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그룹과 말씀묵상2022. 4. 8.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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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예장총회(통합) 순교자기념선교회가 발행하는 『순교신학과 목회』(2022년 6월)에 기고한 원고입니다. 순교자기념선교회에 양해를 얻어 저의 개인 블로그에도 게시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성도들의 신앙생활이 크게 바뀌었다. 코로나 팬데믹이 발생하기 이전까지, 예배 시간은 고사하고 교회 안에 마스크를 쓰고 들어온다는 것은 한국 교회에서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신천지를 중심으로 급속도로 코로나 바이러스가 확산되었던 제1차 유행 당시, 성도들 중에는 방역을 위해 예배시간에 마스크를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 성도들도 있었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에 어떻게 마스크를 쓸 수 있느냐고 생각하는 성도들도 있었다. 그로부터 약 2년이 흐른 지금, 예배에 참여하는 성도들은 물론이요 대표기도를 하는 장로나 설교를 하는 목사들 중에도 마스크를 쓰는 경우가 많다. 이제는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마스크를 쓰고 예배할 수 있는지 아무도 질문하지 않는다. 오히려 예배시간에 마스크를 바르게 착용하지 않는 성도가 있으면 불안하여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본다. 코로나가 초래한 신앙생활의 변화에서 마스크 착용은 매주 작은 부분이다. 이른바 온라인 예배가 대중화되었고, 교회는 코로나 확진자나 유증상자들에게 온라인 예배를 권장하고 있다. 한국 교회가 생명처럼 지키며 강조하였던 주일 성수는 어디까지나 예배당에 몸으로 참여하는 예배였지만 코로나를 이유로 온라인 예배에 참여하는 성도들을 이제는 그 누구도 탓하지 않는다. 

코로나 팬데믹은 신앙생활의 모습과 형태만 바꾼 것이 아니다. 신앙생활의 양태만 변했다면, 교회와 목회자가 그에 적응하면 된다. 문제는 코로나의 확산이 신앙생활 자체를 크게 위축시켰다는 점이다. 그리고 팬데믹 시대에 가장 크게 위축된 목회 영역은 단연코 소그룹이다. 코로나 팬데믹이 발생하고 약 2년 동안 정부는 교회에 단계별 방역수칙을 강제하였다. 이에 따르면 주일예배를 비롯한 정규예배는 예배당 규모의 20%부터 많게는 70%까지 성도들에게 개방할 수 있었다. 많은 제약이 있었지만 그나마 주일예배는 지속할 수 있었다는 의미다. 그러나 동일한 기간에 변하지 않는 방역수칙도 있었다. 곧, ‘소모임 금지’다. 소그룹의 활성화가 목회의 활력을 불어넣어 준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2020년부터 시작된 약 2년의 코로나 시대를 소그룹 목회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그것은 ‘소모임 금지의 시대’로 소그룹 목회는 축소가 아니라 원천 차단되었다. 

코로나 팬데믹이 발생한지 3년째가 되어 가는 지금, 한국 교회는 목회 현장을 재건해야 한다는 당위성 앞에 서 있다. 코로나의 거대한 파도 속에서 온라인 예배를 비롯한 자구책을 간구해야 했던 지난 2년 여 기간을 바벨론 포로 시대로 비유할 수 있다면, 팬데믹(pandemic)의 시대를 지나 엔데믹(endemic)의 시대를 이야기하는 지금은 바벨론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이 성전을 재건해야 했던 시기로 비유할 수 있다. 그리고 코로나 팬데믹으로 가장 큰 타격을 받은 목회 영역이 소그룹이었다는 점에서 소그룹 목회의 회복은 우리 시대의 시급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이 글에서는 팬데믹 시대를 지나고 있는 한국 교회가 소그룹 목회를 회복하기 위한 방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급격한 변동의 시기에도 변하지 않는 소그룹의 원리가 무엇인지, 또한 팬데믹의 시기를 지나며 변화된 소그룹의 환경은 어떠한 것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변하지 않는 소그룹의 원리

교회성장학에서 자주 인용하는 격언이 있다. 

방법론은 다양하지만 원리는 그렇지 않으며,
방법론은 변하기 마련이지만 원리는 결코 변하지 않는다. 
Methods are many, Principles are few;
Methods may change, But Principles never do. 

코로나 팬데믹은 목회의 방법론을 보다 다양하고 변화무쌍하게 만들었다. 만일 팬데믹 시대에 소그룹 목회를 활성화하기 위해 급격히 변화하는 소그룹의 방법론만 뒤쫓는다면 정작 소그룹 목회에 면면히 흐르는 변하지 않는 원리를 놓치기 쉽다. 방법론이란 처음부터 다양하고 늘 변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팬데믹 시대의 소그룹 목회에 대한 대안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급변하는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 원리를 찾아야 한다. 코로나 시대를 겪으며 목회 현장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걸음 뒤에서 소그룹 목회를 관찰해보면 코로나 시대에도 소그룹 목회의 원리는 변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방법론은 변하더라도 원리는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코로나 시대에도 변하지 않았던 소그룹 목회의 원리를 세 가지로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소그룹 목회의 중요성이다. 일찍이 소그룹의 중요성을 깊이 깨달았던 존 웨슬리는 대중설교만으로는 성도들의 영적 성장에 큰 한계가 있음을 이렇게 지적하였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영적 각성을 일으키고 훈련을 시키지 않은 채 설교만하는 것은 살인자를 위해 자녀를 낳는 것과 같다. …(중략)… 정규적인 모임, 훈육, 규율 및 교류가 없으면 영적 각성을 경험한 열 명 가운데 아홉 명은 더 빨리 영적 수면 상태에 빠진다.”[각주:1] 소그룹 목회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한국의 목회자 가운데 한 명이 조용기 목사다. 1981년 출판한 영문판 저서 『성공적인 구역』(Successful Home Cell Group)에서 조용기 목사는 사도행전 2장을 근거로 초대 교회 안에 성전에서 모이는 대형집회와 가정에서 모이는 소그룹이 존재했다고 주장한다. 적지 않은 목회자들이 여의도순복음교회의 급격한 부흥이 삼중축복과 오중복음을 설파하였던 조용기 목사의 설교와 그의 치유사역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조용기 목사 자신은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성장 비결이 초대교회의 가정모임에 해당하는 구역이라고 단언하였다. 

굳이 역사적 인물들을 거론할 필요도 없이, 코로나 이전에도 많은 목회자와 신학자들이 소그룹 목회의 중요성을 강조해왔다. 설교만으로 교회가 부흥하고 성도들의 믿음이 성장한다고 생각하던 목회자는 거의 없었다. D12, G12, 제자훈련, 큐티나눔방 등 소그룹 방법론을 적용한 다양한 양육 프로그램이 개발되었고 신학교에서도 소그룹 목회를 학문적으로 연구하여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코로나 팬데믹 시대를 맞이한 한국 교회는 약 2년 간 소그룹 목회를 멈추어야 했다. 바이러스의 집단 감염을 차단해야 했던 방역당국의 입장에서는 밀폐, 밀집, 밀접의 세 요소가 공존하는 교회의 소모임을 금지하였던 것인데 방역당국의 기준과 의도가 무엇이었든 교회는 소그룹 목회가 멈춘 시간을 통과해야 했다. 이 기간 한국 교회는 코로나의 시기를 지나며 기존의 소그룹을 대체할 수 있는 활동을 적극 개발하였다. 대면하여 심방할 수 없으니 문고리 심방을 시행하고, 소그룹으로 성경공부를 할 수 없으니 온라인 콘텐츠를 제작하여 배포하고, 대면하여 교제할 수 없으니 온라인을 통한 만남을 추진해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을 적극적으로 기울여본 한국 교회는 다시금 소그룹 목회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있다. 다른 노력을 모두 동원하더라도 소그룹 목회를 대체할 수 없으며, 소그룹이 차단되니 목회의 원동력도 사라진다는 분명한 사실을 직접 경험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약 2년의 소모임 금지 시대는 목회 현장에서 소그룹 목회가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역설적으로 증명하였다. 

둘째, 소그룹 목회의 일반적 특징이다. 소그룹이라는 방법론은 대형집회와 비교할 때 여러 가지 장점을 가지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장점은 소그룹 안에서 인격적 상호작용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대형집회로 구분할 수 있는 주일예배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같은 시간에 같은 예배당에서 같은 목사의 설교를 듣더라도 주일예배만으로는 교회 성도들 사이에 인격적 상호작용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소그룹으로 모여 대화를 나누다 보면 쉽게 인격적 만남이 가능해진다. 소그룹의 또 다른 장점은 뛰어난 교육적 효과에 있다. 한 사람의 교사가 학생 50명을 가르칠 때와 학생 10명을 가르칠 때의 교육적 효과는 분명히 다르다. 동일한 원리로, 멘토링과 상호 모방이 가능한 소그룹에서는 신앙의 훈련과 교육이 효과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 소그룹의 장점을 한 가지만 더 지적한다면, 현대 사회와의 적합성을 꼽을 수 있다. 현대 사회는 권위주의가 해체되고 개인주의가 만연하여 권위 있는 소수의 주장보다는 각자의 경험에서 나오는 대중의 의견이 중요해진 다원주의 사회다. 그런데 교회의 대형집회는 회중들에게 수동적인 참여를 요구한다. 반면 소그룹은 참석자들이 자신의 경험이나 의견을 자유롭게 피력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다. 이러한 소그룹의 장점은 팬데믹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 소그룹의 원리다. 

소그룹이라는 환경의 일반적 장점을 지적하였으니, 그에 따르는 위험성도 집고 넘어가자. 소그룹에서는 참여자들의 인격적 교류가 활발히 일어나는 장점이 있지만 그렇기에 상대방의 의견이나 감정이 틀렸다고 직접적으로 이야기하기 어렵다. 소그룹에서는 기독교 교리나 성경의 가르침과 어긋나는 부분을 분명히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하기 어렵다는 의미인데 자칫 오류나 죄의 문제를 묵인할 수 있다. 또한 신학교육을 받지 않은 평신도들이 소그룹을 인도하다 보면 ‘검증되지 않은 가르침’(unapproved teaching)이 소그룹을 통해 전파될 위험성이 존재한다. 소그룹 환경이 태생적으로 안고 있는 위험성에 대해 한 가지만 더 지적하면, 로버트 우스나우가 이야기한 ‘자기중심적 종교’(me-first religion)로 변질될 위험성이다. 소그룹은 참여자 개인의 문제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이 자칫 공동체나 그 너머의 사회적 이슈를 무시하는 경향으로 이어질 수 있다. 로버트 우스나우는 ‘자기중심적 종교’의 특징이 소그룹으로 모인 성도들이 함께 기도하는 시간에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고 관찰하였다. [각주:2] 소그룹의 장점과 함께 이러한 소그룹의 위험성 역시 코로나의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 소그룹 목회의 일반적인 원리다. 그러므로 소그룹 목회를 통해 목회 현장의 활력을 불어넣기를 원하는 목회자들은 팬데믹 시대에도 소그룹의 장점은 극대화하고 소그룹의 위험성은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셋째, 소그룹과 영성의 관계다. 소그룹은 그것을 채택한 기독교 공동체의 영성을 담지하기 마련이다. 교회사에서 가장 큰 성과를 내었던 소그룹 목회는 웨슬리의 감리교운동(속회, class meeting)과 조용기 목사의 여의도순복음교회(구역, home cell group)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감리교의 속회와 여의도순복음교회의 구역은 방법론적으로 너무도 큰 차이가 존재한다. 그 이유는 감리교운동과 순복음운동이 추구하는 기독교적 가치인 영성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존 웨슬리는 그리스도인의 완덕(Christian perfection)이라는 가치를 추구하였기에 ‘속회-신도반-선발신도반’이라는 다층적 구조의 소그룹을 구성하였다. 반면, 조용기 목사는 오순절적이고 번영신학적인 가치를 전파하며 교회 성장을 추구하였기에 구역이라는 단 하나의 소그룹 형태로 만족할 수 있었다. 동일한 원리로 랄프 니버가 제창하였던 구역 모델은 목회적 돌봄이라는 가치를, 칼 조지가 주장했던 메타 모델은 평신도의 리더십이라는 가치를, 그리고 닐 콜이 전파한 가정교회 모델은 제자도라는 가치를 담아내기 위한 소그룹 목회다. [각주:3] 이러한 소그룹과 여성의 관계는 팬데믹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 소그룹 목회의 원리다. 그러므로 소그룹은 매우 효과적인 목회 방법론이지만 목회자나 교회가 추구하는 기독교적 가치인 영성과 어긋나는 경우에는 그 장점을 발휘할 수 없다. 일례로 교회의 시스템을 팀사역 중심으로 변환하면서도 담임 목사가 목회 리더십의 일부를 평신도 리더들에게 이양하지 않는 경우를 본다. 메타 모델에 해당하는 팀사역 중심의 소그룹 목회가 추구하는 기독교적 가치는 평신도의 사역 리더십인데, 담임 목회자가 추구하는 가치가 이와 다르니 교회의 팀사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기 어렵다. 

소그룹 목회를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먼저 교회 공동체가 추구하는 기독교적 가치를 분명히 하고 그에 부합하는 소그룹 목회를 재구성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팬데믹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 원리다. 여의도순복음교회의 구역이 크게 활성화되었던 하나의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조용기 목사의 오순절적이고 번영신학적인 영성에 대해 다양한 비판이 가능하지만, 조용기 목사가 주창했던 사차원의 영성은 여의도순복음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공유하는 교회의 분명한 가치였다. 그리하여 조용기 목사가 추구하는 사차원의 영성을 강화하고 재생산하려는 목적으로 시작한 여의도순복음교회의 구역은 교회의 성장에 핵심적 역할을 감당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팬데믹 시대에도 풍성한 소그룹 목회를 꿈꾸는 장로교 목회자들은 먼저 다음의 질문에 답해야 한다. 팬데믹 시대에 장로교회가 추구하는 소그룹 목회의 기독교적 가치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 개혁교회의 영성인 ‘경건’이다. 칼뱅은 경건을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시작된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경외”[각주:4]라고 정의한다. 이 정의에 따르면 경건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지식으로 시작한다. 여기에서 지식은 성경과 기독교 교리에 대한 암기식 지식이 아닐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하여 아는 지식을 말한다. 그런데 개혁교회의 경건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여 깨닫는 것이 경건의 시작이라면 경건의 지향점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경외다. 사랑과 경외라는 개념은 언듯 상충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모순처럼 보이는 이 두 개의 개념을 칼뱅은 하나님 아버지라는 이미지 안에서 조화시킨다. 만일 하나님 앞에 선 성도의 모습이 주인 앞에 선 종의 모습이라면 인간은 하나님을 경외할 수는 있어도 사랑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성도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동시에 사랑할 수 있다. 이것이 개혁교회가 추구하는 경건의 지향점인데 시대가 변하여도 개혁교회가 추구하는 경건의 가치가 변할 수는 없다. 그리고 팬데믹 시대를 지나며 새롭게 소그룹 목회를 구성하려는 개혁교회 목회자들은 소그룹의 궁극적인 목적을 이러한 경건의 훈련에 두어야 할 것이다. 


