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아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사랑을 받지 못하는 여인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남성들의 마음은 신뢰를 원하고 여성들의 마음은 사랑을 갈구한다고 하지요. 그런데 레아는 사랑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본문이 구체적으로 묘사하지는 않지만, 레아를 사랑하지 않았던 사람은 그의 남편 야곱입니다. 결혼을 하여 야곱을 남편으로 받아들였지만 정작 그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였다는 사실이 레아에게는 가장 큰 고통이었겠지요. 그런데 그녀의 고통을 하나님께서 헤아리셨고 그에게 태의 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레아가 비록 남편의 사랑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레아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으셨고 그녀를 긍휼과 사랑으로 대하여 주셨습니다.
레아는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여 괴로워했지만, 그 가운데서도 자신을 돌봐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깨달았습니다. 그녀가 첫번째 아들을 낳은 뒤 그의 이름을 르우벤이라고 부르며 이렇게 말하지요.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32절) 그뿐이 아닙니다. 레아가 둘째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부르며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33절)
때로는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마치 레아가 남편의 사랑을 그토록 원하였지만 그 사랑을 받을 수 없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나의 간절한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삶을 한 걸음 뒤에서 바라본다면, 내가 간절히 원하는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는 순간에도 하나님은 그 외에 많은 선물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마치 레아에게 남편의 사랑은 없었지만 그만큼 여러 아들을 낳을 수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지금 나의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았더라도 여전히 여러분을 사랑의 눈길로 바라보시며 따스한 손길로 붙잡고 계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은 여전히 여러분을 사랑하여 주십니다.
사람에 대한 기대는 실망만 남깁니다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던 레아였지만, 하나님은 그녀를 특별히 사랑하여 그녀의 형편을 보살펴주셨지요. 그럼에도 그녀의 마음은 하나님의 사랑에 만족하지 못하고 여전히 남편의 사랑만을 갈구합니다. 첫 번째 아들 르우벤이 태어났을 때 레아가 했던 말이 그녀의 마음을 잘 보여줍니다.
레아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 (32절)
레아는 아들을 낳으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괴로움을 돌보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관심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라고 기대하지요. 그러나 첫 번째 아들을 낳아도 그녀의 기대는 현실이 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레아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두 번째 아들 시므온을 낳게 하시고 이어서 셋째 아들 레위를 낳게 하셨습니다. 이때까지도 레아의 관심은 남편에게 어떻게 하면 사랑을 받을 수 있을가에 고착되어 있었어요.
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 하고 그의 이름을 레위라 하였으며 (34절)
여기에 조금도 변하지 않는 레아의 마음이 드러나지요. 결혼을 하였고 그 사이에서 자녀도 낳았지만 레아는 남편 야곱과 마음으로부터 연합하지 못했습니다. 당연하죠. 남편이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잖아요. 이제 세 명의 아들을 낳았으니 남편이 레아 자신과 연합하게 되리라는 기대를 품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창세기를 계속 읽어보면, 레아의 이러한 기대와 소망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맙니다. 야곱은 레아가 아닌 그녀의 동생 라헬을 한평생 변함없이 사랑했거든요. 라헬이 베냐민을 낳는 과정에서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자 야곱은 라헬이 그에게 남겨놓은 두 아들 곧 야곱과 베냐민을 끝까지 사랑하거든요. 레아는 아들을 낳으면 남편이 자신을 사랑하게 될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아들을 세 명이나 낳았으니 남편과 마음으로 연합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에 대한 그녀의 기대는 실망감만 남겼어요.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결코 잊지 마십시오. 사람에 대한 기대는 그 대상이 비록 나와 가장 가까운 남편이라 할지라도, 우리에게 실망만 남기게 되어 있습니다.
참 다행히 오늘 본문을 보면 레아는 네번째 아들을 낳으며 비로소 그녀의 마음과 그녀의 시선을 남편으로부터 하나님에게로 옮기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의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 그의 출산이 멈추었더라 (35절)
남편의 사랑은 이제 포기했습니다. 그대신 자신의 형편을 불쌍히 여겨 네 명의 아들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즐거워하기 시작합니다. 그리하여 레아는 입술을 열어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하지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누구에게 기대를 걸고 소망을 찾고 계시나요? 사람에게 기대하고 사람에게 소망을 두면 우리는 실망하고 절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소망을 두면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시지 않습니다. 오늘도 나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며 그 주님을 찬양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크게 확장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본문은 야곱이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 장면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에서 야곱의 하나님으로
야곱에게 하나님이란 아버지 이삭이 섬기는 하나님이었고,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섬기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야곱에게 하나님이란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에게 복을 주셔서 할아버지를 이어 아버지의 집을 부유하게 만들어주신 하나님이었습니다. 야곱은 부유한 아버지의 재산 가운데 더 많은 것을 유산으로 받고 싶은 마음에 형의 장자권을 빼앗기 위해 그렇게 노력했는지도 모릅니다. 당시 문화에서는 장자에게 다른 아들보다 두배의 유산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만사가 다 뜻대로 되지는 않는 것처럼, 아버지를 속여 장자의 축복을 받은 것이 계기가 되어 야곱은 형 에서의 위협을 피해 멀리 도망쳐야 했지요. 얼마나 달렸을까요? 해가 기울어질 때까지 그는 달리고 또 달렸습니다. 그의 손에는 핸드폰 GPS도 없고 지도 한 장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한 밤이 되니 앞뒤 좌우를 도저히 분간할 수 없었던 야곱은 노상에서 잠을 청합니다.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 곳의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 자더니 (11절)
그런데 바로 그날 밤, 하나님께서 꿈으로 야곱에게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야곱에게 가장 익숙한 방식으로 자신을 소개하십니다.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13a절)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 그리고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은 지금까지 야곱이 익숙하게 알고 있던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할아버지의 하나님과 아버지의 하나님이 지금 야곱 자신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할아버지나 아버지에 대해 말씀하시지 않고 야곱 자신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13b-15절)
바로 이 장면에서 야곱은 할아버지의 하나님과 아버지의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경험하게 됩니다.
아버지의 하나님이 아들의 하나님이 되는 순간
하나님을 만난 야곱은 잠에서 깨어 이렇게 소리칩니다.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16-17절)
야곱은 날이 밝자 그곳에 기름을 붓고 이름을 벧엘(하나님의 집)이라고 붙였습니다. 지금까지 야곱은 하나님께서 아버지 이삭의 집에만 계신 분으로 알았지요. 그런데 정처 없이 달려온 자신을 찾아와 바로 그 자리를 하나님의 집으로 만들어 주시는 하나님을 체험했습니다. 곧 아버지의 집에만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벧엘의 하나님을 발견하는 경험이었습니다.
창세기에서 아버지의 하나님이 자녀의 하나님으로 변화되는 장면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먼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그의 아들 이삭의 하나님이 되는 결정적인 장면은 언제였을까요? 아마 모리아 산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했던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품 안의 자식으로 양육하던 단계를 넘어 아버지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하나님의 손에 전적으로 내어 드릴 때 아버지의 하나님이 아들의 하나님이 되었습니다.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이 그의 아들 야곱의 하나님이 되는 오늘 본문도 동일합니다. 에서와 야곱의 다툼으로 이삭은 어쩔 수 없이 야곱을 하란으로 내보내었지요. 더 이상 자신의 집에서 양육하지 못하고 저 멀리 떠나보내며 하나님의 손에 아들을 맡겨 놓을 때 하나님은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에서 그의 아들 야곱의 하나님, 곧 벧엘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이후 아버지 야곱의 하나님이 그의 아들 요셉의 하나님이 되는 과정도 동일합니다. 야곱이 가장 사랑하였던 아들 요셉을 그의 집에서 양육할 때까지 요셉에게 하나님은 아버지 야곱의 하나님이었겠지요. 그러나 형들의 미움과 폭행으로 아버지의 집을 떠나 애굽으로 팔려가면서 비로소 아버지 야곱의 하나님은 그의 아들 요셉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모든 부모는 최선을 다해 자녀를 양육합니다. 그러나 부모가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는 바로 그때, 그리하여 자녀들을 하나님의 손에 온전히 내어 맡기는 그때 하나님께서 벧엘의 하나님으로 우리 자녀들에게 나타나십니다. 그리하여 아버지의 하나님이 이제 아들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에서와 야곱의 다툼은 결국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 멀리 하란으로 도망하는 결과를 빚게 됩니다. 본문은 야곱이 집을 나서기 전, 아버지 이삭이 야곱을 다시 한번 축복하고 또 권면하는 장면입니다.
결혼에 대한 권면
창세기를 계속해서 묵상하는 우리는 오늘 본문의 배경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야곱이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의 축복을 받게 되었지요. 이것이 계기가 되어 형 에서는 동생 야곱을 죽이겠다고 달려드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어머니 리브가는 야곱을 자신의 친정이 있는 하란으로 보내려는 계획을 세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만 떼어놓고 읽어보면, 이러한 긴박한 사건의 흐름과는 달리 이삭이 마치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 아들 야곱을 하란 땅으로 보내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됩니다. 그 특별한 목적이란 야곱의 결혼이지요.
