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강해2018. 2. 26.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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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78편은 시편 전체에서 두번째로 긴 시편입니다. 시편 78편이 이렇게 길게 노래하고 있는 내용은 이스라엘의 역사입니다. 모든 역사가 그러하듯이 단순히 과거에 있었던 사건을 나열하고 서술하는 것 자체에 그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시편 78편은 과거의 기억을 길게 서술하면서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역사를 통한 교훈을 얻으라고 권면합니다. 시편 78편의 표제어가 아삽의 마스길인데, 마스길이라는 단어의 뜻은 교훈이지요. 그런 점에서 시편 78편은 역사를 통한 교훈을 담고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바쁜 일상을 살다 보면 과거를 돌아보거나 미래를 내다보지 못한 채 그저 하루하루 주어진 삶을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살고 최선을 다하다가 어느 순간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돌아보았을 때 허송 세월하였음에 한탄하는 경우도 있지요. 지금도 나에게 주어진 현실에 매몰되어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편 78편은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과거를 돌아보라고, 과거를 통해 미래를 내다보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묵상할 때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열어 과거의 사건들로 말미암아 교훈을 얻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토로하며 기도할 때 성령께서 우리의 심령에 역사를 통한 교훈으로 말미암은 미래의 소망을 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시편 78편이 역사를 통해 던져주는 교훈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 경고와 소망입니다.[1] 먼저 경고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돌아보면 그들은 언제나 하나님께 반역하였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신뢰가 부족하였고 그 결과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숭배하였지요. 인간의 본성이 얼마나 악한 지 하나님께서 그들을 은혜와 사랑으로 감싸 안으셨지만 그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품을 벗어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그 종 되었던 애굽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셨습니다. 인류 역사를 통해 바라보건데 이스라엘만큼 하나님의 구원을 이처럼 누렸던 민족은 없습니다. 그런데 출애굽이라는 그 위대한 구원의 사건을 경험했던 그들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도 전에 목이 마르다고 먹을 양식이 없다고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였고 불평을 쏟아놓았지요. 시편 78편은 그 장면을 회상하며 이스라엘 백성이 지존자를 배반하였도다라고 서술합니다(17).

그 뿐만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배신하였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그들을 용서하여 주십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지요. 하나님은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을 주셨고 그들은 그곳에서 번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만을 섬기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마땅하지요. 그러나 그들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섬겼습니다. 바로 이 장면을 시편 78편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들의 조상들 같이 배반하고 거짓을 행하여 속이는 활 같이 빗나갔도다”(57) 화살이 과녁을 빗나가듯 그들의 행동은 바른 길에서 벗어났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을 정직하게 돌아보십시오. 우리의 지나온 삶을 정직하게 바라볼 수 있다면,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았음에도 여전히 하나님을 거역하고 배반했던 이스라엘의 모습이 곧 우리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역사를 통해 얻는 첫번째 교훈, 그것은 경고입니다. 날마다 우리의 마음을 쳐 복종시키지 않는다면 우리는 오늘도 넘어질 수 밖에 없는 연약한 인생이라는 깨달음이지요.

 

역사를 통한 교훈, 그 첫번째는 경고입니다. 그러나 두번째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미래에 대한 소망이지요. 시편 78편 전체는 인간의 불순종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 이 두 가지의 팽팽한 긴장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시편 78편 전체를 읽어보면 마치 시소를 타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하나님의 긍휼, 그러나 인간의 불순종. 또 다시 하나님의 구원, 그러나 인간의 배신. 다시 한번 하나님의 긍휼, 그러나 인간의 불신앙. 이 두 가지가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그 사건들의 부분만 바라보면 우리 인생의 결론이 인간의 불순종으로 끝나는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긍휼로 끝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시편 78편을 전체적으로 그려본다면, 아니 신구약 성경 전체를 하나의 그림으로 그려본다면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하심이 인간의 불순종과 불신앙을 넉넉히 감싸안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마치, 모자이크를 수놓는 과정과 같습니다. 나의 인생에 하나님을 향한 불순종이라는 조각을 놓았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받아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 옆에 덧붙여져요. 이제는 바른 신앙의 모습만 붙여넣고 싶지만 그렇게 안되요. 그래서 또 다시 탐욕, 죄악, 미움, 시기, 교만 등 돌이켜 보면 너무도 부끄러운 조각을 나의 인생 여정에 계속해서 붙여넣고 있어요.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용서, 관용, 사랑, 은혜의 조각을 더하여 주시지요. 그 부분 부분만 바라본다면 과연 나의 죄악된 모습이 더 많은 지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더 많은 지 알 수 없어요. 이 두 가지가 끊임 없이 싸우는 것처럼 보여요. 그러나 어느 순간 우리의 인생 전체를 되돌아보게 된다면 수많은 모자이크 조각은 우리의 인생을 변함없는 사랑으로 붙잡고 계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 8:28)