소그룹 목회의 급변하는 환경

소그룹 목회의 변하지 않는 원리로 소그룹 목회의 중요성, 소그룹 목회의 일반적 특징 그리고 소그룹과 영성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이렇게 소그룹 목회의 변하지 않는 원리를 정리하고 나면, 이제 코로나 팬데믹으로 급변하는 이 시대를 소그룹 목회의 관점으로 평가할 수 있는 기준점을 확보하게 된다. 물론, 향후 코로나의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그것이 한국 교회의 소그룹 목회를 어떻게 변화시킬지 현재로서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지난 2~3년 동안 진행되어온 목회 현장의 변화는 얼마든지 관찰하여 소그룹 목회의 관점으로 분석할 수 있다. 코로나 팬데믹을 맞이하며 소그룹 목회에서 일어난 거대한 변화를 세 가지로 설명하고자 한다. 

첫째, 목회 역량의 편중 현상이다. 목회 현장은 그 환경에 따라 대형집회와 소그룹으로 구분할 수 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대형집회 중심의 목회와 소그룹 목회 모두 큰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절대비교가 아닌 상대비교를 한다면 대형집회 중심의 목회보다는 소그룹 목회가 더 크게 위축되었다. 코로나 시대는 소모임 금지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점은 코로나의 시대에도 목회자들은 교회 안에서는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는 점이다. 한 마디로 한국 교회의 목회적 총량은 줄어들지 않았다. 다만, 그 방향이 바뀌었다. 코로나로 대면 예배에 제약이 생기면서 한국 교회는 온라인 예배에 목회 역량을 집중하였다. 온라인 예배가 익숙해지면서, 또다시 온라인을 통한 성경공부나 기도모임을 진행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활동을 일방적으로 콘텐츠를 전달하는 대형집회와 참여자들의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소그룹으로 구분한다면, 그 대부분이 대형집회의 특성을 보이고 있다. 

성도들의 입장에서도 코로나 시대는 신앙생활의 큰 변화를 야기하였다. 지극히 상식적인 측면에서 코로나의 시대는 성도들의 신앙생활이 크게 위축되었는데, 이는 성도들의 ‘참여’가 급감했다고 표현할 수 있다. 성도들의 참여가 줄어드는 동안 오히려 급증한 것도 있다. 신앙생활을 위한 ‘자료’다. 상술한 바와 같이 코로나의 시대라고 한국 교회가 보유한 목회 역량의 총량이 갑자가 줄어들든 것은 아니다. 교회는 성도들을 직접 만나는 목회 활동을 할 수 없으니 성도들의 신앙생활을 돕기 위해 예배나 성경공부의 영상을 제작하고 때로는 문서의 형태로 비대면 자료를 제작하여 배포하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유튜브나 인터넷 검색창에서 ‘예배’나 ‘성경공부’를 검색하면 그 끝을 알 수 없는 콘텐츠 목록이 등장한다. 이 모든 것이 신앙생활을 위한 ‘자료’다. 소그룹 목회의 관점에서 ‘참여’와 ‘자료’는 매우 중요한 주제다. 일반적으로 대형집회 중심의 목회에서 성도들에게 제공되는 것이 자료라면 소그룹 목회에서 성도들이 체험하는 것이 참여이기 때문이다. 

코로나의 시대는 목회 역량을 소그룹보다는 주일예배를 비롯한 대형집회에 집중하게 강요하였다. 성도들의 입장에서도 참여는 줄어들고 자료는 넘쳐나게 되었다. 한 마디로, 코로나 이전에는 대형집회 중심의 목회와 소그룹 목회가 공존하였던 목회 현장이 팬데믹을 지나며 대형집회 중심으로 모든 목회 역량이 편중되는 현상이 초래되었다. 

둘째, 진실한 관계를 향한 갈망의 증폭이다. 코로나의 시대를 지나며 많은 사람들이 불면증과 우울증에 시달리는 현상이 나타났는데 이를 지칭하기 위해 코로나 블루라는 신조어가 탄생했다. 코로나 블루의 원인은 다양하다. 어떤 이들은 코로나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이 원인이 되었다. 또 다른 이들은 사회적 거리두기로 사람들과 소통하지 못해 우울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원인들은 서로 연계되어 증상을 악화시킨다. 의학계는 아직 코로나 블루의 정확한 원인과 진단, 그리고 치유법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상식선에서 동의할 수 있는 코로나 블루의 원인과 해법은 있다. 코로나 블루는 사람과의 불리가 원인이고, 그래서 사람과의 만남이 해법이다. 그러므로 코로나 블루로 표현되는 코로나 시대의 특징은 진실한 만남에 대한 갈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갈망은 소그룹 목회에서 매우 중요한 주제다. 존 웨슬리는 감리교운동의 소그룹인 속회에 참여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기준으로 “장차 올 심판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죄로부터 구원받기 원하는 갈망”을 제시했다. 여기서 웨슬리가 이야기하는 갈망이란 하나님과의 적대적 관계를 벗어나 하나님의 호의를 받는 관계로의 갈망인데,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익숙한 표현으로 바꾼다면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에 대한 갈망이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존 웨슬리가 성도들 사이의 인격적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소그룹의 참여 조건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갈망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이유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사람들과의 관계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는 사람과의 관계를 지배하고, 사람과의 관계도 하나님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와 사람과의 관계가 서로 역동적으로 어우러지는 환경이 바로 소그룹이다. 

코로나 시대를 소그룹 목회의 관점에서 관찰할 때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사실 하나는 진실한 만남에 대한 갈망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증폭되었다는 것이다. 코로나 블루라는 신조어는 사람들의 내면에 찾아온 아픔을 표현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관계와 만남에 대한 갈망을 표현하는 개념이다. 그리고 스스로 인식하든 인식하지 못하든 진실한 만남에 대한 갈망에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만남을 향한 갈망이 내재되어 있다. 존 웨슬리가 일찍이 간파했던 것처럼 이러한 갈망이 소그룹 목회의 전제 조건이라면, 코로나 시대는 외형적으로 소모임 금지의 시대였지만 동시에 사람들의 마음을 소그룹 목회를 위한 좋은 토양으로 일구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셋째, 온라인 소그룹의 대중화다. 코로나 이전에도 온라인교회에 대한 논의는 지속되었지만, 한국 교회의 대체적인 평가는 부정적이었다. 직접 대면하여 만나지 않는 온라인 교회는 공동체성에 심대한 결함이 발생한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코로나 팬데믹은 이러한 신학적 논의를 뒤로하고 지금 당장 온라인 소그룹을 시행하도록 강요하였다. 한국 교회에서 가장 쉽게 떠올리는 온라인 소그룹은 영상기반(Video-based) 플랫폼을 통한 소그룹이다. 영상기반 플랫폼은 화상전화 방식으로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코로나 팬데믹을 지나며 줌(ZOOM)을 비롯하여 구글 행아웃이나 페이스북그룹 등 소그룹 목회를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여러 영상기반 플랫폼이 대중화되었다. 그러나 온라인 소그룹을 위한 플랫폼은 그 외에도 다양하다. 카카오톡의 그룹콜처럼 음성기반(Audio-based) 플랫폼을 이용한 소그룹도 가능하다. 음성기반 플랫폼은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 단점도 있지만, 전화통화에 익숙한 현대인들이 자신의 얼굴을 공개하지 않으면서도 소그룹에 참여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 외에도 비동시적(Asynchronous) 플랫폼이 있다. 카톡, 인스타그램, 페이스북과 같은 소셜 네트워크(SNS)가 이 범주에 속한다. 참여자들은 사전에 승인된 사람들만 들어올 수 있는 온라인 공간에 글이나 사진을 남긴다. 다만, 온라인 공간에 들어오는 시간이 서로 달라 비동시적 플랫폼이라고 부른다. 비동시적 플랫폼은 소그룹의 역동성이 약하다는 단점이 있지만, 그만큼 참여자들에게 부담이 적다는 장점도 있다. 미국 새들백교회의 온라인캠퍼스 담당자인 제이 크란다(Jay Kranda) 목사는 온라인 소그룹의 시작은 문자 기반의 비동시적 플랫폼이 효과적이라고 주장한다. 문자 기반의 비동시적 플랫폼을 시작으로 음성기반이나 영상기반 플랫폼으로 옮겨올 수 있기 때문이다. 

팬데믹 시대에 온라인 소그룹을 선택한 결정적인 이유는 전염병으로부터 안전하다는 것이었지만, 온라인 소그룹의 또 다른 장점은 디지털 자료를 공유하기가 용이하다는 점이다. 온라인 소그룹은 필연적으로 공통된 온라인 플랫폼을 이용해야 하는데, 대부분의 플랫폼은 디지털자료를 공유하는 기능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온라인 소그룹의 성공 사례로 보고된 새들백교회와 알파코스는 온라인 소그룹의 이러한 장점을 극대화한 경우다. 새들백교회는 온라인 소그룹의 참여자들이 함께 시청할 수 있는 영상 자료를 풍부하게 제공하고 있으며, 이와 연동하여 영상을 시청한 참여자들이 함께 대화할 수 있는 열린 질문을 책자로 제공하고 있다. 그러므로 소그룹 리더는 다른 이들을 가르치거나 정해진 목표를 향해 이끌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교회에서 제공하는 콘텐츠를 참여자들에게 온라인을 통해 배부하고, 책자의 질문을 중심으로 참여자들이 자유롭게 자신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환경만 조성하면 된다. 한편, 알파코스의 소그룹은 토크(talk)가 핵심이다. 그런데 기독교의 핵심 주제를 다루는 알파코스에서는 토크에 앞서 반드시 주제 영상을 함께 시청하도록 되어 있다. 알파코스의 창시자인 니키 검블(Nicky Gumbel)은 팬데믹의 상황 속에서 알파 코스를 온라인으로 진행한 사례를 소개하며 매우 효과적이었다고 평가했다. 새들백교회와 알파코스는 온라인 모임을 위한 플랫폼을 이용하기에 양질의 디지털 자료를 보다 쉽게 공유하고 그와 관련된 열린 질문을 활용하여 온라인 소그룹의 장점을 살려낸 경우라 평가할 수 있다. 

온라인 소그룹의 성공사례가 등장하고 있지만, 여전히 온라인 소그룹은 오프라인 소그룹에 비하여 인격적 상호작용이 약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구촌교회와 한국소그룹목회연구원이 2021년 9월에 실시한 “한국 교회 소그룹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온라인 소그룹의 참여자들은 온라인 소그룹의 장점으로 ‘모임의 편리성’(38.4%)과 ‘바이러스로부터의 안전’(26.8%)을 꼽으면서도, 온라인 소그룹의 단점으로는 ‘깊이 있는 대화와 나눔의 어려움’(30.4%)이라는 대답의 비율이 가장 높았다. 온라인 소그룹의 이러한 단점은 ‘모임 사이의 모임’(meeting between the meeting)의 개념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 대면하여 모이는 소그룹을 진행할 때, 공식적인 소모임 외에도 참여자들은 다양한 형태로 교제하기 마련이다. 이처럼 공식적인 소그룹 모임 사이에 이루어지는 참여자들의 비공식적인 만남을 ‘모임 사이의 모임’이라고 부르며, 이러한 비공식적 만남은 공식적인 모임 안에서 참여자들의 인격적 상호작용을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요소다. 그런데 팬데믹 시대에 온라인을 소그룹으로 진행하는 중요한 이유는 전염병의 확신으로 대면 모임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곧, 팬데믹 시대의 온라인 소그룹에서는 비공식적인 만남인 ‘모임 사이의 모임’도 차단되기 마련이요, 결과적으로 공식적인 온라인 소그룹에서만 서로를 마주하게 되니 인격적 상호작용이 부족하다고 느끼게 된다. [각주:5] 이처럼 팬데믹 시대에 온라인 소그룹은 하나의 대안으로 부상하고 있지만 현재까지는 인격적 상호작용이라는 소그룹 목회의 핵심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한다고 평가할 수 있다.


소그룹 목회를 위한 제언

지금까지 논의한 소그룹 목회의 변하지 않는 원리와 소그룹 목회의 급변하는 환경에 근거하여 팬데믹 시대에 소그룹 목회를 활성화하기 위한 제언을 세 가지로 제시하려고 한다. 

첫째, 리더양성 소그룹을 먼저 재개하라. 여기에서 리더란 구역, 셀, 목장 등 목양 소그룹의 리더를 말한다. 교회 안에 소그룹이 활성화된다는 의미는 목양 소그룹의 활성화를 말한다. 그러면 팬데믹 시대를 지나며 큰 타격을 입은 목양 소그룹을 회복하기 위한 첫걸음은 무엇이겠는가? 목양 소그룹의 리더를 훈련하는 것이다. 그런데 안타까운 사실은 많은 교회에서 구역장을 비롯한 목양 소그룹의 리더를 훈련하는 방식이 소그룹이 아닌 대형집회의 특성을 보인다는 점이다. 모든 구역장을 정해진 시간에 한 장소로 모아 담당 목사가 강의하는 방식이다. 팬데믹의 시대를 지나며 함께 모일 수 없으니 어떤 교회는 영상을 제작하여 소그룹 리더들에게 배포한다. 영상을 공유하든 문서 자료를 배포하든 목회자가 평신도 소그룹 리더에게 자료를 일방적으로 공급한다는 점에서 이 역시 소그룹의 형태가 아니라 대형집회의 특성을 따른다고 평가할 수 있다. 소그룹 목회가 활성화되어 있는 시대에는 목회자가 대형집회의 특성인 설교나 강의를 통해 소그룹 리더에게 동기만 유발하여도 소그룹이 활성화되는 경우가 있다. 이미 목양 소그룹의 (예비) 리더들이 소그룹에 참여하며 그 역동성을 체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그룹이 크게 쇠퇴한 상황에서는 강의와 설교만으로는 소그룹의 실제를 충분히 교육할 수 없다. 국제제자훈련원의 제자훈련은 리더양성 소그룹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제자훈련을 받은 사람만 목양소그룹인 사랑방의 리더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제제자훈련원의 창립자인 옥한흠 목사는 제자훈련의 소그룹 환경(리더양성 소그룹)과 교회 전체의 소그룹 분위기(목양 소그룹)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서술하였다. “제자훈련반이라는 소그룹을 강조하는 목적은 교회 전체의 요구에 부응하고자 하는데도 그 목적이 있다. 왜냐하면 전 교회가 소그룹으로 묶여 가능한 많은 수의 신자들이 몸의 지체로서 그 기능을 발휘하는 데 지장을 받지 않게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제자반에서 훈련을 받은 평신도 지도자들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각주:6] 

리더양성 소그룹 운영에 있어서 중요한 질문은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이다. 목양소그룹의 리더를 양성하는 모임이니 소그룹의 특성이나 소그룹 인도법을 가르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은 강의나 설명보다는 소그룹을 직접 체험하면서 체득하는 영역이 더 많다. 무엇보다 목회자가 직접 인도하는 리더양성 소그룹에 참여하면서 모방을 통한 교육이 효과적이다. 그러면 리더양성 소그룹에서 적극적으로 가르쳐야 할 내용은 무엇인가? 리더양성 소그룹은 교회의 소그룹 목회가 추구하는 기독교적 가치가 무엇인지, 나아가 교회의 모든 활동이 추구하는 기독교적 가치, 곧 그 교회가 추구하는 영성을 공유하는 자리가 되어야 한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소그룹은 그것을 채택한 기독교 공동체의 영성을 담지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 연결고리를 명확히 하는 가장 적절한 현장이 리더양성 소그룹이다. 개혁교회의 소그룹 목회는 구역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든 사용하지 않든,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소그룹인 구역이 추구하는 오순절적이고 번영신학적인 조용기 목사의 영성을 따라갈 수 없다. 그 대신 시대가 지나도 변하지 않는 개혁교회의 영성인 경건을 추구하는 소그룹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리더양성 소그룹은 담임 목사가 직접 목양 소그룹의 (예비) 리더들에게 개혁교회가 추구하는 영성인 경건의 가치를 보여주고, 경건을 함께 훈련하는 소그룹으로 이끌어야 한다. 