이삭이 야곱을 불러 그에게 축복하고 또 당부하여 이르되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지 말고 일어나 밧단아람으로 가서 네 외조부 브두엘의 집에 이르러 거기서 네 외삼촌 라반의 딸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라 (1-2절)
이 구절은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의 아내를 찾기 위해 나이 많은 종을 하란으로 보내었던 장면을 생각나게 합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모든 소유를 관리하던 종을 하란으로 보내며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너는 내가 거주하는 이 지방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지 말고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 (창 24:3-4)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비전을 향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이주하였고 그곳에 정착하였습니다. 가나안에서 대대로 정착하기 위해서는 그 지역 사람들과 화평하게 지는 것이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결혼은 그 지역에 동화되는 종은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의 신붓감을 가나안 백성들 사이에서 찾지 않았습니다. 믿을만한 종을 멀리 하란까지 보내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자신의 동족 중에서 이삭의 아내를 찾아오게 합니다. 이후 시간이 흘러 이삭도 동일한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자신의 아들 야곱이 가나안 땅을 떠나야 했을 때, 이삭은 야곱을 하란으로 보내고 그곳에서 자신의 동족과 결혼할 것을 권면하지요.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의 땅은 가나안이지만,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신다는 그 약속이 이루어질 때 민족의 정체성도 반드시 유지되어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정체성은 매우 중요한 주제입니다.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천국 시민의 정체성을 약화시키고 세상의 가치관과 세상의 방식대로 살아가도록 이끄는 유혹이 끝없이 찾아오지요. 바로 이때 그리스도인은 신앙의 바른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멀리 하란으로 믿음직한 종을 보내어 그곳에서 며느릿감을 찾아오게 했던 것처럼, 마치 이삭이 야곱을 하란으로 보내며 그곳에 아내를 만나 결혼하라고 권면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을 살아가지만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언약의 계승자가 아니더라도
이삭은 야곱을 하란으로 보내어 가나안 여인이 아닌 자신의 동족과 결혼할 것을 권면합니다. 야곱의 이러한 행동은 아브라함과 이삭으로 내려온 하나님의 언약이 자신의 두 아들 에서와 야곱 가운데 둘째 아들인 야곱에게 이어질 것이라는 점을 암시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시어 네가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가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네게 주시되 너와 너와 함께 네 자손에게도 주사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 곧 네가 거류하는 땅을 네가 차지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3-4절)
이삭이 야곱을 축복하는 이 구절에 아브라함의 이름이 여러 차례 등장합니다.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은 곧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언약인데, 그 언약이 이제 이삭을 통해 야곱에게로 계승되리라는 선포나 다름없습니다. 이처럼 야곱의 축복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언약의 계승자는 형 에서가 아니라 동생 야곱이라는 점이 분명해졌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이삭이 야곱을 축복하여 하란으로 보내는 이 장면이 그의 형 에서에게도 좋은 자극이 되었다고 서술합니다.
에서가 또 본즉 가나안 사람의 딸들이 그의 아버지 이삭을 기쁘게 하지 못하는지라 이에 에서가 이스마엘에게 가서 그 본처들 외에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딸이요 느바욧의 누이인 마할랏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라 (8-9절)
에서가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는 과정을 살펴보면 그가 민족의 정체성을 철저히 지킨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이 에서가 아닌 야곱에게 이어졌지만, 에서 역시 이삭의 아들로 자신의 민족적 순수성과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위대한 역사의 중심에 여러분이 주인공이 되실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야곱의 결혼과 같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성도의 순서성과 정체성을 온전히 지켜온 분들도 계시겠지만, 이미 가나안의 여인과 결혼한 에서와 같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가지고 있지만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성도의 정체성을 온전히 지키지 못한 분들도 계실 거예요. 그러나 성도 여러분, 우리가 야곱과 같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역사의 중심 주인공이 되었든 혹은 에서와 같이 주변 인물이 되었든 상관없이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마치 야곱만 아니라 에서도 이삭의 아들로서 큰 민족을 이루시겠다고 하나님께서 축복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에서가 이삭의 아들로서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듯, 우리도 성도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라 불러주셨으니, 오늘 하루도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십시오.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도란 놀라운 특권입니다.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지금도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직접 부르며 그 하나님께 기도로 나의 마음을 이야기할 수 있다니 얼마나 놀라운 특권인지요.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합니다. 여러분, 복음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심판과 저주를 피할 수 없는 죄인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형벌을 선고받아야 하는 죄인이라면 그가 어떻게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며 자신의 소원을 아뢸 수 있을까요? 그러므로 구원받기 이전의 우리는 감히 하나님께 기도할 수 없는 존재였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하여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지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셨지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는 용서받았고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아버지라 부르며 기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의 기도는 그저 어딘가에 있을 능력 많은 신적 존재를 향해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자신의 소원을 비는 행위와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누리며 살아가는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와 친밀한 교류를 누리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정확히 나의 마음을 이야기하고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음성에 정확히 우리의 모든 초점을 고정하는 성도들의 이러한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이 누리는 놀라운 특권 중의 특권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선사하는 특권 중의 특권입니다. 그러나 기도를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라고 강조하면 은연중에 기도라는 특권은 내가 사용할 수도 있고 사용하지 않을 수도 있는 선택사항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지요. 그런 점에서 성경은 기도가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라고 가르치면도 동시에 기도는 모든 성도들의 사명이라고 가르칩니다. 여러분, 사명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라고 맡겨주신 역할입니다. 사명을 감당하다 보면 그것을 지속하는 것이 나에게 무거운 짐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잠시 멈추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선택사항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기셨기에 다시 한번 힘을 내어 그 일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 바로 사명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기도는 특권이면서 동시에 사명입니다. 기도는 특권이면서 동시에 사명이기에 우리는 기도하고 싶지 않을 때에도, 기도를 잠시 쉬고 싶을 때에도 다시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디모데전서는 사도 바울이 자신의 사역을 마무리하면서 자신의 뒤를 이어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목양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디모데에게 사명을 감당하는 자세를 권면한 편지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디모데가 그 무엇보다 우선순위에 두고 집중해야 할 사명이 무엇인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첫째로 권한다는 뜻은 권면의 순서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순위를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1절)
디모데에게 주어진 사명이 무엇입니까? 디모데는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목양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가장 우선순위를 두어야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기도의 사명이지요. 바울이 강조하는 기도의 사명은 교회를 목양하는 디모데에게만 적용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주일을 맞이하여 성도들이 함께 모여 예배하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여러 모습으로 봉사하는 손길이 필요하지요. 어떤 분들은 예배를 위한 시설을 관리하고 또 어떤 분들은 주방 봉사나 주차 관리로 수고해주시고 또 어떤 분들은 안내위원이나 봉헌위원으로 봉사해주십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렇게 다양한 모습으로 봉사하는 모든 분들이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가장 우선순위에 두고 집중해야 할 것이 있으니 그것이 무엇일까요? 기도의 사명입니다. 우리 중에는 교회가 아니라 직정이나 가정에서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직장에서 정직하고 바르게 일을 처리하면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사명을 받으신 분들도 계시지요. 가정에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족과 자녀들을 돌보는 귀한 사명을 맡은 분들도 계십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의 장소나 내용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우리가 가장 우선순위에 두어야 할 것이 있으니 그것이 무엇일까요? 역시 기도의 사명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의 은혜를 받은 우리 모두는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사명의 은혜도 받았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 받은 사명의 장소가 다르고 사명의 종류가 다르죠. 그러나 그 모든 사명을 충성스럽게 담당하기 위해 최고의 우선순위에 두어야 할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기도의 사명입니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주신 기도의 사명, 우리 모두가 최우선순위에 두고 감당해야 하는 기도의 사명이 보다 구체적으로 어떠한 기도이어야 하는지를 두 가지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모든 사람을 위한 기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도의 사명, 곧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기도의 사명은 첫째로 “모든 사람을 위한 기도”입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기도의 사명에 대해 말씀하는 본문 1절을 묵상하면, 모든 성도들에게 사명으로 주어진 기도는 자신의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는 간구의 기도를 넘어 보다 다채롭고 보다 폭넓은 기도라는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다시 보시면, 기도의 종류가 네 가지나 등장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입니다. 간구하는 기도로 시작하여 감사하는 기도까지 기도의 다양한 형태와 내용이 이 짧은 구절에 등장하지요. 어떤 분들은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가 각각 무엇을 나타내는지 상세하게 설명하기 위해 노력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러나 본문에는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에 대한 별도의 설명이 없으니 우리는 바울이 어떠한 의미로 이러한 용어를 사용했는지 정확히 알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이 대목을 묵상하며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분명한 교훈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성도들의 기도가 단지 하나님께 나의 소원을 아뢰는 간구만이 아니라 하나님과 대화하는 다양한 내용과 다양한 형식으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물론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첫 번째 기도의 유형은 간구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기도의 사명은 간구의 기도에 머무른 것이 아닙니다.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라는 다채로운 기도를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는 말씀이지요.
또 한 가지, 본문 1절에서 우리가 쉽게 지나칠 수 없는 문구가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라는 구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기도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는 나만을 위한 기도가 아닙니다. 우리 가족만을 위한 기도도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모든 사람을 위한 기도가 어떠한 것인지 구체적인 예가 등장합니다.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 하라 (2a절)
이 말씀은 세상의 통치자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구절로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인들도 대통령을 비롯한 여야 정치인들을 위해 기도하지요. 그런데 바울이 기록한 이 글을 초대교회 성도들이 읽었을 때에는 우리 시대 그리스도인들은 쉽게 예상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당시 기독교가 로마 제국 안에서 큰 박해를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시대의 정치인들 중에도 종교적 편향성을 보이는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적으로 종교의 자유를 옹호하는 입장이지요. 그런데 당시 로마의 고위 관료들은 한결같이 기독교인들을 미워하여 기독교를 비방하고 기독교를 박해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디모데와 초대교회 성도들을 향해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권면했을 때, 그 권면은 성도들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삶을 가장 크게 괴롭히는 사람들 그리하여 자연스럽게 성도들의 마음에 미움과 분노의 감정이 일어나는 그 대상을 위해 기도하라는 권면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 칼뱅은 이 구절을 해설하면서 성도들이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앉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이유를 “그들이 교회의 미움을 받기 때문이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바울은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모든 사람을 위하여, 특별히 기독교를 박해하는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앉은 사람들을 위해 간구하고 기도하고 도고하고 감사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기도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 본문 3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 (3절)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기도의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누구를 위한 기도의 사명을 받았을까요? 모든 사람을 위한 기도입니다. 물론 나 자신을 위한 기도 포함됩니다. 우리 가족을 위한 기도가 포함됩니다. 나와 함께 일하는 직장 동료도 포함되고, 내가 자주 마주치는 이웃들을 위한 기도도 포함되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도의 사명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심지어 나를 가장 괴롭히는 사람 그리하여 내 마음에 가장 미움이 생기는 그 사람을 위해서도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받으실 선한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기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도의 사명, 곧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기도의 사명은 둘째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기도”입니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주어진 기도의 사명을 말씀하면서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지요. 바울은 이제 그 모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그 다음을 주목하십시오) 원하시느니라 (4절)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알기를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 구절에도 “모든 사람”이라는 표현이 등장하지요.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본문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은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온갖 박해에도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성도들만 이야기하는 것 아닙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 중에는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 곧 자신의 권세를 이용하여 교회를 박해하고 기독교인들에게 폭행을 가하는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그들도 구원을 받기 원하십니다.
여러분은 기독교를 박해하는 사람들도 구원을 받기를 하나님께서 원하고 계시다는 바울의 주장에 동의하시나요? 초대교회 성도들 중에는 모든 사람, 특별히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도 구원받는 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는 바울의 주장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했던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주장에 대한 분명한 증거를 제시합니다.
