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2020. 7. 15. 20:35

2020년 7월의 중순을 보내고 있습니다. 벌써 한 해의 절반을 보낸 것인데, 돌이켜보면 눈에도 보이지 않는 조그마한 바이러스를 피해 다니다 6개월의 시간을 덧없이 흘려보낸 듯하여 아쉬운 마음입니다. 처음에는 한두 주, 길어야 한두 달이면 종식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것이 인간이어서, 한해의 절반을 떠나보낸 지금도 코로나 바이러스의 위협은 조금도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언론에서는 제2차 유행이나 가을 대유행과 같은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또 한편에서 코로나 바이러스는 매우 빨리 변이를 일으켜 백신이나 치료제가 나오더라도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도 들립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코로나바이러스가 발생한 초기부터 인간의 생명과 일상을 크게 위협하는 이 바이러스가 하루속히 사라지도록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주 두 주가 이니라, 한 달 두 달이 아니라, 반년이 넘어서까지 확산세가 계속되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이렇게 탄식하게 부르짖게 됩니다.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국내에 코로나 바이러스가 급격히 확산되었던 지난 2월, 바이러스의 확산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 과정에서 신천지라는 이단의 실체가 세상 사람들에게 드러나게 하셨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교회와 성도들을 통한 집단 감염이 발생하였고, 과연 하나님의 뜻은 어디에 있는지 쉽게 답하지 못하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급기야 이달 초 광주광역시에서는 50인 이상의 실내 모임이 금지되었고, 지난주 전국의 교회는 정규 예배 외의 각종 대면 모임과 활동을 금지한다는 정부의 방침이 발표되었습니다. 수련회, 기도회, 부흥회, 구역예배, 성경공부 모임, 성가대 연습 모임 등이 이에 해당한다고 하니 교회로서는 그 활동이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모든 과정 속에서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과연 어디에 있는지 명쾌한 답을 찾을 수 없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시금 하나님을 향해 이렇게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성경을 보면,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끝이 보이지 않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 동일한 기도의 제목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주인공 이사야 선지자도 그 가운데 한 명이었습니다. 본문 11절입니다. 

내가 이르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하였더니 

극심한 고통,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 같은 아픔, 그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도저히 알 수 없는 기나긴 인생의 터널을 지나는 동안 하나님의 사람들은 너 나할 것 없이 이렇게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그리고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뜻이 해석되지 않을 때, 그러면서도 극심한 고통이 멈추지 않고 지속되고 있을 때, 그리하여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바로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이 무엇인지 가르쳐줍니다.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관자이시다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탄식하며 기도하는 성도들에게 본문이 가르쳐주는 믿음, 그 첫 번째는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관자가 되신다는 믿음입니다. 

본문은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라고 시작합니다. 남 유다를 다스렸던 웃시야 왕이 죽고 그의 아들 요담이 왕위를 이어받은 전환의 시기를 말합니다. 웃시야는 남 유다의 전성기를 이끌었다고 평가받는 왕인데, 그의 치세를 평가하는 역대기의 한 구절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웃시야가 그의 아버지 아마샤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며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가 사는 날에 하나님을 찾았고 
그가 여호와를 찾을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셨더라 (대하 26:4-5)

실제로 웃시야가 다스리던 52년의 통치 기간, 남 유다는 정치적으로 안정되었고 경제적으로 번영하였습니다. 그런데 평화의 시대, 번영의 시대를 이끌었던 웃시야가 죽고 이제는 그의 아들 요담이 대신하여 왕위를 이어받았습니다. 그러니 번영의 시기와 쇠락의 시가가 서로 교차하는 그 지점이 오늘 본문의 배경입니다. 

자, 웃시야를 이어 요담이 왕위를 이어받는 시기, 그 전환의 시기에 이사야 선지자가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의 눈을 열어 천상의 세계를 바라보게 하시죠. 그곳에는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 하늘 보좌에 앉아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좌정하신 하늘 보좌 앞으로 스랍, 곧 천사들이 시립하여 있었습니다. 이 장면은 마치 한 나라를 통치하는 임금이 왕좌에 앉아 있고 그 앞에 신하들이 시립하여 있는 장면을 연상시킵니다. 그렇습니다. 이사야가 바라본 이 위대한 장면은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통치자가 되시어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분명한 사실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 시립하고 있었던 천사들의 찬양은 이점을 더욱 분명하게 말해주는데요. 오늘 본문 3절에 그 찬양의 가사가 등장합니다.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평화의 상징, 번영의 상징이었던 웃시야 왕의 치세 때에도 남 유다에게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을 허락하셨던 분은 인간 왕이 아니라, 온 세상을 통치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우리 하나님이셨습니다. 이제 웃시야의 시대가 지나 그의 아들 요담이 왕위를 이어받은 그 시대에도 여전히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를 주관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이사야는 바로 그날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코로나의 시기를 보내며, 도대체 언제 이 사태가 멈출지 알지 못하여 하나님을 향해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믿음이 있다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의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믿음 말입니다. 평화의 시대 번영의 시대 풍요의 시대,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그 풍성한 은혜를 체험하는 시기에도 하나님만이 우리 인생의 주권자가 되신다는 믿음이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불안의 시대 쇠락의 시대 궁핍의 시대, 그리하여 우리 교회와 우리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무엇인지 도저히 해석되지 않아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부르짖는 이 시대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여전히 우리의 인생길 붙들고 계시다는 이 믿음이 더욱 절실히 필요한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한다

극심한 고통이 지속되지만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없어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바로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관자가 되신다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없다는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사야가 하나님으로부터 선지자의 소명을 받는 장면입니다. 선지자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백성들에게 전달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자신의 생각이나 자신의 의견을 말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지시하신 말씀만 전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어떠한 말씀을 주시는지, 곧 이사야 선지자가 무엇을 선포해야 하는지 그 내용을 분명히 기록해 두었습니다. 본문 9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사야 선지자가 전해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희는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다. 너희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할 것이다. 바로 그 메시지입니다. 계속해서 10절은 이사야 선지자가 전하는 말씀이 어떠한 결과로 이어질 것이지 말씀하십니다.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쉽게 이해할 수도 없고, 쉽게 납득할 수도 없지만 그리하여 이사야 선지자도 결코 선포하고 싶지 않은 메시지였지만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전하신 말씀의 내용은 분명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유대 백성에게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할 것이라고 선포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이사야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유대 백성은 그 마음이 더욱 둔하게 되고, 이사야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은 그 귀가 더욱 막히게 되고, 이사야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은 그 눈이 더욱 어두워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극심한 고통의 시기,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때까지니이까?’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유대 백성에게 하나님은 왜 굳이 이와 같은 부정적인 말씀을 전하시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아도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어 아파하는 그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왜 굳이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아도 알지 못한다는 절망적인 말씀을 전하셨을까요? 그렇지 않아도 희망의 소식이 들리지 않고 내일이 보이지 않아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울부짖는 당신의 백성을 향하여 그들의 마음을 둔하게 하시고, 그들의 귀가 막히게 하시며, 그들의 눈이 어둡게 하시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아무리 묵상하고 묵상해 보아도, 아무리 생각하고 생각해보아도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을 다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그저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요. 우리 인간은 말씀을 듣는다고 하지만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 인간은 무엇인가 영적인 세계를 보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깊은 의미를 모두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에게 정해진 운명적 한계라는 사실을 우리는 그저 인정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코로나의 시대가 이제는 일상이 되었고, 교회의 여러 가지 활동은 더욱 위축되었으며, 세상은 교회를 향하여 날 선 비판의 칼날을 휘두르는 이 시기를 보내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취해야 할 자세가 있다면 하나님의 뜻을 도저히 헤아릴 수 없지만, 그저 주어진 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용의 자세가 아니겠습니까? 교회가 코로나 시대를 지혜롭게 대처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들립니다. 참으로 옳은 말씀입니다. 교회가 코로나 이후의 시대를 준비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들립니다. 참으로 옳은 말씀입니다. 교회가 새로운 목회 패러다임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들립니다. 참으로 옳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곳저곳 분주하게 뛰어다니며 새로운 길,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나서기에 앞서 이사야 선지자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하나님의 크고 위대하신 뜻과 계획은커녕 그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우리 인간의 한계를 먼저 인정하고 주어진 현실을 수용하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극심한 고통 가운데,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울부짖었던 또 한 사람의 선지자 예레미야의 노래는 오늘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사람은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메우셨음이라 (애 3:26-28) 