리더양성 소그룹부터 시작하다보면 교회 규모에 따라 목양 소그룹의 활성화까지 짧지 않은 시간이 필요할 수 있다. 목회지가 직접 인도하는 리더양성 소그룹에서 충분한 목양 소그룹의 리더가 배출된 이후에야 목양 소그룹의 활성화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코로나 팬데믹으로 교회의 소그룹이 쇠퇴를 넘어 붕괴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조급한 마음을 내려놓고 차분히 소그룹 목회의 기초부터 쌓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지난 2~3년 동안 코로나 팬데믹을 지나온 한국 교회의 소그룹은 바벨론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이 모든 것이 무너진 예루살렘에 성전을 재건하였던 것처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둘째, 전도 소그룹을 시작하라. 목회 활동을 그 규모에 따라 대형집회 중심의 목회와 소그룹 목회로 구분할 수 있다면, 전도의 방식도 동일한 기준으로 구분할 수 있다. 곧 전도집회와 전도 소그룹이다. 20세기까지 세계 교회의 전도는 주로 전도집회가 중심이었다. 그러한 경향이 가장 먼저 전도 소그룹으로 변화된 곳이 영국이었다. 1980년대 영국에서 대규모의 빌리 그레이엄 전도집회가 개최되었는데, 전도집회의 효과가 그 이전 세대에 비해 급격히 하락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때 우연히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였다. 빌리 그레이엄 전도집회의 주최 측은 전도집회를 통해 회심으로 초청된 사람들을 양육하기 위해 소그룹을 운영하였고, 전도보다는 전도 이후의 양육이 목적이었기에 그 이름을 ‘목양 그룹’(nurture group)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결과는 주최 측의 의도와 정반대였다. 통계를 내어보니 전도집회에 참여한 사람들 가운데 23%가 이후 지역 교회에 등록한 반면 목양 그룹에 참여한 사람들은 72%가 이후 지역 교회에 등록하였다. 이를 계기로 영국 교회는 대형집회보다 소그룹을 전도의 핵심 도구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지금도 한국 교회에서 대표적인 전도 소그룹으로 꼽히는 알파코스도 1977년 영국의 목양 그룹 가운데 하나로 시작했지만 1986년 그 성격과 목적을 전도에 맞춰 개편하면서 세계적으로 확산된 전도 프로그램이 되었다. 

팬데믹 시대의 소그룹 목회를 확성화 하기 위해서는 전도 소그룹이 필수다. [각주:7]그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도 소그룹과 목양 소그룹의 관계를 살펴보아야 한다. 일반적으로 소그룹 목회라고 하면 구역, 목장, 셀, 순 등 다양한 용어로 표현되는 목양 소그룹을 가리킨다. 그리고 한국 교회의 목양 소그룹은 대체로 랄프 니버의 구역모델을 따라 목회적 돌봄을 통한 전도에 그 중요한 가치를 두고 있다. 목양 소그룹의 하나인 구역을 전도와 교회 성장의 중요한 방법론으로 채택했던 조용기 목사는 목양 소그룹을 통한 전도와 교회 성장을 세포분열에 비유하였다. 건강한 어린이는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세포가 분열하여 성장하듯, 교회 안에 건강한 소그룹이 정착되면 소그룹의 분화를 통해 교회가 성장한다는 이론이다. 조용기 목사가 소그룹을 통한 교회 성장을 설명할 때 사용한 또 하나의 비유는 ‘교회의 뒷문’이다. 많은 새가족이 교회에 등록해도 교회가 성장하는 않는 이유가 그만큼의 성도들이 교회의 뒷문을 통해 빠져나가기 때문인데, 구역을 통한 목회적 돌봄은 교회의 뒷문을 잠그는 효과가 있다는 설명이다. 그런데 21세기로 접어들면서 한국 교회의 목양 소그룹은 전도나 교회 성장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고 있다. 이는 목회 현장에 있는 대부분의 목회자가 관찰하는 바인데, 과연 그 원인은 무엇일까? 

20세기까지 행해진 교회의 전도를 소그룹 목회의 관점에서 분석하면 ‘전도집회 – 목양 소그룹’의 구조가 된다. 새가족이 교회를 찾아오는 앞문이 전도 집회요, 그들이 교회를 떠나지 못하게 뒷문을 잠그는 역할이 목양 소그룹이었다는 뜻이다. 부흥의 시대에는 전도 집회로 많은 새가족이 찾아왔고 구역을 비롯한 목양 소그룹은 빈번하게 분가할 수 있었다. 그런데 21세기로 접어들면서 전도 집회를 통해 교회를 찾아오는 사람들의 숫자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팬데믹의 시대를 지나며 한국 교회는 더욱 깊은 침체기를 맞이하고 있다. 자연스러운 결과로 목양 소그룹은 분가를 멈추었다. 교회에 새가족이 늘어나면 목양 소그룹은 자연스럽게 활성화되지만 교회가 침체기를 맞이하면 목양 소그룹은 어떠한 방법을 동원하여도 침체기를 벗어나기 어렵다. 목양 소그룹은 뒷문이지 앞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처럼 목양 소그룹이 교회의 뒷문이라는 관찰은 목양 소그룹의 활성화가 교회의 전도에 달려있다는 통찰력을 준다. 

‘전도 집회 – 목양 소그룹’의 구조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목양 소그룹의 활성화를 위해 어떠한 구조를 만들어야 할까? ‘전도 소그룹 – 목양 소그룹’의 구조다. 20세기까지 부흥의 시대를 견인했던 ‘전도 집회 – 목양 소그룹’의 구조에서 전도 집회를 전도 소그룹으로 대체한 구조다. 한국 교회는 이미 정체기에 접어들었고 팬데믹 시대는 이를 가속화하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그렇다고 목양 소그룹을 포기할 것인가? 나아가 소그룹 목회를 포기할 것인가? 그것이 아니라면, 우리 시대의 전도 역동성은 전도 소그룹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팬데믹 시대에는 더욱 힘겨운 일이지만, 전도 소그룹이 활성화되어야 목양 소그룹의 역동성이 살아날 수 있다. 동시에 목양 소그룹의 역동성이 살아나면 전도 소그룹에도 활력을 불어넣는다. 그런데 이러한 선순환을 일으키는 시발점은 어디까지나 뒷문인 목양 소그룹이 아니라 앞문인 전도 소그룹이다.

셋째, 목회자가 직접 소그룹을 인도하라. 대형집회 중심의 목회 활동은 모임을 주도하는 소수의 목회자가 다수의 평신도 참여자를 대상으로 펼쳐진다. 한 마디로, 철저히 목회자 중심이다. 이에 반하여 소그룹 환경은 평신도의 리더십이 중요하다. 모든 소그룹을 목회자가 참여하거나 주도할 수 없으며 상당 부분을 평신도 리더에게 맡겨야 한다. 그러면 목회자의 역할과 역량은 주로 대형집회 목회 현장에서 발휘되며 소그룹 목회에서는 상대적으로 목회자의 역할이 적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특별히 팬데믹의 시대에는 직접 소그룹을 인도하는 역할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물론, 목회자가 교회 안의 모든 소그룹을 직접 이끌 수는 없다. 그러나 목회자가 참여하고 직접 인도하는 소그룹의 분위기는 교회 소그룹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좌우한다. 

청교도 지도자였던 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는 『참목자상』(The Reformed Pastor)이라는 책에서 목회자의 회개를 촉구했다. 백스터는 목회자가 시급하게 회개해야 할 항목으로 교만, 게으름, 세속적 관심, 분열 등을 언급하는데 그가 이 책에서 가장 강조하는 목회자의 죄는 목양의 사명을 다하지 않은 죄다. “대개 사람들은 목회가 설교하고, 세례와 성찬식을 베풀고, 병자를 심방하는 것 정도로 생각합니다. 목회가 이 정도로 인식될 때 성도들은 목회자를 좀처럼 따르려 하지 않고, 목회자 역시 그 이상의 일을 하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소명을 제대로 알지 못해 의무를 제한해버리는 것을 보면 무척 안타깝습니다. 유능한 목회자들 중에도 설교 준비에 열심을 내지만 영혼 구원을 위한 다른 일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양들과 개인적으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게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각주:8]  이처럼 열심히 설교문을 작성하여 강단에서 외치는 것으로 목양의 사명을 다했다고 여기는 풍습, 바로 이것이 리처드 백스터가 생각하는 반드시 회개해야 할 목회자의 죄악이었다. 나아가 그가 강조한 목회자의 개혁은 설교와 더불어 성도들을 적극적으로 찾아가 그들의 회심과 성장을 위해 헌신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리처드 백스터는 목양의 책무를 말과 글로만 강조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매주 모이는 두 개의 소그룹을 인도하였다. 하나는 지난 주일 설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기도하는 그룹이요, 또 하나는 청년들과 기도하는 모임이었다. 리처드 백스터의 이러한 외침과 실천은 팬데믹 시대로 소그룹 목회가 크게 위축된 오늘날 한국 교회 목회자들이 반드시 귀를 기울여 들어야 할 대목이다. 

코로나로 말미암아 소그룹 목회는 쇠퇴를 넘어 붕괴되었다. 이제 소그룹 목회는 처음부터 새롭게 시작되어야 한다. 그리고 팬데믹 시대에도 소그룹 목회의 그 시작점은 어디까지나 평신도가 아닌 목회자다. 

 

 

팬데믹 시대의 소그룹 목회 - 예스24

코로나 팬데믹으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목회 영역이 소그룹이다. 그 끝을 알 수 없는 팬데믹 시대에 소그룹 목회를 위한 탈출구는 어디에 있는가? 저자는 목회 현장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은 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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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John Wesley, “Rev. J. Wesley’s Journal on August 25, 1763,” in The Works of John Wesley, 8:254. [본문으로]
  2. Robert Wuthnow, ed., “I come away stronger”: how small groups are shaping American religion (Grand Rapids: Eerdmans, 1994), 356. [본문으로]
  3. 소그룹의 형태와 그에 따른 영성의 관계에 대해서는 이한진, 『팬데믹 시대의 소그룹 목회』(양주: 드림북, 2022), 1부에서 자세히 서술하였다. [본문으로]
  4.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1.2.1. [본문으로]
  5. 온라인 소그룹과 모임 사이의 모임의 관계에 대해서는 Allen White, Leading Online Small Group: Embracing the Church’s Digital future (LA: Allen White Consulting, 2020), 110를 참고하라. [본문으로]
  6. 옥한흠, 『다스쓰는 평신도를 깨운다』(서울: 국제제자훈련원, 1998), 248-249. [본문으로]
  7. 교회 안에 전도 소그룹을 정착하는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는 이한진, 『팬데믹 시대의 소그룹 목회』(양주: 드림북, 2022), 119-123을 참고하라. [본문으로]
  8. Richard Baxter, 『참목자상』, 최치남 역 (서울: 생명의말씀사, 2003), 247.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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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소그룹과 말씀묵상2020. 6. 17.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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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12년 버클리기독대학에서 행한 "제자 훈련" 특강 원교입니다. 

 

소그룹은 제자 훈련을 위한 필수적인 환경이다. 주일 예배와 같은 대형 모임에서는 정보의 전달은 가능할지 몰라도, 성도 개개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자신에게 적용하였는지, 어떻게 실천하였는지를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기회는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소그룹이 배제된 대형 모임에서는 ‘방관자’로서의 크리스천들이 양산될 소지가 높다. 고(故) 옥한흠 목사 역시 소그룹 환경은 제자 훈련을 위해 필수적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소그룹의 장점을 다음의 다섯 가지로 지적한 바 있다.[각주:1]   

1. 일반화의 요소. 
소그룹 환경에서는 참석자들이 자연스럽게 마음 속에 있는 고민과 갈등을 내어 놓을 수가 있다. 그러다 보면, 내가 가지고 있던 문제가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와 비슷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2. 인격 상호간의 학습(Interpersonal Learning)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 속에서 자기 자신을 보다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고, 나아가 자신의 성숙을 위해 노력하게 된다. 


3. 모방 
소그룹 안에서는 리더(혹은 목회자)의 삶을 보다 가까이에서 관찰할 수가 있기에, 리더의 좋은 모범을 모방하는 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 


4. 그룹 애착심(Cohesiveness) 
대형 모임에 비하여 소그룹 환경에서 그룹원들 사이의 애착심이 강한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5. 카타르시스(Catharsis) 
소그룹 안에서는 자신의 생각뿐만 아니라, 자신의 느낌이나 감정까지도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 때로는 이러한 자기 고백만으로도 감정의 치유가 일어난다. 

옥한흠 목사가 위에서 지적한 소그룹의 다섯 가지 장점은 ‘인격적 상호작용’이라는 중심 단어로 귀결된다. 평신도에게 기독교 진리를 전달하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훈련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제자훈련에서는 ‘인격적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소그룹 환경은 필수적이라 하겠다. 그러나 소그룹 안에서 일어나는 ‘인격적 상호작용’은 언제나 순기능만을 할까? 소그룹 환경 안에서 너무도 가까운 사이가 되었기에 오히려 문제점을 야기하는 경우는 없을까?


가까워지는 만큼 위험하다 

1991년부터 제자훈련을 시행하고 있는 새춘천교회의 사례는 소그룹 환경이 지니는 위험성을 보여준다. 신재원 목사가 새춘천교회에 부임하였던 1986년 당시, 새춘천교회는 30~40명 정도가 주일 예배를 드리고 있었으며 6개월 동안 목회자가 없는 상태로 방치돼 있었다. 신 목사는 제자 훈련에 앞서 3개월 단기 과정으로 신앙 교육을 시작했다. 이런 과정이 나름대로 성과를 거뒀다고 판단한 신 목사는 1991년부터 본격적인 제자 훈련을 시작했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제자 훈련 1기가 21명으로 시작했지만 3년 뒤 제자 훈련 과정을 수료한 사람은 5명뿐이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제자훈련을 중도에 하차하게 되었을까? 신재원 목사 자신이 제시하는 몇 가지 원인 가운데 두 가지만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각주:2]  

첫째, 제자 훈련을 위한 소그룹 안에서 갈등과 불화가 발생한 경우다. 소그룹 형태로 제자 훈련이 2년 정도 지속되면 사람들의 마음에 있는 것들이 모두 드러나게 마련이다. 소그룹에선 서로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이지만 소그룹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에겐 공감할 수 없는 허물도 소그룹 안에서 모두 드러나게 된다. 그런데 소그룹 안에서 나눴던 이야기들이 다른 성도들의 귀에 전해지기도 했다. 때로 제자 훈련 소그룹에 속한 사람들 사이에 물질 문제라든지,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는 문제 등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런 일로 마음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제자 훈련은 물론이고 교회를 떠나는 경우도 있었다. 