[그리스도 예수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러 주신 증거니라 (6절)
본문 6절에도 “모든 사람”이라는 문구가 등장하네요. “모든 사람”의 의미가 무엇인지 한번만 더 반복해서 말씀드려도 될까요? 본문 6절의 “모든 사람”은 기독교인들, 어떠한 고난과 역경이 찾아와도 마지막까지 믿음을 지키는 신실한 성도들만 가리키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대속물로 주셨다는 이 말씀에서 “모든 사람”은 기독교인들을 미워하는 사람들, 기독교를 박해하는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앉은 사람들도 모두 포괄하는 표현이지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사랑하시는 증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께서 저 이방인들 심지어 교회를 비방하고 교회를 박해하는 사람들도 여전히 사랑하신다는 너무도 분명한 증거가 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 5:8)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 사랑의 증거입니다. 우리가 비록 고난을 당하고 역경에 빠진다 할지라도, 우리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죄인이었을 그때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까지도 십자가 위에 내어주셔서 그것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실히 증명하기 대문이지요. 똑같습니다. 지금 누군가 나를 괴롭힙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을 모욕하고 기독교를 박해합니다. 그 사람의 언어와 행동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죄인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그가 아직 죄인으로 살아가는 그때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 위에 내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그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을 증명하고도 남지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지금도 그 사람을 사랑하여 그가 구원받기를 간절히 원하고 계시다면 우리 성도들이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도의 사명, 그것은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기도입니다.
시각과 청각의 장애를 딛고 일어서 교육자요 또한 사회 운동가로 활동하였던 헬렌 켈러(Hellen Keller)가 진정한 행복의 조건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진정한 행복의 조건이 무엇인지 오해하는 사람이 많다. 진정한 행복은 자기만족을 통해서가 아니라 가치 있는 목적에 헌신할 때 찾아온다.
헬렌 켈러가 이야기했던 “가치 있는 목적에 대한 헌신”을 기독교에서는 사명이라고 부르지요. 곧, 사명을 위하 살아가는 인생이 진정으로 행복한 삶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소명>이라는 책의 저자로 유명한 오스 기니스는 그의 책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 사회에 대해 이렇게 진단했습니다.
인류 역사상 존재했던 수많은 문명 가운데 현대 서구 문명은 인생의 목적에 관해 합의된 대답이 없는 최초의 문명이다. 현대인의 고민은 너무나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지만 삶의 목적은 너무나 빈약하다는 것이다.
헬렌 켈러의 이야기와 오스 기니스의 이야기를 종합하면 이렇게 되지요. 진정한 행복은 가치 있는 목적에 헌신할 때 찾아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는 인생의 참된 목적이 무엇인지 알려주지 않는다는 사실이지요. 자연스러운 결과로, 현대인들은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지만 삶의 참된 목적은 너무도 빈약하니 그 어떠한 소유나 그 어떠한 성취로도 진정한 행복을 누리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풍성한 은혜가 있다면,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에게 사명을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사명의 은혜
오늘 본문 디모데전서는 바울의 후기서신으로 구분합니다. 바울이 많은 서신서를 기록하였는데 디모데전서는 그 저술 시기가 다른 서신서들보다 늦게 쓰였기 때문이지요.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바울은 이미 1차, 2차, 3차 전도여행을 모두 마쳤습니다. 지금까지 사도로서 그리고 선교사로서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목양했던 바울이 이제 자신을 이어 교회를 목양해야 하는 디모데에게 어떠한 자세로 그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지를 편지로 기록해준 것이 디모데전서입니다. 그러니 바울의 생애에 있어 디모데전서는 그의 노년 시기, 그것도 자신의 사역을 마무리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하기 위한 준비를 하던 시기에 기록된 서신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는 노년의 바울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회상하는 장면이 담겨 있습니다.
이제는 노년이 되어 지난 자신의 삶과 자신의 사역을 되돌아보던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 12절이 이렇게 시작하잖아요.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12b절)
바울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사도라는 직분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도가 되어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주셨기 때문이지요. 직분이나 사명은 성도들이 충성스럽게 감당해야 하는 역할을 말합니다. 그런 점에서 직분이나 사명은 감사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나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힘들 때도 많고 그만두고 싶을 때도 많지만 끝까지 하나님께서 주신 직분과 사명을 감당하는 경우가 있지요. 그러니 직분이나 사명은 감사의 결과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직분이나 사명은 감사한 마음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직분이나 사명 자체가 감사의 중요한 이유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왜 그렇습니까? 헬렌 켈러가 이미 이야기했잖아요. 진정한 행복은 자기만족을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행복은 가치 있는 목적, 곧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직분과 사명에 헌신할 때 찾아옵니다. 그러니 인생의 참된 목적을 잃어버린 우리 시대에 하나님께서 여전히 우리에게 직분을 주시고 사명을 주신다는 사실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요 감사의 이유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사도 바울이 직분과 사명을 주시는 하나님께 크게 감사하는 또 다른 이유가 등장합니다. 곧,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귀한 사명이 주어질 이유나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12절을 다시 보십시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그 다음을 주목하십시오. “나를 충성되이 여겨” 충성되이 여긴다는 것은 충성스럽다는 것과 다른 말이지요. 바울은 충성스러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충성스럽게 여겨주시니 은혜입니다. 마치, 우리는 의인이 아닙니다.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성인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의롭게 여겨주십니다. 우리를 거룩한 성인으로, 곧 성인들의 모임인 성도로 우리를 불러주십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충성스러운 사람이 아닌데 하나님께서 충성스럽게 여겨 직분과 사명을 맡겨주시니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보다 자세히 설명합니다.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13절)
어떤 분들은 이 구절을 읽으면서도 바울에게 사도의 직분과 사명이 주어질 만한 어떤 자격이나 조건을 찾으려고 노력하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본문 13절에서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에 주목하지요. 무지할 때에는 비방자와 박해자로 살았지만, 복음의 진리를 깨달은 뒤로는 충성스럽게 사도의 직분을 감당했다는 해석입니다. 그러나 본문 13절에서 우리가 더욱 주목해야 할 구절은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가 아니라 “긍휼은 입은 것은”입니다. 긍휼이 무엇입니까? 도저히 희망이 없는 이들을 향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지요. 바울은 복음에 대한 비방자로 살았습니다. 기독교에 대한 박해자로 살았습니다. 성도들을 향해 폭행을 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바울을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겨주셔서, 그 모든 죄악도 그저 모르고 한 것이 아니냐고 애써 덮어주셨다는 말씀이지요. 그래서 바울은 자신을 불러 직분과 사명을 맡겨주신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었어요.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14절)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감사 제목은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할만큼 풍족하지는 않아도 근근이 살아갈 수 있도록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께 우리는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가족을 허락하여 주셔서 그 안에서 사랑과 위로를 경험하게 하시니 감사하지요. 우리에게 출석할 수 있는 교회를 허락하여 주시고 다른 성도들과 함께 신앙생활을 영위하게 하시니 감사를 드리지요. 그러나 여러분, 그에 못지않게 우리가 반드시 기억하고 감사해야 할 이유가 있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직분을 주시고 사명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성도로 집사로 권사로 혹은 장로로 부르심을 받으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직분과 그에 따르는 사명을 주신 것은 한이 없으신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에게는 그와 같은 직분과 사명을 받을 자격이 조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를 충성스럽게 여겨 직분과 사명을 주셨으니 우리는 그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구원의 은혜
노년의 바울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니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던 자신에게 사도라는 귀한 직분과 사명을 맡겨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일생에 변함없이 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다보니, 당시 교회 안에 회자되던 하나의 격언이 생각났습니다. 그 격언이 오늘 본문 15절에 등장합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15절)
15절이 어떻게 시작합니까?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당시 초대 교회 안에 성도들이 자주 인용하였던 격언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격언은 참으로 진리의 말씀이었고,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는 말씀이었다는 의미지요. 그러면 당시 교회에서 회자되었던 격언이 무엇입니까? 15절 중간에 등장하네요.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그런데 여러분, 바울이 지금 인용하는 격언은 바로 위에서 바울이 이야기했던 감사의 이유와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바울은 무엇에 대해 감사했습니까? 자신에게 직분을 주신 것, 자신에게 사명을 맡겨주신 일에 감사했습니다. 반면에 바울이 인용하는 격언은 무엇을 이야기합니까? 구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라는 말씀이잖아요. 계속되는 16절도 마찬가지로 구원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됩니다.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16절)
