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설교2021. 12. 19.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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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믿음을 설명하는 여러 비유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두 사람이 같은 비행기를 타고 멀리 여행을 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한 사람은 비행기를 처음 타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날아본다는 새로운 경험에 흥미도 있지만, 비행기를 이용하여 하늘을 나른다는 것이 어쩐지 불안하기만 합니다. 그는 비행기에 탑승할 때부터 비행기가 목적지에 도착하여 착륙할 때까지 늘 불안하고 긴장한 상태였습니다. 반면에 같은 비행기를 타고 있었던 또 한 명의 사람은 이미 여러 차례 비행기를 타고 먼 거리를 여행해본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그 마음에 있었지요. 그는 비행기에 탑승할 때부터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편안한 마음이었습니다. 이처럼 두 사람은 비행기에 대한 믿음, 비행기를 조종하는 조종사에 대한 신뢰가 전혀 달랐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제 답해보십시오. 비행기와 조종사에 대한 두 사람의 마음과 감정이 이처럼 정반대였다면, 그들의 마음과 감정에 따라 비행기 여행의 안전이 좌우될까요? 그럴 수 없지요. 비행기와 조종사를 완전히 신뢰하는 사람도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고, 설령 비행기와 조종사를 신뢰하지 못하여 불안해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결국에는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겠지요. 

매우 유사한 또 다른 이야기도 있습니다. 추운 겨울날 호수의 물이 얼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 호수의 물이 꽝꽝 얼어 있다고 생각한 나머지 그 호수 물에 뛰어들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런데 사실 호수의 물은 표면만 얼어 있는 살얼음이었습니다. 그 사람의 마음이 아무리 믿음과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더라도 살얼음은 순식간에 깨어지고 그 사람은 호숫물에 빠지고 말겠지요. 그 반대의 경우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추운 겨울날 호수의 물이 꽝꽝 얼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떤 사람이 지금 보이는 얼음이 살얼음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으로 조심조심 호수를 건너기 시작합니다. 그 사람의 마음이 비록 불안하고 불신으로 가득 차 있다 할지라도 호수의 물이 꽝꽝 얼어있기에 그는 호수에 빠지지 않고 무사히 건널 수가 있겠지요. 

지금까지 소개해드린 이야기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믿음에 대한 교훈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다고 말할 때, 우리가 얼마나 복음을 확신하는지 우리가 얼마나 복음을 신뢰하는지 곧 우리의 마음과 감정의 상태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믿고 신뢰하는 대상입니다. 믿음이 확고하고 그리하여 분명한 신뢰의 마음을 가지고 있더라도 믿음의 대상이 잘못되어 있다면, 살얼음을 꽝꽝 얼어 있는 얼음이라고 믿는 사람처럼 낭패를 당하고 맙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뢰하고 의지하는 믿음의 대상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사실이 변하지 않는다면 비행기와 조종사를 신뢰하지 못하여 불안해하는 마음을 품더라도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여행할 수 있는 것처럼, 호수의 얼음이 살얼음 일지 모른다고 불안한 마음을 품고 있더라도 무사히 호수를 건널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이나 감정과 상관없이 우리의 구원의 토대는 든든하고 확고하다는 사실입니다. 


신뢰가 무너진 시인의 기도

오늘 본문 시편 80편은 국가적인 위기 속에서 하나님께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달라고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시편 80편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분명한 확신과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드리는 기도라기보다 믿음이 흔들리고 확신이 흔들릴 때 하나님께 드린 기도라는 사실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시인의 눈 앞에 펼쳐진 현실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전통적인 믿음을 뒤 흔들기에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시편 80편 안에는 이스라엘을 포도나무에 비유하며 지금 그들이 처한 상황을 노래하는 장면이 꽤 길게 등장합니다. 그 가운데 한 두 가지 대목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주께서 어찌하여 그 담을 허시사 
길을 지나가는 모든 이들이 그것을 따게 하셨나이까 
숲 속의 멧돼지들이 상해하며 들짐승들이 먹나이다 (12-13절) 

시편 80편이 묘사하는 내용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본문 12절과 13절이 묘사하는 내용은 북이스라엘이 아람이나 앗수르제국에 의해 공격을 당하고 침략을 당하는 장면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북 이스라엘의 현재 형편은 주변국들의 침략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 이상입니다. 현재 이스라엘이 당한 현실을 가장 결정적으로 묘사하는 구절은 본문 16절입니다. 

