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별 시리즈설교2021. 8. 27.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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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기도>는 주기도문의 의미를 순차적으로 해설하는 시리즈 설교입니다. 

 

주님의 기도, 그 마지막 시간입니다. 

유명한 복음주의 운동가이며 저술가인 제임스 패커라는 분의 저서 중에 <하나님의 인도>(Guard us, Guide us)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제임스 패커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과거나 지금이나 직접 하늘의 음성을 통해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법을 잘 사용하시지 않으신다.” 만일 “그런 음성이 들려왔다 해도 단지 부분적인 것일 뿐, 하나님의 인도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요소를 포함한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를 지적하시고, 그때마다 우리에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시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로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를 소망하지만, 여전히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이끌어가시는지 알지 못하고 계획을 수정해야 하는 경우가 있지요. 

오늘 본문이 묘사하는 사도 바울의 상황이 바로 그렇습니다. 그는 고린도를 방문하려던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15-16절). 이러한 바울의 계획은 신중하였고 기도하면서 내린 결정이었습니다(17절). 그러나 사도 바울은 고린도를 방문하려는 자신의 계획을 바꿀 수밖에 없었습니다(23절). 바울이 이렇게 자신의 계획을 바꾸니, 고린도교회 안에 바울을 비난하기 좋아했던 사람들에게는 좋은 이야깃거리가 되었습니다. 바울이 신중하지 않은 사람이라느니, 여기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저기에서는 다르게 말하는 사람이라느니, 속과 겉이 다른 사람이라느니 여러 가지 말로 바울을 헐뜯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을 담담하게 서술해나가는 사도 바울은 자신의 연약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한계 속에서도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의 섭리를 선포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계획대로 고린도를 방문하지 못하였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통하여 고린도교회 성도들로 하여금 스스로 믿음 위에 서게 만드셨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24절).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18절)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19절)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20절) 

인간에게는 ‘아니오’가 분명히 있습니다. 계획한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너무도 많습니다. 우리는 연약한지라 기도하면서도, 이 길인지 저 길인지 고민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연약한지라 기도하면서도, 기도가 어떻게 응답될 것인지 알지 못하여 고민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언제나 예가 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멘”이라고 소리를 높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한 포로수용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춥고 어두운 저녁, 여러 차례 얻어맞은 수백 명의 포로들이 한 시간에 걸쳐 수용소 지휘관의 일장연설을 듣고 행진한 후에, 어둠침침한 막사로 돌아와서는 남은 밤 시간 내내 침묵할 것을 명령받았습니다. 그때 어느 막사에서 누군가 주님의 기도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옆자리에 누워 있던 동료 포로 몇몇이 그 기도에 함께 했습니다. 기도소리는 옆 막사의 포로들에게도 전해졌고, 그들도 그 기도에 합세했습니다. 막사 하나하나가 그 기도에 동참했고, 마침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로 기도가 끝날 때, 수백 명의 포로들이 도전적이고 우렁찬 목소리로 “아멘”을 외쳤다고 합니다. 

주님의 기도로 함께 기도하는 우리의 기도를 완성하는 단 하나의 고백, 그것은 바로 “아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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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주제별 시리즈설교2021. 8. 26.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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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기도>는 주기도문의 의미를 순차적으로 해설하는 시리즈 설교입니다. 

 

주님의 기도, 그 아홉 번째 시간입니다. 