이미 노년이 된 바울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자신을 사도로 불러주시고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지요. 한 마디로 사명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그 사명의 은혜를 깊이 헤아려보니 또 하나의 은혜가 떠오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죄인이었던 나를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아 구속해주신 구원의 은혜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미 노년이 된 바울이 자신의 삶을 깊이 돌아보며 자신의 한평생을 온전히 사로잡았던 하나님의 두 가지 은혜를 깨달았습니다. 곧 구원의 은혜 그리고 사명의 은혜입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돌이켜보면 돌이켜볼수록 이 두 가지 은혜가 바울 자신의 삶에 가득하였기에 그는 오늘 본문의 마지막 절을 말로 다 할 수 없는 찬양으로 마무리합니다.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17절)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당시 초대교회에는 성도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하나의 격언이 있었습니다. 본문 15절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라는 말씀이지요. 그러므로 이 말씀은 바울이 처음으로 기록한 말씀이 아니라, 초대교회 성도들 사이에서 구전으로 회자되고 있던 말씀이었고, 아마도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으로부터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을 부르시는데 마태라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서 자신의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다 아시는 것처럼 당시 세리는 죄인들의 대명사였습니다.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던 시대적 상황에서 로마의 앞잡이가 되어 동포들에게 세금을 걷고 그 과정에서 징수한 세금의 많은 몫을 자신의 주머니에 챙겼던 세리는 모든 유대인들이 싫어하는 가장 대표적인 죄인이었습니다. 만일 지옥의 가장 뜨거운 불길이 타오르는 자리에 들어가야 할 사람이 있다면, 당시 유대인들은 당연히 남자들 중에는 세리요 여자들 중에는 창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세관에서 세리의 일을 하고 있는 마태를 예수님께서 직접 찾아가셔서 불러주십니다. 그리고 마태의 집에 들어가셔서 함께 식사를 나누십니다. 그러자 모두가 예상할 수 있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행동을 비난하기 시작했지요.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고 따지기 시작했어요. 여러분, 이 장면을 마태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십시오. 마태는 세리라는 직업을 갖게 된 후부터 주변의 사람들로부터 줄곧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자신을 제자로 불러주시고 자신의 집에 들어와 식사를 하시는 것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 비난을 받고 계세요. 마태의 입장에서 그 장면이 얼마나 불편하고 얼마나 죄송했을까요? 그렇게 가시방석에 앉아 어찌할지를 몰랐던 마태의 귀에 예수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셨거든요.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마 9:12-13)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와 목적이 무엇입니까?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마태는 자신의 귓가에 들렸던 예수님의 이 말씀을 결코 잊을 수가 없었어요. 비록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했을지 몰라도, 그 자리에서 함께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마태의 마음에는 이 말씀이 깊이 각인되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너는 죄인인데, 너는 지옥의 가장 뜨거운 불길이 타오르는 자리에 들어가야 하는 세리인데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될 수 있겠느냐고 비난할 때마다 사람들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날마다 되새기지 않았을까요?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이후 바울이 사도가 되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할 때마다 그의 발목을 붙잡는 비난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비방하고 교회를 박해했던 사람이라고, 너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라”는 비난이었지요. 그때마다 바울의 마음을 다시 일으켜주는 말씀이 있었으니,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가치 있는 목적에 헌신하며 살아가는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직분과 사명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의 발목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걸림돌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와 더불어 사명의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물론, 우리에게는 구원의 은혜도, 그리고 사명의 은혜도 받을 자격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죄인을 불러 구원하시려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지금도 우리를 충성되이 여겨 사명을 맡겨 주시니, 다시 일어나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위해 달려가십시오. 그렇게 주변의 목소리가 아니라 지금도 우리의 마음에 들려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따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따라 달려갈 때, 헬렌 켈러가 이야기했던 그 진정한 행복, 곧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목적인 하나님의 사명을 위해 살아가는 그 풍성한 행복이 사도 마태나 사도 바울만이 아니라 여러분의 삶에도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 가정에는 식솔도 많았고, 아브라함이 부리는 종들도 매우 많았습니다. 그 가운데 아브라함은 자신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할 뿐만 아니라 일솜씨도 똑 부러지는 종을 고르고 골랐습니다. 지금 아브라함이 맡기려는 일은 어그러지거나 실패하였을 때 조금 손해를 보고 마는 정도의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아브라함의 형제들이 여전히 살고 있었던 하란에 가서, 이삭의 아내감을 데려오는 일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늙은 종은 이삭의 아내를 찾아 데려오는 사명을 받고, 하란으로 출발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이번 여행을 위해 철저히 준비했습니다. 낙타를 열 마리나 끌고 갔는데, 낙타의 등에는 아브라함이 내어준 온갖 좋은 보물이 가득 실려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쉬지 않았고 드디어 하란에 도착하였습니다. 하란에 도착하자, 아브라함의 종은 계획을 세우며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우물 곁에서 기다리다가 소녀들이 오면 그들에게 물을 좀 달라고 청하겠다는 계획입니다. 만일, 어느 소녀가 우물을 길어 이방 나그네인 아브라함의 종에게 물을 대접한다면 그 소녀를 낙점하겠다는 계획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종은 여기에 하나의 조건을 덧붙입니다. 자신이 물을 좀 달라고 요청할 때, 그 요청을 받은 소녀가 자신에게 물을 줄뿐만 아니라 자신이 데려온 낙타에게도 우물물을 길어 목을 축이도록 해준다면 그 소녀야 말로 이삭의 아내로 손색이 없을 것이라고 계획을 세운 것이죠.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다고, 그렇게 나그네를 대접할 수 있는 여성이라면 아브라함의 며느리로 손색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이 일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리고 우물 곁에 있는 자신에게 가까이 오는 한 소녀, 리브가라는 이름의 그 소녀에게 계획대로 말합니다. '나에게 물을 좀 주시오.' 그랬더니, 그 소녀가 아브라함의 종에게 물을 대접하는 것은 물론이고, 낙타에게도 물을 주겠다고 말하며 우물물을 긷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아브라함의 종이 취했던 모습을 묘사해주는 것이 창세기 24장 21절의 말씀이지요.
그 사람이 그를 묵묵히 주목하며
여호와께서 과연 평탄한 길을 주신 여부를 알고자 하더니
아브라함의 종은 주인으로부터 사명을 받고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쉬지 않고 달려왔습니다. 철저히 준비하였고, 준비를 마치자 곧 출발하여 하란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는 하란에 이르러서도 쉼을 몰랐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위해 기도하였고, 계획을 세우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결정적인 순간 - 과연 자신의 눈앞에 있는 여인이 이삭의 아내로 하나님께서 점찍어 둔 사람인지를 확인하는 - 그 순간입니다. 바로 그 결정적인 순간이 도래하자, 아브라함의 종은 자신의 모든 행동을 멈춥니다. 그리고 묵묵히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지, 과연 지금 내 앞에 있는 여인이 하나님께서 이삭의 아내로 점쳐두신 사람인지, 자신의 모든 노력이나 자신의 모든 계획이나 자신의 모든 생각을 내려놓고 과연 하나님께서 어떻게 행하시는지를 묵묵히 지켜보고 있는 바로 그 장면입니다.
아브라함의 종이 이 장면을 묵묵히 바라봤던 시간은 얼마나 길었을까요? 리브가가 우물을 길어 아브라함의 종이 데려온 낙타에게 물을 먹이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종이 몇 마리의 낙타를 데려왔는지 기억하십니까? 설교의 초반부에 말씀을 드린 것처럼, 모두 열마리입니다. 한 소녀가 열 마리나 되는 낙타에게 우물을 길어 한 마리씩 물을 먹이는 시간. 결코 짧지 않은 그 시간 동안 아브라함의 종은 그 장면을 그저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준비함 모든 일이 결정되는 시점, 그래서 너무도 중요한 바로 그 시점에, 아브라함의 늙은 종은 결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자신의 모든 행위와 자신의 모든 언어를 멈추어버리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지 잠잠히 지켜보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 노인이 아브라함에게 배운 지혜요, 그 노인이 아브라함에게 배운 신앙이었습니다.
신앙의 절정[하이라이트]은 달려가는 것도, 힘껏 소리치는 것도 아니라 결정적인 그 순간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일을 위해 최선을 다해 달려가십니다. 열심히, 최선을 다해 준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일을 위해 최선을 다해 일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도 때로는 아브라함의 종과 같이 모든 것을 멈추고 묵묵히 바라보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가장 중요한 시점, 가장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그 시점,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하는 바로 그 시점에 이르렀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욱 열심히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달려가던 걸음을 멈추고 묵묵히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지켜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내일에 대한 희망을 품고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지금 고단하고 힘겨운 일이 있더라도 내일에 대한 소망이 있으면 우리는 기쁨으로 하루를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편안하고 크게 부족한 것이 없더라도 내일에 대한 희망이 사라진다면 우리는 절망하고 괴로워하게 되지요. 우리 시대 젊은 청년들의 삶이 더욱 팍팍해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많은 이유를 제시할 수 있지만, 그 중심에는 내일에 대한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젊은 시절 열심히 노력하고 최선을 다하면 시간이 흐를수록 밝은 미래가 보장되기를 원하는데, 우리 사회는 그렇지 않다는 인식입니다. 어떤 이들은 은수저나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는데 어떤 이들은 흙수저를 물고 태어났으니, 지금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이러한 차이를 극복하기 어려운 현실 앞에서 많은 청년들은 내일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젊은 청년만이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내일에 대한 희망을 간직할 때 오늘을 활기차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지금 나의 삶에 큰 어려움과 괴로움이 찾아오더라도 내일에 대한 소망이 있다면 그 모든 과정을 참고 인내할 수 있지요. 그래서 사도 바울의 편지를 보면 “소망의 인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이처럼 내일을 바라보며 참된 희망을 품을 수 있다는 것은 오늘 우리의 삶을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됩니다.
기독교 신학자 가운데 희망을 노래하였던 유명한 사람이 있습니다. 위르겐 몰트만이라는 독일의 신학자입니다. 그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주었던 대표적인 저서가 『희망의 신학』입니다. 위르겐 몰트만은 그의 저서 『희망의 신학』에서 희망을 낙관과 구분하여 설명합니다. 희망이나 낙관은 내일에 대한 긍정적인 전망이라는 측면에서 유사해 보이지요. 그러나 몰트만은 희망과 낙관이 전혀 다르다고 강조합니다. 그가 이야기하는 낙관은 과거나 현재에 이미 잠재되어 있다가 미래에 나타나는 좋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지금 나의 모습이나 우리 사회의 형편을 주도면밀하게 살펴보면 자연스러운 결과로 내일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을 때, 미래가 낙관적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제 시작된 4월 한 달 여러분의 삶은 낙관적이신가요? 여전히 9개월이 남아있는 올해의 남은 시간을 생각할 때 여러분의 미래는 낙관적이십니까? 지금 여러분이 살아가는 방식이 이대로 지속되기만 하면 일 년 뒤, 오 년 뒤, 혹은 십 년 뒤에 마주하게 될 여러분의 미래를 낙관하실 수 있으십니까?
희망은 내일에 대한 긍정적인 전망이라는 점에서 낙관과 유사합니다. 그러나 위르겐 몰트만은 희망과 낙관이 전혀 다른 개념이라고 설명합니다. 낙관이 과거나 현재에 잠재되어 있다가 미래에 좋은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라면, 희망은 현재 내재되어 있는 요소들로는 내일에 대한 낙관이 불가능할 때, 지금의 모습에만 집중한다면 낙심할 수밖에 없을 그때 외부로부터, 즉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좋은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나이가 많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아들을 낳을 수 있으리라는 낙관적인 전망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아들이 태어날 것이라고 약속하시며 미래의 희망을 주십니다. 애굽애굽 땅에서 종살이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으리라는 낙관적인 전망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를 불러 출애굽을 선포하시고 민족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불어넣어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장면을 바라보며 그 누구도 십자가에 달린 무기력한 사형수가 온 인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리라고 낙관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절망의 순간에 예수님을 다시 살리셔서 영생에 대한 희망을 우리에게 선사하셨지요. 바로 이것이 기독교가 선포하는 희망입니다.
