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2022. 4. 3.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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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내일에 대한 희망을 품고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지금 고단하고 힘겨운 일이 있더라도 내일에 대한 소망이 있으면 우리는 기쁨으로 하루를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편안하고 크게 부족한 것이 없더라도 내일에 대한 희망이 사라진다면 우리는 절망하고 괴로워하게 되지요. 우리 시대 젊은 청년들의 삶이 더욱 팍팍해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많은 이유를 제시할 수 있지만, 그 중심에는 내일에 대한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젊은 시절 열심히 노력하고 최선을 다하면 시간이 흐를수록 밝은 미래가 보장되기를 원하는데, 우리 사회는 그렇지 않다는 인식입니다. 어떤 이들은 은수저나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는데 어떤 이들은 흙수저를 물고 태어났으니, 지금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이러한 차이를 극복하기 어려운 현실 앞에서 많은 청년들은 내일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젊은 청년만이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내일에 대한 희망을 간직할 때 오늘을 활기차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지금 나의 삶에 큰 어려움과 괴로움이 찾아오더라도 내일에 대한 소망이 있다면 그 모든 과정을 참고 인내할 수 있지요. 그래서 사도 바울의 편지를 보면 “소망의 인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이처럼 내일을 바라보며 참된 희망을 품을 수 있다는 것은 오늘 우리의 삶을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됩니다. 

기독교 신학자 가운데 희망을 노래하였던 유명한 사람이 있습니다. 위르겐 몰트만이라는 독일의 신학자입니다. 그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주었던 대표적인 저서가 『희망의 신학』입니다. 위르겐 몰트만은 그의 저서 『희망의 신학』에서 희망을 낙관과 구분하여 설명합니다. 희망이나 낙관은 내일에 대한 긍정적인 전망이라는 측면에서 유사해 보이지요. 그러나 몰트만은 희망과 낙관이 전혀 다르다고 강조합니다. 그가 이야기하는 낙관은 과거나 현재에 이미 잠재되어 있다가 미래에 나타나는 좋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지금 나의 모습이나 우리 사회의 형편을 주도면밀하게 살펴보면 자연스러운 결과로 내일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을 때, 미래가 낙관적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제 시작된 4월 한 달 여러분의 삶은 낙관적이신가요? 여전히 9개월이 남아있는 올해의 남은 시간을 생각할 때 여러분의 미래는 낙관적이십니까? 지금 여러분이 살아가는 방식이 이대로 지속되기만 하면 일 년 뒤, 오 년 뒤, 혹은 십 년 뒤에 마주하게 될 여러분의 미래를 낙관하실 수 있으십니까? 

희망은 내일에 대한 긍정적인 전망이라는 점에서 낙관과 유사합니다. 그러나 위르겐 몰트만은 희망과 낙관이 전혀 다른 개념이라고 설명합니다. 낙관이 과거나 현재에 잠재되어 있다가 미래에 좋은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라면, 희망은 현재 내재되어 있는 요소들로는 내일에 대한 낙관이 불가능할 때, 지금의 모습에만 집중한다면 낙심할 수밖에 없을 그때 외부로부터, 즉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좋은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나이가 많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아들을 낳을 수 있으리라는 낙관적인 전망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아들이 태어날 것이라고 약속하시며 미래의 희망을 주십니다. 애굽애굽 땅에서 종살이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으리라는 낙관적인 전망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를 불러 출애굽을 선포하시고 민족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불어넣어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장면을 바라보며 그 누구도 십자가에 달린 무기력한 사형수가 온 인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리라고 낙관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절망의 순간에 예수님을 다시 살리셔서 영생에 대한 희망을 우리에게 선사하셨지요. 바로 이것이 기독교가 선포하는 희망입니다. 


