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별 시리즈설교2021. 7. 8.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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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기도>는 주기도문의 의미를 순차적으로 해설하는 시리즈 설교입니다. 


사도행전 11장에는 큰 흉년이 있었을 때 일어난 사건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큰 흉년이 들자 예루살렘 교회는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안디옥 교회 성도들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헌금을 모으기 시작했고, 그 돈으로 예루살렘 교회를 도와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당시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이 사건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주로 유대인들로 구성된 교회입니다. 그러나 안디옥 교회는 이방인의 비율이 매우 높았던 교회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지요. 그들은 이방인과는 식사도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주로 이방인으로 구성된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가 흉년으로 고생한다는 소식을 듣자 많은 헌금을 모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마음에 품었던 그들은 자신을 이방인이라고 무시하였던 예루살렘 교회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였고 오히려 사랑을 실천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주기도문을 통해 우리에게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마 6:12) 예수님의 이 기도는 사도행전 11장이 묘사하는 안디옥 교회 성도들과 같이 다른 이들의 잘못을 진심으로 용납해주는 성도들의 진실된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루는 베드로가 예수님께 용서에 대해 질문합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마 18:21-22) 

베드로의 질문에는 용서의 횟수가 핵심이었습니다. 과연 얼마나, 언제까지 용서해야 하는지를 여쭈었지요. 아마도 베드로는 일곱 번이 굉장히 많은 숫자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횟수의 제한을 넘어서라고 요구하셨습니다. 톰 라이트가 설명한 것처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하라는 말씀은 ‘세어볼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말라. 그냥 용서해 주어라’는 뜻입니다. 몇 번을 용서해 주었는지 아직 세고 있다면, 사실은 용서한 게 아니라 복수를 미루고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다른 사람에 대한 성도들의 용서는 인간 사이의 문제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중요한 기초라는 교훈입니다. 나에게 백 데나리온의 빚을 지고 되갚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나에게는 그것을 탕감해 줄 이유가 없습니다. 나와 그 사람 사이의 관계만 생각하면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지점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는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받은 감격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빚을 마땅히 탕감해 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의 모든 죄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위대한 용서의 사건이 먼저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나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용서하고 용서받는 일은 지속적으로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의 용서는 우리에게 해를 가한 동료 인간을 향한 관대함의 행위이기보다는, 우리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행위이다.” 

우리는 주기도문을 따라 우리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지속적인 회개의 기도를 드립니다. 이는 하나님의 용서를 확신하는 과정이요, 곧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을 얻는 통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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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