내가 새 일을 행하리라
오늘 본문 이사야 43장이 선포되었을 때 유대인들은 바벨론에 포로민으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들에게는 조상 적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곧 출애굽의 이야기였지요. 그 옛날 모세 시대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종살이하던 애굽 땅에서 이끌어내셨다는 이야기는 유대인이라면 어린 시절부터 귀가 따갑도록 들었던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출애굽의 이야기에 빗대어 생각한다면 지금 바벨론에서 포로로 살아가는 유대인들도 하나님께서 자유의 몸이 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리라 기대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바벨론에서 포로민으로 살아가던 당시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출애굽의 이야기는 너무도 먼 옛날의 이야기였어요. 지금 이사야 43장이 선포되었던 때를 기준으로 모세 시대에 있었던 출애굽의 사건은 천 년도 더 이전에 있었던 사건이거든요. 너무도 많이 들었지만 그만큼 포로민으로 살아가는 그들에게는 피부에 와닿지 않는 이야기였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비교적 최근에 일어난 일, 그래서 그들의 피부에 와닿는 이야기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 가운데 대부분을 차지하였던 열 지파에게 일어난 일이었지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였던 이스라엘의 열 지파, 곧 북이스라엘이 앗수르 제국에 의해 멸망하였는데 앗수르의 민족혼합정책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라는 정체성을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거든요. 출애굽이라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너무도 멀어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북 이스라엘의 멸망과 앗수르 제국의 민족혼합정책은 너무도 명백하게 그들의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또 다른 제국 바벨론의 포로민으로 잡혀 있는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지금 자신들의 형편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내일에 대한 긍정적인 낙관이 불가능했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에 대해 이렇게 소개합니다.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15절)
여기에서 특징적인 표현이 하나 등장합니다. “이스라엘의 창조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자라고 말할 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대상은 무엇입니까? 온 우주 만물입니다. 그래서 흔히 하나님을 묘사하면서 만물의 창조자라고 말합니다. 한편, 이스라엘을 위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그들을 자유의 몸으로 이끌어주셨지요. 시내산에서 그들과 언약을 맺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셨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을 구원하셨고 그들을 구속하여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흔히 이스라엘 백성과 관련하여 하나님을 묘사하면 이스라엘의 구원자 혹은 이스라엘의 구속자라고 말하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이 두 가지 개념이 함께 모여서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창조자’라고 묘사하네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창조자라는 묘사에는 어떠한 의미가 담겨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주시고 구속하여 주신 사건은 마치 창조의 역사와 같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창조는 없는 것을 만드는 일입니다. 무에서 유를 만드는 것이 창조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창조자’가 되신다는 의미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과거와의 연속성이나 어떠한 인과관계로 설명할 수 없는 완전히 새로운 일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유대인들을 바벨론에서 이끌어 내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그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오래 전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셨던 출애굽의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요소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출애굽 직후에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를 마른땅처럼 건넜지요. 그런데 본문 1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다 가운데에 길을, 큰 물 가운데에 지름길을 내고” 계속해서 17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널 때 그들을 뒤쫓아오던 애굽의 군대를 바닷물로 물리쳐주신 장면을 떠오르게 합니다. “병거와 말과 군대의 용사를 이끌어 내어 그들이 일시에 엎드러져 일어나지 못하고 소멸하기를 꺼져가는 등불 같게 하였느니라”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생활할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물이 흐르게 하셔서 그들의 목마름을 해갈해 주셨지요. 그 장면은 20절에 등장합니다.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이처럼 바벨론에서 자유의 몸으로 나오게 되는 출바벨론을 예언하는 오늘 본문은 예전의 출애굽을 연상시키는 묘사가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 바벨론에서 포로민으로 살아가는 유대인들이 내일에 대해 낙관할 수 있는 이유는 과거에 있었던 출애굽의 사건일까요? 과거에 출애굽을 경험했던 민족이니 이후에도 바벨론에서 자유의 몸으로 벗어날 수 있으리라고 내일을 낙관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지금 유대인들에게 출애굽의 사건은 약 천년도 더 넘게 지난 까마득한 과거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18-19a절)
성도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구원은 언제나 새로운 역사이고, 하나님께서 새롭게 행하시는 창조의 역사입니다.
우리는 약 이천 년전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도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늘었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매년 사순절, 고난 주간, 그리고 부활절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벨론의 포로민으로 살아가는 유대인들에게 출애굽의 역사는 너무 먼 과거의 이야기일 뿐이요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예루살렘의 멸망은 너무도 분명한 현실이기에 지금의 현실을 아무리 되돌아보아도 내일을 낙관할 수 없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매년 반복되는 식상한 이야기요 지금 나의 현실은 내일에 대한 그 어떠한 낙관적인 전망도 불가능하여 소망을 잃어버리고 희망이 사라져 버린 채 살아가고 있지는 않으신가요? 그러한 우리의 심령에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도 바로 이것입니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희망을 간직한 사람들의 자세
하나님은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던 유대인들에게 새 일을 행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동일하신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새로운 구원의 역사를 펼치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마음에 내일에 대한 낙관이 아니라 내일에 대한 희망을 던져주지요. 그런데 새 일을 행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명령형으로 시작하네요. 그 명령이 무엇입니까?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이 명령은 새 일을 행하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 마음에 참된 소망을 품은 신앙인들이 마땅히 취해야 할 삶의 자세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과거의 일에 얽매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대신 내일에 대해 열린 마음을 품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십니까? 이스라엘의 창조자이십니다. 곧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삶을 날마다 새롭게 창조하시는 분이시지요. 동일한 원리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어떠한 능력을 발휘합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날마다 새롭게 창조하는 능력을 발휘합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약속하십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성도 여러분, 이 말씀을 믿으십니까? 이제 시작된 4월 한 달 동안 여러분의 삶 속에도 하나님께서 새 일을 행하시리라고 믿으시나요? 앞으로 남은 2022년의 9개월도 하나님께서 새로운 일을 여러분에게 보이실 것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처럼 이전 일을 기억하지도 말고 옛날 일은 생각하지도 마십시오. 모든 복잡한 생각을 던져버리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을 끊어버리십시오. 여러분의 생각을 지나치게 신뢰하지도 마시고, 여러분의 계획을 끝까지 밀고 나가지도 마십시오. 그 대신 여러분의 삶에 새 일을 행하실 하나님을 기대하며 하나님께서 무엇을 행하시든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린 마음을 가지십시오. 이것이 이스라엘의 창조자이신 하나님께서 오늘도 나의 삶에 새 일을 행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성도들의 마땅한 자세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새 일을 행하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 말씀을 믿는 사람은 과거의 일에 얽매이지 말고 내일에 대해 열린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의 이 약속을 믿는 사람들이 마땅히 취해야 할 또 하나의 자세가 등장하는데, 그것은 찬송입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21절)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새 일을 행하셨을 때, 그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고 하나님을 찬송하였던 많은 노래들이 등장합니다. 홍해를 건넌 뒤 이스라엘 백성과 미리암이 불렀던 찬양이 그렇지요. 모든 대적으로부터 하나님께서 다윗을 건져주셨을 때 다윗이 하나님께 감사하며 불렀던 찬양도 그 예가 됩니다.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던 유대인들이 오늘 본문의 약속처럼 자유인이 되어 예루살렘에 돌아오게 되었을 때 그들은 감사와 감격의 마음으로 시편 126편을 노래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모든 예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새 일을 직접 체험한 뒤에 자연스러운 반응으로 터져 나온 찬양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21절이 이야기하는 찬송은 조금 다릅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지금 유대인들은 여전히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처지와 형편을 객관적으로 분석한다면 내일에 대해 낙관적인 전망을 내어 놓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바로 그때에 하나님은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 하나님 백성의 마땅한 자세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본문 21절의 찬송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새 일을 체험하였기에 부르는 찬송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을 소망하면서 부르는 찬송이요 하나님께서 새 일을 행하실 것을 믿기에 그 마음에 희망을 품고 부르는 찬송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이 부르시는 찬양은 어느 쪽에 가까우십니까? 하나님께서 나의 삶에 새 일을 행하시는 현장을 체험하였다면 당연히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그때는 옆에서 누가 찬양을 부르라고 권면하지 않아도 모두가 기쁨으로 찬양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하나님께서 행하실 새 일이 나의 삶에 나타나지 않아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지 못하고 계신 분이 계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참된 희망을 부어주시기 바랍니다. 지금의 현실은 내일에 대한 낙관을 불가능하게 만들지라도, “보라 내가 이제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말씀하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마음에는 희망이 넘쳐나고 여러분의 입술에는 찬송이 흘러나오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아니하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그 하신 말씀, ‘내가 이제 새 일을 행하리라’는 이 말씀을 반드시 실행하여 주실 것입니다. (cf. 민 23:19)
하버드대학교에서 심리학을 가르치는 하워드 가드너(Howard Gardner)라는 분은 『마음을 이끌다』(Leading Minds)라는 책에서 리더십과 리더가 전하는 이야기의 관계를 언급하였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리더들을 3가지로 구분합니다. 그 첫 번째는 ‘일반적인 리더’(ordinary leader)로 그들의 특징은 전통적인 이야기, 그래서 모두가 알고 있는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전달한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리더와 구별되는 두 번째 리더는 ‘혁신적인 리더’(innovative leader)입니다. 혁신적인 리더의 특징은 모두가 알고 있는 전통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내에 잠재되어 있는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사람입니다. 하워드 가드너가 마지막 세 번째로 구분한 리더는 ‘비전을 제시하는 리더’(visionary leader)로 기존의 전통적인 이야기와 공동체 안에 잠재되어 있는 이야기를 통해 새로운 이야기를 창조하는 리더를 말합니다. 당연히 하워드 가드너는 마지막 비전적인 리더가 가장 높게 평가하였지요.
우리는 계속해서 호세아서의 말씀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북 이스라엘에서 활동하였던 선지자들의 메시지가 기록되어 있는 호세아서와 이후 살펴보게 될 아모서스를 읽어보면 이들은 참 뛰어난 이야기꾼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하워드 가드너의 구분을 굳이 적용하자면, 호세아와 아모스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는 전통적인 이야기를 가지고 옵니다. 여기에서 전통적인 이야기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하나님께서 과거에 행하신 위대한 일들을 말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출애굽의 사건이요, 또한 시내산에서 그들과 언약을 맺으신 사건이지요. 그런데 호세아 선지자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잠재되어 있는 이야기를 끄집어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가 인식하고는 있었지만 굳이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이야기, 곧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살아가지 않고 죄악을 행하며 살아가는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호세아를 비롯하여 북 이스라엘 선지자들의 위대함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하워드 가드너가 가장 높이 평가했던 비전적인 리더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전통적 이야기와 공동체에 내재되어 있는 이야기를 통해 새로운 이야기, 곧 내일에 대한 비전을 선포하는 이야기를 창조하는 것이지요. 호세아를 비롯한 북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은 바로 이러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과거 조상들에게 하나님께서 행하신 위대한 일에 대한 이야기, 곧 전통적인 이야기 위에 현재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행하고 있는 죄악의 이야기를 덧붙였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곧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미래를 일구어 갈 수 있는지에 대한 비전을 선포하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가 하나의 문장으로 농축되어 있는 구절을 찾는다면 오늘 본문 호세아 9장 10절을 꼽을 수 있습니다.