내가 새 일을 행하리라

오늘 본문 이사야 43장이 선포되었을 때 유대인들은 바벨론에 포로민으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들에게는 조상 적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곧 출애굽의 이야기였지요. 그 옛날 모세 시대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종살이하던 애굽 땅에서 이끌어내셨다는 이야기는 유대인이라면 어린 시절부터 귀가 따갑도록 들었던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출애굽의 이야기에 빗대어 생각한다면 지금 바벨론에서 포로로 살아가는 유대인들도 하나님께서 자유의 몸이 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리라 기대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바벨론에서 포로민으로 살아가던 당시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출애굽의 이야기는 너무도 먼 옛날의 이야기였어요. 지금 이사야 43장이 선포되었던 때를 기준으로 모세 시대에 있었던 출애굽의 사건은 천 년도 더 이전에 있었던 사건이거든요. 너무도 많이 들었지만 그만큼 포로민으로 살아가는 그들에게는 피부에 와닿지 않는 이야기였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비교적 최근에 일어난 일, 그래서 그들의 피부에 와닿는 이야기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 가운데 대부분을 차지하였던 열 지파에게 일어난 일이었지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였던 이스라엘의 열 지파, 곧 북이스라엘이 앗수르 제국에 의해 멸망하였는데 앗수르의 민족혼합정책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라는 정체성을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거든요. 출애굽이라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너무도 멀어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북 이스라엘의 멸망과 앗수르 제국의 민족혼합정책은 너무도 명백하게 그들의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또 다른 제국 바벨론의 포로민으로 잡혀 있는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지금 자신들의 형편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내일에 대한 긍정적인 낙관이 불가능했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에 대해 이렇게 소개합니다.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15절) 

여기에서 특징적인 표현이 하나 등장합니다. “이스라엘의 창조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자라고 말할 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대상은 무엇입니까? 온 우주 만물입니다. 그래서 흔히 하나님을 묘사하면서 만물의 창조자라고 말합니다. 한편, 이스라엘을 위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그들을 자유의 몸으로 이끌어주셨지요. 시내산에서 그들과 언약을 맺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셨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을 구원하셨고 그들을 구속하여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흔히 이스라엘 백성과 관련하여 하나님을 묘사하면 이스라엘의 구원자 혹은 이스라엘의 구속자라고 말하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이 두 가지 개념이 함께 모여서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창조자’라고 묘사하네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창조자라는 묘사에는 어떠한 의미가 담겨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주시고 구속하여 주신 사건은 마치 창조의 역사와 같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창조는 없는 것을 만드는 일입니다. 무에서 유를 만드는 것이 창조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창조자’가 되신다는 의미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과거와의 연속성이나 어떠한 인과관계로 설명할 수 없는 완전히 새로운 일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유대인들을 바벨론에서 이끌어 내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그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오래 전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셨던 출애굽의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요소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출애굽 직후에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를 마른땅처럼 건넜지요. 그런데 본문 1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다 가운데에 길을, 큰 물 가운데에 지름길을 내고” 계속해서 17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널 때 그들을 뒤쫓아오던 애굽의 군대를 바닷물로 물리쳐주신 장면을 떠오르게 합니다. “병거와 말과 군대의 용사를 이끌어 내어 그들이 일시에 엎드러져 일어나지 못하고 소멸하기를 꺼져가는 등불 같게 하였느니라”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생활할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물이 흐르게 하셔서 그들의 목마름을 해갈해 주셨지요. 그 장면은 20절에 등장합니다.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이처럼 바벨론에서 자유의 몸으로 나오게 되는 출바벨론을 예언하는 오늘 본문은 예전의 출애굽을 연상시키는 묘사가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 바벨론에서 포로민으로 살아가는 유대인들이 내일에 대해 낙관할 수 있는 이유는 과거에 있었던 출애굽의 사건일까요? 과거에 출애굽을 경험했던 민족이니 이후에도 바벨론에서 자유의 몸으로 벗어날 수 있으리라고 내일을 낙관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지금 유대인들에게 출애굽의 사건은 약 천년도 더 넘게 지난 까마득한 과거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18-19a절) 

성도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구원은 언제나 새로운 역사이고, 하나님께서 새롭게 행하시는 창조의 역사입니다. 