그것이 불타고 베임을 당하며
주의 면책으로 말미암아 멸망하오니 (16절) 

북 이스라엘이 완전히 불에 타버렸습니다. 포도나무가 베임을 당하듯이 모든 주민이 앗수르 제국의 각 지역으로 강제 이주를 당했습니다. 북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분노로 말미암아 멸망하였습니다. 이것이 지금 시인의 눈앞에서 펼쳐지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은 시인을 비롯하여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을 뒤흔들기에 충분했습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전통적으로 두가지 확고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 하나는 신명기 언약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율법과 규례를 순종하면 복을 받는다는 믿음입니다. 물론 신명기 언약은 그 반대의 경우도 가르칩니다. 만일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거나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을 거역한다면 하나님의 저주와 분노가 임하게 되리라는 믿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간직하고 있었던 또 하나의 믿음은 다윗 언약으로 불리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결코 버리지 않으시리라는 믿음입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성전을 지어드리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약속을 주셨지요. 다윗의 왕조를 마지막까지 보존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이 약속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겠다는 믿음으로 이어졌습니다. 

앗수르 제국에 의해 북 이스라엘이 멸망하였고 북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는 완전히 불탔습니다. 그것이 지금 시인의 눈앞에서 펼쳐지는 현실입니다. 도저히 부인할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이 지금까지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던 이 두 가지 믿음이 그 기초부터 흔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상을 숭배하는 악인은 벌하시고 하나님을 섬기는 의인에게는 복을 주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우상을 숭배하는 저 악한 앗수르에 의해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 10개의 지파가 모두 멸망했잖아요. 그러니 신명기 언약이 가르치는 믿음에 대해 의심이 들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끝까지 버리지 않으실 줄 분명히 믿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10개 지파를 이렇게 이방인의 손에 던져주시니 다윗 언약으로 표현되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하는 거지요. 이처럼 사마리아 성이 점령당하고, 북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그 장면을 보며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이 흔들렸습니다. 그리고 지금 시편 80편을 노래하는 시인의 믿음도 흔들리고 있습니다. 지금 시인이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고 있지만, 그의 눈앞에 보이는 현실로 말미암아 그의 마음이 흔들리고 그의 믿음도 흔들리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하십니까? 지금 여러분의 마음과 감정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확신으로 가득 차 계십니까?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서 함께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지만,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서 예배하게 기도하고 있지만 시편 80편을 노래하였던 시인과 같이 지금 내 앞에 펼쳐지는 현실로 말미암아 나의 믿음의 흔들리고 나의 확신이 흔들리고 하나님을 향한 나의 신뢰가 흔들리고 계신 분은 안 계신가요? 그러나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분명한 사실이 무엇입니까? 시편 80편을 노래하였던 시인의 마음도 흔들렸고, 시편 80편을 읊조렸던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도 믿음이 흔들렸습니다. 그리고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마음도 나의 눈에 펼쳐지는 현실로 말미암아 마음이 흔들리고 믿음이 흔들릴 때가 많이 있어요. 그러나 성도 여러분, 괜찮습니다. 기독교의 믿음과 관련하여 너무도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이 무엇입니까? 사람의 마음과 감정의 상태보다 믿음의 대상이 훨씬 중요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흔들리고 여러분의 믿음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지금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고 바로 그 하나님께 예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를 구원하러 오소서 

시편 80편을 노래하는 시인이 자신의 눈 앞에 펼쳐진 현실을 바라보며 믿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그때 시인은 다시금 기도할 수 있는 힘을 내기 위해 지나온 과거를 회상하기 시작합니다. 

요셉을 양 떼 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여 귀를 기울이소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이여 빛을 비추소서 (1절) 

여기에 하나님을 묘사하는 두 가지 표현이 등장하네요. 그 첫 번째가 무엇입니까? “요셉을 양 떼 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입니다. 지금 시인은 목자와 양의 이미지로 하나님께서 출애굽을 통해 이스라엘을 인도하셨던 사건을 회상하는 장면입니다. 그러면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이”는 어떠한 표현일까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에서 생활할 때 그들의 한 중앙에는 성막이 있었습니다. 성막의 가장 중심에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를 모셨습니다. 바로 그 법궤에 두 개의 그룹이 조각되어 있었거든요. 그러므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하나님은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셨던 하나님에 대한 묘사입니다. 동일한 의미를 담고 있는 표현이 본문 2절에도 등장합니다.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 앞에서 
주의 능력을 나타내사 우리를 구원하러 오소서 (2절) 

여기에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 지파의 이름이 등장하지요.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생활할 때,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는 동서남북 사방으로 자리를 잡은 열두 지파의 정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한 곳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행진을 시작하면 열두 지파가 앞뒤로 하나의 긴 행렬을 만들어서 진행했습니다. 그러면 이때는 법궤가 어디에 위치했을까요? 앞에서 행진하는 여섯 개의 지파와 뒤에서 행진하는 여섯 개의 지파 그 사이에 법궤가 위치하였지요. 그리고 그 법궤를 중심으로 바로 뒤따라오는 지파가 오늘 본문 2절에 등장하는 에브라임, 므낫세, 베냐민 지파입니다. 그러니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 앞에서”라는 오늘의 표현은 출애굽 이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까지 인도하셨던 것처럼 이제도 우리를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여 달라는 기도입니다. 