인내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

하나님의 뜻이 해석되지 않을 때, 그러면서도 극심한 고통이 지속되고 있을 때, 그리하여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바로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관자가 되신다는 믿음입니다. 둘째로,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없다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로, 인내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는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13절입니다.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 

여기에 그루터기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나무의 줄기가 잘려나간 뒤에도 여전히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그 남아 있는 그 밑동 말입니다. 웃시야를 이어 요담이 왕이 되는 이 시기를 지나 마침내 남 유다는 바벨론 제국의 의해 멸망하고, 유대인들은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가 이르러 유대인들은 70년 만에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여 믿음의 공동체를 새롭게 세우는데, 이때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무리들을 하나님께서 남겨두신 그루터기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본문에 등장하는 그루터기를 ‘거룩한 씨’라는 표현을 중심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13절 마지막에 이렇게 말씀하잖아요.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작년 우리나라 동해안에 큰 산불이 났습니다. 온 산을 뒤덮었던 나무가 모두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거대한 화마 속에서도 생명의 씨앗이 남겨져 있으니 시간이 흐르면 그 씨앗이 발아하여 새로운 나무가 탄생하고, 새로운 숲을 조성하게 되는 장면을 떠올려 보십시오. 바로 그것이 거룩한 씨입니다. 

또한 종교개혁자 칼뱅은 오늘 본문 13절을 주석하며 ‘그루터기’를 한 겨울의 모진 한파를 견디어 내는 나뭇가지로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글을 조금만 읽어보겠습니다. “겨울에 잎이 다 떨어져 버리면 죽은 나뭇가지 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봄이 되면 잎은 다시 돋아난다. 즉 이 백성도 그와 같게 된다는 뜻이다.”

나무가 모두 베어져도 여전히 남아 있는 그루터기, 온 산림이 불에 타 없어져도 여전히 남아있는 거룩한 씨앗, 겨울철의 한파가 모든 생명 현상을 질식시키는 현장에서도 여전히 봄을 기다리는 나뭇가지. 이들은 자연 현상의 원리를 다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 고단한 역경의 세월을 그저 묵묵히 인내하여 마침내 새로운 생명을 발아합니다. 이처럼 마음이 둔하고 귀가 막히고 눈이 어두워 하나님의 뜻을 다 헤아릴 수 없는 것은 우리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지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여전히 소망이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알기 때문이 아니라 인내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도저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고통 속에서,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부르짖으며 기도하는 성도 여러분, 이 믿음을 끝까지 지키십시오. 

하나님께서 지금도 여러분 인생의 주권자가 되어 주십니다. 
비록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다 깨닫지 못하지만, 
인내하며 이 아픔의 시기를 끈까지 견디어 내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반드시 구원하여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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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0. 7. 10. 22:13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 12:24) 

 

분주한 일상을 살다 보니 '희로애락'이 뒤섞인 삶을 살곤 했습니다. 이렇게 도심을 벗어나니 '생로병사'의 주기가 온 세상에 유유히 반복되고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생' 태어나면 시간이 흐를수록 나이를 먹고, 늙어 병이 들면 마침내 '사'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생'은 '사'를 향해 끊임없이 달려가니 생로병사의 순환 속에 살아가는 모든 인생은 누구도 예외 없이 '생'을 출발하여 '사'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는 끝이 아니기에 다시금 '생'이 되어 생로병사의 주기는 지금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사'가 다시금 '생'이 되는 과정을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곧 '생'이 '사'를 경험하지 않으면 새로운 '생'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곧 '생'이 '사'를 경험하면 다시금 새로운 '생'으로 출발하게 됩니다. 죽는 것은 밀 한 알입니다. 그러나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죽는 것은 씨앗 한 알입니다. 그러나 그 열매는 온 산천을 뒤덮는 푸르름입니다. 

우리는 고인의 육신을 이 곳에 묻으려 합니다. 아니, 보다 정확히 표현하면 우리는 고인의 육신을 이 곳에 심으려 합니다. 하나님은 고인에게 영원한 생명, 곧 영생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고인의 육신은 이곳에 심겨지지만 고인의 영혼은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아름답게 피어납니다. 심기는 것은 한 분의 생애이지만 그 열매는 풍성하여 고인의 영혼이 영원한 천국에서 아름답게 피어나는 것은 물론이요, 고인을 기억하는 모든 유가족의 마음에도 영원토록 살아있을 것입니다. 

유가족 여러분, 고인의 육신을 이곳에 심으며 고인의 영혼이 영원한 천국에서 아름답게 피어나는 그 장면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고인과 고인을 기억하는 우리 모두에게 풍성한 생명의 역사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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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0. 7. 10. 17:43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살전 4:13-18) 

 


발인예배를 시작으로 오늘의 장례 일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하루 모든 장례 일정 가운데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고인을 떠나보내는 모든 유가족의 마음에 평화와 위로가 가득하시기를 바랍니다.

부활, 곧 다시 살아나는 일은 반드시 있습니다. 부활이 얼마나 확실한 진리인지 오늘 읽은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14절입니다. "예수께서 죽으셨다고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 진대" 곧, 성도의 부활은 얼마나 확실한 지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신 사실만큼 분명한 진리입니다. 14절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지요.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예수님의 부활이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요, 역사적 진리인 것처럼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예수님을 믿은 모든 성도들은 죽음을 경험하더라도 반드시 부활합니다. 뿐만 아니라 여전히 살아있는 우리보다 먼저 부활하여 하나님의 품에 안깁니다. 본문 15절이 이 사실을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곧 예수님을 믿고 죽음을 경험하신 분들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인간은 죽음 이후의 일을 살아서는 목격할 수도 없고 경험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체험할 수 없고 알 수 없을 뿐, 죽음 이후의 삶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히 선언합니다. 부활은 있습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요, 죽음 이후 인간은 다시 살아납니다. 살아생전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은 성도들은 죽음이 끝이 아니요 죽음 이후에 부활하여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갑니다. 고인께서도 비록 육신의 죽음을 경험하였지만 반드시 부활하여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계십니다. 유가족 여러분, 오늘 하루 이 한 가지 진리를 반드시 마음에 기억하십시오.

성경이 부활의 확실한 진리를 우리에게 선포하는 이유와 목적이 있습니다. 본문에는 두 가지로 그 목적을 이야기하지요. 그 첫번째 목적은 슬픔을 이기기 위함입니다. 본문 13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그 다음을 주목하십시오.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사랑하는 남편, 사랑하는 아버지, 사랑하는 할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그 누가 슬퍼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 앞에 비통해하고 슬퍼하고 아파하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그러나 유가족 여러분, 오늘 하루 장례식을 진행하는 동안 여러분의 마음에 슬픔이 찾아올지라도 그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마음이 무너져 내리지는 마십시오. 오늘 하루 장례식을 진행하는 동안 여러분의 마음에 상실감과 비통한 마음이 찾아올 지라도 절망의 나락에 빠져들지는 마십시오. 고인은 반드시 부활하여 하나님의 품에 안기시니, 그 사실을 믿으며 슬픔이 찾아오나 그 슬픔을 이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하루 유가족 여러분의 마음을 위로하시고, 힘을 주시며, 여러분의 눈물을 친히 닦아 주실 것입니다.