둘째, 제자 훈련을 인도하는 목회자와의 관계에서 갈등이 발생하는 경우다. 제자 훈련을 중심으로 목회를 하면 아무래도 목회자는 제자 훈련을 받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제자 훈련은 1주일에 한 번의 만남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주 중에도 계속해서 과제를 점검하고 용기를 불어넣어주기 위해 목회자가 연락을 취하게 된다. 그런데 제자 훈련을 받다가 도중하차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겐 아무래도 목회자가 직접 연락하는 경우가 확연히 줄어들게 된다. 동시에 교회의 일에서도 제자 훈련을 수료한 사람들이 주도권을 쥐게 된다. 이런 이유들이 겹쳐 제자 훈련을 도중하차한 사람들 중에는 교회까지 떠나는 일이 있었다. 

고(故) 하영조 목사는 교회 안에서 단짝을 없애야 함을 강조한 바 있다. “교회 안에 단짝을 만들지 않게 해야 합니다. 소위 지역, 학벌 등을 따져서 끼리끼리 모이지 말게 해야 합니다. 친한 사람들끼리 즉 단짝에서 사고 나고 단짝에서 비판이 나오기 때문에 단짝은 꼭 떨어지라고 말합니다. … 목사는 더 친할 사람도 없고 덜 친한 교인도 없어야 합니다.”[각주:3] 옥한흠 목사가 지적한 ‘그룹 애착심’은 소그룹의 중요한 장점으로서, 성도들의 인격 및 가치관을 변화시킬 수 있는 핵심 요소이다.[각주:4] 그러나 ‘그룹 애착심’이 단짝을 만드는 과정으로 오용될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개인을 존중하기에 기준이 무너질 수 있다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사회학을 가르치는 로버트 위트나우(Robert Wuthnow) 교수는 소그룹이 미국의 여러 종교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광범위하게 조사하였는데, 결론적으로 그는 소그룹 영성의 한계를 두 가지로 지적하였다. 

첫째로 소그룹 환경이 ‘자기 중심적 종교’(me-first religion)를 조장한다는 것이다.[각주:5] 소그룹에서는 개인적인 경험이나 감정의 나눔을 중요하게 여기다 보니, 공동체나 그 너머의 사회적인 이슈보다는 개인의 문제에 집중하는 경향이 나타난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현상은 소그룹에서 시행되는 기도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사람들은 자신의 (지극히 개인적인) 기도 제목을 내어 놓고, 소그룹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개인적인 기도 제목을 위해 기도해주기 때문이다. 

둘째로 소그룹 환경이 ‘무엇이든 괜찮아 영성’(anything-goes spirituality)를 조장한다는 것이다.[각주:6]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설교에서는 무엇이 옳으며 무엇이 그른가를 분명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인격적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소그룹 안에서는 “당신의 의견[감정]이 틀렸소.”라고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그러다 보면,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소그룹의 장점이 오히려 신앙의 기준을 모호하게 만드는 위험성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교회 안에 다양한 성격의 소그룹을 만들라 

소그룹 환경은 참여자들 사이에 ‘인격적 상호작용’을 형성하는 강력한 힘이 있다. 적은 수의 사람들이 소그룹을 형성하여 최소 3~4달, 혹은 1~2년 정도 정기적인 모임을 가졌다면, 서로에 대하여 깊이 이해하는 강력한 결속력을 지니게 된다. 이러한 소그룹의 특징은 AA(Alcoholics Anonymous) 등과 같이 사람의 내명을 치유하는 기능을 할 수도 있고, 제자훈련과 같이 인격 혹은 가치관의 변화를 추구하는 목회를 가능케 하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그러나 소그룹이 갖는 친밀성은 인간 본연에 위치한 ‘죄성’이 드러나는 장소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위험성을 최소화하면서도, 소그룹의 장점을 최대화하는 방법은 없는가? 

이러한 질문에 한가지 대답은 교회 안에 다양한 성격의 소그룹을 만들라는 것이다. 예컨대, 지역별로 구성된 소그룹(구역, 셀, 목장 등)은 관계 전도 및 목양에 큰 장점이 있다. 그러나 지역별 소그룹 모임이 오랜 시간 지속되면서 형성되는 ‘단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지역별 소그룹의 재배치만으로는 버겁다. 지역별 소그룹의 속해 있는 동일한 성도가 훈련을 위한 소그룹(제자훈련 소그룹, 성경공부 소그룹 등)에 동시에 속해 있을 때에야 ‘단짝’의 관계가 해소될 수 있다. 교회는 지역별 소그룹이나 훈련을 위한 소그룹만이 아니라 사역을 위한 소그룹 등 다양한 성격의 소그룹을 필요로 하지 않는가? 

 

 

 

팬데믹 시대의 소그룹 목회 - 예스24

코로나 팬데믹으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목회 영역이 소그룹이다. 그 끝을 알 수 없는 팬데믹 시대에 소그룹 목회를 위한 탈출구는 어디에 있는가? 저자는 목회 현장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은 팬

www.yes24.com

 

 

선교하는 교회: 지속적인 영적 성숙의 과정

이 글은 2013년 버클리기독대학에서 행한 "제자훈련"에 대한 특강 원고입니다. 교회의 존재 목적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전도하여 그들로 구원받은 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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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옥한흠, 『다시쓰는 평신도를 깨운다』(서울: 국제제자훈련원, 1984), 243-8. [본문으로]
  2. 보다 자세한 내용은 이한진, “포기할 수 없는 제자 훈련,” 『목회와신학』, 2007년 7월호, 150-151를 보라. [본문으로]
  3. 두란노서원 일대일 양육 세미나 “그리스도인의 교제” (1987. 8) 중에서. 이상수, 최심연, 『전문사역자는 평신도 당신입니다』(서울: 교회시스템전략연구소, 2009), 40. [본문으로]
  4. 옥한흠 목사는 “제자반에서 그룹 애착심을 발전시키는 것은 제자훈련의 성패를 좌우하는 열쇠나 다름없다”고 까지 말하였다. 옥한흠, 위의 책, 246. [본문으로]
  5. Robert Wuthnow, ed. “I come away stronger”: how small groups are shaping American religion (Grand Rapids: Eerdmans, 1994) 356-7. [본문으로]
  6. 위의 책, 358-6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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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소그룹과 말씀묵상2020. 4. 5.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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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티 목회 01 _ 큐티의 신학적 이해

큐티 목회 01 _ 큐티의 신학적 이해 큐티 목회 02 _ 큐티의 목회적 이해 큐티 목회 03 _ 소그룹 나눔방의 명암 큐티 목회를 위한 첫 번째 단계는 큐티에 대한 신학적 이해다. 그런데 큐티는 성경에 접근하는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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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티 목회 02 _ 큐티의 목회적 이해

큐티 목회 01 _ 큐티의 신학적 이해 큐티 목회 02 _ 큐티의 목회적 이해 큐티 목회 03 _ 소그룹 나눔방의 명암 큐티의 목회적 이해를 위해 사도 바울의 교회론이 담겨 있다고 평가를 받는 에베소서의 한 구절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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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티 나눔방의 유익 

큐티는 내가 개인적으로 말씀을 묵상하고 묵상한 말씀을 내 개인의 삶에 적용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큐티는 지극히 개인적이며 지극히 주관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혼자서 큐티를 지속한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개인의 큐티를 지지해주는 든든한 지지대가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큐티 나눔’이다. 큐티 나눔의 유익은 크게 다음의 네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큐티를 지속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당신이 오늘부터 큐티를 결심하였다고 생각해보라. 만일 내가 말씀을 묵상한 내용을 다른 사람과 나눌 기회가 없다면 꾸준한 큐티 생활이란 개인의 의지력에 따라 좌우된다. 그러나 당신이 매주 3~4명과 큐티 나눔방으로 만날 약속을 하였다면, 바쁜 일정이 지속하더라도 말씀 묵상에 더욱 우선순위를 두게 된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당신이 큐티 나눔방의 리더라고 생각해보라. 내일이면 나눔방의 방장으로 참여해야 한다면 아무리 바쁜 일이 있더라도 오늘의 큐티 본문을 관찰하며 말씀 묵상을 진행하지 않겠는가? 필자가 지역교회에서 큐티 사역을 시작하면서 참여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는 큐티 나눔방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증명하였다. “큐티를 하면서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입니까?”(복수 응답 불가)라는 질문에 약 25%의 성도들이 “나의 큐티를 다른 사람과 나눌 기회가 없어서”라고 응답하였다. 4명 중의 1명꼴로 큐티를 생활화하는 데 가장 큰 어려움으로 큐티 나눔방을 찾지 못하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각주:1] 그러므로 큐티 나눔방은 개인의 큐티에 덧붙여진 선택사항이 아니라, 개인의 큐티를 지속하게 만드는 필수 사항이다. 

둘째, 개인의 큐티가 지나치게 주관적이 되는 것을 막아준다. 큐티는 그 특성상 주관적인 해석과 개인적인 적용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그것을 큐티의 맹점이라고 지적할 수 있지만, 해석학적 측면에서 본다면 독자의 세계와 성경의 세계가 인식의 융합을 이루는 보다 창조적인 이해라고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러나 때로는 평신도들의 성서해석이 지나치게 주관적으로 치우쳐 이를 바로잡아야 하는 경우도 있다. 이때 큐티 나눔방은 개인의 큐티를 보다 객관적인 성서 해석으로 안내해주는 좋은 표지판이 된다. 만일 누군가 본문의 의도에 반하는 지나친 묵상과 적용을 하였다고 생각해보라. 그가 큐티 나눔방에 참여하여 다른 사람들의 말씀 묵상을 듣는다. 그는 동일한 본문을 다른 사람들이 자신과 전혀 다르게 이해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런데 자신과 전혀 다르게 본문을 해석한 사람이 다수이고, 자신과 같은 본문 이해는 자기 한 사람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다른 사람의 직접적인 가르침이 없이도 개인의 말씀 묵상이 본문을 왜곡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당신이 틀렸다”라는 지적이 없어도 나눔방의 참여만으로도 상당 부분 지나친 주관적 해석을 예방할 수 있는 이유다. 

셋째, 다른 사람의 큐티를 들으면서 더욱 풍성한 나눔과 묵상이 가능하다. 하워드 헨드릭스 교수는 사도행전 1장 8절 한 구절에 대한 관찰 내용을 30개 이상 소개하면서 실제로 이 구절에는 600개 이상의 서로 다른 관찰 내용이 담겨 있다고 주장한다.[각주:2] 이것이 사실이라면 사도행전 1장 8절 한 구절을 가지고 수백 개의 묵상과 그에 따른 적용이 가능하다. 그런데 아무리 뛰어난 개인이라 할지라도 혼자서 이처럼 많은 묵상의 내용을 모두 끄집어 내기는 어렵다. 그러나 큐티 나눔방에 참여한다면 다른 사람의 말씀 묵상과 그에 따른 적용을 나의 것으로 삼을 수 있다. 산술적으로만 본다면, 각 사람이 3~4개의 묵상 포인트를 발견하고 매주 4~5명이 큐티 나눔방에 참여하여 묵상의 내용을 나눈다면 하나의 본문에서 약 20개에 가까운 묵상 포인트를 자신의 것으로 얻을 수 있다. 실제로 큐티 나눔을 진행하다 보면 동일한 본문을 상대방에게 꼭 필요한 의미로 해석해주는 경우도 많이 있다. 필자가 사역하는 지역교회에 선교사 자녀를 둔 성도가 큐티 나눔방에 참여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한 본문을 큐티하면서 어떤 분이 그 성도에게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이 자녀를 선교지로 보내신 성도님의 마음과 비슷하지 않겠어요?’라고 말했을 때 그 성도님은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넷째, 서로의 신앙 생활을 위해 중보기도를 할 수 있다. 말씀 묵상은 본문에 대한 관찰과 해석에서 멈추지 않는다. 어떠한 본문을 묵상하든 그 말씀을 자신의 삶에 적용하게 된다. 그러므로 큐티 나눔방은 성경 본문에 대한 토론장으로 멈추지 않고 참여자들의 삶에 대한 풍성한 나눔 공간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말씀과 기도로 고난을 이겨낸 경험, 간절한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 하나님의 역사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체험 등은 참여하는 모든 이들에게 기쁨의 이유가 된다. 반대로 누군가 어려움에 처하거나 삶의 난관을 부딪치면 모든 참여자들이 그를 위해 기도한다. 한 학기의 큐티 나눔방을 마칠 때쯤 예외 없이 듣게 되는 고백은 자기 자신을 위해 누군가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통신기술의 발달로 나눔방 참여자들의 단체채팅방이 자발적으로 생성된다. 정기적으로 서로의 삶을 나누기에 그때마다 기도 제목을 나누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튼튼한 중보기도팀이 형성된다. 

이상의 이유들로 큐티 나눔방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아래의 그림과 같이, 큐티 나눔방에 참여하면 개인의 큐티가 풍성해지고 개인의 큐티가 풍성해지는 만큼 큐티 나눔방 역시 활기를 띠게 된다. 결론적으로 개인 큐티와 큐티 나눔은 큐티 목회를 지지하는 두 개의 기둥이다. 

개인 큐티와 큐티 나눔은 큐티 목회를 지지하는 두 개의 기둥이다.



소그룹 방법론의 장점과 위험성 

큐티 나눔은 소그룹이라는 환경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소그룹 환경은 기독교의 울타리, 혹은 큐티 나눔을 위한 자리가 아니더라도 교육학, 상담학, 경영학 등의 분야에서 그 중요성이 급속도로 대두되고 있다. 이는 15명 이내의 사람들이 수평적 관계를 형성하는 소그룹이 가지는 효율성 때문이다. 소그룹의 효율성을 일찍부터 인식하였던 기독교는 속회, 구역, 셀, 다락방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소그룹을 목회의 중요한 방편으로 활용하였고, 그들은 나름대로의 독특한 방식으로 소그룹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므로 큐티 나눔을 보다 체계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그룹이라는 형태가 태생적으로 지닐 수밖에 없는 방법론적 특징을 이해해야 한다. 먼저 소그룹의 장점을 크게 세 가지로 소개한 뒤, 소그룹의 방법론적 위험성에 대해서도 지적하겠다. 

소그룹의 장점이 오히려 소그룹 내에서 단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소그룹의 장점, 그 첫번째는 인격적 상호작용이다. 소그룹이 대형집회보다 사람들 사이의 인격적 유대관계를 형성하는 데 유리하다. 참석자들이 소속감을 느끼고, 그리스도인의 형제애와 따뜻한 마음을 맛볼 수 있는 곳은 대형 집회가 아니라 소그룹 현장이다. 마음 속 깊이 자리한 상처와 아픔을 대중 앞에서는 고백하기 어렵지만, 각자의 처지를 모두 알고 있는 소그룹 안에서는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히 털어놓을 수가 있다. 20명 이상이 모인 자리에서 한두 사람이 자신의 큐티를 나누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는 자신의 큐티를 발표하는 것이지 참석자 상호간의 진실한 나눔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큐티 나눔이 소그룹의 형태를 띄어야 하는 이유는 인격적 상호작용이 가능한 환경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교육적 효과다. 일방적인 지식의 전달 외에도, 소그룹에서는 멘토링과 상호 모방이 가능하다. 멘토링이란 피교육자의 학습 정도에 따라 적절한 지도를 해주는 것인데, 소그룹 환경은 참석자들의 영적 상태를 보다 쉽게 파악하여 그에 맞는 조언을 줄 수가 있다. 아울러, 소그룹에서는 다른 이들의 행동이나 삶을 가까운 거리에서 확인할 수 있기에 상호 모방을 통한 학습도 가능하다. 이는 큐티 나눔에도 예외가 아니다. 큐티를 통한 말씀 묵상을 신앙 성장을 위한 영성 훈련의 과정으로 이해한다면, 소그룹의 교육적 효과는 그 중요성이 더욱 두드러진다. 소그룹 큐티 나눔을 통해 나눔방의 리더는 참여자들의 영적인 상태를 보다 쉽게 파악할 수 있으며 말씀을 통한 신앙의 성장에 직접적으로 관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개인 큐티가 아직 서툴거나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 소그룹 형태로 이루어지는 큐티 나눔방은 나눔방 리더의 말씀 묵상을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모방할 수 있는 학습의 기회를 제공한다. 