미국 시카고의 어느 상점에 큰 화재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이 화재는 얼마나 컸는지 상점의 모든 상품들을 잿더미로 만들었지요. 상점이라는 것이 들여온 물건을 팔아서 그것으로 이윤을 남기는 곳인데, 들여다 놓은 상품들이 모두 타버렸으니, 그 손해가 얼마나 컸겠어요. 사람들 모두는 이 화재로 말미암아 상점이 당장 폐업을 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화재가 있은 바로 다음 날, 잿더미가 된 상점 앞에 간판이 나붙었고, 그 간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이 집의 모든 것은 다 타 버렸습니다. 그러나 제 아내와 자식들과 희망은 타지 않았습니다. 내일부터 정상적으로 영업이 계속될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잖아요. 상품이 다 타버렸는데 어떻게 장사를 계속한다는 겁니까? 그런데, 그 간판의 마지막에는 이런 문장이 추가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어떻게, 어떠한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기도해야 하는지 가르쳐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기도이지요. 주님의 기도에서 예수님은 여섯 가지 기도의 제목을 가르쳐주십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의 제목, 그 첫 번째 세 가지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게 해 달라는 기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해 달라는 기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뒤에 나오는 3가지 기도의 제목은 무엇이죠?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기도,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기도, 우리를 시험에 넘어지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의 제목을 따라 지속적으로 기도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도가 지금 당장 응답을 받는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지금 당장 온 세상에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고, 지금 당장 하나님의 나라[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 실현되고, 지금 당장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거든요.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의 제목을 따라 열심히 기도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시험에 빠지고, 여전히 죄를 범하며, 여전히 궁핍한 가운데 있지 않습니까? 바로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강한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마치, 자신이 운영하는 상점에 큰 화재가 일어나 그 안에 있는 모든 상품을 태워버린 현장 속에서도 희망을 잃어버리지 않았던 어느 크리스천의 이야기처럼 말입니다. 

모든 것이 끝나버리고,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과도 같은 그때에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외치며 희망을 붙잡았던 바로 그 크리스천과 같이, 주님의 기도로 기도하는 우리 역시 이렇게 고백해야 할 것입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확신할 수 없는 상황 Ⅰ 

여러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으로부터 주님의 기도를 직접 전해 들은 제자들의 입장에서 한 번 생각해보시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의 제목을 알려주시는데, 그 첫 번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2000년 전, 예수님의 제자들이 활동하던 시대에 로마 제국 전역에서 드높이 올려지던 이름은 하나님의 이름입니까? 아니면 로마 황제의 이름입니까? 로마 황제의 이름입니다. 

또 보세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의 제목을 알려주시는데, 그 두 번째 기도의 제목이 무엇이지요? 하나님의 나라, 곧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 실현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2000년 전, 예수님의 제자들이 활동하던 시대에 팔레스타인을 자신의 손아귀로 완전히 장악하고 자신의 뜻대로 통치하던 사람이 있었으니, 그의 이름이 헤롯입니다. 

세 번째 기도 제목도 보십시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나는데, 특별히 그 시대 하나님의 뜻은 구약의 율법입니다. 그런데 구약의 율법이 지시하는 본뜻, 율법의 본의를 완벽하게 왜곡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곧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그리하여 2000년 전, 예수님의 제자들이 활동하던 시대에 하나님의 뜻은 온전히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기도의 제목을 알려주시지만, 제자들이 보기에 그러한 기도는 조금도 현실적이지 않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바로 그때, 여섯 개의 기도제목을 모두 알려주신 예수님은 제자들의 기도에 반드시 확신에 찬 선언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이러한 고백이 우리 모두에게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현실이 어려울 지라도, 우리의 기도가 현실로 지금 당장 이어지지 않는 것 같을 지라도 이 세상을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는 사실,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붙잡고 계신다는 믿음의 고백이 우리의 흔들리려는 마음을 굳세게 붙잡아 주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확신할 수 없는 상황 Ⅱ 

오늘 본문은 스가랴서입니다. 스가랴 선지자가 활동했던 시기에 대해 스가랴 1장 1절이 대답해주고 있습니다. “다리오 왕 제 이 년 여덟째 달에 여호와의 말씀이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에게 임하니라” 페르시아의 황제 다리오 왕 제2년이라는 정확한 연도가 등장하지요. 그런데 다리오 왕 제2년이라는 연대는 에스라서에도 등장합니다. 함께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닥사스다 왕의 조서 초본이 르훔과 서기관 심새와 그의 동료 앞에서 낭독되매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급히 가서 유다 사람들을 보고 권력으로 억제하여 그 공사를 그치게 하니 이에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성전 공사가 바사 왕 다리오 제 이 년까지 중단되니라 (스 4:23-24) 