성경이 부활의 진리를 강력히 선포하는 이유와 목적, 그 첫번째는 슬픔을 이기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와 목적이 있다면 서로를 위로하기 위함이지요. 본문 16절부터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부활의 이 확고한 진리를 선포한 후, 본문 18절은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유가족 여러분, 장례식을 진행하는 오늘 하루 서로 위로하십시오. 나의 마음에도 슬픔이 찾아오고 아픔이 찾아오겠지만, 바로 그때 내 곁에 있는 가족들도 슬픔의 시간을 견디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리하여 서로 위로하고, 서로 격려하며, 서로의 손을 잡아주십시오. 고인께서 반드시 부활하신다고, 고인은 반드시 부활하여 하나님의 품에 안기신다고, 그러니 슬픔에 사로잡히지 말고 상실감에 무너지지 말자고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십시오.

장례식을 진행하는 오늘 하루, 서로를 위로하는 여러분들에게 하나님께서 친히 하늘의 평강을 부어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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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0. 7. 2. 16:37

베드로가 편지를 보내는 사람들은 유대인으로서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입니다. 유대교의 배경에서 태어났지만 예수님을 믿어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이죠. 그런데 초대교회 성도들은 유대교로부터 극심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유대교 출신 그리스도인 가운데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기독교를 포기하고 다시금 유대교로 돌아가면 지금 당하는 극심한 박해를 피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유혹을 느끼는 성도들에게 사도 베드로는 어떠한 말로 권면하였을까요? 


고난은 기쁨의 이유 

베드로는 고난이 기쁨의 이유라고 권면합니다. 본문 13절입니다.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베드로 사도는 그리스도인의 고난을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말씀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가 당하는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개인의 슬픔이라는 관점을 벗어나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참고 견디신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위대한 영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 사실을 참으로 믿는다면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충분한 기쁨의 이유가 됩니다. 

여러분, 이 말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신앙인은 고난이 찾아올 때 기쁨으로 모든 아픔과 슬픔의 감정을 이겨낼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 그리스도인도 고난이 찾아올 때 슬프고 아프고 괴롭습니다. 그 아픔으로 울부짖기도 하며 그 슬픔으로 하나님께 탄식하며 기도합니다. 그러나 아픔과 슬픔이 우리의 마음을 가득 채우는 그 순간에도 마음 한편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큰 슬픔의 날이 찾아와도 마음 한편에 흐르는 기쁨의 강줄기로 말미암아 그 모든 고난과 시련을 이겨낼 힘을 얻게 됩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리스도인에게 시련과 고난은 다른 한편으로 기쁨의 이유라고 증언합니다. 그런데 본문 13절을 자세히 관찰하면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기쁨이 두 가지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 첫번째 기쁨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고난 중에도 기뻐하는 기쁨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기쁨은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누리게 될 그리스도인의 기쁨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심판의 때 그리스도인은 모든 고난에서 벗어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큰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이 땅에서 누리는 기쁨은 고난의 현장에서 아픔과 슬픔과 공존하는 기쁨이지만 그날에 누리는 기쁨은 아픔과 슬픔이 전혀 없는 온전한 기쁨입니다. 그래서 본문 13절은 이렇게 말씀하지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일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으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고 계시다면 본문 16절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왜 그렇습니까? 지금 여러분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의 이유가 있으며, 마지막 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바로 그때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가장 크고 온전한 기쁨이 여러분에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모두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심판 

베드로가 보내는 편지를 받아 보는 사람들은 유대인으로 태어났지만 예수님을 믿어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였기에 더욱 큰 박해를 받았지요. 그러므로 그들은 박해와 고난을 피하기 위해 기독교를 포기하고 다시금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생각을 한 번쯤은 품어보았습니다. 이러한 유혹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베드로 사도는 어떠한 말로 권면하였을까요? 

베드로 사도는 기독교를 믿든, 유대교를 믿든 상관 없이 하나님의 심판이 모두에게 임한다고 말씀합니다. 문제는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박해와 고난과는 비교할 수 없이 큰 재앙의 날이 불신자들에게 예비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17절과 18절입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

베드로 사도는 하나님의 심판이 하나님의 집, 곧 하나님의 백성부터 시작된다고 말씀합니다. 이는 구약 성경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으로 예레미야 25장 29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보라 내가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성에서부터 
재앙 내리기를 시작하였은즉
너희가 어찌 능히 형벌을 면할 수 있느냐 
면하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칼을 불러
세상의 모든 주민을 칠 것임이라 하셨다 하라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백성부터 시작됩니다. 지금 하나님의 백성이 고난을 받고 불신자들은 평안한 듯 보이지만, 조금만 지나면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백성에서 불신자로 넘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유대교를 포기하고 예수님을 믿어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이 자신에게 임한 고난을 피하고자 다시금 유대교로 개종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결정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백성부터 열방으로 확대됩니다. 그런데 여기에 중요한 차이점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고난을 당하지만 마침내 하나님의 심판을 통과합니다. 반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조금도 견디어 낼 수 없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 18절 말씀의 뜻입니다.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고난이 찾아올 때 '나만 고난을 받는다'고, '나는 믿음을 지키지만 고난을 받고 저 친구는 믿음이 없지만 평안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모든 사람에게 심판의 때는 반드시 찾아옵니다. 그저 우리가 불신자들보다 조금 먼저 심판대 앞에 서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믿음이 있어 그 과정을 이겨낼 수 있으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불신자들이 평안하다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모든 결과를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그저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믿음의 경주를 힘써 달리면 됩니다. 


고난을 당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세 

베드로 사도는 오늘 본문 마지막 절에서 고난을 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견지해야 할 자세를 이야기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5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고난을 당하고 계십니까? 왜 나에게 이와 같은 고난이 찾아왔냐고 질문하지 마십시오. 왜 다른 사람에게는 이와 같은 고난이 비껴가냐고 질문하지 마십시오. 어떻게 하면 이와 같은 고난을 피할 수 있는지도 질문하지 마십시오. 
그저 여러분의 영혼을 하나님께 의탁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에게 기회가 주어지는대로 선을 행하십시오. 그렇게 하루하루,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 여러분에게 찾아온 고난의 터널을 통과하십시오. 하나님은 지금도 여러분의 삶에 기쁨의 이유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고난 중에도 인내하며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여러분에게 최후의 승리가 반드시 주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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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0. 6. 25. 17:46

"그 날에 사람이 예루살렘에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시온아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습 3:16-17) 


사랑하는 고인을 먼저 떠나보낸 모든 유가족에게 
하나님께서 위로하시고, 그 마음에 하늘의 평강을 베풀어주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인간의 마지막 운명이 죽음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찾아올 그 마지막 때, 내가 사랑하는 가족을 데려갈 그 마지막 때, 우리가 사랑했던 고인의 그 마지막 때를 실제로 맞이한다는 것은 너무도 큰 슬픔이요 너무도 큰 아픔입니다. 그리하여 인간은 우리 모두에게 정해져 있는 그 운명을 애써 외면하며 살아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어김없이 그 날은 오고야 말아 우리의 일상을 깊숙이 침범하니 장례식, 특별히 사랑하는 가족의 장례식은 도망치고 싶지만 결코 피할 수 없는 슬픔과 아픔의 현장입니다. 