 

여러분, 바쁜 일상의 삶을 잠시 내려놓고 우리의 지나온 과거를 돌이켜보십시오. 그리하여 역사의 교훈을 얻으십시오. 나의 죄악된 본성을 깨달아 주님 앞에 거룩하게 서기 위해 더욱 노력하십시오. 아울러, 우리의 인생을 최고의 선으로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희망을 품고 내일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 Walter Brueggemann, William H. Bellinger, Jr., Psalms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4), 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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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시편 강해2018. 2. 22.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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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22편은 예루살렘 성전에 오르는 사람들의 기쁨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1)

 

누군가 시편의 저자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곧 이제 정해진 절기가 다가오고 있으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야 한다고 말했다는 것이지요.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들은 매년 세번씩 정해진 절기에 따라 예루살렘 성전에 가야합니다. 이것은 명령이고,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의 의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편의 저자는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명령하신 계명을 따라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는 것이 자신에게 큰 기쁨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교회에 출석하는 것이 기쁨이십니까? 교회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여러분의 삶에 행복이신가요? 신앙생활을 처음 할 때, 혹은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히 누릴 때는 내가 예배당에 앉아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이 큰 기쁨이었어요. 그때는 성도들과 교제하는 것이 나에게 풍성한 행복이 되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교회의 예배와 모임에 참석하는 것이 기쁨이라기보다는 그저 성도의 의무로만 느껴진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점점 더 우리에게 무거운 짐이 되고 말 것입니다.

 

시편의 저자가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는 것을 이토록 기뻐하였던 이유가 있습니다.

 

예루살렘아 너는 잘 짜여진 성읍과 같이 건설되었도다 (3)

 

3절의 말씀이 다윗이 예루살렘을 수도로 건설하고 솔로몬이 그 중심에 성전을 건축하였다는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보다 가능성이 높은 해석은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입니다. 다윗과 솔로몬 때에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수도로 건설되었습니다. 그 중심에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전이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그 아름다웠던 예루살렘은 바벨론 군대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되었습니다. 70년이라는 오랜 세월 예루살렘은 그대로 방치되었죠. 그리고 하나님의 때가 되어 스룹바벨과 예수아의 지도로 예루살렘 성전이 건축되었습니다. 나아가 느헤미야의 지도력 아래에 예루살렘 성벽이 건축되었지요. 스룹바벨과 예수아가 건축한 예루살렘 성전은 예루살렘에 처음 세워진 성전, 곧 솔로몬이 건축했던 성전에 비하면 초라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성전의 규모나, 성전의 화려함이나, 성전을 건축하는데 사용된 자재나, 그 어떠한 것도 솔로몬이 세웠던 성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습니다. 느헤미야가 성벽을 재건하였지만 예루살렘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옛 영광을 단 한 번도 되찾아 올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70년의 세월 동안 황폐하게 버려졌던 예루살렘에 성전이 세워지고 그곳에서 다시금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벅차 오르는 감격을 주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1]

 

지파들 곧 여호와의 지파들이 여호와의 이름에 감사하려고

이스라엘의 전례대로 그리로 올라가는도다 (4)

 