전통적 이야기
본문 말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옛적에 내가 이스라엘을 만나기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셨던 전통적인 이야기로 시작하네요.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처음 만났다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종살이하던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주셨던 장면, 나아가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어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그 약속을 체결하는 장면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본문의 말씀은 단순히 과거의 구원을 서술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이었는지를 알려주시지요.
옛적에 내가 이스라엘을 만나기를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 같이 하였으며 너희 조상들을 보기를 무화과나무에서 처음 맺힌 첫 열매를 봄 같이 하였거늘 (10a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주셨을 때,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두 가지 비유로 표현되어 있네요. 먼저는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 같다’는 것입니다. 메마른 광야를 연상해보십시오. 그곳에서는 목을 축일 수 있는 한방울의 물만 만나도 너무 귀하죠. 하물며 메마른 광야에서 달콤한 포도송이를 만난다면 얼마나 기쁠까요? 바로 그것이 이스라엘을 만났을 때 그들을 바라보신 하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당시 이스라엘의 모습은 참 보잘것없었습니다. 그들의 모습과 삶은 비천했습니다. 누구나 확인할 수 있는 그들의 신분이 무엇입니까? 애굽의 노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광야에서 만난 포도송이처럼 귀하게 여겨주셨어요. 그러니 열방에 많은 민족이 있었지만 바로 다른 어떤 민족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며 그들의 하나님 되시기로 작정하셨던 것이지요.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이야기도 이와 동일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자격이 무엇이 있었습니까? 우리에게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야 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나요? 아닙니다. 그런 것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고, 우리는 하나님의 선한 뜻와 상관없이 살았고, 결과적으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큰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마친 광야에서 만난 포도송이처럼 귀하게 여겨주십니다. 바로 이것이 지금도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을 가지고 살아가게 된 이야기입니다.
본문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만나셨을 때의 감정을 두 가지 비유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첫번째가 “광야에서 포도”라면 두 번째는 “무화과나무에서 처음 맺힌 첫 열매를 봄”같이 하였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무화과나무를 경작하는 농부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무화과나무에 처음으로 열매가 맺혔습니다. 그 열매는 마치 광야에서 만난 포도처럼 탐스럽고 귀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무화과나무에서 귀한 첫 번째 열매를 만난 농부는 그 첫 번째 열매로 만족할까요? 그것이 아니면 농부가 바라는 바는 무엇일까요? 당연히 계속해서 좋은 열매를 맺기를 바라겠지요. 바로 이것이 이스라엘을 만났던 하나님의 마음이요 소원이라는 말씀입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죠.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그것을 시작으로 많은 열매를 맺기 바라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도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기에서 생각이 멈추면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충분히 헤아렸다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바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풍성한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이지요. 어제보다 더 거룩한 오늘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잠재되어 있던 이야기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행하셨던 위대한 역사에 대한 이야기, 곧 전통적인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한 문장으로 구성된 오늘 본문에는 전통적인 이야기 외에도 북 이스라엘 공동체에 내재되어 있는 이야기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곧, 이스라엘 자손이 별로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죠.
그들이 바알브올에 가서 부끄러운 우상에게 몸을 드림으로 저희가 사랑하는 우상 같이 가증하여졌도다 (10b절)
바알브올의 사건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점령하기 이전의 사건입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서로 언약을 맺은 뒤,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도 전에 이스라엘은 우상숭배에 빠져들었음을 분명하게 알려주는 사건이지요. 그러므로 바알브올의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써 외면하고 싶은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얼마나 빨리, 그리고 얼마나 깊이 타락할 수 있는 지를 보여주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은 바로 그 이야기를 드러냅니다. 그러면서 바알브올의 결과를 이렇게 말씀합니다. “저희가 사랑하는 우상 같이 가증하여졌도다” 바로 이것이 지금 북 이스라엘의 영적이고 도덕적인 현실이라고 꼬집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는 ‘어제보다 거룩한 오늘’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스라엘의 형편은 무엇입니까? 우상을 좋아하고 우상을 사랑하더니, 결국 우상처럼 가증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이 드러내는 북 이스라엘의 이야기는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만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에 대한 이야기이죠. 그러나 오늘 나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기대와 바램과 역행할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예배에 참여하는 성도님들 가운데 우상을 숭배하고 우상을 사랑하여 우상과 같이 추한 모습으로 변하는 분들은 별로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언제나 도사리는 유혹은 세상을 사랑하여 세상과 같이 추한 모습으로 바뀌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제보다 거룩한 오늘을 기대하시지만, 오늘 내가 써 내려가는 이야기는 과거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였고 어제는 하나님의 은총을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이었지만 어느덧 이 세상을 본받아 맛을 잃어버린 소금이 되어버리는 것은 아니겠습니까?
새로운 이야기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전통적인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당시 북 이스라엘이라는 신앙 공동체에 내재되어 있던 이스라엘의 우상숭배 이야기로 끝이 나지요. 그러면 설교를 시작하며 소개하였던 비전적인 리더들의 이야기, 곧 전통적인 이야기와 공동체에 내재되어 있는 이야기만이 아니라 그 모든 이야기를 통합하여 앞으로 나아갈 비전을 노래하는 새로운 이야기는 본문에 없는 것일까요? 물론, 문자적으로는 하나의 문장으로만 구성되어 있는 오늘 본문 호세아 9장 10절에는 내일에 대한 비전의 이야기는 안 보입니다. 그러나 저는 여기에 호세아 선지자의 탁월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굳이 문자적으로 말하지 않더라도 한 문장으로 구성된 오늘 본문에는 충분히 내일에 대한 비전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자,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이스라엘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십니다. 그들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동시에 이제는 그들이 어제보다 거룩한 오늘을 살아가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들이 써내려 온 이야기는 하나님의 마음과는 정반대의 이야기였어요. 그리하여 여로보함2세 때에 군사적으로 경제적으로 번영의 시대를 누리기도 하였지만, 그 시간은 금방 지나가버리고 외부에서는 앗수르와 아람의 위협을 당하며 내부에서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혼란이 지속되고 있었어요. 이 모든 이야기를 오늘 본문은 단 한 문장으로 농축하여 서술해주었지요. 그러면 여러분, 이제 북 이스라엘이 내일의 참된 비전을 위해 써 내려가야 할 이야기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호세아 선지자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너무도 당연한 결론이지요. 지금까지 써왔던 바알브올의 이야기, 지금까지 써왔던 우상숭배의 이야기, 지금까지 써 왔던 죄악의 이야기를 모두 그치고 이제부터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이야기, 곧 어제보다 거룩한 오늘의 이야기를 나의 삶을 써 내려가는 것, 바로 그것이 내일에 대한 참된 비전이라 호세아는 선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한 해를 마무리하는 12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지난 한해동안 여러분은 어떠한 이야기를 써 내려온 삶의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지금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이야기는 어제보다 거룩한 오늘을 살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부터라도 세상을 사랑하여 세상을 닮아 우리도 추해진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이야기, 곧 어제보다 거룩한 오늘의 삶을 써 내려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올해 2021년에 출판된 책 가운데 <공간의 미래>라는 책이 있습니다. 코로나 시대를 맞이하면서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코로나가 어떻게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있는지, 나아가 전염병이 앞으로 우리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지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내어놓고 있지요. 대학에서 건축학을 가르치는 이 책의 저자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거주의 형태와 도시의 공간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는지를 서술하고 있습니다. <공간의 미래>라는 책에서 저자는 코로나 바이러스로 우리가 생활하는 공간이 큰 변화를 겪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생활하는 집의 공간이 좁아졌다는 것입니다. 아니, 우리 각자가 살고 있는 집은 코로나 이전이나 코로나 이후나 평수가 똑같은데 왜 집의 공간이 줄어들었다는 것입니까? 저자의 설명은 이렇습니다. 코로나가 발생하기 이전, 평일 낮시간에는 식구들이 학교나 직장을 나갔습니다. 주말에만 온 가족이 한 집에서 생활을 했지요. 그런데 코로나가 발생하면서 재택근무와 온라인 수업이 확대되었고 평일 낮에도 가족이 집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났습니다. 이제 집은 가족들이 학교와 직장을 다녀온 후 쉬는 장소만이 아니라, 직장인들이 재택근무를 하는 업무의 장소가 되고 학생들이 온라인 수업을 듣는 학습의 장소도 되었습니다. 가족들이 집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나고 가족들이 집에서 해야 할 활동의 종류가 늘어나면서 동일한 크기의 집이지만 가족들이 실제로 느끼는 공간은 더 좁아졌다는 설명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의 크기는 그대로인데, 혹은 과거보다 더 넓어졌는데 실제로 느끼는 공간은 좁아지는 이러한 현상이 사실 코로나 이전부터 진행되어 왔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방에 요를 깔면 침실이 되었습니다. 그 방에 요를 치우고 밥상을 놓으면 가족들이 함께 식사하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밥상에 음식을 치우면 공부할 수 있는 책상이 되었습니다. 방 하나가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되었던 것이죠. 그런데 우리 사회가 산업화되면서 우리의 가정에는 생활을 편리하게 만드는 다양한 물건과 가구가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하루 8시간만 사용하는 침대가 넓은 공간을 하루 24시간 차지하고 있지요. 거실에 TV를 놓으니, 가족들이 함께 앉아서 TV를 볼 수 있는 소파가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가족들이 함께 식사를 하기 위해 식탁을 놓을 별도의 공간이 필요해졌습니다. 자녀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책상을 구비해 놓을 별도의 공부방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냉장고만으로도 충분했는데 언제부턴가 김치냉장고가 한쪽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세탁기에 이어 건조기도 생활필수품이 되어 한자리를 차지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만큼 공간이 부족하게 되었고, 부족한 공간을 늘리기 위해 편법이지만 발코니를 확장하여 실내공간을 넓혔습니다. 그렇게 공간이 확보되니 우리는 다시금 물건을 사들이고 우리 집의 공간은 그만큼 더 좁아지게 되었지요. 결과적으로 우리는 더 많은 것을 가지게 되었고, 더 넓은 집을 소유했지만 역설적으로 가족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공간은 더욱 부족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
우리가 함께 묵상하는 호세아서는 1장부터 3장까지 호세아 선지자가 음란한 여인 고멜을 사랑하는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4장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호세아가 선지자로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하였던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호세아 4장에 접어들어, 호세아 선지자가 전하는 메시지의 첫 일성은 당시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를 한마디로 묘사하는데, 그들의 영적 상태를 특징적으로 나타내는 단어는 “없다”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호 4:1)
호세아 4장 1절에 “없다”라는 단어가 세번이나 등장하지요. 이스라엘에게 무엇이 없습니까? 첫째로, 진실이 없습니다. 둘째로, 인애가 없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가장 소중히 여겨야 할 덕목들, 하나님의 백성으로 다른 모든 것을 잃어버리더라도 마지막까지 지키고 보존하여야 할 가장 귀한 가치가 그들에게는 없었습니다. 진실이 없고 인애가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었지요.