구약 시대 스바냐 선지자는 사람들이 그토록 회피하고 싶었던 '그 날', 곧 마지막 그 때를 선언합니다. 스바냐 3장 16절을 시작하는 단어 "그 날"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날,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과 생각과 행위를 평가하시는 날, 그리하여 인간의 죄악을 심판하시는 바로 그날입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바로 그 날이요, 오늘 우리 개인에게는 인간의 육신이 무너지는 바로 그 죽음의 날이니, 모든 사람들에게 운명처럼 정해져 있지만 동시에 모든 사람들이 외면하고 싶은 바로 그 날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위로와 하나님의 사랑은 이제부터 시작됩니다. 

스바냐 3장 16절입니다. 그 날에, 바로 그 때에 사람들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시온아, 예루살렘아, 너의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17절이지요. '너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가운데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구원을 베푸시는 전능자이십니다.' 계속해서 17절은 하나님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아버지, 사랑하는 할아버지를 먼저 떠나보낸 유가족 여러분. 비록 모든 인간이 회피하고 싶은 사랑하는 가족의 장례식장에 모여있지만, 그리하여 영원토록 회피하고 싶었던 바로 '그 날'이 여러분의 일상을 깊숙이 침범하였지만 두려워하지 마십시요, 여러분의 두 손을 늘어뜨리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고인과 함께 하시고, 하나님께서 유가족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은 고인에게 구원을 베풀어주시는 전능자이시니 여러분의 마음에 새 힘을 얻으십시오. 

하나님께서 고인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고, 하나님께서 고인을 잠잠히 사랑하시며, 하나님께서 고인으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고인을 기뻐하시고 사랑하시기에 모두가 두려워하는 바로 이 죽음의 순간,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고인을 영원한 구원으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이 믿음으로 슬픔이 찾아오더라도 슬픔에 잠식당하지 마시고, 상실의 아픔 속에서도 절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바로 지금, 고인을 영원한 구원으로 인도하십니다. 나아가 고인께서 보이신 믿음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그분의 모든 자녀들도 구원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이제 고인의 믿음이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유가족의 믿음이 되어서 두려움과 낙심이 아니라 소망과 위로를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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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0. 6. 15. 18:09

오늘 말씀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라고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말씀이지요.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부정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지만, 오늘 이 시간에도 분명히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그렇다면 오늘도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오늘 말씀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두 가지로 묘사해 주십니다. 그 첫번째는 '전능자'입니다. 오늘 말씀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처비와 형편을 그저 바라만 보고 계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능력에 있어 조금도 한계가 없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전능하신 능력으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고, 절망에서 구원하고, 슬픔의 현장에서 구원하시고, 궁극적으로 죽음의 권세에서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말씀은 먼저, 하나님을 전능자로 묘사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이 참으로 힘주어 말씀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두 번째 모습이지요. 곧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오늘 말씀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오늘도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은 능력이 무한하신 전능자이셔서 얼마든지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팔장을 끼고 우리의 행동을 가만히 보면서 선을 행하면 구원해주고, 열심히 기도하고 교회에서 충성을 다해야 구원을 주시다가, 우리의 행동에 실수와 잘못이 보이면 벌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 언제나 함께하시며 우리를 죄에서, 절망에서 슬픔의 현장에서, 나아가 죽음에서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참으로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누리는 모든 은혜와 축복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자격과 아무런 상관도 없이 우리를 깊이 사랑하셔서 베풀어주신 선물입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로 결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여 구원해주시기로 결심하셨던 겁니다. 우리가 작은 일이라도 교회에서 여러가지 모습으로 섬길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충성스러운 일꾼이 되겠노라고 결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동역자로 불러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오늘도 교회에 출석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도 우리가 하나님께 경배하겠다고 결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배를 통해 우리와 교제하시겠다고 먼저 결심을 하셨던 것이지요.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먼저 사랑해주셨습니다. 주일을 맞이하여 교회에서 예배도 드리고, 여러 가지 모임에 참여하면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기억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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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0. 6. 15. 16:56

히스기야 왕이 남 유다를 다스리던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북쪽에서 내려온 앗수르 제국의 군대는 북이스라엘을 멸망시켰습니다. 그리고 그 기세를 몰아 더 남쪽으로 내려와 남유다의 수도 예루살렘을 완전히 포위하였지요. 당시 앗수르 제국의 군대를 지휘하고 있었던 랍사게 장군은 18만 5천 명이라는 대군을 이끌고 예루살렘을 포위만 하고 있어도 예루살렘 성은 그들의 손에 떨어지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랍사게 장군이 그와 같은 전략을 세운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은 높은 산 위에 세워진 도시로 천연 요새입니다. 아무리 거대한 대군을 이끌고 공격을 하더라도 쉽게 무너트리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예루살렘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약점이란 식수를 얻을 수 있는 강이나 하천이 예루살렘에는 하나도 없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 사람들은 식수를 비롯한 생활용수를 얻기 위해 예루살렘 성을 나와서 기드론 골짜기에 있는 기혼 샘까지 나와야 했습니다. 그러니 앗수르의 장군 랍사게는 예루살렘 성벽을 18만 5천 명의 군인들로 물 샐 틈 없이 포위만 하고 있으면 예루살렘 사람들은 생활에 필요한 식수를 얻을 수 없을 것이고 남 유다는 곧 앗수르 제국에 항복을 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랍사게 장군의 전략은 실패합니다. 물론, 예루살렘에는 식수를 공급할 수 있는 강이나 하천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 왕은 예루살렘 성벽 바깥 곧 기혼샘으로부터 지하를 통해 예루살렘 성전까지 물길이 들어올 수 있도록 터널을 만들었고, 그 끝에는 조그마한 연못을 만들어서 물이 고이게 하였습니다. 그 연못의 이름이 바로 실로암입니다. 사람들은 그 터널을 히스기야 왕이 만들었기에 ‘히스기야 터널’이라고 불렀고 유사시에 히스기야 터널이 시작되는 기혼 샘의 그 입구를 적군이 발견하지 못하도록 잘 막아놓기만 하면 예루살렘 성벽을 제 아무리 18만 5천 명의 대군이 층층이 에워싼다 하더라도 예루살렘 안에는 한줄기 생수가 흘러 들어와 실로암에 모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수많은 적군의 위협 속에서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백성들을 지켜주었던 것은 성벽의 튼튼함이나 강력한 군대라기보다는 기혼샘으로부터 히스기야 터널로 통과하여 실로암 연못에 모이는 한 줄기의 생명수였습니다. 

여러분은 긴박한 위기의 순간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을 지켜주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위기의 순간 우리에게 생명의 끈이 되어주는 것은 거대한 성벽이 아닙니다. 크고 화려한 집을 장만하고, 남부럽지 않은 사회적 지위를 얻고, 사람들이 부러워할만한 성공을 이룬다 하더라도, 그것이 긴박한 위기의 순간 우리를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긴박한 위기의 순간 우리 자신과 우리 가정을 지켜주는 것은 우리의 가정에 흐르는 조그마한 물줄기, 하나님의 은혜의 샘으로부터 시작하여 우리 개인의 심령에 머물러 고이게 되는 ‘실로암 연못.’ 바로 그 은혜의 물줄기가 참된 위기의 순간 우리를 끝까지 지켜 주는 생명의 끈이 되는 것입니다. 


