tistory.com

https://m.blog.naver.com/practicaltheologian/223221926910

 

기독교 역사에 빛나는 기도문 14 “에이브러햄 링컨” (미국 16대 대통령)

기도를 배우는 최고의 방법 가운데 하나는 훌륭한 기도를 본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인 &l...

blog.naver.com

 

반응형
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