셋째는 현대사회와의 적합성이다. 현대 사회는 권위주의가 해체되고 개인주의가 만연하여, 권위 있는 소수의 주장보다는 각자의 경험에서 나오는 대중의 의견이 중요해진 다원주의 사회다. 그런데 소그룹 형태는 참석자들이 자신의 경험이나 의견을 자유롭게 피력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함으로써, 현대인들에게 보다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할 수 있다. 현대 사회에서 소그룹에 대한 관심과 중요성이 급증하는 이유도 이와 같은 사회적 배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교회의 대형모임은 회중들로 하여금 수동적인 참여를 요구한다. 그러나 소그룹으로 이루어지는 큐티 나눔방은 참여자들의 적극적인 자기 표현을 격려함으로 현대인들에게 친숙하게 다가설 수 있다. 

소그룹의 방법론적 장점으로 크게 세 가지를 지적하였다. 그런데 위의 세 가지 장점이 오히려 소그룹 내에서 단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소그룹의 첫번째 장점으로 인격적 상호작용을 지적하였다. 그런데 소그룹원들 사이의 인격적 상호작용이 오히려 교회 안의 갈등을 유발할 수도 있다. 강원도 춘천에 위치한 어느 교회는 제자훈련을 위해 소그룹 형태를 도입하였고, 그 안에서 성도들은 내면의 상처와 아픔을 털어놓았다. 소그룹이 제공하는 ‘인격적 상호작용’ 속에서, 소그룹원들은 서로가 서로의 상처를 품어줄 수 있으리라 느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자훈련에 참여했던 한 성도가 소그룹에 속하지 않은 성도들에게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전했고 이것은 교회 안의 큰 갈등으로 이어졌다.[각주:3] 큐티 나눔을 위한 소그룹 역시 이와 같은 위험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지역 교회에는 개인적으로 말씀 묵상을 하면서도 큐티 나눔방에 참여하지 않는 성도들이 많이 있는데, 그 이유가 큐티 나눔방에서 나누었던 자신의 사적인 이야기가 교회 안에서 회자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경우가 많다. 소그룹의 강점인 인격적 상호작용이 오히려 교회의 갈등을 일으킨 이와 같은 사례는 매우 보편적인 현상으로 미셀 그린(Michael Green)은 소그룹원들 사이의 친밀성이 오히려 소그룹에 속하지 않은 다른 성도들과의 관계를 소원하게 만들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기도 한다.[각주:4] 

소그룹의 두번째 장점으로 멘토링과 상호 모방을 통한 학습 효과를 지적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소그룹의 학습 효과 역시 부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설교에서는 무엇이 옳으며 무엇이 그른가를 분명하게 이야기할 수 있지만, 친근한 유대관계가 형성되는 소그룹 안에서는 참석자들의 잘못을 분명하게 지적하지 못하여 신앙의 기준을 모호하게 만들 수 있는 위험성이 존재한다. 로버트 우스나우(Robert Wuthnow)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는 소그룹 안에서는 “당신의 의견/감정이 틀렸소”라고 직접적으로 이야기하기 어렵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소그룹 안에 존재하는 이러한 위험성을 ‘무엇이든 괜찮아 영성’(anything-goes spirituality)이라고 부른다.[각주:5] 렐리 스탁스틸(Larry Stockstill)은 신학교육을 받지 못한 평신도들이 소그룹을 인도하다보면 ‘검증되지 않은 가르침’(unapproved teaching)이 전파될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지적한다.[각주:6] ‘전적 타락’으로 대표되는 부정적인 인간론을 가지고 있는 개혁교회는 소그룹 목회에 대한 전통이 강하지 않은데,[각주:7] 종교개혁자 존 칼뱅이 재세례파의 가정모임을 인정하지 않았던 이유 역시 ‘검증되지 않은 가르침’에 대한 위험성 때문이었다. 

소그룹의 세번째 장점으로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개인의 경험이나 감정을 중요하게 여기는 소그룹은 다원화된 사회 속에서 장점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이것 역시 부정적인 역할을 할 수도 있다. 개인의 문제에 집중한 나머지 공동체나 그 너머의 사회적인 이슈를 무시하는 경향이 발생할 위험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스나우는 이러한 위험성을 ‘자기 중심적 종교’(me-first religion)라고 명명하였다. 그에 따르면, ‘자기 중심적 종교’의 특징은 기도 시간에 두드리지게 나타난다. 사람들은 자신의 (지극히 개인적인) 기도 제목을 내어 놓고, 소그룹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개인적인 기도 제목을 위해 기도해준다. 이때 기아, 국가적 갈등, 불의 등 사회적/윤리적 이슈는 거의 다루지 않는다.[각주:8] 여의도순복음교회의 ‘구역’에 대한 타당성 있는 비판 가운데 하나가 ‘자기 중심적 종교’라는 공격이다. 오순절적 번영신학에 근거하여 개인의 구원 및 경제적 번영만을 위해 기도할 뿐, 사회적 정의를 위한 노력은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큐티는 성경 본문을 자신의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하는 것을 강조하기에 (personal, practical, possible) 큐티 나눔방은 우스나우가 지적하는 ‘자기 중심적 종교’에 빠져들 위험성이 얼마든지 있다. 

소그룹은 방법론적인 장점을 분명히 가지고 있으며, 큐티 나눔이 소그룹의 형태를 선호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소그룹의 장점이 의도하지 않았던 부정적인 요소로 작용할 수도 있다. 소그룹이 방법론적 장점이 있다고 하여 소그룹 형태로 진행되는 큐티 나눔방이 언제나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오는 것도 아니요, 소그룹의 방법론적 장점이 부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큐티에 있어서 소그룹 중심의 나눔을 처음부터 부정해도 안 된다. 소그룹 목회의 방법론적 특징, 곧 장점과 단점이 동전의 양면과 같이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먼저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큐티 목회를 위해 소그룹의 형태를 도입하되, 그 장점을 극대화하고 그 위험성을 최소화하려는 목회적 노력이 필요하다. 이제부터 그 구체적인 방안들을 제시해보겠다. 


큐티 나눔방 운영 방안 

설교 및 강의, 그 외의 다양한 기회를 활용하여 소그룹의 장점 뒤에 가려진 위험성에 대해 강조해야 한다. 물론 소그룹의 위험성을 지나치게 인식한 나머지 큐티 나눔방이 위축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모든 참여자들이 소그룹이라는 방법론적 환경이 필연적으로 내포하는 위험성을 인식하는 과정이 꼭 필요하다. 아울러, 큐티 나눔방의 리더는 시의 적절하게 소그룹의 위험성을 참여자들에게 알려야 한다. 무엇보다 큐티 나눔방 안에서 오갔던 모든 개인적인 이야기들은 나눔방을 넘어 다른 누군가에게 결코 발설하지 말 것을 강조해야 한다. 소그룹 안에서는, 특별히 그것이 말씀을 묵상하는 큐티 나눔이라면 상대방의 마음과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해줄 수 있다. 그러나 악의가 전혀 없고, 때로는 그 사람을 칭찬할 목적으로 나눔방에서 있었던 대화의 일부를 다른 사람에게 옮기더라도 소그룹으로 구성된 큐티 나눔방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것을 동일한 마음으로 공감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개인 인격의 문제가 아니라 단순히 큐티 나눔을 위한 소그룹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개인의 이야기가 교회 내에 퍼지면 당사자는 큰 상처를 입게 된다. 그러므로 좋은 의도라 할지라도 당사자의 허락을 받지 않았다면 큐티 나눔방에서 나누었던 개인적 이야기는 결코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해야 한다. 

큐티 나눔을 위한 소그룹을 조직하고 운영하는 데에도 신경을 써야 할 부분이 있다. 필자는 지역교회에서 큐티 나눔방을 조직할 때, 처음부터 나눔방을 시작하는 날과 마치는 날을 못 박아 두었다. 3~4개월 정도 큐티 나눔을 하다 보면 서로 친밀한 유대관계가 형성되어 동일한 구성원이 더 오랜 시간 큐티 나눔방으로 모이기를 소망한다. 때로는 다음 기수에도 동일한 구성원들로 나눔방을 구성해 달라고 요청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필자는 단 한 번도 이러한 요청을 수용하지 않았는데,[각주:9] 그 이유는 소그룹 환경이 조성하는 인격적 상호작용이 오히려 교회내의 갈등을 일으키는 위험성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3~4개월 큐티 나눔방을 운영하고 나면, 1~2달은 나눔방을 쉬게 하여 큐티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도록 하였고, 다시금 나눔방을 구성할 때는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여 참여를 원하는 사람들을 새롭게 모집하였다. 그렇게 처음부터 마치는 날을 미리 정해 두니 나눔방의 리더를 섭외하는 일도 한결 손쉬워졌고, 새롭게 참여하는 이들도 뒤늦게 시작한다는 마음 없이 동참할 수 있었다. 

큐티 목회가 지역 교회에 정착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목회적 노력이 또 하나 있다. 성도들이 성경을 공부하거나 통독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라는 것이다. 큐티는 성경공부가 아니며, 정해진 짧은 본문 속에서 ‘오늘 나에게 주시는 말씀’을 듣는 과정이다. 그러나 성경에 대한 바른 지식이 토대로 쌓인다면 큐티는 더욱 풍성해진다. 특별히 큐티는 그 특성상 10여절 안팎의 짧은 본문을 묵상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큐티의 맹점 가운데 하나는 성경 전체의 흐름을 놓치기 쉽다는 데 있다. 사무엘상하의 전체 흐름을 놓친 채, 사무엘, 사울, 다윗에 대한 단편적인 사건들만 묵상하는 잘못을 저지르기 쉽다. 그러므로 사무엘상하의 한 부분을 더욱 깊이 묵상하기 위해서는 사무엘상하의 흐름을 읽는 통독이 병행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평신도의 큐티가 더욱 풍성해지기 위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성경공부와 성경통독에 성도들을 동참시켜야 한다. 큐티만으로 말씀 생활이 온전해질 수 없다는 의미다. 


 

팬데믹 시대의 소그룹 목회 - 예스24

코로나 팬데믹으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목회 영역이 소그룹이다. 그 끝을 알 수 없는 팬데믹 시대에 소그룹 목회를 위한 탈출구는 어디에 있는가? 저자는 목회 현장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은 팬

www.yes24.com

 

  1. 필자의 설문에 응답한 사람은 모두 267명이었다. [본문으로]
  2. Howard G. Hendricks and William D. Hendricks, Living By the Book: The Art and Science of Reading the Bible, revised and updated (Chicago: Moody Publishers, 2007), ch. 6. [본문으로]
  3. 여기에서 소개한 사례에 대해서는 필자가 담임 목사를 직접 인터뷰한 뒤 작성한 기사를 확인하라. 이한진, “포기할 수 없는 제자훈련” <목회와신학> 217 (2007년 7월): 150-151. [본문으로]
  4. Michael Green, “Cell Church: Its Strengths and Dangers,” in Church without Walls: A Global Examination of the Cell Church, ed. Michael Green (Carlisle: Paternoster, 2002), 127-128. [본문으로]
  5. Robert Wuthnow, ed., “I come away stronger”: how small groups are shaping American religion (Grand Rapids: Eerdmans, 1994), 358-360. [본문으로]
  6. Larry Stockstill, The Cell Church (Ventura: Regal Books, 1998), 119-120. [본문으로]
  7. 개혁교회 안에서도 소그룹의 사례를 찾아볼 수 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조나단 웨드워드의 부흥운동이다. Cf. Jonathan Edwards, “Some Thoughts On The Revival of Religions In New England,” in The Works of Jonathan Edwards (1834; repr., Peabody: Hendrickson Publisher, 2000), 1:365-430. 그러나 감리교의 속회(classes)나 오순절의 구역(home cell groups)에 비해 개혁교회에서는 소그룹의 전통이 눈의 띄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본문으로]
  8. Robert Wuthnow, ed., “I come away stronger”: how small groups are shaping American religion, 356. [본문으로]
  9. 대부분의 지역교회와 같이 필자가 섬기는 교회 역시 거주지를 중심으로 구성된 소그룹(구역, 셀, 목장 등)이 조직되어 있다. 상시적이고 지속적인 소그룹의 역할은 거주지 중심의 소그룹이 담당하고 있기에 큐티 나눔방은 3~4개월을 유지한 뒤 흩을 수 있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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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소그룹과 말씀묵상2020. 4. 4.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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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티 목회 01 _ 큐티의 신학적 이해

큐티 목회 01 _ 큐티의 신학적 이해 큐티 목회 02 _ 큐티의 목회적 이해 큐티 목회 03 _ 소그룹 나눔방의 명암 큐티 목회를 위한 첫 번째 단계는 큐티에 대한 신학적 이해다. 그런데 큐티는 성경에 접근하는 하나..

hanjin0207.tistory.com

큐티의 목회적 이해를 위해 사도 바울의 교회론이 담겨 있다고 평가를 받는 에베소서의 한 구절로부터 시작해보자. 에베소서 2장 20절이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이 구절에서 “너희”는 좁은 의미로 에베소교회 성도들을 지칭하지만, 에베소서가 바울의 교회론을 담고 있다는 점을 기억한다면 “너희”는 에베소교회, 나아가 바울의 교회론이 지향하는 바로 그 교회를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 있다. 바울은 교회의 터와 모퉁잇돌에 대해 이야기한다. 곧, 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져야 하며 교회의 모퉁잇돌은 예수 그리스도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가 의미하는 바에 대해 다양한 해석을 제시할 수 있지만, 신약성경 27권이 정경으로 채택된 근거가 사도성이었다는 점을 기억한다면 ‘사도들의 터’는 신약성경으로 그리고 ‘선지자들의 터’는 선지자들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의미에서 구약성경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교회의 든든한 터(기초)는 신구약성경이다. 나아가 바울은 교회의 모퉁잇돌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선언한다. 교회의 터와 연관하여 본다면, 신구약성경이 증언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모퉁잇돌이 되어야 한다. 

교단 및 신학적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기초는 신구약 성경이며 교회의 모퉁잇돌은 신구약성경이 증언하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공유하는 신념이다. 그러나 목회적 관점은 여기에 새로운 질문을 제기한다. ‘어떻게’ 지역교회를 신구약성경에 그 기초를 든든히 둔 교회로 만들 수 있으며,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만을 지역 교회의 모퉁잇돌로 자리 잡게 할 수 있는가? 