여러분, 호세아가 활동하였던 시대 북 이스라엘은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대였습니다. 지난 세 번에 걸쳐 호세아서를 묵상하면서, 우리는 이미 호세아가 활동했던 시대가 여로보암 2세가 왕으로 북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대였고 그때는 이스라엘이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가장 부강했던 시대라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그들은 이른바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왕하 14:25) – 이것은 마치 백두에서 한라까지 라고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과 같은 관용적인 표현입니다 - 넓은 영토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재물을 소유했습니다. 그들의 삶은 더할 나위 없이 풍요로워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소유가 늘어나니 정작 그들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향한 진실과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자리할 자리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중세 스콜라 신학의 대가였던 토마스 아퀴나스가 하루는 가톨릭교회의 추기경 한 사람과 길을 걷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길가에는 돈을 구걸하는 걸인이 있었지요. 그때 추기경은 자신의 주머니에서 은화를 하나 꺼내 그 걸인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죠. “얼마나 다행입니까? 초대교회의 베드로 사도는 은과 금이 내게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걸인들을 구제할 수 있는 은과 금이 있습니다.” 그러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당신 말이 맞습니다. 지금 교회는 베드로 사도께서 하셨던 것처럼, 은과 금은 내게 없다고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교회는 베드로 사도께서 외치셨던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도 말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초대교회는 은과 금이 없었지요, 그러나 지금 우리는 은으로 촛대를 만들고, 금으로 교회의 기둥을 세우며, 대리석으로 교회의 바닥을 깔았습니다. 초대교회는 은과 금은 없었지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미암는 능력을 소유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부터 말미암는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과거에 비해 풍요로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땅의 교회 역시 과거와 비교한다면 큰 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나의 물질을 가지고 다른 사람과 나눌 수도 있고, 우리 교회는 재정을 사용하여 어려운 이웃을 도와줄 수도 있습니다. 참 좋은 일이요, 감사한 일이지요. 그리나 우리의 소유가 늘어날수록, 우리에게 가진 것이 더 풍성해질수록 중세가톨릭교회와 같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귀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미암은 능력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여로보암 2세가 다스리던 북 이스라엘이 광활한 영토를 소유하고 그로 말미암은 재물과 권세는 소유하였지만 그들의 마음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사라지고 없어진 것처럼, 오늘 우리 시대 그리스도인들 역시 모든 것을 소유한 듯 보이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없고 없고 없다”라고 평가받지는 않겠습니까?
우리는 풍요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진실과 인애가 사라지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잃어버린다면, 중세 가톨릭교회와 같이 우리는 복음의 능력을 잃어버린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요 우리 교회는 복음의 능력을 상실한 교회가 되고 맙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회복
하나님은 여로보암 2세의 시대에 이스라엘에게 많은 것을 소유하도록 허락하셨어요. 그런데 소유가 늘어나자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진실과 인애가 텅 비어지고 있었어요. 그 장면을 지켜보시는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에게 눈에 보이는 소유물까지도 모두 사라지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많은 날 동안 왕도 없고 지도자도 없고 제사도 없고 주상도 없고 에봇도 없고 드라빔도 없이 지내다가 (호 3:4)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니 왕도 없어집니다. 지도자도 없어집니다. 제사도 없어지고, 주상도 없어지며, 에봇도 없고 드라빔도 없어질 것입니다. 그들이 자랑하였던 모든 것이 사라지게 되리라는 예언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 심판 뒤에 베풀실 새로운 구원의 역사도 말씀하시네요.
그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와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와 그들의 왕 다윗을 찾고 마지막 날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므로 여호와와 그의 은총으로 나아가리라 (호 3:5)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의 예언자들이 예언한 구원과 회복의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전하게 성취되었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점에서 호세아 4장 5절의 뒷부분 “마지막 날에” 일어날 참된 회복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미 우리에게 성취되었다고 믿습니다. 그 회복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여호와와 그의 은총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북 이스라엘 백성에게 왕도, 지도자도, 제사장도, 눈에 보이는 모든 자랑거리를 사라지게 하신다는 예언 하셨습니다. 이후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의 침공으로 나라의 모든 것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리나 마지막 날이 되면 모든 것을 회복시켜 주시리라고 예언하셨습니다. 이 회복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이 온전히 성취되었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총,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풍성한 선물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그 옛날 여로보암 2세가 다스리던 북 이스라엘이 누렸던 하나님의 축복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우리 그리스도인은 매일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며 살아갑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날마다 누리며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지금도 기대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여로보암 시대, 북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바로 그것들이 아닐까요? 하나님을 향한 진실, 우리의 이웃을 향한 인애,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 말입니다.
우리의 가정에 물건들이 가득 쌓일수록 우리의 가정에 가족들이 함께할 공간은 줄어들기 마련이지요. 그러면 여러분, 우리의 가정에 가족들이 함께 할 수 있는 공간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노력이 필요할까요? <공간의 미래>라는 책의 저자는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우리의 관심을 옮기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더 많이 소유하여 나의 사적 공간이 집에 가득 쌓아놓는 것에 우리의 관심이 있다면 당연히 우리 가정의 공간은 줄어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더 많은 소유가 아니라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과 공간을 소중히 여길 때 우리는 비로소 더 많은 것을 쌓아두려는 마음으로부터 벗어나 더욱 가치 있는 가정의 공간을 확보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충분히 공급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움쳐지려 노력하면 우리의 마음에는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진실과 인애,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 주셨으니 이미 받은 은혜에 자족하면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진실과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채워가기 위해 더욱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바로 그때 우리의 손에 금과 은은 부족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미암은 위대한 능력이 우리 모두를 통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독일 비텐베르크에 위치한 시립교회는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는 교회입니다. 루터는 그 교회에서 3천 번이 넘는 설교를 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비텐베르크 시립교회에는 이른바 ‘종교개혁 제단화’라 불리는 네 점의 성화가 있는데, 그 가운데 가장 크고 중앙에 위치한 그림이 <최후의 만찬>입니다. 지금까지도 가장 대중적인 <최후의 만찬>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그림이지요. 비텐베르크 시립교회에 걸려있는 <최후의 만찬>은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의 든든한 후원자이자 매우 가까운 친구였던 루카스 크라나흐라는 화가가 그린 것입니다. 한번 보시겠습니까?
왼편에 예수님께서 계시고, 예수님의 품에 안겨 있는 사람이 ‘그의 사랑하는 제자’라고 성경에 기록된 사도 요한이겠지요. 그리고 예수님의 맞은편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식탁에 둘러앉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잡히시던 그날 저녁, 제자들과 나누셨던 유월절 식탁을 묘사하는 이 그림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그림의 오른쪽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모두 식탁을 바라보고 있는데, 유독 한 사람만이 식탁의 반대쪽으로 몸을 돌리고 있습니다. 그는 손에 잔을 잡고 있는데, 자신의 뒤에 서 있는 어떤 사람에게 그 잔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 장면은 성경이 기록한 예수님 시대의 이야기가 아니라 크라나흐가 이 그림을 드렸던 16세기 독일에서 일어난 루터의 종교개혁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당시 가톨릭교회는 성만찬을 행하면서 일반 성도들에게는 잔을 주지 않고 떡만 주었습니다. 루터는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된다고 생각했지요. 예수님께서 자신의 피로 세우신 새 언약, 곧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은 구원의 은총은 사도들이나 몇몇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모든 성도들에게 동일하게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은총을 가리키는 성만찬의 떡과 잔도 예배에 참여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고 루터는 확신하였고, 그는 당시 로마가톨릭교회의 금기 사항을 깨고 성만찬에 참여한 모든 성도들에게 떡과 함께 잔도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것이 약 5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우리 개신교의 전통으로 자리를 잡았고, 우리는 성찬식을 행할 때 모든 성도들에게 떡과 잔을 모두 나누어 주고 있습니다. 크라나흐는 마틴 루터의 든든한 후원자로서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과 나누셨던 최후의 만찬 장면을 그리며,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나누어 주신 성만찬의 잔을 일반 성도에게 전달하는 모습을 첨가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그림에서 성만찬의 잔을 자신의 뒤에 있는 어느 젊은이에게 전달하는 사람의 얼굴은 당시 비텐베르크에 살았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인물이었으니, 곧 마틴 루터입니다. 크라나흐가 그린 <최후의 만찬>에는 마틴 루터 외에도 당시 비텐베르크 주민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던 또 한 명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16세기 비텐베르크에 살던 사람들은 예수님이나 열 두 제자의 얼굴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예수님의 실제 얼굴과 제자들의 실제 얼굴을 알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 그림에서 마틴 루터의 바로 왼쪽에 앉아 있는 인물은 당시 비텐베르크 주민들이 모두 알고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한스 루프트인데, 루터가 번역한 독일어 성경을 인쇄하였던 출판업자입니다. 한스 루프트는 당연히 사도도 아니요, 성직자도 아니요, 목회자도 아닙니다. 그는 책을 출판하는 사업가였습니다. 크라나흐는 <최후의 만찬>을 그리며, 출판업이라는 자신의 직업을 가지고 루터의 종교개혁에 큰 도움을 주었던 한스 루프트를 사도들만 참여했던 예수님과의 최후 만찬 자리에 당당하게 그려 넣었습니다. 그리하여 크라나흐 역시 화가라는 자신의 직업을 통해 종교개혁의 핵심 가치를 선포하였던 것입니다. 그 가치가 무엇입니까?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 없이 모든 성도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아 구원의 은총을 누리고 있으며,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 없이 모든 성도는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어진 직업을 통해 하나님의 소명을 감당하고 있다는 가르침, 곧 마틴 루터가 생명을 다해 전파하였던 ‘만인제사장’의 개념을 이 한 폭의 그림 안에 담아 놓았던 것입니다.