이스라엘 백성이 절기를 따라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것은 율법의 규정을 그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저 평범한 일상이라고, 그저 규정대로 하는 것뿐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는 장면을 경험했던 유대인들, 나아가 예루살렘 성읍 자체가 완전히 파괴되는 장면을 목격했던 유대인들에게는 여러 지파가 하나님의 이름에 감사하기 위하여 절기를 따라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장면은 언제나 거대한 감격의 물결로 몰려왔던 것입니다. 시편의 저자는 비록 다윗 시대의 강력한 국가는 다시 이룩되지 못했을지라도, 솔로몬이 건축한 화려한 성전은 다시 볼 수 없을 지라도 예루살렘에 성전이 세워져있고 자기 민족이 함께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 예배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쁨과 행복을 누리고 있었던 것이지요.

 

돌이켜보면 우리가 교회에 출석하여 예배하고 성도들과 함께 교제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큰 은혜입니다. 지극히 일상적인 것처럼 보이고 언제라도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교회에 출석하여 예배에 참석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결코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의 지나온 시간을 돌이켜보면 교회에 출석할 수 없었던 상황, 교회가 평안하지 못하여 성도의 교제를 누리지 못했던 때도 있었습니다. 지금도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매주 정기적으로 교회에 출석하여 예배하는 기쁨, 성도들과 함께 교제하며 즐거움을 누리는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와 예배할 수 있고, 성도들과 함께 교제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망각하는 순간 우리에게 신앙생활의 기쁨은 사라져버립니다. 그러나 다른 어떠한 조건이나 이유가 없더라도 지금 하나님께 나와 예배할 수 있고 성도들과 함께 교제할 수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기쁨과 행복의 노래를 함께 부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함께 예배를 드리는 기쁨과 감격으로 가득한 시편 122편은 이제 예루살렘의 평안을 위한 기도로 이어집니다.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6)

 

시편의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이 평안해야 자신의 삶도 행복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하여 더욱 간절히 예루살렘을 위해 기도하며 이렇게 선포합니다.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오늘도 교회에 모여 함께 예배하고 성도들과 교제할 수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라는 점을 기억하며, 함께 찬양하고 함께 즐거운 노래를 부르며 교회를 위해 진심으로 기도하는 사람들. , 예루살렘을 사랑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형통의 은혜를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1] Mishael Wilcock, The Massage of Psalms 73-150 (England: Inter-Varsity Press, 2001), 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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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시편 강해2018. 2. 21.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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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시편의 저자는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4절에서는 불면증으로 인한 고통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주께서 내가 눈을 붙이지 못하게 하시니

내가 괴로워 말할 수 없나이다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는 밤. 그의 마음은 큰 아픔과 괴로움으로 눌려 있습니다. 고난이 찾아올 때까지만 해도 괜찮았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 간구하고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 나를 구해주시리라는 확신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오늘 시편은 바로 그 믿음의 고백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1) 그러나 시편의 저자는 자신의 믿음을 따라 아무리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기도하여도 하나님의 응답을 받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없었다면 고난을 그저 담담하게 받아들일 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신뢰하였고 하나님께 기도하였는데 현실은 조금도 변하지 않고 있으니 더욱 무거운 마음을 끌어안고 밤을 지새우게 되는 것이지요.

2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는 내 손을 거두지 아니하였나니그 뒤에는 괄호 안에 이런 이야기가 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침묵하셨다그래서 2절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 영혼이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기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위로 받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3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기억하고하나님을 기억했다면 마음에 소망이 넘쳐야 할 것인데, 어찌된 일인지 3절은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불안하여 근심하니 내 심령이 상하도다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구하였지만 여전히 나에게 찾아온 고난의 현실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에게도 소망을 찾을 수 없다면 그 어디에서 탈출구를 찾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극심한 슬픔에 그는 지난 밤 단 한 숨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동안. 그의 마음에는 수많은 장면들이 스치듯 지나갑니다(5). 예전에, 아주 오래전 하나님께서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펼쳐보이셨던 장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재앙과 고난이 찾아온 장면, 다시금 하나님을 기대하며 간구하였던 장면, 그러나 이번만큼은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았던 장면들. 이러한 장면이 스치듯 지나갈수록 그의 마음에는 도저히 회피할 수 없는 질문들이 떠오르는 것이지요.