교회의 터와 모퉁잇돌을 든든히 놓기 위한 목회적 방안 

먼저 지역교회가 신구약성경에 그 기초를 든든히 놓기 위한 목회적 방안이다. 목회자는 자신의 교회(성도)가 언제나 성경에 근거하여 모든 일을 바라보고 결정하기를 기도한다. 이를 위해 최선을 다하여 성경을 연구하며 매주 설교를 준비한다. 그러나 일주일에 한 번의 설교로 모든 성도의 영적 필요를 채우기란 역부족이다. 그래서 수요예배, 금요기도회, 새벽기도회 등 다양한 예배와 기도회 시간마다 성경에 근거한 설교를 충실하게 준비하여 선포한다. 그렇지만 여전히 성도 개인이 마주치는 다양한 사건과 상황에 대한 성경적 대답을 다 제공할 수 없음을 알기에, 목회자는 가가호호를 심방하며 그곳에서도 성경을 읽고 설교한다. 그러나 제아무리 성실하고 뛰어난 목회자라도 모든 성도가 신구약성경에 근거한 삶을 살도록, 나아가 교회가 신구약성경에 그 기초를 든든히 두도록 돕기에는 한계가 존재한다. 대부분 한국교회에서 전임 목회자 대 성도의 비율은 1:100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성도들이 매일의 삶을 성경에 근거를 두고 살아가게 하며, 나아가 지역교회가 신구약성경이라는 분명한 기초 위에 세워질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가능한 대답 가운데 하나가 ‘큐티 목회’다. 지역 교회 안에 큐티를 정착하면 이 과제가 많은 부분 해소될 수 있다. 목회자가 매일 모든 성도에게 꼭 필요한 성경 말씀을 해석하고 적용해줄 수는 없지만 성도들이 매일 큐티를 하며 ‘오늘 나에게 주시는 말씀’을 찾을 수 있도록 훈련시킬 수 있다. 한 명의 목회자가 매일 100명이 넘는 성도들을 먹이기 위해 물고기를 잡아주려고 노력하는 대신 100명의 성도들에게 시간과 정성을 들여 매일 자신에게 필요한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기술을 전수하는 방법이다. 바로 이것이 큐티를 지역 교회에 정착하였을 때 목회적으로 누리는 풍성함이다. 

큐티 목회라는 이 글의 주제에서는 조금 벗어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교회의 모퉁잇돌로 세우는 목회적 대안에 대해서도 잠시 언급하겠다. 예수 그리스도가 지역교회의 모퉁잇돌이 된다는 것은 교회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으며 복음의 은혜를 지속적으로 누리며 살아간다는 의미요, 나아가 교회의 모든 활동이 복음의 감격 위에 진행된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생동감 있게 성도들의 삶과 교회의 모든 활동을 이끌게 할 수 있는 목회적 방안은 무엇인가? 어느 목회자가 예수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모퉁잇돌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깊이 인식하고 주일 설교 시간에 복음의 내용을 힘있게 선포했다고 생각해보라. 대부분의 성도들은 그 설교를 통해 복음을 새롭게 경험할 것이다. 그렇게 한주가 지났고 목회자는 그 다음 주일에도 또 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힘있게 선포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 주일에도 목회자는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설교하였다. 그렇게 매주 복음의 내용만을 설교하는 목회자가 있다면, 그가 제 아무리 뛰어난 설교 능력을 갖추었더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성도들은 설교에 대해 불만을 품게 될 것이다. 교회의 모퉁잇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지만 매주 동일한 회중을 대상으로 설교해야 하는 목회자의 입장에서 동일한 내용을 반복하는 것은 부담스럽다. 

주일 설교가 다양한 주제를 다루어야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지역교회 성도들의 마음에 지속적으로 반복될 수 있는 목회적 대안이 필요하다. 그 대표적인 방법이 전도와 일대일제자 양육이다. 노방에서 전도지를 나누어 주는 것부터 시작하여 사회복지나 문화행사를 통해 불신자의 마음을 얻는 것까지 전도의 형태는 다양하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지역교회의 모퉁잇돌로 분명히 자리매김하기 위한 목회적 방안으로서의 전도는 특별히 ‘복음제시’(presenting the Gospel)를 말한다. 평신도 개인이 자신의 입을 열어 다른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야기할 때 복음의 은혜를 다시금 기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일대일제자 양육 역시 좋은 목회적 대안이다. 여기서 말하는 일대일제자 양육이란 어떠한 교재, 혹은 특정 교회나 단체가 시행하는 제자 양육 프로그램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평신도가 다른 평신도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중점적으로 양육하는 시스템을 총칭하는 용어다. 이러한 프로그램을 진행하면 한편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게 되고 다른 한편에서는 그것을 듣게 된다. 만일 하나의 지역교회에 100팀의 일대일제자 양육이 시행된다면 목회자가 복음의 정수를 강단에서 설교하지 않을지라도 200명의 성도들은 매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든지 듣든지 하게 된다. 결국 전도와 일대일제자 양육의 핵심은 복음제시에 있으며, 교회 성도들이 복음의 은혜를 늘 기억하기 위해서는 성도들이 자신의 입술로 복음을 제시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목회적 기술이 필요하다.[각주:1]


큐티 목회의 인간 이해 

큐티는 신구약 성경을 지역교회의 기초로 확립하는 데 매우 효과적인 목회 방법이지만, 여기에는 성경에 대한 신념과 다른 한편으로는 평신도에 대한 긍정적인 관점이 전제되어 있다. 성경에 대한 신념이란 신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하지 않아도 ‘성경’은 누구나 읽기만 하면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고 하나님의 음성(특별 계시)을 들을 수 있다는 믿음이다. 아울러, 인간에 대한 긍정적 관점이란 ‘대부분의 인간’이 전문적인 신학 지식이 없더라도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다는 긍정적 인간론을 말한다. 

만일 펠라기우스의 자유의지론에 대항하여 ‘원죄론’을 주장하였던 아우구스티누스가 오늘날의 큐티 방법론을 알게 되었다면 평신도들의 자유로운 해석과 평신도들만의 큐티 나눔방(대부분의 큐티 나눔방은 평신도가 인도한다)에 대해 어떠한 평가를 내릴까? 실례로, 인간론에 있어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을 따랐던 16세기 종교개혁자 존 칼뱅은 재세례파의 모임에 대해 몹시 회의적이었다. 콘라드 그레벨(Conrad Grebel)이나 펠릭스 만츠(Felix Mantz)를 비롯한 재세례파들은 개인 가정에서 성경을 공부하였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성경공부를 통해 유아세례를 거부하면서 그레벨이 만츠의 집에서 이미 세례를 받은 조지(George)에게 (재)세례를 주었기 때문이다.[각주:2] 칼뱅은 이러한 재세례파의 출현을 바라보면서 개인의 가정에서 사적으로 성경을 읽고 공부하는 것은 검증되지 않은 가르침이 확산될 위험성이 있음을 인식하였고, 재세례파의 신학과 신앙생활을 정죄하였다.[각주:3] 칼뱅의 신학을 따르는 칼뱅주의는 인간에 대한 신학적 입장을 ‘전적 타락’(total depravity)으로 표현하기도 하였는데, 전전으로 타락한 인간은 결코 자신의 이성으로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진리를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칼뱅의 신학을 따르는 개혁주의 신학의 입장에 서 있는 목회자와 교회는 큐티 목회를 시행함에 있어 자신의 신학적 인간론이 큐티 목회와 상충하는 것은 아닌지 반드시 점검해보아야 한다. 

신학적 인간론에 있어서 칼뱅과 반대의 경우도 존재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존 웨슬레의 아르미니안 주의를 꼽을 수 있다. 존 웨슬레의 아르미니안 주의는 당시 영국 성공회가 주로 받아들였던 신학적 결정론을 반대하면서 인간의 행동은 예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며 사람의 본성 안에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내재되어 있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웨슬레의 인간론은 케드먼이 ‘웨슬리 가르침의 왕관’이라고 표현한[각주:4] ‘그리스도인의 완덕’(Christian perfection)이라는 교리로 이어진다. 곧,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분명한 인식이 있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이 가르치는 참된 완덕을 실현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실제로 웨슬리는 긍정적 인간론을 견지하였기에 평신도가 인도하는 소그룹 모임인 속회(class meeting)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각주:5] 그러므로 우리 시대, 평신도들이 주도하는 큐티와 큐티 나눔방이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먼저 목회자와 교회가 존 웨슬리의 아르미니안 주의와 같은 긍정적 인간론을 받아들여야 한다. 

전적 타락으로 요약할 수 있는 존 칼뱅의 인간론과 아르미니안 주의로 표현할 수 있는 존 웨슬리의 인간론 가운데 어느 하나는 옳고 어느 하나는 그르다고 평가할 수 없습니다. 다만, 존 칼뱅은 웨슬리와 비교했을 때 부정적인 인간론을 견지하였기에 평신도들의 자발적인 성경공부 모임을 지양하였고, 그 대신 제네바 아카데미(Genevan Academy)와 같은 신학생 및 목회자들의 말씀 훈련의 장에 더욱 집중하였다. 반면, 존 칼뱅에 비해 긍정적인 인간론의 입장에 있었던 존 웨슬리는 평신도들의 모임인 속회(class meeting)를 조직하여 활성활시킬 수 있었다. 이와 같이 목회자의 신학적 인간론은 그에 따르는 목회 방법론을 추구하게 되는데, 목회자가 평신도를 바라보는 자신의 인간론에 대한 성찰 없이 단지 하나의 방법론으로서 큐티를 채택한다면 신학적 혼란을 초래함은 물론이요, 큐티 목회라는 방법론이 갖고 있는 역동성도 상실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큐티라는 방법론을 목회적으로 도입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할 사항 가운데 하나는 목회자 자신의 신학적 인간론이다. 


큐티 목회의 위험성 – 큐티 율법주의 

큐티는 지역 교회의 기초를 신구약 성경에 든든히 세우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그러나 큐티 목회가 추구하는 가치를 모든 성도들이 공유하지 못한다면 오히려 부작용을 일으킬 수도 있다. 그 대표적인 부작용이 큐티 율법주의다. 일반적으로 큐티 율법주의는 교회 안에서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데, 그 첫째는 다른 사람을 향한 자세요 또 하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자세다. 

먼저 큐티 율법주의는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경향으로 나타난다. 큐티가 교회에 아무리 잘 정착되어도 지속적으로 큐티를 하지 않는 성도들은 얼마든지 존재한다. 그리고 그 가운데 대부분은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 그런데 큐티를 깊이 경험한 성도들 가운데, 혹은 큐티를 가장 중요한 사역으로 여기는 목회자 가운데 큐티를 하지 않는 것을 불완전한 신앙생활로 여기는 경향이다. 마치 새벽기도회를 빠지지 않고 참여하는 성도가 새벽기도를 하지 못하는 성도들을 판단하거나, 전도의 결과가 많은 성도들이 그렇지 못한 성도들을 무시하는 듯한 태도다. 

또한 큐티 율법주의는 자기 자신이 큐티에 얽매이는 경향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하루도 빠짐없이 큐티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괴롭히는 것이다. 일찍이 큐티 목회를 하면서 이러한 현장을 많이 경험하였던 하용조 목사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했다. “큐티를 하지 못할 때 죄책감이나 좌절감에 빠지지 마십시오. 큐티를 안 한다고 신앙생활을 안 하는 것이 아닙니다. 큐티를 본의 아니게 하지 못했다고 해서 너무 자기를 정죄하거나 비판하는 율법주의적인 큐티를 해서는 안 됩니다.”[각주:6]


큐티와 목회 리더십 

큐티의 목회적 이해를 위해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목회자의 역할이다. 정성국 교수는 큐티 목회에 있어 목회자의 역할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성경 해석학 훈련을 받지 못한 이들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본문의 역사적 배경과 성경 언어에 대한 집중적 훈련이라고 보다는, 성경 전체의 메시지를 일관되게 설명할 수 있는 프레임을 부여해 주는 것이다.”[각주:7] 목회자가 본문에 대한 다양한 정보와 해석을 성도들에게 제공하려는 자세는 성도들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는 부정적 인간관(아우구스티누스나 칼뱅과 같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큐티 목회가 보다 역동적인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묵상과 적용의 역할을 성도들에게 맡겨야 한다. 비록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묵상과 적용이 등장하겠지만 그러한 과정을 포용하며 목회자는 교회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거대한 이야기(Meta-Narrative)에 집중해야 한다. 결국, 큐티 목회에서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큐티의 세세한 진행이 아니라 예배 설교자로서의 역할이다. 설교자로서 자신이 바라보는 성경의 거대한 관점을 제시해준다면, 성도들의 개별적인 묵상과 적용은 교회 공동체가 공유하는 복음 이야기의 한 부분으로 자리잡게 된다. 

 

 

큐티 목회 03 _ 소그룹 나눔방의 명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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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큐티 나눔방을 통해 복음제시가 가능할까?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보다 효과적인 복음제시를 위해서는 일대일의 만남이 필요하다. 귀납법적 성경공부 모임 가운데 하나인 ‘커피 브레이크’는 그 목적을 전도에 둔다. 소그룹 모임의 목적 자체가 전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피 브레이크의 지도자 뎁 페네마는 복음제시를 위해 일대일로 만날 수 있는 소그룹 외의 별도의 시간을 갖는 것이 좋다고 조언한다. Deb Fennema, <커피 브레이크 성경공부 안내서> 전지현 역 (서울: 도서출판 커피브레이크, 2008), 26-27. [본문으로]
  2. Timothy George, Theology of the Reformers (Nashville: Broadman, 1988), 255-256. [본문으로]
  3. 재세례파에 대한 칼뱅의 비판에 대해서는 John Calvin, Institutes, 4. 12. 12.를 보라. [본문으로]
  4. S. Parkes Cadman, The Three Religious Leaders of Oxford and Their Movement: John Wycliffe, John Wesley and John Henry Newman (New York: the Macmillan Company, 1916), 341. [본문으로]
  5. 존 웨슬리의 인간론과 속회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D. Michael Henderson, A Model for Making Disciples: John Wesley’s Class Meeting (Nappanee: Evangel, 1997), 85-86를 참고하라. [본문으로]
  6. 하용조, <큐티하면 행복해집니다> (서울: 두란노, 2008), 161. [본문으로]
  7. 정성국, <묵상과 해석> (서울: 성서유니온, 2018), 23.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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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소그룹과 말씀묵상2020. 4. 3.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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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티 목회 01 _ 큐티의 신학적 이해

큐티 목회 02 _ 큐티의 목회적 이해

큐티 목회 03 _ 소그룹 나눔방의 명암

 

큐티 목회를 위한 첫 번째 단계는 큐티에 대한 신학적 이해다. 그런데 큐티는 성경에 접근하는 하나의 방법론이므로 큐티에 대한 신학적 이해는 해석학적 측면, 곧 큐티라는 방법론 뒤에 놓여 있는 성경해석의 원리들을 탐구해야 한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큐티는 이러한 해석학적 탐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몇몇 신학자들로부터 오해를 받아온 것이 사실이다. 예를 들어, 장로회신학대학교 최진봉 교수는 현재 출판 중인 큐티집을 분석하면서 그 대부분이 ‘개인’이나 ‘개별’ 기관이 제작하였기에 성경 본문의 선정 및 배열의 기준이 각기 상이하고 자의적이며, 그 결과 주일의 경건 실천인 예배와 단절되어 있다고 평가한다. 반면, ‘매일 성구집’(Daily Letionary)은 역사적 ‘공동체’나 ‘교회’가 만들었기에 오랜 기독교 역사 속에서 형성된 신학적 방향성 위에 본문을 배열하였고, 그 결과 ‘교회력’에 부합하여 다양한 경건의 실천과 연결성을 갖게 된다는 주장이다.[각주:1] 요약하자면, 큐티가 대중적인 말씀 운동이기는 하지만 신학적/역사적 배경이 약하기 때문에 교회는 큐티라는 잠시 유행하는 대중적 방법론보다는 교회사 속에서 오랜 시간 점검을 받아온 ‘매일 성구집’의 활용을 확대해야 한다는 논리다. 