스며 나오더라

히스기야 시대의 예루살렘은 기혼샘으로부터 히스기야 터널을 통해 실로암으로 이어지는 은혜의 물줄기가 이어져 왔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은혜의 물줄기를 잊어버리고 맙니다. 결국 바벨론 제국에 의해 예루살렘 성은 초토화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의 황폐함. 그것의 눈에 보이는 현상은 성벽이 무너지고, 성전이 무너지고, 건물이 무너진 것이었지만 실상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하나님의 백성들 마음에 은혜의 물줄기가 사라진 것이요 그들의 마음과 심령이 메말라 타는 듯한 갈증 속에서 그들의 영혼은 죽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새로운 비전과 새로운 약속을 주십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이지요.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성전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는 환상입니다. 그런데 그 위대한 강줄기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주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함께 2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그가 또 나를 데리고 북문으로 나가서
바깥길로 꺾여 동쪽을 향한 바깥 문에 이르시기로
본즉 물이 그 오른쪽에서 스며 나오더라

오늘 본문 1절과 2절의 말씀은 에스겔이 환상 속에서 보았던 성전의 구조를 이해하고 있어야 그 뜻을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어려운 구절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목표가 에스겔서에 나오는 성전 구조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기에 최대한 간단히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2절 중간을 보시면 “동쪽을 향한 바깥문”이 있습니다. 이 문을 기준으로 한쪽에는 성전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에스겔이 서 있습니다. 1절 말씀이 성전에서부터 물이 흘러내려온다는 말씀입니다. 그 흘러내려오는 물은 자연스럽게 이 문에 다다르겠죠. 문제는 이 문이 열려있지 않고 닫혀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 문을 기준으로 성전이 있는 쪽에는 물이 흘러내리고 있는데, 이 문의 반대쪽인 에스겔이 있는 곳에는 물이 넘어오지를 못하는 거예요. 

바로 그때 에스겔이 놀라운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합니다. 2절 뒷부분입니다. “본즉” 에스겔이 그 닫힌 문을 유심히 보았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발견합니까? “물이 그 오른쪽 – 그 닫혀 있는 문의 오른쪽을 말합니다. – 그 오른쪽에서” 어떻게 나옵니까? “스며 나오더라” 이 장면이 상상이 되시나요? 문이 열려 있다면 물줄기가 시원하게 나왔을 거에요. 그러나 문이 닫혀 있으니 물줄기가 막혔어요. 그러나 그 문에 물이 스며들어서 그 문을 뚫고 생수가 조금씩 스며 나오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스며 나오더라’는 표현의 히브리어는 물이 아주 조금씩 떨어지는 장면을 묘사하는 의성어입니다. 우리말의 의성어 가운데 그 의미가 가장 비슷한 단어를 찾는다면, ‘졸졸 흐른다’ 혹은 ‘똑똑 떨어진다’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수도꼭지를 끝까지 열어놓은 것처럼 콸콸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문이 막혀 있기에 스며서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똑똑 떨어지는 물이고, 기껏해야 졸졸 흐르는 물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한 가지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는 똑똑 떨어져도, 졸졸 흘러도 – 거대 한 물줄기가 아니라 – 그저 스며서 나오는 정도의 물줄기라도 시간이 조금만 흐르면 그것은 은혜의 강물이 되어 나의 발목을 적시고, 나의 무릎까지 차오르며, 나아가 나의 허리를 넘어 머리 위까지 차고 넘치는 은혜의 강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 시작은 무엇입니까? 은혜의 물줄기가 스며서 나오는 것, 은혜의 생수가 똑똑 떨어지는 것, 많이 나와야 졸졸 흐르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스며나오는 은혜가 결국은 거대한 강줄기를 이루고 그 강물은 이제 만물을 새롭게 합니다. 9절을 보십시오.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다(9절)

하나님께 기도할 때마다 위대한 환상도 보여주시고, 하나님께 기도할 때마다 각종 은사를 부어주시고, 하나님께 기도할 때마다 생수의 강물이 머리 위까지 차오른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기도할 때마다 큰 은혜가 임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여러분 낙심하지 마십시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생명의 물줄기는 거대한 강물이 아니라 기혼 샘으로부터 실로암 못까지 이어지는 조그마한 히스기야 터널이요, 콸콸 쏟아지는 물줄기가 아니라 그저 똑똑 떨어지고, 많아야 졸졸 흐르지만 메마른 우리의 심령을 조금씩 적실 수 있는 스며 나오는 은혜인 것입니다. 

오늘 밤, 여러분은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시겠습니까? 우리에게는 참으로 많은 기도의 제목이 있지요. 가정의 문제, 자녀의 문제, 질병의 문제, 인간관계의 문제, 직장과 교회에서 당하는 여러 가지 문제들. 우리가 닥면한 문제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수도 없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회복되고 새로워지기 위하여 가장 먼저 시작되어야 할 지점이 있다면, 하나님의 은혜의 강줄기가 나의 삶 속에서 깊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서고 있는 내 마음의 문에 하나님의 은혜의 생수가 스며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당장 성전 문을 활짝 열고 물줄기를 받아들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스며들기만 하더라도, 그리하여 나의 마음이 조금씩 촉촉해지기만 하더라도 어느새 나의 발목이 잠기고, 무릎이 잠기고, 허리가 잠기고 나아가 나의 머리 위까치 차고 넘치는 은혜의 강줄기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치리라

구약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생명의 물줄기를 허락하시는 장면이 많이 등장합니다. 예컨대, 반석에서 물이 나오는 사건, 이사야 선지자가 목마른 자들에게 값없이 와서 물을 마시고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초대하는 장면, 그리고 앞에서 소개해 드린 기혼 샘으로부터 실로암까지 생명의 물줄기가 이어진 장면 등입니다. 이와 같은 일들을 잊을 수 없었던 유대인들은 신약시대로 넘어오면 매년 장막절을 보내며 실로암 연못에 모여 특별한 행사를 진행하곤 했습니다. 그렇게 실로암에서 행사를 진행하고 있던 어느 장막절, 예수님께서 행사를 거의 마치고 있는 유대인들을 향해 소리를 지르십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요 7:37-38)

비록 반석에서 물이 터져 나왔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기혼 샘으로부터 생수가 흘러 실로암 연못에 물이 고였지만 예루살렘은 이후 바벨론 군대에 의해 멸망당하고 맙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목마른 사람은 값없이, 돈 없이 물과 포도주를 사라고 초대하였지만 하나님의 이 약속은 아직 완전히 성취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은 자신을 믿는 모든 성도들에게 생수의 강을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심령에도 예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생수가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하나님의 은혜의 물줄기를 가로막고 있는 동쪽을 향한 바깥문처럼 여전히 우리 마음의 문도 굳게 닫혀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고 거대한 물줄기가 아니더라도 괜찮습니다. 그저 졸졸 흐르는 은혜, 똑똑 떨어지는 은혜, 하나님의 은혜의 샘물로부터 흘러나와 우리의 심령에 흐르는 작은 실로암 연못이면 충분합니다. 그저 나의 심령을 조금씩 적시는 스며 나오는 은혜의 한줄기만이라도 우리에게 주어진다면, 우리를 은혜의 바다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요, 우리의 삶을 사로잡는 은혜의 강물로 말미암아 우리 주변의 모든 죽어가는 것들이 새롭게 되살아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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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0. 6. 15. 14:53

암몬의 죄악

 

에스겔 25장부터 시작하여 에스겔 32장까지 남 유다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 나라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이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방 나라들에 대한 심판의 말씀 가운데 그 첫 번째 장면으로 암몬이라는 나라에 대한 심판 선언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지적하시는 암몬 나라의 죄악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신의 이웃 나라인 남 유다가 바벨론 제국에 의해 멸망을 당하는 그때 그 장면을 보고 기뻐하고 즐거워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 3절에 그 내용이 등장합니다. 