시인의 눈 앞에 펼쳐진 현실은 이스라엘 10개 지파가 완전히 멸망해 버린 절망의 현장입니다. 아무리 주변을 둘러보아도 그 어디에서도 민족의 소망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바로 그때, 시인은 과거의 사건을 기억했던 것이지요. 애굽에서 종살이 하고 있던 이스라엘, 그 어디에서도 구원의 소망을 찾을 수 없었던 이스라엘, 바로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친히 찾아오셔서 그들을 구원해 주셨잖아요. 그리하여 시인은 2절의 마지막에 이렇게 기도합니다. “우리를 구원하러 오소서” 모든 것이 끝장난 것 같은 절망의 순간 하나님께서 친히 임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여 달라는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그런데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이 기도는 확신에 찬 기도라기보다는 믿음이 흔들릴 때 드린 기도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인간의 마음이나 감정의 상태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믿음의 대상이지요. 시인은 ‘주여, 우리를 구원하러 오소서’라고 기도했지만 그의 믿음은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의 상태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의 기도 가운데 하나님께서 응답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대림절을 보내며 오늘 본문 시편 80편을 읽곤 하였습니다. 교회가 대림절 기간에 시편 80편을 읽는 이유는 아주 단순합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것처럼 본문 시편 80편에는 주님의 오심을 간절히 기도하는 내용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시편 80편을 노래하였던 시인은 눈앞에 펼쳐진 현실로 말미암아 그의 믿음이 흔들리고 있었지만, 시인이 기도하며 간구하였던 것처럼 이 세상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셨고 우리 인간의 구원을 완성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눈 앞에 펼쳐진 현실로 말미암아 굳건하게 지키고 있던 하나님에 대한 여러분의 믿음이 흔들리고 계십니까? 주님께서 나의 인생에 찾아오셔서 구원의 역사를 펼치시기를 기다리지만 그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하여 가슴 답답하신 분들이 계신가요? 하나님의 임재를 아무리 기다려도, 내 인생에 주님께서 찾아오시는 성탄절이 오지 않아 여전히 기다림의 절기인 대림절만 계속되는 분이 계신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한 가지 사실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지금 여러분의 마음이 흔들리고 그래서 여러분의 믿음이 흔들려도 기다림의 절기인 대림절이 지나면 반드시 성탄절은 오게 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때로는 여러분의 마음이 흔들리고, 여러분의 믿음이 흔들려도 하나님의 손길을 기다리는 여러분의 삶 속에서도 우리 주님께서 반드시 찾아오십니다. 


우리를 돌이키시고

시편 80편에서 시인이 간절히 원하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시편 80편이 계속 노래하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본문 3절에는 그 반대의 방향도 등장합니다.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빛을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 (3절) 

본문 3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여기에서 돌이키는 주체는 누구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돌이키게 해달라는 기도이니, 본문 3절에서 돌이키는 주체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인간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오시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래야 우리 인간에게 구원의 가능성이 열립니다. 마치, 비행기를 탑승하는 사람의 마음이나 감정의 상태와 상관없이 그 비행기에 결함이 없고 그 비행기의 조종사가 잘 훈련을 받은 베테랑이라면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여행을 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마치, 겨울의 강추위로 꽝꽝 얼어버린 호수 위를 건너는 사람의 마음과 감정의 상태와 상관없이 그 얼음의 강도가 안전을 보장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감정의 상태와 상관없이 주님께서 아기 예수님의 모습으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는 성탄의 진리가 우리에게 결코 흔들리지 않는 구원의 토대가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에게도 필요한 역할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실 때, 우리도 우리의 마음을 돌이켜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마치 비행기와 조종사에 대해 불안한 마음이 있더라도 원하는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가려면 비행기에 탑승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내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해도 나의 두 다리로 얼어있는 호수 위를 걸어서 건너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눈 앞에 펼쳐진 현실이 너무도 절망적이고 도저히 하나님의 손길이 보이지 않아 여러분의 믿음이 흔들리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 괜찮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흔들리는 것, 그것도 괜찮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흔들리고 여러분의 믿음이 흔들리는 것까지는 괜찮아요. 그러나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이 흔들리고 여러분의 믿음이 흔들린다고 믿음의 여정을 걸어가는 여러분의 발걸음까지 멈추어 버리면 안 됩니다. 불안한 마음, 초조한 마음, 믿음이 흔들리는 마음이 여러분에게 찾아올지라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믿음의 걸음을 계속 내딛으십시오. 대림절이 지나면 반드시 성탄절이 찾아오듯, 오늘도 묵묵히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여러분의 삶에 우리 주님께서 깊숙이 찾아오시는 그날은 반드시 오게 될 것입니다. 

지금 나의 마음과 감정은 요동치고 흔들릴 수 있지만, 
이 땅에 구원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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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