큐티는 여러 학자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오랜 역사 속에서 여러 목회자와 신학자들의 신학적 작업 위에 형성된 방법론은 아니다. 성경의 삼중적 의미를 주장한 오리게네스의 <원리론>으로부터 시작하여 계몽주의의 성서비평학에 이르기까지, 나아가 슐라이어마허로부터 시작하여 폴 리쾨르로 이어지는 현대적 해석학 안에서도 큐티에 대한 성서해석학적 분석은 시도되지 않았다. 그러나 성서해석학적 분석이 없었다는 것과 성서해석의 원리가 부재하다는 것은 전혀 다르다. 성경에 접근하는 모든 ‘방법론’은 사람들이 인식하든지 그렇지 않든지 상관없이 나름의 성경해석학적 ‘원리’ 위에 세워져 있다. 그러므로 큐티라는 방법론에 대한 신학적 평가는 큐티 뒤에 놓여 있는 ‘원리’를 발견하고, 그 ‘원리’들을 평가할 때 그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 


순차적 읽기(Lectio Continua)와 귀납적 성경 연구 

큐티는 순차적 읽기 방식을 채택한다. 순차적 읽기란 성경의 한 권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순서대로 읽는 것을 말한다. 중간에 건너뛰는 본문도 없으며, 순서를 바꾸는 일도 없다.[각주:2] 성경을 순서대로 읽는 것이 무엇이 특별하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1519년 1월 1일 울드리히 츠빙글리가 신년을 시작하면서 취리히 그레이트 미니스터(Great Minister)의 강단에서 마태복음 1장 1절부터 순차적으로 신약 성경을 설교하기 시작한 것은 곧 로마가톨릭교회와의 단절을 의미했다.[각주:3] 당시 모든 서방교회가 사용하고 있던 전통적인 성구집(lectionary)을 거부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불링거는 츠빙글리의 이 용기 있는 행동을 “주의 복음을 난도질하기”를 거부한 것이요, “어떤 인간적인 첨가물 없이” 설교한 것이라고 묘사한다.[각주:4]   

로마가톨릭교회는 교회력과 나름의 신학적 체계에 맞추어 성경을 재배치하여 성구집을 만들었지만 츠빙글리는 그 어떠한 신학적 체계보다도 성경 자체가 스스로 말하게 하는 것(let the Bible speak)을 더욱 중요하게 여겨 순차적 성경읽기 방식은 선택하였다.[각주:5] 츠빙글리의 순차적 읽기는 존 칼뱅에게 이어져 개혁교회의 전통을 형성하였고 ‘오직 성서’(Sola Scriptura)라는 종교개혁의 원칙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하나의 방법론이 되었다. 그러므로 교회력과 성구집은 기독론 중심의 신학적 근거 위에 세워져 있지만, 큐티는 자의적으로 성경본문을 선택하고 있기에 신학적 근거가 약하다는 주장은 옳지 않다. 큐티는 순차적 읽기라는 방법론의 뒤에 놓여 있는 신학적 원리, 곧 신학적 체계나 신념보다 성경의 순서를 중요하게 여기는 분명한 성서해석학적 관점 위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성경 연구 방법론은 논리의 흐름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곧 연역적 방법과 귀납적 방법이다. 연역적 방법은 주제를 먼저 정하고 주제와 연관된 성경본문을 연구한다. 그러나 귀납적 방법은 어떠한 주제도 먼저 상정하지 않고, 성경 본문을 먼저 탐구하고 그 본문이 담고 있는 주제들을 다룬다. 큐티는 순차적 읽기(Lectio Continua)를 따르기에 기본적으로 귀납적 방법론에 서 있다. 하워드 헨드릭스에 의하면, 귀납적 성경 연구가 ‘관찰’(observation) - ‘해석’(interpretation) - ‘적용’(application)의 순서로 진행되는데,[각주:6] 큐티 역시 ‘읽기’(reading) – ‘묵상’(meditation)- ‘적용’(application)의 순서로 진행된다. 그리고 아래의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 내용은 거의 동일하다.[각주:7] 


귀납적 성경 연구는 ‘관찰’ – ‘해석’ – ‘적용’의 순서를 따르고, 큐티는 ‘읽기’ – ‘묵상’ – ‘적용’의 순서를 따른다고 할 때, 중요한 점은 언제나 관찰(읽기)로부터 시작해서 적용으로 마쳐야 한다는 점이다(위의 표에서 화살표의 방향에 주목하라). 곧, 관찰(읽기)이 선행되지 않고는 해석(묵상)이 불가능하며, 해석(묵상)이 선행되지 않고는 적용이 불가능하다. 큐티의 핵심은 묵상과 적용이지만,[각주:8] 관찰의 과정을 소홀히 한 묵상과 적용은 올바른 큐티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개인이나 공동체의 주관적인 신학적/신앙적 관심사를 배제하고 성경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여 개인의 생각이나 행동을 성경의 관점에 맞추어야 한다는 기본 전제가 큐티와 귀납적 성경 연구 사이의 공통분모이며, 이는 큐티의 해석학적 특징이다. 


평신도의 성경 해석 – 주관적, 개인적 특성 

큐티는 순차적 읽기(Lectio Continua)와 귀납적 성경 연구의 원리들을 따라가기에 성경 본문의 원래적 의미를 강조하는 방법론적 특징을 지닌다. 그러나 동시에 큐티는 전문적인 신학자나 목회자의 성경 연구가 아니라 신학을 공부하지 않은 평신도들이 성경을 해석하고 묵상하기에 주관적인 특성을 갖게 된다. 

오늘날 성경을 대하는 독자는 언제나 두 가지 세계의 사이를 여행하게 된다. 곧 성경의세계와 독자의 세계다. 성경은 지금으로부터 약 2000년 이전에 기록되었다. 성경이 기록된 장소도 이스라엘과 그 주변의 지역들이다(there and then). 이러한 성경을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이스라엘을 기준으로 거의 지구 반대편에 해당하는 한반도에서 읽고 있다(here and now). 이처럼 성경의 세계와 독자의 세계는 시간적, 공간적, 문화적, 언어적으로 상당한 차이가 있는데 오늘날 성경을 읽는 독자는 이 두 세계 사이를 왕래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성경을 읽는 방식에 따라 성경의 세계와 독자의 세계 가운데 어느 하나를 다른 하나에 비해 강조하게 된다. 성경의 세계로 들어가 저자[혹은 편집자]의 원래적 의도를 찾아가는 과정이 과학적 방법론을 활용한 객관적 작업이라면, 독자의 세계를 강조하며 성경 본문을 통해 개개인을 위한 영적 교훈을 찾는 과정은 그 내용을 객관적으로 검증하기 어렵다는 측면에서 주관적 측면이 강하다. 

큐티는 성서학을 비롯한 신학 전반에 대한 학문적 훈련을 받은 적이 없는 평신도 개인이 성경을 묵상하기에 성경의 세계에 대한 집중보다는 오늘 자신에게 주시는 말씀(특별히 묵상의 단계), 곧 독자의 세계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그런 점에서 큐티는 순차적 읽기와 귀납적 성경 연구의 방법론 위에 있지만 동시에 평신도의 지극히 주관적인 성서 해석이라는 해석학적 특성을 지닌다. 이것이 큐티와 성경공부 – 귀납적 성경 연구를 포함하여 – 의 결정적인 차이점이다. 다시 말해, 큐티와 성경공부는 그 강조점이 다르다. 성경공부 역시 성서의 세계를 탐구하여 본문이 독자의 세계에 던지는 통찰력을 발견하고, 큐티 역시 독자의 세계를 강조하면서 성서의 세계를 간과하지 않지만, 성경공부는 독자의 세계보다는 성서의 세계에 그 강조점이 있으며 큐티는 성서의 세계보다는 독자의 세계에 그 강조점이 있다. 

큐티의 주관적 특성과 아울러 지적해야 할 또 하나의 특징은 큐티의 개인적 특성이다. 큐티는 오늘 나에게 주시는 말씀을 찾는 과정이기에 다른 누군가가 대신 묵상하고 해석해 줄 수 없다. 목회자나 큐티 지도자가 성경 본문에 대한 묵상 및 적용의 예는 얼마든지 보여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목회자나 큐티 지도자의 묵상과 적용이다. 아무리 좋아 보이는 묵상 및 적용이라도 큐티를 하는 개인이 ‘오늘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의 큐티’가 된다. 대중적인 큐티는 언제나 혼자 큐티를 할 것을 권한다. 심지어 부부도 함께 큐티하는 것을 금지한다. 그 이유는 동일한 본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큐티를 하는 각자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이 별도로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각주:9]  

큐티의 개인적 특징은 큐티와 설교를 듣는 것을 비교할 때 더욱 분명해진다. 대부분의 큐티 지도자들이 개인의 말씀 생활에 있어서 설교를 듣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주장한다.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지만 큐티를 통해 오늘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대중적인 큐티가 이처럼 설교와 개인 말씀생활인 큐티를 구분하는 것은 설교는 어디까지나 설교자의 본문 해석이며 설교자의 본문 적용이기 때문이다. 큐티는 설교자, 큐티 지도자, 배우자 등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나 자신의 개인적인 묵상과 나 자신의 개인적인 적용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개인적인 해석학적 특성을 지닌다. 


해석의 준거점 

큐티는 순차적 읽기와 귀납적 성경 연구의 방법을 따른다는 측면에서 성경의 본래적인 의미를 추구하면서도, 개인의 묵상과 적용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특성이 공존한다. 어찌 보면 이 두 가지 특징은 상충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 큐티 현장에서는 이러한 특징들이 서로 갈등을 일으키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물론, 때로는 성경의 본래적 의미를 찾는데 집중하는 것처럼 보이고 때로는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특징이 두드러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지역교회에서 큐티 목회를 시행하려면, 보다 넓은 시각으로 큐티는 이러한 두 가지 특징이 함께 어우러져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정성국 교수는 성서해석학의 원리로 큐티를 분석한 <묵상과 해석>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단언한다. “해석의 목적이 해석 방법에 우선한다.”[각주:10] 그가 말하는 ‘해석의 목적’(hermeneutical goal)은 ‘해석의 준거점’(hermeneutical reference point)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는데 곧 작은 개개의 사건을 해석하는 거대한 해석의 이야기를 뜻한다. 쉽게 이야기하여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경을 해석하는 준거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사건이다. 이 거대한 복음의 이야기(Meta-Narrative)를 준거점을 사용하여 구약과 신약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해석한다. 이때 해석의 방향을 결정짓는 것은 해석의 목적인 거대한 이야기지, 해석의 방법론이 아니라는 것이다. 정성국 교수의 논점을 큐티에 적용하면 이런 결론을 얻게 된다. 큐티의 묵상 결과를 좌우하는 것은 큐티를 시행하는 공동체의 ‘해석 준거점’,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드러난 복음이지 성경 본문에 대한 개인의 관점이 아니다. 그러므로 교회 공동체가 기독교의 복음을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있다면 큐티를 하는 과정에서 때로는 본문의 원래적 의미를 찾기 위해 노력하면서 때로는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묵상과 적용에 치우치더라도 크게 염려할 것이 없다. 큐티를 통해 얻게 되는 이와 같은 작은 정보들은 그들의 마음에 담겨있는 복음의 이야기 안에서 재해석될 것이기 때문이다. 

Your Story is A Truth; 
But, God’s Story is The Tru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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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티 목회 03 _ 소그룹 나눔방의 명암

큐티 목회 01 _ 큐티의 신학적 이해 큐티 목회 02 _ 큐티의 목회적 이해 큐티 목회 03 _ 소그룹 나눔방의 명암 큐티 나눔방의 유익 큐티는 내가 개인적으로 말씀을 묵상하고 묵상한 말씀을 내 개인의 삶에 적용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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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최진봉, “개인과 교회를 위한 매일 성경 읽기로서의 말씀 묵상집(Q.T.)과 매일 성구집(Daily Lectionary)에 대한 연구,” <신학과실천> 42 (November 2014): 193. [본문으로]
  2. 물론 예외는 있다. 사순절(특별히 고난 주간), 대강절 등 절기에 맞춰 성경의 본문을 선택하는 경우다. [본문으로]
  3. 츠빙글리는 마태복음 이후 사도행전, 디모데전후서, 갈라디아서, 베드로전후서를 순차적으로 설교하였고, 1525년에 요한계시록을 제외한 신약성경 전체(츠빙글리는 요한계시록의 정경성을 의심했다)를 설교하였다. 신약성경의 모든 본문을 설교한 후 그는 계속해서 구약성경을 순차적으로 설교하기 시작했다. [본문으로]
  4. Timothy George, <개혁자들의 신학> 이은선, 피영민 역, (서울: 요단출판사, 1994), 151. [본문으로]
  5. Hughes Oliphant Old, The Patristic Roots of Reformed Worship (Zürich: Theologischer Verlag, 1975), 194-97. [본문으로]
  6. 귀납법적 성경연구에 대해서는 Howard G. Hendricks and William D. Hendricks, Living By the Book: The Art and Science of Reading the Bible, revised and updated (Chicago: Moody Publishers, 2007)를 참고하라. [본문으로]
  7. 큐티를 강의하는 사람들마다 진행 순서가 조금씩 다르다. 그러나 큰 뼈대는 동일하니 곧 관찰-묵상-적용이다. [본문으로]
  8. 두란노를 중심으로 한국교회에 큐티를 대중화시킨 고 하용조 목사는 큐티의 핵심은 묵상과 적용이라고 분명히 선을 그었다.  “ 큐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묵상입니다. 하나님과 만나는 깊은 묵상이 큐티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큐티의 또 하나의 핵심은 묵상된 말씀을 적용하는 일입니다.” 하용조, <큐티하면 행복해집니다> (서울: 두란노, 2008), 22 [본문으로]
  9. “큐티는 내가 하나님과 일대일로 만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혼자 하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부부가 함께 큐티를 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인격적으로 만나 주시기 때문에 남편에게는 남편대로, 아내에게는 아내대로 각각에게 하실 말씀이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일대일로 하십시오.” 하용조, <큐티하면 행복해집니다>, 94-95. [본문으로]
  10. 정성국, <묵상과 해석> (서울: 성서유니온, 2018), 69-73.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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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소그룹과 말씀묵상2020. 4. 3.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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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은 옛 언약(구약)과 새 언약(신약)을 극명하게 대비하여 설명한다. 옛 언약은 돌에 쓴 것으로 사람을 정죄하고 죽이는 역할을 하지만, 새 언약은 마음에 쓴 것으로 사람을 살리는 역할을 한다. 뿐만 아니라, 옛 언약이 영광은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면 없어질 유한한 것이었다면, 새 언약은 영원히 있을 것으로 더욱 영광이 있다(고후 3:6-11). 바울의 이와 같은 설명은 기독교인들에게 구약 성경은 ‘옛 언약의 책’이라는 이미지를 각인시키곤 하였다.  그렇다면 기독교인들은 한 권으로 편집된 성경 가운데 신약 성경은 새 언약의 책으로, 구약 성경은 옛 언약의 책으로 이해하는 것이 정당한가? 