이 이야기는 유다 백성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사건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을 징계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만을 섬기는 민족이 되도록 하시기 위해 바벨론에서의 포로 기간을 허락하셨습니다. 자, 나라가 식민통치를 받습니다. 이스라엘의 수도였던 예루살렘은 바벨론 군대에 의해 완전히 무너졌고 백성들은 희망을 잃어버린 채 70년 동안 바벨론의 포로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7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회복시켜 달라고, 하나님께서 택하신 민족 유대인들을 포로에서 해방시켜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백성들이 기도하자마자 바로 하나님께서 응답하셨나요? 아닙니다. 70년의 세월이 필요해요. 그들은 하나님께 기도했지만, 뜨겁게 기도했지만 여전히 현실 속에서 그들을 다스리는 존재는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바벨론의 황제입니다. 과연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선언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70년의 세월이 흘렀어요. 그 동안 유다 백성들이 간절히 기도했던 것처럼, 하나님은 바벨론 포로에서 그들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이제 자신들을 속박했던 바벨론 땅을 벗어나 꿈에도 그리던 약속의 땅 가나안, 그것도 하나님의 성전이 세워져 있었던 예루살렘을 향해 희망의 발걸음을 내디뎠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도착한 예루살렘은 유대인들이 그토록 그리워하던 땅이 아니었지요. 예루살렘의 성전과 성벽은 70년 전에 더 이상 무너질 것이 없을 정도로 파괴되었습니다. 그리고 70년 동안 완전히 방치된 상태로 남아 있었습니다. 
70년 만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유대인들은 그 무엇보다 예루살렘 성전,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던 성전을 재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함께 읽은 에스라의 말씀이 무엇이라고 증언하지요? 그 역시도 정치적 책략에 휘말려서 성전 건축이 무한정 늦어졌다는 것입니다. 아닥사스다 왕이 다스리던 시대로부터 다리오 왕이 즉위한 지 2년이 되던 해까지 성전 건축이 미루어졌습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성전 건축이 미루어지고 있을 때 유대인들이 성전 건축을 위해 기도했을까요, 안 했을까요? 당연히 기도 했겠지요. 열심히 기도했을 거예요. 그런데 기도한다고 지금 당장 예루살렘에 성전이 세워지고, 하나님을 높이는 제사가 드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은 선지자 스가랴를 보내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예루살렘을 회복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예루살렘 성전을 아름답게 재건하시리라는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한 분이실 것이요 
그의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라 (슥 14:9) 

여러분,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따라 열심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기도가 어디로 인지 날아가 버린 것 같지는 않으세요? 마치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 있으면서 70년 동안 하나님께 기도했던 유대인들처럼, 마치 예루살렘에 돌아와 성전 건축을 위해 지속적으로 기도했던 사람들처럼 나의 기도가 어떻게 응답될 것인지 그 청사진이 보이지 않으시는 분이 계신가요? 바로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며 우리의 믿음을 입을 열어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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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주제별 시리즈설교2021. 8. 25.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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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기도>는 주기도문의 의미를 순차적으로 해설하는 시리즈 설교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 그 여섯 번째 기도제목은 “시험에 들지 않게 해 주시고, 악에서 구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를 따라 계속해서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우리가 시험에 들지 않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기도할 때 이미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인류를 대신하여 십자가의 시험을 모두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에게 찾아오는 시험이 견디기 어려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은 예수님께서 친히 대신 지셨고, 우리에게 남은 것은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시험이기 때문입니다. 악에서 구해 달라는 기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에서 ‘악’은 인격적인 악의 실체인 사단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이들에 대한 결정적인 승리를 우리에게 안겨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힘입어 기도하는 순간 우리에게는 이미 하나님께서 주신 승리가 주어져 있습니다.

 

야고보서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시험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합니다(13절). 많은 성도들이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을 어려워합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시험하시는 장면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에게 시험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승리를 주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14-15절)

 

인간의 마음이 욕심에 이끌리면 시험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욕심은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게 됩니다(15절).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이러한 유혹으로부터 자유롭다고 말할 수 없기에, 예수님은 우리에게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하도록 가르쳐주셨습니다. 인간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욕심과 욕망이 우리로 하여금 시험에 빠지게 한다면, 그 시험과 악의 존재로부터 우리를 벗어나게 하는 힘과 능력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17절)

 

여기에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을 위로부터 베풀어주시는 분입니다. 곧, 모든 성도들을 시험과 악의 세력으로부터 구해주시는 은혜는 오직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라는 주님의 기도는 시험에 빠지고 악의 세력에게 무릎을 꿇는 우리 인간의 연약함에 대한 탄식이요, 동시에 우리를 시험과 악의 실체로부터 구하여 내시는 하나님의 복음에 대한 신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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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주제별 시리즈설교2021. 7. 8.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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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기도>는 주기도문의 의미를 순차적으로 해설하는 시리즈 설교입니다. 