“너는 암몬 족속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주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 성소가 더럽힘을 받을 때에 네가 그것에 관하여, 이스라엘 땅이 황폐할 때에 네가 그것에 관하여, 유다 족속이 사로잡힐 때에 네가 그들에 대하여 이르기를 아하 좋다 하였도다” 

하나님께서 암몬 나라의 죄악으로 지적하시는 것은 사람을 죽이거나, 힘으로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암몬의 이웃 나라인 유다 백성, 특별히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칭함을 받았던 유다 백성이 재난을 당하고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끌려가는 그 장면을 보고 ‘아하 좋구나’라고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6절에는 암몬 백성이 남 유다의 슬픔과 아픔을 어떻게 기뻐했는지 보다 구체적으로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네가 이스라엘 땅에 대하여 손뼉을 치며 발을 구르며 마음을 다하여 멸시하며 즐거워하였나니” 

암몬 나라 백성들은 남 유다가 큰 재앙을 당하고 큰 고난과 역경을 당하는 것을 보고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면서 온 몸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했어요.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을 통해 지적하시는 암몬 나라의 죄악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암몬나라의 죄악을 분명히 지적하신 뒤에 그들에게 임할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오늘 본문 7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내가 손을 네 위에 펴서 너를 다른 민족에게 넘겨주어 노략을 당하게 하며 너를 만민 중에서 끊어 버리며 너를 여러 나라 가운데서 패망하게 멸하리니” 그 마지막 결론이 무엇입니까? “내가 주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 

남 유다의 멸망을 기뻐하고 온 몸으로 즐거움을 표현했던 암몬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심판을 선언하시고, 그 모든 심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그들의 행동을 지켜보시고 기억하셨다가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누구나 자신의 삶 속에 고난이나 역경이 일어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찌합니까? 우리의 삶에 고난도 찾아오기 마련이고 역경도 늘 일어납니다. 그런데 지금 당하는 고난의 무게를 더욱 무겁게 하고, 더욱더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 있어요. 주변 사람들이 나의 고난과 역경에 마음으로부터 동참하지 못하고 그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때로는 비난하며 멸시한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은 고난 당하는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그들을 조롱하고 비난하는 것을 매우 싫어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특별히 하나님의 자녀가 된 믿는 사람들을 조롱하고 비난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보응하실 만한 큰 죄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유다 백성이 하나님께 죄를 지어서 바벨론의 공격을 받고, 죄를 지어서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것이 맞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장면을 바라보며 기뻐하고 유다 백성을 비방하고 멸시했던 암몬 족속을 심판하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여러분, 주변 사람의 고난을 불쌍히 여기고 안타까워하지는 못할지라도 그것을 기뻐하고 잘됐다고 고소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특별히 교회 안에서 함께 하나님의 자녀된 사람들의 아픔과 고통을 바라볼 때 진심으로 그들의 아픔에 돌아보며 “재난을 주는 위로자”가 아니라 “힘과 용기를 주는 위로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너희는 여전히 나의 백성

오늘 본문은 암몬 나라에 대한 심판에 이어 모압 나라에 대한 심판이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지적하시는 모압 나라의 죄악도 암몬 나라의 죄와 비슷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유다 백성이 바벨론으로 끌려갈 때, 암몬뿐만 아니라 모압 역시도 유다 백성의 고통과 고난을 기뻐하고 그들을 비방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압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 가운데 우리가 깊이 묵상해볼 만한 장면이 등장합니다. 바로 8절입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모압과 세일이 이르기를 유다 족속은 모든 이방과 다름이 없다 하도다” 

모압과 세일은 남 유다가 멸망하는 장면을 바라보면서 그들을 비난하고 조롱했어요. 네~ 물론 이것도 큰 죄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있어서는 더 큰 문제가 있었는데, 하나님의 백성인 유다 백성이 바벨론 제국의 포로가 되어 끌려가는 장면을 바라보면서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8절을 다시 보시면, 모압과 세일이 스스로 말합니다. “유다 족속은 모든 이방과 다름이 없다” 이렇게 결론을 내렸던 것입니다. 

당시 바벨론 제국에 무너진 나라가 남 유다만이 아니었어요. 바벨론이라는 제국은 워낙 힘있게 일어났고, 그 세력을 전 오리엔트 지역에 확대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남 유다만이 아니라 그 주변의 모든 나라들이 다 바벨론 제국의 침략을 당하고 점령을 당했습니다. 바로 그때 모압이라는 나라, 그리고 세일 혹은 에돔 나라는 이렇게 생각했어요. 바벨론 나라에 무너지는 것을 보면 유다 백성이나 그들이 이방민족이라고 여기던 다른 민족 백성이나 똑같네. 바벨론이라는 큰 위기 앞에 유다 백성이나 그 외의 다른 백성이나 별 차이가 없네. 이런 생각을 모압 나라 백성들이, 그리고 세일 나라 백성들이 마음에 품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은 모압 나라의 그 생각을 기억하시고 그들을 심판하십니다. 
오늘 본문 11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내가 모압에 벌을 내리리니 내가 주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뭐라고, 바벨론이라는 거대한 제국 앞에서 남 유다나 다른 나라다 다 무너지는 것을 보니 하나님의 택함을 받았다는 유다 나라나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다른 나라나 별로 차이가 없다고.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생각하는 너희 모압을 벌하셔서, 그 다음이 무엇입니까? “내가 주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유다 백성이 자신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유다 백성들이 자신들의 우상숭배로 말미암아 바벨론이라는 거대한 제국의 포로가 되고 노예가 되어 저 멀리 타지로 끌려가고 있지만, 그래서 주변 나라들은 남 유다나 다른 이방 나라들이 무엇이 다르냐고 비웃고 조롱하지만 여러분 바로 그 순간에도 남 유다는 하나님의 백성이었고, 하나님은 장차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관하신다고, 하나님께서 유다 나라를 지금도 붙잡고 계시며 그들을 마침내 구원하여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때로는 고난을 당하고 때로는 하나님 앞에 범죄하여서 책망을 받기도 합니다. 그 장면을 놓고 세상의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예수를 믿어서 뭐하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별로 차이가 없네, 똑같이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질문해요. 그러나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때로는 고난을 당하고 역경을 만나죠.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을 당하는 바로 그때에도, 역경을 만나는 바로 그때에도, 그래서 나의 주변 사람들이 나를 비방하고 조롱하는 바로 그때에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께서 손을 붙잡고 계시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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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0. 6. 15. 14:49

바벨론의 식민지가 되어버린 남 유다 

오늘 본문은 남 유다의 마지막 왕이었던 시드기야가 유다의 왕으로 등극하는 장면을 간단하게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2절과 13절에 그 내용이 등장합니다. 

“너는 반역하는 족속에서 묻기를 너희가 이 비유를 깨닫지 못하겠느냐 하고 그들에게 말하기를 바벨론 왕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왕과 고관을 사로잡아 바벨론 자기에게로 끌어 가고 그 왕족 중에서 하나를 택하여 언약을 세우고 그에게 맹세하게 하고 또 그 땅의 능한 자들을 옮겨 갔나니” 

12절 뒷부분을 보시면 “바벨론 왕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왕과 고관을 사로잡아 바벨론 자기에게로 끌어 가고”라고 말씀합니다. 바벨론이라는 거대한 제국의 왕이 예루살렘에서 남 유다를 다스리고 있던 여호야긴 왕을 포로로 사로잡아 갔다는 내용이지요. 바벨론 제국은 여호야긴 왕을 포로로 잡아가면서 남 유대를 다스릴 새로운 왕을 세웠습니다. 