 

주께서 (나를) 영원히 버리실까?

(주께서)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영원히 끝났는가?

하나님의 약속하심도 영구히 폐하였는가?

하나님이 그가 베푸실 은혜를 잊으셨을까?

하나님께서 노하심으로

그가 베푸실 긍휼을 그치셨는가? (7-9)

 

지금까지 배워왔던 하나님에 대한 가르침은 자신을 향해 아니라고 외치지만,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을 곱씹어 볼 수록 그렇다고 대답을 하는 것 같습니다.[1] 그러고 보니 우리의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이 두 가지 사이의 갈등, 곧 지금까지 하나님에 대해 배웠던 교리와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 사이에서의 갈등의 연속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들을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해주신다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는 악인이 번성하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 수모를 당합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기에 악인을 멸하고 의인을 세우신다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자신의 힘으로 죄를 덮고 오히려 의인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경우가 너무도 많습니다.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만을 섬기며 교회를 위해 성도들을 위해 충성하면 하나님께서 형통의 길로 인도하여 주신다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우리의 충성이나 우리의 노력이나 우리의 봉사가 아무런 결실도 없이 끝나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배웠던 신앙과 현실의 모습 사이에 이처럼 큰 간극이 있는데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신앙을 끝까지 견지해 나갈 수 있을까요? 바로 이것이 시편의 저자가 불면의 밤을 지새우며 마음 속에서 괴로워하였던 질문이지요.

 

저는 이 질문에 너무 쉽게 답을 내리고 싶지 않습니다. 내일 본문에서는 이 질문에 대한 나름대로의 답을 주고 있지만, 그 답을 너무도 쉽게 나의 것을 취하기보다는 시편의 저자가 보내야 했던 고통과 번민으로 점철된 불면의 밤이 우리에게 어느 정도는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만한 가지

다만한 가지

시편의 저자는 하나님께 기도하여보았기에, 하나님께 부르짖어 보았기에, 하나님께 간구하여 보았기에 그의 마음이 상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 반대인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배운 신앙과 현실의 모습이 서로 갈등하고 조화되지 않기에 우리는 괴로워하지만 실상은 그러한 갈등과 뼈아픈 질문이 지금도 우리를 붙잡아 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만일 신앙의 가르침이 없어 그저 현실의 모습이 전부라고 생각하며 살아간다면,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를 붙잡아 주신다는 신앙의 가르침이 없이 그저 현실의 고난 앞에 덩그러니 놓여져 있었다면, 밤새워 침상을 적시며 불면의 밤을 보내야 하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을 기억하며 어떻게 이러한 일이 내게 일어날 수 있느냐고 불평조차 할 수 없었다면 우리의 마음은 결코 빠져나올 수 없는 절망의 심연으로 들어가지 않았을까요?

 

우리가 배운 신앙과 현실의 모습이 도저히 일치되지 않지만 다시금 그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가 기도하며 하나님을 향해 질문할 수 있기에 우리에게는 여전히 붙잡을 수 있는 끈이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지금 당장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실 지라도 우리가 배운 신앙은 고난과 재앙 속에서 우리를 여전히 붙아주시는 하나님의 또 다른 손길인 것입니다.



[1] Walter Brueggemann, William H. Bellinger, Jr., Psalms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4), 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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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시편 강해2018. 1. 16.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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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를 맞이하고 첫번째 모임입니다. 올해에는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구약의 시편 가운데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는 제목이 붙어있는 시편을 순차적으로 묵상해보려고 합니다. 시리즈 제목을 단순히 성경의 제목을 따라서 올라가는 노래라고 할 수도 있지만, 조금 더 우리에게 의미 있는 제목으로 부르고 싶어서 함께 부를 노래라고 붙여보았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잠시 후에 말씀을 드리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그 첫번째 시간으로 시편 121편입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1)

 