사도행전 11장에는 큰 흉년이 있었을 때 일어난 사건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큰 흉년이 들자 예루살렘 교회는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안디옥 교회 성도들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헌금을 모으기 시작했고, 그 돈으로 예루살렘 교회를 도와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당시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이 사건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주로 유대인들로 구성된 교회입니다. 그러나 안디옥 교회는 이방인의 비율이 매우 높았던 교회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지요. 그들은 이방인과는 식사도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주로 이방인으로 구성된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가 흉년으로 고생한다는 소식을 듣자 많은 헌금을 모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마음에 품었던 그들은 자신을 이방인이라고 무시하였던 예루살렘 교회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였고 오히려 사랑을 실천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주기도문을 통해 우리에게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마 6:12) 예수님의 이 기도는 사도행전 11장이 묘사하는 안디옥 교회 성도들과 같이 다른 이들의 잘못을 진심으로 용납해주는 성도들의 진실된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루는 베드로가 예수님께 용서에 대해 질문합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마 18:21-22) 

베드로의 질문에는 용서의 횟수가 핵심이었습니다. 과연 얼마나, 언제까지 용서해야 하는지를 여쭈었지요. 아마도 베드로는 일곱 번이 굉장히 많은 숫자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횟수의 제한을 넘어서라고 요구하셨습니다. 톰 라이트가 설명한 것처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하라는 말씀은 ‘세어볼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말라. 그냥 용서해 주어라’는 뜻입니다. 몇 번을 용서해 주었는지 아직 세고 있다면, 사실은 용서한 게 아니라 복수를 미루고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다른 사람에 대한 성도들의 용서는 인간 사이의 문제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중요한 기초라는 교훈입니다. 나에게 백 데나리온의 빚을 지고 되갚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나에게는 그것을 탕감해 줄 이유가 없습니다. 나와 그 사람 사이의 관계만 생각하면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지점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는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받은 감격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빚을 마땅히 탕감해 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의 모든 죄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위대한 용서의 사건이 먼저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나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용서하고 용서받는 일은 지속적으로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의 용서는 우리에게 해를 가한 동료 인간을 향한 관대함의 행위이기보다는, 우리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행위이다.” 

우리는 주기도문을 따라 우리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지속적인 회개의 기도를 드립니다. 이는 하나님의 용서를 확신하는 과정이요, 곧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을 얻는 통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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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주제별 시리즈설교2021. 5. 26.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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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기도>는 주기도문의 의미를 순차적으로 해설하는 시리즈 설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날마다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드리는 기도의 대부분은 우리의 필요를 채워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기도 생활에는 믿음으로 기도하고 열심히 기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기도한 대로 응답받지 못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우리에게 계속 기도할 것을 요구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문에도 일용할 양식을 위해 간구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성경은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말씀할까요?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주여, 기도를 가르쳐 주소서>라는 책에서 “매일의 양식을 구하는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 가운데 날마다 임하기를 구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기도하고, 믿음으로 기도하여도 우리가 기도한대로 응답을 받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간구하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고 기도 가운데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이 가능하기에 성경은 우리에게 쉬지 않고 기도할 것을 명령합니다. 


하나님의 목적 _ 겸손

본문은 하나님의 관심과 인간의 관심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지난 40년의 세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이 장면에서 이스라엘의 관심은 그들에게 공급해주시는 만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네 조상들이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신명기 8장 16절)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셨던 하나님의 관심과 목적은 이스라엘의 겸손에 있었습니다. 그들을 광야로 인도하신 이유도, 그곳에서 매일 만나를 먹여주신 목적도 그들의 마음이 겸손히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하는 데 있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관심과 우리의 관심이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면서 나의 요구사항을 하나님께서 그대로 들어주시는 지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도의 과정을 통해 우리의 마음이 겸손히 하나님만을 섬기는 지에 더욱 관심이 있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한대로 응답하실 수도 있고 그렇지 않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든 상관없이 우리는 쉬지않는 기도의 과정을 통해 내 삶의 공급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며 하나님 앞에 겸손을 훈련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목적하시는 바이기 때문입니다. 