오늘 본문 13절을 보시면, “그 왕족 중에서 하나를 택하여” 왕족 중에서 한 사람을 세웠다고 말씀하는데, 실제로 바벨론 제국이 사로잡아갔던 여호야긴 왕의 삼촌이 됩니다. 여호야긴 왕의 숙부인 남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를 택했다는 말씀이죠. 13절 말씀을 계속해서 보시면 “언약을 세우고 그에게 맹세하게” 하였습니다. 시드기야 왕에게 어떠한 맹세를 하게 했는지는 우리가 충분히 추측할 수 있잖아요? 거대한 제국 바벨론이 조그마한 유대 나라의 왕을 바꾸었으니 당연히 남 유다의 시드기야 왕에게 바벨론 제국은 잘 섬기겠다는 맹세를 하도록 했겠지요.  그래서 오늘 본문 14절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는 (유다) 나라를 낮추어 스스로 서지 못하고” 바벨론을 섬기겠다는 그 약속을 지켜야 능히 생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방인의 포로가 된 것, 과연 하나님의 뜻인가? 

여러분, 남 유다는 그래도 하나님에 대해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민족이었어요. 물론, 그들 안에 우상숭배도 있고 율법대로 살지 못하는 모습이 많이 있었지만 그래도 그들은 언약의 백성이었잖아요. 백번 양보해서 바벨론 제국처럼 공식적으로 마르둑이라는 우상을 숭배하는 민족은 아니었다고요. 그런데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나라, 하나님을 오히려 대적하는 바벨론 제국의 포로가 되어 가고 식민지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때, 신앙인은 –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는 – 유대 민족들은 하나님께 어떻게 기도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너무도 당연하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해달라고, 하나님께서 저 이방인인 바벨론의 손에서 우리를 구원해 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 같지 않으세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면서 바벨론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대해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세요? 

여러분이 여러분의 자녀들을 위해 참으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아버지, 기도하는 어머니를 둔 여러분의 자녀들이 직장에서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상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오히려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는 상관을 만나서 너무 큰 핍박을 받는 거예요. 그러면 새벽 기도에 나오셔서 어떻게 기도하시겠어요? ‘하나님, 우리 자녀가 믿음 때문에 너무도 큰 핍박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도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이루어진 것으로 알고 그저 감사하고 만족하게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시겠어요? 아니면, ‘하나님, 우리 자녀를 괴롭히는 그 놈이 지금 당장 회사에서 잘리게 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그 자리에 우리 자녀가 올라가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시겠어요? 우리는 다 똑같아요. 우리가 예수님 믿는 사람이고, 우리 자녀가 믿음의 자녀라면 이 세상 속에서도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는 머리가 되고 형통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기도하기 마련이지요. 

여러분, 모르긴 몰라도, 에스겔 시대 유다 백성들도 동일한 기도를 했을 겁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선택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신 우리 민족이 지금 하나님을 모르고 오히려 우상을 섬기는 바벨론 제국에 포로가 되었고 식민지가 되고 있어요. 그러니 지금 당장 우리를 구해주시고 저 바벨론 제국으로부터 모든 멍에를 풀어주십시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을 방법으로 남쪽에 있는 또 하나의 큰 나라였던 애굽과 동맹을 맺고 바벨론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나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은 참으로 의외의 말씀을 하십니다. 오늘 본문 16절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바벨론 왕이 그를 왕으로 세웠거늘 그가 맹세를 저버리고 언약을 배반하였은즉 그 왕이 거주하는 곳 바벨론에서 왕과 함게 있다가 죽을 것이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을 두고 맹세하신데요. 하나님께서 확고하게 말씀하시는 거죠. 바벨론 왕이 시드기야를 왕으로 세웠는데, 시드기야 왕이 바벨론 왕을 섬기겠다는 맹세를 저버리고 바벨론 왕에게 맺은 약속을 배반하였기 때문에 바벨론에 사로잡혀 가서 머나먼 바벨론 땅에서 자신의 생애를 마감하게 될 것이라는 심판의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매우 의미심장한 말씀을 우리에게 들려주십니다. 오늘 본문 19절입니다. 

“그러므로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그가 내 맹세를 업신여기고 내 언약을 배반하였은즉 내가 그 죄를 그 머리에 돌리되” 

시드기야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과 맺은 언약, 곧 바벨론의 속국이 되어서 바벨론을 떠받히고 바벨론을 섬기겠다는 약속을 어긴 것이 곧 ‘하나님과의  맹세’를 업신여기고 ‘하나님과의 언약’을 배반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여러 가지로 묵상을 하면서, 하나님은 왜 유다의 왕 시드기야가 이방 나라 바벨론을 섬기겠다는 약속을 하나님과 맺은 약속으로 생각을 하실까 질문을 하고 생각을 해 보았어요. 그러자, 그 안에 중요한 교훈이 한 가지 있더라고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을 분명하게 구분해요.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신다고 생각해요. 여기까지는 바른 생각이에요.  그런데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죠.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세요. 그런데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이러한 생각을 틀린 생각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은 함께하시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생사화복도 하나님께서 주관하십니다. 다만 그들이 자신들의 삶을 붙잡고 계시는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할 뿐이지요. 

그러므로, 비록 불신자가 세상에서 우리의 상관이 되고 때로는 불신자들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괴로움을 당하게 되더라도, 여러분 그들의 뒤에서 실제로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반드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안에 하나님의 깊으신 뜻이 있습니다. 나에게 해를 끼치고, 나를 힘들게 하고, 나를 어려움과 고통으로 몰아넣는 불신자가 있으세요? 하나님은 바로 그들을 통해 오늘 우리에게 무엇인가 놀라운 계획을 진행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숨겨진 계획 

에스겔 시대, 유다 백성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고 식민지가 되어가는 모습 속에서 유다 민족이 바벨론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노력하자 하나님은 그들을 꾸짓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참 단순합니다. 유다 백성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가고 바벨론의 식민지가 되어가는 모든 과정 속에서 묵묵히 유다 민족을 위한 놀라운 계획을 조금씩 성취해하고 계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드디어 유다 백성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가는 이 과정 속에서 하나님이 예비하시는 놀라운 계획을 말씀하여 주십니다. 오늘 본문 22절과 23절 말씀입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백향목 꼭대기에서 높은 가지를 꺾어다가 심으리라 내가 그 높은 새 가지 끝에서 연한 가지를 꺾어 높고 우뚝 솟은 산에 심되 이스라엘 높은 산에 심으리니 그 가지가 무성하고 열매를 맺어서 아름다운 백향목이 될 것이요 각종 새가 그 아래에 깃들이며 그 가지 그늘에 살리라” 

하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백향목 꼭대기에서 높은 가지를 꺾어서 다시 심으시겠답니다. 연한 가지를 꺾어서 다시 높고 우뚝 솟은 산에 심으시겠데요. 이 비유의 의미는 너무도 명확합니다. 지금 남 유다는 바베론의 포로가 되어가고 식민지가 되어가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의 일부를 다시금 약속의 땅 예루살렘으로 인도하시고 그곳에 심어주시겠다는 말씀이지요. 그리고 23절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새롭게 심으실 사람들을 통해 이루실 놀라운 역사를 분명하게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높은 산에 심으리니” 그 가지가 무성해집니다. 그리고 좋은 열매를 가득가득 맺게 됩니다. 아름다운 백향목이 되어서 각종 새가 그 아래에 깃들이며 그 가지 그늘에 살게 됩니다. 여러분, 여기에서 각종 새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유다를 식민지로 만들어가고 있는 바벨론을 포함한 모든 열방을 의미합니다. 열방의 모든 나라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흘러 보낼 수 있는 축복의 통로로 유다 민족을 사용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께서 유다 민족을 통해 열방에 하나님의 은혜를 흘러넘치게 하시기 위해서는 그들의 심령을 근원부터 바꿀 수 있는 바벨론에서의 포로 생활이 꼭 필요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방민족 바벨론을 통해 그 일을 진행하고 계셨던 것이죠. 