사도 바울의 논리는 옛 언약와 새 언약을 뚜렷이 구분하지만, 이러한 구분이 곧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이라는 구체적인 책의 종류를 구분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없다. 오히려 바울의 문장 속에는 옛 언약과 새 언약을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점이 분명히 드러나는데, 그것은 바로 ‘문자’(letter)와 ‘영’(Spirit)이다.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고후 3:6b)  성경의 한 부분을 구성하는 어느 책이든, 문자는 사람을 죽이지만 영은 사람을 살린다. 곧, 구약 성경을 문자로만 대하면 구약의 율법이 사람을 죽이지만, 구약 성경을 영으로 읽는 사람에게는 구원의 말씀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기준은 신약 성경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예수님 시대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구약 성경의 전문가로서 그 내용을 완전히 암기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들의 지식은 문자적 지식이었을 뿐 영적 지식은 아니었다.  성경의 문자적 의미는 알고 있었지만, 그 뒤에 감춰진 영의 세계는 알지 못했고, 무엇보다 구약의 예언이 그들의 눈앞에서 활동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고 있다는 사실을 볼 수 있는 영의 눈이 없었다. 그들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았지만 그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고’(눅 12:56)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그렇다면, 신약 성경을 읽는 기독교인들에게는 성경을 영이 배제된 문자로만 읽을 위험성은 없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구약 성경을 읽든, 신약 성경을 읽든 ‘문자는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다.’ 

성경을 영으로 읽는다는 의미는 성경의 문자 뒤에 담긴 의미를 읽는다는 의미요, 그 문자들이 증거하는 하나님의 역사를 읽는다는 의미다. 나아가, 오늘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대면하며 오늘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단순한 성경 공부(Bible Study)는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영으로서의 말씀이 될 수 없다. 성경의 세계(then and there)를 넘어 독자의 세계(now and here)를 파고드는 말씀과의 만남을 통해서만 성경은 문자를 넘어 영이 된다. 

바로 여기에서 말씀묵상(QT)에 내포되어 있는 위험성과 더불어 방향성을 발견하게 된다. 곧, 말씀을 묵상한다고 하면서도 성경을 지식으로만 접근한다면, 그리하여 성경이 문자가 되어버린다면 그러한 말씀묵상은 우리를 교만의 늪에 빠지게 만든다. 오히려 말씀 묵상이 자신의 영혼을 죽이는 문자로 작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말씀 묵상을 통해 성경 지식을 쌓는 것에 목적을 두지 않고 그저 한 구절이라도 나의 삶에 적용하여 순종의 발걸음을 내딛는다면 비로소 우리가 묵상하는 말씀은 영이 되어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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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소그룹과 말씀묵상2020. 4. 2.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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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신학자 데이비드 페린(David B. Perrin)은 “인간성에 대한 깊은 관심과 초월적 가치에 대한 신념이 함께 만나 인생의 궁극적 성취를 향해 나아가는 바로 그 지점에 기독교 영성이 위치한다”고 주장한다. [각주:1]  그의 주장을 따르면, 세 가지 차원이 함께 공존해야 그것을 기독교영성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데, 그 세 가지 차원이란 (1) 인간성, (2)초월적 가치, 그리고 (3) 인생의 궁극적 성취다. 그런 점에서, 최근 등장하는 다양한 영성훈련 프로그램이 건전한 기독교 영성을 추구하는지 여부는 위의 세 가지 요소로 판가름해 볼 수 있다. 만일 이 가운데 단 하나라도 배제된다면, 그것은 어딘가 부족한 기독교 영성훈련이라 평가할 수 있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성경묵상은 언제나 기독교 영성훈련에 핵심적인 역할을 해 왔다. 성경 묵상이 영성 훈련을 위한 매우 핵심적이고도 효과적인 활동이라는 점에 이의를 제기하는 기독교인은 거의 없다. 그러나 성경 묵상이 탁월한 영성 훈련의 방법일지라도 성경을 대하는 방법이나 태도는 개인이나 공동체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그러므로 누군가의 성경 묵상이 과연 건전한 기독교 영성을 추구하는 추천할 만한 영성훈련활동인지는 재차 점검해보아야 한다. 이때 데이비드 페린이 제시한 기독교 영성의 세 가지 측면은 성경 묵상의 방법이나 태도를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다. 

첫째, 말씀 묵상이 건전한 기독교 영성훈련이 되기 위해서는 ‘인간성’에 대한 깊은 관심이 포함되어야 한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온갖 종류의 감정이나 희노애락 등을 정직하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성경 묵상을 통해 인간의 심성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죄성의 문제를 통감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영성훈련으로서의 말씀 묵상은 그리스도인 개인이나 기독교 공동체에 자리잡고 있는 인간적 한계와 죄성에 대한 분명한 인식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둘째, 말씀 묵상이 건전한 기독교 영성훈련이 되기 위해서는 ‘초월성’을 경험해야 한다. 성경을 통해 인간 사회의 다양한 현실 – 인간의 한계와 죄성 – 을 정직하게 인식하는 데서 나아가 하나님께서 부여하시는 초월적 가치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관상기도나 거룩한 독서(Letio Divina) 등과 같은 대표적인 영성훈련이 구체적인 삶의 적용보다는 의식성찰[각주:2]을 비롯하여 관상이라는 초월성에 더욱 강조점을 두는 이유 역시 기독교 영성이 초월적 가치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셋째, 말씀 묵상이 건전한 기독교 영성훈련이 되기 위해서는 ‘궁극적 성취’를 지향해야 한다.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인의 완덕(Christian perfection)을,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를 본받음(imitation of Christ)을, 그리고 어떤 이들은 제자도(discipline)를 영성훈련의 궁극적 목표로 삼을 수 있다. 이처럼 기독교 영성이 추구하는 지향점은 개인이나 공동체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무엇이 되었든 분명한 지향점이 있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빌립보서 2장 5-11절은 바울 시대의 교회가 즐겨 부르던 찬송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떠한 분이신 지를 노래하는 내용이다. 이 구절은 바울의 언어라기보다는 당시 널리 퍼져있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을 바울이 직접 인용한 것이다. 한 마디로, 이 구절은 바울 시대의 교회가 공유했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본문(texts) 가운데 하나였다. 바울은 그리스도에 대한 본문을 소개한 후 빌립보서 2장 12절 이하부터 이 본문을 근거로 빌립보교인들에게 권면의 이야기를 계속하는데, 바울의 권면에는 데이비드 페린이 이야기하는 기독교 영성의 세 가지 측면이 모두 등장한다. (1) 빌립보 교회의 고질적인 병폐인 ‘원망과 시비’는 여전하지만(14절), (2) 빌립보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은 여전히 진행 중에 있다(13절). (3) 그러므로 빌립보교회는 그들의 구원을 이루기까지 나아갈 것이며,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12, 15-16절). 바울은 자신이 선택한 그리스도에 대한 본문을 근거로 인간성, 초월성, 궁극적 성취라는 기독교 영성의 세 가지 측면을 두루 갖춘 권면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신구약성경 66권이라는 확정된 본문이 주어졌다. 이 본문을 묵상하며 인간성, 초월성, 궁극적 성취라는 기독교 영성의 세 가지 측면 가운데 그 어느 것도 소홀히 하지 않을 때 말씀 묵상은 참으로 유익한 영성 훈련의 방편이 된다. 


  1. David B. Reppin, Studying Christian Spirituality (New York: Routledge, 2007), 22. [본문으로]
  2. “의식성찰은 하루 중 15분에서 20분 정도 조용한 시간을 내어서 내면(의식)의 흐름에 관심을 두면서 하루의 삶을 돌아보는 것이다. 내적 흐름을 관찰하여 하루 동안에 하나님이 어떻게 나의 삶 속에 임재하시고 역사하셨는가를 살피고, 또한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하루 동안 나의 존재와 삶은 어떠하였는지를 살피는 것이 바로 의식성찰이다.” 총회목회정보정책연구소 편, <영성목회>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2012), 9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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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소그룹과 말씀묵상2020. 4. 2.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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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감당해야 하는 사명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 첫째는 교회를 통해 새롭게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는 사람들이 일어나도록 하는 것이요, 둘째는 이미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믿음의 성숙을 경험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그리스도인 개인의 관점에서 본다면,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영적인 거듭남과 예수님 안에서 믿음이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성화로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그 누구도 예외없이 성화의 과정을 걸어야 하는 것입니다. 

영적 성숙을 추구하는 성화의 과정은 ‘순례자’의 모습으로 그려볼 수 있습니다(히브리서 11장 13절). 그리스도인은 하늘의 본향을 사모하면서, 이 땅에서는 잠시 머무는 나그네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마지막날 하늘의 본향으로 돌아갈 것이기에 이 땅에서의 삶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늘 본향을 바라보며 순례자의 삶을 살았던 신앙의 영웅들이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답게 이 세상에서 마주치는 다양한 문제들 속에서도 믿음의 선택을 하였다고 강조합니다(히브리서 11장 17절 이하). 

말씀 묵상(QT)은 순례자의 길을 걸으며 지속적인 영적 성숙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에게 필수적인 과정입니다. 이 땅에서 만나는 다양한 사건과 환경 속에서 말씀을 묵상하지 않고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찾을 수 있으며, 나아가 어떻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말씀 묵상(QT)을 통해 오늘 나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그 말씀에 순종하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조금씩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변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말씀묵상(QT)는 지식을 쌓기 위한 성경공부가 아니라 나의 믿음과 신앙이 말씀 안에서 성숙해지는 영성 훈련입니다. 말씀묵상(QT)을 통해 성경에 대한 많은 정보를 얻으려는 조급한 마음을 내려 놓으십시오. 성경을 단시간에 정복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입니다. 다만, 말씀 묵상(QT)을 통해 오늘 나의 내면에 말씀하시는 단 한 절의 말씀을 마음에 담으십시오. 그 말씀을 지속적으로 묵상하며 나의 삶에 적용하십시오. 말씀이라는 거울에 자신의 마음과 영혼을 비추어 보고, 나의 생각과 행동으로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영혼과 마음과 행동을 이끌어가는 것, 이것이 말씀 묵상(QT)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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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소그룹과 말씀묵상2020. 4. 2.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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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티란 주어진 성경본문을 내가 (1)묵상하고, 묵상한 말씀을 내 삶에 (2)적용하여 매일 하나님의 말씀에 (3)순종하는 과정이다. 

먼저, 큐티는 성경본문을 묵상한다. 묵상이라는 뜻을 지닌 ‘contemplation’의 일차적인 의미는 ‘오래도록 응시하다’는 뜻이다. 곧 큐티에서 묵상이란 시간을 두고 성경본문을 응시하면서, 오늘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내가 개인적으로” 말씀을 묵상한다는 점이다. 성경 본문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있고, 수많은 설교자들이 말씀을 선포하지만 큐티는 오늘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직접 듣는 시간이다. 

둘째, 큐티는 묵상한 말씀을 내 삶에 적용한다. 묵상을 통해 오늘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면 이제는 그 말씀을 나의 삶에 적용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큐티의 적용이 개인적이고(personal), 실제적이고(practical), 실천가능한(possible) 것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다른 사람에게 적용을 하거나, 추상적이고 불가능한 적용이라면 그러한 큐티는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수 없다. 

끝으로, 큐티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과정이다. 토저(A. W. Tozer) 목사는 “우리가 누리는 영적인 복은 하나님이 얼마만큼 우리를 정복하시는가에 정비례한다”고 말했다. 큐티를 통해 누리는 영적인 복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내가 말씀을 묵상하고, 묵상한 말씀을 나의 삶에 적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생명의 길을 걷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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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소그룹과 말씀묵상2020. 3. 26. 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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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 소그룹 프로그램 01 - 영적 여정으로서의 목회자의 삶

목회자 소그룹 프로그램 02 - 목회자의 자기 성찰 (개혁교회의 인간론)

목회자 소그룹 프로그램 03 - 목회자와 성경

목회자 소그룹 프로그램 04 - 목회자와 기도

목회자 소그룹 프로그램 05 - 목회자의 삶 (정의)

목회자 소그룹 프로그램 06 - 목회자와 공동체

 

개혁교회 신학은 영적 성숙을 위해서는 영적 공동체 안에 소속되어 있어야 함을 강조한다. 

라인홀드 니버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윤리적 덕목으로 ‘정의’와 ‘사랑’을 강조하였는데, 이를 위해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죄악된 본성을 직시하도록 하여 겸손과 회개의 마음이 일어나도록 하는 교회의 역할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니버는 기득권자들을 대상으로 한 목회가 중요한 이유에 대해 그들은 자신의 이익 추구를 사회적 구조나 법으로 정당화하기 때문이라고 하였으며, 소외계층을 대상으로 한 목회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기득권층에 반대하는 자신들의 입장에 과도한 정당성을 부여할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한 마디로, 개인이든 사회든 ‘정의’와 ‘사랑’의 덕목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교회라는 기독교 공동체의 역할이 필수적이다. 

경건의 훈련을 위해 신앙 공동체가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갈파하였던 칼뱅은 목회자의 경건훈련을 위한 별도의 기구를 ‘제네바 아카데미’라는 이름으로 설립하였다. 칼뱅이 설립한 제네바 아카데미는 고대언어를 가르치고 신학을 연구하는 학문적 깊이를 추구하면서도, 동시에 목회자들의 경건 훈련을 위한 장소였다. 다시 말해, 제네바 아카데미는 이미 말씀에 대한 연구와 사역에 헌신한 이들, 목회자로 세워지기 위하여 성경의 언어와 신학을 공부하는 이들에게 학문적 성취와 더불어 지속적인 성화의 과정을 요구함으로써 경건의 훈련을 갖춘 목회자를 배출하고자 했던 칼뱅의 의도였다. 이와 같이 개혁교회 전통은 평신도만이 아니라, 목회자들 역시 경건 훈련을 위한 그들만의 신앙 공동체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역설하고 있다. 

한국 장로교 목회자들은 모두가 교회에 소속되어 있다. 그들은 평신도들로 하여금 교회 공동체 안에 더욱 깊이 참여할 것을 권면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언제나 신앙 공동체 안에서 생활하는 듯 하다. 그러나 그들의 영적 성숙을 위해 필요한 것은 어느 지역 교회의 목회자라는 자리가 아니라, 목회자 스스로를 영적으로 지지해주는 신앙 공동체다. 


의견을 나누기 위한 질문 

 

1. 위의 짧은 글에 대한 여러분의 의견은 무엇입니까? (동의, 반대, 첨언 등) 

2.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의 영적 성숙을 도울 수 있는 신앙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으십니까? 


적용을 위한 질문 


1. 우리에게 필요한 신앙 공동체를 발견(혹은 형성)하고 유지하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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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팬데믹으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목회 영역이 소그룹이다. 그 끝을 알 수 없는 팬데믹 시대에 소그룹 목회를 위한 탈출구는 어디에 있는가? 저자는 목회 현장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은 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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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