공급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궁극적인 관심이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 상태였다고 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의 필요를 채우시는 일에 무관심하셨던 것은 아닙니다. 본문 18절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신명기 8장 18절) 

하나님은 광야 40년의 세월 이스라엘 자손에게 부족함 없이 양식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십니다. 나아가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풍성한 영혼의 양식도 제공해 주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6장 35절) 

교회는 성찬식에 앞서 주기도문을 드리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교회의 이러한 전통은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주기도문이 생명의 떡이 되시는 예수님을 통해 응답 받았음에 대한 확신을 예식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면,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우리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이미 응답하셨고 지금도 응답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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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주제별 시리즈설교2021. 5. 12.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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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기도>는 주기도문의 의미를 순차적으로 해설하는 시리즈 설교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세 번째 기도 제목은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첫 번째 기도제목이나 두 번째 기도제목과는 달리 세 번째 기도의 제목에는 ‘하늘과 땅에 대한 비교’가 있습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여기에서 대조적으로 등장하는 ‘하늘’과 ‘땅’은 공간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은 땅 위의 어느 공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천군과 천사를 말합니다. 천군과 천사들은 하나님의 뜻에 기쁜 마음으로 순종하지요. 그러나 땅에 있는 우리 인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보다는 거역하고 자신의 욕심을 따라 살고자 하는 욕망이 가득합니다. 바로 이 싸움의 현장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을 지키려는 열망이 바로 이 기도 제목에 표현되어 있는 것입니다. 


영적 전투의 현장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간절한 기도는 우리가 살아가는 바로 이 현실이 영적인 전투가 벌어지는 현장, 곧 영적 전쟁터라는 사실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세상은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이 아닌 육신의 욕망을 향해 달려가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좇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그 사이에서 우리는 전투를 벌이고 있는 것이지요. 

본문을 기록한 시인도 영적 전쟁터의 한 가운데 있는 사람입니다. 

악을 따르는 자들이 가까이 왔사오니 
그들은 주의 법에서 머니이다 (시편 119편 150절) 

지금 시인의 바로 옆에 악을 따르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주의 법에서 멀어요.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말씀, 곧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성도들 가까이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할 수 없도록 괴롭힙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인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전심으로 부르짖었사오니 내게 응답하소서 
내가 주의 교훈들을 지키리이다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의 증거들을 지키리이다 (시편 119편 145-146절) 

시인은 하나님께 제발 자신을 구해달라고 부르짖으며 기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교훈, 곧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 싶다는 기도입니다. 그의 기도는 얼마나 간절했던지, 145절의 기도가 146절에서는 단어만 바뀌고 똑같은 내용으로 반복됩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살아간다고 불평하지 마십시오. 세상은 원래 그래요. 오늘 본문이 쓰여진 구약 시대부터 포스트모던 시대라 불리는 오늘 우리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세상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합니다. 이것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진심으로 경계하고 두려워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지 않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인내의 기도

본문을 기록한 시인은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치열하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자신의 삶에 실현되기를 간절히 구했습니다. 그가 얼마나 열심히 하나님의 뜻을 구했는지 새벽부터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을 찾고 또 찾았습니다. 

내가 날이 밝기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주의 말씀을 조용히 읊조리려고 내가 새벽녘에 눈을 떴나이다 (시편 119편 147-148절) 

위의 구절은 시인이 얼마나 간절히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을 구했는지 그 치열함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저는 거기에 더하여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을 발견합니다. 오늘 아침 새벽에 하나님의 뜻을 구했다고 하여, 오늘 당장 내 삶에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아침 날이 밝기 전에 일어나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주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것과 같이 오늘 나의 삶에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그러면 그날 하루 안에 하나님의 뜻이 명확하게 보였을까요? 안보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 다음날도 새벽녘에 눈을 뜨고 또다시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찾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인내’입니다. 