속죄의 은혜
이사야 선지자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었습니다. 그분은 하늘의 높은 보좌에 앉아 계셨고, 그분의 옷자락은 온 성전에 가득했지요. 하나님을 곁에서 섬기는 스랍의 천사들조차 거룩하신 하나님을 감히 대면하지 못하고 자신의 얼굴과 자신의 발을 가리기에 바빴습니다. 그리고 모든 천사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이사야 6장 3절)
이사야 선지자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마음은 단 하나의 질문으로 온통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는 거룩한 삶을 살고 있는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우리 민족은 거룩한 삶을 살고 있는가?’ 이 하나의 질문에 온 마음이 사로잡힌 이사야 선지자는 탄식하고 맙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이사야 6장 5절)
그런데 여러분, 이사야 선지지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난 사건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죄악으로 가득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애통하며 탄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하나님의 은혜가 그에게 찾아옵니다. 본문 6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때에”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이사야 6장 6-7절)
이사야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이 죄악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는데, 특별히 자신의 입술이 가장 부정하게 느껴졌어요. 입술이 부정하다는 것은 그의 언어가 부정하고, 그의 언어생활이 죄로 가득하다는 의미이겠지요. 그렇게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 자신의 입술, 곧 자신의 언어생활이 가장 부정하다고 여겼던 이사야에게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어 그의 입술에 숯불을 대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시죠. ‘너의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이사야 선지자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니 자신의 입술이 그렇게 부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어떤 분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면 자신의 손이 부정하고 자신의 손이 죄악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분도 계십니다. 손이 부정하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손으로 행한 일이 죄악으로 물들어 있다는 의미겠지요. 그래서 이후 이사야서에는 이런 표현이 등장해요. “그 행위는 죄악의 행위라 그 손에는 포악한 행동이 있으며”(이사야 59장 6b절) 그래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면 어떤 분들은 자신의 손이 그렇게 더럽고 부정하게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하나님은 그러한 분들에게 천사를 보내어 어느 부분을 정결하게 하실까요? 그의 손을 정결하게 하시겠지요.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의 악이 제하여졌고 너의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이사야 선지자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입술이 부정하다고 탄식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어떤 분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면 자신의 발이 너무도 부끄럽게 여겨지곤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의 발이 부정하다는 것은 지금까지 내가 죄악의 길을 걷고 마땅히 피해야 할 곳을 떠나지 않았다는 의미겠지요. 그래서 이후 이사야서에는 이런 표현도 등장해요. “그 발은 행악하기에 빠르고 무죄한 피를 흘리기에 신속하며”(이사야 59장 7a절)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았을 때 나의 발이 부정하다고 여겨지는 분이 계신가요? 하나님은 그러한 분들에게 천사를 보내어 우리의 발을 정결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너의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은 계속하고 있지만, 여전히 거룩하신 하나님을 생각할 때마다 부끄러워 가리고 싶은 부분이 여러분에게도 있지 않으세요? 어제도 실패하여 오늘만큼은 또다시 잘못을 범하고 싶지 않은데 여전히 실패하고 넘어지는 지점이 있지는 않으세요? 이사야에게는 그것이 입술이었어요. 어떤 분들에게는 손이 될 수도 있고, 어떤 분들에게는 발이나 또 다른 곳이 될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것이 무엇이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의 그 모든 악을 제하시며 우리의 그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우리의 모든 죄악을 용서하여 주실뿐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를 거룩한 삶으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복음의 능력입니다.
사명으로의 부르심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속죄의 은혜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사야에게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이사야 6장 8a절)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선지자로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이사야를 선지자로 선택해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질문을 던지며 이사야를 사명의 자리로 초대하시네요. 그러면 하나님은 왜 이사야에게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하라 명령하지 않으시고, 먼저 그의 의향을 질문하셨을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의도를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자발적으로 자신의 사명을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함이었겠지요. 그리고 이사야는 하나님의 의도에 정확히 부합하는 대답을 합니다.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이사야 6장 8b절)
우리는 이 장면에서 신앙의 매우 중요한 원리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속죄와 사명의 관계인데, 우리가 주님께서 주시는 사명을 즐거운 마음으로 감당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속죄의 은혜라는 사실입니다. 성도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속죄의 은총을 경험한 사람만이 하나님의 소명을 진실한 마음으로 감당할 수 있습니다. 겉모습은 유사할 수 있습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 나의 모든 죄악을 용서해주시는 속죄의 은혜가 가득하지 않으면 겉으로는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실제로는 나의 유익만을 쫓으며 내가 원하는 일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각자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하나님의 소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그 무엇보다도 우리의 마음에 나의 죄를 용서하여 주신 속죄의 은혜가 먼저 회복되어야 합니다.
속죄의 은혜를 체험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였던 이사야에게 이제 하나님께서 구체적인 선지자의 사명을 알려 주십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이상합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사야 6장 9절)
지금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여러분은 이해가 되세요? 물론, 문자적인 의미는 이해가 되지요. 그러나 이것이 선지자의 사명이라니, 이것이 이사야가 선지자로 한 평생 감당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 이해가 되고 납득이 되십니까? 이사야가 선포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너희가 보기는 보아도 알 수 없다.’ 이러한 말씀을 전하는 것이 이사야의 사명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이사야 선지자가 이러한 말씀을 전해야 하는 이유와 목적을 말씀하십니다.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도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이사야 6장 10절)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백성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겨서 마침내 그들의 마음이 둔해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사야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은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해왔던 우리의 상식을 완전히 뒤집어 놓습니다. 우리는 선지자의 사명이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우리는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이유와 목적이 그들의 마음이 열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생명의 길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에게 주신 사명은 그와는 정반대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백성들에게 눈을 열어 하나님을 보라고 말하고 싶었겠지요. 백성들에게 귀를 열어 주님의 음성을 들으라고 선포하고 싶었겠지요. 모르기는 몰라도 그것이 선지자의 역할이라고 생각하여 ‘나를 보내소서’ 헌신하지 않았을까요? 이사야 선지자는 자신이 말씀을 전하면 백성들의 마음이 열려 회개하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선교사의 소명을 받아들였겠지요. 그런데 여러분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사명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라고 맡기신 일이 사명입니다.
지금 여러분에게는 어떠한 사명이 주어져 있습니까?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지금 나에게는 사명이 주어지지 않았다고 여겨지는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만 더 나 자신의 마음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사명을 주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내가 거부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지요.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저것입니다. 저 정도는 되어야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사명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하나님은 내가 원하는 저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이것을 맡기고 계시거든요. 이렇게 내가 하고 싶은 일과 하나님께서 맡기시는 일 사이에 차이가 있으니,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사명이 없다고 결론을 내리는 경우가 너무나 많아요. 그런데 여러분, 이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속죄의 은혜, 대속의 은혜, 구원의 은혜를 받으셨다면 여러분에게는 바로 지금 감당해야 할 사명이 반드시 주어져 있습니다. 때로는 직장에서 감당해야 할 사명이 주어지기도 합니다. 때로는 가정에서 감당해야 할 사명이 주어지기도 하고, 또 때로는 교회에서 감당해야 할 사명이 주어지기도 합니다. 심지어 어떤 경우는 여러분 자신이 결코 하고 싶지 않은 그것을 하나님께서 요구하실 때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을 그 자리로 부르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시니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주어진 사명을 통해 마침내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을 이루어 주십니다. 마치 이사야 선지자에게 온갖 죄악에 빠진 유대인들을 향해 징벌과 심판을 선언하라 말씀하셨던 하나님께서 마침내 동일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회복과 치유의 때도 선포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주님의 식탁
설교를 시작하며 크라나흐가 그린 <최후의 만찬>을 함께 보았지요? 이 그림에는 오늘 설교의 두 가지 주제가 모두 담겨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속죄의 은혜입니다. 이 그림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유월절 식탁을 나누고 계시네요. 그래서 식탁의 한 중앙에는 유월절 어린양이 누워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지요. 예수님께서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어린양이 되어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속죄하셨습니다. 이 그림에 담긴 또 하나의 주제는 사명으로의 부르심입니다. 지금 예수님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고 있는 제자들은 사도의 사명을 받아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위해 봉사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이 그림에는 마틴 루터와 같은 성직자도 있지만 한스 루프트와 같은 사업가도 있어요. 그들의 직업이 무엇이든, 그들의 역할이 무엇이든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속죄의 은혜를 누리는 모든 사람은 각자에게 주어진 소명을 따라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속죄의 은혜 그리고 사명으로의 부르심이라는 오늘 설교의 주제가 이 한 폭의 그림 안에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그림을 다시 보니, 속죄의 은혜와 사명으로의 부르심이 함께 담겨 있는 장소는 다름이 아닌 예수님께서 지금도 우리를 부르며 초대하시는 은혜의 식탁이네요.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거룩하신 하나님을 따라 거룩한 삶을 살고 싶으시나요? 지금도 우리에게 속죄의 은총을 한 없이 베풀어 주시는 예수님의 식탁으로 오십시오. 과거에 실패하셨더라도 괜찮습니다. 같은 잘못을 반복하여 저지르셨더라도 괜찮습니다. 예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혜의 식탁에서 예수님은 여러분의 모든 과거를 용서하시며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영혼의 양식을 풍성히 베풀어 주십니다. 여러분은 주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하기를 원하시나요? 그리하여 여러분을 통하여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가 일어나기를 참으로 원하시나요? 그러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도 여러분에게 사명을 주시며 하나님의 일꾼으로 세워 주시는 주님의 식탁으로 오십시오. 지금 내가 하는 일이 하나님의 나라에 어떻게 쓰임 받을지 알 수 없어 답답한 마음이라도 상관없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하고 싶은 일과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맡기시는 일이 서로 달라 어리둥절하여도 괜찮아요. 주님과의 친밀한 식탁의 교제를 누리며 ‘주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주님께서 맡겨 주시는 그 소명에 응답하십시오.
여러분에게 속죄의 은혜를 베푸시는 분도 우리 주님이시요, 여러분을 사명으로 부르시는 분도 우리 주님이시니, 마침내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가 여러분의 삶에 펼쳐질 것입니다.