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2022. 9. 11.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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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과 청각의 장애를 딛고 일어서 교육자요 또한 사회 운동가로 활동하였던 헬렌 켈러(Hellen Keller)가 진정한 행복의 조건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진정한 행복의 조건이 무엇인지 오해하는 사람이 많다. 
진정한 행복은 자기만족을 통해서가 아니라 
가치 있는 목적에 헌신할 때 찾아온다. 

헬렌 켈러가 이야기했던 “가치 있는 목적에 대한 헌신”을 기독교에서는 사명이라고 부르지요. 곧, 사명을 위하 살아가는 인생이 진정으로 행복한 삶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소명>이라는 책의 저자로 유명한 오스 기니스는 그의 책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 사회에 대해 이렇게 진단했습니다. 

인류 역사상 존재했던 수많은 문명 가운데 
현대 서구 문명은 인생의 목적에 관해 합의된 대답이 없는 최초의 문명이다. 
현대인의 고민은 너무나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지만 
삶의 목적은 너무나 빈약하다는 것이다.

헬렌 켈러의 이야기와 오스 기니스의 이야기를 종합하면 이렇게 되지요. 진정한 행복은 가치 있는 목적에 헌신할 때 찾아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는 인생의 참된 목적이 무엇인지 알려주지 않는다는 사실이지요. 자연스러운 결과로, 현대인들은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지만 삶의 참된 목적은 너무도 빈약하니 그 어떠한 소유나 그 어떠한 성취로도 진정한 행복을 누리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풍성한 은혜가 있다면,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에게 사명을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사명의 은혜

오늘 본문 디모데전서는 바울의 후기서신으로 구분합니다. 바울이 많은 서신서를 기록하였는데 디모데전서는 그 저술 시기가 다른 서신서들보다 늦게 쓰였기 때문이지요.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바울은 이미 1차, 2차, 3차 전도여행을 모두 마쳤습니다. 지금까지 사도로서 그리고 선교사로서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목양했던 바울이 이제 자신을 이어 교회를 목양해야 하는 디모데에게 어떠한 자세로 그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지를 편지로 기록해준 것이 디모데전서입니다. 그러니 바울의 생애에 있어 디모데전서는 그의 노년 시기, 그것도 자신의 사역을 마무리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하기 위한 준비를 하던 시기에 기록된 서신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는 노년의 바울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회상하는 장면이 담겨 있습니다. 

이제는 노년이 되어 지난 자신의 삶과 자신의 사역을 되돌아보던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 12절이 이렇게 시작하잖아요.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12b절) 

바울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사도라는 직분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도가 되어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주셨기 때문이지요. 직분이나 사명은 성도들이 충성스럽게 감당해야 하는 역할을 말합니다. 그런 점에서 직분이나 사명은 감사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나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힘들 때도 많고 그만두고 싶을 때도 많지만 끝까지 하나님께서 주신 직분과 사명을 감당하는 경우가 있지요. 그러니 직분이나 사명은 감사의 결과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직분이나 사명은 감사한 마음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직분이나 사명 자체가 감사의 중요한 이유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왜 그렇습니까? 헬렌 켈러가 이미 이야기했잖아요. 진정한 행복은 자기만족을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행복은 가치 있는 목적, 곧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직분과 사명에 헌신할 때 찾아옵니다. 그러니 인생의 참된 목적을 잃어버린 우리 시대에 하나님께서 여전히 우리에게 직분을 주시고 사명을 주신다는 사실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요 감사의 이유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사도 바울이 직분과 사명을 주시는 하나님께 크게 감사하는 또 다른 이유가 등장합니다. 곧,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귀한 사명이 주어질 이유나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12절을 다시 보십시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그 다음을 주목하십시오. “나를 충성되이 여겨” 충성되이 여긴다는 것은 충성스럽다는 것과 다른 말이지요. 바울은 충성스러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충성스럽게 여겨주시니 은혜입니다. 마치, 우리는 의인이 아닙니다.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성인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의롭게 여겨주십니다. 우리를 거룩한 성인으로, 곧 성인들의 모임인 성도로 우리를 불러주십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충성스러운 사람이 아닌데 하나님께서 충성스럽게 여겨 직분과 사명을 맡겨주시니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보다 자세히 설명합니다.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13절) 

어떤 분들은 이 구절을 읽으면서도 바울에게 사도의 직분과 사명이 주어질 만한 어떤 자격이나 조건을 찾으려고 노력하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본문 13절에서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에 주목하지요. 무지할 때에는 비방자와 박해자로 살았지만, 복음의 진리를 깨달은 뒤로는 충성스럽게 사도의 직분을 감당했다는 해석입니다. 그러나 본문 13절에서 우리가 더욱 주목해야 할 구절은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가 아니라 “긍휼은 입은 것은”입니다. 긍휼이 무엇입니까? 도저히 희망이 없는 이들을 향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지요. 바울은 복음에 대한 비방자로 살았습니다. 기독교에 대한 박해자로 살았습니다. 성도들을 향해 폭행을 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바울을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겨주셔서, 그 모든 죄악도 그저 모르고 한 것이 아니냐고 애써 덮어주셨다는 말씀이지요. 그래서 바울은 자신을 불러 직분과 사명을 맡겨주신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었어요.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14절)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감사 제목은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할만큼 풍족하지는 않아도 근근이 살아갈 수 있도록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께 우리는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가족을 허락하여 주셔서 그 안에서 사랑과 위로를 경험하게 하시니 감사하지요. 우리에게 출석할 수 있는 교회를 허락하여 주시고 다른 성도들과 함께 신앙생활을 영위하게 하시니 감사를 드리지요. 그러나 여러분, 그에 못지않게 우리가 반드시 기억하고 감사해야 할 이유가 있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직분을 주시고 사명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성도로 집사로 권사로 혹은 장로로 부르심을 받으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직분과 그에 따르는 사명을 주신 것은 한이 없으신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에게는 그와 같은 직분과 사명을 받을 자격이 조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를 충성스럽게 여겨 직분과 사명을 주셨으니 우리는 그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구원의 은혜