주일 예배에 참여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어요. 바로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리라 결심했습니다. 그러면 하루하루 살아갈 때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을 경험해야 할 거 같잖아요? 기적이 날마다 일어나야 할 거 같잖아요?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사람들보다 세상적으로도 잘 되어야 할 거 같잖아요? 그런데 많은 경우에 오늘 아침에 하나님의 뜻을 따르겠다고 결심했다고 오늘 당장 어떠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를 가르쳐주셨지만, 그 뜻이 언제까지 이루어져야 한다는 기한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뜻이 지금 당장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기도를 멈추지도 마십시오. 그저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기도합니다.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그리고 인내합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 땅에 펼치실 것을 분명히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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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주제별 시리즈설교2021. 4. 6.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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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기도>는 주기도문의 의미를 순차적으로 해설하는 시리즈 설교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의 두 번째 기도 제목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대부분의 성경 학자들이 동의하는 바에 의하면 성경, 특별히 신약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그곳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누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까?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통치가 우리에게 임하는 것에 대해 매우 중요한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은 그 가운데 두 가지만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교훈, 그 첫 번째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우리에게 임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 20절에서 예수님께서 바로 이 사실을 선언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누가복음 11장 20절)

예수님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내었고 병든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죽은 사람까지도 살려주셨죠.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가 하나님의 나라, 곧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 시대에도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나요? 그럼요.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 시대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 시대, 우리 교회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요, 그 말씀이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의 마음을 뒤흔듭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그러면, 바로 그 자리에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하나의 비유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십니다.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더 강한 자가 와서 그를 굴복시킬 때에는 
그가 믿던 무장을 빼앗고 그의 재물을 나누느니라 (누가복음 11장 21-22절) 

예수님의 비유에서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키는 ‘강한 자’는 누구를 비유한 말씀일까요? 바로 18절에 등장하는 사탄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강한 자를 굴복시키는 더 강한 자는 누구를 의미할까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강한 자, 곧 사단이 인간을 사로잡고 있어요. 바로 이러한 모습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다’고 설명했던 것입니다(엡 2:2). 하나님의 통치가 아닌 사단의 통치를 받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봐도 사단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우리를 완전히 사로잡았던 강한 자, 사단을 굴복시킬 수 있는 분이 계신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여러분, 바로 이것이 복음입니다. 사단의 통치 아래에 있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통치 아래 놓이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직 임하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에게 임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중요한 또 하나의 교훈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완성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하였지만,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다고 표현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크리스천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사단의 세력으로부터 자유하여 하나님의 통치 안에 들어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주체가 우리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아니라, 물질에 대한 욕심이며 세상적인 성공이라면 바로 그 순간 우리의 참된 주인은 누구일까요? 네, 바로 그 순간에는 나의 마음이 사단의 지배를 받고 있어요. 그 순간에는 내가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에 대해서도 하나의 이야기를 통해 구체적으로 말씀해주고 계십니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가서 보니 
그 집이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 (누가복음 11장 24-26절)

이 이야기는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간 것으로 시작합니다.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귀신의 세력에 붙잡혀 있던 한 사람이 귀신으로부터 자유를 얻었으니 얼마나 놀라운 역사입니까? 그런데 이 이야기의 마지막은 비극으로 마칩니다.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 

여러분, 한 번 귀신이 떠나갔다고 해서, 한 번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통치권 안에 들어왔다고 해서 나의 삶에 변함 없이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미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크리스천들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통치가 아닌 사단의 통치 아래로 사로잡힐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속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미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였지만,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삶의 구주로 영접하고 고백하고 있지만, 나의 삶에 구체적인 순간순간마다 하나님의 주님 되심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우리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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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주제별 시리즈설교2021. 3. 17.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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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기도>는 주기도문의 의미를 순차적으로 해설하는 시리즈 설교입니다. 

 

주기도문의 첫 번째 기도 제목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이름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거룩하신 이름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해 지기를 원한다고 또다시 기도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이름은 거룩하고 영화롭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두운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이름이 얼마나 거룩하고 영화로운지 바라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해 달라’는 기도의 제목은 사실 ‘우리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셔서 하나님의 이름의 거룩함과 영화로움을 바라보게 해 주십시오’라는 기도입니다.  