말씀드린 것처럼 시편 121편은 성전에 올라가며 부르는 노래입니다. 누군가 치열했던 일상의 삶을 잠시 뒤로 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오르며 스스로에게 이렇게 질문합니다. “나의 도움은 어디서 올까?” 이 치열한 삶의 한 복판에서, 전쟁터와 같은 이 현실 속에서 나의 도움은 어디서 올까?” 스스로에게 질문하지요. 바로 그때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음성이 들려옵니다.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2)

 

우리가 바쁜 일상 속에서도, 치열한 삶의 현장 속에서도 하나님을 찾아 성전에 오를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음성이 있다면 우리의 도움이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깨달음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새해에는 기쁜 일 즐거운 일만 일어나기를 소망하지만, 우리 모두는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희망차게 시작한 새해에도 우리는 매일을 치열하게 살아야 하고, 때로는 눈물로 기도해야 하며,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이 없이는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인생이라는 사실. 그때마다 시편 121편의 주인공처럼 성전을 찾아와 하나님께 기도하며 나의 도움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있다는 그 위대한 사실로 말미암아 날마다 새 힘을 얻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삶에 지친 한 사람이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올라가며 스스로에게 질문합니다.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그리고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요.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터벅터벅 성전을 향해 올라오는 그 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실 뿐만 아니라, 그의 곁에는 신앙의 동지들이 있었습니다.

 

그 신앙의 동지들이 이제는 노래하기 시작합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3)

 

1절과 2절을 노래하는 사람과 3절 이후를 노래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입니다. 어떻게 아냐고요? 주어가 바뀌었잖아요. 1절과 2절에서는 내가산을 향하여 눈을 들었고, “나의도움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3절 이후부터는 로 바뀌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너를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그러므로 시편 121편은 한 사람의 노래가 아니라 여러 사람이 주고 받으며 불렀던 노래, 곧 이번 시리즈의 제목인 함께 부를 노래였던 것입니다.[1]

 

이제 우리 모두가 서로 믿음의 친구들, 믿음의 동역자들이 되어 시편 121편을 주고 받으며 함께 부르는 시간을 가져보겠습니다.

 

<< 2~3명씩 시편 121편을 1-2절과 3-8절을 나누어 주고 받으며 부르기>>

 

여러분! 삶의 위기가 찾아왔을 때, 삶의 아픔이 찾아왔을 때, 삶의 무게가 버거워질 때 나의 도움이 되시는 하나님을 찾기 위하여 성전으로 올라오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도움이 되신다고 여러분의 마음을 위로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날마다 성전에 오르며 함께 성전을 향해 올라가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십시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 힘을 공급해주시는 것은 물론이요, 우리가 서로를 격려하고 날마다 손 잡아주는 믿음의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기를 바랍니다.

 



[1] Mishael Wilcock, The Massage of Psalms 73-150 (England: Inter-Varsity Press, 2001), 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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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시편 강해2016. 11. 14.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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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이 소개하는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입니다. 1절은 이렇게 말씀하지요.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2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는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함도 아니요, 교회의 여러 가지 모임의 순서를 채우기 위함도 아닙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을 향해 기도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지금도 듣고 계시기에 우리는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듣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음성과 간구에 귀를 기울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 1절을 다시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도다사랑이라는 감정은 멀리서 동경하거나 그저 바라보는 것을 의미하지 않지요. 사랑이라는 감정은 매우 친밀한 관계를 이야기하죠.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주십니다. 그리고 때로는 하나님께서 세미한 음성을 우리의 마음에 들려주기도 하시죠. 바로 그때 우리는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며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쇠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듣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음성과 간구에 귀를 기울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아울러 하나님께 한 평생 기도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 2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우리는 많은 기도의 제목을 하나님께 올려드립니다. 그런데 그 모든 기도의 제목이 그 즉시 응답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기도의 제목은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시는 것처럼 아무리 기도를 해도 응답이 없는 경우도 때로는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지만 하나님께서 언제 응답을 주실 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한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응답을 언제 주실 지는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가 기도하는 한마디 한마디의 기도를 다 듣고 계시며 우리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귀를 기울이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혹 기도의 응답이 더디게 느껴진다 하더라도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며, 우리의 한 평생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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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