우리는 약 이천 년전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도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늘었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매년 사순절, 고난 주간, 그리고 부활절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벨론의 포로민으로 살아가는 유대인들에게 출애굽의 역사는 너무 먼 과거의 이야기일 뿐이요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예루살렘의 멸망은 너무도 분명한 현실이기에 지금의 현실을 아무리 되돌아보아도 내일을 낙관할 수 없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매년 반복되는 식상한 이야기요 지금 나의 현실은 내일에 대한 그 어떠한 낙관적인 전망도 불가능하여 소망을 잃어버리고 희망이 사라져 버린 채 살아가고 있지는 않으신가요? 그러한 우리의 심령에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도 바로 이것입니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희망을 간직한 사람들의 자세

하나님은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던 유대인들에게 새 일을 행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동일하신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새로운 구원의 역사를 펼치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마음에 내일에 대한 낙관이 아니라 내일에 대한 희망을 던져주지요. 그런데 새 일을 행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명령형으로 시작하네요. 그 명령이 무엇입니까?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이 명령은 새 일을 행하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 마음에 참된 소망을 품은 신앙인들이 마땅히 취해야 할 삶의 자세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과거의 일에 얽매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대신 내일에 대해 열린 마음을 품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십니까? 이스라엘의 창조자이십니다. 곧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삶을 날마다 새롭게 창조하시는 분이시지요. 동일한 원리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어떠한 능력을 발휘합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날마다 새롭게 창조하는 능력을 발휘합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약속하십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성도 여러분, 이 말씀을 믿으십니까? 이제 시작된 4월 한 달 동안 여러분의 삶 속에도 하나님께서 새 일을 행하시리라고 믿으시나요? 앞으로 남은 2022년의 9개월도 하나님께서 새로운 일을 여러분에게 보이실 것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처럼 이전 일을 기억하지도 말고 옛날 일은 생각하지도 마십시오. 모든 복잡한 생각을 던져버리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을 끊어버리십시오. 여러분의 생각을 지나치게 신뢰하지도 마시고, 여러분의 계획을 끝까지 밀고 나가지도 마십시오. 그 대신 여러분의 삶에 새 일을 행하실 하나님을 기대하며 하나님께서 무엇을 행하시든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린 마음을 가지십시오. 이것이 이스라엘의 창조자이신 하나님께서 오늘도 나의 삶에 새 일을 행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성도들의 마땅한 자세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새 일을 행하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 말씀을 믿는 사람은 과거의 일에 얽매이지 말고 내일에 대해 열린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의 이 약속을 믿는 사람들이 마땅히 취해야 할 또 하나의 자세가 등장하는데, 그것은 찬송입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21절)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새 일을 행하셨을 때, 그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고 하나님을 찬송하였던 많은 노래들이 등장합니다. 홍해를 건넌 뒤 이스라엘 백성과 미리암이 불렀던 찬양이 그렇지요. 모든 대적으로부터 하나님께서 다윗을 건져주셨을 때 다윗이 하나님께 감사하며 불렀던 찬양도 그 예가 됩니다.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던 유대인들이 오늘 본문의 약속처럼 자유인이 되어 예루살렘에 돌아오게 되었을 때 그들은 감사와 감격의 마음으로 시편 126편을 노래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모든 예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새 일을 직접 체험한 뒤에 자연스러운 반응으로 터져 나온 찬양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21절이 이야기하는 찬송은 조금 다릅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지금 유대인들은 여전히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처지와 형편을 객관적으로 분석한다면 내일에 대해 낙관적인 전망을 내어 놓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바로 그때에 하나님은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 하나님 백성의 마땅한 자세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본문 21절의 찬송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새 일을 체험하였기에 부르는 찬송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을 소망하면서 부르는 찬송이요 하나님께서 새 일을 행하실 것을 믿기에 그 마음에 희망을 품고 부르는 찬송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이 부르시는 찬양은 어느 쪽에 가까우십니까? 하나님께서 나의 삶에 새 일을 행하시는 현장을 체험하였다면 당연히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그때는 옆에서 누가 찬양을 부르라고 권면하지 않아도 모두가 기쁨으로 찬양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하나님께서 행하실 새 일이 나의 삶에 나타나지 않아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지 못하고 계신 분이 계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참된 희망을 부어주시기 바랍니다. 지금의 현실은 내일에 대한 낙관을 불가능하게 만들지라도, “보라 내가 이제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말씀하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마음에는 희망이 넘쳐나고 여러분의 입술에는 찬송이 흘러나오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아니하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그 하신 말씀, ‘내가 이제 새 일을 행하리라’는 이 말씀을 
반드시 실행하여 주실 것입니다. (cf. 민 2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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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