우리의 삶 속에서 고통이 찾아오고 아픔이 찾아올때, 특별히 불신자들로 말미암아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불이익을 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그저 그 아픔과 고통 속에서 하루속히 벗어나게 해 다라고 몸부림치며 기도하기보다 그러한 아픔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펼치고 계실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뜻을 묻고 찾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인 우리를 결코 포기하거나 방치해두지 않으십니다. 그저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이루기 위해 잠시 잠깐 우리에게 아픔도 허락하시고, 고통의 시련도 허락하시는 것이지요.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기억하고, 믿고 확신하면서 우리 안에 있는 다양한 기도의 제목을 놓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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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0. 6. 15. 13:43

미국의 저명한 설교자 가운데 한명인 토니 에반슨 목사님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이분은 평소에 통닭을 참 좋아하셨다고 합니다. 하루는 에반스 목사님이 비행기를 타고 달라스에서 아틀란타로 이동하기 위해 공항에 갔습니다. 그런데 비행기를 탑승할 때까지 조금 시간이 있어서 기다리고 있는데, 그분의 눈 앞에 어느 유명한 프라이드 치킨 간판이 보이는 겁니다. 평소에도 치킨은 참 좋아하셨던 분이라 잠시 시간도 있어서 통닭을 사먹었는데, 어떻게 되었을까요? 네, 비행기를 놓쳤습니다. 
그리고 토니 에반스 목사님은 이 사건이 있은 후 자신의 설교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닭다리 때문에 비행기를 놓치지 마십시오.” 
닭다리와 같은 작은 것, 부수적인 것 때문에 자신이 가야하는 중요한 목적지를 놓치면 안된다는 교훈이지요. 


음식, 그 뒤에 계신 분 

오늘 본문에도 이와 비슷한 교훈이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 1절과 2절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네가 관원과 함께 앉아 음식을 먹게 되거든 삼가 네 앞에 있는 자가 누구인지를 생각하며 네가 만일 음식을 탐하는 자이거든 네 목에 칼을 둘 것이니라” 

누군가 여러분을 초대하였습니다. 특별히 힘이 있고 권력을 가진 사람, 곧 관원이 여러분을 초대하여 음식을 대접할 때, 어떻게 하라고 말씀합니까? “삼가 네 앞에 있는 자가 누구인지를 생각하며” 지금 당장 내 앞에 있는 귀한 음식, 좋아보이는 음식만 바라보지 말고 그 뒤에 앉아있는 사람 – 곧 나에게 이 음식을 제공하고 있는 사람 – 이 누구인지, 그가 나에게 이 음식을 제공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라는 말씀입니다. 

2절 말씀은 1절의 내용을 더욱더 강경하고 분명하게 명령합니다. 

“네가 만일 음식을 탐하는 자이거든 네 목에 칼을 둘 것이니라” 

특별히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들, 맛있는 음식을 보면 식탐이 올라오는 사람들은 더욱더 주의해야 하는데, 어느정도까지 주의를 해야 합니까? “너의 목에 칼을 둘 것이니라” 내가 이 음식을 먹으면 죽을 수도 있다는 분명한 인식을 가지고 음식을 대해야 한다는 말씀이지요. 

여러분, 매일 우리가 먹는 음식은 참으로 귀한 것이고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특별한 은총입니다. 그래서 어린 시절 교회에서 배우는 찬양이 있잖아요? 
“날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그 다음에 이떻게 됩니까? 
“은혜로우신 하나님” 
우리는 매일 하루 세끼의 식사를 하면서 날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기억할 수가 있습니다. 내 앞에 놓여 있는 밥 한 그릇을 보면서 나의 모든 것을 채워주시고 오늘도 나의 삶을 붙잡고 계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처럼 귀한 음식도 잘못 사용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특별히 악한 사람들이 이처럼 귀한 음식을 가지고 사람을 올무에 걸리게 하거나, 너머지게 만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들은 음식을 대할 때에도 지혜가 필요합니다. 

음식을 대하는 지혜란 그 음식 자체에 우리의 모든 관심을 쏟는 것이 아니라 그 음식 뒤에 누가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음식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않는다고 해서 더 못사는 것도 아니고 
먹는다고 해서 더 잘사는 것도 아니니라” (고전 8:8) 

여러분, 성경에 이런 구절도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하루 기름진 음식을 먹었느냐, 아니면 그저 하루 세 끼를 채우기 위해 거친 음식을 먹었느냐는 오늘 하루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보람되고 의미있는 하루를 보냈느냐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먹지 않는다고 해서 더 못사는 것도 아니고, 먹는 다고 해서 더 잘 사는 것이 아니락 분명히 말씀한 뒤에 조금 더 내려가면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말씀을 선포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여러분, 지혜로운 그리스도인들은 내 앞에 있는 음식을 바라보며 그 음식에만 초점을 두는 사람이 아니라 오늘 나에게 주어진 밥 한 그릇을 대하면서 그 뒤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오늘도 우리에게 풍성한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들입니다. 


옛 지계석을 옮기지 마라 

오늘 본문은 좋은 음식을 대할 때, 그 뒤에 누가 있는지를 바라보라고 교훈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교훈은 단지 음식을 대할 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음식만이 아니라 나의 눈에 좋아보이는 것, 나의 마음을 빼앗을 만한 좋은 것들을 보더라도 그 뒤에 계신 분을 기억해야 할 경우는 더 많이 있습니다. 또 다른 하나의  예가 오늘 본문 10절과 11절에 등장합니다. 

“옛 지계석을 옮기지 말며 고아들의 밭을 침범하지 말지어다 대저 그들의 구속자는 강하시니 그가 너를 대적하여 그들의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여기에 등장하는 옛 지계석은 땅의 영역을 구분해 놓은 표시이지요. 그런데 옛 지계석을 옮기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아니, 내가 돈을 주고 땅을 샀으면 지계석을 옮겨도 되지 않아요? 내가 고아들을 밭이나 땅을 돈을 주고 정당하게 샀으면 그것이 내 땅이나 밭이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오늘 본문은 그와 같은 행동을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땅이나 밭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에 인간이 사사로이 사거나 팔 수 없다는 것이 구약 율법의 정신이었기 때문입니다. 11절에 이 사실을 분명하게 말씀하시죠. 

“대저 그들의 구속자는 강하시니 그가 너를 대적하여 그들의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지금 당장 내 앞에 땅이나 밭을 더 많이 소유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 듯하지만, 지혜로운 그리스도인들은 한번 더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 내가 소유하고 싶은 바로 그것의 뒤에 누가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께 기도하며 질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이것을 가지고 싶은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허락도 하지 않으셨는데 제가 욕심을 부리는 것입니까?’ 

그런 점에서 오늘 우리가 얻는 참된 지혜는 바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에 만족하는 ‘자족하는 지혜’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서 하루 세 끼의 식사를 주셨다는 것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셨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오직 무엇을 먹든지 무엇을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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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연구" 목차 (Contents)

"잠언 연구"는 구약성경 잠언의 주요 주제를 소개하는 시리즈입니다. 잠언은 매우 쉬운 성경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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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