오늘 본문 시편 48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과 같이 
찬송도 땅 끝까지 미쳤으며 (시편 48편 10a절) 

시인은 하나님의 이름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하나님의 향한 찬송이 얼마나 이 세상에 흘러 넘치는지 바라보며 감격합니다. 시인은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에 이렇게 감격할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생각하라

시인이 하나님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할 수 있었던 이유, 그 첫 번째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깊이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의 전 가운데에서 
주의 인자하심을 생각하였나이다 (시편 48편 9절)

시인이 하나님의 이름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깨닫고 찬양하기 전에 했던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깊이 생각하며 묵상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깊이 묵상해야 하는데, 그 대신 얼마나 많은 사건과 환경들을 깊이 묵상하지는 모릅니다. 만일 어느 직장인이 월요일 아침 출근하자마자 직장 상사로부터 참기 힘들 정도의 모욕적인 꾸중을 들었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그 직장인은 하루 종일 무엇을 묵상하고 있을까요? 오전에 들었던 직장 상사의 그 심한 언어를 묵상하고 또 묵상하고 있을 것입니다. 어느 가정 주부가 집안에서 반드시 지출해야만 하는 비용이 있는데 지금 당장 그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주부는 하루 종일 무엇을 묵상하고 있을까요? 돈이 필요하다는 그 환경을 묵상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하루 종일 깊이 묵상하는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내가 깊이 묵상하는 그 대상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성전인 교회에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깊이 묵상하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의 영화로우심을 바라볼 수 있는 비결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찬송가 429장의 가사가 이렇게 되지요. “세상 모든 풍파 너를 흔들어 약한 마음 낙심하게 될 때” 세상의 모든 풍파가 우리를 뒤흔들어서 약한 마음을 낙심하게 만들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이름을 찬양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그 영광스러운 이름을 부르지 못해요. 그러나 바로 그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받은 복을 세어라”(Count your blessings) 그러면 우리의 마음도 오늘 본문을 기록한 시인과 같이 노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과 같이 찬송도 땅 끝까지 미쳤나이다


자세히 살피라

시인은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이름을 온전히 찬양할 수 있었을까요? 그 첫 번째 비결은 하나님의 전에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깊이 묵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비결이 오늘 본문 12절과 13절에 등장합니다. 

너희는 시온을 돌면서 
그 곳을 둘러보고 그 망대들을 세어 보라 
그의 성벽을 자세히 보고 
그의 궁전을 살펴서 후대에 전하라 (시편 48편 12-13절)

시인은 시온을 돌아보면서 구석구석을 살펴보라고 명령합니다. 시인은 시온성을 보호하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워놓은 망대와 성벽을 자세히 살피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을 지키고 있는 망대와 성벽을 자세히 살피면서 무엇을 보아야 할까요? 

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 (시편 48편 14절)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서 성벽을 쌓고 망대를 건축했습니다. 그러면 예루살렘을 안전하게 지키는 것은 성벽이나 망대입니까? 아니면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십니까? 당연히 하나님이시죠. 바로 이 사실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이름을 찬양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현실을 깊이 분석하면서, 지금도 나를 붙잡고 계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어떤 분들은 교회의 구석구석을 탁월한 통찰력을 가지고 정확하게 분석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교회의 모습을 정확하게 분석할 수 있다고 훌륭한 신앙인인가요? 목사님들의 목회와 설교에 대해 객관적으로 분석할 수 있다고 훌륭한 교회의 일꾼이겠습니까? 

시온 성의 성벽과 망대를 자세히 살피는 목적은 시온 성의 성벽과 망대가 견고하게 세워졌는지, 혹은 부실하게 세워졌는지를 파악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시온 성의 성벽과 망대를 자세히 살펴보아서 결국에는 예루살렘 성을 지키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바로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이름을 높이며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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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주제별 시리즈설교2021. 2. 16.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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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기도>는 주기도문의 의미를 순차적으로 해설하는 시리즈 설교입니다.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

히브리서는 예수님을 대제사장으로 소개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히브리서 4장 14절)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소개하며 본문은 ‘승천하신 이’라고 표현합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온 인류의 죄악을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고(부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승천). 그리고 예수님은 지금도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세상의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며, 마지막 날에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다시 오실 것입니다. 

주기도문은 바로 그러한 믿음을 선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시요, 나의 아빠가 되시지만(주님의 기도 01 "우리 아버지여" / 갈라디아서 4장 1-7절)동시에 그분은 하늘에 계시며 지금도 세상의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는 나를 만나기 위해 인간의 옷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아기 예수님이시지만, 동시에 그분은 하늘에 올리어 지금도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세상을 통치하고 계신 분이십니다. 