노년의 바울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니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던 자신에게 사도라는 귀한 직분과 사명을 맡겨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일생에 변함없이 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다보니, 당시 교회 안에 회자되던 하나의 격언이 생각났습니다. 그 격언이 오늘 본문 15절에 등장합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15절) 

15절이 어떻게 시작합니까?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당시 초대 교회 안에 성도들이 자주 인용하였던 격언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격언은 참으로 진리의 말씀이었고,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는 말씀이었다는 의미지요. 그러면 당시 교회에서 회자되었던 격언이 무엇입니까? 15절 중간에 등장하네요.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그런데 여러분, 바울이 지금 인용하는 격언은 바로 위에서 바울이 이야기했던 감사의 이유와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바울은 무엇에 대해 감사했습니까? 자신에게 직분을 주신 것, 자신에게 사명을 맡겨주신 일에 감사했습니다. 반면에 바울이 인용하는 격언은 무엇을 이야기합니까? 구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라는 말씀이잖아요. 계속되는 16절도 마찬가지로 구원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됩니다.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16절) 

이미 노년이 된 바울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자신을 사도로 불러주시고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지요. 한 마디로 사명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그 사명의 은혜를 깊이 헤아려보니 또 하나의 은혜가 떠오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죄인이었던 나를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아 구속해주신 구원의 은혜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미 노년이 된 바울이 자신의 삶을 깊이 돌아보며 자신의 한평생을 온전히 사로잡았던 하나님의 두 가지 은혜를 깨달았습니다. 곧 구원의 은혜 그리고 사명의 은혜입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돌이켜보면 돌이켜볼수록 이 두 가지 은혜가 바울 자신의 삶에 가득하였기에 그는 오늘 본문의 마지막 절을 말로 다 할 수 없는 찬양으로 마무리합니다.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17절)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당시 초대교회에는 성도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하나의 격언이 있었습니다. 본문 15절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라는 말씀이지요. 그러므로 이 말씀은 바울이 처음으로 기록한 말씀이 아니라, 초대교회 성도들 사이에서 구전으로 회자되고 있던 말씀이었고, 아마도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으로부터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을 부르시는데 마태라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서 자신의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다 아시는 것처럼 당시 세리는 죄인들의 대명사였습니다.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던 시대적 상황에서 로마의 앞잡이가 되어 동포들에게 세금을 걷고 그 과정에서 징수한 세금의 많은 몫을 자신의 주머니에 챙겼던 세리는 모든 유대인들이 싫어하는 가장 대표적인 죄인이었습니다. 만일 지옥의 가장 뜨거운 불길이 타오르는 자리에 들어가야 할 사람이 있다면, 당시 유대인들은 당연히 남자들 중에는 세리요 여자들 중에는 창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세관에서 세리의 일을 하고 있는 마태를 예수님께서 직접 찾아가셔서 불러주십니다. 그리고 마태의 집에 들어가셔서 함께 식사를 나누십니다. 그러자 모두가 예상할 수 있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행동을 비난하기 시작했지요.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고 따지기 시작했어요. 여러분, 이 장면을 마태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십시오. 마태는 세리라는 직업을 갖게 된 후부터 주변의 사람들로부터 줄곧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자신을 제자로 불러주시고 자신의 집에 들어와 식사를 하시는 것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 비난을 받고 계세요. 마태의 입장에서 그 장면이 얼마나 불편하고 얼마나 죄송했을까요? 그렇게 가시방석에 앉아 어찌할지를 몰랐던 마태의 귀에 예수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셨거든요.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마 9:12-13)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와 목적이 무엇입니까?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마태는 자신의 귓가에 들렸던 예수님의 이 말씀을 결코 잊을 수가 없었어요. 비록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했을지 몰라도, 그 자리에서 함께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마태의 마음에는 이 말씀이 깊이 각인되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너는 죄인인데, 너는 지옥의 가장 뜨거운 불길이 타오르는 자리에 들어가야 하는 세리인데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될 수 있겠느냐고 비난할 때마다 사람들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날마다 되새기지 않았을까요?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이후 바울이 사도가 되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할 때마다 그의 발목을 붙잡는 비난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비방하고 교회를 박해했던 사람이라고, 너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라”는 비난이었지요. 그때마다 바울의 마음을 다시 일으켜주는 말씀이 있었으니,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가치 있는 목적에 헌신하며 살아가는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직분과 사명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의 발목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걸림돌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와 더불어 사명의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물론, 우리에게는 구원의 은혜도, 그리고 사명의 은혜도 받을 자격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죄인을 불러 구원하시려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지금도 우리를 충성되이 여겨 사명을 맡겨 주시니, 다시 일어나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위해 달려가십시오. 그렇게 주변의 목소리가 아니라 지금도 우리의 마음에 들려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따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따라 달려갈 때, 헬렌 켈러가 이야기했던 그 진정한 행복, 곧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목적인 하나님의 사명을 위해 살아가는 그 풍성한 행복이 사도 마태나 사도 바울만이 아니라 여러분의 삶에도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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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