은혜의 보좌 앞으로 

예수님은 승천하셨고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시며 마지막 날에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다시 오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만나기 위해 마지막 날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브리서 4장 16절) 

예수님의 승천에 대해 성 어거스틴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님은 우리 눈에서 벗어나 승천하셨고 우리는 슬퍼하며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주님, 우리는 당신을 우리 가슴속에서 발견했습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셨고, 지금도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육신으로 예수님을 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당장 나의 삶에 주님께서 계시지 않는다고 슬퍼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승천하신 그 주님을 우리는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을까요? 어거스틴의 고백처럼, 우리의 마음속에서 예수님을 발견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우리는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해 은혜의 보좌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곧 하나님을 향하여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 부르며 주기도문으로 기도할 때, 우리는 지금도 하늘 보좌에 앉아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주님 앞으로 나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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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주제별 시리즈설교2021. 1. 8.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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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기도>는 주기도문의 의미를 순차적으로 해설하는 시리즈 설교입니다. 

한글성경에는 주기도문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시작합니다.(마태복음 6장 9절) 그러나 헬라어 원문은 “우리 아버지”가 먼저 등장하고 그 뒤에 “하늘에 계신”이라는 표현이 뒤따라 나옵니다. 우리는 원문의 순서를 따라 “우리 아버지여”라는 호칭에 대해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갈라디아서 4장 5절) 

갈라디아서 본문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분을 얻었다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무엇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특권일까요? 


‘어떻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가?

바울은 하나의 비유를 통해 이 질문에 대답하고 있습니다. 곧 집주인의 어린 아들에 대한 비유입니다(갈라디아서 4장 1-3절). 제 아무리 집주인의 아들이라도 어렸을 때에는 그 집의 종과 다를 바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오히려 아버지가 정해준 때까지는 주인의 아들이 후견인이나 청지기의 아래에서 지도를 받으며 살아갑니다. 이것은 마치 인간이 율법 아래에 있는 모습과 동일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그분의 자녀로, 그분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지만 율법의 시대에는 인간이 율법의 종이 되어 율법 아래에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을 믿은 이스라엘이나 그렇지 않은 이방인이나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타임 테이블에 따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 태어나게 하셨지요. 본문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동정녀 마리아에게 태어나신 것은 곧 예수님께서 율법 아래에서 태어나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율법 아래에서 종노릇하는 사람들을 위해 스스로 율법의 아래에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율법 아래 태어나신 예수님은 율법 아래 있는 인간들을 속량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놀라운 속량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분을 얻게 되었습니다. 

주기도문의 의미를 묵상하는 우리가 그 무엇보다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위대한 명분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주기도문으로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자녀 된 특권인가? 

사도 바울은 먼저 하나님을 향해 ‘아버지’라고 부르는 특권을 이야기합니다.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갈라디아서 4장 6절)

우리가 아들이기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담대히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주기도문에는 6개의 기도 제목이 등장합니다. 6개의 기도제목 하나하나가 위대하고 그 각각에 응답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으로 우리의 마음은 감동합니다. 그러나 6개의 기도제목을 다 올리지 못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향해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는 그 하나의 사실만으로도 우리의 마음은 감격스럽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 주신다는 사실, 세상의 그 어떠한 아버지보다도 더욱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향해 기도할 수 있다는 놀라운 행복이 우리 가운데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본문이 소개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또 다른 특권은 하나님의 유업을 받는 특권, 곧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는 특권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갈라디아서 4장 7절)

우리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아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자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상속자’는 구약에서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약속이 그의 후손들에게, 곧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이어졌던 장면을 염두에 둔 개념입니다. 한 마디로 설명하면, '하나님의 상속자’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참여한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속량, 곧 죄용서와 구원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아버지라고 불러요. 나아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의 중요한 특권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참여한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넌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상관없이 살아갑니다. 그래서 인생의 주인이 자기 자신이지요. 자신의 힘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큰 위기나 어려움이 찾아올 때 쓰러져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크리스천들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자이기에 우리의 하루하루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 하나님의 구원 섭리 안에 있습니다. 

때로는 나의 계획이 실패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때로는 나의 앞길이 막막하게만 보입니다. 그러나 그 위기의 순간에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여”라고 부르며 주기도문의 내용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딸이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우리의 삶을 인자하게 인도해가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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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